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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10강 정과 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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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837회 작성일 21-07-2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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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강 정과 혜 



오조홍인대사께서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었습니다. 혜능이 처음 금강경 독송하는 것을 듣고 깨쳤어요. 그때 벌써 깨침을 이루었고 그다음 또 홍인이 혜능을 불러 금강경을 설해줍니다.  ‘혜능이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구절에서 문득 다시 깨쳤다. 혜능은 생각을 일으키는 뿌리가 훤하게 밝아졌으며 마음 쓰는 법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감격한 혜능은 자기의 마음을 감추기 못하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견성하고 나면 견성에 대한 오동송이 있습니다. 그럼 혜능의 오도송이 있느냐?  오조홍인이 게송 하나씩 지으라고 한 것이 일차적으로 혜능의 오도송이고, 그 후에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에서 깨달음의 상태를 읊은 것을 혜능의 오도송이라 생각 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알았으며,” 견성 했을 때 원래 성품이 무엇이냐? 라고 하면 물들기 전의 상태, 본래 상태를 청정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서 바로 이것이 청정법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으며” 바로 청정법신이 갖는 내용입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함을 알았으며” 이 구족한 것은 바로 원만보신의 모습입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움직임이 없음을 알았으며,” 바로 원만보신이 아무리 행을 하여도 본래 동요가 없는 것으로 청정법신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만법을 냄을 알았겠습니까?” 청정법신의 활용이 천백억화신이며, 결국은 진공모유입니다. 이 공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전부다 나오는 것이며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공모유의 이 내용에 청정법신과 원만보신과 천백억화신이 전부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육조단경의 내용입니다.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내 오조홍인대사께서는 단박에 깨치는 법과 가사를 전하며 말씀하였다. 네가 육조대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서 신표로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 혜능아 예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을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여기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속히 떠나라. 혜능이 가사와 법을 받고 밤중에 떠나려 하니 홍인대사께서 몸소 구강역까지 혜능을 전송해 주었으며 떠날 때 문득 홍인대사께서 말씀하였다. 너는 가서 애를 쓰고 노력하여라. 부지런히 닦고 수행하도록 해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아무 법도 펼려고 하지 말라. 환란이 일어날 것이다. 귀에 널리 펴서 미혹한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만약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법을 다른 사람이 깨쳐도 네가 깨친 것과 같을 것이다. 이에 혜능은 홍인대사를 하직하고 곧 떠나서 남쪽으로 떠나갔다.”

 가사를 혜능에게 전했습니다. 그 후 홍인의 거치가 어떻게 되는지 그다음 내용이 홍인의 거치표명입니다. 오조홍인은 다음 달 초하루, “법문을 해야하는데 몸이 아프다면서 법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제자들은 이상하게 여겨 상황을 알아보니 법의 증표인 가사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때서야 대중들은 혜능을 찾아 나섰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이 혜능이 갖고 간 의발을 빼앗고자 합니다. “혜능은 두 달이 지나서 대유령에 이르렀는데 뒤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쫓아와 가사와 법을 빼앗고자 했으나 다들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오직 한 스님만 돌아가지 않았는데 성은 진이며 이름은 혜명이며 선조는 삼품장군으로 성품과 행동이 거칠고 포악하여 바로 고갯마루까지 쫓아 올라와서 혜능을 덮치려고 하였다. 혜능은 가사를 큰 바위에 올려놓고 가져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신물의 신통함을 보입니다. “그 가사를 혜명은 힘써 가져가려고 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혜명은 순간 법의 신통함에 등골이 오싹하였다.” 바위 위에 올려놓은 그 가사를 가져가려고 하는데 가사가 꿈쩍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 순간 혜명은 법의 신통함에 놀라 “제가 짐짓 멀리 오게 된 것은 법을 구함이요, 그 가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하고 변명을 합니다.