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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강 분별발취도상의 대의와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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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0,511회 작성일 21-07-1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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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강


(3-3-2-2) 법아견을 대치하다

[진제60] 법아견(法我見)이란 이승의 둔한 근기(鈍根)에 의지하 기 때문에 여래가 그들을 위하여 인무아(人無我)만을 설하였으 며, 이 설함이 완전(究竟)하지 않기 때문에 오음의 생멸(五陰生 滅)의 법이 있음을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망령되게 열반을 취 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음법(五陰法)은 그 자성이 생기지 않는 것으로 멸함도 없으니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法我見者,依二乘鈍根故,如來但為說人無我。以說不究竟, 見有五陰生滅之法,怖畏生死、妄取涅槃。云何對治?以五陰 法自性不生則無有滅,本來涅槃故。

(3-2-3) 구경에 망집을 여의게 하다 

[진제61] 구경에 허망한 집착(妄執)을 다 여읜다는 것은 염법과 정법이 서로 의지하는 것이어서 말할 만한 자상이 없음을 알아 야 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색도 아니고 마음[心]도 아니며, 지혜[智]도 아니고 알음알이[識]도 아니며, 있는 것[有]도 아니고 없는 것[無]도 아니다. 

마침내 그 모양을 말할 수 없지만 말로 설명하는 이유는 여래의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취지란 모든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는 것이니, 일체법을 생각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하여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 하게 하는 까닭이다.

復次,究竟離妄執者,當知染法、淨法皆悉相待,無有自相可 說,是故一切法從本已來,非色非心、非智非識、非有非無, 畢竟不可說相。而有言說者,當知如來善巧方便,假以言說引 導眾生,其旨趣者皆為離念歸於真如,以念一切法令心生滅不 入實智故。

(3-3) 도에 발취하는 모양을 분별하다 

(3-3-1) 분별발취도상 대의를 총히 표하다 

[진제62]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은 도에 발취하는 모양을 분별한다는 것으로 부처가 증득한 도에 모든 보살이 발심하고 수 행하여 나아가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分別發趣道相者,謂一切諸佛所證之道,一切菩薩發心修行趣 向義故。

(3-3-2) 분별발취도상을 별도로 해석하다 

[진제63] 대략 발심(發心)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신성취발 심(信成就發心)은 믿음을 성취한 발심이며, 둘째 해행발심(解行 發心)은 알고 실천는 발심이며, 셋째 증발심(證發心)은 깨달은 발심이다.

略說發心有三種。云何為三?一者、信成就發心,二者、解行 發心,三者、證發心。

(3-3-2-1) 신성취발심을 설하다 

[진제64]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은 믿음을 성취한 발심으로 어 떤 사람을 의지하여 어떤 수행을 닦아서 믿음이 성취되어 능히 발심을 감당 할 수 있는가? 

信成就發心者,依何等人、修何等行,得信成就堪能發心? 

(3-3-2-1-1) 믿음이 성취되는 수행 

(3-3-2-1-1-1) 발심을 성취한 이 

부정취중생(不定聚衆生)에게도 선근을 훈습하는 힘이 있으므로 업의 과보를 믿고 십선(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뇌를 싫어하 고 무상보리(無上菩提)를 구하려고 한다. 

여러 부처를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信心)을 수행하되, 일만 겁을 지나서 신심이 성취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이 가르쳐서 발심하게 하며 혹은 대자비(大悲)에 의해서 호법(護法) 의 인연으로 스스로 발심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심이 성취 되어 발심하게 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 마침내 물러 나지 않으며, 여래의 종자(如來種) 가운데 머물러 정인(正因)과 상응한다고 한다. 

所謂依不定聚眾生,有熏習善根力故,信業果報,能起十善, 厭生死苦、欲求無上菩提,得值諸佛,親承供養修行信心,經 一萬劫信心成就故,諸佛菩薩教令發心;或以大悲故,能自發 心;或因正法欲滅,以護法因緣,能自發心。如是信心成就得 發心者,入正定聚,畢竟不退,名住如來種中正因相應。 

(3-3-2-1-1-2) 발심을 확정되지 못한 이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이 미약해서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깊고 두텁다면 비록 부처를 만나 공양하게 되더라도 인천(人天)의 종자를 일으키고, 혹은 이승(二乘)의 종자를 일으킨다. 설사 대승을 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근기(根器)가 결정되지 못 하여 어떤 때는 나아가고 어떤 때는 물러나기도 한다. 

