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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서론, 귀경계, 인연분, 입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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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6,427회 작성일 21-07-10 23:19

본문

제2강

(0) 귀경게 

(0-1) 귀경과 짓는 의도를 서술하다 (0-1-1) 삼보에 귀의하다 

(0-1-1-1) 불보를 찬탄하다 

[진제1] 시방세계에서 가장 수승한 업으로 두루 아시며 색이 걸 림이 없이 자재하신 세상을 구제하는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께 귀명합니다. 

歸命盡十方, 最勝業遍知, 色無礙自在, 救世大悲者, (0-1-1-2) 법보를 찬탄하다 

그 몸의 형상이 법성인 진여의 바다에 귀명합니다. 及彼身體相, 法性真如海,

(0-1-1-3) 승보를 찬탄하다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고 여실히 수행하는 이들께 귀명합니다.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0-2) 논을 지은 대의를 총괄적으로 표하다 

(0-2-1) 중생을 교화하다

[진제2] 중생으로 하여금 의심을 제거하고 잘못된 집착을 버리 게 하여 

為欲令眾生, 除疑捨邪執, 

(0-2-2) 불도를 계승하다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부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 는 까닭이다.

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 

(0-3) 논체를 정립하다 

(0-3-1) 논의 핵심을 세우다

[진제3] 논하기를, 일심법이 대승의 신심을 일으키므로, 이러한 까닭으로 마땅히 설한다.

論曰:有法能起摩訶衍信根,是故應說。 

[진제4]  (0-3-2) 논을 다섯 단락으로 분류하다 

설명함에 다섯 가지 구분이 있다. 첫째는 인연분(因緣分)이며, 둘째는 입의분(立義分)이며, 셋째는 해석분(解釋分)이며, 넷째 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이며, 다섯째는 권수이익분(勸修利 益分)이다.

云何為五?一者、因緣分, 二者、立義分, 三者、解釋分, 四者、 修行信心分, 五者、勸修利益分。

(1) 인연분

(1-1) 논을 지은 인연을 설하다 

[진제5] 처음에 인연분을 설한다. 

[진제6] 묻기를

“어떤 인연으로 이 논을 지었는가?” 대답하기를

“이 인연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 인연의 총상(總相)이니,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괴로 움을 여의고 구경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함이며, 세속의 명리(名利)와 공경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여래의 근본 뜻을 해석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바르게 알게 하여 어긋나지 않게 하는 까닭이다. 

셋째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법을 감당하여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는 까닭이다. 

넷째 선근이 적은 중생으로 하여금 수행하여 신심을 익히게 하 는 까닭이다. 

다섯째 방편을 보여서 악한 업장을 녹이고 마음을 잘 지켜 어리 석음과 교만함을 철저히 여의어 삿된 그물에서 벗어나도록 하 는 까닭이다. 

여섯째 지(止)와 관(觀)의 수습함을 나타내어 범부와 이승(二乘) 의 마음의 허물을 대치(對治)하는 까닭이다. 

일곱째 염불(念佛)에 일념하는 방편을 나타내어 부처님 전에 왕 생하여 결정코 신심에서 물러나지 않도록 하는 까닭이다. 여덟째 이익을 보여줌으로써 수행을 권유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논을 짓는다.” 

初說因緣分。問曰:「有何因緣而造此論?」 答曰:「是因緣有八種。云何為八?

一者、因緣總相,所謂為令眾生離一切苦得究竟樂,非求世間 名利恭敬故。二者、為欲解釋如來根本之義,令諸眾生正解不 謬故。三者、為令善根成熟眾生於摩訶衍法堪任不退信故。四 者、為令善根微少眾生修習信心故。五者、為示方便消惡業障 善護其心,遠離癡慢出邪網故。六者、為示修習止觀,對治凡 夫二乘心過故。七者、為示專念方便,生於佛前必定不退信心

故。八者、為示利益勸修行故。有如是等因緣,所以造論。」 

(1-2) 논을 지은 구체적 이유를 밝히다 

[진제7] 묻기를

“경속에 이러한 법이 갖추어 있는데, 어찌하여 거듭 설명해야 하 는가?”