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문득 법을 설하니 혜명이 그 법문을 듣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혜명은 삼배를 올려 스승으로의 예를 다하였습니다. 혜능은 혜명으로 하여금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15년 동안 보림에 대한 내용입니다.  “혜능이 조계에 이르러 또 나쁜 사람들에게 쫓겨서 사회현으로 피난하여 사냥꾼들 틈에서 지내기를 무릇 열다섯 해 동안 했다.” 육조단경에는 이 내용만 있습니다. 추가한 보림의 내용입니다. “오조홍인께서 주신 금강경을 수만 번 더 독송하여 모두 외웠으며 사냥꾼들이 사냥을 하러 갈 때는 혼자 참선을 하였다. 때때로 사냥꾼들에게 법을 설하여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였으며 그들이 그물을 지켜달라고 하면 산 목숨이 있으면 놓아주었다. 음식은 나무를 뜯어 끼니를 연맹하였다. 사냥꾼들이 없는 해는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거의 한 해 동안 선정에 들어있기도 하였다.” 핵심은 이겁니다. 진정으로 혜능이 보림을 하면서 깊은 선정에 들었다는 것을 지금 여기에 추가 한 것입니다. 이제 법을 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첫 설법의 사연이 나오게 됩니다. “마을을 따라 내려오니 바로 광주 법성사에 이르게 되었고 마침 인종법사가 열반경을 설하는 날이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 철간에 꽂아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절 마당에 보면 그 절을 상징하는 깃발을 꽂아둬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 스님이 바람이 움직인다하고 또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 하였다.” 듣고 있던 혜능이, 그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면 깃발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당신들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라고 한 마디해요. 이 소리에 대중들은 놀랍니다. 인종법사에게까지 그 소리가 들어가 혜능은 인종법사에게 불려 갔습니다. “인종법사는 혜능에게 불법에 대해 여러 가지 물어봤으며 혜능의 대답은 글자에 관계없이 분명하게 이치에 맞게 했다.” 혜능이 일자무식이었지만 인종법사가 물었을 때 정확한 개념을 설명했지만 논리에 맞는 그런 말은 못했어도 정답은 정답이었다는 겁니다. 인종법사가 조심스럽게 혜능에게 물었다. 전부터 들리는 말에 황매에서 의발이 남방으로 왔다고 하던데 혹시 스님께서 법을 받은 스님이 아닙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혜능이 부끄럽습니다라고 한마디 합니다. 결국은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종법사는 의발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혜능이 의발을 인종법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의발을 보고 인종은 혜능에게 물었습니다. 황매에서 어떤 법을 얻었습니까? 혜능이 한 말이, 오직 제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견성을 하게 할 뿐입니다. 또한 불법의 이치가 둘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본래 성품, 견성을 해서 불법의 이치가 둘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화두 “만법귀일 일귀하처,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 화두의 답은 바로 견성한 상태의 답을 하나 탁 던지면 답이 되는 거라요. 어떤 것이 불법이 둘이 아닌 이치입니까? 하고 인종법사가 다시 혜능에게 묻습니다. 혜능의 육조경전에서의 답은 성품에는 둘이 있으니 하나는 떳떳함이며 둘은 떳떳하지 아니함인데 불성은 떳떳함도 아니며 떳떳하지 아니함도 아니며 또한 끊어지지 않는 것을 둘이 아니라합니다. 끊어지지 않아서 하나인 것을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만으로는 우리가 분명하게 불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어떤 것이 불법의 이치입니까?”하고 인종이 물었을 때, 혜능은 선함과 악함이 둘이지만 선악에 물들지 않고 마음을 일으키면 둘 아닌 법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 해 주는 것입니다. 선함과 악함이 원래 둘이지만 선과 악에 물들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 그 마음을 쓰면 나한테 아무리 악이 있더라도 악한 마음을 안 쓰면 악이 없는 겁니다. 나한테 선은 99가 있고 악이 하나있어요. 근데 천날만날 하나인 악을 쓰면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한테 선은 60이고 악은 40입니다. 그런데 쓰는 것마다 선만 끄집어 내서 써요. 그러면 나는 선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써야하는 마음은 선악에 물들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을 일으키면 둘 아닌 법인 불이법을 아는 거고, 불이법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마경의 중요한 핵심내용입니다. “이 법사의 법문은 깨어진 기왓장과 같은데 스님의 법문은 마치 순금과 같습니다.” 여기서 인종은 혜능의 머리를 삭발합니다. 혜능의 머리가 어떻겠습니까? 사냥꾼들과 15년 동안 살았으니까 산적보다 더 했겠지요? 산적 같은 그 머리를 삭발하였고 스승으로 모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이것이 혜능이 제일 처음으로 법성사에서 동산법문을 열게 된 인연이었습니다. 


