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강 염심의 여섯 가지, 상응과 불상응, 지애와 번뇌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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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강
(3-1-1-3-3-223) 염심의 여섯 가지를 밝히다
[진제38] 염심(染心)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染心者有六種。云何為六?
(3-1-1-3-3-2231) 집상응염을 밝히다
첫째 집상응염(執相應染)은 집착으로 상응하는 오염이니, 성문 연각의 이승(二乘)의 해탈과 믿음에 상응하는 경지[信相應地]에 의지하여 멀리 여의게 된다.
一者、執相應染,依二乘解脫及信相應地遠離故。
(3-1-1-3-3-2232) 부단상응염을 밝히다
둘째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은 끊어지지 않고 상응하는 오염 이니, 신상응지에 의지하여 방편을 수학(修學)하여 점차로 버릴 수 있으며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러서 완전히 여읠 수 있다. 二者、不斷相應染,依信相應地修學方便漸漸能捨,得淨心地 究竟離故。
(3-1-1-3-3-2233) 분별지상응염을 밝히다
셋째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은 분별하여 알아 상응하는 오염이니, 구계지(具戒地)에 의지하여 점차로 여의며 이에 무상 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야 완전히 여읠 수 있다.
三者、分別智相應染,依具戒地漸離,乃至無相方便地究竟離 故。
(3-1-1-3-3-2234) 현색불상응염을 밝히다
넷째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은 현색에 상응하지 않는 오 염이니, 색자재지(色自在地)에 의지하여야 여읠 수 있다. 四者、現色不相應染,依色自在地能離故。
(3-1-1-3-3-2235) 능견심불상응염을 밝히다
다섯째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은 능견의 마음에 상응 하지 않는 오염이니, 심자재지(心自在地)에 의지하여야 여읠 수 있다.
五者、能見心不相應染,依心自在地能離故。
(3-1-1-3-3-2236) 근본업불상응염을 밝히다
여섯째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은 근본업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이니, 보살지(菩薩地)의 다함에 의지하여 부처의 경지 에 들어 여래지(如來地)에서만 여읠 수 있다.
六者、根本業不相應染,依菩薩盡地得入如來地能離故。
(3-1-1-3-3-23) 무명을 끊는 지위를 밝히다
[진제39] 일법계(一法界)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 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관찰하여 배우고 끊으며 정심지(淨心 地)에 들어가 분수에 따라 여의게 되며 여래지(如來地)에 이르러 서야 완전히 여의게 된다.
不了一法界義者,從信相應地觀察學斷,入淨心地隨分得離, 乃至如來地能究竟離故。
(3-1-1-3-3-24) 상응과 불상응을 밝히다
(3-1-1-3-3-241) 상응을 밝히다
[진제40] 상응의(相應義)라 한 것은 심(心)과 염법(念法)이 달라서 염정(染淨)의 차별을 의지하여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 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言相應義者,謂心念法異,依染淨差別,而知相緣相同故。
(3-1-1-3-3-242) 불상응을 밝히다
불상응의(不相應義)란 곧 마음이 불각(不覺)이라 항상 다름이 없 어서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不相應義者,謂即心不覺常無別異,不同知相緣相故。
(3-1-1-3-3-24) 지애와 번뇌애를 밝히다
(3-1-1-3-3-241) 염심은 번뇌애다
[진제41] 또 염심(染心)의 뜻을 번뇌애(煩惱礙)라고 하니 능히 진 여의 근본지(根本智)를 막는 까닭이다.
又染心義者,名為煩惱礙,能障真如根本智故。
(3-1-1-3-3-242) 무명은 지애다
무명의 뜻을 지애(智礙)라고 하니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막는 까닭이다.
염심(染心)에 의지하여 보고 나타내며 경계를 망령되이 취착하 여 평등성을 어기는 까닭이다.