답하기를

“경속에 비록 이러한 법이 있지만 중생의 근기와 수행이 같지 않 으며, 받아 지녀 이해하는 인연(緣)도 다른 까닭이다.” 이른바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에는 중생의 근기가 영리하고 법 을 설법하는 사람도 색(色)과 심(心)의 업이 수승하여 원음(圓音) 으로 한 번 연설하면 다른 종류의 중생들이 평등하게 이해하므 로 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래가 열반한 후에 어떤 중생은 능히 스스로의 힘으로 널리 듣고 이해하였으며,  어떤 중생은 능히 스스로의 힘으로 적 게 듣고 많이 알기도 하였으며, 어떤 중생은 스스로의 힘은 없으 나 많은 논에 의하여 이해하였으며, 어떤 중생은 광대한 논서의 많은 글을  번거롭게 여겨 마음으로 총지(總持)와 같이 글의 분 량은 적지만 많은 뜻을 가진 것을 좋아하고 잘 이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같이 이 논은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한없는 뜻을 총섭 하려는 까닭으로 이 논을 설명하는 것이다.

問曰:「修多羅中具有此法,何須重說?」

答曰:「修多羅中雖有此法,以眾生根行不等、受解緣別。

所謂如來在世眾生利根,能說之人色心業勝,圓音一演異類等

解,則不須論。

若如來滅後,或有眾生能以自力廣聞而取解者;或有眾生亦以 自力少聞而多解者;或有眾生無自心力因於廣論而得解者;自 有眾生復以廣論文多為煩,心樂總持少文而攝多義能取解者。 如是此論,為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應說此論。」 

(2) 입의분

[진제8] 이미 인연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입의분(立義分)을 설명한다.

次說立義分。

(2-0) 대승의 법과 의를 함께 표하다 

대승이란 총괄하여 설명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法)이 며, 둘째는 의(義)이다. 

摩訶衍者,總說有二種。云何為二?一者、法,二者、義。 

(2-2-0-0) 법이라는 것은 중생심이다

법은 중생심(衆生心)을 말한다. 이 마음은 일체의 세간법(世間 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을 포괄하며, 이 마음에 의지하여 대승 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 

所言法者,謂眾生心,是心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依於 此心顯示摩訶衍義。

(2-2-1-0) 심진여상은 대승의 본체이다

왜냐하면 이 마음의 진여상(眞如相)은 대승의 체(體)를 나타내 기 때문이다.  

何以故?是心真如相,即示摩訶衍體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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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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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승기신론의 저자가 마명입니다. 마명은 80년경부터 150 년경까지 산 인도의 승려이자 불교 사상가입니다. 마명은 대승 기신론 이외에도 ‘붓다차리타’라고 하는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대서사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대승기신론은 양이 많지 않습니 다. 11,000 글자 정도로 구성되어 있는 얇은 책 한권 분량 밖 에 되지 않습니다. 적은 분량이지만 이 우주의 진리가 간단명료 하게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불기 몇 년이라고 합니다. 이 불기 의 시작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을 때부터 시작됩 니다. 부처님의 열반을 불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마명이 살았 던 때는 부처님 불멸 후 500년이 지난 후입니다. 한 나라나 왕 조가 일어나서 망하기 까지 짧게는 약 300년 길게는 약 500년 정도가 걸립니다. 

  마명과 부처님 열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불멸 후 100년부터 부파불교가 시작됩니다. 부처님 열반 후 부 처님의 많은 제자가 인도 전역으로 전도를 떠납니다. 그리고 점 점 지역화되고 자기화된 불교를 만들어갑니다. 제자들이 부처 님께 많은 것을 배우지만 그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을 더 많이 가르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지방은 법화경 중심의 불교가 되어 있고 어떤 지방은 금강경 중심의 불교가 되어 있습니다. 부파불교가 될 수밖에 없

었던 이유는 전법을 떠난 제자들이 그 지역에 머물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잘 알고 있는 내용을 가르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 니다. 그래서 백 년이 지나고 이백 년이 지나면서 지역마다 불 교의 특색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화폐 경제가 발달된 상업 지역이 생 겨나게 되고 이 지역에서는  부처님 당시와는 다르게 밤늦게까 지 일하고 늦은 아침(11시경) 시간에 공양을 하게 되는 특수 상 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지역에 거주하는 승려들은 공양을 제대로 못 받게 됩니다. 승려들은 자기 거주지역 외 다른 지역 으로 걸식을 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승려들 이 총무원(승단 본부)에 건의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정하신 공양 시간이 아니어도 공양을 할 수 있게 해달라, 화폐를 공양대 신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건의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총무원에 서는 부처님의 법에 어긋나는 비법(非法)이라고 해서 통과시켜 주지 않습니다. 건의를 한 승려들은 몇 대를 그곳에서 정착해서 살았으므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이살리(Vaishali) 의 비구들은 다시 모입니다. 그들은 회의를 한 후 “우리가 주장 하는 내용은 비법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정한 율에 어긋나지 않 는 정법(正法)이다. 총무원에서 뭐라고 해도 우리는 정법이라 고 생각하고 시행하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이렇게 갈라져 분 파가 생기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각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발전, 변형되었던 불교가 부파불교로 급속히 발전하게 됩니다. 많은 경전이 부파불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집니다. 경전의 연구 와 부파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사이에 불멸 후 300년이 지납

