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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정훈습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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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6,740회 작성일 21-07-12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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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3-1-1-3-5-41) 정훈습을 밝히다 

[진제47] 어떻게 훈습하여 청정한 법을 일으켜 끊어지지 않게 하 는가? 이것은 진여법이 있기 때문에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 이며 훈습하는 인연의 힘에 의지하여 곧 허망한 마음으로 하여 금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를 좋아하게 한다. 허망한 마음에는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 구하기를 좋아하는 인연 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본성을 믿고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으로 앞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여의 는 법을 수행한다. 

눈앞에 나타나는 경계가 없음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여러 가 지 방편으로 수순행(隨順行)을 일으켜 취착하지도 않으며 잘못 생각하지도 않으므로 오랫동안 훈습한 힘에 의해 무명이 곧 멸 하게 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일 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따라서 멸한다. 인과 연이 다 멸하기 때문에 마음의 모양이 다 없어지니, 열반을 얻게 되어 자연업(自 然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云何熏習起淨法不斷?所謂以有真如法故能熏習無明,以熏 習因緣力故,則令妄心厭生死苦、樂求涅槃。以此妄心有厭求 因緣故,即熏習真如。自信己性,知心妄動無前境界,修遠離 法,以如實知無前境界故,種種方便起隨順行,不取不念,乃至久遠熏習力故,無明則滅。以無明滅故心無有起,以無起故 境界隨滅,以因緣俱滅故心相皆盡,名得涅槃成自然業。 

(3-1-1-3-5-42) 망심훈습을 밝히다 

[진제48] 망심훈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다. 妄心熏習義有二種。云何為二? 

(3-1-1-3-5-421) 분별사식훈습을 밝히다 

 첫째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인( 二乘人)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힘이 닿는 대로 조금씩 무 상도(無上道)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一者、分別事識熏習,依諸凡夫二乘人等,厭生死苦,隨力所 能,以漸趣向無上道故。

(3-1-1-3-5-422) 의훈습을 밝히다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니, 모든 보살이 발심하고 용맹하여 속 히 열반에 나아가는 까닭이다. 

二者、意熏習,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槃故。 

(3-1-1-3-5-43) 진여훈습을 밝히다

[진제49] 진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체상훈습 (自體相熏習)이며, 둘째는 용훈습(用熏習)이다. 

真如熏習義有二種。云何為二?一者、自體相熏習,二者、用 熏習。

(3-1-1-3-5-431) 자체상훈습을 밝히다

자체상훈습이란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무루법(無漏法)을 갖추고 부사의한 업[不思議業]을 갖추고 있어서 경계의 성품(境 界性)을 짓는다. 

이 두 가지의 뜻에 의지하여 항상 훈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중 생은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며 스스로 자기의 몸 에 진여법이 있는 줄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묻기를, "만일 이러한 뜻이라면 모든 중생에게 진여가 있어서 똑 같이 훈습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한량없는 앞뒤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모두 동시에 스스로 진여법이 있음을 알고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열반에 평등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답하기를, "진여는 본래 하나이지만 한량없고 가이없는 무명이 있어서,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차별되어 두텁고 얇음이 같지 않 다. 그러므로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번뇌(煩惱)가 무명에 의지하 여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과 아애의 오염된 번뇌[我見愛染煩惱] 가 무명에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일체의 번뇌가 무명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어서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이 있는 것 이며, 오직 여래만이 이것을 알 수 있다. 

또 모든 불법에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니, 인연이 구족하여 야 법이 성취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무 가운데 불의 성질은 불의 정인(正因)이지만 만약 사 람이 알지 못하여 방편을 빌리지 못하면 스스로 나무를 태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 정인(正因)의 훈습하는 힘이 있지만 부처나 보 살이나 선지식 등을 만나서 그들로 연(緣)을 삼지 못한다면 능히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외연( 外緣)의 힘은 있으나 안으로 청정한 법이 아직 훈습하는 힘이 없는 자는 구경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를 좋아 할 수가 없다. 

만약 인연이 구족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부처와 보살의 자비와 원력으로 보호하기 때문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음을 믿어 선근을 닦아 익힌 다. 수행으로 선근이 성숙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의 가르 침과 이익됨과 기뻐함을 만나서 열반의 도를 향한다."