일체법(一切法)이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모양은 없으나 무명 으로 깨닫지 못하여 망령되이 법성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 서 세간의 모든 경계에 수순하는 여러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없다. 無明義者,名為智礙,能障世間自然業智故。此義云何?以依 染心能見、能現、妄取境界,違平等性故。以一切法常靜無有 起相,無明不覺妄與法違故;不能得隨順世間一切境界種種智 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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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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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응염과 불상응염에 대해 지난 시간에 이어 보겠습니다. 이 상응염과 불상응염의 상응이란 업과 부합하거나 심소와 심왕이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내 속에 축적된 것과 나타내는 것이 같 은 경우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업만큼 능 력을 갖게 되어 알고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8식 아뢰야식 보다 근본적인 것들은 물들기 전의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써먹 는 물든 후의 것들과 다릅니다. 그래서 근본 뿌리의 마음과 우 리가 써먹는 오염된 업은 다릅니다. 이것이 불상응입니다. 제8 아뢰야식은 불상응염이고 제7 말라식과 제6식, 전5식은 상응 염이 됩니다.
여기 파도가 치는 그림이 있습니다. 파도가 치면 우리는 파도 가 치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눈앞에 파도가 없 어도 파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그 장면을 기억해냅니다. 그 생 각의 뿌리는 제8 아뢰야식입니다. 우리는 보통 제7식까지는 알 지만 제8식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실제 우리가 일으키는 모 든 생각은 나와 대상이 있습니다.
여기서 불상응염 세 가지를 살펴봅시다. 불상응염 세 가지 는 근본업불상응염, 능견심불상응염, 현색불상응염이 있습니 다. 근본업불상응염이란 나와 대상이 나누어지기 전입니다. 예 를 들어 파도가 치는 생각을 했을 때 바늘구멍, 점과 같은 어떤 한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 현상이 근본업불상응염입니다.
그림4. 육식과 말라식과 아뢰야식과의 관계
능견심불상응염이란 그 일어난 바늘구멍, 점과 같은 생각이 조금 구 체화된 것입니다. 이 때는 아직 어렴풋한 상태라고 보면 될 것 입니다. 현색불상응염이란 그것이 완벽하게 구체화된 상태입니 다. 그것이 투영된 것이 제7식인 말라식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고 분별합니다. 제7식의 형상은 근본적으로 제 8식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시작은 작은 점과 같은 것에 있습 니다. 우리가 만약 무언가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과정들을 거친 것입니다.
다시 파도로 돌아와 봅시다. 파도가 치기 전 잠잠한 바다, 물 은 제8식에 해당할 것입니다. 근본업불상응염, 능견심불상응염, 현색불상응염이 해당합니다. 무언가에 부딪히거나 작용으 로 파도가 일어나는데 파도를 일으키는 그것은 제7식에 해당할 것입니다. 분별지상응염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끝없이 일어나 는 파도의 경계, 작용은 제6식에 해당할 것입니다. 부단상응염 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파도가 일어나는 것을 모으는 것이 전오 식인 집상응염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면 눈을 통해 모읍니다. 눈 이외에도 다 른 감각들을 통해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것이 제8식 아뢰야식에 자극이 되어 활성화되면 그것이 점에서 구체화되어 생각이 됩니다. 그 생각이 투영되어 나에게 저장된 업과 작용하 여 개별적으로 구체화됩니다. 생각을 하고 행위를 일으키기 전 에 감각을 통해 모으는 곳이 집(상응염)이며 전5식입니다.
우리는 물든 것만 빼면 부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 기의 고집, 집착을 빼면 우리가 걸어가는 삶은 바로 부처의 삶 입니다. 앞서 진여나 진각, 시각, 불각이 다른 것이 아닌 하나임 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삶도 오염만 되어 있을 뿐 이지 원래 부처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속에 중생과 부처 가 공존하기 때문에 삶 속에서 부처되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 다. 연습을 하다보면 무언가를 객관화시킬 수 있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일어나는 것들 가운데 내가 받아들일 수 있 는 것은 긍정이지만 나머지는 모두 부정입니다. 나 혼자 올바르 고 똑똑하고 다른 사람은 바르지 않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이것 이 100% 긍정이 되면 세상에 바르지 않고 옳지 않은 것이 없습 니다. 내가 부처라고 생각하면 삶 속에 물든 것이 무엇인지 끊
임없이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끝없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기지 만 노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공부, 수행의 노력이 있어 야 아집과 무지가 광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 수 행은 수행자도 할 수 있고 세속의 일반인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공부, 수행을 해야하기에 여러 가지 절제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신’이란 책의 내용을 봅시다. “필자는 기독교인으로 자라났으나 하느님이 누구인가를 오래 추구한 끝에, 스피노자 가 그랬듯이, 대우주(大宇宙)가 자신임을 깨달았다. 과학과 종교 의 통일이요, 대통합이요, 분열된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었 다. 나의 기독교는 정점에 이르러 여기에 도달한 것으로, 이것을 남에게 전달하기는 힘들다. 각자가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고, 깨닫기 위해서는 배우고 공부를 해야 하고 생각을 많이 해 야 한다.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종교지도자에게 서 무엇을 들어도 비판적으로 생각하여 소화하는 능력이 있어 야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 수준에까지 가는 일은 자기 몫이다.” 여기서 대우주가 자신임을 깨달은 것이 바로 일심입니다. ‘비판 적으로 생각하여 소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임제가 ‘부처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죽이고 조상을 만나 면 조상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공부해서 부처되는 것은 우리 의 몫입니다.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만 부처되어 깨 닫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공부하면 깨달 음, 부처의 길이 열립니다.
