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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강 심생멸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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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7,045회 작성일 21-07-1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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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강


(3-1-1-3-3-6)  각과 불각은 동이를 설하다 

[진제30] 각(覺)과 불각(不覺)에는 두 가지의 모양(相)이 있다. 첫 째는 같은 모양(同相)이고, 둘째는 다른 모양(異相)이다. 復次,覺與不覺有二種相。云何為二?一者、同相,二者、異 相。

(3-1-1-3-3-61) 동상을 밝히다 

같은 모양(同相)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의 질그릇이 모두 같은 미진(微塵)의 성상(性相)인 것처럼 무루(無漏)와 무명 (無明)과 여러 가지 업환(業幻)이 같은 진여의 성상인 것이다. [같은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의 질그릇이 같은 흙으로 빚어졌듯이, 각과 불각의 무루와 무명과 여러 가지 업환도 진여 의 성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경 가운데 이 진여의 뜻에 의지하는 까닭은 '일체의 중 생이 본래 항상 머물러서 열반에 들어 있으며, 보리의 법도 닦을 수 있는 모양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모양도 아니고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색상(色相)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색상을 보는 것은 오직 오염된 업환(業幻)에 따라 지은 것 이며 지색의 불공(智色不空)의 성질이 아니므로 지상(智相)을 볼 수 없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同相者,譬如種種瓦器皆同微塵性相,如是無漏無明種種業幻皆同真如性相。是故修多羅中依於此真如義故,說一切眾生本 來常住入於涅槃,菩提之法非可修相、非可作相,畢竟無得, 亦無色相可見;而有見色相者,唯是隨染業幻所作,非是智色 不空之性,以智相無可見故。

(3-1-1-3-3-62) 이상을 밝히다 

다른 모양(異相)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 가지 질그릇이 같지 않은 것처럼 무루와 무명이 오염된 환을 따르는 차별이며, 자성이 오 염된 환의 차별인 까닭이다. 

[다른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의 질그릇이 모두 흙으로 빚어졌지만 각각 다른 인연에 따라 다른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 이다.]

異相者,如種種瓦器各各不同,如是無漏無明隨染幻差別,性 染幻差別故。

(3-1-1-3-3)  심생멸의 인연을 해석하다 

(3-1-1-3-3-1) 생멸인연의 뜻을 설하다

[진제31] 또한 생멸인연(生滅因緣)이라는 것은 이른바 중생은 마음(心)에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이 전변하기 때문이다. 復次,生滅因緣者,所謂眾生依心.意.意識轉故。 

(3-1-1-3-3-11) 심에 의지함을 밝히다

[진제32] 심에 의지함이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무명이 있다고 설한다. 

此義云何?以依阿梨耶識說有無明 

(3-1-1-3-3-12) 의에 유전함을 밝히다 

[진제33] 불각(不覺)이 일어나서 능히 보고 나타나며 경계를 취하며 망념을 일으켜 상속하기에  ‘의(意)’라고 말한다. 이 의(意) 에는 다섯 가지의 이름이 있다. 

不覺而起,能見、能現、能取境界,起念相續,故說為意。此 意復有五種名。云何為五?

(3-1-1-3-3-121) 업식을 밝히다

첫째는 업식(業識)이라고 이름하니,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마음 이 움직인 까닭이다. 

一者、名為業識,謂無明力不覺心動故。 

(3-1-1-3-3-122) 전식을 밝히다

둘째는 전식(轉識)이라고 이름하니, 움직인 마음에 의지하여 능 히 보는 모양인 까닭이다.  

二者、名為轉識,依於動心能見相故。 

(3-1-1-3-3-123) 현식을 밝히다

셋째는 현식(現識)이라고 이름하니, 일체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 이 마치 밝은 거울이 물체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현식도 또한 그러하여 다섯 가지 경계를 따라서 대상이 부딪히면 곧 나 타난다. 앞뒤가 없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임의로 일어나서 항상 앞에 있기 때문이다. 

三者、名為現識,所謂能現一切境界,猶如明鏡現於色像;現 識亦爾,隨其五塵對至,即現無有前後,以一切時任運而起常 在前故。

(3-1-1-3-3-124) 지식을 밝히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라고 이름하니,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四者、名為智識,謂分別染淨法故。 

(3-1-1-3-3-125) 상속식을 밝히다

다섯째는 상속식(相續識)이라고 이름하니, 망념이 상응하여 끊 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한량없는 세상에서 선악의 업을 간 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 까닭이며, 

또 현재와 미래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켜 어긋남이 없는 까 닭으로 현재에 이미 지나간 일을 문득 생각하게 하고 미래의 일 을 알지도 못하면서 망령되이 염려하게 한다. 

