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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강 용대를 별도로 풀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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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7-12 11:05 조회 16,59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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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강


(3-1-1-3-6-2) 용대를 별도로 풀이하다 

(3-1-1-3-6-21) 본행본원과 진여평등을 설하다

[진제54] 진여의 작용(用)이란 모든 부처와 여래가 본래 인지(因 地)에서 대자비심을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 하며, 큰 서원을 세워 일체의 중생계를 도탈(度脫)시키고자 하여 겁의 수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모든 중생 을 돌보기를 자기 몸처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중생상(衆生相)을 취하지 않는다. 이는 무슨 뜻에 의 해서인가? 

일체 중생과 자기의 몸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다름이 없는 것인 줄 여실히 아는 까닭이다. 

復次,真如用者,所謂諸佛如來,本在因地發大慈悲,修諸波 羅蜜,攝化眾生。立大誓願,盡欲度脫等眾生界。亦不限劫數 盡於未來,以取一切眾生如己身故,而亦不取眾生相。此以何 義?謂如實知一切眾生及與己身真如平等無別異故。 (3-1-1-3-6-22) 대방편지로서 법신을 보다 

이와 같은 대방편지혜(大方便智)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고 본래의 법신을 보아 자연히 불사의한 업의 여러 가지 작용을 갖 는 것이니, 곧 진여와 더불어 모든 곳에 평등하고 두루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얻을 만한 작용의 모양도 없다. 왜 그런가? 말하자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오직 법신(法身)의 지상(智相)인 몸 뿐이며 제일의제(第一義諦)이기 때문이다. 세간(世諦)의 경계가 없어서 베풀고 지음은 여의지만 다만 중생의 보고 들음[見聞]에 따라서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작용(用)이라 말하는 것이다.

以有如是大方便智,除滅無明、見本法身,自然而有不思議業 種種之用,即與真如等遍一切處,又亦無有用相可得。何以 故?謂諸佛如來唯是法身智相之身,第一義諦無有世諦境界, 離於施作,但隨眾生見聞得益故說為用。

(3-1-1-3-6-23) 추세식에 의한 응신과 보신을 설하다 

[진제55] 이 작용(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사식 에 의한 것으로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응신(應身) 이라 이름한다. 이는 전식이 나타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에 서 온 것이라 보고 색의 차별상[色分齊]을 취하여 능히 알지 못 하는 까닭이다. 

둘째는 업식에 의한 것이니, 이는 모든 보살이 처음 발심함(初發 意)으로부터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본 것을 보 신(報身)이라 말한다. 몸에는 한량없는 색(色)이 있고 색에는 한 량없는 상(相)이 있고, 상에는 한량없는 호(好)가 있고, 머무는 곳 에 의지하는 과보도 또한 한량없는 장엄이 있어서 곳에 따라 나 타냄이 가이 없고 다함이 없다. 분제의 모양(色分齊)을 여의었지 만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항상 머물러 있어서 훼손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  

이러한 공덕은 모든 바라밀의 무루의 행의 훈습(行熏)과 불사의 한 훈습(不思議熏)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다. 이러한 한량없는 즐거운 모양(樂相)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고 하는 것 이다. 

此用有二種。云何為二?一者、依分別事識,凡夫、二乘心所 見者,名為應身。以不知轉識現故見從外來,取色分齊不能 盡知故。二者、依於業識,謂諸菩薩從初發意,乃至菩薩究竟 地,心所見者,名為報身。身有無量色,色有無量相,相有無 量好,所住依果亦有無量種種莊嚴隨所示現,即無有邊不可 窮盡離分齊相,隨其所應,常能住持不毀不失。如是功德,皆 因諸波羅蜜等無漏行熏,及不思議熏之所成就,具足無量樂相 故,說為報身。

(3-1-1-3-6-24) 범부가 거친 형색의 응신을 보다 

또 범부가 보는 것은 거친 형색이다. 육도(六道)에 따라서 각각 보는 것이 같지 않아서 여러 가지의 다른 종류(異類)이다. 즐거운 모양(樂相)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응신(應身)이라 말한다. 又為凡夫所見者,是其麁色,隨於六道各見不同,種種異類非 受樂相故,說為應身。

(3-1-1-3-6-25) 초발의 보살이 보신을 보다  

초발심의 의지를 가진 보살이 보는 것은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 문이다. 부분적으로 보신을 보아서 보신의 색상(色相)과 장엄(莊 嚴)의 일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 분제를 떠났으며 오직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는 것을 안다. 그러 나 이 보살은 아직 스스로를 분별하고 있으니, 아직 법신(法身) 의 지위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이다. 

