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강 수행이 성취된 발심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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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7-12 11:25 조회 18,422 댓글 0본문
제21강
(3-3-2-1-2) 수행이 성취된 발심을 밝히다
(3-3-2-1-2-1) 직심, 심심, 대비심을 밝히다
[진제65] 다음 믿음을 성취한 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떤 마음 을 발하는 것인가? 대략 말하자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직심 (直心)이니 진여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둘째 심심(深心) 이니 일체의 모든 선행을 이루기 좋아하기 때문이며, 셋째 대비 심(大悲心)이니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復次,信成就發心者,發何等心?略說有三種。云何為三?一 者、直心,正念真如法故。二者、深心,樂集一切諸善行故。 三者、大悲心,欲拔一切眾生苦故。
(3-3-2-1-2-2) 선행을 닦아 진여에 귀순하다
묻기를
"위에서 법계는 하나의 모양(相)이며 부처의 본체(佛體)는 둘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직 진여만을 생각해야 하고 다 시 여러 선행을 닦음을 구하는 것인가?"
답하기를,
"비유하자면 큰 마니보배(摩尼寶)의 체성(體性)은 맑고 깨끗한 것이지만 거친 광석의 때를 가지고 있어 만약 어떤 사람이 마니 보배의 깨끗한 본성을 생각하면서도 갖가지 방편으로써 갈고 닦 지 않으면 끝내 청정함을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의 법도 체성이 텅 비었고 청정하지만 한 량없는 번뇌의 오염된 때가 있으니, 비록 진여를 생각하지만 갖 가지 방편으로 훈습하여 닦지 않으면 또한 청정함을 얻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때가 한량이 없어 모든 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모든 선 행을 닦아서 대치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선법(善法) 을 수행하면 저절로 진여법에 귀순하기 때문이다.
問曰:「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何故不唯念真如,復假求 學諸善之行?」
答曰:「譬如大摩尼寶體性明淨,而有鑛穢之垢。若人雖念寶 性,不以方便種種磨治,終無得淨。如是眾生真如之法體性空 淨,而有無量煩惱染垢。若人雖念真如,不以方便種種熏修, 亦無得淨。以垢無量遍一切法故,修一切善行以為對治。若人 修行一切善法,自然歸順真如法故。
(3-3-2-1-2-3) 네 가지 방편을 밝히다
방편을 간단히 말하자면 네 가지가 있다. 略說方便有四種。云何為四?
(3-3-2-1-2-31) 행근본방편을 밝히다
첫째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다. 모든 법은 자성(自性)이 생 김이 없음을 관하여 망견(妄見)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않는다. 또 모든 법이 인연의 화합이라 업과(業果)가 없어지지 않음을 관 하여 대비심을 일으켜서 모든 복덕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하여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는 법성의 머무름이 없는 것을 수순 하기 때문이다.
一者、行根本方便。謂觀一切法自性無生,離於妄見,不住生 死。觀一切法因緣和合,業果不失,起於大悲修諸福德,攝化 眾生不住涅槃,以隨順法性無住故。
(3-3-2-1-2-32) 능지방편을 밝히다
둘째 능지방편(能止方便)이다.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 하고 뉘 우쳐서 모든 악법을 그치게 하여 증장하지 않게 함을 말하는 것 이니, 이는 법성의 모든 허물을 여읜 것을 수순하기 때문이다. 二者、能止方便。謂慚愧悔過,能止一切惡法不令增長,以隨 順法性離諸過故。
(3-3-2-1-2-33) 선근증장방편을 밝히다
셋째 발기선근증장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으로 선근을 일으켜 증장시키는 방편이다. 삼보(三寶)에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 며, 모든 부처를 찬탄하고 기뻐하며 권청(勸請)하여 삼보를 애경 (愛敬)하는 순수하고 깊은 마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되어 무상의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둔다. 또 불법승(佛法僧)의 힘의 보호를 받 아 능히 업장(業障)을 소멸하여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이 는 법성의 어리석은 장애(癡障)을 여읜 것을 수순하기 때문이다. 三者、發起善根增長方便。謂勤供養、禮拜三寶,讚歎、隨 喜、勸請諸佛,以愛敬三寶淳厚心故,信得增長,乃能志求無 上之道。又因佛法僧力所護故,能消業障,善根不退,以隨順 法性離癡障故。
(3-3-2-1-2-34) 대원평등방편을 밝히다
넷째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이다.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여 남음이 없고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도록 발원하는 것이다. 이는 법성의 단절됨이 없음을 수 순하기 때문이다.
