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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성정본각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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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5,264회 작성일 21-07-1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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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3-1-1-3-3-412) 부사의업상을 밝히다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는 것은 지정상(智淨相)인 지혜가 깨끗한 모양에 의지하여 일체의 수승하고 미묘한 경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한량없는 공덕의 모양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 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갖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 는 것이다. 

不思議業相者,以依智淨能作一切勝妙境界,所謂無量功德之 相常無斷絕,隨眾生根自然相應,種種而見,得利益故。 

[진제25]  (3-1-1-3-3-42) 성정본각을 밝히다 

다음의 각체상(覺體相: 성정본각의 체가 지니는 상)에는 네 가지 의 큰 뜻이 있어서 허공과 같으며, 마치 깨끗한 거울과도 같다.  復次,覺體相者,有四種大義,與虛空等,猶如淨鏡。云何為 四?一

(3-1-1-3-3-421)  여실공경을 밝히다 

첫째 여실공경(如實空鏡)은 여실히 공한 거울이니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여의어 나타낼 만한 법이 없기에 깨닫고 비추는 뜻이 아니다. 

一者、如實空鏡。遠離一切心境界相,無法可現,非覺照義 故。

(3-1-1-3-3-422)  인훈습경을 밝히다 

둘째 인훈습경(因熏習鏡)은 인을 훈습하는 거울이니 여실히 공하 지 않다[如實不空].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되 나가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으며, 잃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아 서 항상 일심에 머무니, 일체법이 곧 진실성이기 때문이다. 또 일체의 염법으로 오염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의 자 체는 움직이지 아니하여 무루(無漏)를 구족하여서 중생을 훈습 하는 까닭이다. 

二者、因熏習鏡。謂如實不空,一切世間境界悉於中現,不出 不入、不失不壞,常住一心,以一切法即真實性故;又一切染 法所不能染,智體不動,具足無漏熏眾生故。 

(3-1-1-3-3-423)  법출리경을 밝히다 

셋째 법출리경(法出離鏡)은 법에서 멀리 떠나는 거울이니 공하 지 않는 법이다. 불공법(不空法)이 번뇌애(煩惱礙)와 지애(智礙) 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여의어 순박하고 깨끗하고 밝은 까닭이다. 三者、法出離鏡。謂不空法,出煩惱礙、智礙,離和合相,淳 淨明故。

(3-1-1-3-3-424) 연훈습경을 밝히다 

넷째 연훈습경(緣熏習鏡)은 연을 훈습하는 거울이니 법을 멀리 떠나 의지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선근을 닦 게 하여 생각에 따라 나타나는 까닭이다. 

四者、緣熏習鏡。謂依法出離故,遍照眾生之心,令修善根, 隨念示現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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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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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돈으로 기술로 세상에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으로 보시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돈이나 기술이 없어서 보시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 음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이지만 마음 속 의 부처를 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내 속에 부처가 들어있는 것을 알고 부처와 같이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 리는 부처와 중생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하면 부처의 마 음을 쓴다면 우리의 삶은 아름답게 되고 이 세상은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적인 마음을 개발하고 잘 활용함으로서 이 세상은 불국토 가 됩니다. 부처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수많은 생을 거쳐 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냥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가 부처입니 다. 이것이 대승기신론이 가르쳐주는 큰 가르침입니다. 일심 속 에 부처의 마음도 있고 지옥의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그대로 다 부처입니다. 내가 부처라고 하는 생각을 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일심 속 에는 부처와 중생과 중생이 부처되는 과정이 다 들어있습니다.

  불교는 체상용의 구조입니다. 세상의 어떤 가르침도 가르침 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체상용의 구조를 따릅니다. 본질, 일 심이 있고 이 일심은 누구에게나 다 똑같습니다. 일심을 모를 때는 나도 있고 너도 있지만 일심을 알면 모든 것이 다 하나입

니다. 이것이 체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들어오면 상으로 모양입 니다. 사람에게 들어오면 사람 모양이 되고 강아지에게 들어가 면 강아지 모양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렇게 생겼고 강아지 는 이렇게 생겼고 나무는 저렇게 생겼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는 각자 자신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상입니다. 본체 가 작용을 하기 전에는 각자 작용에 걸맞는 모양을 가지고 있 습니다. 그래서 이 모양을 가지고 여러 가지 활동, 작용을 합니 다. 나의 일을 하면서 내 속의 능력을 표현하며 세상을 살아갑 니다. 어떤 때는 부처 마음도 있을 것이고 지옥 마음도 있을 것 입니다. 어떤 때는 이기심이 작용할 것이고 어떤 때는 끝없는 자비심이 작용할 것입니다. 이것이 용, 작용입니다. 체상용입니 다. 기독교의 성부는 체고 성자는 상이고 성신은 용입니다. 어 떤 가르침이든지 본질이 있고 본질을 나타낼 수 있는 그릇이 있 고 그 그릇의 작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세계나 지옥이나 다 똑같습니다.