復次,初發意菩薩等所見者,以深信真如法故,少分而見,知彼色相莊嚴等事,無來無去、離於分齊,唯依心現、不離真 如。然此菩薩猶自分別,以未入法身位故。

(3-1-1-3-6-26) 업식을 여의고 법신을 보다  

만약 청정한 마음[淨心]을 얻으면 보는 바가 미묘하고 그 작용은 더욱 수승하여 이에 보살지가 다함[菩薩地盡]에 이르러 보는 것 이 완전하다. 

만약 업식을 여의면 보는 모양[見相]이 없으져 모든 부처의 법신 은 피차의 색상(色相)을 서로 보는 일이 없게 된다.

若得淨心,所見微妙其用轉勝,乃至菩薩地盡見之究竟。若離 業識則無見相,以諸佛法身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

(3-1-1-3-6-27) 지신(智身)과 진여의 자재함을 설하다

묻기를, 

"만약 모든 부처의 법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 타낼 수 있겠는가?" 

답하기를, 

"이 법신은 색의 본체(體)이기 때문에 능히 색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본래부터 색(色)과 마음(心)은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색 의 본성은 곧 지혜(智)인 까닭에 색의 본체가 형체가 없는 것을 지혜의 몸(智身)이라 하며, 

지혜의 성품[智性]은 곧 색인 까닭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하다 고 말하는 것이다. 

나타낸 색이 차별상[分齊]이 없으니 중생의 마음을 따라 능히 시 방세계에 한량없는 보살과 한량없는 보신과 한량없는 장엄에는 

각각 차별이 있지만 모두 차별상[分齊]이 없어서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 이는 심식(心識)의 분별로는 알 수 없는 것으로 진여의 자재한 작용(用)의 뜻이기 때문이다."

