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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강 지관문의 수행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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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6,341회 작성일 21-07-1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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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강


(4-3-5) 지관문의 수행을 밝히다 

(4-3-5-1) 간략히 밝히다

[진제76] 어떻게 지관문(止觀門)을 수행하는가? 云何修行止觀門?

(4-3-5-1-1) 사마타

사마타, 지(止)라 하는 것은 모든 경계를 그치는 것이니, 사마타 관을 수순하는 뜻이다.

所言止者,謂止一切境界相,隨順奢摩他觀義故。 

(4-3-5-1-2) 위빠사나 

위빠사나, 관(觀)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의 생멸상[因緣生滅相] 을 분별하는 것이니 위빠사나관을 수순하는 뜻이다. 

所言觀者,謂分別因緣生滅相,隨順毘鉢舍那觀義故。 

(4-3-5-1-3) 수순

어떻게 수순하는가? 두 가지 도리를 차츰차츰 닦고 익혀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함께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云何隨順?以此二義,漸漸修習不相捨離,雙現前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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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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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불각의 세계에서 오문수행을 통해 각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진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문 수행 가운데 마지막 지관문(止觀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 관문은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과 지혜에 해당합니다. 선정과 지 혜는 하나입니다. 선정을 통해서 지혜를 얻고, 지혜를 통해 선 정에 들 수 있습니다.

  “지관문의 수행을 밝히다. 간략히 밝히다. 어떻게 지관문(止 觀門)을 수행하는가?”

  “사마타. 지(止)라 하는 것은 모든 경계를 그치는 것이니 사마 타관을 수순하는 뜻이다.” 지(止)가 바로 사마타입니다. 끊임없 이 되풀이 하는 삶, 생각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것을 한번 그쳐 보자는 것입니다. 움직이던 것을 멈추었을 때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더 깊은 곳으로 들어 가서 이해할 수 없던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이 생을 현생이라 하고 태어나기 전 삶을 전생이라 하고 죽은 뒤 다시 태 어나는 삶을 내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연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현생만 인식하고 알기 때 문에 전생과 내생은 모릅니다. 무언가의 원인에 의해 모를 뿐입 니다. 움직일 때는 고요하게 멈춰 있는 원래 모습들이 안 보입 니다. 움직임을 멈추면 원래 모습들이 보입니다. 사마타관이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경계(번뇌망상)를 멈출 수 있도록 행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화두가 던져지면 모든 다른 생각은 그치고 그 화두에 모든 생각을 모읍니다. 어떤 하나의 일에 몰두하는 것 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위빠사나. 관(觀)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의 생멸상[因緣生滅 相]을 분별하는 것이니 위빠사나 관을 수순하는 뜻이다.” 인연 의 생멸상이란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소멸하고 어떤 일이 어떤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것을 살피는 것 이 위빠사나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그런 일이 벌어졌 을까하고 원인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바로 지혜 가 됩니다. 사마타만 하고 위빠사나를 하지 않으면 남쪽으로 가 야하는데 북쪽으로 가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바로 생각을 그치 고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우 리는 부처와 진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없을 때 엉 뚱하고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마타만 잘하 면 바둑만 잘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낚시만 잘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 진리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닙 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 ‘왜 이 생에서 나는 이렇게 사 는가?’ ‘왜 나는 죽어야만 하는가?’ 그 원인을 찾아가는 것이 위 빠사나가 됩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부처의 세계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수순. 어떻게 수순하는가? 두 가지 도리를 차츰 닦고 익혀 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함께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 다.” 공부에는 특별한 왕도가 없습니다. 열심히 꾸준히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삶 속에서 꾸준히 닦고 익히는 것이 바로 수순입니다. 삶은 습(습관)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도 지옥에 가는 것 도 나의 습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부지런히 노력하 고 익히는 것에 따라 부처가 되거나 지옥에 가기도 합니다. 두 가지 즉, 지와 관을 수순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고 부처 가 될 수 있습니다. 