  오늘은 체에 해당하는 성정본각에 대해서 공부하는데 내용 이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르는 것을 다루기 때문 입니다. 지금 우리가 일으키는 마음은 알기 쉽지만 견성하고 깨 쳐야 볼 수 있는 본질, 진여는 알기 어렵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 계에 대한 성질, 성품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될 것입니다. 선불교는 깨침을 화두로 주고받을 뿐이지 깨달음 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 대승 기신론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을 밝히다. 부사의업상이라는 것은 지정상(智淨相)인 지혜가 깨끗한 모양에 의지하여 일체의 수승 하고 미묘한 경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한량없는 공덕의 모양 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갖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작용하는 모든 것이 부사의업상으로 표현됩니다. 살아가면서 일으키는 모든 작용이 부사의업상입니다.

  “성정본각을 밝히다. 각체상(覺體相: 성정본각의 체가 지니는 상)에는 네 가지의 큰 뜻이 허공과 같으며, 마치 깨끗한 거울과 도 같다.” 이제는 작용이 아니라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진여의 모양은 우리들이 생전 듣도보도 못한 이야기입니다. 깨달음의 모양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열심히 참선해서 깨쳐야 각체상 의 감이 잡힐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깨달아 부처님같은 마음으 로 진여의 세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해놓았습니다. 대부 분 경전에서 본질을 표현할 때 허공이란 표현을 많이 씁니다. 우 리가 상상할 때 허공이란 어떻게 조작을 해도 그냥 허공입니다. 아무리 변화시켜도 허공은 그대로입니다. 무슨 짓을 해도 여여 (如如)한 것이 허공입니다. 그리고 깨끗한 거울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거울은 뭔가 보이면 있는 그대로 비춥니다. 다르지만 똑 같은 성격입니다. 아무리 무엇을 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허공이 라면 조작과 속임이 없는 것이 깨끗한 거울입니다. 진여의 세계 를 잘 표현한 것입니다. 불교가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구조 는 원인과 결과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에 따라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로 진여의 세

계와 같습니다. 깨달음 속에서 보는 진여의 세계도 원인과 결과 가 작용합니다. 성정본각은 구체적으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 데 여실공경, 인훈습경, 법출리경, 연훈습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 다. 여기서 여실공경, 인훈습경은 원인에 해당하고 법출리경, 연 훈습경은 결과에 해당합니다. 금으로 금목걸이를 만듭니다. 금 목걸이를 만들면 가격이 매겨집니다. 금은 체이고 금목걸이는 상이고 가격이 매겨지는 것은 용입니다. 이것은 내가 어떤 행위 를 하든지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잘하려면 체 상용의 관계를 잘 생각해보면 됩니다.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들 은 밤을 새가며 공부했지만 성적은 좋지 않습니다. 체상용을 못 해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본질의 구조와 작용 을 잘 알아야 합니다. 머리로 생각해봐야 알지 무턱대고 움직여 서는 잘 할 수 없습니다. 기도나 참선도 그렇습니다. 지금 필요 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나 참선을 통해 뭔가 잘될 수 있는 방편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작 용을 일으키려면 모양을 제대로 알아야겠고 모양은 본질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원효와 사복의 일화를 봅시다. 어떤 과부가 남편도 없이 임 신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사복입니다. 아이는 12살이 넘도록 말을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말 을 하게 됩니다. 사복은 고선사에 있는 원효를 찾아갑니다. 사복 이 원효에게 말했습니다. “옛날 그대와 내가 함께 불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는데 장사를 지내주자.”고 하니 원효가 좋다

고 합니다. 사복이 말한 암소가 바로 환생한 사복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사복이 원효더러 천도법문을 하라고 하니 원효는 법 문을 해줍니다. “태어나지 말지니 죽는 것이 괴롭구나. 죽지 말 지니 태어나는 것이 괴롭구나.” 이렇게 법문하니까 사복이 말합 니다. “무슨 법문이 그렇게 긴가.” 그러자 원효가 다시 법문을 해줍니다. “죽고 사는 것이 괴롭구나.” 재가 끝나고 사복은 “석 가 부처님처럼 나도 이제 연화장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네.”라고 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연화장 세계의 문이 열리더니 사 복은 그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구에서 팔지보살 의 경지까지 이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원효 대사가 팔지보살 의 경지인데 사복은 공덕이 그와 비슷했던 것입니다. 사복은 원 효에게 계급장을 다 떼고 말합니다. 본질, 진리, 깨달음에 대한 세계를 대화로서 풀어내고 보여준 것입니다. 진여의 세계가 사 복이 들어간 연화장의 세계일지도 모릅니다.