니다. 그 때 불교를 지금과 같은 세계 종교로 만드는데 일등공 신 중 한 사람인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전 인도를 통일합 니다. 인도가 불교 국가가 됩니다. 아쇼카 왕에 의해 불교가 폭 발적으로 흥기해서 대승불교가 일어날 수 있는 기틀이 만들어 집니다. 그 후 불멸 후 500년 정도가 되면 부파불교가 완성됩니 다. 이렇게 해서 대승불교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대승경전이 생 산되기 시작합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장례를 재가 신자들에게 맡깁니다. 만약 부 처님의 장례 절차를 승려들에게 맡겼다면 부처님 당시의 승단 은 확장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부처님을 화장한 후 생긴 사리 를 부처님께서 살아 생전 가장 인연이 있었던 8곳에 사리탑을 만들어 보관하게 됩니다. 이 8개의 사리탑이 승려들의 절에 세 워진 것이 아니라 신자들 중심의 절 밖에 세워집니다. 이것이 앞 으로 전개될 불교의 방향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절 밖에 탑이 있 다 보니까 기존의 부처님을 찾던 신자들은 부처님이 계시지 않 는 교단의 절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놓 은 불탑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사리탑을 중심으로 재가 신자들 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불탑신앙이 형성 됩니다. 승단은 부처님 열반 후 계속 축소되지만 불탑을 중심으 로 한 새로운 불교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확장됩니다. 이러한 것 이 아쇼카 왕 때는 8개의 불탑의 사리를 나누어 전 인도에 불탑 을 세우게 됩니다. 아쇼카 왕 때는 전 인도에 새로운 불교가 어 느 정도 구축된 상태가 됩니다. 불탑 중심의 새로운 불교 흐름과 

승가가 결합되면서 대승불교라는 새로운 불교가 창출되게 됩니 다. 대승불교는 기존의 승가라는 틀에서 벗어나 형성된 적극적 이고 포용적인 새로운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목표였던 아라한이 새로운 불교 이상인 보살로 바뀝니다. 여기 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란 말이 등장합니 다. 한 세상 멋지게 잘 살아 진리를 터득하고 나와 함께 살아가 는 모든 생명도 깨달음의 길에 나아가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 이 불교의 이상이고 인류의 이상이며 모든 생명의 이상입니다.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대승기신론의 내용들은 원효의 대승기 신론소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다 명나라 4대 승려 가 운데 한 사람 감산 덕청의 대승기신론약소를 더한 것입니다. 대 승기신론약소는 현수의 대승기신론의기에 약소를 붙인 것입니 다. 방대한 소를 요약해서 알기 쉽게 한 것이 약소입니다. 여기 에다 제가 알고 있는 불교 지식과 이 시대의 언어를 더한 것입 니다. 저는 대승기신론소 만큼 불교 자체를 명확하게 밝힌 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불교가 내걸고 있는 기치가 바로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 인심, 견성성불입니다. 교외별전이란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 은 경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떠나서 있다는 것입니다. 불립문자는 진정한 진리는 글이나 문자로 전할 수 없다는 것입 니다. 직지인심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진리 는 내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견성성불이란 본성을 깨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배우려는 일심(一心) 을 이 사람들은 이렇게 풀어서 불교를 일으킨 것입니다. 앞에서 명나라 4대 승려가 나왔습니다. 이 중 한 사람인 자백 진가의 시 한 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한번 웃음에 본디 까닭 있나 니 / 천지가 이 몸 용납치 않을 줄이야 그 어찌 알았으랴. 