그래서 삼계(三界)는 허망한 것이며,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망령으로 생겨난 것이니 일체의 분별은 곧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한 것이며,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기에 모양을 가히 얻을 수 없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중생의 무명의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머 무름을 얻는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체를 가히 얻을 수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 기 때문이다.

五者、名為相續識,以念相應不斷故,住持過去無量世等善惡 之業令不失故,復能成熟現在未來苦樂等報無差違故,能令現 在已經之事忽然而念,未來之事不覺妄慮。是故三界虛偽唯 心所作,離心則無六塵境界。此義云何?以一切法皆從心起妄 念而生,一切分別即分別自心,心不見心無相可得。當知世間一切境界,皆依眾生無明妄心而得住持,是故一切法,如鏡中 像無體可得,唯心虛妄。以心生則種種法生,心滅則種種法滅 故。

(3-1-1-3-3-13) 의식의 유전함을 밝히다

[진제34] 또한 의식(意識)이라는 것은 곧 상속식이니 범부의 취 착함이 점점 깊어져서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따지고 여러 가 지 허망된 집착으로 일을 따라 반연하여 육진(六塵) 경계를 분별 하므로 의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이름하고 다시 분별사식(分別事 識: 사물을 분별하는 식)이라고도 이름하니, 이 식이 견애번뇌( 見愛煩惱)를 의지하여 증장한다는 뜻이다. 

復次,言意識者,即此相續識,依諸凡夫取著轉深計我我所, 種種妄執隨事攀緣,分別六塵名為意識,亦名分離識。又復說 名分別事識,此識依見愛煩惱增長義故。

(3-1-1-3-3-2) 인연의 체상을 설하다 

(3-1-1-3-3-21) 인연의 깊은 도리를 밝히다 

[진제35] 무명의 훈습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식(識)은 범부가 능 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승(二乘)의 지혜로 깨닫는 것 도 아니다. 이는 보살이 처음 바른 믿음을 발심하여 관찰함을 의 지하여 법신(法身)을 증득해도 조금 알게 되며 나아가 보살의 구 경지(究竟地)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 알 수 없으며 오직 부처만이 다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자성(自性)은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어서 이 무명에 의하여 물들게 되어 염심(染心)이 있는 것이다. 

비록 오염된 마음이 있지만 항상 변하지 않는 까닭으로 이 뜻은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依無明熏習所起識者,非凡夫能知,亦非二乘智慧所覺。謂依 菩薩,從初正信發心觀察,若證法身得少分知,乃至菩薩究竟 地不能知盡,唯佛窮了。何以故?是心從本已來自性清淨而有 無明,為無明所染,有其染心。雖有染心而常恒不變,是故此 義唯佛能知。

(3-1-1-3-3-22) 인연의 차별된 상태를 밝히다 

(3-1-1-3-3-221) 심성인의 체상을 밝히다 

[진제36] 이른바 심성(心性)이 항상 무념인 까닭으로 불변(不變) 이라 이름하며,

所謂心性常無念故名為不變, 

(3-1-1-3-3-222) 무명연의 체상을 밝히다 

[진제37] 하나의 법계(法界)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상 응하지 못하여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 하는 것 이다.

以不達一法界故心不相應,忽然念起名為無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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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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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별없는 참사람. 펼치면 우주 만물을 덮고, 접으면 터럭 하 나도 그 위에 서지 못한다. 홀로 밝히는 빛이지만 온 우주를 비 추고도 부족함이 없다. 눈에도 안 보이고 귀에도 안 들리니, 이 를 무엇이라 이름하겠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는 다(육조 혜능)>는 옛 스승의 말 그대로다. 그러니 어찌하겠느냐. 스스로 들여다보는 수밖에.”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는다.”는 육조 혜능과 남악 회 양의 선문답입니다. 남악 회양이 혜능을 찾아가 ‘부처가 무엇인 가’ 하고 물을려고 했는데 혜능이 먼저 묻습니다. “어떤 한 물건 이 왔는가?” 남악은 여기서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리고 8년 동안 도대체 한 물건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화두에 집 중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깨우치고 보니 한 물건이라도 해도 맞는 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리나케 혜능을 찾아가 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고 말하자 혜능이 “ 알았으면 됐지. 뭣하러 찾아왔는고.” 라고 했습니다. 