問曰:「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云何能現色相?」

答曰:「即此法身是色體故,能現於色。所謂從本已來色心不 二,以色性即智故色體無形,說名智身;以智性即色故,說名 法身遍一切處。所現之色無有分齊,隨心能示十方世界,無量 菩薩無量報身,無量莊嚴各各差別,皆無分齊而不相妨。此非 心識分別能知,以真如自在用義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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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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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상대. 용대란 첫째 본행본원과 진여평등이고 둘째 대방편 지로서 법신이고 셋째 추세식에 의한 응신과 보신이고 넷째 지 신(智身)과 진여의 자재함이다.” 이번에는 용대를 공부합니다. 세상의 기본적인 원리는 체상용입니다. 우리의 구조나 세상의 구조는 모두 체상용의 원리로 되어있습니다. 체상용의 원리를 이해하면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정리하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나 수억 겁 동안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출현하시어 베푸신 모든 은혜도 용대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 면서 남겨놓은 모든 흔적입니다. 본행본원과 진여평등에 대해 설명해보자면 이 용에는 본행과 본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원을 세우고 삽니다. 원을 세우고 그것을 하기 위한 행을 하고 그 결과는 진여평등이 되어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방편지 로서 법신을 설명하면 용은 모두 방편입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 는 모든 것은 방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하는 행위들은 모두 방편인데 잘하면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이롭게 합니다. 하지 만 잘 못쓰면 자기의 욕심만 챙기고 상대방과 원망을 쌓게 됩니 다. 그래서 방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자비도 중요 하지만 자비의 방향성인 지혜도 중요합니다. 추세식에 의한 응 신과 보신이란 말을 보면 추세는 거친 것과 미세한 것입니다. 거 친 것은 제6식과 제7식이고 가는 것, 즉 미세한 것은 제8식 아뢰 야식입니다. 추는 중생을 가리키고 세는 깨달은 자를 가리킵니 다. 불교의 기본 골격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 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입니다. 각각 체상용에 해당합니다. 원만보신에서 ‘보신’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천백억화신에 서 ‘화신’은 ‘응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응신은 응하여 나타 나는 것이라 화신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지신(智身)과 진여의 자재함이란 말을 살펴봅시다. 지신이란 지혜의 몸으로 법신과 같은 말입니다. 깨치는 행위는 지신과 진 여의 자재함에 의해 진여로 향하게 합니다. 이것이 용대입니다. 깨친 사람의 용은 주위의 모든 것을 깨치는 쪽(진여)으로 인도합니다. 반대로 깨우치지 못한 사람의 용은 주위의 모든 것을 무명 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 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용대를 별도로 풀이하다. 본행본원. 진여의 작용[用]이란 모 든 부처가 여래가 본래 인연의 땅[因地]에서 대자비심을 일으 켜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하며, 큰 서원을 세워 일 체의 중생계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度脫]하고자 겁의 수를 한 정하지 않고 미래에 까지 다하는 것이니 중생을 돌보기를 자기 몸처럼 하기 때문이다.” 인연의 땅에서 대자비심을 일으켜 모 든 바라밀을 닦아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본행입니다. 깨달은 상 태에서 용의 작용입니다. 부처의 본행은 모든 중생을 육바라밀 의 실천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큰 원을 세워 이 세상에 있는 모 든 중생을 괴로움에서 제도하는 것은 본원입니다. 부처의 원이 란 나 혼자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 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중생 돌보기를 자기 몸처럼 하기 때문에 이런 원을 세울 수 있습니다. 자신과 중생은 둘이 아니라고 보 기 때문에 바로 일심입니다. 모를 때는 전부 다르지만 알고 나 면 하나입니다. 공부하면서 일심을 느끼는 순간 도가 트인 것이 라 할 수 있습니다.

  견성은 내가 공부한 만큼 됩니다. 견성이 멀리 있는 것이 아 닙니다. 내 삶 속에 항상 있는 것이 견성입니다. 주변에서 살아 가는 모든 것과 관계하고 작용하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 깨달음 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생깁니다. 이것이 부처에 대한 자각입니 다. 100% 부처가 되면 제일 좋겠지만 설령 못되더라도 내가 알고 느끼는 만큼 부처가 됩니다. 내가 부처라는 생각이 중요합니 다. 부처를 목표로 두면 어느 세상에서든지 진리를 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처를 모를 때는 부처가 나와 별개의 삶이지만 내가 부처를 인식하고 이해하면 부처가 내 속에 있음을 알고 부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부처이고 이웃들도 모두 부처 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이것은 부처의 원인 본 원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하면 그 렇게 됩니다.

  “진여평등. 그러면서도 중생상(衆生相)을 취하지 않는다. 이 는 무슨 뜻에 의해서인가? 일체 중생과 자기의 몸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다름이 없는 것인 줄 여실히 아는 까닭이다.” 일심, 하 나니까 전부 평등합니다. 하나가 아닐 때는 차별이 있습니다. 우 리는 진여를 못 보기 때문에 차별상으로 각자의 모습이 다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진여를 보게 되면 차별상 속의 진실을 보게 됩 니다. 그것을 보게 되니까 다 똑같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눈의 차별상은 무명으로 보기 때문이지만 무명을 던져버리고 진실을 보면 전부 다 평등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생상을 취하면 차별 이 있게 됩니다. 다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중생상을 취하지 않으면 진여평등이 됩니다. 본래 성품으로 보면 평등합니다. 우 리는 그런 모습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 하 지 말고 노력을 통해 본래 모습인 부처가 되면 됩니다.