自體相熏習者,從無始世來,具無漏法備,有不思議業,作境 界之性。依此二義恒常熏習,以有力故,能令眾生厭生死苦、 樂求涅槃,自信己身有真如法,發心修行。

問曰:「若如是義者,一切眾生悉有真如,等皆熏習,云何有 信、無信,無量前後差別?皆應一時自知有真如法,勤修方便 等入涅槃。」

答曰:「真如本一,而有無量無邊無明,從本已來自性差別厚 薄不同故。過恒沙等上煩惱依無明起差別,我見愛染煩惱依無 明起差別。如是一切煩惱,依於無明所起,前後無量差別,唯 如來能知故。又諸佛法有因有緣,因緣具足乃得成辦。如木中 火性是火正因,若無人知,不假方便能自燒木,無有是處。眾 生亦爾,雖有正因熏習之力,若不值遇諸佛菩薩善知識等以之 為緣,能自斷煩惱入涅槃者,則無是處。若雖有外緣之力,而 內淨法未有熏習力者,亦不能究竟厭生死苦、樂求涅槃。若因 緣具足者,所謂自有熏習之力,又為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 能起厭苦之心,信有涅槃,修習善根。以修善根成熟故,則值 諸佛菩薩示教利喜,乃能進趣,向涅槃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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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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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이 유사성을 되풀이하는 프랙탈 이론은 훈습과 유사합니 다. 오염된 것을 끝도 없이 훈습하는 것이 염훈습인데 이것은 지 난번에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정훈습인데 깨달은 사람이 나 아가는 방법입니다. 염훈습은 일반 중생들의 삶이라면 정훈습 은 깨달은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정훈습을 밝히다. 어떻게 훈습하여 청정한 법을 일으켜 끊어 지지 않게 하는가? 이것은 진여법이 있기 때문에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이며, 훈습하는 인연의 힘에 의지하여 곧 허망한 마 음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를 좋 아하게 한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일으키는 행위 와 생각은 염훈습을 증장시켜 나갑니다. 하지만 깨닫고 일으키 는 행위와 생각은 정훈습을 증장시켜 나갑니다. 진여를 증장시 켜 가는 것입니다. 염훈습은 무명이 진여를 훈습한다면 정훈습 은 진여가 무명을 훈습합니다.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니까 진여 밖에 없습니다. 원래 다 진여입니다. 본래 성품이 무명에 오염 되는 것이 염훈습입니다. 그래서 오염된 것을 내 것이라고 씁니 다. 그런데 본래 성품을 보고 제8 아뢰야식을 보면 오염되기 전 의 깨끗한 것이 훈습됩니다. 제7식을 거치지 않고 제8식으로부 터 오염되기 전의 것이 올라오면 항상 진여의 생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견성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 견성 후 보림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무명에 의해 본성이 오염된 상태가 ‘나’인 것으로 착 각합니다. 하지만 정훈습에서는 진여법이 무명을 훈습하여 무 명이 점점 없어집니다. 진여에 훈습된 사람들은 공부하기를 좋 아하고 수행하기를 좋아하고 절제된 삶을 좋아하게 됩니다. 하 지만 진여에 훈습되지 않으면 자극, 느낌(수)에 쉽게 따라가 버 립니다. 이것이 무명에 오염된 상태입니다.

