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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강 입의분에서 세운 의를 해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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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7-12 10:58 조회 20,48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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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강


(3-1-1-3-6) 입의분에서 세운 의를 해석하다

(3-1-1-3-6-1) 체상 2대를 함께 풀이하다 

[진제53] 또한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란 일체 범부와 성문과 연각과 보살과 제불은 증감이 없어서 앞(과거)에 생기는 것도 아 니며 뒤(미래)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침내 항상 변함이 없어 서 본래부터 성품이 스스로 일체의 공덕을 가득 채운다. 그 자체에 큰 지혜의 광명의 뜻[大智慧光明義]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를 두루 비치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아는 뜻이 있 기 때문이며, 자성이 청정한 마음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락아 정(常樂我淨)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청량하고 불변하고 자재한 뜻이 있기 때문다. 

이와 같은 항하사보다 많은 뜻을 여의지 않으며[不離], 뜻이 끊 어지지 않으며[不斷], 뜻이 다르지 않으며[不異], 부사의(不思議) 한 법을 구족하고 이에 만족하여 부족한 바가 없는 까닭에 여래 장(如來藏)이라 하며 또한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 이름하는 것 이다. 

묻기를 "위에서 진여는 그 자체가 평등하여 일체의 상을 여의었 다고 말하였는데, 어째서 다시 진여의 체에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공덕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하기를, "실로 이러한 모든 공덕의 뜻이 있으나 차별의 모양이 없고 평등하여 한 맛(一味)이며 오직 하나의 진여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분별이 없어서(無分別) 분별의 모양(分別相) 을 여의므로 둘이 없는 것이다. 

또한 무슨 뜻으로 차별을 말하는가? 업식의 생멸의 모양에 의지 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뿐으로 실 제로 망념이 없다. 그러나 허망한 마음이 있어서 깨닫지 못하고 망념을 일으켜서 모든 경계를 보게 되므로 무명(無明)이라 하며,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곧 큰 지혜의 광명의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보는 것(見)을 일으키면 곧 보지 못하는 모양이 있 으니 심성이 보는 것을 여의면 바로 이것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성이 없으며 상(常)도 아니며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 도 아니다. 이리하여 열뇌(熱惱)하고 쇠변(衰變)하여 자재하지 못하며 항하사보다 많은 망염(妄染)의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 대하기 때문에 심성이 움직임이 없으면 항하사보다 많은 깨끗한 공덕상의 뜻을 나타낸다. 

만약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있어 다시 앞의 법을 보고 생각하면  모자라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청정한 법의 무량한 공 덕은 바로 일심(一心)이며, 다시 생각할 것이 없기 때문에 원만 히 구족하여  법신여래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復次,真如自體相者,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無有增減,非前際生、非後際滅,畢竟常恒。從本已來,性自 滿足一切功德。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遍照法界義故, 真實識知義故,自性清淨心義故,常樂我淨義故,清涼不變自 在義故。具足如是過於恒沙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 乃至滿足無有所少義故,名為如來藏,亦名如來法身。 問曰:「上說真如,其體平等離一切相,云何復說體有如是種 種功德?」