혹 여러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면 일만 겁을 지나지 않더라도 중 도에 인연(緣)을 만나 또한 발심하기도 한다. 

이른바 부처의 색상(色相)을 보고 그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여 러 스님에게 공양함에 의하여 그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이승인 의 가르침에 의하여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배워 마음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발심들은 모두 결정되지 않은 것이니, 나쁜 인연을 만 나면 문득 물러나고 잃어버리며  이승의 지위(二乘地)에 떨어지 기도 하는 것이다.

若有眾生善根微少,久遠已來煩惱深厚,雖值於佛亦得供養, 然起人天種子,或起二乘種子。設有求大乘者,根則不定,若 進若退。或有供養諸佛未經一萬劫,於中遇緣亦有發心,所謂 見佛色相而發其心;或因供養眾僧而發其心;或因二乘之人教 令發心;或學他發心。如是等發心悉皆不定,遇惡因緣,或便 退失墮二乘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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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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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을 크게 분류하면 나와 대상이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인아견입니다. 법아견은 대상, 법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크게 인아견은 법아견에 포함됩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유식에서 ‘유식무경’이란 말 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단 지 ‘식’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법아견(法我見)을 대치하다. 법아견이란 이승의 둔한 근기[ 鈍根]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래가 그들을 위하여 인무아(人無我) 만을 설하였으며, 이 설함이 완전[究竟]하지 않기 때문에 오음 의 생멸[五陰生滅]의 법이 있음을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망령 되게 열반을 취하는 것이다. 어떻게 대치하는가?” 보살보다 낮 은 단계인 성문과 연각을 이승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들을 둔한 근기라고 하는데 보살과 같이 빼어난 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 다. 여래가 이런 둔한 사람들을 위하여 인무아만을 설했다고 합 니다. 법무아까지 설명해서 이해시키려고 하니까 힘이 드는 것 입니다. 무아라는 개념에서 단지 인무아만 설명했습니다. 그러 나 여기서는 좀 더 근기가 뛰어난 보살들을 위해 법무아를 설명 한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이고 고이고 무아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속성은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입니다. 그래서 인무 아만 설명하는 것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음 즉 색, 수, 상, 행, 

식의 생멸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를 겪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멸하기 때문에 고인 것입니다. 이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 열반적정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목적은 열 반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래열반. 오음법(五陰法)은 그 자성이 생기지 않는 것으로 멸함도 없으니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물들기 전의 본래 성 품은 우리가 물들어 있는 동안에도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열 반이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것으로 회복하는 것입 니다. 오음법은 생함도 멸함도 없는 본래 그대로라는 것을 말하 고 있습니다. 열반이란 지금 있는 것에서 다른 존재가 되는 것 이 아니라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입니다. 단지 물들어 있는 것 으로 보니까 우리는 무상, 고, 무아인 것입니다. 이것을 물들기 전의 것으로 보니까 본래 열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이 란 거창하게 다다라야 할 다른 존재, 목적이 아니라, 비록 물들 어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 성품 이라는 것입니다. 

  “구경에 망집을 여의게 하다. 구경에 허망한 집착(妄執)을 다 여읜다는 것은 염법과 정법이 서로 의지하는 것이어서 말할 만 한 자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색도 아니고 마음[心]도 아니며, 지혜[智]도 아니고 알음알이[識] 도 아니며, 있는 것[有]도 아니고 없는 것[無]도 아니다.” 오염된 것이 염법이고 오염되기 전의 청정한 것이 정법입니다. 모든 구 경의 망집을 여읜다는 것은 염법뿐만 아니라 정법까지 모두 여읜다는 말입니다. 여읜다는 것은 원래 있는 그대로만 보게 된다 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나라고 주장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 서 일체의 법은 색,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고 알음알이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있는 그대 로 열반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법아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교묘한 방편. 마침내 그 모양을 말할 수 없지만 말로 설명하 는 이유는 여래의 교묘한 방편으로 말로 설함을 빌어 중생을 제 도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취지란 모든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는 것이니, 일체법을 생각하면 마음으로 생멸케 하여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다.” 원래 진리 는 우리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께서 말을 빌어서 설명하시는 것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부처 님의 교묘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 방편 중 하나가 경전을 설하 고 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일체법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 끝없는 생멸을 일으켜 참된 지혜로 들어가 지 못하게 합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 대상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자는 것입 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지 의식의 투영일 뿐입니다. 이 투 영은 오염된 것들에 의해 나타나는데 오염된 것을 소멸시켜 버 리면 나도 대상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심은 초기 불교, 대승 불 교, 선불교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일심, 생멸문, 진여문이란 말은 초기 불교, 대승 불교, 선불교에도 다 있습니 다. 진리란 생멸문만 버리고 진여문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일심 