  왜 공부해야 하는가. 스스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 다. 세상의 묘한 진리는 내가 아는 것만큼 내 세상입니다. 진리 를 깨우치고 여유작작하게 걸어가는 그 모습이 바로 화엄입니 다. 공부를 해야 압니다.

  이번에 다룰 것은 망경계훈습에 의해서 오염된 식들입니다. 

  “각과 불각의 동이(同異)를 설하다. 각(覺)과 불각(不覺)에는 

두 가지 모양의 상(相)이 있다. 첫째는 같은 모양[同相]이고 둘째 는 다른 모양[異相]이다.” 각과 불각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 니다. 일심 속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불각에서부터 진여의 세 계까지 모두 있는 것이 대승기신론입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도 일심 속에 있으며 진여가 같이 들어있습니다. 단지 오염되어 있 으면 불각이고 오염되어 있지 않은 진실은 각일 뿐입니다. 나 의 삶도 각과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하루의 삶은 부처 의 삶인 것입니다. 

  “동상을 밝히다. 같은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의 질 그릇이 같은 흙으로 빚어졌듯이 각과 불각과 무루와 무명과 여 러 가지 업환도 진여의 성품인 것이다.” 모양은 다르고 종류가 다양한 질그릇이지만 같은 흙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빚 고 나니 둥근 것도 있고 각진 것도 있고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불각이나 번뇌가 없는 무루나 번뇌 의 근원인 무명도 모두 진여의 성품 안에 있는 같은 것입니다. 동상은 우리의 근본 성품, 오염되기 전의 하나[一心]를 말합니 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소재는 같듯이, 물들어 있는 것을 없애고 근본으로 가면 같은 진여입니다. 바로 그것이 동상을 밝 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진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 깨우치면 일심(一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하나인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건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합니다. 그에게는 어떠한 사심도 없습니다. 우리 는 남에게 너를 위해서 했다고 자주 말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마음과 계산이 깔려있습니다. 가장 일심에 가까운 것이 어머니가 자식을 위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 가운데 이 진여의 뜻에 의지하는 까닭은 ‘일체 의 중생이 본래 항상 머물러서 열반에 들어 있으며, 보리의 법 을 닦을 수 있는 모양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모양도 아니고 끝 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색상(色相)을 볼 수 없다.’고 하였 다.” 무명 때문에 원래 열반적정인지 모르고 끝없이 번뇌망상을 일으킵니다. 번뇌망상 속에 열반적정이 들어앉아 있는 것입니 다. 보리의 법은 깨달음, 본래 성품을 말합니다. ‘끝내 얻을 수 없다.’는 말은 원래 갖고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 가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처임을 인식해 야 하는 것입니다. 절박함을 더하기 위해 부처가 되자고 말하지 만 우리는 원래 부처입니다. 오염이 되어 부처임을 모르는 것 뿐 입니다. 공부하는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 금 모양이나 형태는 오염된 상태에는 있지만 깨달은 상태, 진여 의 상태에서는 없습니다. 그래서 ‘색상을 볼 수 없다.’고 말한 것 입니다. 이것은 진여가 무엇인지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색상을 보는 것은 오직 오염된 업환(業幻)에 따라 지 은 것이며 지색의 불공[智色不空]의 성질이 아니므로 ‘지상(智 相)을 볼 수 없는 까닭이다.’고 하였다.” 지는 지식으로 제7식 말라식에 해당합니다. 색은 우리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계명자 상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불공(不空)이란 공(空)보다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불공은 공이 아닌 것이 아니라 공을 넘어선 것으로 ‘공 조차도 아니다’는 뜻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공의 성질이 아니다’는 것은 진여의 성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상(智相)은 제7식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것입니다. 진여가 아니므로 업을 전부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상(異相)을 밝히다. 다른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 의 질그릇이 모두 흙으로 빚어졌지만 각각 다른 인연에 따라 다 른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각기 그릇의 모양은 다 다릅니 다. 물든 것을 넘어서 본래 성품을 보니까 하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업에 물들어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업에 물들기 전 의 성품은 같습니다. 동상은 진여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니까 전 부다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은 뿌리는 같은데 나뭇가지 는 다 다른 것입니다. 뿌리인 일심은 다 같은데 열린 업들은 다 다릅니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말(보리즉번뇌, 번뇌즉보리)에 서 같기도 하다는 것은 진여에 뿌리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다 르기도 하다는 것은 업을 받아서 나타나는 각기 다른 모양을 말 한 것입니다. 업에 의해 각자 다른 모양을 가지는 것입니다. ‘보 리즉번뇌, 번뇌즉보리’에서 번뇌즉보리는 동상의 관점에서 말 한 것이고 보리즉번뇌는 이상의 관점에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 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지만 같은 것은 본래 성품입니다. 혜 능이 말했던 질문 ‘어떤 한 물건이 왔는가?’는 진여의 상태에서 답을 하면 맞는 것이 되고 분별심으로 답을 하게 되면 다른 것 입니다.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다 맞는 것 같은데 아는 사 람 입장에서 보면 맞고 틀리고가 명확하게 분간됩니다. 알면 눈 빛만 보아도 알 듯이 던지는 말도 본래 어떤 마음에서 던진 것인 지 알 수 있습니다. 물들기 전의 진여는 하나입니다. 하나의 그 마음에서 일으키는 모든 것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밖에 없습 니다. 위하고 원하는 마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 광명, 깨 달음은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끝없는 자비를 베풉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성품은 자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밖에 없는 것 이 본래 성품입니다. 


