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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강설

1강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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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6,512회 작성일 21-07-10 22:02

본문

제1강

- 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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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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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심을 꿰뚫어 아집과 무지를 떨치고 해탈과 평안으로 최고 의 삶으로 이끄는 대승기신론입니다. 세세생생 살아온 내 업에 의해 쌓여있는 이 아집과 무지를 떨치고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 인 해탈과 평안으로 이끄는 대승기신론 공부를 오늘부터 시작 하겠습니다. 대승기신론에 최고로 기여한 분이 인도의 마명(馬 鳴:아슈바고샤), 진제(眞諦:파라마르타)와 우리나라에서는 원효 일 것입니다. 마명이 AD 100년 경에 이 대승기신론을 저술했 고 이것을 진제가 한문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승기신 론에 대한 최고의 명강을 원효가 했습니다. 이것을 제가 이제 풀 어서 강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티벳 불교는 이 세상 불교 가운데 가장 특이하면서 활발하게 살아있는 활불사상입니다. 윤회를 직접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 금 달라이 라마는 14세입니다. 이는 열네 번째로 윤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생을 이어받고 이어받아 달라이 라마 14세가 된 것입 니다. 우리 인류의 삶에 그리고 더불어 같이 사는 만물에게 진실한 삶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는 표본으로 수행자이자 승려이자 지도자이자 스승인 이 달라이 라마가 대승기신론 강의의 첫 시 간에 어울리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달라이 라마께서 1989 년 12월 10일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 연설문을 한번 봅시다. 

“나는 육백만 명의 티베트 국민들, 함께 고통을 겪어왔고 계 속 고통을 겪고 있는 용감한 국민을 대신하여 이 상을 받습니다.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국가와 문화의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전략 과 전술에 맞서고 있습니다. 이 상은 진리와 용기, 결단력이 우 리의 무기이며 티베트는 해방될 것이라는 우리의 신념을 재확 인 시켜주었습니다. 불교승려로서 나는 모든 인간과 고통 받는 모든 유정물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고통이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인 행복과 만 족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 나 진정한 행복은 형제와 자매라는 생각에서 얻어집니다. 우리 는 서로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지구에 대한 공동 의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유식이 우리의 아집을 알아보자는 것이었다면 이 대승기신론 에서 추구하고 있는 진정한 행복은 형제, 자매라는 생각, 즉 우 리는 하나라는 생각입니다. 깨치고 난 다음의 생각이 우리는 전 부 하나라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아집에 갇혀 있으면 우리 는 모두 분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하나이면 내 손이 행 복하면 내 머리가 행복하고 내 가슴도 행복하고 다 행복합니다. 하나일 때는 내가 행복함으로써 전부 다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의 극치가 하나라는 마음입니다. 바로 깨친 마음 입니다. 내가 행복함으로써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더불어 행복 해지는 것입니다. 깨치고 지선(至善)의 마음이 아니면 달라이 라 마처럼 지구가 하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저 아프리카 에 많은 아이들이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것은 그 지역의 문제이지 지구 공동, 전체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 다. 그 고통을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을 나눌 수 있을 때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고 시각에 포 착되는 범위 내에서만 우리는 고통스럽고 행복하고 하지만 조 금만 더 넓게 생각하면 내가 일으키는 이 지극한 마음이 여기에 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벽을 뚫고 지구의 어디든 그 지 극한 마음이 미칩니다. 그래서 나의 바른 생각 하나, 내가 일으 키는 지극한 마음 하나 이것이 나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 라 이 지구 전체를 행복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깨친 마음 은 모든 인류에게 모든 생명이 있는 유정물을 행복하게 하는 최 고의 가르침입니다. 