答曰:「雖實有此諸功德義,而無差別之相,等同一味,唯一 真如。此義云何?以無分別離分別相。是故無二。復以何義 得說差別?以依業識,生滅相示。此云何示?以一切法本來 唯心,實無於念,而有妄心,不覺起念,見諸境界故說無明。 心性不起,即是大智慧光明義故。若心起見,則有不見之相。 心性離見,即是遍照法界義故。若心有動,非真識知,無有自 性,非常、非樂、非我、非淨,熱惱衰變則不自在,乃至具有 過恒沙等妄染之義。對此義故,心性無動則有過恒沙等諸淨功 德相義示現。若心有起,更見前法可念者則有所少。如是淨法 無量功德,即是一心,更無所念,是故滿足。名為法身如來之 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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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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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의분에서 세운 의를 해석하다. 체상 2대를 함께 풀이하다. 또한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란 일체 범부와 성문과 연각과 보 살과 제불은 증감이 없어서 앞(과거)에 생기는 것도 아니며 뒤( 미래)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침내 항상 변함이 없어서 본래 부터 성품이 스스로 일체의 공덕을 가득 채운다.” 앞에서도 말 했듯이 이 세상은 체상용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3대이며 여기서는 체상 2대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체 상용 가운데 용에 해당합니다. 용이란 쓰임새, 작용입니다. 우 리는 세세생생 쌓은 업에 의해 이런 모양을 갖고 사는데 이것은 상입니다. 상 안에 들어있는 본래 성품이 바로 체입니다. 체는 진여인데 이것을 제대로 알면 각자의 업에 의해 다른 모양을 가 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각자 다른 모양의 뿌리는( 오염되기 전의 것은) 누구나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 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진여는 똑같은 것으로 일심(一心), 하나 라는 것입니다. 하나인데 자신의 업을 쏟아부어 자기만의 모양 을 만들어놓고 다 다른 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다 다른데 알면 다 같은 하나일 뿐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범부란 공부, 수행하지 않는 일반적인 사람입 니다. 성문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사성제, 연기를 터득한 수행 자입니다. 연각은 12 연기를 인식하고 터득한 수행자입니다. 보 살은 대승불교의 육바라밀을 실천하고 체득한 수행자입니다. 

제불은 이 모든 것을 이룬 부처를 말합니다. ‘앞에서 생기는 것 도 아니며 뒤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는 말은 과거에서 발생 한 것도 아니고 미래가 되어 사라지는 것도 아닌 그냥 존재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냥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 당 시의 천이백 아라한들이 지금 이 세상에서도 원생하여 곳곳에 현현하여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앞에 서 본 것만큼만 봅니다. 그래서 내가 있고 너가 있고 전부 다 다 른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평생 살다 갑니다. 이것이 중생입니 다. 반면 부처는 모든 것을 보았으니 하나라는 것을 압니다. 전 부 하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너와 나가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끝없는 자비와 끝없는 보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는 보시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와 나의 경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뛰어 넘으려면 내 마음이 그 너머까지 볼 수 있어야 그 상황을 넘을 수 있습니다. 중생의 상태에서 아무리 베 풀어봤자 그 상황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뛰어넘는 방법은 내 가 공부해서 내가 보는 영역을 넓히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세 상은 내가 보는 것 밖에 못 보고 내가 느끼는 것 밖에 못 느낍니 다. 예를 들어 내가 슬프다고 합시다. 얼마나 슬픈가는 내가 느 껴본 것 만큼 슬픕니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중생들은 행하는 만큼 행하다 갑니다. 그래서 진리의 터득 여부와 정도에 따라 범 부, 성문, 연각, 보살, 제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래 성품은 항상 변함이 없이 그냥 있을 뿐 본래부터 공덕이 가득 차 있습니다. 끝없는 자비 밖에 없기 때문에 공덕이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인과법입니다. 인과법의 바탕은 공덕과 복덕입니다. 누군가는 능력은 없는데 돈을 잘 벌고 승진 을 합니다. 이것은 이번 생이나 전생의 복덕이 있기 때문에 가 능합니다. 돈도 내가 전생에 베푼 것이 있어서 들어오는 것입니 다. 그래서 지금 가난하다면 지금부터라도 베풀어야 합니다. 베 풀어야 다음에 내가 그 인과를 받습니다. 베풀지 않는다면 다음 생에도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 뿐입니다. 우리는 자 기 경계 속에 갇혀 삽니다. 이것을 뛰어넘게 해주는 것이 공부 인데 베풂도 하나의 공부이자 수행입니다. 중생은 자기 것만 사 랑하고 좋아하고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결국 공덕과 복덕이 삶을 변화시키는 끝없는 원천 입니다. 세상에 위대한 공적, 업적을 세운 사람들은 전생에 많은 공덕과 복덕을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전 세계 사람들이 좋아 하고 돈을 갖다 줍니다. 다 전생의 빚이기 때문에 갖다 줍니다.


