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의언진여, 심생멸문 > 대승기신론강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대승기신론강설

5강 의언진여, 심생멸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4,934회 작성일 21-07-11 23:10

본문

제5강


(3-1-1-2-2) 의언진여를 설하다 

[진제14] 또한 진여란 언설에 의하여 분별하면 두 가지 뜻이 있 다. 첫째는 여실공(如實空)이니 구경에는 실체를 나타내는 까닭 이며, 둘째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그 자체에 번뇌 없는 본성 의 공덕을 구족하는 까닭이다.

復次,真如者,依言說分別有二種義。云何為二?一者、如實 空,以能究竟顯實故。二者、如實不空,以有自體,具足無漏 性功德故。

(3-1-1-2-2-1) 여실공은 허무함이 전무하다 

[진제15] 여실공(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일체의 염법(染法) 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체법의 차별되는 모양 을 떠났으며, 허망한 심념(心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 여의 자성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유 (有), 무(無)를 함께 갖추었지만 모양도 아닌 것이며, 같은 모양도 아니며 다른 모양도 아니며, 같은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다른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같고 다른 모양을 함께 갖춘 것도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일체의 중생은 허망한 마음이 있어서 생 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지만, 만약 허망한 마음을 여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다. 所言空者,從本已來一切染法不相應故,謂離一切法差別之 相,以無虛妄心念故。當知真如自性,非有相、非無相、非非 有相、非非無相、非有無俱相,非一相、非異相、非非一相、 非非異相、非一異俱相。乃至總說,依一切眾生以有妄心念念 分別,皆不相應故說為空,若離妄心實無可空故。 

(3-1-1-2-2-2) 불여실공은 청정법이 가득하다 

[진제16] 불공(不空)이라는 것은 이미 법체가 공(空)하여 허망함 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이는 진심(眞心)이며, 진심은 항상하 여 변하지 않고 청정한 법이므로 불공(不空)이라 말한다. 또한 모양을 가히 취할 수 없으니  망념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 함으로써 상응하는 것이다.

所言不空者,已顯法體空無妄故,即是真心常恒不變淨法滿 足,故名不空,亦無有相可取,以離念境界唯證相應故。 

(3-1-1-3) 심생멸문 

[진제17]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과 더불어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이름하여 아뢰야식(阿梨 耶識)이라고 하는 것이다.

心生滅者,依如來藏故有生滅心,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 非一非異,名為阿梨耶識。

(3-1-1-3-1) 제법의 포섭과 발생을 널리 해석하다 

(3-1-1-3-10) 아뢰야식을 해석하다

[진제18] 아뢰야식(識)은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일체법을 포섭하

며, 일체법을 내기도 한다.

此識有二種義,能攝一切法、生一切法。 

(3-1-1-3-2) 생멸심의 각과 불각을 해석하다

[진제19] 생멸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각(覺)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