  “정훈습을 밝히다. 허망한 마음에는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 구 하기를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 로 본성을 믿고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으로 앞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수행한다.” 눈 앞에 생기는 망경 계가 없음을 알고 물질로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이 헛것임 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수행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 훈습입니다. 점점 내 몸을 진리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진 리, 진여를 알고나면 끊임없이 정훈습을 합니다. 공부하고 수행 하기 좋아하는 인연이 생기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공 부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내 속에 정훈습을 하는 마음이 자 리잡고 있으면 진여는 항상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번 뇌망상을 안하게 됩니다. 항상 여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줍 니다. 공부에 커트라인이 있듯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끊임없 이 공부하며 정훈습을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의 삶을 끝없이 되풀이 합니다. 커트라인을 넘어 진여의 훈 습이 되면 진리에 대한 믿음이 생겨 세세생생 공부와 멀어지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커트라인을 넘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 중생은 염훈습에 오염되어 있어 느낌 따라 탐진치가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엄청 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야든지 죽어라고 노력하면 지금 의 단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갖고 있는 업 에서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지금의 그 릇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의 단계에서 한 단계 올라가면 세상 을 인식하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생이든 공부를 하지 않고는 잘 살 수 없게 됩니다. 무언가 성취하려면 목숨 걸고 공 부를 하는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정훈습을 밝히다. 눈 앞에 나타나는 경계가 없음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수순행(隨順行)을 일으켜 취착 하지도 않으며 잘못 생각하지도 않으므로 오랫동안 훈습한 힘 에 의해 무명이 곧 멸하게 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멸한다. 인과 연이 다 멸하 기 때문에 마음의 모양이 없어지니 열반을 얻게 되어 자연업(自 然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것, 예쁜 것, 맛있는 것에 이끌립니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으면 이런 것에 물들지 않 게 됩니다. 오랫동안 진여 쪽으로 훈습하면 무명이 결국 멸하게 됩니다. 화두, 참선의 최종 목표가 무명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진여에 훈습한다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무명 타파입니다. 참선, 수행, 경전을 보는 것이 결국 무명 타파의 방법입니다. 앞에 설 명이 바로 정훈습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처음 정훈습이 이루 어져 최고 목적지 열반에까지 이르는 과정인 것입니다.

  허망한 마음에는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 구하기를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본성을 믿고(십신 위 중의 신을 밝힘- 신, 해, 행, 증, 과)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 는 것으로 앞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수행합니 다.(삼현위 중에서 수행을 나타냄- 삼현, 사선근, 견도, 수도, 무 학도) 눈 앞에 나타나는 경계가 없음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초 지의 견도에서 유식관이 이루어짐) 여러 가지 방편으로 수순행( 隨順行)을 일으켜 취착하지도 않으며 잘못 생각하지도 않으므로 오랫동안 훈습한 힘에 의해(십지의 수도위에서 만행을 닦음) 무 명이 멸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따라서 멸합니다.(과지에서 열반의 증득) 정훈습 의 단계를 이렇게 나타낸 것입니다. 십신위 중의 신이란 믿음입 니다. 우리가 공부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 다. 어떤 공부든 시작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공부를 아무 리 해도 잘 할 수 없습니다. 학교 공부는 정해진 수업을 듣거나 학점을 채우면 됩니다. 하지만 마음 공부는 먼저 믿음이 서 있 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절 에 가면 간혹 삼천배를 시킵니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하기 전과 한 후가 전혀 다릅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절에 가서 처음으로 천 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 야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런 믿음을 근본으로부터 느끼 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효과도 나이가 적을 수록 절실하게 와닿습니다. 지금 5,60대에는 오염이 많이 되어서 만 배를 해도 10대 때의 천 배만 못합니다. 스님들이 어렸을 때 출가하는 것 도 이런 이유와 같습니다. 부처님과 같은 큰 깨달음을 위해서는어렸을 때 동진출가가 좋은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면 수행을 합니다. 삼현, 사선근, 견도, 수도, 무 학도는 구사론의 수행단계입니다. 수행하는 과정은 삼현, 사선 근, 견도까지가 해당합니다. 그 다음 눈 앞에 나타나는 경계가 없음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데 이것이 초지 견도입니다. 그렇게 수행한 후 십지에 도달하게 되면 방편을 통해 깨달은 마음을 세 상에 베풀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무명이 멸하면 열반을 증득 한 상태가 됩니다.

