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해석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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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3-1-1-2) 심진여문
(3-1-1-2-1) 이언진여를 설하다
(3-1-1-2-1-1) 심진여는 일법계대총상법문체이다
[진제11] 심진여(心眞如)란 일법계(一法界) 중의 대총상(大總相) 법문(法門)의 본체(體)다.
이른바 심성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망념(妄念)에 의지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약 심념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境界)의 형상이 없어진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체의 법이 본래의 언설(言說)의 모양을 여의 었으며, 이름의 모양도 여의었고, 마음에 반연하는 모양을 여의 어 필경에는 평등하게 되며,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 괴할 수도 없는 것으로 오직 일심(一心)이니, 진여라 이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설(言說)은 임시적인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으로 망념만 따를 뿐 그 실체를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心真如者,即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所謂心性不生不滅,一 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若離妄念則無一切境界之相。是 故一切法從本已來,離言說相、離名字相、離心緣相,畢竟平 等、無有變異、不可破壞。唯是一心故名真如,以一切言說假
名無實,但隨妄念不可得故。
(3-1-1-2-1-3) 진여는 말과 생각 밖의 이름이다
[진제12] 진여라는 것도 모양이 없으니 언설(言說)의 궁극은 말 에 의하여 말을 보내는 것이다. 진여의 본체는 버릴 만한 것이 없 으니 일체의 법이 다 참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법이 모두 똑같기 때문에 주장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일체의 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한 것이다.
言真如者,亦無有相。謂言說之極因言遣言,此真如體無有可 遣,以一切法悉皆真故;亦無可立,以一切法皆同如故。當知 一切法不可說、不可念故,名為真如。
(3-1-1-2-1-3) 집착 없이 수순해야 득입한다
[진제13] 묻기를,
만약 이와 같은 뜻이라면 모든 중생이 어떻게 수순(隨順)하여야 득입할 수 있겠는가?
답하기를,
일체의 법이 설명되기는 하나 설명할 수도, 설명할 만한 것도 없 으며, 생각되기는 하나 역시 생각할 수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 는 줄 알면 이를 수순이라고 하며, 이 생각을 여의면 득입이라 고 말한다.
問曰:「若如是義者,諸眾生等云何隨順而能得入?」
答曰:「若知一切法雖說,無有能說可說,雖念,亦無能念可 念,是名隨順。若離於念,名為得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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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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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을 통해 진여문과 생사문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 이 공부 의 본론입니다. 유식 공부할 때는 생사문에 대한 이야기만 공부 했습니다. 이 생사문과 우리가 깨쳐 견성해 갈 수 있는 진여문 은 같은 것입니다. 같은 일심의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것은 진여 가운데 의언진여와 이언진여입 니다. 의언진여는 말에 의지한 진여이고 이언진여는 말을 떠난 진여입니다. 원래 진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알아듣게끔 말로 표현해놓은 것이 의언진여입니다. 이언진여는 진여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부분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해석분을 세 가지로 나누 다. 첫째는 현시정의(顯示正義)이며, 둘째는 대치사집(對治邪執) 이며, 셋째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다.” 진여문으로 나 아갈 때 바른 것이 무엇인가를 보이고 우리의 잘못된 아집, 무지 등을 바른 것으로 대치하고 우리의 삶을 도의 세계, 진리의 세계 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기신론의 목적입니다. 진여가 뭔지 알고 잘못된 마음을 진여로 대치해야하고 대치된 그 마음으로 수행하고 살아감으로써 견성성불하는 것입니다.