  “대방편지로서 법신을 보다. 대방편지혜(大方便智慧)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고 본래의 법신을 보아 자연히 불가사의한 업의 여러 가지 작용을 갖는 것이니, 곧 진여와 더불어 모든 곳에 평등하고 두루하게 된다.” 부처와 보살은 이 세상의 모든 생 명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부처와 보살의 마음에는 악심이 없고 자비심만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행위를 하든지간에 생명을 살 리는 행위만 합니다.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하지만 중 생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행위를 합니다. 자 기에게 도움이 될 행동만 합니다. 본래의 법신은 바로 청정법신 입니다. 청정법신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자비 밖에 없습니다. 아 무리 공부를 해도 행동이 자비롭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한 것이 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은 쌀가마를 들고 가만히 서있는 것과 같 습니다. 쌀가마를 들고 오래 서있으면 엄청 힘듭니다. 옮기던지 주던지 작용을 해야 일이 되지만 서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공부를 통해 심성의 깨끗함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무명을 없애고 본래의 청정한 법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사의한 업의 여러 가지 작용은 바로 깨달은 사람들 의 기적을 말합니다.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끝없는 진리의 세계 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기적이 일어나게 한다면 엄청난 공덕이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디든지 진리를 베풀어야 합니다. 진여와 더불 어 모든 곳에 평등하고 두루하게 된다는 말이 이것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혼자 산 속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을 한다면 그의 자비가 타인, 만물, 우주에 영향을 미치는가 여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것입니다. 만약 제대로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산 속에 혼 자 있어도 자비가 세상에 베풀어집니다. 전해지고 공유하게 됩 니다. 진리는 항상 여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만큼 보입니다. 부처에게는 모든 것이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자기 밖에 안 보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을 위해 삽니다.  

  “대방편지로서 법신. 그러면서도 얻을 만한 작용의 모양도 없 다. 왜 그런가? 말하자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오직 법신(法身)의 지상(智相)인 몸 뿐이며 제일의제(第一義諦)이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세간의 경계[世諦]가 없어서 베풀고 지음은 여의지만 다만 중생의 보고 들음[見聞]에 따라서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작용[ 用]이라 말하는 것이다.” 만약 자비를 베풀어 상을 받으면 자취 가 남겠지만 진리를 깨우친 자는 베풀면 베푼 것으로 끝납니다.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기는 모든 흔적은 내 업과 결 부되어 작용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작용을 하면 그 댓가를 바랍니다. 이것이 중생심입니다. 하지만 부처는 행위 를 하면 끝나기 때문에 작용의 모양, 흔적이 없습니다. 편형 다 섯 개는 촉, 작의, 수, 상, 사입니다. 이것은 6식, 7식, 8식에 다 있습니다. 깨친 자는 이것만 작용합니다. 중생들은 업의 창고와 연결되어 작용됩니다. 그렇게 행위가 업에 축적되면 다음 생의 과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는 그 연결줄이 없습 니다. 부처는 어떤 행위를 하건 대가와 과보를 바라지 않습니다. 행위를 하면 행위한 것이고 보았으면 봤을 뿐입니다. 

부처는 끝없이 중생을 위해 이익되게 하는 것을 베풀기 때문 에 작용이라 말하지만 베푼 것은 베푼 것으로 끝납니다. 베풂에 대한 댓가가 작용하지 않습니다. 중생은 제7식에 머물기 때문 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행위에 대한 댓가가 따라오게 되 어 있습니다. 부처는 행위만으로 끝납니다. 진리를 말하고 행하고 베풀 뿐입니다. 

  “추세식에 의한 응신과 보신을 설하다. 이 작용[用]에는 두 가 지가 있으니 응신과 보신이다. 응신(應身)이란 분별사식에 의한 것으로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전식이 나타 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에서 온 것이라 보고 색의 차별상 [色分齊]을 취하여 능히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법신이 체라면 응신은 용입니다. 분별사식은 제7식을 가리킵니다. 이승이란 성문, 연각을 말합니다. 제7식의 마음으로 일으키는 모든 것이 응신입니다.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저장창고의 업을 써 서 모든 것을 차별되게 보는 것입니다. 대상이 바깥에 있다고 생 각하기 때문에 전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깨닫지 못한 응신입 니다. 제7식 분별사식에 의하여 우리가 대상을 보고 생기는 모 양, 마음들을 응신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추세 가운데 추에 해 당하는 것이 응신입니다.