오늘은 정과 혜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육조단경에서 이야기 하는 정과 혜는 “진리는 정과 혜로서 근본을 삼는다.”하고 시작합니다. 불교공부의 핵심은 8정도의 정정인 사마타와 정념인 위빠사나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공부하는 내용은 정념과 정정입니다. 정념은 혜고 정정은 정입니다. 바로 이 두 가지 밖에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첫 설법도 사제법, 팔정도를 설하셨고 45년 동안 설하고 마지막 열반에 드시는 그 순간에도 팔정도법을 설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정과 혜를 닦지 않고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종교를 통틀어서 누구든 진리에 다다르고자 한다면 정과 혜를 닦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공부하는 그 중심에 있는 것들이 정과 혜입니다. 육조혜능은 15년 동안 보림을 하면서 정정, 깊이깊이 한 군데 몰두하고 파고들어가는 겁니다. 혜는 이치와 논리의 관계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정은 혜의 몸이요, 혜는 정의 씀이니 바로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두 개가 하나라는 것이 오늘 이 강의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팔정도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두 개가 이렇게 연관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숱한 경전을 통하여 정과 혜 두 가지를 닦아야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정을 먼저 하고 혜를 해도 좋고. 혜를 먼저 하고 정을 해도 좋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정과 혜를 같이 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인연이 성숙되는 과정인 15년 동안 보림을 하고 광주 법성사에 처음 이르게 됩니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서 전한 이 달마법을 결국 혜능에서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내가 가르치는 이 법이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근본 뿌리는 금강경,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부터 시작을 했고 좀더 가까이에서는 달마대사가 설한 그 법에 따라 이 법의 뿌리가 그것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마가 양무제 앞에 나타났을 때 양무제가 묻습니다. “내가 절을 그렇게 많이 지었는데 얼마나 공덕이 많으냐?” 했을 때 달마가 “무공덕”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달마는 쫓겨나고 인연을 찾아서 소림사에서 동굴에 들어가 9년을 참선을 합니다. 면벅 9년을 하는 중에 신광이라는 유학자가 달마를 찾아 왔어요. 신광은 출가를 해서 이조혜가가 됩니다. 신광이 달마에게 진리를 묻자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데 얼마나 진지한지 내가 어떻게 너의 마음을 알 수 있느냐?”고 하자  신광은 밤새도록 몸이 눈에 파묻힐 정도로 눈을 맞으며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을 합니다. 그래도 달마가 거절을 해요. 너의 그 결심을 보여 달라고하자 바로 신광은 자기의 팔을 잘라 결심을 증명해 보입니다. 신광을 제자로 받아들여 혜가라는 법명을 주었는데 아무리 공부해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요. 하루는  “스승님 저는 아무리 공부해도 내 마음이 불편해서, 편하지가 않습니다. 이 마음을 좀 편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니까 달마가 한 말이, 야 너 그 불편한 마음 갖고 오너라. 편하게 해줄게. 그 불편한 마음 가져오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이제까지 그렇게 추구했던 마음의 본질을 이 한 마디 말에 알아듣습니다. 달마부터 시작하여 육조까지 오는 법은 회광반조하여 본래 마음을 인식하게 하는 마음 법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견성이라는 말을 붙여서 좀더 본질적인 문제까지 파고 들어가지만 이 내용에서 보면 달마는 좀더 포괄적인 만법으로 선불교를 열고 있습니다. 만법의 핵심은 견성이고, 만법의 본질을 보는 것이고, 만법을 다스리는 것이고, 만법을 관하는 것입니다. 혜능의 뿌리가 바로 여기라는 것을 우리는 이 법을 보면서 알 수 있겠습니다. 혜능이 이곳 대범사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 도교인, 속인들과 오랜 전생부터 인연이 있어서이다. 왜 대범사에서 육조단경을 설하는가? 했을 때 바로 전생부터 많은 인연이 있어서 이곳에서 법을 설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관료들과 도교인과 일반 사람들도 사회에서 나름대로 부유층이나 기득권자들이 바로 이 법문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법이 단순하게 불교 내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사회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이 부분을 서술하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혜능은 일자 무식꾼으로는 어떻게 관료들하고 인연이 되겠어요? 나도 전생에는 관료를 했는 양반집 자식이다. 바로 자기의 신분이 지금 이렇게 일자무식꾼이고 공부도 못한 천민이지만 전생부터 이런 것이 아니다. 나의 뿌리도  나름대로 공부를 제대로 한 관료이고 양반이다 라는 것을 이 부분에서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미스코리아든가, 미스유니버시아 선발대회를 하면 진, 선, 미를 뽑습니다. 진은 진리이며 진리는 정과 혜로서 근본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의 앞서는 것이 바로 이 진입니다. 아름다운 미보다는 선이 조금 더 뛰어나고 선보다 진이 더 앞선 겁니다. 이 세상의 초고의 가치는 진이고 그것보다 조금 못한 가치가 선이고 그보다 더 못한 가치가 미라는 겁니다. 