  “체상 2대를 함께 풀이하다. 그 자체에 큰 지혜의 광명의 뜻[ 大智慧光明義]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를 두루 비치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아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성이 청정한 마 음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뜻이 있기 때문 이며, 청량하고 불변하고 자재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복덕에 서 중요한 것은 자비입니다. 그 자비에는 눈이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지혜입니다. 제대로 바르게 베푸는 것이 지혜 입니다. 바로 지혜가 방향성 역할을 합니다. 이 방향성이 없으 면 엉뚱한 방향으로 갑니다. 아무리 자비를 베풀어도 잘못 베풀 면 복덕이 쌓이지 않거나 적게 쌓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둑놈에게 계속 베풀면 그것은 자비가 아닐 것입니다. 법계를 두루 비친다는 말은 지혜와 자비는 이 우주에 가득 차있다는 말입니 다. 우리는 이렇게 가득 차 있지만 보는 만큼 느끼는 것만큼 자 기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우리는 눈 앞에 보고 느끼는 것만 보고 느낍니다. 부처가 되면 진실하게 모 든 것을 다 아는데, 막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 에게 다 막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이라 는 한계를 뛰어넘어 부처가 되면 상대방을 알게 되고 세상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각자 다 르게 살지만 물들기 전의 청정한 자성은 모두 같습니다. ‘자성 이 청정한 마음의 뜻이 있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상락아정 은 잘 살펴보면 무상임을 알면 상이 되고, 고임을 알면 낙이 되 고, 무아임을 알면 아가 되고, 적정임을 알면 정이 됩니다. 세상 에 존재하는 것들의 내용은 무아이고 무상인데 상과 아라고 말 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 뒤에 나옵니다. 청량하고 불변하고 자재한 것은 진여의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항하사(갠지스강의 모래수, 1052)보다 많은 뜻을 여의지 않으며[不離], 뜻이 끊어지지 않으며[不斷], 뜻이 다르지 않으며[不異], 부사의(不思議)한 법을 구족하고 이에 만족하여 부족한 바가 없는 까닭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며 또한 여래법 신(如來法身)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항하사는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수를 비유한 것입니다. 진여를 여래장이라 하고 여래법신 이라고도 합니다. 여래장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부처의 씨앗 을 갖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우치신 근본 가르침이 대승불교로 변천하면서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이 등장합니다. 중관사상은 연기가 곧 공( 空)이라는 사상으로 전개되고, 유식사상은 연기를 우리가 갖고 있는 6식, 7식, 8식으로 체계화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큰 흐름 속에 여래장 사상이 같이 나옵니다. 여래장 사상은 중관과 유식 모두를 포함합니다. 여래장 사상에서 여래장은 부처의 씨앗이 들어 있는 창고입니다. 여래장 사상에서 우리는 원래 부처라는 생각이 나옵니다. 우리 속에는 모두 여래장이 들어있다는 말입 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나오는 일심(一心)이라는 것이 여 래장과 의미가 상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생은 부처를 못보 고 오염된 것만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두 다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결국 중관사상과 유식사상 모두 여래장 사상과 관계 되어 있습니다.

  여래장은 “진여의 뜻을 여의지 않으며[不離], 진여의 뜻이 끊 어지지 않으며[不斷], 진여의 뜻과 다르지 않으며[不異] 부사의 (不思議)한 법을 구족하고 이에 만족하여 부족한 바가 없는 것” 입니다.