云何為二?一者、覺義,二者、不覺義。


---------------------

대승기신론 강설_5

--------------------- 


  “의언진여를 설하다. 진여란 언설에 의하여 분별하면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여실공(如實空)이니 구경에는 실체를 나타내 는 까닭이며 둘째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그 자체에 번뇌 없 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하는 까닭이다.” 지난 시간에 설명한 이 언진여란 말을 떠난 진여이며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진여입니 다. 이번에 설명할 의언진여는 말에 의지하는 진여입니다. 부처 님의 가르침에는 교(교리)가 있고 선(참선)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선이고 말로 표현한 것은 교리, 경 전입니다. 선과 교가 있듯이 진여도 이언진여와 의언진여가 있 습니다. 공은 진공(眞空)이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이고 연기이고 깨달음이고 진여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이 공입니다. 여실공(如實空)은 공의 실체를 여실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실불공(如實不空)은 실체를 넘어선 것입니다. 여실공(如實空)은 보 이지 않는 실상의 세계를 말로 나타내보려고 하는 것이고, 여실 불공(如實不空)은 실상을 두루 갖추고 있는 공덕 그 자체, 즉 본 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언진여를 여실공(如實空)과 여 실불공(如實不空)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여를 사랑에 한번 비유해 봅시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까지 살면서 사랑 한번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은 말을 떠난 곳 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만 쳐다봐도, 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떠난 사랑 이 바로 이언이라고 할 수 있고, 말에 의지하여 사랑을 표현하 는 것이 의언입니다. 앞서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 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실공(如實空)은 사랑에 비유하면 사랑의 실상입니다. 사랑에 대해 묻는다면 모두 각자가 느낀 사랑이 있 을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이 보다 더한 기쁨을 느끼지 못했 다거나 깊이 빠지는 것 같았다거나 보고 싶었다거나 눈물이 나 기도 했을 것입니다. 보고 싶다는 것은 눈은 말그대로 보고 싶 다는 것이고 귀는 그 사람의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고 코는 그 사람의 향기를 맡고 싶은 것이고 육신은 감촉을 느끼고 싶은 것 등을 나타냅니다. 이것들이 보고싶다는 말에 함축되어 있는 것 입니다. 육근 모두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실공(如 實空)은 자기가 느낀 것을 표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실불 공(如實不空)은 사랑을 느낌으로 생기는 이득입니다. 내가 사랑 의 실상을 흠뻑 체득함으로써 나에게 생기는 이득(공덕)입니다. 

사랑의 실체를 내 속에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세상과 관 계하고 세상과 공유하는 모든 것입니다. 이것이 여실불공(如實 不空)의 원칙이자 원리입니다. 사랑을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 공(如實不空)과 연결하여 설명해보았습니다.

  여실공(如實空)에 대해 자세히 살펴봅시다. “여실공(如實空) 이란 부정으로서의 진실성입니다.” 사실적인 진실성입니다. 여 실불공(如實不空)은 내가 체험하고 체득하고 느끼는 진실성입니 다. “여실공(如實空)은 진여가 비실재적이며 비본질적인 일체의 사물의 속성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어 틀림없는 실재라는 의 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이 있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 는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우리가 보고 느 끼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진여에는 우 리의 모든 가치와 삶을 결정지워주는 많은 요소가 있습니다. 여 실공(如實空)은 실상이 참으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실불공(如實不空)은 “긍정으로서의 진실성”입니다. “진여 가 무한한 공덕(무루성 공덕)을 내포하고 있으며 스스로 존재한 다는 의미”입니다. 무한한 공덕(무루성 공덕)이란 공덕은 무한 하지만 업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 속에는 업도 있 고 복덕도 있습니다. 내가 선한 행동을 하면 선의 과보가 쌓이 고 그에 상응하는 몸을 받습니다. 이것은 유루성 공덕입니다. 하지만 진여가 갖고 있는 무한한 공덕은 무루 공덕입니다. 공덕 은 무한하지만 다음 생에 몸을 받고 윤회하게 하는 업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실공은 허무함이 전무하다. 여실공(如實空)이라고 말하는것은 본래 일체의 염법(染法)과 상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 법의 차별되는 모양을 떠났으며, 허망한 심념(心念)이 없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자성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며 모양 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 지 않은 것도 아니다.” ‘허무함이 전무하다’는 말은 실상 그대로 란 말입니다. 여실공(如實空) 즉 진여는 모든 오염된 법(염법: 染 法)과 상응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오 염된 것을 씁니다. 내 속에 축적된 업은 전부 오염된 것입니다. 이 오염된 것을 내가 계속 쓰는 것입니다. 오염된 것을 계속 끄 집어내 쓰기 때문에 염법(染法)과 상응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 으키는 모든 생각은 전생에 내가 행위했던 업에서 나오는 것입 니다. TV에서 어떤 연예인이 나오면 그 연예인을 보고 내 속에 들어있던 업이 ‘마음에 든다’, ‘잘 생겼다’, ‘마음에 안 든다’등 의 생각, 판단을 하게 만듭니다. 전생에 축적된 업을 가지고 이 생의 나는 어떤 행동이나, 판단이나, 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그 래서 모두 자기대로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오염되고 물든 염법(染法)입니다. 하지만 진여는 이 염법(染法) 을 떠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차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눈에 비치는 대로 다르게 봅니다. 다 차별이 되어 있는데 진여는 그 차별을 떠난 자리입니다. 그래서 ‘일체법의 차별되는 모양을 떠났다’ 고 한 것입니다. 진여는 모두 평등하고 일심이고 하나인 것입 니다. 모두 차별되는 모양을 각자의 업만큼 갖고 있는데 진여는 차별되는 모양을 떠난 것입니다. 진여라는 세계를 알고나면 본

질을 알고 살아가지만 모르면 업이 시키는대로 분별하며 살아 가게 됩니다.

