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강 증발심을 설하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7-12 11:53 조회 18,214 댓글 0본문
제24강
(3-3-2-3) 증발심을 설하다
(3-3-2-3-1) 증발심의 모든 지위를 밝히다
(3-3-2-3-1-1) 지위와 증의 뜻을 밝히다
[진제68] 증발심(證發心)이란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보살구경지 (菩薩究竟地)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이른 바 진여이다. 전식(轉識)에 의하여 경계라고 말하지만 이 증 득은 경계가 없는 것이며 오직 진여의 지혜[眞如智]뿐이므로 법 신(法身)이라 한다.
證發心者,從淨心地乃至菩薩究竟地,證何境界?所謂真如, 以依轉識說為境界,而此證者無有境界,唯真如智名為法身。
(3-3-2-3-1-2) 덕을 찬탄하다
보살이 일념(一念) 사이에 시방의 모든 세계에 이르러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법륜을 굴리기를 청하니, 그것은 오직 중생을 도에 이르도록 인도(開導)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이지 문자에 의 지하지 않는다.
혹은 지위(地)를 초월하여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을 보이 니 이는 겁약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혹은 내가 한량없는 아승기겁에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설하였 으니 이는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수한 방편의 불가사의함을 보이지만 실제로 보살은 종성(種性)과 근기(根)가 평등하고 발심이 평등하며 증득한 것도 평등하여 초과하는 법이 없으니, 모든 보살이 다 삼 아승기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의 세계와 같지 않으며 보는 바와 듣는 바의 근기(根: 능력)와 욕망(欲: 희망)과 성질이 달라서 행하는 것도 차별이 있 는 것이다.
是菩薩於一念頃能至十方無餘世界,供養諸佛、請轉法輪,唯 為開導利益眾生。不依文字,或示超地速成正覺,以為怯弱眾 生故;或說我於無量阿僧祇劫當成佛道,以為懈慢眾生故。能 示如是無數方便不可思議,而實菩薩種性根等,發心則等,所 證亦等,無有超過之法。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祇劫故,但隨 眾生世界不同,所見所聞根欲性異,故示所行亦有差別。
(3-3-2-3-1-3) 삼종심의 미세한 상을 밝히다
보살의 발심한 모양(發心相)이란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형상 이 있다.
又是菩薩發心相者,有三種心微細之相。云何為三?
(3-3-2-3-1-31) 진심을 밝히다
첫째는 진심(眞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一者、真心,無分別故。
(3-3-2-3-1-32) 방편심을 밝히다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니 자연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되 게 하기 때문이다.
二者、方便心,自然遍行,利益眾生故。
(3-3-2-3-1-33) 업식심을 밝히다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니 미세하게 생멸하기 때문이다. 三者、業識心,微細起滅故。
(3-3-2-3-2) 제십지에서 이룬 덕을 밝히다
(3-3-2-3-2-1) 훌륭한 덕을 바로 밝히다
[진제69] 또 보살은 공덕이 원만함을 이루어서 색구경처(色究竟 處)에서 모든 세간 중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니, 이는 일념과 상 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을 일체종지(一切種 智)라 하며 자연히 불가사의한 업이 있어 시방에 나타내어 중생 을 이익 되게 한다.
又是菩薩功德成滿,於色究竟處示一切世間最高大身。謂以一 念相應慧,無明頓盡,名一切種智,自然而有不思議業,能現 十方利益眾生。」
(3-3-2-3-2-2) 여래의 일체종지를 밝히다
[진제70]
묻기를
"허공이 무변하기 때문에 세계가 무변하며 세계가 무변하기 때 문에 중생이 무변하며 중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심행(心行)의 차 별도 또한 무변하니, 이와 같은 경계는 한계를 지을 수 없어서 알 기 어렵다.
만약 무명이 끊어지면 마음의 생각[心想]이 없어지는데 어떻게 알아서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말하는가?"
답하기를
"일체 경계는 본래 일심(一心)이다. 상념을 떠나 있으나, 중생이 망령되이 경계를 보는 까닭으로 마음에 분제가 있게 되니 망령 되이 상념을 일으켜서 법성에 들어맞지 않기에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망견과 망상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않는 것 이 없으며,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이는 모든 법의 본성인 것이다.
그 자체가 모든 허망한 법을 환하게 비추어 큰 지혜[大智]의 작 용이 있어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이 응당 알아야 할 바를 따 라서 여러 가지 법의(法義)를 모두 열어 보이기 때문에 일체종지 라 이름한다."