“심진여는 일법계 대총상법문체이다. 심진여(心眞如)란 일법 계(一法界) 중의 형상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大總相] 법문(法門) 의 본체[體]다. 이른바 심성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망념(妄念)에 의지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약 심념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境界)의 형상이 없어진다.” 심 진여(心眞如)는 마음으로 느끼고 일으키는 본질적인 진여입니 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세상이 바로 법계입니다. 이것을 하 나라고 보는 것이 바로 일법계(一法界)입니다. 일법계(一法界) 안에 형상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한 내용이 진여입니 다. 진여는 모두 같고 하나입니다. 마음의 성품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말은 원래 있는 그대로란 말입니다. 이는 반 야심경의 핵심과도 통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원래 있 는 그대로인데 망념(妄念) 즉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 때문에 차별이 생깁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을 망념(妄念)이라고 하 는 이유는 모든 생각이 내가 갖고 있는 업을 바탕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본질, 진여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생 각은 모두 망념(妄念)입니다. 우리는 망념(妄念) 때문에 똑같은 것을 똑같이 보고도 다르게 인식합니다. 차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만큼 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저를 보지만 어떤 사람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있어도 다르게 인식합니다. 보는 사람마다 차별이 있는 것은 업 때문입니다. 자 신의 업과 잘 맞으면 좋아 보이고 자신의 업과 맞지 않으면 좋지 않게 보이는 것입니다. 남녀의 만남도 같습니다. 남녀도 세세생 생의 업 때문에 강렬히 끌립니다. 그게 서로 맞는 줄 알고 결혼 해보면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심념, 망념(妄念)은 같은 말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모두 업에 의해 일어나는 생각들입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념, 망념(妄念)을 떨치면(우리 의 업을 떨치고 넘어서버리면) 일체 경계(境界)의 형상이 없어집 니다. 일체 경계(境界)의 형상이 없어진다는 것은 다 같아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업에 의해서 각각 다르게 분별합니 다. 하지만 이것을 벗어나면 전부 같습니다. 다 있는 그대로 보 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 망념(妄念)을 보고 있습니다. 유식을 알고 보면 이 말이 더 쉽 게 다가올 것입니다.
진여에 대해 자세히 살펴봅시다. 진여는 “이언설상(離言說 相), 이명자상(離名字相), 이심연상(離心緣相)”이라고 합니다. 본성은 말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문자나 개념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분석적인 사변이 닿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진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진여는 아무리 말로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말로써 설명하기 이전의 것입니다. 진여는 말이나 개념으로서 설명해 이해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 다. 그리고 진여는 내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설명해 도 그 뿌리까지 닿지 않습니다.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인 것을 넘 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에서 추구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진여 의 세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래 성품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래 성품이나 나의 본래 성품은 다
르지 않습니다. 하나입니다. 그것이 일심으로 회통하는 것입니 다. 대승기신론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대긍정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버릴 것이 하나 없기 때문입니다. 다 각자 나름의 의미가 있고 바로 보기만 하면 진여입니다. 긍정적으로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받아들이면 세상은 진리 그대로 보일 것입 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지옥에 가는 것이고 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면 진여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부 분이고 표현일 뿐입니다. 세상은 잘 보면 극락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끝도 없는 극락이 부정적으로 보면 끝없는 지옥이 이 세상에 열립니다. 내 마음의 문이 닫히면 이 세상은 가도 가도 지옥밖에 없습니다.
부처는 무엇입니까?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본질이 무엇입니 까? 본성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다름 아닌 진여입니다. 앞서 진 여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문자나 개념으로 이해를 시킬 수 없 고 분석적 사변으로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이것은 말을 떠난 자리입니다.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자리입니 다. 그래서 조주는 부처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무(無)라고 대 답했고 운문 문언은 간시궐(幹屎厥) 그냥 똥막대기일 뿐이라고 말했고 동산은 마삼근(麻三斤)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 든 것이 진여인데 쓸데없이 나에게 까지 와서 물을 필요가 있는 가?” “평범한 것이 진리다.”라는 말입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이 러한 말들로 우리에게 진여, 부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라도 이해할 수 있게 말한 것입 니다. 이것을 통해 진여의 자리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면 분명 그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 처를 이야기할 때는 불교에 국한될 수 있지만 진여를 이야기하 면 세상의 모든 것을 포섭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삶, 학문 들도 진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여는 불생불멸합니다.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습니다. 불생불멸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반야심경은 이 세 상에 살아가려고 하는 삶의 핵심을 명쾌하게 집약시켜놓은 것 입니다. 반야심경은 262자로 설명했고 대승기신론은 약 11000 자에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체계화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망념(妄念)은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념입니다. 망념(妄念)은 smrti, 반성, 기억, 변계소집성입니다. smrti의 뜻이 반성, 기억 입니다. 내 속에 들어있는 것을 기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망 념(妄念)은 유식의 변계소집성입니다. 변계소집성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허망된 생각들입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 각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의타기성은 어떤 원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가 그 원인이 다하 여 소멸하는 것입니다. 형상이 있는 것은 의타기성이 됩니다. 현 재 우리가 있는 이 건물은 의타기성이 됩니다. 이런 형상을 갖 고 만들어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버립니다. 이렇게 형상 과 모양으로 경계(境界)를 나타내는 것을 일체제법이라고 합니 다. 형상을 갖고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경계(境界)라고 표 현하며 일체제법입니다. 이것은 허망된 변계소집이 빚어낸 대 상입니다.
