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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강 해행발심을 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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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7-12 11:47 조회 18,40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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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강


(3-3-2-2) 해행발심을 설하다 

(3-3-2-2-1) 심해가 현전하다 

[진제67] 해행발심(解行發心)은 알고 실천하는 발심으로 더욱 수승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보살은 처음 바른 신 심[正信]을 일으킨 후 제일 아승기겁이 다 할 때까지 바른 신심 이 이어지도록 하기 때문에 진여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나타나 며, 닦는 것이 모양을 여읜다. 

解行發心者,當知轉勝。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於第一阿僧 祇劫將欲滿故,於真如法中,深解現前,所修離相。 

(3-3-2-2-2) 수순하여 육바라밀을 닦다

법성의 자체는 인색하고 욕심 많음(慳貪)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을 수행하며, 

법성은 물들어 더럽혀짐이 없어 오욕락(五欲)의 허물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지계(持戒)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고뇌(苦)가 없어 성 내고 괴로워함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인욕(忍辱)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몸과 마음(身心)의 모양이 없어 게으름을 여읜 줄 알기 때 문에 정진(精進)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항상 안정하여 자체가 산란함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 에 수순하여 선정(禪定)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자체가 밝아서 무명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 여 반야(般若)바라밀을 수행한다. 

以知法性體無慳貪故,隨順修行檀波羅蜜;以知法性無染,離 五欲過故,隨順修行尸波羅蜜;以知法性無苦,離瞋惱故,隨 順修行羼提波羅蜜;以知法性無身心相,離懈怠故,隨順修行 毘梨耶波羅蜜;以知法性常定,體無亂故,隨順修行禪波羅 蜜;以知法性體明,離無明故,隨順修行般若波羅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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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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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심에는 신심으로 부처를 이루겠다는 신성취발심과 알고 행 하는 발심이 해행발심입니다. 알고 행한 후 회향하여 증명하는 발심이 증발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신성취발심까지 했습니 다. 오늘은 해행발심을 할 차례입니다.

  “해행발심(解行發心)을 설하다. 심해가 현전하다. 해행발심은 알고 실천하는 발심으로 더욱 수승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보살은 처음 바른 신심[正信]을 일으킨 후 제일 아승기겁이 다할 때까지 바른 신심이 이어지도록 하기 때문에 진여법에 대 한 깊은 이해가 나타나며, 닦는 것이 모양을 여의기 때문이다.” 심해는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본질은 아는 것입니다. 알면 실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아라고 하지 실 천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가 지극하면 그 한 가지 방향으로 흘 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 다.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것 밖에 없습니다. 어떻 게 부처가 되는지 알고 발심하면 실천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 렇게 되면 부처되기는 쉬워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까요? 내가 처음 바른 신심(부 처가 되겠다는 신심)을 일으킨 후에 아승기겁과 같은 아득한 세 월 동안 그 마음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여에 대한 깊은 이해가 나타나게 됩니다. 생각이 한 순간에 그쳐버리면 깊어지지 않지만, 오랜 세월 동안 발심하고 신심을 이어가면 이해 가 깊어집니다. 그러면 깊은 이해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승기겁이 나왔으므로 경전에 나오는 숫자들을 살펴보겠습 니다. “일십백천만억조경해자양구간정재극이 있습니다. 극은 10의 48승이고 그 위에 항하사가 있고 그 위에 아승기가 있는 데 아승기는 무수겁으로 10의 56승입니다. 그 위에는 나유타, 불가사의가 있습니다.” 흔히 조까지는 압니다. 10의 9승이 억 인데 극은 그에 비해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항하사는 10의 52승이고 나유타는 10의 60승이고 불가사의는 10의 64승입 니다. 경전에 나오는 불가사의는 말로만 불가사의가 아니라 실 제 숫자도 불가사의합니다. 항하사는 숫자지만 항하강은 갠지 스 강을 말합니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통계이고 확률입니다. 통계가 유효 한 것은 아보가도르 수와 같은 엄청나게 큰 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아보가도르 수는 6.023 곱하기 10의 23승입니다. 물 22.4L 속에 들어있는 물분자의 수가 6.023 곱하기 10의 23 승입니다. 한 컵의 물 500g 속에는 10의 21승개 정도 물분자가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동해 바다로 가서 바다에 붓고 배를 타고 태평양을 휘저었습니다. 그래서 하와이로 가서 물 500g을 다시 떴습니다. 그렇다면 동해 바다에서 부은 물 분자의 몇 개가 이 컵에 다시 들어왔을까요? 이것을 확률로 계산해보면 보면 최소 한 물분자 7, 8개 정도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 10의 23승 이란 어마어마한 숫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랙탈 이론, 전생, 윤회, 인과 법칙도 결국은 이런 어마어마한 숫자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것입니다. 무생물에 적용되는 인과법칙은 과학이 정확 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탄을 이 각도로 던지면 어 떤 곳에 떨어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물은 좀 다릅니다.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포탄은 무조건 날아 가지만 사람은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합니다. 생명은 가고 싶으 면 더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않거나 덜 갑니다. 인과율이 무생 물에게는 정확하게 적용되지만 생물에게는 다르게 적용됩니다. 무생물, 생물에게 모두 적용되는 인과율은 연기입니다. 만약 누 군가에게 돈을 준다면 웬만하면 다들 좋아할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정도는 다를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사람들의 따귀를 때린다면 다들 싫어할 것입니다. 다만 사람마다 기분 나 쁜 정도는 다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의지가 적용되어도 방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선과 악이 나옵니다. 만약 선한 행위를 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나고 악한 행위를 하면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대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의 바탕이 확률과 통계입니다. 숫자가 10의 23승을 넘어가면 모든 것이 확률적으 로 정확하게 똑같이 일어납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모든 이야 기를 보면 10의 23승을 초월한 시간이 나옵니다. 그러니 일어 날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우주 공간은 어마어마합니다. 공 간적으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고 숫자적으로도 경우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통계 적으로 확률적으로 정확하게 일어날 일들이 일어납니다.