  여기에 십바라밀이 있는데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에 네 가지를 더한 것입니다. 방편, 원, 력, 지바라밀 입니다. 대승에서 수행의 완성은 육바라밀을 통해 완성됩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팔정도 수행입니다. 팔정도가 육바라밀로 바 뀌고 선종에서는 계정혜 삼학으로 바뀐 것입니다. 말만 다를뿐 같은 것입니다. 육바라밀의 지혜에 이르면 지혜를 베푸는 방편 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보시, 지계, 인욕을 위하여 좋은 방편 을 쓰는 일입니다. 원은 원바라밀로 부지런히 정진할 것을 원으 로 발하는 것입니다. 역은 선정을 닦는 힘을 기르는 일입니다. 지는 지바라밀로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모든 지적인 노력을 말 합니다. 수행은 십바라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망심훈습을 밝히다. 분별사식훈습을 밝히다. 첫째는 분별사 식훈습(分別事識熏習)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인(二乘人)이 생사 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힘이 닿는 대로 조금씩 무상도(無上道)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분별이란 제7식 말라식을 가리킵니다. 이승은 성문과 연각입니다. 성문과 연각을 알면 이승인이고 모르 면 범부입니다. 사성제와 연기를 알면 나름 진리를 알기 때문에 조금씩 진여를 좋아하는 기운이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힘닿는 대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만약 제7식에 훈습되는 우리 가 공부할 마음이 생기면 분별사식훈습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서 공부, 수행을 열심히 하면 제8식으로 점점 훈습되어 결과가 쌓이면 어떤 계기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의훈습(意熏習)을 밝히다. 둘째는 의훈습이니, 모든 보살이 발심하고 용맹하여 속히 열반에 나아가는 까닭이다.” 의훈습은 제8 아뢰야식을 훈습하는 것입니다. 그냥 공부하면 분별사식훈 습이 되고 집중해서 깊이 들어가서 선정에 들면 이것은 의훈습 에 든 것입니다. 용맹하다는 것은 용맹정진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는 것은 용맹이 아닙니다. 용맹정진 하다보면 열반으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수업을 들으며 훈습을 하고 있지 만 가끔은 밤잠을 설쳐가며 식사도 잊으며 용맹정진 해봐야 합 니다. 깨달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 으면 신통력이 생깁니다. 신통력이 생기면 전생의 기억도 납니 다. 예를 들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도 전생에 가본 곳이라 면 생각이 난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어려서부터 공부, 수행을 해 야하는 이유는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학습력, 흡수력이 성인이 된 뒤와는 매우 다릅니다. 성인이 되면 오염된 틀이 좀처럼 깨 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맞다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렸 을 때, 젊었을 때와는 다릅니다. 어떤 공부건 금방 익히고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점 의심도 없이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어린 시절, 젊은 시절입니다. 성인이 된 뒤에는 의심과 자 기 확신이 생겨서 수행을 해도 ‘지금 이렇게 해봤자 부처가 안 될텐데...’하고 생각하고 맙니다. 의훈습은 용맹정진해야 될 수 있는데 어린 시절, 젊은 시절에 하는 것이 더 용이한 것입니다. 용맹정진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수행을 해도 전생과 비슷한 정 도가 될 것입니다. 용맹을 해야 전생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진여훈습을 밝히다. 자체상훈습을 밝히다. 자체상훈습이란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무루법(無漏法)을 갖추고 부사의 한 업[不思議業]을 갖추고 있어서 경계의 성품[境界性]을 짓는 다.” 자체상훈습에서 ‘체상용’의 ‘체상’이 나옵니다. 본체와 본 체의 모양입니다. 중생이 평생 일으키는 생각, 행동은 모두 유 루법입니다. 다음 생에 업 따라 태어나게 합니다. 무루는 번뇌 망상, 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진여에 훈습하는 것이 무루법 인 것입니다. 무명이 훈습되면 끝없는 유루법 속에서 살게 됩니 다. 무명의 상을 짓지 않고 경계가 없는 것입니다.

  “자체상훈습. 이 두 가지 뜻에 의지하여 항상 훈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은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며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는 줄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내 속에서 진여가 증장하고 진여에 훈습되면 중생도 생 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 기에게 진여법이 있다고 믿고 수행을 하게 됩니다. 목적만 잘 설 정해 놓으면 한 생 끝없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묻기를 ‘만일 이러한 뜻이라면 모든 중생에게 진여가 있어서 똑같이 훈습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한량없는 앞뒤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모두 동시에 스스로 진여법이 있음을 알고 부지런히 방편을 닦 아 열반에 평등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다 같이 일심에 진여가 있지만 왜 믿음에 차별이 생길까요? 이것이 질문의 내용입니다.