問曰:「虛空無邊故世界無邊,世界無邊故眾生無邊,眾生無 邊故心行差別亦復無邊。如是境界不可分齊,難知難解。若無 明斷無有心想,云何能了,名一切種智?」
答曰:「一切境界,本來一心離於想念,以眾生妄見境界故心 有分齊,以妄起想念不稱法性故不能決了。諸佛如來離於見想 無所不遍,心真實故,即是諸法之性。自體顯照一切妄法,有 大智用無量方便,隨諸眾生所應得解,皆能開示種種法義,是 故得名一切種智。」
(3-3-2-3-2-3) 법신의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을 밝히다 또 묻기를
"만약 부처에게 자연업(自然業)이 있어서 모든 곳에 나타나 중생 을 이익 되게 한다면 모든 중생이 부처의 몸을 보거나, 혹은 신비 한 변화를 보거나, 혹은 그 설법을 듣는다면 이익을 얻을 것인데 어찌하여 세간에는 많은 이가 볼 수 없는가?
답하기를
"부처와 여래의 법신이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며 마음에 조작(作意: 의식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에 '자연(自然)'이라 한 것 이니 다만 중생심에 의하여 나타난다.
중생심(衆生心)이란 마치 거울과 같으니, 거울에 때가 있으면, 색상(色傷)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중생심에도 때가 있으면 법 신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又問曰:「若諸佛有自然業,能現一切處利益眾生者,一切眾 生若見其身、若覩神變、若聞其說,無不得利。云何世間多不 能見?」
答曰:「諸佛如來法身平等遍一切處,無有作意故。而說自 然,但依眾生心現。眾生心者猶如於鏡,鏡若有垢,色像不 現。如是眾生心若有垢,法身不現故。」
----------------------------
대승기신론 강설_24
----------------------------
내가 부처가 되어야겠다고 발심하는 것이 신성취발심이고 발 심한 뜻을 알고 수행해가는 것이 해행발심이고 그것이 성취되 어 이루어진 상태가 증발심입니다. 증발심은 부처가 된 상태이 기 때문에 지위가 나옵니다.
“증발심을 설하다. 지위와 증의 뜻을 밝히다. 발심을 증득 [證發心]한 자는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 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이른 바 진여를 증득 한다. 전식(轉識)에 의하여 경계라고 말하지만 이 증득은 경계 가 없는 것이며 오직 진여의 지혜[眞如智]뿐이므로 법신(法身)이 라 한다.” 발심을 증득했다는 것은 부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부처가 되더라도 증득한 단계가 있습니다. 초지보살도 있고 십 지보살도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경계를 증득했는가 하고 말하 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증득해야 하는 것은 진여입니다. 우리 가 갖고 있는 본래 성품입니다.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오염된 것 을 나인 줄 착각하고 써먹습니다. 진여는 물들기 전의 것입니다.
전식이 나오는데 전식은 제8아뢰야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 승기신론에서는 제8식 아뢰야식을 업식(업상), 전식(능견상), 현식(경계상)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방울(첫 하나의 생각)이 떨어지면 업식, 업상을 만듭니다. 이것이 전식과 현식으로 확대되는데 전식은 능견상이라고도 합니다. 능은 주 체를 의미하고 견은 내가 일으키는 생각을 의미합니다. 전식이 구체화되면 현식 경계상이 됩니다. 현식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 제7식입니다. 예를 들어 현식이 빵틀이라면 제7식은 그 틀에서 만들어져 나온 빵입니다. 업식이 있는 것이 능과 경계가 되는데 능견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밖으로 나가면 경계가 됩니다. 즉 전식에서 현식으로 나가면 경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 이 제7식에 투영되어 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 증득은 경계가 없다’는 말은 제 8아뢰야식에는 진여를 얻었기 때문에 경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경계라는 말도 이해하기 쉽도록 한 것이지 진여에 경계가 있겠 습니까. 진여에는 진여의 지혜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견성을 한 상태를 법신이라고 합니다.