  원효는 사상사에서 아주 대단한 인물입니다. 부처님 같은 사 람이 깨친 후 깨침의 길을 알려주고 나면 깨치는 것은 크게 어렵 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지 않는 길에 처음으로 길을 낸 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한국의 불교는 중국에서 배워서 시작합니다. 중국에 간 유학승 들에 의해 한국불교가 만들어집니다. 그러한 가운데 스스로 깨 침으로 한국의 사상사를 개척한 분이 원효입니다. 원효의 오도 송을 봅시다. ‘수많은 부처님이 깨친 내용을 잘 알려고 법계를,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관찰해보고 알아보니까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고 내 마음에서 만드는 것이다’라는 겁니 다. 해골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난 뒤에 읊은 것입니다. 원효는 중국 유학을 두 번이나 시도합니다. 젊었을 때는 이루지 못했고 30대가 넘어서 드디어 의상과 중국 유학을 떠납니다. 의상과 중 국 유학길에 산중의 무덤 옆에서 자다가 갈증이 나 바가지에 담 겨져있는 물을 정신없이 마셨습니다. 그렇게 맛있게 마셨던 물 이 새벽에 일어나보니 해골에 고여 있는 물이었습니다. 밤에 뭔 지 모르고 마셨을 때는 꿀맛이었는데 해골 바가지의 물이었다 는 것을 알고부터는 피까지 토할 만큼 토해냈습니다. 그 때 원 효가 깨우친 것이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모든 것이 내 마음 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견성을 한 원효는 의 상을 중국에 보내고 혼자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중국에 갈 이유 가 없어진 것입니다. 깨우치고 나니 부처님 말씀을 가지고 와서 가르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스스로 깨우친 말을 가르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원효는 천성산 화엄벌의 척판암에서 혼자서 수행을 했습니다. 어느 날 원효는 중국 종남산 운제사의 스님들이 경을 논하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대웅전 법당이 무너지려고 하는 것 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널빤지 하나를 뜯어 ‘해동사문 원 효’라 쓰고 운제사로 날려 보냅니다. 그 널빤지가 운제사로 날아 가서 비행물체와 같이 하늘에서 빙빙 돌아가니까 그곳의 스님 들이 신기해서 모두 다 나옵니다. 그 순간 대웅전이 무너져버립니다. 운제사의 천 명이나 되는 스님들이 모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운제사의 스님들은 널빤지를 보고 신라의 원효가 보낸 것을 알았고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화엄을 배우러 한국 으로 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천 명이나 되는 스님들을 수용하고 가르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성산 들판에서 천 명이 원효에게 화엄학을 배웁니다. 저는 40대가 되기 전에 이 이야기가 생각나 새벽에 천성산에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풍경들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길에 오어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오 어사 앞에는 못이 있는데 원효와 해공 대사가 내기를 합니다. 정 해진 시간 안에 누가 물고기를 더 많이 잡아먹는가 대결을 합니 다. 그리고 방변을 하며 확인을 하는데 살아있는 물고기 두 마 리가 나와서 한 마리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아홉 번째까지는 두 마리가 나왔는데 열 번 째는 한 마리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원효와 해공은 그 한 마리가 자신의 물고기라고 주장했다는 설화에서 오어사란 이름이 유래 했다고 합니다. 서로의 신통력을 확인하다가 이름이 부쳐진 것 입니다. 이처럼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원효의 신통력에 대한 이 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교라고 하면 불, 법, 승입니다. 불은 부처님, 깨달음입니다. 불교는 부처님께서 깨우침으로써 시작합니다. 부처님은 본인이 깨친 깨달음을 사람들이 알 수 있다고 여기고 법을 전하게 됩니 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을 설하신 것이 법, 가르침입니다. 