  ‘진여의 자성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입 니다. 누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대로 생각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뭔가 경계가 오면 그에 따라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양을 안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진 여 속에서 보는 현상에 따라 일으키는 경계에 따라 모든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갖고 있는 업에 따라 분별을 하고 판단 을 하는데 이것들을 떠난 자리가 여실공(如實空)입니다. 유식에 서 공부했던 제8식 아뢰야식부터가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 다. 제7식은 염법(染法)이고 심념(心念)입니다. 제8식 아뢰야식 은 염법(染法) 되기 전의 것입니다. 물들기 전의 것을 구체적으 로 나누어놓은 것입니다. 여실공(如實空)은 물들기 전의 실상을 보는 것이고, 여실불공(如實不空)은 그 실상을 체득해서 내 것으 로 써먹는 것으로 무한한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자성에 대해 살펴봅시다. 자성은 진여이고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는 성품입니다.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원래 가 지고 있는 성품은 법성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법이라고 하 기 때문에 법성인 것입니다. 이 자성을 제대로 보는 것을 견성 이라고 합니다. 견성은 여실공(如實空)이고 그것을 깊이 체득해 서 써먹는 것은 여실불공(如實不空)입니다. 자성이란 물들기 이 전의 것입니다. 우리같은 중생은 물든 후의 것을 가지고 쓰며 평 생을 살아갑니다. 이 자성은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모양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양도 되고 모양이 아닌 다른 것도 될 수 있습니다. 같은 모양이기도 하고 다른 모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하고 법이라고 하 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근과 육근 이 작용해서 일으키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의 본질이 법 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복사꽃이란 제목의 선시입니다. 


  30년을 복사꽃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돌아다니다가

  지쳐 집에 돌아와

  낡아 삐거득거리는 문을 여니

  앞 뜰에 복사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30년 동안 깨달음을 찾아 전국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닌 이야 기입니다. 평생을 자성을 찾아헤매어도 못 찾았지만 결국 속으 로 침잠해서 내 속을 보니까(집으로 와보니까) 자성이란 꽃이 피 어있더라는 말입니다. 자성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더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한번 봅시다. 에너지, 일, 열 이런 것들은 불교와 별로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진여, 진 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에너지가 넘친다고 말하는데 이는 내 속에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만되었다는 말입니다. 포트에 물을 넣고 끓이면 열이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힘과 일의 

관계는 어떨까요? 힘이 세다고 해서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닙 니다. 만약 쌀 한 가마니를 들고 한 시간을 서있었다면 이것은 힘은 많이 썼지만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쌀만 들고 있었 을 뿐입니다. 하지만 쌀을 들고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였다면 이 것은 일입니다. 일은 힘을 쓴 것에다 일정한 움직임이 있어야 합 니다. 이처럼 에너지는 일이나 열로 변환시킬 수 있지만 일은 에 너지로 환원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열도 다시 에너지로 되 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런 비 가역 현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늙고 죽습니다. 이것도 비가역 현상입니다. 다시 환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 가 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만약 에너지, 일, 열이 각각 통 하나에 들어있다고 한다면 다들 에너지를 들고 갈 것입니다. 에 너지를 갖고 있는 만큼 일을 할 수 있고 열을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에너지가 여실공(如實空)이고 일과 열은 소모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물들여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면 무언가 일을 할 수도 있고 무언가 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여실공(如實空)을 모르면 물들어 있 는 것만 사용하는데 여실공(如實空)을 알면 근본, 뿌리를 알게 됩니다. 근본, 뿌리(에너지)를 알면 그것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여실공은 허무함이 전무하다. 유(有)와 무(無)를 함께 갖추었 지만 모양도 아닌 것이며, 같은 모양도 아니며 다른 모양도 아니 며, 같은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다른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 며, 같고 다른 모양을 함께 갖춘 것도 아닌 것이다.” 여실공 즉, 진여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양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모양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같은 모양이기도 하고 같은 모양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모양을 함께 갖춘 것도 아닙니다.