  불교 경전에는 이외에도 다른 숫자들도 나옵니다. 진은 10의 -9승이고 애는 10의 -10승입니다. 모호는 10의 -13승이고 순식은 10의 -16승입니다. 찰나는 10의 -18승이고 허공은 10의 -20승이고 청정은 10의 -21승입니다. 진애는 이 작은 먼지와 같은 단위입니다. 먼지를 진애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10 의 -9승, -10승 정도로 작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모르는 것을 모호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작습니다. 그보 다 더 한 것이 순식입니다. 흔히 순식간에 무언가 지나가더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도 숫자입니다. 경전을 보면 의식이 나타났 다 사라지는 것이 찰나라고 말합니다. 그 찰나는 10의 -18승입 니다. 불성, 진여를 나타낼 때 허공에 비유합니다. 10의 -20승 이니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청정은 청정법신의 그 청정입 니다. 먼지 한 조각도 오염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만큼 미세 한 단계입니다. 결국 경전에 나오는 숫자가 변형되어서 우리 생 활 속에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진여에 대한 깊은 이해는 1 아승기겁 동안 알고 행했기 때문 이며 10회향의 단계에서 평등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행 한 것을 100년 200년 한 것이 아니라 10의 56승 년이나 한 것 입니다. 끝없이 긴 시간 동안 한 것입니다. 내 생각 속에서 끝없 이 꾸준히 진리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진여에 대한 생 각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려면 어떤 생각을 하루 종일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온갖 잡생각이 일어납니다. 한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진리로 내 모든 것을 채우면 다른 것이 못 들어옵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 면 회향의 단계까지 넘어갑니다. 차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회 향은 쉽게 말하면 봉사와 비슷합니다.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같이 잘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향입니다. 내가 텅 비 어 있으면 죽어도 회향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차 있으면 회향이 됩니다. 봉사라는 것은 내 속에서 넘쳐 흘러나는 것입니다. 아까 운 생각이 있으면 봉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대가를 바 라는 행위인 것입니다. 진정한 봉사는 대가를 원하지 않습니다.