  이에 어머니 낳아주신 발을 거두나니 / 무쇠나무 꽃이 핌은 봄 아녀도 좋으니라.” 이 몸 이렇게 형상을 타고 난 것이 아니 라는 것입니다. ‘무쇠나무 꽃이 핌은 봄 아녀도 좋으니라.’는 진 리를 깨닫는 것은 어느 때인들 좋다는 말입니다. 이런 시가 대 승기신론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언급해 보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앞서 언급했던 감산 덕청의 말을 한번 살펴봅시다. “나는 젊어서 유불선을 다 보고 물러가서 깊은 산 흐르는 물가에 고요하게 앉아서 마음을 관(觀)하였다. 이로 말 미암아 삼계가 오직 이 마음 하나이며 만법이 오로지 이 마음의 표현인줄을 알았다. 이 심식(心識)을 관하여 보니 일체형상이 오 직 마음의 그림자이며 일체 소리가 마음의 메아리이다. 이 마음 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일체 성인의 그림자를 단정히 쫓아가 는 것이며 일체 언교(言敎)는 모두 이 메아리를 순(順)하는 것이 다. 만법은 오직 마음으로 짓는 일이다.” 고요하게 앉아서 마음 을 보는 것이 감산 덕청 공부의 핵심입니다. 이는 최고의 경지 에 이르게 되는 밑거름이 됩니다.


  먼저 일심(一心)에 들어갑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중 의 하나가 정의하는 것입니다. 2 + 3 = 5입니다. ‘왜 2에다 3를 더하면 5가 되는지 설명해보시오.’ 하면 어떻게 설명하겠습니 까? 정의를 모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돌이 한 개 있는 것을 1이라 정의합니다. 한 개, 한 개 있는 것을 2라고 정 의합니다. 한 개, 한 개, 한 개 있는 것을 3이라 정의합니다. 이 렇게 10까지 정의합니다. 그러니까 2에다 3을 더하면 5가 되는 것입니다. 정의가 제대로 되면 수월해집니다. 모든 사물은 ‘제 법무아’(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라고 주장할만한 독립된 실체가 없다.)라서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심입니다. 떨어져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 하나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법(모든 존재)의 맑음과 흐림을 가립니다. 즉 깨끗함 과 더러움을 가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둘이 아닙니 다. 본질은 하나지만 깨닫지 못하면 둘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본래 청정법신이지만 오염된 것을 나라고 생각해서 세세생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정법신과 나를 다른 것으로 보게 됩니다. 진리를 모르고 살아가면 오염된 마음이 일으키는 생각이 맞는 줄 알고 살아갑니다. 돈이나 권력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가 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돈을 쓰는 마음, 권력을 부리는 마음입 니다. 그래서 이 오염된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오염된 것을 제 거하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아집과 무지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 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평생 사랑하다가 갑니다.


  우리가 참됨과 거짓됨의 두 문을 세우지만 그것이 따로 별개 의 것이 아닙니다. 참됨은 진여문이고 거짓됨은 생사문을 가리 킵니다. 진리와 거짓이라는 두 문을 이해하기 쉽게 세우지만 실은 하나가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두 개로 보이는 것뿐입 니다. 별개의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짓됨을 정화시켜 참됨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합니 다. 진여가 따로 있고 생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에 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진여가 되기도 하고 생사가 되기도 합니 다. 우리 속의 오염만 걷어내면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가 따로 있고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심, 하나입 니다. “둘이 아닌 이 자리에서 모든 사물은 알찬 것이 되며 그것 은 조금도 헛되지 않아 그 스스로 모든 것을 환히 아는 까닭에 이를 불러 마음이라 하는 것이다.”고 합니다. 이럴 때 마음은 일 심이고 물들기 전의 마음입니다. ‘견성’은 나의 본래 성품을 본 마음입니다. 내가 일으키는 이 마음을 잘 알기만 하면 진리의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별개가 아니라 같이 붙어있는 서로 다른 면일 뿐입니다. 감산 덕청이 끊임없이 생각했듯이 우 리도 뭔가 조용히 관조하고 생각을 해보면 진리의 세계, 깨달음 의 세계, 일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가 있으랴! 하나란 가 짐이 없단 말이니, 어찌 마음을 누구의 것이라고 하랴! 이러한 마음의 도리는 언설과 사려를 절(絶)한 것으로 무엇이라고 지목 할 바를 몰라 구태여 일심(一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일 심은 사실 ‘하나’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둘’ 자체 가 없으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는 가짐이 없어 누 구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말로 할 수도 없고 생 각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 자체도 끊어진 곳입니

다. 구지 이름을 붙이려니 일심(一心)이란 말이 가장 적합하더 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마음, 일심에 대해 말 한 것입니다.