이 깨친 내용을 따라 우리도 깨쳐보자고 마음을 먹고 수행하는 집단이 승입니다. 공부는 혼자서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이 하루는 부처님께 묻습니다. “부처님이시여 공부하는 벗, 우정은 공부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도의 반이라 생각해도 좋겠 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말을 듣고 말씀하십니다. “아난아, 벗, 우정은 도의 전부이니라.” 그래서 공부를 같이 하는 이 무리들 이 중요한 것입니다. 혼자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부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의 집단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하는 것이 아 니라 순수하고 깨끗하게 공부하는 집단입니다. 진리, 올바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법인데 법을 알고나면 우리는 행복해지고 편안해집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잘 살기 위해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 목적을 100% 제대 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법을 알고 바른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깨달으면 부처가 됩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내용이 바로 연기입니다. 연기는 불교의 전 부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경전과 부처님의 가르침 은 연기를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밝혀놓은 것입니다. 이 연기를 초기 불교에서는 직접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짐으로써 저것이 없어지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하는’ 연기의 내용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설명입니다. 어떤 사건이 있 으면 그 사건의 원인이 필히 있게 마련이고 그 원인을 알면 사건 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화두였던 ‘사람은 왜 죽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연기입니다. ‘왜 죽어야만 하는가?’ 태어났기 때문에 죽고, ‘왜 태어났는가?’ 바로 12연기 가 원인이 되어 그 집제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12연기의 첫 출 발점이 무지, 무명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많은 사람에게 연기를 설하셨고, 연기는 그 후 약 500년 동안의 부파불교 시대를 겪으면서 체계화됩니다. 이 과정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집단이 수백만 명으로 어마어마하게 커집니다. 그래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방법만으로는 그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생각으로 단순화해서 그 생각에 집중하게 하는 방법이 등장합니다. 이후 대승불교 시대로 넘어가면서 ‘연기가 공이다.’라는 논리로 체계 화됩니다. 반야심경을 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나옵니다.    ‘색(色)’ 현상적으로 있는 모든 것은 ‘공(空)’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공(空)으로부터 모든 것이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과 공은 하나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 다. 아집에 의해 모두 남남인 줄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모든 것 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연기를 연기적으로 설명한 것이 유가행파입니다. 유식 30송 의 정식 명칭은 유식삼십론입니다. 이 유식삼십론을 간결하고 시적인 문체로 다듬은 것이 유식삼십론송입니다. 그 후 뛰어난 논사 10명이 유식삼십론에 해설, 설명을 붙이는데 그것이 성유 식론입니다. 우리의 마음체계를 다양하게 자신이 깨달은 관점 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연기가 공이라는 쪽으로 전개되는 학파가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중관파입니다. 현대 불교의 가 장 중심 핵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마명은 대승기신론을 저술 했고 용수(龍樹: 나가르주나)는 중론을 저술했습니다. 우리가 배 울 대승기신론은 여기에 속해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마명이 저술한 원본이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진제가 한문으로 번역한 한문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제가 한문으 로 번역한 것이 원본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법인데 이 법을 좀 더 구체적 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삼장입니다. 삼장은 경, 율, 논입 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과 부처님께서 제정한 율, 경과 율 을 체계화 논리화한 것이 논입니다. 경에 있는 내용을 체득해나 가는 것이 율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규범을 정하고 있 는 것이 율입니다. 이 율에 오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계의 첫 번째 항목이 바로 ‘살생을 하지 말라’,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입니다. 이것은 인간에 국한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생명에 해당 합니다. 다른 종교에는 없고 불교에만 있는 위대한 계율이 바 로 이 오계의 첫 번째 항목입니다.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푸 는 것입니다. 함께 모두 잘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만 잘 살 자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전부 다 잘 살자는 것 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목적도 됩니다. 논은 경과 율을 체계화 하고 논리화하여 알기 쉽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가 지나 도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기능도 있습니 다. 우리가 경전을 보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함경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한 경전이라 이해하기 비교적 쉽지만 금 강경, 능엄경, 법화경 등의 대승경전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우 리는 한문으로 된 경전은 배우지만 경전의 사상적 체계는 잘 배 우지 않습니다. 진정한 경전 공부는 경전의 구조와 내용을 제대 로 배우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한 이유는 크게 열 가지입니다. 첫 번 째는 올바른 법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를 믿고 공 부하는 사람은 크게 사부대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출가한 남 자, 출가한 여자,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수행하는 남자, 출가하 지 않고 집에서 수행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살려면 규 칙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계율대로 규칙적으로 사는 것입니 다. 두 번째 이유는 교단의 질서를 잡기 위해서 입니다. 모두 자 기 멋대로 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공부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질서를 유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 째 이유는 현재의 실수를 없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계율을 지 키고 규칙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현재의 실수를 없게 할 수 있습 니다. 네 번째 이유는 미래의 실수를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이 것은 앞과 마찬가지 입니다. 다섯 번째 이유는 다루기 어려운 이 를 잘 다루기 위해서 입니다. 질서가 정해져 있으면 말 안 듣는 사람도 계율에 따라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여섯 번째 이유는 이 미 믿는 이를 더 굳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진리를 믿는 이 마음 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해 규칙적인 생활을 합니다. 여덟 번째 이 유는 뉘우치는 이를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홉 번째 이 유는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열 번째 이유는 대중을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계율을 제정함으로써 집단 이 목적하는 바를 더욱 쉽게 성취할 수 있게 됩니다.


  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던 용수의 중론, 마명 의 대승기신론, 진제의 대승기신론 한역본을 비롯해 대비바사 론, 세친(世親: 바수반두)의 구사론 등이 있습니다. 세친의 구사 론을 정리 요약한 것이 유식삼십송 입니다. 부처님부터 시작해 서 100년 200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대비바사론이 지어지고 이 것을 좀 더 알기 쉽고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 세친의 구사론입니 다. 이것을 좀 더 간결하게 한 것이 유식삼십송입니다.  