진여는 이러한 망념(妄念)과 경계(境界)가 없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경계(境界) 속에서 살아갑니다. 나무, 집이나 산, 들, 바다, 직장 이런 것들 전부 다입니다. 내가 일으키는 모든 망념(妄念)이 없어져버리면 경계(境界)도 떠나게 됩니다. 우리 가 보는 것은 우리의 아집에 의해 만들어진 형상입니다. 하지만 아집을 다 떨쳐버리면 어떤 모양이나 형상에서도 그것들이 갖 고 있는 본래 성품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경계(境界)를 떠 나고 벗어나고 여읜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망념(妄念)이 모든 것 을 만들어내는데 우리가 우리의 심념, 마음을 여의면 모든 경계 (境界)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경계(境界) 속에서 가치 를 부여하고 삶을 이끌어가지만 이것이 무너지면 진리의 세계 를 볼 수 있고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반야심경을 좀 살펴봅시다. 반야심경의 이름은 마하반야바 라밀다심경입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 개공 도일체고액’은 반야심경의 결론입니다. 내가 견성해서 진 리의 세계를 보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空)하니, 그래서 모든 괴로움을 건너 해탈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편안 의 세계로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공의 원리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 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입니다. 그 다음은 공의 모습, 현상을 말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입니다. 이 세상의 제법을 제대로 보면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고 부증불감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부처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에 조주가 ‘무(無)’라고 했고 운문이 ‘똥 막대기’라
고 했고 동산은 ‘마 세 근’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름이 아니라 진리를 물었을 때 공의 모습과 현상을 일러준 것입니다. 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일러줘야 정답이 되는 것입니 다. 진리를 이야기하는 선문답에서 항상 주어진 답은 공의 모습 을 한 마디 던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답을 주고받고 하 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화두가 수월해집니다.
제법은 모든 존재와 존재의 현상을 말합니다. 이것은 정신적 인 법과 물질적인 법이 있고, 육근(보는 법)과 육경(보이는 법) 이 있습니다. 수상행식에 의해 일으키는 정신적인 모든 법, 물 질적인 법 즉 색(色)이 제법에 속합니다. 내가 주체가 될 때 나는 보는 법입니다. ‘나’는 주체가 되어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육근인데 눈, 코, 귀, 입, 몸, 뜻입니다. 육근의 대상이 되어 보여지는 세계가 육경입 니다. 나는 보는 법이고 세상은 보이는 법입니다. 이 두 개가 부 딪히면서 존재하는 모든 관계가 법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제법에 속합니다. 제법을 있는 그대로 보면 진여의 성 품을 떠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제 법은 진여와 같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진여면 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것도 진여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도를 행하고 법 을 행하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최고의 멋진 삶을 살 수 있습 니다. 이 세상이 오염되고 지옥이라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진여고 불국토가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있다고 보지만 본질을 보게 되면 모두 공(空)합니다. 제법공상이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잘 보 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나의 것’이 있 다고 생각하지만 이것 때문에 모든 아집과 집착이 생깁니다. 제 법이 공상인 줄 모르기 때문에 윤회를 일으키는 원인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도 없는 소유의 삶을 마감하다 가는 것 이 어리석은 중생들의 삶입니다. 부처님은 연기를 깨쳐서 이 세 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관계 속에서 파악했습니다. 진리를 아 는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당당하게 살다가 갑니다. 진리를 모르 면 모두 소유와 존재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유와 존재 속에서 살다가 갑니다. 연기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 이 열리고 이 상태에서 세상을 보고 살아간다면 최고의 멋진 삶 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법이 공(空)하다는 것만 알면 제법과 진여가 하나가 되고 그것이 일심으로 회통하게 됩니다.
티베트의 승려 밀라레빠(Milarepa, 1040-1123)의 무상이 란 시를 보면 제법무상이 더더욱 잘 이해될 것입니다. 한번 살 펴봅시다.