  “일심을 나누니 두 개의 문이 있는데 진여문과 생사문이다. 두 개의 문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에서 나와서 하나 로 돌아가는 것이며, 돌아가 같은 것이다. 수십 명의 도공이 기 왓장을 만들었을 때 만들어진 기왓장은 다 다르지만(생멸문) 모 두 흙(진여문)을 사용하여 만들었다는 점은 같은 것이다.” 일심 에는 진여문과 생사문이 있는데 진여문은 진리의 세계이며 생 사문은 생사의 세계입니다. 물들지 않은 세계와 물든 세계입니 다. 이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나와서 돌아가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생사=보리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치지 못하고 보면 유위의 세계지만 진리를 깨치고 보면 그대로 여여 (如如)한 무위의 세계일 뿐입니다. 무위의 세계가 따로 있고 유 위의 세계가 따로 있고 유루법이 따로 있고 무루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가 하나인데 우리가 깨친 눈으로 보느냐 오 염된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원래 물이 있는데 물감 을 섞으면 오염된 물이 됩니다. 여기서 물감이 가라앉으면 원래 물과 같게 됩니다. 도공을 예로 들어보면 각 도공들이 만들어낸 기왓장은 각기 다 다릅니다. 모두 흙을 사용해서 만들었다는 점 은 같습니다. 생사문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모두 다 다른 사람 입니다. 하지만 오염된 것을 다 걷어내면 우리가 갖고 있는 본 성은 모두 똑같은 하나입니다. 오염되어 있으니까 아집밖에 없

어서 자기 자신 밖에 모르고 자기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평생 을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 같지만 위하는 척을 할 뿐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집과 무지 때문에 진정으로 위하 지는 못합니다. 위해도 자기 생각대로 위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위하는 마음은 깨달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진여에 대해 좀 더 살펴봅시다. 진여는 진리입니다. 진은 ‘참 되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여는 ‘한결같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 니다. 이 진여는 인도어로 Tathata라고 합니다. 원효는 진여를  버릴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無遺] 진이고 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無立] 여라고 했습니다. 참된 것에는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 평등하기 때문에 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원효의 말을 더 살펴봅시다. “왜 참되고 한결 같다고 하느냐?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음이 다 참된 까닭이며 아무 것도 보탤 것이 없음이 이 세상 모든 것이 한결같은 까닭이 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설명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까닭에 그냥 ‘참되고 한결같다’고 할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 을 진여라고 하기도 하고 여여라고 하기도 하고 일심이라고 하 기도 합니다. 원효는 이 진여의 마음을 매우 깊고[甚深] 매우 넓 고[廣大] 무궁무진한 보배를 지니고[百寶無窮] 모든 것을 나타내 는 것[萬像影現]이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의 세계란 것은 이 말이 주는 의미를 내가 읽고 느끼는 것만큼 내 속에 스며들고 젖어들 게 됩니다. 이 깨달음의 세계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할만큼 넓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 세 상에 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귀한 보배 덩어리입니다. 진여의 마음은 모든 것을 나타냅니다. 원효는 이 세상 모 든 것이 진여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생각 돌이키면 진여의 세상으로 갈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진 여의 마음을 일으키지만 내가 모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갑니다. 