법성이 광대하여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고 평등하여 둘이 없으 며 깨끗함과 물듬[彼此]를 생각하지 않고 구경에 적멸(寂滅)하 기 때문이다."
四者、大願平等方便。所謂發願盡於未來,化度一切眾生使無 有餘,皆令究竟無餘涅槃,以隨順法性無斷絕故,法性廣大, 遍一切眾生,平等無二,不念彼此,究竟寂滅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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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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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 보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나옵니다. 아상 은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인아견에 해당하고 인상은 대상이 있 다는 생각으로 법아견에 해당합니다. 중생상은 존재하는 것이 모두 있다는 생각이고 수자상은 존재하는 것이 영원히 존재한 다는 생각입니다. 아상, 인상은 무아에 대한 내용이고 중생상, 수자상은 무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인무아를 알게 되면 견성을 한 것이고, 대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법무아를 알게 되면 성불한 것입니다. 견성 을 하면 인무아를 알기도 하고 성불을 하면 법무아를 알게 되기 도 합니다. 내가 인무아를 터득하면 번뇌장에서 벗어나 나의 본래 성품을 보게 됩니다. 나를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갖고 있는 아집, 집착은 소지장이라고 합니다. 대상에서 생기는 번뇌 는 소지장 입니다. 그 소지장에서 벗어나면 부처가 됩니다. 성 불하게 됩니다.
“수행이 성취된 발심을 밝히다. 직심, 심심, 대비심이 있다. 선행을 닦아 진여에 귀의(귀순)한 것으로 행근본방편, 능지방 편, 선근증장방편, 대원평등방편의 네 가지 방편이 있다.” 직심 이란 정직하고 곧은 마음이고, 심심은 깊은 마음이고, 대비심은 끝없는 자비로운 마음을 말합니다. 수행이 성취되면 이런 마음 이 나옵니다. 착한 일을 계속 하게 되면 다다르는 곳은 진여, 진 리의 세계입니다.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네 가지 방편이 있습니다. 네 가지 방편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직심, 심심, 대비심. 믿음을 성취한 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 떤 마음을 발하는 것인가? 첫째 직심(直心)이니 진여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둘째 심심(深心)이니 일체의 모든 선행을 이 루기 좋아하기 때문이며, 셋째 대비심(大悲心)이니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직심, 심심, 대비심은 믿음 을 성취한 발심입니다. 믿음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직심이 란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똑바로 진리로 나아가겠다는 마음입니 다. 어떻게 살 것인가? 머리 속에서 진리만 생각하고 사는 것입 니다. 심심은 깊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심심을 가지게 되면 표면에 있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본질을 보게 됩니다. 본질은 물들지 않 는 바른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선행을 이루기 좋아하게 됩니다. 수행을 하다보면 진여의 세계에 들어가고 일심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 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대비심입니다. 대비심은 끝 없는 자비입니다. 이 넘치는 자비는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이 마 음이 좋다면 그것은 마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모자란 것입니다. 마음이 좋고 지혜로워야 진정 마음이 좋은 것입니다. 대비심은 이런 것입니다. 자비는 지혜와 항상 병행되는 것입니다. 자비가 끝이 없으면 지혜도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지혜광명의 흘러넘 치는 지혜가 광명(대비심)이라는 말입니다.
직심을 잘 표현한 것이 선불교의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 심, 견성성불입니다. 부처님께서 방대한 경전을 설하셨지만 경 전 외 따로 전하셔서 문자로 세우지 않고 마음을 바로 가리켜 견 성성불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진여의 마음이 꽉 차서 항상 진여 속에 있게 하는 것이 직심입니다. 이런 직심과 관련된 일화 로 구지 선사와 신찬 선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지 선사는 스승인 천룡 선사가 손가락 하나를 세우자 깨우 친 사람입니다. 그 이후 다른 사람들이 와서 구지 선사에게 도 를 물으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은 구지 선사가 부재중이었는데, 구지 선사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사미승에게 구지 선사의 법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사미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여주었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구지 선사는 사미승에게 어떻게 가르쳐 주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 미승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내민 순간 구지 선사는 사미승의 그 손가락을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스승님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 사미승은 절을 떠납니다. 사미승은 손가락을 부여잡고 가는 데 구지 선사가 그 순간 사미승에게 “사미야, 도가 무엇이냐?” 하고 소리칩니다. 사미는 돌아서서 그 잘린 손가락을 세워 보여 주었습니다. 사미승이 보니까 스승은 손가락을 세워 보여주고 있는데 자신은 손가락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사미승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말을 떠나 진리를 나타내 는 좋은 예입니다.