  “생멸인연(生滅因緣)의 뜻을 설하다. 생멸인연이라는 것은 이 른바 중생은 마음[心]에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이 전변하 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몸받아 살아가는 모든 것은 생멸인 연입니다. 의식은 경계에 부딪혀 일으키는 생각 제6식이고, 의( 意)는 의지대로 하려는 마음 제7식입니다. 심(마음)은 일으키는 식의 총집합체로 아뢰야식 제8식입니다. 마음, 의, 식이 전변하 는 것이 중생입니다. 심(마음), 의, 식을 알면 부처고 모르면 중 생입니다. 우리의 삶은 의(意)에 의해 살아갑니다. 내가 갖는 업 이 삶을 결정합니다. 이 의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분별하고 판단 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삶의 연속이 됩니다.

  “심에 의지함을 밝히다. 마음에 의지함이란 아뢰야식에 의지 하여 무명이 있다고 설한다.”

마음의 통이 아뢰야식인데, 불이 켜져 밝을 수도 있고(견성, 성품을 본다), 어두운 상태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밝을 때는 아 뢰야식을 본 것이고, 어두울 때는 아뢰야식을 보지 못한 상태인 무명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아뢰야식이 밝아 훤하게 보이면 각 이고, 아뢰야식이 어두워 보이지 않으면 불각입니다. 원래 아뢰 야식뿐인데, 아뢰야식이 밝아 각을 이룬 상태를 제 9식 아말라식이라고도 합니다. 식은 원래 8식까지 뿐입니다. 

  “의에 유전함을 밝히다. 불각(不覺)이 일어나서 능히 보고 나 타나며 경계를 취하며 망념을 일으켜 상속하기에 ‘의(意)’라고 말한다. 이 의(意)에는 다섯 가지의 이름이 있다.” 

  “업식을 밝히다. 첫째는 업식(業識)이라 하며,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마음이 움직인 까닭이다.” 의는 제7식인 말라식을 말합 니다. 말라식이 형성되어 나타나는 과정에는 업식, 전식, 현식, 지식, 상속식이 있습니다. 말라식의 핵심은 지식입니다. 끝없는 우주에 티끌 하나 떨어지는 것이 업식입니다.  

  “둘째는 전식(轉識)이라 하며, 움직인 마음에 의지하여 능히 보는 모양인 까닭이다.” 티끌 하나가 어렴풋한 모양을 갖추는 단계가 전식입니다. 원망하는 요소들을 모아서 어렴풋한 모양 이 형성되는 단계입니다.   