  “여실공은 허무함이 전무하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일체의 중 생은 허망한 마음이 있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진여와 상 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지만, 만약 허망한 마음을 여 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다.” 우리는 진여를 쓰는 것이 아니 라 오염된 마음, 제7식을 씁니다. 그래서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란 표현을 씁니다. 하지만 진여와 상응하게 되면 여실공(如實空)이 됩니다.

  “여실불공(如實不空)은 청정법이 가득하다. 불공(不空)이라는 것은 이미 법체가 공(空)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이는 진심(眞心)이며, 진심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고 청정한 법이 므로 불공(不空)이라 말한다.”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 不空)은 진여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실공은 진여의 실 상, 진여에 대한 설명을 나타내고 여실불공은 진여의 실상을 체 득한 상태에서 나오는 공덕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의언진여는 크게 여실공과 여실불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실불공은 청정법이 가득하다. 또한 모양을 가히 취할 수 없으니 망념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함으로써 상응하는 것이 다.” 여실불공은 진여의 마음을 체득한 것입니다. 여실불공은 온 세상 그대로, 물들기 전의 것이라 청정한 것 밖에 없습니다. 진여의 마음을 체득하려면 체득 방법을 통해서 느껴봐야 합니 다. 제일 좋은 방법이 내 생각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우

리가 쓰고 있는 모든 마음은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염된 것을 보고 그것을 깨트려야 합니다. 만약 단단한 돌을 깨려면 돌 보다 강한 물건으로 계속 쳐야 합니다.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오 염된 염법(染法)을 깨려면 한 곳을 계속 때려야 합니다. 생각을 집중시켜야 합니다(사마타). 돌의 성질을 보고 어디를 칠 것인 가 파악하는 것은 관조 즉 위빠사나입니다. 그래서 한 곳을 계속 치다보면 돌에 금이 갑니다. 집중해서 단단한 돌을 깨면 에너지 가 나옵니다. 돌이 깨지면 그 에너지가 내게 축적이 됩니다. 불 여실공은 증득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대승기신론과 같은 경전에 대한 초기 논을 쓴 사람들은 자신 이 증득한 것을 가지고 글을 썼습니다. 본인의 체험에서 나온 것 입니다. 지금 가만히 있으면 내가 망념을 일으키는 것인지 아닌 지 모릅니다. 생각을 집중시키다보면 내가 일으키는 번뇌를 알 게되고 그 번뇌를 다스리는 방법도 생기게 됩니다. 그냥 생각을 집중시키면 그 집중이 10초도 안 갑니다. 계속 딴 생각이 뚫고 일어납니다. 이럴 때 어떤 한 생각으로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 한 생각에 계속 모으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생각이 일어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르지만 한 생각 에 집중해 생각해보면 번뇌, 잡념이 끝없이 일어남을 알 수 있습 니다. 이것은 진여를 증득해야 해결됩니다. 이언진여는 이미 진 여가 체득된 상태지만 의언진여는 진여를 보고 증득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우리의 끝없는 번뇌망상은 그냥은 없어지지 않습 니다. 생각을 집중시켜 번뇌를 깨트리고 부수어야 없어집니다.

  “심생멸문,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과 더불어 화합 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이름하여 아뢰야식 (阿梨耶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심에 진여문과 생멸문이 있 었습니다. 이것은 같고 하나이기 때문에 일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도 진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중생의 마 음으로 탐진치를 일으켜 살아가지만 우리 삶에 궁극적인 의미 를 부여하는 것이 진여입니다. 이것은 대긍정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살아도 진여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모습 속에 진여가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유식은 심생멸문을 알고 진여 의 세계로 가는 것이라면 대승기신론은 진여의 세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래장에도 진여의 성품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원래 진여의 세계는 불생불멸인데 우리가 사는 생멸심에도 불생불멸의 진 여가 있어 생멸이 불생불멸이 됩니다. 유식은 제6식과 제7식을 중심으로 제8식을 설명하고 수행을 통해 진여의 세계로 나아가 자고 합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심생멸문에서 일어나는 것들 이 진여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생불멸이 생멸과 더불어 화합한다.’가 그 뜻입니다. 제7식에 서는 생멸밖에 안 되지만 제8식에 가면 불생불멸도 되고 생멸 도 됩니다.