또 신찬 선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찬 선사는 계현 선사 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가 백장 스님에게서 깨달음을 얻었습 니다. 계현 선사 밑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다가 백장 스님에게 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계현 선사에게 돌아가니까 스승은 예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었습니 다. 스승을 깨우치게 하고 싶었던 신찬은 어느 날 계현 선사의 등의 때를 밀어주며 말했습니다. “법당은 참 좋구나. 그런데 부 처가 영험함이 없구나. 영험함이 없는 부처가 또한 방광은 하는 구나.” 계현 선사는 그 뜻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며 신찬을 쳐 다보고 말았습니다. 그 후 어느 날 계현 선사가 경전을 읽고 있 는데 방안에 있던 벌 한마리가 나가려고 봉창을 두드리고 있었 습니다. 그것을 본 신찬 선사가 스승 들으라고 한 마디 합니다. “문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봉창을 치니 크게 어리석구나. 백 년 을 그런들 종이가 뚫릴까. 어느 날에나 나갈 수 있겠는가.” 계 현 선사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깨우쳐 신찬을 바로 상좌에 앉히 고 법문을 하라고 합니다. 신찬이 법문을 하는데 여태껏 경전에 서 본 것이랑 완전 틀린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직심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심심이란 만 가지 선업을 성취하는 깊고 깊은 마음이다.” 우 리는 깊이 일으키는 마음을 모릅니다. 현재 우리가 일으키는 마 음보다 더 깊은 마음이 심심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말로 하지 않아도 깊이 느끼는 그런 마음들입니다. 어머 니가 자식에게 하는 지극한 마음이 이러한 예일 것입니다. 깊이 있는 마음, 본질을 본다면 끝없는 선행으로 연결되어서 진여에 들어간 삶을 살게 됩니다.
선종은 육조로부터 다섯 개의 종파로 나누어집니다. 그 가운 데 법안 문익이 만든 종파가 법안종입니다. 선종 다섯 개 종파 가운데 가장 늦게 만들어집니다. 법안이 지은 선시 가운데 하 나인데 그 깊은 마음을 볼 수 있는 시입니다. “깊은 숲 속 새들 은 피리처럼 지저귀고 수양버들 가지가지 금실처럼 춤추네. 구 름이 돌아오니 산골짝 더욱 고요하고 살구꽃 향기는 바람에 묻 어오는구나. 온종일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았으니 마음 맑아지고 모든 근심 사라진다.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그대여, 세 상 일 놓아두고 이 숲 속에 오게나.” 고요한 정경 속에서 가만 히 앉아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가라앉고 정리되어 마음이 맑아 지고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왔는가, 내가 어디 로 갈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진리를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래서 법안이 숲으로 와서 진리를 깊이 느껴보지 않겠는 가 하고 말합니다. 진여를 향한 그 깊은 마음(심심)에서 우러나 온 선시입니다.
이번에는 승려가 아닌 시인의 시를 살펴봅시다. 여기서도 깊은 마음이 나타납니다. 당나라 시인 왕유의 가을밤이란 시입니 다. “빈 방에 홀로 앉았으면 늙어감이 서럽다. 초저녁 밖에서는 찬비가 내리고 어디선가 과일이 떨어지는 소리. 풀벌레가 방안 에 들어와 운다.” 왕유의 시도 한 편의 선시나 다름없습니다.
대비심이란 끝없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공부를 하면서 생기 는 끝없는 자비입니다. 도천수대비가란 노래가 있습니다. 어느 어머니가 눈 먼 딸을 위해서 자신의 한 눈을 딸에게 주겠다고 관 세음보살에게 빌던 노래입니다. “무릎을 꿇으며 두 손바닥을 모 아 천수관음전에 비옵니다. 천 손에 천 눈을 하나를 놓고 하나 를 덜겠사옵기에 둘 없는 내라 하나야 그윽이 고치올러라. 아, 내게 (은혜를) 끼쳐주시면 놓되 쓰을 자비여 얼마나 큰가!” 자비 란 내가 필요한 것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을 다른 사람은 필요하겠지 생각하고 주는 것은 자비가 아닙니다.