  “그래서 진여의 마음은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의 큰 바다도 그 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영원히 모든 오해를 여의었으며 만물이 그 안에 들어있으며 덕이란 덕은 모두 갖추었으며 상이란 상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이것은 앞에 나온 내용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한 것입니다. 깊고 넓고 보배롭고 모든 것을 나타내는 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 법, 승의 진리가 있습니다. 어떤 종교 단체 든 불, 법, 승이 있습니다. 깨달음, 깨친 내용, 진리를 추구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승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살펴봅 시다. 승은 승가로 산스크리트 원어 ‘상가(Sangha)’와 연관이 있습니다. 상가는 공동체란 뜻입니다. 이 상가란 말이 스님으 로 변화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님을 ‘비구’라고 합 니다. 이것은 산스크리트어 비쿠(bhikkhu), 비크슈(bhiksu)에 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쿠(bhikkhu)의 뜻은 스스로 밥 을 해먹는 것이 아니라 걸식을 하면서 밥을 얻어먹는 자를 말합 니다. 이 승은 네 가지 부류 사람들의 공동체로 분류됩니다. 바 로 비구, 비구니, 우바새(upasakha), 우바이(upaikha)입니다. 비구, 비구니는 가정을 갖지 않고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바 새, 우바이는 가정을 갖고 세속에 살면서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공부하는 조건이 어렵지만 수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원래 는 승가가 이렇게 사부중 중심이었는데 현재는 스님 중심의 이 부중 중심입니다. 여기서 사부중의 ‘중’은 무리 중(衆)으로 현재 는 승려를 비하하는 의미로 쓰이지만 원래는 비하하는 뜻은 아 닙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정신에 따라 생활하는 집단이 승이고 승가입니다. 원효는  승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가지 일 이 행해짐에 따라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고 그 하나하나의 일이 모두 진리 그대로이다.” 승이 지극한 마음으로, 깨달음을 추구 하려는 마음으로 행위하는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에 따라 살아 가는 사람들이 바로 승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끝없는 공덕의 본 체라고 하여 ‘무량공덕장’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중요한 문제는 수행(bhavikata)과 연관이 있습니다. 수행(bhavikata)의 Bha는 Bhu에서 파생한 낱말로 ‘있다’, ‘이 다’, ‘되다’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수행(bhavikata)은 ‘있게끔 하는 것’, ‘이게끔 하는 것’, ‘되게끔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 다. 내가 부처를 있게끔 하는 것, 부처이게끔 하는 것, 부처되게 끔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 속에 있게끔 하는 것, 진리이게끔 하는 것, 진리되게끔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수행을 통해 주장 한 것은 바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승불교 가 부르짖은 것이 보살의 실천이상을 제시한 것입니다. 인간다 운 인간을 보살로 제시하고 실천이상으로서 “상구보리 하화중 생(上求菩提下化衆生)”을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가벼운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위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입니다. 원효는 이 수행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정적 인 내관으로 나의 내부로 파고드는 공부이고 둘째는 동적인 현 실참여로 외부로 발산하는 공부입니다. 우리가 정적인 내관이 익으면 누군가를 도와주고 베풀어주고 행위하게 됩니다. 이것 은 동적인 현실참여입니다. 알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으 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정적인 내관이란 여실수행으로 있는 그 대로 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심히 관조해서 모 든 것이 있는 그대로 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 것에도 결박되지 않는 지혜로움인 무장지(無障智: asangata) 가 생깁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동적 인 현실참여는 편수행으로 이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 은 두루 모든 중생과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도 와줘도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이 동적인 현실참여는 아 무 것도 파괴하지 않으며 무엇으로부터도 파괴되지 않는 지혜 입니다. 내가 현실참여를 해서 어떤 행동을 해도 아무것도 파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돕지만 상대방의 자존 심같은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무엇으로부터 도 내가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가 생기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 지혜를 무애지(無礙智: apatihata)라고 합니다.


  앞서 불법승을 이야기하면서 ‘이 목숨 거두어 돌아갑니다.’ 라는 대목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목숨 거두어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원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거들어준 것에 대한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는 이웃에게 베풀어주는 일, 즉 보시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인간다운 인간이 지켜야 할 모든 일, 지계를 말했고 참고 용서하는 일, 인욕을 말했고 원하는 세 상으로 나아가는 일, 정진을 말했고, 나아가는 힘인 지, 나아가 는 방향, 관을 말했습니다.

진정한 보시란 청정심, 주고받는 어떠한 마음도 일으키지 않 는 상태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 지선 의 삶을 살기 위해 지켜야할 모든 것이 지계입니다. 

  인욕은 참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참고 용서하는 것만큼 위대 한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에게 조금만 맞으면 좋아하 고 조금만 수가 틀리면 뒤도 안 돌아봅니다. 우리는 모두 가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직장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 사 람을 만나고 함께 하면서 참고 용서하는 일만큼 위대한 일은 없 습니다. 하지만 조금도 못 참고 화를 내면 그것이 내게 돌아옵니 다. 우리가 관계 속에서 일방적으로 잘하는 것은 없습니다. 반면 일방적으로 못하는 것도 없습니다. 대부분 싸움은 다 자기가 맞 다고 생각해서 일어납니다. 상대방이 맞다고 생각하면 서로 싸 울 것이 없습니다. 몇 분만 참으면 그리고 일주일만 지나면 ‘내 생각도 맞지만 상대방 생각도 맞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렇게 되면 상대방이 어땠는지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지나고 나 면 다 알고 있고 알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기 싫을 뿐입니다. 내 가 얼마나 잘했고 못했는지는 다 압니다. 

  정진은 원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살려면 정진을 해야 합니다. 본전치기 하는 삶은 살기 쉽습니다. 전생의 업에 의해 살아가는 것까지는 쉽 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잘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진이 필요합니다. 이 생에서 이 몸 받아 정진 못하고 가는 사 람은 본전치기 삶입니다. 이 정진에 나아가는 힘인 지와 나아가 는 방향인 관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무언가 하고 싶다 면 힘과 방향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내 안에 축적시키는 것이 지 와 관입니다. 이것을 삶에서 수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늘어나 는 것이 없습니다. 내 속에 힘이 축적되고 내가 나아가는 방향이 진리의 방향으로 가는지 아는 관조하는 힘이 성숙되어야 합니 다. 결국 우리가 목숨 거두어 돌아가야 할 것은 바로 육바라밀의 실천입니다. 승의 목적이 바로 이 육바라밀의 실천인 것입니다.