  “답하기를 ‘진여는 본래 하나이지만 한량없고 끝이 없는 무명 이 있어서,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차별되어 두텁고 얇음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항하사보다 많은 번뇌(煩惱)가 무명에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과 아애의 오염된 번뇌[我見愛染煩惱]가 무명에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일체의 번뇌가 무 명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어서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이 있는 것 이며, 오직 여래만이 이것을 알고 있다.’” 모두 일심이며 똑같이 진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똑같이 진여를 갖고 있지만 무명 에 물든 정도는 다릅니다. 각기 모양도 다르고 능력, 성격도 다 다릅니다. 이것은 무명에 훈습된 모습들입니다. 무명에 물든 것 만큼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믿음을 갖고 공부하기 좋고, 누구는 믿음이 적어 공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무명과 업 때문 에 이런 차별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7식에 오염되어 아 견, 아애, 아집, 아만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무명에 의 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부처(여래)가 되면 일심이 되어 숙명통이 열리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 의 전생 인과를 알게 됩니다.

  “모든 불법에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니, 인연이 구족하 여야 법이 성취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무 가운데 불의 성질은 불의 정인(正因)이지만 만약 사람을 알지 못하여 방편을 빌리지 못하면 스스로 나무를 태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조 건 지어진 모든 것은 인연과 인과 법칙이 있습니다. 인만 있으 면 연이 없어 촉발되지 않습니다. 만약 명당이 있다고 합시다. (인) 여기서 살며 누군가 발복을 해야 진정한 명당이 됩니다.(연) 인에 연이 없으면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인연이 화합해야 과가 생깁니다. 내 자신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환경도 중요한 것입니다. 인만큼 연도 중요한 것입니다. 나무도 가만히 놔두면 불이 붙지 않습니다. 불을 붙여야 불이 붙습니다. 나무는 인이 고 불을 붙여 태우는 것은 연입니다.

  “중생도 그러하여 정인(正因)의 훈습하는 힘이 있지만 부처 나 보살이나 선지식 등을 만나서 그들로 연(緣)을 삼지 못한다 면 능히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만 약 외연(外緣)의 힘은 있으나 안으로는 청정한 법이 아직 훈습하 는 힘이 없는 자는 구경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 기를 좋아할 수가 없다.” 모두가 부처고 보살인데 가만히 놔두 면 부처, 보살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부처나 보살을 만나 공부 하는 방법을 배워야 부처와 보살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공부 할 수 있는 연을 만나야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부처지만 진정으 로 부처가 될 수 있으려면 연을 만나서 방법을 알아야하는 것입 니다. 그리고 청정한 법을 훈습하는 힘도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청정한 법을 훈습하는 힘이 있으면 모든 유혹을 뿌리 치고 수행의 길로 갑니다. 이 힘은 청정한 법을 훈습하는 믿음 입니다. 이것을 키워야 합니다. 여기서 시작합니다. 삶의 가치, 성취가 엄청나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만약 인연이 구족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부처와 보살의 자비와 원력으로 보호하기 때문에 생사의 고 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음을 믿어 선근을 닦 아 익힌다. 수행으로 선근이 성숙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 의 가르침과 이익됨과 기쁘함을 만나서 열반의 도를 향한다.” 내 속의 진여의 힘이 성숙되어 있고 훈습하는 힘이 있으면 진리 쪽으로 끝없이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 


  오늘은 부처님 전생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기록에 남아있는 부처님의 전생을 보면 먼저 선혜보살이 있습니다. 선혜의 집안 은 무마성의 최고 장자였습니다. 하지만 선혜는 어려서 부모님 을 잃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 다.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선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많은 재산을 가져갈 줄 알았는데 그대로 남기고 돌아가신 것입 니다. 생전에 아버지가 애착을 가지고 관리했던 재산들을 죽어 서는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선혜는 허무해졌습니다. 그리 고 ‘나는 죽은 후에도 갖고 갈 수 있는 것을 가져야겠다.’고 생각 합니다. 선혜는 다음 날 국왕에게 알리고 북을 치며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수행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는 히말라야 산에서 수행을 했는데 당시 연등 부처님의 출현 소 식을 듣고 마을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내려오기 전날 비가 와서 곳곳에 웅덩이가 패여 있고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연등 부처님 이 지나가시는 길에도 큰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선혜는 부처님이 그것을 밟을까봐 몸으로 웅덩이를 메웁니다. 웅덩이가 커서 머리를 풀어 나머지 부분을 메웁니다. 그것을 본 연등 부처님이 “젊은이여 왜 그러고 있느냐? 난 너를 밟고 가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자 선혜는 “부처님이시여 이렇게 밟고 지나가는 것도 인 연이니 밟고 지나가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지극 정성에 감동한 부처님은 “너는 다음 생에 석가모니 부처로 태어 날 것이다.”라고 말해줍니다.