  “보신(報身)이란 업식에 의한 것으로, 모든 보살이 처음 발심 함[初發意]으로부터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본 것을 말한다. 몸에는 한량없는 색(色)이 있고 색에는 한량없는 상(相)이 있고, 상에는 한량없는 호(好)가 있고, 머무는 곳에 의 지하는 과보도 또한 한량없는 장엄이 있어서 곳에 따라 나타냄 이 끝이 없고 다함이 없다. 차별상의 모양[色分齊]을 여의었지만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항상 머물러 있어서 훼손되지도 않고 잃 지도 않는다.” 업식은 제8식입니다. 보신은 제8식의 영역에 속 하며 초지보살에서 십지보살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보신은 본 래 성품을 본 견성한 사람이 보고 일으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몸에는 한량없는 색이 있고 색에는 한량없는 모양이 있고 모 양에는 한량없는 호가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고 인식하는 모 든 것은 상, 형상으로 다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쓸 때는 단 위로 된 형상들을 끄집어내 쓰는 것입니다. 연속된 것이라면 끄 집어내 쓸 수 없습니다. 전생 가운데 어느 생에 행위했던 것이 모양으로 축적되어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좋고 싫음 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에 한량없는 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좋고 싫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머무는 곳에 의지하는 과보도 또한 한량이 없다’는 말은 우 리가 머물러서 행위하는 모든 것에 과보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데 따른 과보가 따라오고 싫어하면 싫어하는 데 따른 과보가 따라옵니다. 장엄은 나타내는 것입니다. 색으로 시작한 상이 끝도 없고 상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끝없 이 있고 그 행위를 함으로써 과보가 끝이 없고 그 과보는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는(장엄) 것입니다.

  ‘차별상의 모양을 여의었다’는 말은 견성을 했다는 말입니다. 차별상의 모양을 보아도 차별상에 집착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차별상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호오를 일으켜도 일으키 고 끝나는 것이지 저장창고로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어 떤 사람이 웃는다고 한다면 도인의 경우 웃으면 웃고 끝입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웃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응 하는 바에 따라서 항상 머물러 있어서 훼손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는 말은 그냥 그대로 있을 뿐임을 말한 것입니다. 머무 름 없이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응신은 제7식에 의해 보고 느낀 모든 마음입니다. 보신은 초 지보살부터 십지보살까지의 존재들이 보고 느낀 모든 마음입니 다. 응신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일으킨 마음이고 보신은 깨달 은 상태의 마음입니다.

  “보신. 이러한 공덕은 모든 바라밀의 무루의 행의 훈습[行熏] 과 부사의한 훈습[不思議熏]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다. 이러한 한 량없는 즐거운 모양[樂相]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 고 하는 것이다.” 무루란 다음 생에 태어날 업이 되지 않는 것 입니다. 부처가 하는 행위는 무루입니다. 육바라밀, 십바라밀 을 행하는 것은 무루의 행을 훈습하는 것이고, 기적과 같은 불 가사의한 훈습에 의해 보신이 성취됩니다. 우리는 제대로 공부 해서 응신에 머물지 말고 보신을 이루고 법신에서 살 수 있도 록 해야 합니다.

  중생은 무명이고 무상이기 때문에 변하고 생멸합니다. 이러 한 것이 고(苦)입니다. 고가 고인줄 알면 낙이 됩니다. 고가 고 인줄 모르면 고가 됩니다. 파도타기를 예로 들어 보면 파도타는 법을 알고 잘 타면 극락이 펼쳐지지만 파도타는 법을 모르고 물 에 빠져버리면 고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런 두 가지면을 다 가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이며 중생이고 중생이며 부처인 것 입니다. 내가 눈 감고 있으면 중생이지만 눈을 뜨면 부처입니다. 보신은 부처를 이룬 몸이기 때문에 끝없는 낙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끝없이 즐거운 모양이 구족되어 있어 극락에서 살 수 밖 에 없습니다.