다시 6염심으로 돌아가 봅시다. “집상응염(執相應染)을 밝히 다. 집상응염은 집착으로 상응하는 오염이니, 성문 연각의 이승 (二乘)의 해탈과 믿음에 상응하는 경지[信相應地]에 의지하여 집 착을 멀리 여의게 된다.” 집상응염부터 시작합니다. 전5식에 해 당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몸으로 느끼는 모든 것에 집착합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내 속에 고여 있 습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불안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내 속에 집어넣어 자기화 시킵 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업을 만듭니다. 만약 집착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을 그냥 보고, 귀로 듣는 것을 그냥 듣고, 냄새 맡는 것을 그냥 맡고, 몸으로 느끼는 것을 그냥 느낍 니다. 집착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내 속에 무언가를 넣어놓는 것이 이 삶은 사는데 유리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많을 수록 좋습니다. 다만 집착을 하지 말 아야 합니다. 집착을 여의면 없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입 니다. 여기서 믿음도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공부하는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속에서 믿음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 게도 믿음이 생깁니다. 내가 헷갈리면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을 밝히다. 부단상응염은 끊어지지 않고 상응하는 오염이니, 신상응지에 의지하여 방편을 수학(修 學)하여 점차로 버릴 수 있으며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러 완전 히 여의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하건 계속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끝없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신상응 지란 철저한 믿음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철저한 믿음이 있으면 부단상응염을 여읠 수 있습니다. 정심지란 마음이 깨끗한 경지 로, 보살 10지 가운데 첫 번째 단계(환희지)에 해당하는 것입니 다. 시험에 합격하는 커트라인 점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들 기 전 본성, 맑은 마음을 본 것입니다. 견성입니다. 정심지에 이 르면 부단상응염이 해결됩니다.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을 밝히다. 분별지상응염은 분 별하여 알아 상응하는 오염이니, 구계지(具戒地)에 의지하여 점 차로 여의며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야 완전히 여의게 된다.” 이것은 제7식 말라식입니다. 평생 나라고 생각하는 내 속 의 내용물입니다. 자기 속에서 능력껏 분별해서 아는 것입니다. 제7 말라식을 깨트리려면 적어도 구계지에 들어가야 점차 없앨 수 있고 무상방편지에 이르면 모두 깨트려집니다. 구계지는 보 살 10지 가운데 제2지 이구지, 제3지 발광지, 제4지 염혜지, 제 5지 현전지(現前地)까지 해당합니다. 무상방편지란 모든 방면 에 능숙한 경지로 보살 10지 가운데 제7지 원행지(遠行地)에 해 당합니다. 제7식 말라식은 원행지에 이르러야 구생혹이 다 깨 어지고 모든 행이 부처에 이르게 됩니다. 아집, 아만, 아애, 아 치가 완벽하게 없어집니다. 우리가 공부를 한다면 최소한 제7 식 말라식은 깨트려야겠다고 목표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 면 ‘나’가 없어져서 이 세상 모든 생명에게 끝없는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건 베풀어집니다. 제7식이 안깨트 려진 중생들은 모두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만큼 보고 느끼고 베 풀면서 살다 갑니다. 우리는 무언가 조금 모아놓고 잘 살았다고 생각하고 가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진리를 모르고 그냥 갑니다. 진리를 알고나면 이면에 소중한 것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진리를 알면 더욱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불편한 이유 가 집착에 있기 때문입니다.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을 밝히다. 현색불상응염은 현 색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이니 색자재지(色自在地)에 의지하여야 여의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불상응염입니다. 색자재지는 보살 10지 가운데 제8지인 부동지에 해당합니다. 부동지의 경지에 가야 아뢰야식의 현색불상응염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을 밝히다. 능견심불상응염 은 능견의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이니, 심자재지(心自在地) 에 의지하여야 여의게 된다.” 심자재지는 보살 10지 가운데 제 9지인 선혜지에 해당합니다.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을 밝히다. 근본업불상응염 은 근본업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이니, 보살지(菩薩地)의 다함에 의지하여 부처의 경지에 들어 여래지(如來地)에서만 여읠 수 있 다.” 보살 10지의 제10지인 법운지가 되어야 근본업불상응염 이 소멸됩니다. 보살 10지의 1지부터 견성이라고 말하고 부처 의 시작입니다. 한번 견성했다고 공부를 그치면 완성을 할 수 없 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일단 무상방편지를 깨트리고 말라식을 깨트려야 해결됩니다. 만약 1지의 단계에서 그친다면 6식만 깨 트려지고 업은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견성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일반 중생들보다 못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말라식, 업이 그대로 남아있는 견성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는 수시로 견성을 하지만 그것이 계속 이어져야 흔히 말해 견성이라고 합니다.