직심, 심심, 대비심으로 이 세상을 산다면 이 세상 어디에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도 우리가 걸어가야할 길은 진리, 진여입니다. 직심, 심심, 대비심을 통해 진여로 나아간다면 아무리 더러운 세상에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든 내가 당당하고 정직하게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직심, 심심, 대비심으로 걸어가면 세상은 그냥 열립니다. 내가 걸어가고 연만큼 내 세상입니다. 내가 뿌린 자 비만큼 내 세상입니다.
“선행을 닦아 진여에 귀순하다. 묻기를 ‘위에서 법계는 하나 의 모양[相]이며 부처의 본체[佛體]는 둘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 슨 까닭으로 오직 진여만을 생각해야 하고 다시 여러 선행을 닦 음을 구하는 것인가?’” 직심, 심심, 대비심을 가지면 끝없는 선 행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선행을 닦다보면 진여에 이르게 됩니다. ‘법계는 하나의 모양’이라는 말은 일심을 말합 니다. 여기서 질문의 의미는 결국 일심이면 진여도 오염된 것도 하나인데 왜 진여만 생각해야 하느냐입니다. 오염된 것도 하나 인데 왜 선행을 닦으라고 하느냐입니다.
“답하기를 ‘비유하자면 큰 마니보배(摩尼寶)의 체성(體性)은 맑고 깨끗한 것이지만 거친 광석의 때를 가지고 있어 만약 어떤 사람이 마니보배의 깨끗한 본성을 생각하면서도 갖가지 방편으 로써 갈고 닦지 않으면 끝내 청정함을 얻을 수 없다.’” 원래 하 나는 맑고 깨끗하지만 그냥 놔두니까 때가 끼고 먼지가 앉는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들어 있는 것을 제거해야 본래 깨끗한 본 성(마니보배)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청정법신인데 업, 번뇌로 물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면 청정법신이 드러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들어 있는 것을 걷어내자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인데 오염된 것 때문에 못 봅니다. 못 보기 때문에 오 염된 것을 진짜인줄 알고 착각합니다.
“중생의 진여.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의 법도 체성이 텅 비었 고 청정하지만 한량없는 번뇌에 오염된 때가 있으니, 비록 진여 를 생각하지만 갖가지 방편으로 훈습하여 닦지 않으면 또한 청 정함을 얻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때가 한량이 없어 모든 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모든 선행을 닦아서 대치하는 것이다. 만약 어 떤 사람이 모든 선법(善法)을 수행하면 저절로 진여법에 귀순하 기 때문이다.” 원래 청정하지만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오염된 때 가 있습니다. 이 오염된 때가 훈습을 하기 때문에 본성을 되찾 기 위해서 갖가지 방편으로 닦아야 합니다. 오염된 것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오염된 것만 씁니다. 이 오염된 것 은 모든 것에 묻어있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본래 청정한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오염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자비심을 일으켜 선행을 닦으면 진리를 보게 됩니다. 착한 마음을 일으켜 선법을 수행하면 가만히 내버려둬도 진리로 갑니다. 원래 청정 한 순수한 마음을 일으키면 내버려둬도 진리로 가게 되어있습 니다. 물들기 전의 깊은 마음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청 정한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것은 끝없 는 자비입니다.
진여, 대비심에 들어가기 위한 네 가지 방편을 살펴봅시다. 네 가지 방편이란 앞에서 보았듯이 행근본방편, 능지방편, 선근 증장방편, 대원평등방편입니다.
“행근본방편을 밝히다. 모든 법은 자성(自性)이 생김이 없음 을 관하여 망견(妄見)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않는다. 또 모든 법이 인연의 화합이라 업과(業果)가 없어지지 않음을 관하여 대 비심을 일으켜서 모든 복덕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하여 열반에 도 머물지 않는다. 이는 법성의 머무름이 없는 것을 수순하기 때문이다.” 행근본방편이란 근본을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법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이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음을 보고(본래 있는 대로 볼 수 있게 되 면) 내가 있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이 없어져 생사에 머물지 않 게 된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생사에 머물며 끊임없이 생사를 되 풀이합니다. 망견을 여의고 본성을 보게 되면 생사가 원래 없음 을 알게 됩니다.