것을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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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에서 생멸문과 진여문에 대한 설명




  초기 불교에서 생멸문이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이 고 진여문은 열반적정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불교가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하셨습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항상 일정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무상의 첫 출발은 생이고 마지막은 멸입니다. 그래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생멸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생멸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은 나라고 주장할 독립적인 실체가 없습니다. 존재 속에서 사실 나라고 주장할만한 것은 없는데 중생들은 나가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업으로 오염된 자신의 성(性)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무 아인데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여문으로 들 어가면 열반적정이 됩니다. 이렇게 요동치고 있는 세상이지만 본래 모습은 열반적정입니다. 12연기와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 서 열반적정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발생 한 이유를 알면 해결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사를 포함한 모든 것은 원인을 정 확하게 알면 해결이 가능합니다. 생사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 태가 생멸문이고 해결한 상태가 바로 진여문, 열반적정입니다. 일심은 생멸문, 진여문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 가를 이해하면 신이 나서 계속하게 됩니다. 학교에 다닐 때 문 제를 풀어서 답을 맞추고 알아갈 때 얼마나 신이 나고 좋습니까. 불교의 교리를 공부할 때 이런 과정을 통해 깊이 들어갈 수 있습 니다. 공부하는 것에 신나지 않으면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각인 하화중생이 생멸문에 해당하고 각인 상구보리가 진여문에 해당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이 깨닫 지 못한 세상은 불각의 세계입니다. 상구보리에서 도를 이루어 나아가는 진여의 세계는 각,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각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중요한 것은 지관입니다. 멈추고 끊고(집중하고) 

관조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관조하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끝 없이 관조하다보면 원리를 알게 되고 이유를 알게 됩니다. 본질 이 터득됩니다. 화가 나면 마음이 요동칩니다. 끝없이 집중하다 보면 마음의 요동이 멈추고 끊기게 됩니다. 무념이 되고 삼매에 들어갑니다.

  선불교에서는 중생이 생멸문에 해당하고 부처, 견성성불의 상태가 진여문에 해당합니다. 추구하는 목적이 견성성불입니 다. 여기서 12연기, 지관을 체계화한 것이 화두입니다. 집중하 고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 보편적이고 쉬운 방법을 체계화한 것 이 화두입니다. 진여, 열반적정, 상구보리, 부처, 견성성불 모두 같은 진리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불교에서는 성불 하는 것을 화두를 통해서 합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 을 때 ‘마삼근’이라고 말하는 것은 화두입니다. 화두란 한 문제 를 가지고 깊이 집중하는 방법입니다. 지와 관을 집중적으로 되 풀이하기 좋은 방법입니다. 선불교에서는 화두를 통해서 무념 과 삼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들기 전의 내 본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에는 화두가 12 연기나 지관보다 쉽고 구체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머릿속,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다양한 생 각이 일어나니까 한 곳으로 집중이 안 됩니다. 공부는 집중을 해 야 나아갈 수 있습니다. 화두를 통해서 ‘왜 그럴까?’라고 생각하 며 조금씩 집중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수많은 생각이 일어나는 마음 밭이 한 곳으로 집중이 됩니다.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망상 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입니다. 생각들이 한 곳으로 모여 무념의 상태가 되면 각이 됩니다. 번뇌망상을 뚫고 본질로 가기 위해서 는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돌을 뚫듯이 끝없이 뚫고 들어 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을 위해서 번뇌망상들을 하 나로 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공부하기 쉽게 누 군가 이렇게 방법을 체계화시켜 놓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것을 알고도 안합니다. 