  유식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내용들을 복습해봅시다. 이 세상 에는 나와 나 이외의 대상이 존재합니다. 나를 표현하는 것은 내 용을 인식하는 인식체인 6근입니다. 나는 눈이 있어 대상을 볼 수 있고 귀가 있어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코가 있어 냄새를 맡을 

수 있고 혀가 있어 맛을 느낄 수 있고 몸이 있어 감촉을 느낄 수 있고 의지가 있어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인식하는 대상은 6 경입니다. 근(根)은 작용을 일으키는 능력체(indriya)입니다. 그 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12처라고 하 셨습니다. 나와 대상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는 것입 니다. 그리고 눈과 형상이 부딪히면 안식이 생기고, 귀와 소리가 부딪히면 이식이 생기고, 코와 냄새가 부딪히면 비식이 생기고, 혀와 맛이 부딪히면 설식이 생기고, 몸과 감촉이 부딪히면 신식 이 생기고, 뜻과 법(생각의 대상)이 부딪히면 의식이 생깁니다. 나와 대상이 부딪혀 식이 생기고 분별이 일어납니다. 무엇이든 지 나와 대상이 부딪히면 식이 발생합니다. 6식과 6근과 6경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입니다. 6근, 6경, 6식을 통틀어 18계 라고 합니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연기법에 준하여) 부처님은 일 어나는 모든 것을 경전을 통해 설하셨습니다. 식은 6가지가 있 습니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입니다. 

  여기서 의식을 세분화해보니까 6식, 7식, 8식이 있습니다. 우 리가 순간 부딪히며 생기는 의식이 현재의식 6식입니다. 7식은 말라식, 잠재의식, 심층적 자아 집착심입니다. 평생 나라고 고 집하는 것입니다. 7식이 일으키는 모든 것이 아집입니다. 우리 는 평생 7식을 나라고 착각하고 써먹습니다. 여기서 더 깊이 들 어가면 물들기 전의 원래의 것이 있습니다. 7식이 물들기 전의 것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이 8식입니다. 8식 아뢰야식은 물들기 전의 무의식입니다. 한 생을 살고나면 행위의 모든 정보가 아뢰 야식에 저장됩니다. 이것이 윤회의 씨앗이 됩니다. 다시 대승기

신론 내용으로 돌아갑시다.

  “아뢰야식을 해석하다. 아뢰야식은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일체 법을 포섭하며 일체법을 내기도 한다.” 아뢰야식은 일체의 법을 전부 받아들이고 일체의 법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일 체법이 내 아뢰야식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생멸심의 각과 불각을 해석하다. 생멸심에는 두 가지가 있으 니 첫째는 각(覺)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 진여 는 각이고 생멸문은(유식에서 설명되어 있는 6식, 7식) 불각에 해당합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각과 불각을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심으로 회향하 는 것입니다. 생멸심은 불각에 해당하지만 불각의 뿌리는 각과 맞닿아있고 각입니다.

  “본각과 시각을 함께 설하다. 각(覺)의 뜻은 심체(心體)가 망 념을 여읜 것을 말함이니 망념을 여읜 모양은 허공(虛空)과 같아 서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어 법계가 한 모양이다. 이것이 여래 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것을 본각(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각은 본각과 시각으로 나뉩니다. 본각은 깨달은 그 상태이고 시 각은 본각으로 가는 것입니다. 각은 모든 분별경계를 떠난 것을 말합니다. 깨친 상태에서 보면 전부 다(법계)가 하나로 통섭됩 니다. 그래서 법계가 한 모양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전부 평 등합니다. 그래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라고 말합니다. 본각은 깨치고 난 본래 성품입니다.