  “현식을 밝히다. 셋째는 현식(現識)이라 하며, 일체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 마치 밝은 거울이 물체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현식도 그러하여 다섯 가지 경계를 따라서 대상이 부딪히 면 곧 나타난다. 앞뒤가 없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임의로 일어나 서 항상 앞에 있기 때문이다.” 원망하는 조각들이 모여 원망하 는 분명한 모양을 갖추는 단계가 현식입니다. 여기까지는 불각 의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지식을 밝히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라 하며,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 현식이 거울에 투영되듯 나타나는 것이 지식이며 투영된 모양에 대해 구체적인 분별을 일으키는 단계가 지식의 단계입니다. 제7식 말라식이 대표적인 단계입니다.   

  “상속식을 밝히다. 다섯째는 상속식(相續識)이라 하며, 망념 이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한량없는 세상에서 선악의 업을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 까닭이며, 또 현재와 미래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켜 어긋남이 없는 까닭으로 현재에 이미 지나간 일을 문득 생각하 게 하고 미래의 일을 알지도 못하면서 망령되이 염려하게 한다. 

  그래서 삼계(三界)는 허망한 것이며,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 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도 사라지게 된다. 일체법이 모 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망령으로 생겨난 것이니 일체의 분별 은 곧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한 것이며,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 기에 모양을 가히 얻을 수 없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중생의 무 명의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머무름을 얻는다. 그러므로 일체 법은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체를 가히 얻을 수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 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식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의식을 통하여 제 육식으로 표 현됩니다. 그래서 상속식은 의식이며, 제 육식을 나타냅니다. 그 러므로 상속식을 제 육식이라고도 합니다. 

“의식의 유전함을 밝히다. 또한 의식(意識)이라는 것은 곧 상 속식이니 범부의 취착함이 점점 깊어져서 나[我]와 나의 것[我 所]을 따지고 여러 가지 허망된 집착으로 일을 따라 반연하여 육 진(六塵) 경계를 분별하므로 의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분리식(分 離識)이라고도 이름하고 다시 분별사식(分別事識: 사물을 분별하는 식)이라고도 하며, 이 식이 견애번뇌(見愛煩惱)를 의지하여 증장한다는 뜻이다.” 이 상속식이 구체적으로 TV에서 김태희를 보는 순간 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티끌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하 여(업식) 어렴풋한 형체를 이루고(전식) 더욱 뚜렷한 형체로 완 성되며(현식), 이것이 거울에 투영되어 분별을 하게 되고(지식), 분별한 것이 연속적으로 의식화되며(상속식), 이것이 구체적으 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의식). 이러한 마음으로 상대방과 감정을 교감하면서 원망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 이 증장되어 다른 형태의 원망하는 마음이 지식에 저장 되며, 이 마음이 거울에 투영되듯 현식화 되며, 어렴풋한 전식을 거쳐 무 명 업식으로 아뢰야식에 저장되게 됩니다. 


  “인연의 체상을 설하다. 인연의 깊은 도리, 인연의 차별된 상 태이다.” 인연의 체상은 깊은 도리와 차별된 상태입니다. 인과 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인연의 차별된 상태는 다 다 른 것입니다. 이렇게 몸받아 살아가는 모든 인연은 각각 뿌리에 깊은 도리가 있습니다.

“인연의 깊은 도리를 밝히다. 무명의 훈습에 의지하여 일어 나는 식(識)은 범부가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승( 二乘)의 지혜로 깨닫는 것도 아니다. 이는 보살이 처음 바른 믿 음  을 발심하여 관찰함을 의지하여 법신(法身)을 증득해도 조금 알게 되며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 알 수 없으며 오직 부처만이 다 알 수가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 로 진여가 무명에 오염된 상태입니다. 식(識)은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을 말합니다. 이 속에 든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모 르는데 생각을 자꾸 일으켜 경계에 부딪히면 알게 됩니다. 이것 은 이승(二乘) 정도라도 모릅니다. 성문, 연각, 보살, 부처 중 성 문, 연각 단계에서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연기를 깨친 연각승도 깊은 인연의 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신 통 제일인 목건련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신통력으로 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느 지옥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태어난지 본질적으로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소하게 일어나는 것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경우 원인을 알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암에 대 해 살펴봅시다. 이것은 주로 스트레스가 원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끝도 없는 조화입니다. 정신이든 육체든 조화가 깨지 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포가 일정한 속도로 분열해야 하는데 스트레스에 의해 혼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분열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덩어리 같은 것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것이 암이 되 는 것입니다. 