부처선발대회가 있다면 공부 열심히 하는 우리가 전부다 뽑히겠지요.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꾸준하게 한번 공부를 해보면 어느 순간 탁 터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혜능은 정과 혜가 같음을 정견으로 나타냅니다. 팔정도는 정견부터 시작합니다. 마지막 결론이 정견입니다. 정정이 되고 정혜가 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정견인 것입니다. 정견이 갖고 있는 중요한 성분 두 개가 정정과 정혜입니다. 정정은 사마타이며, 정혜는 위빠사나입니다. 송곳과 칼날을 한번 봅시다. 정정, 사마타라는 것은 송곳에 해당합니다. 뚫고 들어가 본질을 보는 능력이 정정입니다. 이 송곳은 뚫고 들어가서 아뢰야식까지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끊어내는 게 칼날입니다. 번뇌망상을 잘라 버려야 본질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번뇌망상에 싸여있으면 본질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잘라내 버려야 해요. 과감하게 번뇌망상을 자르는 능력은 칼날이고 뚫고 들어가 본질을 보는 능력은 송곳입니다. 정이 송곳이고 혜가 칼날이라면 뚫고 자르고 하여 목적지인 본래 성품까지 다다라야 모든 것이 정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000년 들어서기 조금 전부터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엔트로피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합니다. 엔트로피는 과학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이 사회적인 현상에까지 빗대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너지라고 하면 잘 이해가 됩니다. 어떤 물질의 무게가 있고 속도가 있다면 속도와 물질의 무게를 적당하게 곱하면 에너지의 크기가 얼마인지 알 수 있으며 질량을 갖고 있는 모든 물체는 에너지로서 나타낼 수가 있어요. 이 육신이 에너지라면 정신은 엔트로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엔트로피는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를 결정하는 것은 정신적인 차원입니다. 그것을 따라 열심히 하는 것은 육신입니다. 그래서 에너지를 육신에 비유한다면 정신은 엔트로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로 정과 혜라는 것도 에너지와 엔트로피와 같이 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분리가 될 수 없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관계 속에서 이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너지와 엔트로피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해를 한다면 정과 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결국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엔트로피로써 방향성 문제입니다. 이 세상은 어디로 흘러가느냐? 엔드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계속 흘러갑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늙고 죽습니다. 늙는다는 것이 엔트로피가 계속 증가하는 방향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쪽 하늘을 보면 해가 떠요. 오늘도 뜨고, 내일도 뜨고, 천 년 전에도 떴고, 만 년 후에도 뜨고, 항상 동쪽을 보면 해가 뜹니다. 이것이 바로 방향성 문제입니다. 이 우주는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어린애가 자라 어른이 되고, 늙어서는 언젠가 죽는 것입니다. 방향성에 따라 태어나서 우리는 생, 주, 이, 멸하며 우주는 성, 주, 계, 공을 하는 것입니다. 생했는 것은 언젠가는 멸하는 것이 바로 방향성에서 오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런 것들이 엔트로피입니다. 엔트로피는 얼마나 안정하냐? 혹은 얼마나 더 혼란스러우냐? 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혼란도가 큰 것이 엔트로피가 큰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엔트로피를 적게 하려고 합니다. 안정해질려고 하는 것이 본래 성질입니다.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도 이 엔트로피가 최저가 되는 것이 바로 부처의 상태입니다. 엔트로피가 가장 큰 것이 바로 지옥으로 제멋대로입니다. 눈곱만큼 잘 해도 상달라고 하는 것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보살은 평생을 99.9%를 잘하면서도 내가 잘못해서 세상이 이렇구나, 나 때문에 세상이 이렇다고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걱정하고 세상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 세상의 엔트로피를 적게 만드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만법귀일 일귀하처,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고 그 하나는 어디인가? 우리가 결국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거나 안다면 그만큼 안정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도 없이 안정해지려고 애를 씁니다. 안정의 최고 극점이 부처입니다. 방에 나 혼자 있다면 혼란도가 상당히 커요. 