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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각의 뜻을 네가지로 풀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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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5,057회 작성일 21-07-1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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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3-1-1-3-3) 각의 뜻을 네 가지로 풀이하다 

(3-1-1-3-3-1) 본각과 시각을 함께 설하다 

[진제20] 각(覺)의 뜻은 심체(心體)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함이 니, 망념을 여읜 모양은 허공(虛空)과 같아서 두루 하지 않는 곳 이 없어 법계가 한 모양이다. 이것이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것을 본각(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각의 뜻은 시각(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그 러므로 시각이라는 것은 바로 본각과 같다.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으며 불각 에 의지하는 까닭으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所言覺義者,謂心體離念。離念相者,等虛空界無所不遍,法 界一相即是如來平等法身,依此法身說名本覺。何以故?本覺 義者,對始覺義說,以始覺者即同本覺。始覺義者,依本覺故 而有不覺,依不覺故說有始覺。

(3-1-1-3-3-2) 시각을 사상으로 밝히다 

[진제21]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은 까닭으로 구경각(究竟覺)이 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한 까닭으로 구경각이 아니라 고 한다. 

又以覺心源故名究竟覺,不覺心源故非究竟覺。此義云何? 

(3-1-1-3-3-21)  불각을 밝히다 

[진제22] 무릇 사람은 앞 생각에 악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치게 하여 그 악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 게 한다. 이것을 각(覺)이라고 말은 하지만 곧 불각(不覺)이 된다. 如凡夫人覺知前念起惡故,能止後念令其不起,雖復名覺,即 是不覺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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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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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이 우주에는 무엇이 존재하 는가? 이것은 간단하지만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주에는 어마어 마한 공간이 펼쳐져 있고 공간 속에 물체가 있습니다. 태초에 공 간이 있고 물체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물체는 움직입니다.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시간으로 인식합니다. 공간이 일정한 방 향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면 시간이 됩니다. x축, y축, z 축을 하나의 공간이라고 할 때 우주는 이러한 공간들 속에 놓여 져 있습니다. 이 안의 물체가 있고 그것이 움직이기 때문에 시간 이란 요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가장 기본적인 값 이 됩니다. 여기서 물체들은 어떤 일정한 값과 법칙이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인류는 엄청난 발전을 해왔습니다. 이 속에서 의지 를 갖고 있는 존재들이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이 의지가 집속되 어 생명이 탄생하게 되고 법칙이 생겨납니다. 이 의지를 가진 생명체들은 집단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조직체 를 갖고 연구를 하고 답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법칙을 다양하게 적용합니다. 철학에서는 존재의 목적과 원리를 연구하고 인문 학에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연구를 하고 사회학에서는 삶의 효 율성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과 관계를 연구하고 자연과학에서는 물리학과 생물학이 있는데 무생물의 법칙을 물리학이 연구하고 생물의 법칙을 생물학이 연구합니다. 종교는 원리에 신앙이 더 해진 것입니다.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이 이러한 학문들에서 나옵니다.

  좁은 지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은 일심으로 통하는 내용들입니다. 지난 시간의 내용을 요약하면 진여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원래 진여는 말로 표 현할 수 없지만 어떻게 해서 말로 표현해냅니다. 말로 표현한 진 여를 의언진여라고 하는데 이것을 여실공과 여실불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진여 자체는 여실공이고 여실공을 체득하여 나오 는 공덕은 여실불공입니다. 여기서 아뢰야식이 나오는데 아뢰 야식은 일체법을 포섭하고 냅니다. 즉 우리 안에 일체법, 이 세 상 전체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뢰야식은 능장, 소장, 아애집장 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능장은 종자를 넣을 수 있는 곳간입 니다. 그 종자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소장입니다. 능장과 소장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애집장은 말라식에 의해 집 착되어 나타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들어있는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일체법을 내는 부분입니다.

  생멸심의 각과 불각은 지난 시간에 본 부분이지만 나중에 나

올 내용과 연결됩니다. 일심은 심진여문과 심생사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멸과 진여가 일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데, 생 멸이 진여가 되고 진여가 생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멸심 에는 깨달은 각과 오염되고 깨닫지 못한 상태인 불각이 있습니 다. 본각과 시각, 불각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깨달음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습니다. 깨친 상태, 진여가 본각입니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상태는 시각입니다. 깨닫지 못한 지금 우리와 같은 상태는 불각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 은 불각의 상태에서 시각을 거쳐 완전해지면 본각이 됩니다. 결 국 깨닫지 못한 불각의 세계는 진여, 본각의 한 부분일 뿐입니 다. 깨닫지 못한 중생의 마음 안에도 진여심이 있는 것입니다. 불성이 그대로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를 전 부 다라고 생각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함한 진여의 세계 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있는 상태 그대로가 일심 으로 회통하는 것입니다.