  “범부가 거친 형색의 응신을 보다. 또 범부가 보는 것은 거친 형색이다. 육도(六道)에 따라서 각각 보는 것이 같지 않아서 여 러 가지의 다른 종류[異類]이다. 즐거운 모양[樂相]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응신(應身)이라 한다.” 응신은 거친[麤] 분별사식 에 의한 것으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6 식, 7식에서 일으키는 것은 모두 거친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하면 거친 것은 쉽게 사라지지만 미세한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육도윤회는 다 각자 다른 모양입 니다. 어떤 경우는 천상에 태어나거나, 인간이 되기도 하고 지 옥에 태어나기도 하고 아귀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다 다르게 태 어나기 때문에 보는 것도 다 다릅니다. 천상에서 보고 느끼는 것 이 다르고 인간이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르고 축생이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르고 아귀가 보고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즐거운 모양은 견성한 보신에서 받습니다. 범부나 중생은 깨닫지 못하기 때문 에 괴로운 모양[苦相]을 봅니다. 이 응신은 화신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경전에 따라 설명의 차이가 있습니다.

  “초발의 보살이 보신을 보다. 초발심의 의지를 가진 보살이 보는 것은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보신을 보 아서 보신의 색상(色相)과 장엄(莊嚴)의 일이 오는 것도 없고 가 는 것도 없어 차별상[分齊]을 떠났으며 오직 마음을 의지하여 나 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는 것을 안다. 그러나 보살은 아직 스 스로를 분별하고 있으니, 아직 법신(法身)의 지위에 들어가지 못 한 까닭이다.” 깨닫지 못한 범부들은 응신 속에서 살지만 초발 의 보살, 초지보살 이상은 보신 속에서 삽니다. 그렇다면 법신은 십지보살 위의 부처가 보는 것입니다. 

  “업식을 여의고 법신을 보다. 만약 청정한 마음[淨心]을 얻으 면 보는 바가 미묘하고 그 작용은 더욱 수승하여 이에 보살지가 다함[菩薩地盡]에 이르러 구경을 보게 된다. 만약 업식을 여의면 보는 모양[見相]이 없어져 모든 부처의 법신은 피차의 색상(色 相)을 서로 보는 일이 없게 된다.” 법신은 완전하게 견성한 상태 입니다. 청정한 마음은 물들기 전의 본래 마음입니다. ‘보살지 가 다함’이란 십지보살 이상이 되어 구경각에 이른 것을 말합니 다. 법신은 존재하는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다른 경전에서는 응신, 보신, 법신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 지 봅시다. 약간씩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승동성경에서 는 예토의 성불을 화신이라 하고 정토의 성불을 보신이라고 합 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더럽고 물든 예토입니다. 깨달 음의 세계는 청정한 정토입니다. 여기서는 견성한 상태, 부처가 된 상태부터 시작합니다. 금광명최승왕경에서는 32상과 80종 호 등의 상을 응신이라 하고, 육도의 상을 따라 나타난 몸을 화 신이라 합니다. 섭론에서는 ‘자성신은 법신이고 수용신, 자수용 신은 보신이고 타수용신, 변화신은 응신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지전(십지 이전)에서 보는 것을 변화신이라 하고, 지상(십지 이상)에서 보는 것을 수용신이라 합니다. 변화신이 화신이고 수 용신이 보신입니다. 


  “지신(智身)과 진여의 자재함을 설하다. 만약 모든 부처의 법 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이 법신은 색의 본체[體]이기 때문에 능히 색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본래부터 색(色)과 마음[心]은 둘이 아니다. 왜 냐하면 색의 본성은 곧 지혜[智]인 까닭에 색의 본체가 형체가 없는 것을 지혜의 몸[智身]이라 하며, 지혜의 성품[智性]은 곧 색 인 까닭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타낸 색이 차별상[分齊]이 없으니 중생의 마음을 따라 능히 시방세계 에 한량없는 보살과 한량없는 보신과 한량없는 장엄에는 각각 차별이 있지만 모두 차별상[分齊]이 없어서 서로 방해되지 않는 다. 이는 심식(心識)의 분별로는 알 수 없는 것으로 진여의 자재 한 작용[用]의 뜻이기 때문이다.”