내 멋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명이 있다고 하면 방귀도 제대로 못 뀌고, 옷도 멋대로 못벗고 지킬 것을 다 지켜야 하므로 혼란도가 적어집니다. 궁극적으로 엔트로피라는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이상과 꿈과 모든 것을 같이 생각해도 되는 팩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속에서 끝도 없이 엔트로피를 낮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남자와 여자가 떨어져 있는 것을 붙여보세요. 떨어지면 엔트로피가 제멋대로 커지는데 붙여놓으니까 트로피가 쑥 줄어듭니다. 우리가 좋아서 붙는 것 같은데 우주가 보면 우주 나름대로 살기 위해서는 붙여놔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겁니다. 지혜롭다는 것도 똑같은 것입니다. 알면 훨씬 더 잘할 수 있는데 모르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것 밖에 없습니다. 행여나 하는 것은 없어요. 알면 행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확신입니다. 100% 확신이 없기 때문에 행하지 않는 것이고 모르기 때문에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알면 행하게 됩니다. 정은 송곳이고 혜는 칼날입니다. 우리는 항상 호주머니 속에 송곳과 칼을 갖고 다닙시다. 호주머니 속이 찢어지더라도 항상 송곳과 칼날을 갖고 다닙시다. “육조단경의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신 것이다. 혜능 스스로 안 것이 아니라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듣고 스스로 미혹함을 없애 옛 사람들의 깨침과 같기를 바란다.”  라고 합니다. 혜능이 법을 설하면서 이것은 내 소리가 아니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설한 것은 깨치고 보니까, 견성하고 보니까 부처님이 한 그 말씀을 내가 그냥 전하는 것이지 내 소리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설법은 법을 설해야한다.고 한 것입니다. 잘못하면 설법한다고 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우리가 사담의 자리에서는 자기 이야기를 해도 좋습니다. 설법을 할 때는 법을 설해야 돼요. 무아와 무상과 연기를 포함하는 법을 설하는 것이 설법이지 그 외에 것은 설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설법은 경전에 의거해서 설해야 됩니다. 법을 논할 수는 있지만 논을 할 때는 그 법의 정당성과 법의 맞고 틀림에 대해서 우리가 논할 수는 있습니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상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 선지식들아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룰 것이다.” 깨치게 되면 지혜와 정을 다 이루게 되고 또 지혜와 정을 수행하다 보면 깨치게 되는 겁니다.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자기의 성품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선지식이 있을 때는 공부하기가 쉽습니다. 법을 물어 볼 데가 있어요. 선지식이 없는 세상은 누구한테 묻겠어요? 바로 이런 상황이 1800년 말 근대조선의 상황입니다. 이때 경허선사가 한국 땅에서 견성을 하면서 불교의 기치를 새롭게 듭니다. 경허선사는 1870년  경에 태어나셨는데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교학을 터득하시고 동학사에서 경을 강의하는 강주였어요. 강사로서 강의를 잘하여 전국에 있는 스님들이 동학사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경허스님은 한번도 방학이 없었어요. 10년을 하고 나니까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방학 때 연로하신 스승님께 다녀와야 겠다고 서울로 올라갑니다. 여름철이라 천안에서 장마를 만나요. 어딘가 비를 피해야 되겠다 싶어 마을로 들어가니 집집마다 사람들이 누워있고 쫓아내요. 그러니까 그때 천연두가 번졌던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천연두 전염병이 돌면 마을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 마을에서 쫓겨나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는 이제까지 부처님 법을 배워 너무나 당당했고 생사 문제가 다 해결됐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만약 천연두에 걸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라고 죽음을 피해 갈 것인가?’ 내 생사의 문제도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이제까지 부처님 법을 강의하면서 당당하게 살았던 자기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동학사로 내려와요, 동학사로 돌아와 “생사를 뛰어넘는 법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경전을 찾고, 중국 선사들 화두집을 찾아 아무리 보아도 와닿는 것이 없었어요. 어느 날 선어록을 보다가 영원선사의 “여사미거 마사도래, 아직 나귀의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왔도다.”하는 화두가 가슴에 탁 와닿는 거라요. 그래서 경허선사는 “지금부터 내가 이 뒷방에서 문 열고 나올 때까지 하루에 밥 한 그릇만 넣어주고 어느 누구도 오지마라” 라고 하며 참선에 들어갑니다. 참선한다고 앉아서 졸면 송곳에 찔려 온통 얼굴에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여사미거 마사도래 라는 화두를 들었습니다. 