  시각의 상태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선 깨 닫지 못한 상태인 불각, 깨달음의 세계를 조금 안 것은 상사각이 고 상당히 깊이 깨달음의 세계에 접어든 것은 수분각이고, 구경 각은 깨달음을 완전하게 터득한 상태입니다. 구경각이 100%가 되면 본각이 되고 진여가 됩니다. 대승기신론은 아뢰야식을 바 탕으로 해서 진여의 세계와 불각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각과 시각을 함께 설하다. 본각은 심체(心體)가 망념을 여 읜 것을 말함이니, 망념을 여읜 모양은 허공(虛空)과 같아서 두 루 하지 않는 곳이 없어 법계가 한 모양이다. 이것이 여래의 평

등한 법신이니, 본각(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각(覺)에는 본각과 시각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망념이란 분별되는 허 망한 생각, 말라식에 근거하여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을 가 리킵니다. 우리 중생들은 망념을 여의지 못하고 망념을 따라 생 각을 일으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허공과 같은 상태는 그냥 그대 로 있는 상태 여여(如如)한 상태입니다. 허공과 같아서 이 세상 어디에도 전부 있는 것입니다. 망념을 여의면 허공과 같아서 모 든 곳에 나타납니다. 나타나는 법계 그 모양이 하나의 덩어리입 니다. 분별되어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인 것을 모르니까 다 자기의 분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로 연결된 일 법계가 일심입니다. 우리는 나와 남을 끝없이 분별하니까 나만 잘 되면 되는 줄 압니다. 깨치면 나와 남의 분별이 없어지기 때 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잘되게 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는 마 음과 같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잘되게 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 나이기 때문에 높고 낮은 분별, 차별 없이 평등합니다. 그래서 평등한 하나의 법신입니다. 진정한 평등은 하나이기 때문에 평 등합니다. 본각은 철저하게 사무쳐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 를 하다보면 가끔씩 깨우친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굉장히 좋기 도 하며 깨달음의 상태를 드문드문 느낍니다. 그것은 본각의 상 태로 가고 있는 시각의 상태입니다. 

  본각에 대해서 원효 소에서는 “본각의 체를 밝히자면 ‘심체( 心體)가 망념을 여읜’이란 것은 불각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 허공과 같아서’는 어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혜의 광명이 법계 에 두루 비쳐 평등하고 둘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둠은 무명, 무지를 가리킵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을 원효는 소에 서 이렇게 풀어놓았습니다. 

  본각을 향해 나아가는 상태가 시각입니다. “본각을 상대하여 불각이 일어나는 뜻을 나타내고 불각에 대하여 시각의 뜻을 나 타낸다. 시각이 불각을 기다리고 불각이 본각을 기다리며 본각 이 시각을 기다리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미 서로 기다 리는 것이라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하다보면 깨달음의 상태를 가끔씩 느끼고 더 깊이 공부하면 빠지기도 합 니다. 공부하다보면 끝도 없이 편안하고 집중이 잘 되어 무념의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잠시 앉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갑니다. 공부에 대한 깊은 묘미를 알려면 혼자서도 수행을 해봐야 합니다. 절에 가서 참선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다리가 아 프다가 시간이 지나면 아픈것을 잊어 버립니다. 깨어있지 않으 면 화두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두는 성성적적이란 말과 같이 깨어있는 상태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시각의 상태가 되면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다가 느껴가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진 묵스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 때는 먹을 것이 없어서 스님들이 결재하기 전에 양식을 얻으러 탁발하러 갑니다. 어느 날 진묵스 님의 제자들이 탁발하러 마을에 갑니다. 곁에서 스님을 모시던 시자도 공양을 차려놓고 마을에 갔습니다. 스님은 시자가 나갈 때 문을 열어놓고 문지방에 손을 얹고 있었습니다. 열흘만에 시 자가 탁발을 하고 돌아와 보니 문지방에 얹혀진 스님의 손은 바 람에 의해 열렸다 닫혀진 문에 다쳐 피가 흘러 말라 붙어 있었습니다. 차려진 공양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스님은 시자가 돌아 왔다고 말하자 왜 이리도 빨리 왔느냐고 합니다. 스님은 시자가 나갈 때 삼매에 들어 시자가 돌아와서 문안 인사를 드리자 깨어 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공부해서 시각의 상태가 지속되면 무념, 선정의 상태에 들 수 있습니다.