  중관사상의 중도는 실천적 중도와 사상적 중도가 있습니다. 실천적 중도는 불고불락하며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수행관을 버리고 실천적 계율주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상적 중도는 팔불로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상부단(不常不斷)하며 불일불 이(不一不異)하며 불래불거(不來不去)합니다. 생겨나지도 않으 며 없어지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으며 단절되지도 않고, 같지 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중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중도나 여래장은 크게 다르 지 않습니다.

  “묻기를 ‘위에서 진여는 그 자체가 평등하여 일체의 상을 여 의었다고 말하는데 어째서 다시 진여의 체에 이와 같은 여러 가 지 공덕이 있다고 말하는가?’” 진여는 일체의 상을 여의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체나 공덕이 있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여의었으면 체나 공덕이 다 없어야 하는데 왜 있냐고 하는 것 입니다. 

  “답하기를 ‘실로 이러한 모든 공덕의 뜻이 있으나 차별의 모 양이 없고 평등하여 한 맛[一味]이며 오직 하나의 진여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분별이 없어서[無分別] 분별의 모양[分別相]을 여의므로 둘이 없는 것이다.’ ‘또한 무슨 뜻으로 차별을 말하는 가?’ ‘업식의 생멸의 모양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차별상 을 여의었다는 것입니다. 물들어 있는 것을 다 여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는 샘솟는 샘과 같이 끝없는 공덕이 있 는 것입니다. 이 한 맛이라는 것은 책을 보고 느끼나 참선을 하 다가 느끼거나 모두 평등하여 하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하 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염된 나를 변화시키는 본래 성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대상이나 사물을 대할 때 태도가 달라 집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자비를 베풀 수밖에 없습니다. 분별을 여의게 되면 하나의 모양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우리 는 업 때문에 차별이 생깁니다. 

  공부를 해서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를 아무리 오래 해도 이러한 것들을 모르면 공부를 끝낼 수 없습니다. 몸에 큰 병이 났거나 곧 돌아가실 노스님들을 뵈면 평생 공부를 하셨 다는데 이야기해보면 다를 것이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마지 막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견성이 평생 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결 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당장 효과가 안 나오더 라도 공부는 해야 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원력이 필요합 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원을 세우고 결심을 해야 가능해집니 다. 중생들 가운데 공부 좋아하는 사람 얼마나 있겠습니까? 결 국 결심을 해야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뿐이 므로 실제로 망념이 없다. 그러나 허망한 마음이 있어서 깨닫지 못하고 망념을 일으켜서 모든 경계를 보게 되므로 무명(無明)이 라 하며,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곧 큰 지혜의 광명 의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보는 것[見]을 일으키면 곧 보 지 못하는 모양이 있으니 심성이 보는 것을 여의면 바로 이것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기 때문이다.’” 본래 청정한 것에는 망 념이 없지만 허망한 마음 때문에 망념을 일으켜서 경계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무명입니다. 우리의 삶은 끝없는 무명과 연기의 관계속에 있습니다. 고민해서 원인을 알아내면 연기로 넘어가 는 것이고, 모르면 무명이 됩니다. 무명에서 무가 없으면 ‘명’입 니다. 명이란 밝음입니다. 이 밝음이 다름 아니라 연기입니다. 이것이 팔정도의 정견입니다. 100% 정견이면 부처님이고 중생들은 조금씩 정견을 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중생은 60%이기도 하고 어떤 중생은 10%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모양이 있는 것, 업에 의해 만들어진 것만 여의면 법계에 두루 비치는 하나의 본 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 성이 없으며 상(常)도 아니며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니다. 상이 아닌 것(無常)을 아는 것이 상이고, 낙이 아닌 것(苦)을 아는 것이 낙이고 아가 없는 것(無我)을 아는 것이 아이고 오염되지 않는 것(淸淨)을 아는 것이 정이다.” 우리는 마 음의 움직임, 분별하는 차별심을 여의어야 하는데 마음에 움직 임이 있어 번뇌망상 속에 삽니다. 상낙아정은 언뜻 보면 지금까 지 배운 진리와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원래 상은 없습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이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상임을 아는 것이 상입니다. 말 그대로 이해하면 틀릴 수 있습니다. 낙은 고를 알면 낙이 됩니다. 그래 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목적이 극락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서 고 를 알아 극락인 사람은 죽어서 가지 말라고 해도 극락에 갑니다. 그러니 살 때 잘 살아야 합니다. 천도 비용 많이 줘서 극락갈 생 각하지 말고 살아있을 때 열심히 잘 베풀고 제대로 잘 사는게 낫 습니다. 정확하게 이해하면 불교 진리와 어긋나지 않게 됩니다.