이 화두를 타파하지 못하면 이 방에서 안 나온다는 각오로 들어앉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10살 된 사미가 마을에 심부름을 갔다가 마을의 선비어른을 만나게 됩니다. 이 선비는 그 절에 시주도 많이 하는 마을에서는 큰 부자였습니다. 요즘 너희 절에 경허스님이 열심히 공부한다면서 물으면서 사미한테 “고삐 뚫린 자국이 없는 소, 그런 것을 찾나보지? 하면서 한마디 던져요. 사미는 고삐 뚫린 자국이 없는 소, 이것이 무슨 말인가 싶어서 절에 와서 스님들한테 ‘스님스님 마을에 갔더니 선비님이 고삐 뚫린 자국이 없는 소’ 그런 소리를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물으니까 아무도 답이 없었습니다. 이 사미는 노래삼아 “고삐 뚫린 자국이 없는 소” 하면서 흥얼거리며 다녔습니다. 공양 때가 되어 경허스님한테 “고삐 뚫린 자국이 없는 소”를 흥얼하면서 밥을 갖다 줍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경허스님은 깨치게 됩니다. 여사미거 마사도래, 화두를 들고 있었는데 깨치는 건 엉뚱한 게 들어와서 깨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부하고 있으면 어떤 순간 뭐든지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중하고 몰두하고 있을 때는 주위의 조그마한 움직임도 깨침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깨침의 순간이 다가오면 바로 그 인연에 의해서 무엇으로도 계기가 만들어지게 되며 깨치게 됩니다. 고삐 뚫인 흔적이 없는 소가 의미하는 것은  태어나기 전의 소식입니다. 이 몸을 받아가지고 나오면 소에게는 고삐 뚫려있습니다. 그러니까 고삐 뚫린 흔적이 없는 소는 이 몸 받기 전의 소식을 묻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여사미거 마사도래” 라는 화두를 깨쳐버린 것입니다. 


깨치고 난 다음에 경허스님은 오도송을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燕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코구멍 뚫은 흔적 없다는 말 홀연히 듣고

문득 깨달으니 온 우주가 내 집이네

유월 연암산 산길에서

야인은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스님의 견성으로부터 한국불교가 새롭게 일어난 겁니다. 경허스님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또 부정적인 면도 있어요. 깨치고 나서도 오랫동안 몇생 동안의 습이 남아 있습니다. 그 습을 전부다 닦아내기 위해서는 보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경허스님은 견성을 하여 한국불교를 일으켰지만 또 행위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보림을 하면서 전생의 습기를 제거하였다면 어떤 상황이더라도 막행막식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습니다. 견성을 하고 난 다음의, 전생의 섭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뛰쳐나왔기 때문에 법을 행하고 설할 때 그런 행동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가 왜 깊은 산속에 있어야 하는가? 깊은 산속에 있어야 끝까지 살아남고 끝까지 산을 지킬 수가 있어요. 아무리 견성을 했다고 해도 보림을 통해서 내가 전생에 갖고 있는 습기들을 전부다 닦아내야 합니다. 다 소멸 시켜야 되는데 그것을 제대로 못했을 때는 견성하고 나서도 전생 습의 행위들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과 혜는 하나라고 합니다. “첫째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모르면서 정과 혜가 다르다고 이야기 하는데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정은 혜의 몸이요, 혜는 정의 씀이니 곧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는 것이다.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과 혜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의 능력 중에서, 신통이라고 하는 것은 정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혜라고 하는 것은 넓게, 전부다 관계를 잘 아는 것이라면 정이라는 것은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송곳과 같이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통이라는 것은 지금 싸여 있는 것을 뚫기만 뚫어 놓으면 모르는 부분을 알게 돼요. 우리는 나와 대상이 구별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나를 알지만 대상은 몰라요. 그런데 뚫어버리면 상대방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그냥 아는 것입니다. 뚫어버리면 안 보이는 것들이 다 보여요. 참선을 하며 화두를 들고, 생각을 한군데에 집중하는 것이 뚫는 힘을 기르는 겁니다. 뚫고 지나가기 위해서 집중하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집중하기 힘이 드니까 히말라야산을 가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등산을 하려면 0.1초만 딴 생각해도 떨어져 죽어요. 그 집중이 끝도 없이 연속적으로 됩니다. 그런 상황을 히말라야산을 올라가면 연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방에 앉아서 생각을 집중한다고 한번 해보세요. 집중이 돼요? 안 죽으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산에서는 집중이 안되면 죽으니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못하니까 참선은 하고 나면 집중력이 생기는 겁니다. 