  진여는 자재합니다. 진공묘유입니다. 공에서 만물을 만들어 냅니다. 모든 것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없는 것 같이 보 일 뿐입니다. 무색인 빛을 프리즘에 비추면 빨강, 주황, 노랑, 초 록, 파랑, 남색, 보라색등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본체가 모 양을 만나 작용을 일으키면 한량없는 형상을 만들어 냅니다. 만 들어진 낱낱 속에서는 진여가 들어있어 본체와 다를 바가 없습 니다. 그러므로 색과 심은 둘이 아닙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_윤회와 인과응보 제선스님


  이번에는 제선스님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선스님은 도 봉산 천축사에서 무문관 6년 수행을 했습니다. 출가 전에 일본 에서 유학을 했는데, 유학 시절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도 했습니 다. 졸업 후 본가인 제주도로 돌아와서 결혼을 했고 슬하에 아 들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뒤에 놀다가 “아야”하고 쓰러졌는데 죽고 말았습니다. 아들을 잃 은 충격에 제선스님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고 걱정된 스님 의 어머니께서 돈을 주고 기분전환 겸 금강산에 다녀오라고 합 니다. 제선스님은 금강산에 가지 않고 서울로 가서 내기 바둑으 로 돈을 다 탕진해버렸고 막노동을 전전하다 묘향산에 갔습니 다. 묘향산에 가니 토굴에 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제선스님 은 호기심에 그 스님에게 말을 걸었고 그렇게 토굴에서 며칠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좀 친해지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제선스님의 아들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선스님이 스 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스님 그 아이가 왜 그렇게 죽어버린 것일까요?” 그러 자 그 스님이 대답합니다.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간단하지. 7일 만 잠 안자고 기도하면 금방 알 수 있어.” 그 아이가 잊혀지지 않 았던 제선스님은 바로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 날부터 기도를 시 작했는데 첫날부터 잠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잠과 싸 운지 42일째 되는 날, 드디어 잠 안자고 7일 동안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아이가 죽은 이유 를 알 수 없었습니다. “속았구나! 부처도 관세음도 원래 없는 것 이었구나.” 화가 난 제선스님은 부처님의 목을 베겠다고 불단으 로 가다가 탁자에 소매가 걸려 넘어집니다. 그 순간 눈 앞에 아 이가 나타났습니다. 그 아이가 웃으면서 다가오더랍니다. 그런 데 다가가면 다시 멀어집니다. 약이 오른 제선스님은 아이를 따 라잡아 엉덩이를 발로 찼습니다. 그러자 “아야” 소리를 내며 뒤 를 돌아보는데 아이가 개로 변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났던 개 한 마리가 떠올랐습니다.

  제선스님이 일본 유학 시절 주인집에 개가 한 마리 있었습니 다. 그 개가 제선스님을 잘 따랐습니다. 하루는 영화를 보러 갔 는데 재선스님이 극장에서 나올 때까지 개가 기다리고 있었습 니다. 하지만 그 개가 병이 들게 되었고 아무 것도 먹지 않자 집 주인이 개가 제선스님을 잘 따르는 것을 알고, 제선스님에게 개 를 버리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제선스님은 개를 버리러 외딴 시 골에 가게 되었고 가다가 날이 저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 것도 먹 지 않던 개가 밥을 먹기 시작하더니 기운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원래 동물들이 병이 들면 자기 치유책으로 단식을 합니다. 그 개 가 밥을 먹지 않았던 것은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기운을 차린 개는 죽어라고 제선스님을 따라왔습니다. 개가 끈질기게 따라오자 스님은 개가 오줌 누는 사이에 자전거 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그러고 며칠 후 개가 집까지 찾아오더니 제선스님을 원망의 섬뜩한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고 바 로 죽어버렸습니다.

  바로 그 개가 아들로 환생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요절한 것이 그 개를 버린 과보였음을 깨닫습니다. 제선스님은 이런 인 과응보를 직접 체험했던 것이었습니다. 인과응보는 정확하고 정직합니다. 원인을 알고 당하는 것도 있지만 원인도 모르고 당 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을 따르 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포심, 불안함이 많다면 이 사 람은 업보가 많은 사람입니다. 전생에 나쁜 짓을 한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누군가, 무엇인가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하는 것입 니다. 업보가 없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당당합니다. 무엇을 해 도 수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잘 써야 하고 부처님의 계 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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