  지와 관을 익히면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은 자동으로 이루어 집니다. 보시하지 말라고 해도 보시하게 되고, 굳이 계율을 지키 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계율을 지킵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억지로 하면 얼마 못갑니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 로 하면 얼마든지 해도 질리지 않습니다. 지혜가 생기면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기 적인 마음이 사라져 저절로 자비가 베풀어지고 지계가 되고 인 욕, 정진이 됩니다. 그리고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을 계속하게 되면 지와 관을 터득하기도 합니다. 세상물정 잘 모르고 진리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이것들을 중심으로 교육을 시킬 수 있습니 다.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라’ 이것은 정진입니다. ‘학교를 마치면 되도록 샛길로 가서 놀지 말고 집으로 와라’ 이것은 지 계입니다. ‘친구들과 다투지 말고 네가 양보해라’ 이것은 보시 이자 인욕입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 공 부나 수행에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철이 들면 ‘왜 사는가?’ ‘왜 죽어야 하는가?’ 등의 이런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 있습 니다. 지관을 통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관을 터득하면 앞의 네 가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 만 이런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백지 상태에서 맨땅에 머리를 박는 꼴입니다. 아무리 지관을 닦아도 보시나 지계가 잘 되지 않습 니다. 끊임없이 익히면 그 습이 저장되면 하기 쉽습니다. 

  “마하지관(대지관좌선법). 지자는 대수의 개황 14년(594년) 4월 26일에 형주의 옥천사에서 한 여름 동안 두 번의 자비를 장 마비처럼 뿌려주셨고, 쾌히 설하여 주심이 끝남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겨우 견경에 이르러 법륜을 굴리심을 그치고서 그 뒷부 분은 말씀하지 않았다.” 여기서 지자는 천태 지자 대사를 말합 니다. 대수는 바로 수나라입니다. 두 번의 자비를 장마비처럼 뿌 려주었다는 것은 설법을 했다는 말입니다. 견경이란 처음 견성 한 상태로 지혜에 눈을 뜬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지 않 은 내용은 마하지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관이 세상에 나와서 적용되는 것은 명상입니다. 불교란 타 이틀이 아닌 명상이란 타이틀이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명상 은 지관을 현대화시킨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명상은 심리치 료, 건강유지, 자기향상의 기능이 있습니다. 샤피로란 사람은 명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명상이란 전통적으 로 한층 더 높은 의식상태 혹은 훨씬 더 건강하게 여겨지는 상 태에 도달하고자 정신적 과정을 가다듬는 의식적 훈련이지만 현대에는 이완을 목적으로 하거나 어떤 종류의 심리적 치료를 목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다.” 이런 명상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집중명상(Concentrationn Meditation)과 통찰명상(Insight Meditation)이 있습니다. 집중명상을 불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지이고 통찰명상은 관입니다. 이 명상은 나름 확산되어서 2005 년 미국 ‘뉴스위크’지에서는 “미국 성인 약 1/3이 어떤 형태로든 매일 명상을 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90년대 서구사회에 서 일어났던 불교 붐이 이제 생활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불자는 대부분 특별한 날에 절에 가서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서구사회에서는 불교가 명상, 수행의 형태로 전파, 실행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핵심은 누구에게나 어디에 서나 적용되지만 입문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쉽 게 입문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쓸 수 있습니다. 일단 입 문해야 스스로 깊은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관도 그런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세계에 명상을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 다. 그는 프랑스 남부 보르도의 플럼빌리지에 명상센터를 열었 고 ‘명상은 휴식과 예술이다.’고 말하며 걷기 명상, 명상 수행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수많은 씨앗이 마음에 있습니다. 어떤 씨앗은 꽃이 되고 열매를 맺어내지만 어 떤 씨앗은 마음을 병들게 만듭니다. 씨앗 하나가 모든 것의 시작 입니다. 맨 처음부터 잘 솎아내야 좋은 꽃이 핍니다.” 틱낫한 스 님은 명상이야말로 ‘좋은 씨앗에 물주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며 그 밭에는 사랑, 미움, 분노, 희망, 열정, 자비, 폭력 등의 다양한 형태의 씨앗이 섞여 있다고 말합 니다. 거기에서 부정적인 씨앗을 솎아내고 긍정적인 씨앗에 물 을 주는 과정이 명상이라고 했습니다. 부정적인 씨앗을 솎아내 기 때문에 명상을 하면 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부처는 100% 긍정인 사람이고 공부는 긍정적인 것을 길러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마음 속에는 자비 밖에 없게 되고 무엇을 끄집어내어도 자비 밖에 없어 온전한 것입니다. 중생은 이기심, 아집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을 명상, 지관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 고 부처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을 모를 때는 어떤 방법을 해도 괜찮지만 최고 의 방법을 알거나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으면 그 방법으로 하 는 것이 좋습니다. 진리에 빠르게 가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지 관문입니다. 만약 길을 가다 동을 주웠다고 칩시다. 그 후 길에 서 은을 봤습니다. 일반 중생이라면 은도 들고 갈 것입니다. 그 렇게 되면 무거워서 제대로 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동을 들고 가다가도 더 좋은 은이 나오면 동을 과감히 버리고 은을 선택하 여 가져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은을 들고 가다가 더 좋은 금이 나오면 은을 버리고 금을 선택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위빠사나의 대법고를 울린 위대한 스승 마하시 사야도는 사 미 때부터 『대념처경』의 7년 혹은 7일 동안 이 수행을 하면 아 라한 아니면 아나함이 된다고 하는 수행의 이익에 대한 가르침 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증지부의 『칼라마경』에 제시된 스스 로 확인한 진리만을 받아들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수 행을 통한 개인적인 체험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실 제적인 수행을 하려는 사람은 많은 수행법 가운데 한 가지를 선 택해야 하는데, 마하시 사야도는 마음챙김을 통한 통찰 수행(사 띠팟타나 위빠사나)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미얀마의 승려 마 하시 사야도는 위빠사나를 세계적으로 전파하는데 큰 공을 세 운 사람입니다.