“무명을 끊는 지위를 밝히다. 일법계(一法界)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관찰하여 배우고 끊으며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 분수에 따라 여의게 되며 여래 지(如來地)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여의게 된다.” 일법계는 일심 을 말합니다. 신상응지는 성문과 연각입니다. 이런 단계를 거치 면 사성제, 12연기를 통해 진리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 이 생기면 세세생생 진리와 멀어지지 않게 됩니다. 앞에서도 설 명했듯이 정심지는 보살 10지 가운데 1지에 해당하고 여래지는 마지막 10지에 해당합니다. 여래지가 되면 우리가 무명을 완전 하게 끊고 부처가 됩니다.
“상응을 밝히다. 상응의(相應義)라 한 것은 심(心)과 염법(念 法)이 달라서 물듦과 깨끗함[染淨]의 차별을 의지하여 지상(知 相)과 연상(緣相)이 같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지상과 연상이 같 다는 말은 내 속에 든 것과 나타나는 것이 같음을 말한 것입니다.
“불상응을 밝히다. 불상응의(不相應義)란 곧 마음의 불각(不 覺)이라 항상 차별의 다름이 없어서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진여나 제8식은 우리의 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상과 연상이 같지 않습니다. 즉 내 속에 든 것과 나타나는 것이 같지 않습니다.
죽을 때 통장에 돈 한 푼 더 있다고 훌륭한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자식들 다툼의 씨앗만 됩니다. 이 세상에 보 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지애와 번뇌애를 밝히다. 염심은 번뇌애다. 또 염심(染心)의 뜻을 번뇌애(煩惱礙)라고 하니 능히 진여의 근본지(根本智)를 막 는 까닭이다.” 흙탕물에 의해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원 래 무명의 흰색에 오염되어 물들어 버리면 흰색은 없어지고 물 든 여러 가지 색깔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물들면 근본지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견성을 하면 오염된 것을 걷어내면 근본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명은 지애다. 무명의 뜻을 지애(智礙)라고 하니 세간의 자 연업지(自然業智)를 막는 까닭이다. 염심(染心)에 의지하여 보 고 나타내며 경계를 망령되이 취착하여 평등성을 어기는 까닭 이다. 일체법(一切法)이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모양은 없으나 무명으로 깨닫지 못하여 망령되이 법성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간의 모든 경계에 수순하는 여러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애는 지를 막아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무영을 지애라고 합니다. 화두를 들어 무명을 타파 할 때 이 무명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근본무명을 말합니다. 오염되고 나 면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형성된 업대로 보기 때문에 평 등성을 잃게 됩니다. 무명을 깨뜨리면 존재의 본래성품인 법성 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못 둑이 툭 터져 물이 콸콸 흘러야 되는데, 업에 의해 쌓인 지혜는 바늘구멍 뚫어놓고 흐르는 물을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