이 세상 모든 것 덧없고 무상하여서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아버지 살아계실 때 내 나이 어렸고
내가 성인되니 그 분 이미 세상에 없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할 것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어머니 살아계실 때 나는 집을 떠나 없었고
나 이제 돌아오니 그 분 이미 세상에 없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할 것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경전이 있을 때 공부할 사람 없었고
공부할 사람 돌아오니 경전은 낡고 없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할 것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기름진 밭 있을 때 농부 떠나 없었고
농부 돌아오니 밭은 잡초만 무성하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할 것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좋은 집 있을 때 주인은 떠나 없고
주인 돌아오니 집은 이미 폐허됐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할 것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나는 불굴의 귀의자
이 세상 모든 것 무상함을 알았으니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에 정진하리.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 생에 이렇게 공부할 인연을 만난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느끼는 순간 알아집니 다. 승조(僧肇: 384-414)의 시를 한번 보겠습니다. 승조의 저서 로는 조론, 보장론 등이 있습니다.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음이요(四大元無主)
오온은 본래 비었음이라(五蘊本來空)
머리를 흰 칼날 아래 내미니(將頭臨白刃)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 같도다(恰似斬春風)
이것은 승조가 황제에게 사형을 당할 때 읊은 시입니다. 사대 (四大)는 우리 육신을 가리킵니다. 오온은 원래 비었다는 말은 앞의 제법공상이란 말과도 통합니다. 마지막 구절은 봄바람을 베는 것이나 내 머리를 베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진리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우(普雨: 1509-1565)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보우는 승가고시를 실시합니다. 제1회 승가고시 때 선과에 장원급제한 사람이 서산 대사이고 교과에 장원급제한 사람이 사명 대사입 니다. 서산과 사명을 발굴해낸 사람이 보우입니다. 서산은 승가 고시에 장원한 후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나이 사십이 되기도 전 에 승려 최고의 직위인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됩니다. 그 후 미련 없이 승직을 버리고 지팡이, 바리대, 옷 한 벌을 들고 훌쩍 떠납니다. 어느 날 사명이 서산에게 찾아와서 질문을 합니다. “본래 청정하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만들어졌습 니까?” 그러자 서산이 답합니다. “청정본연한데 어디서 산하대 지를 보았느냐?” 이 말을 듣고 사명 대사가 두 손을 들었다고 합 니다. 본래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진여의 성질입니다. 우리는 이 러한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찾아야 합니다. 생각을 거쳐 답 을 찾아야 합니다. 생각 없이 답을 찾은 사람은 도인입니다. 일 반 중생들은 답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제멋대로 분별망상 을 일으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화두에 몰두해서 체계적인 생각 을 하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없는 것 같아도 있고 있 는 것 같아도 없습니다. 세상은 어느 시대가 더 좋고 어느 시대 가 더 나쁜 것도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시대가 최고의 시대일 뿐입니다. 이 속에서 어떤 삶이든 그 삶 속에 진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진여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법의 원래 모습은 불생불멸입니다. 존재를 이해할 때 현상 론적으로 이해하면 생멸이지만, 실상론적으로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면 불생불멸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다 른 것이 아니라 불생불멸입니다. 내가 그것을 느껴야 합니다. 내 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언가를 보다가 뭔가 느낌을 순간적으 로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느낌을 생각을 통해 느낄 수 있어 야 하고 인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불생불멸이 고 그냥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그냥 존재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 가 볼 때는 있다고 하고 안 보일 때는 없다고 합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을 뿐입니다. 세상 모든 존재는 불 생불멸하고 그냥 존재할 뿐인데 우리 눈에 보이면 생으로 인식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멸로 인식할 뿐입니다.
제법의 성품은 불구부정입니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본래 청정할 뿐입니다.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닌데 왜 본래 청정이라고 말할까요? 물들기 전의 모습을 표현 하려고 하니까 청정이라고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견성은 내 본 래 청정한 성품을 본 것입니다.