  법신을 증득했다는 말은 견성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말입니 다. 보살 초지도 여기에 해당함으로 견성입니다. 부처가 된 상 태가 시작된 것입니다. 인연의 깊은 도리는 보살의 구경지에 이 르러도 다 알 수 없고 오로지 부처가 되어야만 다 알 수 있습니 다. 그 전에는 부분적으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 는 이 인연의 깊고 깊은 도리가 부처가 되어야만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유를 설명하면 본래부터 자성(自性)은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어서 이 무명에 의하여 물들게 되어 염심(染心)이 있는 것이 다. 비록 오염된 마음이 있지만 항상 변하지 않는 까닭으로 이 뜻은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우리는 오염된 것만 본 다)” 청정이란 물들기 전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오염되었기 때 문에 오염된 마음을 일으켜 끝없는 중생의 삶이 만들어지는 것 입니다. 나타난 각자 형상은 오염된 업만큼 만들어져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는 끝없는 자기애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것을 깨트려야 뿌리에 있는 자성(自性)을 보고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을 깨트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끝도 없이 일으키는 마음이 란 아집, 아만, 아치, 아애입니다. 오염되어 있지만 오염된 것의 본질인 진여는 항상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으니까 일심이 되면 다 압니다. 변하면 우리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오염된 업 은 변하지만 오염되지 않는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중생은 본 질을 못보고 오염된 것만 봅니다. 평생 오염된 것만 가지고 살 아갑니다. 불교를 배우는 것 보다 더 어마어마한 인연은 없습니 다. 수십 생을 살면서 불법, 불도, 깨달음의 세계를 감지하고 그 에 따라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복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수많 은 생을 살아가더라도 어느 생에 진리를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진리 만나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쉽게 오지 않습니다. 불교는 본질, 진리에 대한 공부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본질에 대한 것은 다 같습니다. 다르게 표현했다고 해 서 다를 수 없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 다. 우리는 평생 오염된 것만 가지고 살기 때문에 이기적으로 살 아갑니다. 이것의 뿌리를 보아야 합니다.

  “심성인의 체상을 밝히다. 이른바 심성(心性)이 항상 무념인 까닭으로 불변(不變)이라 이름한다.” 해산스님의 선시를 한편 보도록 합시다. ‘남담북촌에 노을이 지면 석양의 목동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마음이 마음을 보고 마음이라 하는 그 마음을 알기 는 어렵지만 본래면목은 생긴 그대로 변함이 없네.(해산)’ 끊임 없이 변하는 경계를 보면 다 다릅니다. 하지만 부처는 불변하는 본질을 봅니다. 본질, 진여를 보기 위해서는 무념의 상태가 되 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 수행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는 것입니다. 파도가 잔잔해지면 물 아래가 보입니다. 하지만 물을 흔들어 흐리게 하면 물 아래가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 가라 앉으면 바닥이 보입니다. 무념은 이런 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없는 분별심과 번뇌망상 때문에 아뢰야식, 본래 성품 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를 보기 위해 나를 무념의 상태로 만들어 야 합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어딘가에 몰두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무념의 상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름대로 보이 기 시작합니다. 불교는 이 무념의 상태가 되는 방법을 몇 천 년 동안 체계화시켜놓았습니다.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모든 것들 로도 가능합니다. 가능하지만 도달하기는 불교보다 어려울 것 입니다. 과거 사람들은 수많은 경험, 시행착오를 통해 도달하였 지만 우리들은 과거의 정보를 토대로 따라만 가면 쉽게 도달합 니다. 예를 들어 학창시절 배웠던 함수는 요령을 배우지 않아도 어떻게 하면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원리를 배우면 대입하여 쉽 게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함수의 원리를 배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교는 무념으로 갈 수 있는 법칙을 체계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세상 어떤 공부라도 다 가 능하지만 불교를 통해 비교적 체계적으로 쉽게 갈 수 있습니다.