  대승의 길은 모든 생명 있는 것[중생]으로 하여금 의혹을 없 애고 그릇된 고집을 버리게 하며 대승에 대한 바른 믿음을 일으 켜 깨닫는 자가 계속해서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끝이 없도록 하 는 것이 대승의 목표입니다. 의혹과 내가 맞다는 그릇된 고집을 깨트리는 것이 대승기신론을 공부하는 목적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의심이 있는데 의법과 의문입니다. 의법( 疑法)이란 무엇이 실재하는 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법에 대해 모 르는 것이 의법입니다. 이것은 믿는 마음(수레를 타고 갈 마음) 을 일으키는데 지장을 줍니다. 이 세상에 진리가 있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정말 진리가 있는가?’ 생각 하며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원효는 의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다 진리라고 한 다면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물건마다 다 진리요. 그 개체성이 뚜 렷한데 어떻게 모든 개체를 하나로 묶는 자비행을 실천하는가?” 내가 누구에게 보시를 일으키면 그 보시하겠다는 마음이 어떻 게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 전해지고 공유하게 되는가의 뜻입 니다. 법을 모르면 이런 의심이 생기게 됩니다. 의문(疑門)이란 많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 것도 맞고 저것도 맞아서 세상에 좋은 것 천지입니다. 이렇게 많 은 것 가운데 무엇이 진짜로 좋은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진짜 좋은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천에 지장을 줍니다. 원 효는 이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처님이 내세운 가르침이 매우 많은데 어느 것부터 시작해서 실천해나가야 하 는가? 모두를 보면 핵심을 알 수가 없고 한 가지를 택하자니 어 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금강경, 화엄경, 묘법연 화경 등 많은 경전 가운데 무엇부터 시작할지 모르고 그 상태에 서 다양한 모든 경전을 보면 핵심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 가운 데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할지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 기서 의문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원효는 하나의 마음 [一心]을 말합니다. “하나의 마음 이외에 다른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리 석어[무명] 하나인 마음을 잘 모르고 방황하는 까닭에 적정으로 고요해야 할 바다에 파랑이 일고 기복이 생기며 갖가지 평화롭 지 못한 한계상황은 생겨나는 것이다.” 진리에 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세계 그것이 일심(一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것을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진정 실재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 이지 않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깨달으면 끝없는 열 반적정, 고요한 마음에 들어갑니다. 이 마음은 요동치지 않습니 다. 이 고요해야 할 바다와 같은 마음에 파랑이 일고 기복이 생 기는 것은 부딪히는 경계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마음인 것 을 알 때는 원래 마음이 적정한 것임을 압니다. 우리는 겉의 파 도치는 것을 나인 줄 알고 움직이는 모습을 나라고 생각하고 아 래의 고요하고 깊은 바다가 원래 마음임을 모릅니다. 내가 일심 (一心)된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아무리 풍랑이 일지 라도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심(一心)임을 모를 때 의혹이 생겨나는데 그런 의혹 에 의해서 육도윤회를 하게 됩니다. 본질을 이해하고 해탈을 하 고 존재, 본체, 근원을 아는 것이 일심(一心)입니다. 앞서 바다 이야기를 했는데 그 바다의 파랑과 기복이 바로 육도의 세계입 니다. 본질, 근원에서 타락한 상태가 육도입니다. 일심(一心)이 오염되어 우리는 육도를 윤회합니다. 본질이 오염되면 끝없는 육도윤회를 하게 됩니다. 일심(一心)은 진여문이고 육도는 생사 문이 됩니다. 우리가 진여일 때 본질을 인식하고 이해하면 물들 지 않는 마음을 항상 일으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마음은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자기 업 이 갖고 있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공부, 수행한다는 것은 그 이 기적인 마음을 제거한다는 것이고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는 오염된 정도에 따라 지옥으로 윤회하기도 하고 괜찮은 몸을 받기도 합니다. 일심(一心)이 되면 모든 육도가 일심(一心)으로 섭렵되고 회향을 하게 됩니다. 육도윤회를 해도 일심(一心)의 마 음으로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의혹과 의문의 첫째 의혹에 대한 원효의 답을 살펴봅시다. “가지각색의 물결이 일지만 그것은 영원한 마음의 바다에서의 일이다. 실로 하나인 마음의 빛이 가려짐으로 여섯 갈래의 중생 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며 그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끝없는 원 을 세우는 것이며 여섯 갈래의 중생이 일심을 떠나 나타난 것이 아니므로 세상은 그냥 일심동체의 세계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일심(一心)이 가려져 육도윤회를 하게 되지만, 이 육도도 일심   (一心)을 떠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심동체 속에서 그냥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문에 대한 원효의 답을 살펴봅시다. “집착에서 벗 어나는 행을 닦으라.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의 문이 열린다. 옳게 판단하여 자비를 실천하라. 그러면 요동치고 산란한 마음의 문 을 여의게 된다. 버릴 것을 버리며 동시에 볼 것을 보고 옳게 생 각하고 행하면 생활은 깨달음으로 향하게 된다.” 그 많은 경전 가운데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마땅히 먼저 논을 설하는 인연과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순 서이지만 논에 대한 인식이 먼저일 것 같아 일심을 먼저 설했습 니다. 이제 이 논을 설하는 인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논을 설하는 인연에는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인연의 총상(總相)입니다. 총괄적인 인연입니다.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괴로움을 여의고 구경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함 입니다. 여기에 설하는 근본 뜻이 다 들어있습니다. 