대승기신론을 한역했다는 진제에 대해 자세히 살펴봅시다. 진제와 비슷한 위대한 불교 번역가로 구마라집(鳩摩羅什: 쿠마 라지바)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인 현장이 있습니다. 불교가 한 국에 제대로 영향을 주려면 내용이 한글로 번역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은 현실입니다. 이런 것은 여러 사람이 해 야 하는데 뜻있는 소수나 개인이 겨우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국 문학자, 철학자, 승려, 수많은 신자가 모여 과정을 거쳐야 제대 로 된 번역이 될 수 있습니다. 정확하든 부족하든 누군가 번역 을 하면 나중에 누군가 더 나은 번역을 하지 않을까 해서 끊임 없이 번역을 하는 것입니다. 진제는 브라만 출신으로 서북 인도 의 우쟈이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양나라 무제의 초청으로 중국에 갔는데 마침 초청했던 무제가 사망하면서 중요한 후원 자를 잃고 떠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번역하기 위해 인도에서 많은 책들을 갖고 왔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자기 몸 하나 의탁할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양 왕조가 무너지고 진나라가 세워지는 남조의 혼란 속에서 진 제는 소주, 항주로 피난해 그곳에서 불경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진제가 번역한 책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저는 30대에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의 귀명삼보의 불에 나오 는 첫마디 ‘이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나이다.’ 이 말에서 불교에 대해 새로운 세계가 열려버렸습니다. 그냥 견성한다고 깨닫겠 다고 했던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온 혼신의 힘을 다 할 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임을 철저히 깨달은 것입니다.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나이다. 어디에서나 어느 때 에나 가장 훌륭한 일을 하시며, 두루 모르시는 바 없이 다 아시 며, 그 인간성이 자유자재하시고 세상을 구하고자 큰 자비를 베 푸는 자이시여.” 이것이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첫 구절이며 불에 대해 설명한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일이란 이 세상의 모든 유 정물에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명삼보 법을 살펴봅시다. “이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나이다. 그 (지혜롭고 자비로운 자의) 몸이여, 그 몸의 모습이여, 참되고 영원함이 저 바다와 같은 진리여.” 지혜롭고 자비로운 자의 몸 은 법신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법을 알게 되면 진리가 아닌 것 이 없습니다. 모르면 내 것이 있고 네 것이 있고 내 것이 맞고 남 의 것이 틀리지만 법(진리)을 알게되면 이 세상에 버릴 것이 하 나도 없습니다. 다 맞게 됩니다. 이것이 대긍정, 무한 긍정입니 다. 세상은 내가 아는 만큼 열려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만큼내 세상입니다. 천 년 전이나 만 년 후나 부처님 살아계실 적이 나 지금이나 이 세상은 그냥 세상으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 가 법을 깨우치면 이 세상 전부가 진리의 바다인데 깨치지 못하 니까 자기의 우물에 빠져 살게 됩니다. 우물 안 개구리를 밖에 나올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귀명삼보 승을 살펴봅시다. “이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나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의 씨여, 있는 그대로 그리고 모든 것 속에서 생활하는 그 숫한 구도자들이여.” 우리는 가능하면 잘 살고 싶습니다. 이런 공덕의 씨앗은 모두 수행에서 나옵니다. 능력도 없고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되기를 바라는 것이 도둑놈 심보입니다. 그보다 나은 것이 기도하면서 무언가를 빌고 원하 는 사람이고,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그 길을 가면서 기도하고 수 행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행위로 인해서 그것이 모여 이 세상에 태어나보니 자비, 돈, 명예, 지위 등이 됩니다. 진리를 공부하는 것도 공덕의 씨앗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수행 을 통해 자신의 그릇을 크게 하면 엄청난 사람이 됩니다. 대기 업의 사장들을 예로 들어보면 이런 사람들은 그릇이 커서 큰 돈 이 들어와도 나가지를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사람들 에게 그 많은 돈을 나누어 줍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이것도 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도울 때 100만원 을 쓰라고 하면 아까워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채울 때 100만원 을 쓰라고 하면 잘 씁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자비로운 것입니다. 돈은 마음이 내는 것이지 내가 갖고 있는 돈이 내는 것이 아닙니 다. 마음껏 베풀 수 있는 마음은 하나일 때 가능합니다. 모두가 형제, 자매일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삶은 출가, 재가를 떠나서 있는 그대로 모든 것 속에서 수행하고 공부합니다. 앉아서 책을 보는 것만 공부가 아닙니다. 숨 쉬고 밥 먹고 잘 때나 일할 때나 앉고 일어나는 것도 공부입니다. 식사를 해도 이 음식이 오기까 지 수많은 과정을 거쳤음을 생각하며 이 음식이 베푼 것만큼 나 도 이 세상에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냥 먹는 식사와 다르게 됩니다. 구도자의 삶이 다른 것 이 아닙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구도자의 삶입니다. 공부 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멋지게 살고 가는 것입니다. 혼자 잘 살 면 뭐합니까. 다 잘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했던 것이 대승기신론 서론의 귀경송입니다. 그 다음 본론을 살펴보면 논을 짓는 이유인 인연분, 논지의 제시 부 분인 입의분, 논지의 해명 부분인 해석분, 논지의 실천 부분인 수행신심분, 연구실천의 근고 부분인 근수이익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론 부분은 회향송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경전의 결론은 전도, 전법입니다. 세상 최고의 공덕은 법을 전하는 것입 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넘치면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이 대승기신론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일 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사신(四信), 오행(五行)입니다. 일심(一心)은 깨달아서 세상은 하나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일심 (一心)을 알기 전에는 문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진여문과 생사 문이 있습니다. 진리 쪽으로 열려있는 문이 진여문이고 진리를 모를 때 헤매고 있는 문이 생사문입니다. 진여문으로 가면 일심(一心)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삼대(三大)로 구성되어 있습 니다. 체, 상, 용입니다. 본체와 본체의 모습, 본체의 모습에 대 한 작용입니다. 사신(四信)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한 답입 니다. 근본(진여), 불(깨달음), 법(올바름), 승(깨끗함)입니다. 이 것들을 믿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오행(五行)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입니다. 우리의 삶이 진리로 나아가기 위 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한 것입니다. 부처님 초기에 는 팔정도를 설했습니다. 이 팔정도가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육바라밀의 실천이 됩니다. 육바라밀이 이 오행(五行)입니다. 지 관은 육바라밀의 선정, 지혜를 합친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의 내용을 도표로 만든 것입니다. 이 도표는 제가 예전에 BBS 대구불교방송에서 불교 100강 대특강을 강의했을 때 대승기신론이 한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한 시 간에 대승기신론을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만들게 된 것입 니다. 이 구조를 알면 대승기신론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여 기 생사문의 상태는 깨닫지 못한 상태로 이렇게 많은 마음이 있 습니다. 하지만 수행을 해서 깨달으면 시각과 본각의 상태가 됩 니다. 시각은 깨달음을 성취해나가는 것으로 잠시 깨달은 것이 고 본각은 진짜 깨달은 것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진리가 있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진짜 진리가 있습니다. 유식에서 배 운 것은 생사문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생 사문의 내용에서 진여문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대승기신론의 전체 구조를 알면 이해가 아주 쉽습니다. 반 면 전체 설명이 안 되면 하나의 내용 설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승기신론을 설명한 것 중 기신론 3소가 있습니다. 기신론 3소는 바로 수나라 혜원의 대승기신론의소와 신라 원효의 대승 기신론소와 당나라 법장의 대승기신론의기입니다. 