  팔정도의 마지막 두 개는 무념에 가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마 지막 두 개란 정념과 정정입니다. 정념은 바르게 생각해서 지혜 를 얻는 것입니다. 정정은 바른 지혜를 통해 하나의 생각에 깊 이 빠져드는 것입니다. 정정은 가라앉히는 작업과 같은 것입니 다. 정념은 잘 가라앉히기 위한 작업이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이 정념과 정정도 불교 이외에도 세상 어디에서나 깔려있는 것 들입니다. 이것과 관련된 적절한 게송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해 산 스님의 게송일 것입니다. ‘마음이 마음을 보고 마음이라 하 는 그 마음’이 바로 일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여인 마음, 일 심인 마음, 본래의 마음입니다. ‘본래면목은 생긴 그대로 변함 이 없네,’란 말은 말 그대로 그대로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깨 우친 것이나 약 2500년 지난 우리들이 깨우친 것이나 같습니 다. 조주의 화두나 임제의 ‘할!’이나 다 같은 것입니다. 본래 성 품은 불변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일심이 기 때문입니다. 


  “무명연의 체상을 밝히다. 하나의 법계(法界)임을 알지 못하 기 때문에 마음이 상응하지 못하여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 을 무명이라 하는 것이다.” 중생들은 각자의 세계를 갖고 있고 자기 세계 속에서 자기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무명에 물들면 하 나의 법계임을 알지 못합니다. 물들기 전의 종이는 다 같은 종 이지만 각자 자기만의 색깔로 물들이면 다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끝도 없이 일어나는 무명 속에서 나의 몸을 만들어서 업을 지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본 래 성품을 보면 다 해결됩니다. 자기의 업대로 빗어놓았지만 알 고 보면 다 하나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들은 끝없이 헤매고 있습니다.


  “염심의 여섯 가지를 밝히다. 집상응염(執相應染), 부단상응 염(不斷相應染),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 현색불상응염(現 色不相應染),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 근본업불상응염 (根本業不相應染)이다.” 진여가 무명에 물들면 여섯 가지 마음이 나옵니다. 앞의 세 개는 상응염이고 뒤의 3개는 불상응염입니 다. 앞에 나온 6추 3세에서 3세는 무명업상, 능견상, 경계상이 었습니다. 이 가운데 무명업상은 근본업불상응염과 연결되고, 능견상은 능견심불상응염과 연결되고, 경계상(현식)이 현색불 상응염과 연결됩니다. 그 다음 6추로 넘어가서 지상이 분별지 상응염과 연결되고 상속상이 부단상응염과 연결되고 나머지는 집상응염과 연결됩니다. 불상응염 3가지는 3세와 연결되어 제 8식 아뢰야식과 상응하고, 상응염 3가지는 6추와 연결되어 제7 식 말라식과 제6식과 상응합니다. 그 가운데 분별지상응염은 제 7식 말라식과 상응하고 부단상응염은 제6식과 상응합니다. 제6 식, 제7식이 생기려면 근거 뿌리가 모여야 하는데 그것이 집 상 응염입니다. 우리는 수(受), 느낌을 안이비설신으로 받아 들이 고 그 느낌이 모입니다. 안이비설신이 집의 입구 역할을 합니다. 이것들이 식이 작용하는 근본재료들을 제공합니다. 이 생에서 짓는 업의 대부분은 눈을 통해 짓습니다. 눈을 통해 형상을 보 는데 이것이 마음을 일으키는데 많은 작용을 합니다. 보는 것은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고 맛을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보다 접하 기 쉽습니다. 이렇게 모으는 것이 집상응염입니다. 

  부단상응염이란 끝도 없이 오염된 것을 일으키는 것이며, 분 별지상응염은 분별된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분별은 업 에 따라 분별합니다. 우리가 쓰고 아는 일반적인 단계는 상응염 의 단계입니다. 상응염은 오염된 것에 상응한다는 말입니다. 나 의 업과 내가 일으키는 생각은 같습니다. 나의 의식과 나의 업 은 같은 것입니다. 내 업만큼 생각을 일으킵니다. 상응합니다. 내 안에 없는 엉뚱한 것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중생들 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부처는 자기중심적으로 분별, 판단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생각합니다. 