  “도에 발취하는 모양을 분별하다.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 相)은 도에 발취하는 모양을 분별한다는 것으로 부처가 증득한 도에 모든 보살이 발심하고 수행하여 나아가는 뜻을 말하는 것 이다.” 도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분별발취 도상이란 도에 들어가는 다양한 모양을 분별한다는 것입니다. 부처가 증득한 도에 보살이 발심하고 수행하여 나아가는 뜻을 말합니다.

  “분별발취도상을 별도로 해석하다. 발심(發心)에는 세 가지 가 있다. 첫째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믿음을 성취한 발심이 다. 둘째 해행발심(解行發心), 알고 실천하는 발심이다. 셋째 증 발심(證發心), 깨달은 발심이다.” 우리는 믿음이 생기면 알고 실 천합니다. 그 앎과 실천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화 엄경에서 설명하는 내용이 바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 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입니다. 가장 먼저 신, 믿음이 나 옵니다. 어떤 공부를 하던 간에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나이 가 들면 웬만해서 가슴을 울리는 것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순 수하기 때문에 작은 것이 와도 가슴을 울립니다. 그래서 어려서 발심을 하는 것이 나이가 들었을 때 발심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순수한 마음에 믿음이 생기면 다른 마음이 못 들어옵니다. 하지 만 나이가 들면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수많은 생각을 하는데 믿 음이 생기다가도 손익을 따져봅니다. 완벽한 믿음이 생기기 힘 듭니다. 우리가 경전을 보는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경전을 보 다보면 어느 순간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이 일어나면 믿음 이 성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생의 마음은 국 자고 시계추와 같습니다. 시간도 모르고 왔다갔다하고 국을 몇 천 번, 몇 만 번 퍼날라도 맛을 모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믿음이 성취되면 알고 실천하는 것은 그냥 따 라서 됩니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아는 것 밖에 없습 니다. 부처님은 실천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라고 합니다. 진리를 알고 믿음이 생기면 알고 실천하는 마음이 그냥 생깁니다. 만약 실천하지 않는다면 믿는 마음이 제대로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죽는지 모르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습니다.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 임과 같이 두 개의 갈림길이 있어 선택을 하면 되돌아갈 수 없습 니다. 선택하면 끝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선택에 대해 망설이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열심히 한 길 로 가다보면 성취할 수 있습니다. 경전을 읽다가 어느 부분 구절 에서 믿음이 확고히 생깁니다. 그것이 언젠가 일어납니다. 일어 나는 순간 내가 부처되는 시작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만히 놔두 어도 부처가 됩니다. 다른 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알고 실 천하다 보니까 증발심, 깨닫게 됩니다. 깨달음까지 가겠다는 발심이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분별발취도상은 보살이 부처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을 설하다. 신성취발심은 믿음을 성 취한 발심이다. 어떤 사람(부정취중생)을 의지하여 어떤 수행( 십선, 선)을 닦아서 믿음이 성취되어 능히 발심(깨달음,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 신성취발심은 100% 믿음이 내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생애든 이것이 되면 진 리로 나아가려 합니다. 이 믿음이 내 속에 응어리져 있어야 합니 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것이 와도 깨트릴 수 없습니다. 

“발심을 성취한 이. 부정취중생(不定聚衆生)에게도(취에는 정 정취와 사정취와 부정취가 있다) 선근을 훈습하는 힘이 있으므 로 업의 과보를 믿고 십선(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뇌를 싫 어하고 무상보리(無上菩提)를 구하려고 한다.” 부정취중생이란 우리를 말합니다. 정정취중생은 안에 선(善) 밖에 들지 않은 중 생을 말합니다. 사정취중생은 진리를 믿지 않는 중생을 말합니 다. 이런 중생들에게는 거짓, 삿된 것 밖에 없습니다. 부정취중 생은 선도 있고 불선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선이고 어떤 때는 불선입니다. 선근을 훈습하는 힘은 진리, 진여로 나아가는 힘을 말합니다. 이렇게 발심을 성취한 이는 업의 과보를 믿고 착한 일 을 하여 깨달음, 각의 세계로 나아가려 합니다.