경계가 없다는 말은 능(주체, 전식), 소(객체, 현식)가 없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응당히 심소에 머무르지 않고 생각을 일 으킨다.’는 말입니다. 소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말은 견성한 상 태를 가리킵니다. 앞서 업식, 전식, 현식을 말했는데 다르게 심 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업식은 업식심 즉 아뢰야식을 가리키 기도 합니다. 전식은 방편심, 후득지를 가리키며 진심은 현식, 무분별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지’라고 하는 것은 지혜를 구 체적으로 나눈 것입니다. 유식에서는 지혜를 가행지, 근본무분 별지, 후득청정세간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행지는 진실, 진 리, 진여를 깨닫기까지의 수행 단계에서 적용되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로써 서서히 자신의 인격을 높여 진리 인식으로 한걸음 다가가게 됩니다. 공부, 수행을 하면서 얻어지는 지혜가 가행지인 것입니다. 근본무분별지는 진리 자체를 보는 지혜입니다. 그 것은 모든 지혜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근본이라 하며 주관과 객 관의 대립이 없는 일원적 인식, 환언하면 진리와 합일된 지혜이 기 때문에 무분별지라고 합니다. 유식적으로 말하면 진여에 통 달하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지혜가 샘솟는 샘물입니다. 견성을 하면 끝없는 지혜가 생깁니다. 지혜가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견성을 한 상태에서의 지혜입니다. 후득청정세간지 즉 후득지는 근본무분별지 뒤에 얻어지는 청정 한 지혜입니다. 현상적 세계인 세간을 다시 바라보는 지혜입니 다. 완성된 것을 본 뒤에 다른 것에 의한 것을 보는 지혜입니다. 지혜를 얻고 그 지혜로 행위하고 세상으로 환원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보시하는 것입니다.
앞서 증발심에서 지위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그 지위들에 대 해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지위를 네 가지로 나누셨고 화엄경에서 10개로 나누어집니다. 여기서 말 할 것은 화엄경의 것입니다. 첫 번째 환희지(歡喜地)란 정심지 (淨心地)라고도 하며 진실한 희열의 경지입니다. 오염에서 벗어 났기 때문에 깨끗한 마음 밖에 없습니다. 끝없는 희열이 일어납 니다. 중생은 환희가 짧게 일어나지만 여기서는 환희가 끝없이 일어납니다. 물들어 있을 때는 너와 나가 분별되어 있기 때문에 이기적이게 됩니다. 하지만 경계가 없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 라집니다.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생명 있는 모든 것에게 자애,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없는 환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구지(離垢地)는 구계지(具戒地)라고도 하며 의혹을 끊는 깨끗한 경지입니다.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떠나는 경지입 니다. 구계지에서는 계가 저절로 갖추어집니다. 세상에 어떤 행 위를 하더라도 파계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여섯 번째 현전지까 지 이어집니다. 세 번째 발광지(發光地)는 지혜가 빛나는 경지 이고 네 번째 염혜지(焰慧地)는 지혜가 치성한 경지입니다. 다섯 번째 난승지(難勝地)는 지혜와 지식이 조화를 이룬 경지이고 여 섯 번째 현전지(現前地)는 참 마음의 모습을 나타낸 경지입니다. 여기까지 구계지입니다.
구계지를 넘어서면 일곱 번째 원행지(遠行地)에 이릅니다. 원 행지는 무상방편지 즉 모든 방편에 능숙한 경지라고도 합니다. 원행지에 이르면 진리의 세계로 직접 들어간 것입니다. 세상에 끝없이 회향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여덟 번째는 부동지(不動 地)입니다. 다시는 동요되지 않는 경지입니다. 대상 등에 동요 됨이 없는 색자재지라고도 합니다. 부동지의 경지까지 간 사람 은 지구상에 얼마 안 됩니다. 원효가 이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 니다. 원효의 위대한 점은 중국에서 배워와서 깨우친 것이 아니 라 이 땅에서 직접 깨우친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홉 번째 선혜지(善彗地)에 이릅니다. 지혜로써 옳게 선도하는 경지 입니다. 자기 마음에 걸림이 없는 심자재지라고도 합니다. 마지 막 법운지(法雲地)는 진리가 구름처럼 된 경지입니다. 이것은 보 살로서의 수행을 다 한 여래 경지로 보살, 여래지라고도 합니다.
“덕을 찬탄하다. 보살이 일념(一念) 사이에 시방의 모든 세계 에 이르러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법륜을 굴리기를 청하니, 그것은 오직 중생을 도에 이르도록 인도[開導]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 한 것이지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 지위에 오른 부처가 된 그 덕을 찬탄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일념으로 부처에게 공양을 올 리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 니다. 그런 마음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끝없는 자비심이기도 합 니다. 이런 마음을 경험해봐야 합니다.