  불상응이란 상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진여는 오염된 것 으로 볼 때 모두 상응하지 않습니다. 물든 중생이 일으키는 생 각은 본질과 상응하지 않습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

  늙음과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수(受) 느낌 다음 애가 옵니다. 수에서 애로 넘어가면 윤 회하는 몸을 받게 됩니다. 부처님의 어느 전생에 왕자로 태어나 왕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자비희사를 열심히 닦을 때였습니다. 왕비의 마음에 왕의 죽음에 대한 징조가 떠올랐습니다. 보통 사 람이면 죽을 때 불길한 징조가 보이는데, 왕비가 왕을 보니 편

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왕비가 왕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나라와 백성과 나를 측은히 여겨 절대 돌아가셔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왕이 말합니다. “나에게 더 이상 갈애를 일 으킬 말을 하지 마시오. 내가 당신과 백성과 이 나라를 측은히 여겨 갈애의 마음을 일으켜 갈애를 품고 죽는다면 갈애를 원인 으로 마음에 집착이 생기고 집착을 원인으로 불선의 업을 짓게 됩니다. 왕비시여, 부디 나에게 갈애를 일으키는 말을 하지 마 시고 갈애를 제거하는 말을 해주시오.” 그 말을 듣고 왕비는 말 합니다. “왕이시여, 이 나라와 저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지 마십 시오. 수행을 하면서 죽음을 맞아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십시오.” 누구를 위해서 사는 삶 속에서 갈애가 나옵니다. 내 자신을 위 한 것도 되고 남을 위한 것도 됩니다.

  축생은 우리 가까이 있는 동물들입니다. 축생은 어리석고 탐 욕이 많은 과보로 태어나며 태생과 난생이 있습니다. 탐욕스럽 다고 다 부자는 아닙니다. 진정한 부자는 많이 베푸는 사람입니 다. 베푼 만큼 돌아옵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이것이 인과입니다. 전생에 베푼 만큼 내게 돌아옵니다. 유명하고 위대 한 사람들은 세세생생 많은 생명들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들입 니다. 그래서 유명해지고 위대해지고 부귀해지는 것입니다. 축 생은 두려움과 고통의 세계입니다. 축생들은 끝도 없는 두려움 과 고통의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수명도 정해져 있지 않고 과 보만큼 살다가 죽습니다. 인간이 동물이 될 수 있고 동물이 인간 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동물에 마음이 매여 그 동물을 애 지중지 하다보면 키우던 동물은 인간으로 환생할지 몰라도 본인은 그 동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삶 은 돌아보지 않고 자기가 키우다가 죽은 개가 좋은 세상에 태어 날 것을 기대합니다. 축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점을 돌 아봐야 합니다.

  아귀에 대해 살펴봅시다. 인간이 살아서 아귀로 살면 죽어서 도 아귀가 됩니다. 아귀는 인색하여 먹지를 못합니다. 다른 것은 불로 변해 먹지를 못하는데 발우 공양 받으며 받은 청정수만은 먹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인색하여 남에게 베풀지 못하면 살아 서도 아귀의 마음으로 살고 이렇게 살면 죽어서도 아귀가 됩니 다. 탐욕스러우면 축생 과보를 받지만 인색하면 아귀 과보를 받 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집착이 우리를 아귀로 만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 는 것이 과연 나의 것일까요?

  아수라에 대해 살펴봅시다. 아수라는 흔히 나쁜 신, 악신으로 이야기합니다. 아수라는 성냄의 과보로 태어나며 화생으로 태 어납니다. 수명은 정해지지 않고 과보만큼 살다가 다른 생명으 로 태어납니다. 불길하고 검습니다. 바다나 강변, 숲 속의 으스 스한 그런 곳에 삽니다. 아수라는 항상 굶주린 상태로 살며 목마 른 상태로 삽니다. 수다원이 되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사 악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생에서 공부해서 진리를 인식하 고 믿음을 가지면 수다원의 단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의 삶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시작도 못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긴가민가해집니다. 

  법의 인연에 대해 살펴봅시다.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후 첫 고민이 ‘이 법을 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과연 이 법을 누구에 게 설할 것인가?’였습니다. 부처님은 본인이 도를 이룬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도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여 설할 것이라 결론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설하실 것인가를 고민한 후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처음으로 무색계의 3선정에 들게 한 스승을 생각합니다. 그는 알라라 칼라마로 찾아보니 부처님께 서 도를 이루기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 다음 무색 계의 4선정을 알게 해준 스승을 생각합니다. 그는 웃다카 라마 풋다로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기 그 전날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자신과 함께 수행한 다섯 비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들을 찾아 가 이 법을 전합니다. 이와 같이 법의 인연이란 쉽지도 않으며 또한 오묘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어떻게 여기 와서 공부할지 모릅니다. 얼마나 오묘한 인연입니까. 알고 보면 이렇게 저렇게 인연이 얽혀 있는데 모르니까 다 남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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