  “이리하여 번뇌가 치성하고[熱惱]하고 끊임없이 변[衰變]하여 자재하지 못하며 항하사보다 많은 망염(妄染)의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 대하기 때문에 심성이 움직임이 없으면 항하사보다 많은 깨끗한 공덕상의 뜻을 나타낸다.” 항하사는 수 를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음을 나타 내며, 10의 52승(1052)입니다. 세세생생 살아오며 쌓인 끝없는 망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성의 움직임이 없으면, 즉 망념을 여의고 나면 공덕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번뇌망상을 여의고 진리에 들면 끝없이 샘솟는 공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자신을 위해 온갖 행동을 다 합니다. 이 세상이 하나라면 나에게 하는 정성 그 자비가 세상에 그대로 다 베풀어지게 됩니다.


  “만약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있어 다시 앞의 법을 보고 생각 하면 모자라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청정한 법의 무 량한 공덕은 바로 일심(一心)이며, 다시 생각할 것이 없기 때문 에 원만히 구족하여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심은 곧 부 처의 씨앗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원래 우리 는 부처입니다. 우리는 부처가 될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 다. 공부는 열심히 해야 남보다 낫게 됩니다. 설령 모두가 부처 라도 열심히 수행하고 오염된 것을 걷어내야 부처가 드러납니 다. 가만히 놔두면 씨앗만 있는 것이지 씨앗이 싹 트지 않습니 다. 공부, 수행이란 부처의 씨앗을 틔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 래장입니다. 여래장은 중관, 유식으로 갈라진 모든 것에 포함된 원래 부처의 성품입니다. 세상에 보이지 않는 그것이 일심입니 다. 우리는 보이는 세상의 논리, 질서를 평생 추구하며 아웅다 웅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면 보

이는 것은 그냥 이루어집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 림자일 뿐입니다.

  “체상대. 용대란 첫째 본행본원과 진여평등이고 둘째 대방 편지로서 법신이고 셋째 추세식에 의한 응신과 보신이고 넷째 지신(智身)과 진여의 자재함이다.” 세상 어떤 것이든 체상용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용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작용입니다.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 있습니다. 법신이 바로 물들기 전의 청정한 것이며 진여이고 일심입니다. 이것이 체입니다. 그리고 ‘원만보신노사나불’이 있습니다. 진리의 모양은 모나지 않고 원 만합니다. 그래서 어디든지 적용될 수 있고 어울릴 수 있습니다. 원만한 모습이 바로 상입니다.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은 이 세 상에 오셔서 불법을 전파하는데, 우리들은 그 끝없는 화신들입 니다.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이 세상에 화신으로 태어난 것입니 다. 이것이 용입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 

  부처님 제자 가운데 논의제일 가전연이 있었습니다. 가전연 은 남인도 아반티국 우쩌니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에 게는 아반티국 재상의 아들로 브라만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형 이 한 명 있었는데 마가다국, 코살라국에서 10년 동안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문명이 성했던 마다가국, 코살라국에 유학 을 가서 공부를 한 것이었습니다. 형은 공부를 마치고 아반티국 에 돌아와서 배운 것을 자랑합니다. 배운 내용을 외워서 이야기 하자 왕을 비롯한 사람들이 감탄을 합니다. 형이 가전연에게 “너는 10년 동안 놀면서 무엇을 했느냐?”라고 약을 올리자 가전 연은 형이 방금 말했던 내용들을 그대로 읊어냅니다. 그것을 보 고 형은 이대로 가면 재상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동생 가전연을 죽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 사실을 안 가전연의 아버지는 그 를 출가시켜 다른 나라로 보내게 됩니다. 그러자 가전연은 부처 님을 찾아갑니다.