“십신, 십해-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정정취란 십해 이상의 결정적인 불퇴를 말한다. 사정취는 십신에 들지 아니하여 인과 를 믿지 않음이다. 부정취란 십신과 십해의 중간이다.” 십신은 믿음을 말합니다. 십해는 십주와 같은 것으로 믿음에 머물러서 진리를 이해하고 아는 단계입니다. 아니까 행위를 하는데 이것 이 십행입니다. 이 세상에 진리를 회향하는 것이 십회향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살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인 십지에 들어가게 됩 니다. 십지부터 깨달음의 세계가 시작됩니다. 초지보살부터 십 지보살까지는 총 52단계입니다. 정정취란 십해 이상으로 믿음 이 꽉 차면 해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꽉 찬 상태이기 때문에 어 떤 삶을 살더라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부처의 세계로 끝없이 나 아갑니다. 사정취란 십신에 들지 않고 인과를 믿지 않는 것입니 다. 즉 믿음이 일어나지 않아서 인과를 안 믿는 것입니다. 일반 적인 중생은 부정취입니다. 십신과 십해의 중간입니다. 인과에 대한 믿음이 긴가민가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잘하면 천상에 태 어나기도 하고 못하면 축생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선근을 훈습하는 힘이 있으므로’라는 말은 여래장에 있는 훈습력에 의하여 그리고 전생의 선근을 닦은 힘에 의한 것을 말 하며 이를 통해 선근을 닦는 행위를 하게 된다.” 부정취 중생에 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믿음을 바탕으로 선근을 끝없이 실천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물들기 전의 부처의 씨앗(여래 장)이 있습니다. 그 여래장의 훈습력에 의하여 끝없이 선근을 실 천하려고 합니다. 믿음이 생기면 세상을 아름답고 선하게 살려 는 힘이 끝없이 생겨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말라식을 해 부해보면 전생의 착한 일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진리를 공부하 는 인연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내가 전생에 선근을 닦을 수 있 는 인과를 지었기 때문에 이 생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먹고 용맹정진하면 결단코 물러나지 않는 단계까지는 가지만 아애, 아집, 아치, 아만 때문에 그 마음을 제대로 못냅니다. 이것들(아애, 아치, 아집, 아만)이 요동치기 전 순수할 때 마음 을 내면 약간은 수월합니다. 이런 믿음과 선근이 쌓이고 쌓여 어 느 생에 100% 발심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 때 그것으로 끝납 니다. 그 뒤로는 절대로 진리와 멀어질 수 없습니다. 공부를 하 다가 무념과 삼매의 상태가 되면 전생에 닦았던 선근의 힘에 의 해 공부가 크게 진전됩니다. 그렇게 되면 본인의 인연, 인과를 더 자세히 알게 됩니다. 

  “십선(十善). 업의 과보를 믿고 십선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뇌 를 싫어하고 무상보리를 일으킨다. 오계와 십선을 닦는다.” 업 의 과보를 믿으면 오계와 십선을 닦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 계는 살생을 하지 말며, 도둑질을 하지 말며, 거짓말을 하지 말 며, 음행을 하지 말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중독성 있는 것을 먹 지 말라 입니다. 십선은 입으로 몸으로 뜻으로 짓는 십악을 하 지 않으면 십선이 됩니다.  

  “무상보리(無上菩提). 생사의 고뇌를 싫어하고 무상보리를 구 하려고 한다. 이것은 도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부처를 만나 신심을 수행한다.” 참선을 하다가 선정에 들 거나, 꿈에서도 수많은 부처님이 나타나 환희로운 마음을 일으 키게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십선을 닦으면 생사의 고뇌를 싫어 하고 무상보리,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도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깨닫겠다고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 생이건 저 생이건 많은 부처를 만나 끝없는 신심을 수행합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 가는 부처가 됩니다. 모든 것은 매우 복잡하지만 출발점은 극히단순합니다. 그 단순함은 내가 진리에 들겠다는 믿음을 내는 것 입니다. 믿음을 내면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그 방향으로 흘러갑 니다. 이 생에서 지극한 마음을 한번 내면 아집, 아애, 아치, 아 만을 깰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깨면 무념의 상태가 되어 지금 까지 보고 느낄 수 없었던 지혜와 자비가 끝없이 솟아오릅니다. 부처란 좋은 인연을 지어주는 도반입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수 많은 부처를 만나게 됩니다. 만나는 것 마다 다 부처입니다. 그 러나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니까 부처를 못보고 다 넘어갑니다.