“덕을 찬탄하다. 혹은 지위(地位)를 초월하여 빨리 정각(正覺) 을 이루는 것을 보이니 이는 겁약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 며, 혹은 내가 한량없는 아승기겁에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설 하였으니 이는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위를 초월하여 빠르게 정각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비겁하고 나약한 중생을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아승기 겁과 같은 어마어마한 시간에 걸쳐 불도를 이룬다고 말한 것도 게으르고 교만한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덕을 찬탄하다. 무수한 방편의 불가사의함을 보이지만 실제 로 보살은 종성(種性)과 근기(根)가 평등하고 발심이 평등하며 증득한 것도 평등하여 초과하는 법이 없으니, 모든 보살이 다 삼 아승기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우치면 모든 것이 평등하게 다가옵니다. 하나의 본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본성에 서는 잘나고 못나고 더하고 못하고 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중 생이 평등합니다. 하지만 깨우치지 못한 일반 중생의 마음은 차 별이 있습니다. 여기서 부처가 되려면 길고 긴 시간 동안 수행 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덕을 찬탄하다. 단지 중생의 세계와 같지 않으며 보는 바와
듣는 바의 근기[根: 능력]와 욕망[欲: 희망]과 성질이 달라서 행 하는 것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원래 평등하지만 중생은 업에 의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차별이 있습니다. 차별이 있는 중생 에게 평등이란 중생에 맞게끔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 고 듣는 바의 근기와 욕망과 성질이 달라서 행하는 것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는 말도 그런 것입니다.
“삼종심의 미세한 상을 밝히다. 진심(眞心)은 분별이 없기 때 문이다. 방편심은 자연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 문이다. 업식심은 미세하게 생멸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6추 3 세가 나왔습니다. 6추는 6식과 7식의 영역을 말하고 3세는 제8 식 아뢰야식의 영역을 말한 것입니다. 미세한 것이란 우리가 아 무리 알려고 해도 모르는 것입니다. 견성해야 비로소 압니다. 3 세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 삼종심입니다. 근본적으로 제8아뢰 야식은 미세합니다. 움직이더라도 그 움직임을 우리는 모릅니 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거친 것’입니다. 제8식 은 견성을 해야 볼 수 있는 미세한 것입니다. 거친 것과 미세한 것 모두를 없애야 본래의 것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흙탕물이 있 는데 가라앉히면 물이 맑게 됩니다. 가라앉히는 것은 선정에 들 고 삼매에 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이 맑게 되면 제8 아뢰야식이 보이는 단계입니다. 안의 미세한 움직임, 생물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미세한 생멸을 감지하게 되면 안보이던 것 을 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집니다.
“제십지에서 이룬 덕을 밝히다. 훌륭한 덕을 바로 밝히다. 보 살은 공덕이 원만함을 이루어서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 중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니, 이는 일념과 상응하는 지혜 로써 무명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며 자연히 불가사의한 업이 있어 시방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제십지는 앞에서 나온 보살 10지 가운데 법운지에 해당 합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끝없는 무명 속에 갇혀 있습니다. 화 두를 보면 ‘근본 무명을 타파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명을 타파하는 것은 진여를 보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 밝은 불을 환 하게 킨 것과 같습니다. 일체종지란 모든 존재의 참모습을 보는 지혜인데 무명을 없애면 이 지혜가 열립니다. 무명이 없어지면 아애, 아집이 깨트려진 상태이기 때문에 자비 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이익되게 하는 것입니다. 자비 밖에 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덕이 원만함을 이루어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 은 제십지에서 지위가 성취된 것을 말합니다. 완전한 부처가 되 었기 때문에 공덕이 원만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색구경처에서 모든 세간 중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니, 이는 일념과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을 일체종지라 하며’라는 말은 보신불의 타수용신을 나타낸 것입니다. 타수용신은 깨달 음의 희열을 중생에게 나누어주고 함께하는 부처를 말합니다.
“여래의 일체종지를 밝히다. 묻기를 ‘허공이 무변하기 때문에 세계가 무변하며 세계가 무변하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며 중 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심행(心行)의 차별도 또한 무변하니, 이와 같은 경계는 한계를 지을 수 없어서 알기 어렵다. 만약 무명이 끊어지면 마음의 생각[心想]이 없어지는데 어떻게 알아서 일체
종지(一切種智)라고 말하는가?’ 답하기를 ‘일체 경계는 본래 일 심(一心)이다. 상념을 떠나 있으나, 중생이 망령되어 경계를 보 는 까닭으로 마음에 차별상[分濟]이 있게 되니 망령되이 상념을 일으켜서 법성에 들어 맞지 않기에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망견과 망상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않는 것 이 없으며,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이는 모든 법의 본성인 것이다.’” 일체종지는 무명을 타파하면 나타나는 여래의 지혜입 니다. 이 세상 모든 지혜의 근원입니다. 질문의 내용은 무명이 끊어지면 마음속의 생각이 없어지는데, 즉 아무 것도 없는데 어 떻게 일체종지를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답을 봅시다. 다양하게 있는 것 같지만 원래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지만 업에 의해 각 양각색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성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즉 답에서 말하는 것은 무명이 끊어지면 망견 이나 망상은 끊어지지만 일심은 여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래서 일체종지를 아는 것입니다.