수많은 대승기신론 해설서 중에서 명쾌하게 밝힌 것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대승기신론을 읽으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설한 법은 바다에 들어가는 것처럼 들어갈수록 더욱 더 깊어진다.”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이 불교 공부는 하면 할수 록 재미있어집니다. 우리가 잠시 듣는 법문은 공부가 아닙니다. 공부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하나의 체계를 보고 아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이기 영 교수 번역)를 볼 수 있었던 인연에 고마움을 느끼고 행운이 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 책을 보며 느낀 환희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인연으로 대승기신론을 번역하고 강의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대승기신론은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물건들을 흩어놓았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정리하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깨끗하게 정리된 공장이 대승기신론입니다. 불법을 깊이 이해하는 한 사 람만 있어도 세상이 당당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진 리의 길을 걷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세상은 행복합니다. 칼 날 위를 편안하게 걸어가는 것도 불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승기신론을 번역하면서 꽃다운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요절 한 승조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황제가 승조를 보고 그의 재 능에 반해 정승의 벼슬을 내렸지만 승조는 불법만이 나의 길이라고 하며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 때문에 감옥에서 젊은 나이 에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감히 이 마음으로 대승기신론을 우 리말로 옮기고 설명을 해보았습니다. 세상은 그냥 자신이 서있 는 자리에 뿌리내린 나무일뿐인데 어떻게 불법의 인연을 마다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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