  “본각과 시각을 함께 설하다. 본각의 뜻은 시각(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시각이라는 것은 바로 본각과 같

다.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으며 불각에 의지하는 까닭으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본각 은 진여 자체를 설명한 것이고 시각은 우리가 행위를 통해서 본 각을 체험하고 체득해나가는 것입니다. 결국 깨닫지 못한 우리 의 삶이나 수행을 통해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 시각입니다. 이 시각의 상태가 완전하게 되어 깨닫게 되면 본각이 됩니다. 그래 서 불각, 시각, 본각은 하나이고 같다는 것입니다. 진여와 생멸 이 같다고 했듯이 불각, 시각, 본각은 하나의 궤 속에서 통과해 같이 있습니다.

  심생멸문을 좀 자세히 봅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 는 같거나 오른쪽의 것이 왼쪽의 것에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 심진여문 ⊇ 심생멸문’ 우리의 모든 삶은 심생멸문입니다. 진여 문은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심생멸문은 심진여문에 포함되거나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진여입니다. ‘각 ⊇ 불각’ 불각은 각과 같거나 각에 포함됩니다. ‘본각 ⊇ 시각’, ‘시각 ⊇ 불각’, ‘ 진여 ⊇ 본각 ⊇ 시각 ⊇ 불각’ 결국 불각, 시각, 본각도 전부 진 여의 일심으로 통합니다. 대승기신론의 대긍정은 불각이 본각, 진여와 다르지 않다는데서 나옵니다. 내 삶 자체에서 진여가 포 함되어 있고 이것을 떠난 진여는 없습니다. 진여를 깨우치고 체 험하고 체득하면 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상태라도 진여가 그 속에 들어있고 시각과 본각을 통해 본각이 되는 순간 진여가 됩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우리의 삶도 긍정적으로 보면 시각 과 같거나 포함된 상태이고 시각은 본각과 같거나 포함된 상태 여서 결국 모두 진여와 다르지 않고 진여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화엄경의 세계가 나옵니다. 있는 그대로가 화엄의 세계입니다. 깨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 대로가 깨우침이고 진여가 되는 것입니다. 심생멸문에 대한 대 긍정이 바로 심진여문과 같다는 것이고 이것으로 일심과 하나 가 됩니다. 대승기신론의 거대구조를 이해하면 세부구조에 대 한 이해가 수월해질 것입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 

  이 생에서 한 생을 살고 죽을 때 과보를 받습니다. 그 과보도 받는 순서가 있습니다. 무거운 업을 가장 먼저 받습니다. 무거 운 업에는 불선업과 선업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살생 을 하거나 누군가를 도와주고 착한 일을 하면 다음 생에 내 삶을 결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 다음 받는 것은 습관적으로 지은 업입 니다. 매일 한 시간씩 공부하는 것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공부하는 습이 붙게 됩니다. 습관적으로 지은 업이 삶을 결정하 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매일매일 수행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받는 업 이 임종 가까울 때 지은 업입니다. 사람이 죽음이 가까워지면 불 안해집니다. 죽음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마음이 편안한 상 태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한 사람은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안 했던 사 람은 죽음의 문턱 앞에서 불안한 생각 밖에 없습니다. 임종 가까 이서 지은 업이 다음 생에 몸을 받을 때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예로 빠세나디 왕의 왕비 말리카 왕비의 이야기가 있

습니다.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이란 큰 나라가 있었습니다. 당시  코살라국의 왕이 빠세나디 왕이었습니다. 불교 경전 가운데 승 만경은 빠세나디 왕의 딸이 시집가서 부처님의 법을 생각하며 적은 것입니다. 코살라국의 사위성에는 최고의 불교 사원 기원 정사가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네 가지 계급이 있습니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가 있습니다. 당시 수드라 중에서 꽃 배달을 하는 말리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빠세나 디 왕의 눈에 띄여 왕비가 됩니다. 말리카는 빠세나디 왕을 불법 으로 귀의시키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말리카 왕비는 빠세나디 왕에게 부처님을 만나보라고 계속 말합니다. 1년 정도 설득한 후에 빠세나디 왕이 겨우 마음을 내어 부처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렇게 빠세나디 왕은 불교에 귀의하고 말리카 왕비는 엄청난 금액을 보시합니다. 하지만 말리카 왕비는 다음 생에 또 수드라 (천민)로 태어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 니다. 결국 말리카 왕비는 그렇게 많은 보시를 했음에도 불구하 고 임종 직전의 그 불안 때문에 극락에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 래서 평생 수행을 해야합니다. 평생 수행을 하지 않으면 누구든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 불안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 불안 때문 에 내가 받을 수 있는 좋은 업들도 못 받게 됩니다.