  ‘본각을 상대하여 불각이 일어나는 뜻을 나타내고 불각에 대 하여 시각의 뜻을 나타내다.’ 본각을 상대한다는 것은 본각에 대치되는 본각이 아닌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시각입니다. 여 기서는 본각이 아닌 상태를 시각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하 게 물든 것은 불각이지만 쥐꼬리만큼이라도 본래 성품을 본 상 태는 시각으로 나아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각이 불 각을 기다리고 불각이 본각을 기다리며 본각이 시각을 기다리 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 말은 시각, 불각, 본각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각의 상태에서 기다리고 공부하면 시각의 상태가 되고, 시각의 상태에서 기다리고 공부하면 본각 의 상태가 됩니다. 본각이 물들면 불각이 됩니다. 결국 불각, 시 각, 본각은 순환되는 바퀴 속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서로 기다리는 것이라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기다리면 같게 된다는 것은 나라고 주장할만한 독립된 성품 자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시각에) 자성이 없다면 각이 있지 않을 것이요, 각이 있지 않는 것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이다. 상대하여서 이루어지면 각 이 없지 않을 것이요, 각이 없지 않기 때문에 각이라 말하는 것 이지 자성이 있어 각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본각이나 시각이나 불각이나 하나 속에 있으면서도 상대되는 관계입니다. 자성 은 내가 본래 갖고 있는 성품이고 법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갖 고 있는 본래 성품입니다. 그래서 자성은 법성에 속해 있습니다. 결국 하나의 뿌리입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은 자성이란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상태(본각)의 법성은 하나인데 어떻게 분리된 자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각, 시각은 본각에 상대되는 말이긴 하지만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진 개념이지 본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본각과 시각을 함께 설하다. 본각의 뜻은 시각(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시각이라는 것은 바로 본각과 같 다.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으며 불각에 의지하는 까닭으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본각 과 시각은 말을 분리했지만 결국은 시각은 본각에 포함된 것으 로 본각과 같은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상태, 깨달음으로 가는 상태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본각에 있습니다. 일심 속에 진여와 생멸이 있듯이 생멸 속에 본각, 시각, 불각이 있습니다. 본각, 시 각, 불각으로 나누어 설명하지만 원래 일심으로 하나입니다. 그 내용에 대한 설명입니다.

  “불각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불각이며, 둘째 는 지말불각이다. 근본불각이란 아뢰야식 내의 근본 무명을 불 각이라 이름하는 것을 말하며, 지말불각은 무명에서 일어난 일 체의 염법(染法)을 모두 불각이라 이름하는 것을 말한다.” 무명 은 무지이며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것입니다. 근본무명을 근본 불각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염법(染法), 경계, 생각은 지말불각입니다. 우리 속에 내재된 무지, 무명인 근 본불각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은 지말불각입니다. 우리가 진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근본무명을 타파해야 합니다. 근본 무명을 타파하면(여의면) 본각의 세계(깨달음의 세계)가 나타나 게 됩니다.

  지금까지 본각, 시각, 불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축에 속 한 같은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중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 속에서 살고 있고 깨달음이 내 속에 내재 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추어보고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 다. 현재 우리는 무명에 물들어 있어 그것을 못 드러낼 뿐입니 다. 드러낼 수 있게 하면 됩니다. 진여의 세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내 삶이 깨달음의 삶이고 진여의 삶입니 다. 내가 자각을 하지 못할 뿐입니다. 알면 부처고 모르면 중생 일 뿐입니다.

  “시각을 사상으로 밝히다. 마음의 근원을 깨달은 까닭으로 구 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한 까닭으로 구 경각이 아니라고 한다.” 이제 시각을 네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 을 합니다. 마음의 근원을 깨치면 구경각이 되고 구경각이 사무 치면 본각이 되고 진여가 됩니다.