내공을 쌓는 것은 끝도 없는 그 집중력을 내 속에 키우는 것입니다. 참선하면서 한번 생각을 집중해 보세요. 전생에 나는 뭐였는가? 이 생각을 하다 보면, 모든 생각을 그 생각에 집중집중 해서 뭔가 뚝 뚫혀요. 한 생각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부처님이 도와줘요. 순간적으로 훤하게 보이는 상태가 되기도 하고 뭐가 나타나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순간적으로 팔식까지 내려가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끊임없이 계속 거기에 내려가는 것은 견성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부처님께서 신통을 나타내어 도와주신 겁니다. 


내가 아는 이것을 더욱더 철저하게 아는 방법은 집중하는 것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제대로 철저하게 알면 내외명철이 됩니다. 우리는 항상 정을 통해서 혜도 구하고 더 깊은 정도 구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집중을 하다보면 견성할 기회가 주어져요. 공부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신통이 생길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특성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정과 혜가 다르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에 두 모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법에는 두 모양이 없는 겁니다.  

입으로는 착한 척 하면서 마음은 착하지 않으면 혜와 정이 함께하는 것이 아니니 입도 착해야 하지만 그 뿌리까지 착해야 된다는 겁니다. 나오는 입구만 착한 것이 아니라 그 밑뿌리까지 착해야 합니다.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 가지면 정과 혜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공부가 아니더라도 학교공부에도 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수학문제를 풀 때, 쉽게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있어요. 그런 문제을 풀려고 며칠을 끙끙 앓아가면서 온갖 고민 다 하다가 기적적으로 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십 문제 풀 시간을 한 문제 푸는데 다 낭비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신기하게도 어떤 수학문제도 척척 다 풀려요. 정의 내공이 그만큼 쌓였으며 혜도 함께 성숙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려운 문제를 풀고 나면 자신이 생깁니다. 공부를 하면서, 참선을 하면서 자신이 생기면 쉽습니다. 공부를 못 하면 평생을 해도 자신이 안 생겨요.


유식도 공부하고, 경전도 공부하고, 부처님이 깨친 연기도 공부한 후에 참선을 하면 잘 할 수 있어요. 우리가 공부 했는 것이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선을 해도 잘 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입니다. 닦아 놓은 혜가 쉽게 정을 할 수 있게하며 정과 혜가 함께 익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돈 벌 것인가 고민하다 보면 지혜가 생겨요. 돈 버는 방법이 보입니다. 고민고민 해서 돈이 눈에 보여야 돈이 벌려요. 돈을 벌어도 내 것이 될 수도 있고 남의 것이 될 수도 있어요. 벌고 난 다음에 그 돈이 내것이 되느냐, 내것이 아니냐 하는 것은 내 업의, 내 그릇의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그 돈을 벌 만큼 전생에 그 업을 닦았으면, 자비를 베풀고 닦았으면 그것이 나한테 고여있는 것이고 그렇게 못했으면 돈은 나한테 오자마자 정거장처럼 가버리는 것입니다. 나가더라도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은 커지는 것입니다. 이왕 나갈거면 잘 베풀어야 고이기 시작해요. 나가는 거 끝까지 붙잡고 고민하다 보면 결국은 베풀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지만 분명하게 나가는 것을 알고 베풀다 보면 나한테도 고이기 시작하는 단계가 됩니다. 결국 깊이 고민하여 정으로 말미암아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업을 뛰어넘고 이기는 방법은 정 밖에 없습니다. 정을 하다보면 혜가 생기고 정과 혜가 함께 이루어지면 업을 뛰어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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