  그리고 금강산 표훈사 돈도암에서 수행하던 홍도 비구의 이 야기가 있습니다. 홍도 비구는 수행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습 니다. 당시 사람들은 수행에 있어서는 홍도 비구를 따라갈 사람 이 없다고 했고 곧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홍도 비구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앓아누워 있다가 잠시 바람을 쐬는데 눈에 먼지가 들어가자 화가 폭 발하고 맙니다. 그 때 홍도 비구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삼 세제불(三世諸佛)도 소용이 없고 팔부신장(八部神將)도 믿을 것 이 못되는구나. 나와 같이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도 틀린 일이지만, 바람까지 불어서 나를 괴롭게 하니 이래가 지고 무슨 부처님 법이 영험하다고 할 것이냐?” 이렇게 부처님 을 비방(誹謗)하고 맙니다. 그렇게 말하고 누워 자는데 꿈속에서 자신의 몸이 뱀의 비늘로 덮히는 것이었습니다. 꿈을 깨고 일어 나니 본인이 뱀이 되어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수행을 열심히 했어도 자신의 화를 못 삼키고 부처님을 비방한 과보로 뱀이 된 것이었습니다. 뱀이 된 홍도 비구는 자신의 꼬리로 글 을 써서 젊은 수행자들에게 귀감이 되게 합니다.


  금강산 돈도암에서(金剛山頓道庵)

  홍도비구의 지나간 자취(弘道比丘往去側)

  다행히 불법 만나고 사람 몸 얻어서(幸逢佛法得人身)

  오랫동안 수행하여 성불에 가깝더니(多劫修行近成佛)

  솔 바람 불어 쳐 눈 가운데 티끌 보고서(松風吹打眼中視)

  한 번 성내는 마음 일으켜 뱀의 몸을 받으니(一起嗔心受蛇身)

  천당과 극락이 마치 지옥과 같으며(天堂佛刹如地獄)

  오직 사람 몸으로만 짓는 인(因)이 있는지라(唯有人身所作因)

  내가 전생에 비구로 이 암자에 머물렀으나(我昔比丘住此庵)

  금생에 이 몸을 받아 한이 많고 많은지라(今受此身恨萬端)

  원하옵건대 스승께서는 염부제에 돌아가셔서(願師還鄕閻浮提)

  저의 모습 이야기하여 후인들에게 경계케 하소서(說我形容 誡後人)

  차라리 저의 몸을 부수어 가루를 만들지라도(寧碎我身作微塵)

  요컨대 평생 한번의 성냄도 일으키지 않게 하소서(要不平生一起嗔)

  뜻은 품고 있으나 입으로 말을 할 수 없어서(含情口不能語言)

  꼬리를 가지고 글을 써서 참 뜻을 들어내니(以尾成書露眞情)

  원하옵건대 수행자는 이 일을 글로 써서 벽에 걸고(願師書事懸壁上)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려고 하거든 얼굴을 들어 읽어보게 하 소서(欲起嗔心擧顔看)


  이를 통해 수행이 얼마나 힘든지, 화내는 마음이 얼마나 지독 한지 알 수 있습니다. 화내는 마음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계속 화를 내게 됩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수행을 하는 하루 하루의 습관이 중요한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이트 정보

상호.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대표. 김성규 사업자등록번호. 514-82-14810 [사업자등록, 법인등록정보 확인]
Tel)053-474-1208 Fax)053-794-0087 E-mail) tongsub2013@daum.net
주소 : 대구광역시 남구 두류공원로 10(대명동)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성규

Copyright ©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All rights reserved.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0
어제
0
최대
0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