  대학교에 가려면 커트라인이 있듯이 우리 인생도 각자 나름 의 점수가 있습니다. 그 점수를 보살지위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1등급부터 52등급까지 나누어져 있습니다. 부처님은 네 단계로 나누었지만 좀 더 세분화한 것입니다. 여기서 커트라인에 해당 하는 단계에 걸리면 아래로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도 합격한 것과 합격하지 못한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 어 십신의 단계 위로 가지 못하면 그 아래로 수시로 떨어지며 육 도 윤회를 반복합니다. 큰 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은 그 밑으로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보살지위에 가려면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가 필요합 니다. 가장 먼저 오는 십신은 진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원을 세 워 이루어지기 원하면 이루어지는 믿음입니다. 그 후 십주(십 해)가 옵니다. 주, 해는 이해하고 아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알면 자동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그 다음 행동하는 십행이 오 고 행동이 넘쳐나면 세상을 향해 회향을 합니다. 이것이 십회향 입니다. 그 후에 부처가 됩니다. 십지는 부처의 지위에 들어간 것입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해행발심은 십주와 십행의 단계에 해당합니다. 알고 행하는 발심입니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계속 하면 넘쳐 십회향으로 갑니다. 진여에 대한 깊은 이해가 긴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물들어 익은 것입니다. 속속들이 진여로 나 를 채워놓은 것입니다. 


  “수순하여 육바라밀을 닦다. 육바라밀이란 보시바라밀(dana paramita), 지계바라밀(sila), 인욕바라밀(ksanti), 정진바라밀 (vyayama),  선정바라밀(dyyana),  지혜바라밀(prajna)이다.” 육바라밀을 닦는 것이 해행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무엇을 행 하느냐 하면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지표가 되는 것이 초기불교에서는 팔정도였습니다. 부처 님께서는 나 이전이나 이후나 8정도를 떠나 진리를 이룰 수 없 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팔정도가 대승불교로 넘어 와서 육바라밀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꾸준히 행하면 부처되지 말라고 해도 부처가 됩니다.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법성의 자체는 인색하고 욕심 많음 [慳貪]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보시바라밀을 수 행하며 십행 중에서 법공을 얻었기 때문에 법계에 수순하여 육 도행을 닦는다.” 법이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6근과 6경의 화 합으로 이루어진 12처, 즉 이 세상 모든 것과 모든 작용을 말합 니다. 이 법의 형태가 법신이고 성품이 법성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의 형태, 몸은 자신이고 나의 성품은 자성입니다. 자성을 깨치 면 견성을 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고 완전한 부처가 되려면 법성 까지 깨쳐야 합니다. 이것이 성불입니다. 불성(佛性)은 자성과 법성을 합친 것입니다. 크게 보면 자성은 법성에 속합니다. 그래 서 법성은 불성과 같게 됩니다. 이 말은 법성 자체에 베품의 완성인 보시바라밀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거꾸로 보면 법성의 내용이 바로 육바라밀이 가득 채워진 것입니다. 중생은 아집과 무지 때문에 가득찬 보시를 모릅니다. 법성과 달리 중생은 아집 과 무지로 차 있기 때문에 인색하고 욕심이 많습니다. 베풀자고 하면서 못 도와주는 이유가 뭡니까? 자신의 욕심 때문에 못 도 와주는 것입니다. 법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흘러넘쳐야 진정으로 도와줄 수 있 습니다. 육도행이란 육도 윤회하는 가운데 진리를 행하는 행을 말합니다. 진리를 제대로 알면 법성 자체에 인색하고 욕심이 없 음을 압니다. 중생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인색함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어야 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법성은 물들어 더럽혀짐이 없어 오 욕(五慾)락의 허물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지계바 라밀을 수행한다.” 내가 본래 성품을 본다는 것은 물들어 더럽 혀지지 않은 것을 본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평생 물들어 더럽혀 진 것을 씁니다. 원래 법성, 자성은 물들어 더럽혀진 것이 없습 니다. 지계는 삶의 모습입니다. 계율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 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여에 가까이 가 는 방법입니다. 물들고 더럽혀지지 않으려면 지계를 해야 합니 다. 지계는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살생을 하 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자 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둘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셋 째가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이고, 넷째가 음행을 하지 않는 것 이고, 다섯째가 술을 먹지 말며 마약을 하지 말며 생각은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법성은 고뇌[苦]가 없어 성내고 괴 로워함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인욕바라밀을 수 행한다.” 참고 견딘다고 생각할 때는 힘듭니다. 하지만 자연스 럽게 있을 때는 그냥 참고 견뎌집니다.