그 다음을 봅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 연과, 두 개가 부 딪혀서 만들어내는 과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존재의 전부 입니 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연과의 법칙으로 설명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연기의 법칙을 쉽게 표현하면 인연과 의 법칙이 되고 그 속성은 연속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끌어 당김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 왜 성취가 될 까요? 이것은 끌어당김의 법칙이며 가속도의 법칙입니다. 공부 하던 사람들은 계속 공부하기를 좋아합니다. 반면 노름을 좋아 하는 사람은 노름이 습이 되어 계속 노름 하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연속성의 법칙에 의해 하려고 하는 것을 끝없이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른 생각을 하면 내 속에서 바른 것을 자꾸 끄 집어내어 쓰고, 반대로 내가 나쁜 생각을 하면 전생의 업 가운 데 나쁜 것을 자꾸 끄집어내어 쓰는데 이것은 연속성의 법칙입 니다. 중생을 섭화한다는 말은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입니다. 연 기의 법칙을 깨닫고 본질을 따르게 되면 열반에 머물지 않고 대 비심을 일으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입니다.
“능지방편을 밝히다.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서 모든 악법을 그치게 하여 증장하지 않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법성의 모든 허물을 여읜 것을 수순하기 때문이다.” 능지방 편이란 능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의 허 물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변 하지 않습니다. 끝없는 아집 속에서 인생이 흘러갑니다. 내가 참 회하고 자신을 되돌아봄으로써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고, 이것이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법성의 모든 허물을 여 의고 진리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선근증장반편을 밝히다. 선근을 일으켜 증장시키는 방편이 다. 삼보(三寶)에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모든 부처를 찬 탄하고 기뻐하며 권청(勸請)하여 삼보를 애경(愛敬)하는 순수하 고 깊은 마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되어 무상의 도를 구하는 데 뜻 을 둔다. 또 불법승(佛法僧)의 힘의 보호를 받아 능히 업장(業障) 을 소멸하여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이는 법성의 어리석은 장애[癡障]을 여읜 것을 수순하기 때문이다.” 선근증장반편은 선한 마음의 뿌리를 일으켜 증장시키는 방편입니다. 삼보란 불 법승을 말합니다. 불이란 부처(진리를 깨친 사람)이고 법은 진리 그 자체를 말하고 승이란 진리를 따라 수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것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라고 해서 삼보라고 합니다. 삼보를 기뻐하고 찬탄하고 애경하는 순수하고 깊은 마 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됩니다. 진리를 믿으면 나도 부처가 되어 야겠다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불법승만 생각하게 되어도 업장 이 소멸 됩니다. 진리를 믿기만 해도 번뇌망상들, 아집과 같은 업장들이 소멸합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어두운 곳에 불을 켜 기만 해도 어둠이 없어집니다. 내 안에 선도 악도 있지만 내 속에 진리가 우뚝 서면 다른 것은 없어집니다. 불법승 삼보를 믿 고 진리를 생각하면 내 속의 오염된 것들은 그냥 없어집니다.
“대원평등방편을 밝히다.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교화 하고 제도하여 남음이 없고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도록 발원하는 것이다. 이는 법성의 단절됨이 없음을 수순하기 때문 이다. 법성이 광대하여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고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깨끗함과 물듦[彼此]를 생각하지 않고 구경에 적멸(寂 滅)하기 때문이다.” 대원평등방편은 모든 것들의 가치를 다같 이 중요하게 여기는 평등심에 이르는 것입니다. 진리를 행하고 진리에 나아가면 하나의 일심이 되는데 하나라는 것은 평등, 같 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볼 수 있다면(일심이 된다면) 부처의 세계에 드는 것입니다. 모두가 부처의 세계에 들도록 불 국토가 되도록 발원하는 것이 대원평등방편입니다. 유여열반( 有餘涅槃)은 육신을 갖고 찌거기가 남아있는 열반을 말합니다. 무여열반이란 찌거기가 없는 순수 그대로 열반에 들어간 상태 를 말합니다. 초기불교, 대승불교, 밀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육신을 가지고 부처가 되었기 때문에 유여 열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진리 그 자체를 상징 하는 비로자나불(바이로차나)을 진정한 무여열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전쟁을 하면 선봉대가 있습니다. 