  “여실공경(如實空鏡)을 밝히다. 여실공경은 여실히 공한 거울 이니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여의어 나타낼 만한 법이 없기 에 깨닫고 비추는 뜻이 아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나오거나 뒤에 나옵니다. 여기서는 가장 먼저 나옵니 다. 인과를 말할 때 인은 뿌리고 과는 나무 열매입니다. 과는 눈 에 보이는 세상이고 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인과와 체상용을 알면 안보이던 것들이 보입니다. 이것만 보이면 공부 는 쉽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느 정도 했는지 모를 때는 공부 하기가 싫어지지만 그것을 알면 성취에 의해 공부가 신나게 됩니다. 

  인은 본질에 더욱 가깝습니다. 앞의 두 개는 진여에 더 가까운 모양을 나타내고 뒤의 두 개는 진여의 작용에 가깝습니다. 여실 공경은 허공과 같은 깨끗한 거울입니다. 여실공경은 허공과 깨 끗한 거울이 같이 들어있어 가장 본질에 가까운 내용들을 나타 내고 있습니다. 오염되어 일으키는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떠나 나타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거울에 비치고 할 것이  없습니다. 본질을 알고 공을 체득하면 비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오염이 되면 비칩니다.

  “인훈습경(因熏習鏡)을 밝히다. 인훈습경은 인을 훈습하는 거 울이니 여실히 공하지 않다.[如實不空]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 도로 나가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으며, 잃지 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아서 항상 일심에 머무니 일체법이 곧 진 실성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염법으로 오염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무루(無漏)를 구족하여 중생을 훈습하는 까닭이다.” 오염되면 무엇인가 점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나타날 수 있게 하는 뿌리가 바로 인훈습경입니다. 인(因)을 자꾸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원래 진여는 여실공경인데 인을 훈습하여 물이 들었기 때문에 여실히 공하지 않게 됩니다. 점점 물들며 나타나는 것입니다. 뿌리에서 가지로 올라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이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진여가 투영된 것 입니다. 마치 투명인간에 색을 칠한 것과 같습니다. 나는 이 모 양으로 세상에 작용합니다. 하지만 모양을 만들기 전에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3D 프린트처럼)가 있고 투명인간에 색 을 칠하면 이 모양처럼 됩니다. 투명인간을 만들기까지가 진여

의 4가지 단계인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이런 모양을 나타내는 것은 진여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놓았 던 것을 오염 시켜서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제7식 말라식부터 는 형상을 갖고 나타나는 세계입니다. 아뢰야식 이전까지는 진 여의 세계로 모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인훈습경이란 이 세 상에 뭔가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因)을 덧붙여가는 것입니 다. 모두 투명인간이 되어 모양이 없지만 나타나면 똑같습니다. 인훈습경을 오염시키면 형상을 갖고 이 세상에 작용을 하게 됩 니다. 진여의 세계는 나타나지 않는 세계인데 중생의 세계로 넘 어오면 진리의 세계에서 있던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신이 어 떻게 생긴지 모르지만 우리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우리같 은 모양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우리는 오염된 중생 심을 일으키지만 진여심도 똑같은 형상을 갖고있지 않을까 추 측할 수 있습니다. 형상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성정본각 안에 있 는 것입니다. 인훈습경은 원인까지 만들어냅니다.

  “법출리경(法出離鏡)은 법에서 멀리 떠나는 거울이니 공하지 않는 법이다. 불공법(不空法)이 번뇌애(煩惱礙)와 지애(智礙)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여의어 순박하고 깨끗하고 밝은 까닭이다.”  인(因)에 의해 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훈습경에 의해서 인이 많이 훈습되었습니다. 그래서 법에서 멀리 벗어납니다. 법에서 멀리 떠났으니까 이 세상에 이런 모양을 갖고 나타날 수 있는 조 건을 갖춘 것입니다. 법에서 멀리 떠났기 때문에 진여 자체의 모 양이 아닙니다. 즉 금이 아니라 금목걸이의 모양을 갖추어가는 것입니다. 물들고 멀리 떠나 공하지 않지만 체 자체는 깨끗하고 

순박하고 밝습니다. 중생 속에 있지만 중생의 삶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원효나 유마와 같은 사람들이 법출리경에 해당된다 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형상화되는 과정이 법출리경입니다.