  “믿음의 성취. 여러 부처를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 信心)을 수행하되, 일만 겁을 지나서 신심이 성취되기 때문에 모 든 부처와 보살이 가르쳐서 발심하게 하며 혹은 대자비(大悲)에 의해서 호법(護法)의 인연으로 스스로 발심케 하는 것이다. 이 와 같이 신심이 성취되어 발심하게 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 마침내 물러나지 않으며, 여래의 종자(如來種) 가운데 머 물러 정인(正因)과 상응한다고 한다.” 실제로 일만 겁은 아주 긴 시간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함께 공부하는 인연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무심하게 만난 인연들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신심 을 내면 그 긴 시간이 그냥 갑니다. 일념(一念)이 만 겁(萬劫)이 됩니다. 지극한 마음을 내는 순간이 만 겁이 됩니다. 중생의 이 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마음이라면 일만 겁 동안 마음을 내도 똑 같을 뿐입니다. 그래서 공부란 집중입니다. 뚫고 들어가야 합니 다. 바깥으로 보이는 것은 더 이상 봐도 볼 것이 없습니다. 뚫고 들어가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만 겁이 란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도 되지만 100%되는 믿음을 일으키는 순간 일만 겁은 그냥 그대로 성취됩니다. 마음을 일으키는 발심 의 인연이란 부처와 보살을 만나도 주어지고 책을 보다 스스로 인연이 생기기도 합니다. 대비심이 어느 순간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을 측은하게 볼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심이 성취되어 발심하게 된 사람’은 믿음을 100% 낸 사람입니다. 이 런 사람은 끝없이 수행하다 보면 정정취에 들어가 마침내 진리 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정인이란 본래 마음 열반, 진여를 말합니 다. 정정취에 들어가면 진리에 대한 믿음 밖에 없습니다. 내 속 에는 수많은 가치가 요동칩니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확신이 생 기면 그 진리가 우뚝 서게 됩니다. 나머지는 따라 갑니다. 누가 뭐라해도 진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발심을 확정시키지 못한 이.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이 미약 해서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깊고 두텁다면 비록 부처를 만 나 공양 올리게 되더라도 인천(人天)의 종자를 일으키고, 혹은 이승(二乘)의 종자를 일으킨다. 설사 대승을 구하는 사람이 있 더라도 근기(根器)가 결정되지 못하여 어떤 때는 나아가고 어떤 때는 물러나기도 한다.” 일반 중생과 같은 상태입니다. 불교를 어느 정도 배운 사람이라면 선근이 어느 정도 강해집니다. 불교 공부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세생생 수많은 선근을 심었 기 때문에 이런 인연이 온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물을 뜨는 것은 전생의 내가 아닌 지금의 나입니다. 하지만 선근이 미약하 면 비록 부처를 만나 공양을 올리게 되더라도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내 속에 부처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선근이 미약하다면 아 무리 잘해도 하늘에 태어나거나 성문, 연각에 그칩니다. 설령 보 살이나 부처가 되려는(대승을 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물러나 지 않는 정정취가 없기 때문에 어느 생에는 나아가기도 하고 어 느 생에는 물러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끝없이 제자리걸음을 하 며 60점짜리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못 넘고 있는 것입니다. 

  “발심을 확정시키지 못한 이. 여러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면 일만 겁을 지나지 않더라도 중도에 인연(緣)을 만나 또한 발심 하기도 한다. 이른바 부처의 색상(色相)을 보고 그 마음을 일으 키며, 혹은 여러 스님에게 공양함에 의하여 그 마음을 일으키 며, 혹은 이승인의 가르침에 의하여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다 른 사람에게 배워 마음을 일으킨다.” 부처에 공양을 올리면 긴 긴 세월 동안 믿음이 생겨 일만 겁이 지나지 않더라도 중도에 인연을 만나 발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디 부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발심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두를 통해 한군데 몰두한다면 그 하나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 라 모든 것에 몰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심을 통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발심을 일으키는 기회 는 여러 곳에서 주어질 수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서도 할 수 있 고, 스님을 만나서 할 수 있고, 수행자를 만나서 할 수 있고, 다 른 사람에게 배워서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는 기회를 단지 잡지 못할 뿐입니다. 