  어느 날 부처님의 제자들이 가전연의 전생을 부처님께 묻습 니다. 부처님께서 가전연의 전생에 대해 이야기 해줍니다. 가전 연의 전생은 ‘나라다’라는 수행자였는데 열심히 정진하여 벽지 불을 이루었습니다. 벽지불은 연각승과 같은 경지입니다. 연각 승은 누구의 가르침으로 무리 속에서 불법을 깨우친 사람이고 벽지불은 독학으로 깨우친 사람입니다. 당시 나라다의 소문을 들은 용왕은 부처님 정도가 되어야 알 수 있는 어려운 질문을 나라다에게 합니다. “무엇이 자재하기에 염착하여 물든다고 합 니까? 어떤 것을 청정이라 하고 어떤 것을 어리석다고 합니까?” 나라다는 답을 할 수 없어서 일주일만 기다려주면 부처님을 찾 아가 답을 듣고 오겠다고 말합니다.

  나라다는 부처님을 찾아가서 이 질문을 했고 부처님은 다음 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육식이 자재로운 까닭에 심왕이 물든 것을 물들었다고 하노라. 물들 것이 없는데 물듦으로써 이것을 어리석다 하노라. 큰 물에 빠진 까닭에 방편을 다 한다고 이름 함이요, 일체의 방편을 다 하게 되면 이것을 지혜로움이라 하노 라.” 나라다에게 답을 준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었 습니다. 육식은 안이비설신의를 말하고 심왕은 마음을 말합니다. 어리석음, 즉 ‘치’는 탐진치의 치로 무명의 상태입니다. 그 러니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서 물들여지는 것입니다. 어리석음 이란 물들 것이 없는데 물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 한 구절에서 다 설명이 됩니다. 방편이 자유로우면 지혜가 됩니다. 우리는 방편이 있어야 적용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끝없는 방편 입니다. 지혜와 지식은 다릅니다. 지식은 단편적인 사실로 이것 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성품이 바 르지 않으면 못 씁니다. 성품이 곧고 발라야 올바른 지혜가 나 옵니다. 성품이 바르지 않으면 머리가 좋아도 좋은 곳에 써먹지 못합니다. 잔꾀나 부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도박과 같은 불법 적이고 어두운 영역에서 놀게 됩니다. 지혜는 방향성도 되기 때 문에 올바른 성품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전연의 전 생이야기입니다. 

  가전연은 석가모니 부처님 밑에서 공부하다 훗날 자기 나라 로 돌아갑니다. 그 당시 출가를 하려면 그것을 증명하는 출가증 명인이 필요했습니다. 부처님 교단에는 일반적으로 10명이 필 요했습니다. 가전연이 아반티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부처님은 아직 불교가 전파되지 않은 먼 나라이니 출가증명인이 5명만 되 어도 출가를 인정하는 특혜를 주겠다고 합니다. 다른 곳보다 쉽 게 불교를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전연은 아 반티국에 돌아가 불교를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주로 불교를 전파하셨던 중심지역인 마다가국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리 중 심의 불교가 발전합니다. 하지만 불교가 전 인도로 퍼져나가면

서 나름대로 특색을 띈 불교가 나타납니다. 간다라 지방에서는 부처님의 뜻을 기려 그 형상을 만들어 불상이 발전하게 되었습 니다. 남인도 자카타 지방은 부처님 전생의 땅으로 부처님의 전 생담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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