오늘은 장수왕 이야기를 봅시다. 장수왕 이야기는 부처님께 서 제자들에게 인과를 설명해줄 때 하셨던 것입니다. 장수왕은 코살라국의 왕이었습니다. 당시 코살라국 남동쪽에 카시국이 있었는데 그곳의 왕은 범예왕이었습니다. 장수왕은 어질고 착 했던 반면 범예왕은 악하고 악착같았습니다. 카시국은 코살라 국에 비해 약소국이었으나 범예왕이 장수왕의 빈틈을 타 전쟁 에서 승리합니다. 그래서 장수왕은 나라를 버리고 아들 장생태 자를 데리고 산에 숨어 살게 됩니다. 장생태자는 복수를 하고 나 라를 되찾고 싶었으나 장수왕은 원한을 만들지 말라고 말합니 다. 자신이 마음을 잘 먹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 다. 어느 날 마을 축제 때 씨름대회를 했는데 뛰어난 장생태자 를 보고 백성 중 누군가가 장수왕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챕니 다. 범예왕은 승리한 후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전국에 장수왕과 장생태자를 찾기 위해 사람을 보냅니다. 그 백성을 통해 밀정에 게 장수왕의 장소가 알려지고 장수왕은 사로잡혀 처형을 당합 니다. 그 후 장생태자는 복수를 위해 범예왕의 측근이 되어 뛰어 난 무예를 뽐내며 동시에 이야기로 왕을 즐겁게 합니다. 범예왕 의 최측근이 된 장생태자는 어느 날 범예왕이 혼자 낮잠을 자는 것을 봅니다. 그 때 그는 복수를 하려다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갈등합니다. 그러는 사이 범예왕이 깼고 그는 그 사이 꾼 꿈 이 야기를 장생태자에게 해줍니다. 꿈에 장생태자가 자신을 죽이 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생태자는 범예왕에게 자신이 장 생태자이며 왕을 죽이려고 했다고 밝힙니다. 하지만 아버지 장수왕의 ‘원한은 원한을 낳으니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의 선에 서 끝내도록 하라.’라는 말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범예왕은 장생태자의 그 진실된 마음과 장수왕의 말에 감동하 여 자신의 지난 과오를 반성하게 됩니다. 그 후 장생태자를 자 기의 양아들로 입적시켜 나라를 물려줍니다. 결국 원한을 원한 으로 안 갚고도 장생태자는 원래 나라를 되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쇼카 왕의 전생 이야기도 살펴봅시다. 부처님이 어 느 날 아난과 함께 마을에 탁발을 하러 나갔습니다. 마을 어귀 에서 모래를 가지고 소꿉장난을 하던 키 작은 아이가 모래로 밥 을 지어 정성껏 부처님께 올립니다. 그것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모래 밥을 받게 하여 정사로 돌아와 허물어진 벽에 바 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아이가 다음 생에 국 왕으로 태어날 것이다. 환희심으로 이 모래를 공양 올렸으니 그 공덕으로 삼보를 공경하여 팔만 보탑을 세울 것이다.” 이 아이 가 아쇼카 왕의 전생이었습니다. 팔만 보탑은 부처님께서 열반 에 드신 후 그 사리를 8등분해서 여덟 개의 탑이 세워집니다. 불 교가 인도 전역으로 퍼지게 되자 아쇼카 왕은 탑이 인도 전역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사리를 나누어 팔만 개의 탑을 세웁니 다. 그래서 인도 전역에서 공양을 올리고 예불을 올릴 수 있도 록 한 것이었습니다. 아쇼카 왕은 출가를 하지 않았지만 불법이 지금까지 전해지게 하는데 1등 공신이 됩니다. 임금이 되어 좋 은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불교를 나라 차원에서 전법합니다. 이 렇게 한 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진리에 대한 공부가 쌓이거나 진실된 마음이 있으면세상이 대응합니다. 내 속에 쌓이는 것만큼 세상은 물질적인 것 을 내게 줍니다. 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주어진 것을 악한 것으로 잘못 쓰게 되고, 내 마음이 청정하면 주어진 것으로 모 든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 내가 진리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이든 권력이 든 명예든 세상을 통해 잘 전파되려면 덕성이 필요합니다. 이것 은 집착을 없애는 것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끝없 는 집착의 연속 속에서 삽니다. 아집, 아만, 아애, 아치에 휘둘려 살게 됩니다. 공부하지 않는 한 이것들은 깨트릴 수 없습니다. 아집이 깨지면 정견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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