  “이와 같은 발심들은 모두 결정되지 않은 것이니, 나쁜 인연을 만나면 문득 물러나고 잃어버리며 이승의 지위[二乘地]에 떨 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모두 결정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은 확 률이란 말입니다. 주변에는 좋은 인연을 만나기도 하고 나쁜 인 연을 만나기도 하는데 이것을 확정시키기 위해서는 발심 밖에 없습니다. 이승의 지위에 떨어진다는 말은 내가 나쁜 인연을 만 나면 진리에서 멀어지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 지 않게 하려면 발심을 해야 합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_제프리 아이븐슨 블록샴 이야기


  서구 사회에서 전생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제프리 아이브슨 의 저서 『전생의 나를 찾아서』라는 책을 보면 전생 이야기가 나 옵니다. 블록샴은 1890년대 태어난 사람으로 최면을 통해 사람 들의 전생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는 20년 동안 400명의 전생의 기억을 기록합니다.

  책에는 제인 에반스 부인의 일곱 생의 전생이 나옵니다. 그녀 는 로마 제국 통치하의 영국에서 교사의 아내로 살았습니다. 이 것은 서기 약 286년 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전생은 영국 요크에서 유대인 여성으로서 살았습니다. 서기 1190년 경에 사 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전생은 프랑스 대부호 자크 꿰르 란 사람의 하녀로서 살았고 1451년에 사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스페인 캐서린 공주 시대 하녀로서 살았고, 그 다음은 앤 여왕 재위 시 런던의 바느질 품팔이 소녀로 살았다고 말했습니 다. 그 다음은 미국의 메릴랜드 주 수녀로서 살았고 1920년 경 에 사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1939년 현생으로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전생의 이야기를 할 때 그 당시의 언어로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전생에서 기억이 역 사적 사실과 흡사한 부분이 많았고 역사적으로 고증이 안 된 것 도 사학자들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인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전생에 유대인 부인이었던 어느 여인의 이야기 가 나옵니다. 블록샴이 최면을 걸자 그 여인은 말합니다. “나는 12세기 어느 유대인의 부인 레베카이다. 남편은 값비싼 법복을 입지만 그 옷이 비싼 것처럼 보이면 안 된다. 사람들은 우리집 을 탐내고 유대인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가슴에 원형의 노 란색 뱃지를 달아야 한다.” 그 말을 듣고 블록샴이 가슴에 뱃지 를 달아야 한다니 불쾌하지 않느냐고 묻자 여인은 불쾌하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전생에 중세 프랑스의 하녀였던 아리송이 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아리송은 최면을 걸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아직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매우 흥 분해 있다.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라고 한다.” 블록샴이 그 미인 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아리송은 “사람들은 그녀가 프로망 트(Fromenteau)에서 왔다고 한다.” 블록샴이 그녀는 특별한 손님이냐고 묻자 아리송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블록샴이 왜 특별한 손님이냐고 묻자 아리송은 그녀가 왕의 정부라고 말합 니다. 블록샴은 어느 왕의 정부냐고 묻자 아리송은 잠시 말이 없 다가 망설이듯 ‘샤를’(샤를 7세)이라고 말합니다. 블록샴이 프랑 소와냐고 묻자 아리송은 “아니다. 샤를 발루아이다. 그는 아네 스 소렐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블록샴이 확인차 “아네스 다음

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리송 은 “소렐이다. 아네스 소렐은 프로망트의 아가씨이다.”라고 대 답합니다. 이어 아리송은 아네스 소렐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 녀는 참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고운 옷을 입었다.” 블록샴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반달과 별 무늬가 있 는 초록색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와 가장 자리를 모피로 장식한 융단으로 된 외투를 입고 머리채를 썼다. 그녀는 왕을 대신해서 우리 주인에게 돈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고 아리송이 대답했습 니다. 그 말을 듣고 블록샴이 “당신 주인은 왕에게 돈을 빌려주 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리송이 “그렇다. 주인은 전 에도 왕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블록샴은 그 말을 듣고 “당신 주인은 작위가 있는 귀족인가?”라고 물었습니 다. 아리송은 “그저 대상인 퀘르라고 부른다.”라고 대답했고, 블 록샴은 “왕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빌려주었는가?”라고 묻자 아 리송은 “2000 에퀴돌을 빌려주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에퀴돌 은 1395년부터 프랑스에서 통용되었던 금화입니다. 샤를 7세 의 생년이 1403년이고 재위 기간이 1422년부터 1461년까지 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도 맞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믿기 힘든 전생이지만 내가 직접 체험해보 면 그것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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