제법의 내용은 부증불감입니다. 내가 죽었다고 해서 무언가 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간 것일 뿐입니다. 태어났다 고 해서 무언가가 더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난 곳으로 온 것입니 다. 준 것도 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볼 때는 늘고 준 것으로 보입 니다. 지구를 순환하는 물을 보면 바다나 강의 물이 증발해서 구 름이 되었다가 다시 떨어집니다. 그것이 나무로 가거나 우리들 입으로 가고 또 돌아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단지 상태의 변화가 일어나고 순환할 뿐이지 늘고 줄은 것은 아닙니다. 제법의 모습, 성품, 내용을 알면 진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일법계대총상법문체를 봅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체의 법 이 본래의 언설(言說)의 모양을 여의었으며, 이름의 모양도 여의 었고, 마음에 반연하는 모양을 여의어 필경에는 평등하게 되며,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는 것으로 오직 일심(一心)이니, 진여라 이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 설(言說)은 임시적인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으로 망념만 따를 뿐 그 실체를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말, 이름 등 모든 것을 떠 나 하나이기 때문에 평등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심, 진여는 불 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합니다. 우리는 오염되어 있는 눈, 마음으로 보니까 너와 나가 있고 차별이 있습니다. 하지만 깨우 친 마음으로 보니까 모두가 진여, 일심입니다. 뿌리로 내려가면 다 똑같지만 중생이 자신의 업으로 보니까 구별이 되는 것입니 다. 그것(업)을 벗어놓고 보면 뿌리는 다 같은 것입니다. 말이나 이름은 임시적으로 세운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업에 의해 일어 난 망념만 볼 뿐이지 그 본질은 보지 못합니다.
“진여는 말과 생각 밖의 이름이다. 진여라는 것도 모양이 없 으니 언설(言說)의 궁극은 말에 의하여 말을 보내는 것이다. 진 여의 본체는 버릴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참이기 때 문이다. 일체의 법이 모두 같기 때문에 주장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일체의 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 여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진여이 고 참이기 때문에 버릴 것이 없습니다. 일심이 되면 모두 평등 하기 때문에 너의 것 내 것이 맞다고 주장할 것이 없습니다. 다 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 체계, 견성을 진 여라고 할 뿐입니다.
“집착없이 수순(隨順)해야 득입(得入)한다. 일체의 법이 설명 되기는 하나 설명할 수도 설명할 만한 것도 없으며, 생각되기는 하나 역시 생각할 수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는 줄 알면 이를 수 순이라고 하며, 이 생각을 여의는 것을 득입이라고 한다.” 집착 없이 수순해야 견성한다는 말입니다. 공부하는 내용이 무엇인 지를 이해하고 아는 것이 수순(隨順)입니다. 득입(得入)이란 공 (空), 진여를 인식하고 아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존재하 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맞는지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수순이고 그 이해한 것을 수행을 통해 깨닫고 체득한 것이 득입입 니다. 수순하려면, 진리를 이해하려면 집착이 없어야 합니다. 내 가 갖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은 자기 세계에 빠지게 합니 다. 이 집착을 떠나야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인식을 자기 것으로 만 드는 것이 득입입니다. 알고 실천해서 그렇게 되자는 것입니다.
수순은 ‘anugata’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쫓아가다, 따라가 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공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수순에 대해 원효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체법을 설한다 할지라도 설하 는 주체와 설해지는 객체가 따로 구별되지 않음을 아는 것이며, 일체법을 염한다 할지라도 염하는 주체와 염해지는 객체가 따 로 구별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분별되고 차별되었는 데 분별과 차별을 넘어서야함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수순 이라는 말입니다.
득입은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수순의 염마저 여의 는 것입니다. 견성성불한 상태입니다. 진여를 인식하고 알고 실 천을 통해 그 세계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득입입니다. 칼 야스 퍼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세계에서 살지만, 이 세 계에서 사는 것과 같이 살지 말라.” 우리는 진리의 세계, 공의 세 계를 알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고속도로에서 마주 오는 두 차가 부딪혀서 그 안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인과 가운데는 설명할 수 있는 인과가 있고 설명할 수 없는 인과가 있습니다. 만약 상