  마하시 사야도는 28세가 되던 1932년 타톤의 밍군 사야도에게 가서 도착하는 날부터 곧바로 수행 지도를 받고 수행에 들 어갔습니다. 마하시 사야도는 4개월 동안 한 잠도 자지 않고 수 행에 몰두했습니다. 잠을 자지 않고 정진을 했어도 몸이 건강했 던 이유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칠각 지: 念, 擇法, 精進, 喜, 輕安, 定, 捨覺支)가 경험되면서 마음이 정화되었고, 마음의 정화에 의해서 육체가 정화되었기 때문이 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부, 수행을 통해 마음이 정화되고 육체가 정화되었기 때문에 4개월 동안 잠을 자지 않았어도 몸이 건강 했던 것입니다.

  위빠사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위빠사나(Vipassana)의 위(Vi)는 접두어로 ‘여러가지’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란 제법무아의 제법, 제행무상의 제 행, 일체개고의 일체를 가리킵니다. 빠(Pa)란 자세히, 면밀히란 뜻이고 사나(Ssana)란 꿰뚫어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대념처경 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삶의 깨끗함을 위하여, 육체적 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정신적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 하여 해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네 곳에 마음을 챙겨 관찰하 라.” 위빠사나란 여러 가지 일어난 일들을 ‘왜 일어났는가?’라 고 생각하며 자세히 꿰뚫어 관찰하는 것입니다. 피상적이 아닌 원인을 꿰뚫어 살피는 것입니다.

  위빠사나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왜 일이 일어났는가?’하 고 관찰하고 생각하다보면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통찰과 집중입니다. 알아차리게 되면 진리에 깨어있기 때문에 무지, 아 집에 물들지 않습니다. 중생은 무지, 아집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릅니다.

  송나라 청원 유신 선사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철 스님이 말씀하셔서 더 유명해진 말입니다. 바로 ‘산은 산 이요 물은 물이다.’입니다. 여기에는 뒷말이 있습니다. ‘산은 산 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뿐인데 주체(나)에 따라서 인식 되어질 뿐입니다. 나의 육신(身)과 육신의 느낌(受)과 대상에 대 한 생각(心)과 대상(法)을 모두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요? 신수심법을 모두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안이비설신의 가운 데 비입니다. 지난 시간에 호흡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나 와 대상이 공감하기 위해서는 호흡법이 필요합니다. 눈은 보기 만 할 뿐이고 귀는 듣기만 할 뿐이고 혀는 맛을 볼 뿐이고 몸은 느끼기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코를 통해 숨을 뱉고 숨 을 들이킬 수 있습니다.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은 호흡법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경전입니다. 안반수의경은 아나파나사티 (anapanasati)라고도 하는데 아나(ana)가 들숨이란 뜻이고 아 파나(apana)가 날숨이란 뜻이고 사티(sati)가 의식의 집중이란 뜻입니다.  