의심을 없애야 하는데, 의심을 없애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도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앞선 질문에 대입하여 말해보면 ‘일체 경계는 상념을 떠나 본래 일심(一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른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것입니다. 이 것도 앞선 질문에 대해 말해보면 ‘중생이 망령되이 경계를 보는 까닭으로 마음에 차별상[分濟]이 있게 되니 망령되이 상념을 일 으켜서 법성에 들어맞지 않기에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옳은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 도 앞선 질문에서 보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망견과 망상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이는 모든 법의 본성인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선 질 문에서 무명을 타파하면 어떻게 일체종지를 아는가라고 했는데 이것도 의심입니다. 그 의심을 없애기 위해 도리를 세우고 잘못 된 것에 대해 듣고 옳은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일체종지. 그 자체가 모든 허망한 법을 환하게 비추어 큰 지 혜[大智]의 작용이 있어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이 응당 알 아야할 바를 따라서 여러 가지 법의(法義)를 모두 열어 보이기 때문에 일체종지라 이름한다.” 이것이 일체종지를 설명한 것입 니다.
“불심은 모든 망법의 체이며 모든 망법은 불심의 상이다. 그 래서 자체가 모든 허망한 법을 환하게 비추어 나타낸 것이다.” 앞서 체상용에 대해 말했습니다. 모든 존재에는 본체가 있고 모 양이 있고 작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견성하지 못할 때 일어나 는 모든 현상도 알고 보면 그 본체는 불심이라는 것입니다. 그 리고 모든 망법은 오염되기는 했지만 불심에서 나온 모양이라 는 것입니다.
“법신의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을 밝히다. 또 묻기를 ‘만약 부처에게 자연업(自然業)이 있어서 모든 곳에 나타나 중생을 이 익되게 한다면 모든 중생이 부처의 몸을 보거나, 혹은 신비한 변 화를 보거나, 혹은 그 설법을 듣는다면 이익을 얻을 것인데 어찌 하여 세간에는 많은 이가 볼 수 없는가?’ 답하기를 ‘부처와 여래 의 법신이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며 마음에 조작[作意: 의식 적인 노력]이 없기 때문에 자연(自然)이라 한 것이며 다만 중생
심에 의하여 나타난다. 중생심(衆生心)이란 마치 거울과 같으니, 거울에 때가 있으면, 색상(色像)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중생 심에도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질문의 내 용은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서 끝없는 자비를 베푸는데 왜 우리 눈에는 안보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에 가려서 좋은 것만 보니까 진리를 못 보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부처가 현현해서 끝없는 자비를 베풀고 있지만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 음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에 때가 묻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 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에도 때가 있으면 법신, 부처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때가 무명인 것입니다.
‘거울에 때가 있으면 색상(色像)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중 생심에도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법신은 본 바탕과 같고 화신은 영상과 같은 것이다.’ 법신, 보신, 화신이 있 습니다. 법신은 본질이고 보신은 모양이고 화신은 작용입니다. ‘중생심에도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능견의 본 바탕에 의거하기 때문에’ 내가 주체인 능견의 본 바탕에 의 거하기 때문에 법신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끝없는 법신이 들어 있지만 우리는 못 보고 못 나타내는 것입니다. 때만 없애면 법 신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_법안스님 이야기
오늘은 법안 스님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법안 스님은 유명 한 일타 스님의 외삼촌으로 속세의 이름은 김학남이었고 1902 년부터 1955년까지 54년의 삶을 살았습니다. 1924년에 출가했고 만공 스님의 주선으로 혜월 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혜 월 스님은 만공 스님과 함께 경허 스님의 제자로 있었던 분입니 다. 오대산, 금강산, 천성산, 지리산 등을 찾아다니며 수행정진 을 했는데 오직 누더기 한 벌로 다니셨습니다. 35세 때 백련암 에 들어가며 견성할 때까지 지장기도를 계속할 것이라고 했습 니다. 그리고나서 5년이 지나자 4일씩 기도선정에 드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9년째가 되자 “허공골(虛空骨)을 보았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선시를 한 수 읊으셨습니다.
허공골 중의 유상무상이여
상 속에는 부처가 없고 부처 속에는 상이 없다 선정에 들다가 견성하시고 깨우치신 것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