  “연훈습경(緣熏習鏡)을 밝히다. 연훈습경은 연을 훈습하는 거 울이니 법을 멀리 떠나 의지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 추어서 선근을 닦게하여 생각에 따라 나타나는 까닭이다.” 연훈 습경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양을 훈습하는 거울입니다. 각각 중생의 모양대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연훈습경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은 진여 세계의 것이 물들고 물들어 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정본각의 네 가지 단계는 진여가 물들 고 물들어 지금 이 모양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 모양이 투명해지면 바로 진여의 모습입니다. 결국 진여가 중 생들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빛에 계속 충격을 주면 전자 두 개로 나누어집니다. 전자를 살펴보면 마이너스 전자가 있고 플러스 전자가 있습니다. 이 두 전자를 붙여버리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래 없던 것에서 힘(충 격)을 주어 두 개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형상이란 오염을 벗겨 버리면 진여의 세계의 그 모양이 됩니다. 일심이란 것도 뭉뚱그 려 하나로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 일 심입니다. 이 모양을 나타내는 그대로가 진여의 세계가 되는 것 입니다. 물들어 오염된 것에서 벗어나면 진여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호수에 큰 산이 비칩니다. 이것과 같습니다. 실제  그 안에 산이 없더라도 산에 있는 것입니다. 물 속에 산이 없어 도 산이 있는 것입니다. 진여의 세계도 똑같습니다.

  “불각의입니다. 첫 번째 근본불각은 무명이고 두 번째 지말불 각은 삼세와 육추이고 세 번째 마지막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의 총결은 무명의 오염입니다.” 불각의부터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근본불각은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무명입니 다. 지말불각에는 삼세와 육추가 있는데 이것은 아뢰야식, 말라 식, 육식, 의식, 색수상행식 등을 가리킵니다. 이 근본불각과 지 말불각은 모두 다 무명의 오염으로부터 옵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 


  부처님 십대 제자 가운데 두타 제일 가섭 존자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가섭은 바라문 출신으로 왕사성에서 가장 부유한 집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가섭은 수행자로 사는 것이 소원이 었으나 부모들은 장가를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그려 이 여자가 아니면 결혼하 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상대를 찾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부모는 그림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됩니다. 하 지만 결혼해서 아내에게 결혼은 했지만 수행자처럼 살자고 했 습니다. 아내도 동의했습니다. 그 후 결혼해서 12년 동안 낮에 는 평범한 부부와 같이 지내고 밤에는 수행을 하면서 살게 되었 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 출현의 소식을 듣고 출가하게 됩니다. 가섭의 부인은 다른 곳으로 출가합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부처님께 왜 저렇게 가섭이 공부를 잘하느 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가섭의 전생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가섭은 전생에 파라나성에 살았던 가난한 사람이었 습니다. 어느 날 흉년이 든 파라나성에 벽지불 수행자가 걸식을 하는데 빈 그릇을 들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벽지불은 연기의 이치를 혼자서 터득하여 스스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성문, 연각, 보살의 단계 가운데 연각과 같습니다. 그 마을의 가장 가난한 사 람이 벽지불이 빈 그릇을 들고 돌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자신 이 먹으려고 한 피밥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벽지불이 발우에 피밥을 받아 돌아가는 뒷모습이 너무나 성스러워서 가난한 사 람은 합장을 하며 원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앞으로 뛰어난 벽지불을 만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들어 나도 벽지불 과 같이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옵니다. 또한 세세생생 지옥이나 악도에 떨어지지 않기를 원하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이 바로 가섭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그 벽지불은 석가모니 부 처님의 전생이었습니다. 가섭은 전생에 순수한 마음으로 원을 세웠기 때문에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전생의 인연 덕분 에 그 생에서도 부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어떤 인과도 피해갑 니다. 그 지극한 마음, 거룩한 마음을 내면 세상은 그에 따라 바 뀌어 갑니다. 가섭의 두타행을 보면 가섭이 평생 어떻게 수행했 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섭은 평생 세 벌 이상의 옷을 갖지 않았 고 다른 사람이 버린 옷을 주워다 깁어서 만든 분소의를 평생 입 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가섭에게 분소의를 입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가섭은 “부처님 이시여. 저는 이 생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소신이 있습니다. 

분소의를 입는 것은 수행자의 바른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누가 버린 옷이지만 깁어서 이렇게 입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 다. 그 말을 듣고 부처님은 그것을 허락해주시고 더 이상 말하 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섭은 수행자가 된 이후로 한번도 등을 바닥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가섭과 같은 위대한 제 자들을 보면 부처님에 버금가는 위대함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교단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을 따라 수 행했던 수행자들의 삶들이 부처님 못지않은 버금가는 삶이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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