상도 하지 못한 곳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죽는다면 이것은 아마 살생의 과보일 것입니다. 내가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그 생명 을 해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면 그 어떤 것도 나를 해치지 못 합니다. 무언가 나를 해친다면 내가 이번 생이나 전생에 다른 존 재가 해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영주 희방사에는 전 생과 관련된 전설이 있습니다. 지금은 길이 잘 닦여서 가기 쉽지 만 과거에 이 곳은 첩첩산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는 억 불정책을 썼기 때문에 절은 가난했습니다. 양반들의 지원은 없 고 가난한 백성들의 도움을 받으며 명맥을 이어나갔습니다. 어 느 날 희방사의 대웅전이 낡아서 무너지자 희방사의 스님이 나 서서 마을에 불전을 모금하러 갔지만 돈이 거의 모이지 않았습 니다. 이 희방사 절 밑 마을에는 어떤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가 어느 날 주지 스님에게 면회를 요청했습니다. 스님이 농부의 집으로 가자 농부는 스님에게 논문서를 주며 이것을 팔 아 대웅전을 지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은 논문서를 팔고 대 웅전을 지었습니다. 낙성식을 하는 날 주지 스님은 그 농부를 초 대합니다. 농부가 그 낙성식을 보러 산을 넘고 넘어 가는 도중에 그만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고 맙니다. 낙성식도 보지 못하고 집 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얼마나 땅을 치고 통탄할 일입니까? 몇 년 후 이번에는 종각이 허물어져버립니다. 종각을 다시 짓기 위 해 주지 스님은 그 일대에서 시주를 돌아다녀도 돈이 모이지 않 았습니다. 이번에도 그 농부가 주지 스님에게 면회를 요청합니 다. 스님이 가보니까 그 농부가 지금까지 번 돈을 다 주면서 종 각을 다시 지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돈을 갖고 종각을 지었습니다. 이번에도 절에서 낙성식에 농부를 초대했지만 절에 오 기 직전에 종소리도 듣지 못하고 농부가 그만 귀가 먹어버립니 다.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몇 년 후 이번에는 스님이 기거하는 방 요사채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요사채를 다시 짓기 위해 스님들이 다시 그 근처 마을을 돌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저번의 그 농부가 스님을 불러 밭문서를 주면 서 이것으로 지으라고 합니다. 그 돈을 가지고 요사채를 지었습 니다. 이번에도 낙성식에 초대되어 농부가 가족들의 도움을 받 으며 절에 가는데 가는 도중 앉은뱅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 모습을 본 주지 스님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농부가 지 극 정성으로 절에 보시를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납득이 되지 않는 주지 스님은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와 불상의 배 부분에 칼을 꽂고 이 생에서 다시는 불교 를 하지 않겠다고 하고 절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농부는 요사채 불사를 끝내고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지 스님은 절을 떠나 걸인 신세가 되고 희방사는 거의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의 어느 양반댁 도령이 과 거에 급제해서 영주 고을 원님으로 부임합니다. 이 원님은 당시 억불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오자마 자 영주 부근의 절들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원님이 더 돌아볼 절이 없냐고 묻자 이방들이 원님을 모시고 희방사에 갑니다. 가 보니 절은 오랫동안 방치된지라 풀은 우거지고, 건물은 무너지 고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원님이 문을 열고 대웅전에 들어간 순간 자신이 전생에 농부였음을 알게 되고 그 인과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농부는 업보로 인해 한 생은 장님으로 살 아야 되고 한 생은 귀머거리로 살아야 되고 한 생은 앉은뱅이로 살아야했었는데 세 생의 과보를 한 생에 다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주지 스님의 절실한 기도 덕분이었음을 알게 된 원 님은 그 스님을 찾아갑니다. 수소문 끝에 그 스님을 찾으니까 오 랫동안 떠돌아다니며 거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원님은 그 스님 을 만나 그 동안의 인과를 이야기해줍니다. 원님은 주지 스님을 희방사로 다시 모셔옵니다. 원님이 희방사를 재건합니다. 이 재 건한 절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나의 전생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전생 만 알면 이 생에 달라져야 할 것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 결정을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금을 넣는 이유는 일정 기간 후에 얼마가 나올지 알기 때문에 넣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 생각과 선한 행동을 하거나 악한 생각과 악한 행동을 하면 그에 따라 과보가 따르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습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악한 행동을 하면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없겠지.’라 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생을 알게 되면 내 삶에 대한 확신이 달라집니다. 전생과 인과, 과보를 알게 되면 진여에 가까운 진여 로 갈 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보고 확신하게 되면 그 만큼 달 라지게 됩니다. DNA 유전자 검사를 하면 45억년 전의 전생 이 야기까지 밝혀낼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이 들 뿐입니다. 우 리가 그 만한 돈이 없으니 못하는 것뿐입니다. 지금은 인간의 모 든 게놈 지도도 다 풀었습니다. 1996년에 단세포 생물 초파리의 유전자 정보를 다 풀어냈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유전자 정보 도 다 풀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인과, 과보가 다 나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 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진리도 변하지 않습니다. 과학적 인 진실 하나하나가 모여서 진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유롭고 편안하게 삶을 즐기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 좋은 조건을 제대로 잘 살아야 합니다. 전생 을 아는 것은 ‘정말 이 생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고 확신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은 이 세상에 공부하 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진리는 공부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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