  부처님 경전에 앙굴리말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앙굴리말 라는 용모가 잘 생기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젊은이였습니다. 그 는 브라만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스승의 아내가 그에게 흑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유혹해도 안되자 앙굴리말라가 자 신을 겁탈했다고 무고를 합니다. 분노한 스승은 그의 죄를 사하 기 위해 사람 100명을 죽이고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99명의 사람을 죽입 니다. 죽인 사람의 손가락을 주렁주렁 목에 걸고 1명만 더 죽이 면 모든 문제가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때 부처 님을 만납니다.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을 죽이려고 아무리 쫓아 가도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앙굴리말라가 지쳤을때 부처님 은 그에게 법을 설합니다. 원래 명석했던 앙굴리말라는 그 말을 듣고 진리를 깨우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 가를 깨닫고 부처님 법에 귀의합니다. 이후 앙굴리말라는 마을 에 탁발을 하러 나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아무도 밖 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앙굴리말라가 살 인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때리 고 했습니다. 매일 나가기만 하면 피를 철철 흘리며 돌아왔습니 다. 그런 앙굴리말라를 보고 부처님은 “너의 업보를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다. 이 세상에 인욕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고 말씀해주십니다. 앙굴리말라는 마을 사람들의 보복을 이겨 냈고 아무리 맞아도 얼굴에 분노와 원망은 없었고 평온함만 가 득했다고 합니다.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법성은 몸과 마음[身心]의 모양이 없어 게으름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정진바라밀을 수행한다.” 우리는 계속 편안하고 나태해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육신이 하자고 하는 대로 따라서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몸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매우 힘듭니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 해집니다. 몸과 마음의 모양이 없는 것을 알면 이런 게으름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끝없는 정진이 가능해집 니다. 누구나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서 정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부처님의 뛰어난 제자이자 수행자인 가섭 존자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 두 시간 이상 자지 않았고 허리를 바닥에 대지 않았 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법을 믿고 평생을 정진했습니다. 가섭은 분소의를 입고 다녔고 방에서 자지 않고 나무 밑에서 앉아 선정 에 들었습니다. 가섭이 나이가 들어서도 그러자 보다 못한 부처 님께서 이제는 좀 편안하게 지내도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 러자 가섭이 말합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고 싶습니 다. 이렇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 말을 듣고 부처님은 감탄하 며 가섭의 삶을 인정해주고 허락합니다. 부처님께서 허락해주 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가섭의 이런 삶이고 나머 지 하나는 사리불이 먼저 열반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알면 게을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끝없는 합 리화 때문에 게을러집니다. 젊어서 규칙적이었던 사람은 나이 가 들어서도 그 습관 때문에 규칙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렇지 못 한 사람은 쉽게 허물어져버립니다. 수행을 잘 했던 사람은 죽을 때도 편안하게 죽습니다. 하지만 수행을 제대로 못하거나 아예 못한 사람은 극도의 공포가 엄습합니다. 이 공포를 이기지 못합 니다. 삶 가운데 정신은 시간, 공간이 달라도 크게 다르지 않습 니다. 내가 어떤 시대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정신은 같습니 다. 공부하고 수행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내가 그런 마음을 먹 고 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지 볼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부처면 세상이 부처고 내가 지옥이면 세상이 지옥입니다.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법성은 항상 안정하여 자체가 산란 함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선정바라밀을 수행한 다.” 정진의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라 선정과 지혜입니다. 선정 이란 집중하여 들어가는 세계입니다. 끝없이 집중하다 보면 어 느 순간 선정에 듭니다. 삼매에 듭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은 선정입니다. 선정에 들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청정한 것이 보입니다. 극히 미세한 청정이 선정에 들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집중을 합니다. 내 생각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법성은 항상 안정하고 산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산란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내가 의식 하지 못한 생각들도 일어나지만 내가 의식하는 거친 생각도 일 어납니다. 안하려고 해도 일어나기 때문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 는 것입니다. 집중하다 보면 하나로 모아지는데 그 순간 선정에 들고 삼매에 듭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수행자들을 찾아다녔지만 이것이 아니 다라고 생각하여 혼자 6년 고행에 들어갑니다. 부처님은 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 어린 시절 기억 때 문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렸을 때 생노병사를 보시고, 농 부가 쟁기로 땅을 파자 벌레가 나오니 새가 그것을 낚아채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문제에 꽂혀 생각하시다 선정 에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기억을 떠올리시고 고행도 아 니라고 생각하시고 우유죽을 먹고 힘을 내어 나무 밑에 풀을 깔 고 앉아 선정에 듭니다. 그러고 일주일 만에 견성성불합니다. 우 리도 순간순간 선정에 들긴 합니다. 한 군데 깊이 몰두해 빠지다 보면 겪을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을 기억해내면 누구나 쉽게 선정 에 들 수 있습니다.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법성은 자체가 밝아서 무명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지혜[般若]바라밀을 수행한다.” 지혜란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분별하여 판단하 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하고 나타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 리는 왜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할까요? 견성하면 실천하지 않으 려고 해도 육바라밀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성 의 내용이 육바라밀이기 때문입니다. 법성이 이루고 있는 내용, 즉 나의 자성이 육바라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견성을 하고나 면 그냥 행하는 모든 것이 육바라밀인 것입니다. 그냥 그것들이 흘러넘칠 뿐입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