  둘째 여래의 근본 뜻을 해석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바르 게 알게 하여 어긋나지 않게 하고자 함입니다. 내용을 바로 알 자는 것입니다.  

  셋째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법을 감당하 여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겠다는 세상에 자비를 베푸겠다는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게 함입니다. 

  넷째 선근이 적은 중생으로 하여금 수행하여 신심을 익히게 하고자 함입니다. 이기심이 많고 모자라는 중생도 진리의 세계 에 들어오게 하려고 신심을 내게 함입니다. 

  다섯째 방편을 보여서 악한 업장을 녹이고 마음을 잘 지켜 어 리석음과 교만함을 철저히 여의어 삿된 그물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우리 중생들의 뿌리인 어리석음과 자신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교만함을 쳐부수고자 함입니다.   

  여섯째 지(止)와 관(觀)의 수승함을 나타내어 범부와 이승(二 乘)의 마음의 허물을 대치(對治)하고자 함입니다. 진리는 모르는 범부에게도 성문승과 연각승에게도 보살의 마음을 품어 부처의 길을 열어주고자 함입니다.   

  일곱째 염불(念佛)에 일념하는 방편을 나타내어 부처님 전에 왕생하여 결정코 신심에서 물러나지 않도록 하고자 함입니다. 염불이 목적은 아니지만 방편으로 중간 목적을 보여 쉽게 마음 을 내어 극락을 둘러보고 부처되고자 하는 신심에서 물러나지 않게 함입니다. 

  여덟째 이익을 보여줌으로써 수행을 권유하고자 함입니다.  보이는 이익을 주어야 해볼까하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중생 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중생들에게 마음을 내도록 하자는 것 입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논을 지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 이유를 밝 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경 속에 여덟 가지의 인연이 있는데 새삼 다시 설명하고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묻습니다. 경에 이러한 뜻이 있지 만 중생들의 근기와 수행에 따라 제 각기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정도가 다 다릅니다. 이러한 중생들이 혼란스럽지 않고 진리에 잘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다시 설명하는 것입니다. 설명을 해주 면 이해하고 부처가 될 수 있는 중생도 모르면 수억 겁을 육도 윤회하면서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에는 중생의 근기가 영리하고 법을 설 법하는 사람도 색(色)과 심(心)의 업이 수승하여 원음(圓音)으로 한 번 연설하면 다른 종류의 중생들이 평등하게 이해하므로 논 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래가 열반한 후에 어떤 중생은 능히 스스로의 힘으 로 널리 듣고 이해하였으며, 어떤 중생은 능히 스스로의 힘으로 적게 듣고 많이 알기도 하였으며, 어떤 중생은 스스로의 힘은 없 으나 많은 논에 의하여 이해하였으며, 어떤 중생은 광대한 논서 의 많은 글을  번거롭게 여겨 마음으로 총지(總持)와 같이 글의 분량은 적지만 많은 뜻을 가진 것을 좋아하고 잘 이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이 모든 중생을 모두 포섭하여 진리에 회귀시키려 고 이 논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 의 한없는 뜻을 총섭하려는 까닭으로 이 논을 설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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