  지금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일뿐입니다. 하지만 공부 를 하다 희열이 넘친 상태에서 산이나 물이나 보는 사람마다 다 부처가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 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수행해서 견성을 하고 보면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입니다. 명상을 통해 목표할 단계가 이런 단계이고 이런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의식을 집중시켜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안반수의경입니다. 

  호흡수련의 단계에는 수, 상수, 지, 관, 환, 정이 있습니다. 수(數)란 들숨과 날숨의 수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상수(相隨)란 호흡에 따라 의식과 호흡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지(止)란 마음이 호흡을 의식하지 않고 고요히 안정된 것입니다. 관(觀)이란 사물 을 관찰하게 되는 정신 집중의 상태입니다. 환(還)이란 다시 고 요한 자기의 주체로 돌아오는 상태입니다. 정(淨)은 어떤 것에 도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세계입니다. 수를 통해 모든 것을 일 정하게 만들어 숫자를 잊어버리고 의식과 호흡이 하나가 됩니 다. 그 후 지관의 상태가 됩니다. 지의 상태가 되어야 제대로 관 을 할 수 있습니다. 고요히 안정된 상태에서 사물의 본질을 관 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원되어 자기에게 되돌아오면 자기 관조가 됩니다. 결국 견성성불하게 되어 청정한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월지국의 사기유국에 머무르시며 안반수의를 90일 동안 행하셨습니다. 다시 90일을 홀로 앉아 생각을 가다 듬어 온 세상의 인간과 날아다니는 새와 굼틀대는 동물을 구제 하고자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안반수의를 통해 모든 존재의 본성을 일깨워주고 구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께서는 “나는 안반수의를 90일 동안 행하여 안반수의로 자재와 자비의 마음을 얻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반수의를 통해 지 관을 거치고 청정한 세계에 드니까 저절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들숨(안)과 날숨(반). 안은 생명의 창조가 되고 반은 그치는 것이 됩니다. 수의는 잘못되지 않게 하는 것이니 그것은 되어진 그대로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보호한다는 것은 일체의 것이 잘 못되지 않도록 두루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의식이 한 곳에 서 쉬고 있는 것이니, 또한 마음의 본래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생과 멸의 깨달음에서 안은 생하는 것이 되고, 반은 멸하는 것 이 되며, 마음은 인연이 되고 수는 도가 됩니다. 수식과 정신 집 중에서 안은 수를 헤아림이 되고, 반은 서로 따름이 되며, 수의 는 그치는 것입니다. 정신 집중해서 그치게 됩니다. 

  합리적인 호흡에서 안은 도를 생각하는 것이 되고, 반은 맺힘 을 푸는 것이 되며, 수의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됩니다. 따 라서 안은 죄를 피하는 것이 되고, 반은 죄로 들어가지 않는 것 이 되고, 수의는 도가 됩니다. 수의는 바로 견성하는 상태로 가 는 것입니다. 

  “삼매를 닦을 지어다.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을지어다. 비구 들이여, 삼매에 든 비구는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pajanati)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어떠한가? 눈(眼)에 대해 무 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시각 대상(色)에 대해 무상 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의식(眼識)에 대해 무상하 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접촉(觸)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 겁거나 고통스럽거나 즐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느낌(受)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있는 그대로’ 이 말 이 중요합니다.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 다. 대상의 무아와 무상과 본성과 같은 모든 것을 보는 것입니 다. 삼매에 들면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니까 무지에서 벗어나고 아집을 깨트리고 공덕 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념처관에서 신(身) 몸의 현상을 관찰, 몸의 세계에서 일어 나는 욕망과 혐오감에서 벗어나라. 수(受) 느낌의 현상을 관찰, 느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에서 벗어나라. 심(心) 마음의 현상을 관찰,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 에서 벗어나라. 법(法) 법의 현상을 관찰, 법의 세계에서 일어나 는 욕망과 혐오감에서 벗어나라 입니다. 지관을 통해서 끊임없 이 사념처관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지관해야 하느냐?’라고 할 때 생각할 네 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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