  난다는 부처님의 배다른 동생입니다. 그는 부처님의 동생이 었으나 성격이 짓궂었습니다. 원래는 출가하지 않으려고 했으 나 강제로 부처님께서 출가시켰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사가 뒤틀리고 불만에 가득 차 있었겠습니까. 어느 날 사리불 존자가 달빛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가 달빛에 빛 이 났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화가 난 난다는 사리불의 머리를 세게 때렸습니다. 사리불은 선정의 힘 때문에 무엇엔가 부딪히 는 미세한 힘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난다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았습니다. 

  나중에 부처님은 이 일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을 되풀이하여 반조해야 한 다. ‘오랜 세월 동안 내 마음은 탐욕과 성냄 그리고 무지에 의 해 오염되었다.’라고. 비구들이여, 마음이 오염되면 중생이 오 염된다.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이 청정하다.” 난다는 자기 속에 들어있는 성냄을 이기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부처님께서는 내 마음 속의 탐욕, 성냄, 무지에서 벗어나 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잔인한 새 사냥꾼의 이야기입니다. 뿌띠가따 띳사(부 처님 시대의 이름)는 가섭불 시대에서는 사꾸니까라는 새 잡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잔인하게도 새의 날개와 다리를 부러뜨 려 도망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느 생에서 그는 발우에 공양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자신도 아라한이 되기를 발원하였습니다. 그는 새를 괴롭힌 업보로 수 백만년 동안 지옥의 고통을 받다가 

그 공덕으로 부처님 때 인간의 몸을 받아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 습니다. 하지만 이런 복을 받았지만 뿌띠가따 띳사는 얼마 후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습니다. 죽기 전에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극 심한 고통 속에서 죽었습니다. 비록 아라한의 원을 세워 부처님 을 만나고 출가를 했지만 새를 괴롭힌 과보로 고통스럽게 죽은 것이었습니다.

  부처님 시대에 바꿀라 존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 정하게 계를 지키며 사무량심을 닦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만 겁 전에 그는 학식이 있는 브라만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미래 생 에도 자신의 행복이 이어지기를 발원하였습니다. 이번 생에도 항상 부지런하고 건전하게 살고 있었는데 마침 부처님이 출현 하셨고 그 때 법문을 듣고 불법에 귀의하였습니다. 하루는 배가 아픈 부처님께 약을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걸식을 나가 공양 받은 밥이 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꿀라의 약을 먹은 덕분 에 부처님은 복통에서 벗어나셨습니다. 바꿀라는 이후에 세세 생생 아프지 않는 건강한 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나중에 파두뭇따라 부처님 시대 때 함사와띠시에 재가 자로 살았는데 어느 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부처님의 제자로 살기를 발원하였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야무나 강에서 간호사 가 그를 씻기다가 잘못하여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물고기가 그를 잡아먹었지만 전생 선정의 힘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선정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보시의 조건은 덕이 있는 자가 바르게 얻어진 재물 을 덕이 있는 자에게 청정한 마음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 셨습니다. “계를 청정하게 지켜야 한다. 덕이 있는 사람에게 온 마음으로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재물 등을 제공하고 돌보 아 주어야 한다. 계속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수행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청정하게 계를 지켰기 때문에 계가 있는 사람의 소 원은 이루어진다.” ‘청정하게’라 함은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 고 내마음 속에 흘러넘치는 자비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속 에 있는 업은 뒤죽박죽되어 있습니다. 옷장을 정리해두면 입고 싶은 옷을 쉽게 꺼내 입을 수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 옷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져야 합니다. 기도란 내 속의 옷장을 정 리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두면 전생의 착한 업이 바로 꺼내지 기 때문에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 속에 선한 업이 쌓여있지 않으면 수백 생이 지나도 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가 되겠다는 원을 세우고 계속 선한 업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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