밀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선봉대이고 비로자나불이 본진이라고 말합니다. 밀교 는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추구합니다. 법성은 어느 한 순간도 끊 어짐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법성 은 광대하여 모든 중생에게 두루 평등하고 둘이 없습니다. 중생들은 법성의 광대함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밖에 없습니다. 중생 은 업장에 싸여있기 때문에 나와 남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업 을 내려놓고 깨트려버리면 원래 평등하고 하나였던 법성을 보 게 됩니다. 둘이 없고 깨끗하고 물듦에서도 떠나게 되는 본질의 법성을 보게 됩니다. 법성은 그냥 적멸한 열반적정의 세상입니 다. 이것은 나의 중생심을 걷어버리면 일심으로 뿌리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 게 되면 그대로 진리의 세계에 듭니다. 원래 적멸한 그 세계를 볼 수 있게 되고 그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_내생에 과보를 받는 업
부처님 제자 가운데 제바달다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었으나 평생 부처님을 시기질투하고 죽이려고 했습 니다. 그는 부처님을 죽이려고 벼랑 위에서 바위를 밀기도 했습 니다. 다행히 부처님은 피했지만 그 파편 중 하나가 튀어 부처님 발에 피를 냈습니다. 또 코끼리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부처님께 서 가는 길목에 풀어놓았습니다. 제바달다는 술취한 코끼리가 부처님을 죽이기를 바랐으나, 신기하게도 코끼리는 부처님 앞 에 와서는 얌전히 앉아버립니다.
또 그는 승가를 분열시키기도 했습니다. 승가를 분열시킨 후 무리를 이끌고 부처님 승단을 나갑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지 라 자신의 죄를 알고 참회하여 죄를 빌러 부처님께 향합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께로 가는 도중 죽고 맙 니다. 그는 사후 부처님을 죽이려한 업보로 무간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승가를 분열시킨 업보로 그가 겪은 지옥의 고통 은 격심하였고 지속되었습니다. 여기서 10만겁의 기간이 연장 되었습니다.
그럼 현생에 효과가 있는 업을 살펴봅시다. “어떤 업을 행하 기 전과 행하는 과정에서 유쾌하거나 불쾌하다면 금생에 과보 를 만드는 업의 결과물이다. 지계하거나 명상할 때 편안한 마음 이나 행복한 마음을 느끼고, 12연기에 따라 어떤 일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면 현생에 효과가 있는 업이 된다. 사성제에서 도 를 실천하고 나면 바로 다음 순간에 과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 이다.” 계를 지키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명상을 하면 편안하 고 행복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앞으로의 행위에도 영향 을 미칩니다. 이것은 현생의 삶을 안정되고 편안하게 하고 내생 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 은 단순히 내생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현생을 편하고 행복하 게 합니다. 현생이 극락이면 내생도 자연스럽게 극락이 됩니다. 현생이 지옥이라면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내생에 극락에 가기 힘 듭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 내가 살았던 삶의 연속입니다.
“소멸된 업. 아라한이 대열반을 성취할 때 업이 소멸한다. 내 생이나 그 다음 생에서 무르익을 수 있는, 셀 수도 없는 과거 생 에서 지은 무수한 해로운 업과 유익한 업들은 모두 소멸된 업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는 소멸되었다. 더 이상 새로운 존재는 없다. 미래의 존재에 대해 갈망하는 마음 이 없이 이것의 씨앗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아라한이 대열반 을 성취할 때는 부처가 된 때를 말합니다. 견성성불할 때 내 속에 들었던 업이 모두 소멸합니다. 이것은 어두운 방에 불을 켠 것과 같습니다. 어둠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지만 불을 켜면 어둠 이 없어집니다. 열반을 성취해서 자비광명이 되면 내 속의 악한 마음과 잘못된 것들이 그냥 없어집니다. 견성성불하고 부처가 된 순간 대자대비심 밖에 없습니다. 업에 의한 어떤 분별심도 일 어나지 않습니다. 대열반을 성취하면 나타나는 모든 것은 자비 밖에 없습니다. 내 안의 번뇌, 아집은 모두 멈춥니다.
암수술은 몸 안의 암세포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방사선치료 는 분열하는 암세포를 분열하지 못하게 가만히 있게 만듭니다. 있어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이 열반을 이루면 업이 있 더라도 이것이 작용을 못합니다. 작용을 못하니 과거가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고, 더 이상 새로운 존재가 없고 미래에 대한 갈 망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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