  

  그 다음은 설산동자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열반경에 나 옵니다. 히말라야 산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어떤 젊은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매우 열심히 수행하기에 제석천왕도 그의 정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고 나찰로 변신 하여 그를 시험합니다. 나찰이 된 제석천왕은 수행자의 반대편 나무 위에 앉아 게송 한 구절을 읊습니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 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끊임없이 생겼다가 없어지나니.[諸 行無常 是生滅法]” 이 게송을 듣자마자 수행자는 마음에서 환희 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게송을 읊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고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나찰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찰에 게 말합니다. “당신이 읊었소?” 나찰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수 행자가 말합니다. “나머지 구절도 들려주시오.” 그러자 나찰이 “그렇다면 네가 가진 무언가를 내놓아라.”라고 말합니다. 수행 자는 “나는 지금 가진 것이 하나도 없소.”라고 하니 나찰은 “그렇 다면 너의 몸이라도 내놓거라.”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자 수 행자는 나머지 구절을 들려주면 내 몸 던져 너의 밥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찰이 뒷 구절을 말해줍니다. “생겨나고 없 어지는 법 깨닫고 나면 진리의 바다 끝없이 고요하여 즐거우리 라.[生滅滅已 寂滅爲樂]” 이 말을 들은 수행자는 환희로움에 겨 워 자신의 몸을 던집니다. 그러자 제석천왕은 수행자를 살려주 고 너를 시험한 것이라고 말하고 떠납니다.


  그 다음은 인욕선인 시절입니다. 이것은 금강경에 나옵니다. 먼 과거에 가리왕이라는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하 루는 대신들을 거느리고 깊은 산으로 사냥을 갔습니다. 왕의 시 중을 드는 궁녀들도 따라갔습니다. 사냥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 나른해지자 왕과 대신들은 낮잠을 잤습니다. 왕이 잠들자 궁녀 들은 숲 속을 돌아다니며 자유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궁녀들이 깊은 산 속에서 어떤 수행자 한 명이 깊은 선정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수행자에게 다가갔습니다. 수행자의 모습에 감 탄한 궁녀들은 저절로 절을 하고 곁에서 설법을 해달라고 했고 수행자는 설법을 해줍니다. 왕이 잠깨어 일어나보니 궁녀들이 보이지 않아 그들을 찾아 나섭니다. 한참을 찾으니 수행자 주위 에 궁녀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왕이 노발대발하여 수행자를 잡아들여 사지를 잘라버립니다.


  그 다음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인인 야수다라의 전생인 구 리선녀 이야기입니다. 데바디 왕의 태자 보광이 출가수행하여 부처가 되었을 때 선혜 선인은 깊은 산 속에서 수행하고 있었습 니다. 선혜는 부처님의 출현 소식을 듣고 마을로 내려오는데 바라문이 500명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을 봅니다. 선혜는 바라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바라문이 대답하지 못하자 그 답을 알려줍니다. 설교를 듣던 500명은 기뻐서 은자 한 냥씩 선혜에게 줍니다. 선혜는 부처님께 꽃을 올리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부처님께 올리려고 꽃을 모두 사갔기 때문에 꽃 이 없었습니다. 꽃을 들고 가는 구리 선녀를 만나게 됩니다. 선 혜는 구리 선녀에게 꽃을 팔라고 사정을 했고 구리 선녀는 꽃 한 송이에 은자 100냥을 요구했습니다. 선혜는 500냥을 주고 꽃을 사려고 합니다. 그러자 호기심이 생긴 구리 선녀는 꽃을 사려는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선혜는 부처님께서 오셔서 꽃을 공양 으로 올리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구리 선녀는 자 신과 결혼하면 꽃을 주겠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 제안을 거절했 지만 절충해서 선혜는 부처를 이룰 때까지 부부 인연을 맺기로 합니다. 이 구리 선녀가 다음 생의 야수다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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