  “불각을 밝히다. 무릇 사람은 앞 생각에 악이 일어난 것을 알 기 때문에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치게 하여 그 악의 생각이 일 어나지 않게 한다. 이것을 각(覺)이라고 말은 하지만 곧 불각(不 覺)이 된다.” 불각도 시각의 네 단계 중 하나에 속합니다. 불각 이란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무명에 물들어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생각을 하면 불선을 일으킵니다. 내가 일으 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 그 생각을 그치게 하여 일어나 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일으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불선한 생각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각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순간적으로 일으킬 수 있지만 계속 깨어있으면 각입니 다. 즉 불이 계속 켜져 있으면 되는데 불각, 시각의 상태에서는 이 불이 한번 번개치듯이 잠깐 번뜩했다가 꺼집니다. 우리 중생 들은 잠깐 번뜩일 때는 각이 되지만 금새 불각이 됩니다. 잘못 된 생각인 것을 알지만 생각이 안 멈추고 끊임없이 계속 일어납 니다. 일반 중생들은 이런 상태로 평생 불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상사각을 밝히다. 이승(二乘)의 관지(觀智)와 처음 마음을 낸 보살은 생각[念]의 다른 모양을 일으키는 바탕을 깨달아서 생각 에 다른 모양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은 추분별집착상,  거 칠게 분별하는 집착의 바탕[麤分別執着相]을 버리는 까닭으로 상사각(相似覺)이라 한다.” 불각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상사 각이 됩니다. 공부를 했으면 상사각 정도에는 살아야 합니다. 여 기서 이승(二乘)이 나오는데 이와 관련된 부분을 살펴봅시다. 삼 승(三乘)을 회통하여 일승(一乘)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승 문, 연각, 보살의 단계가 있는데 우리는 궁극적으로 부처를 추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불승(一佛乘) 사상입니다. 우리 의 목표가 부처의 세계에서 살고 부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묘 법연화경의 목적입니다. 이승(二乘)은 무명에서 한 단계 나아간 성문, 연각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원리 정도는 압 니다. 사성제법을 알면 성문입니다. 연각은 연기의 도리를 아는 것입니다. 관지(觀智)는 사리를 관견하는 바른 지혜입니다. 즉 관조해서 생긴 바른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승(二乘)의 관지(觀 智)는 성문, 연각 정도의 앎의 상태입니다. 처음 마음을 낸 보살 은 초지보살이라고 합니다. 초지보살의 상태를 넘어서면 세세 생생 살아가면서 공부의 뜻에서 멀어지지 않고 유지됩니다. 초 지보살은 보살십지에서 초지인 환희지를 터득한 사람을 가리킵 니다. 지금 이 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생에서 내가 어떻게 마 음먹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생이 연결되어 나옵니다. 꼭 부처가 되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뭉쳐 가슴에 맺힌 상태가 지나 면 공부해서 끝없는 환희가 나타납니다. ‘다른 모양을 일으키는 바탕을 깨달아서’ 이 말은 그 뿌리인 아뢰야식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물들어 있기 때문에 물들어 있는 것이 본래의 것인 줄 알고 씁니다. 우리는 지금 제7식 말라식을 본래의 것인 줄 알고 쓰는 것입니다. 이 상사각의 상태에서는 견성의 그림자 를 보는 것입니다. 무엇이 견성인지, 무엇이 본래 성품인지, 진 여가 무엇인지 맛 본 상태입니다. ‘거친 분별’은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인식 하는 것 이외에 미세한 분별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집중하고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끝없이 마음을 가라앉히다 보 면 그 미세한 움직임을 보게 됩니다. 평소의 우리들은 이 미세 한 움직임을 모릅니다. 거친 분별만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친 분별 6추, 미세 분별 3세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우리 마음을 표 현해놓은 것들입니다. 진여, 본질, 자성을 맛보고 나면 지금 일 어나고 있는 생각(거친 분별)이 아닌 뿌리, 바탕을 알게 됩니다. 

제8식을 알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상사각이 됩니다. 불각 은 일반 중생들이지만 상사각부터는 견성을 한 상태입니다. 초 지보살 같은 사람들이 속합니다. 하지만 뿌리깊이 견성을 한 것 이 아니라 잠시 맛보고 조금 아는 것입니다.

  분별한다고 할 때 무엇을 분별하는가? 우리가 일으키는 모 든 분별은 생삼(生三), 주사(住四), 이육(異六), 멸칠(滅七)로 나 눌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알면 우리 마음의 구조와 마음이 일 으키는 내용들을 쉽고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생삼은 업 상, 전상,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고, 주사는 우리에게 머무 는 네 가지 아치, 아집, 아만, 아애를 말합니다. 주사는 바로 말 라식을 말합니다. 이육은 다른 것 여섯 개로 탐, 진, 치, 만, 의 견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는데 방 해하는 것들입니다. 멸칠은 우리가 없애야 할 것들입니다. 몸에 는 살생, 투도, 사음을 없애야 하고 입으로는 망어, 기어, 악구, 양설을 없애야 합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   

  이번에는 우바사 비구와 미묘 비구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 왕사성에 우애가 좋은 형과 아우가 있었습니 다. 형이 약혼을 하고 장사하러 먼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형 은 장사를 하러가는 도중에 바다에서 난파를 당해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도 형은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 습니다. 약혼한 형수는 늙어가지만 약혼을 한지라 다른 곳에 시 집가지 못했고 다른 장사꾼들의 소문으로 형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8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지만 형은 돌 아오지 않았고, 결국 동생은 형과 약혼한 여자와 결혼하게 됩니 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었는데 형이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습니 다. 형은 동생이 자신의 약혼자와 결혼한 사실을 알고 동생을 향 한 원망, 복수의 마음이 생깁니다. 한편 동생은 형이 온 것을 알 고 출가를 해버립니다. 출가한 동생의 법명이 우바사입니다. 우 바사 비구는 형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깊은 산속에서 수 행하고 참회를 합니다. 형은 우바사에 대한 원망을 삭힐 수 없어 결국 죽이겠다는 생각을 품습니다. 사냥꾼을 고용하여 산속에 서 수행하는 우바사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냥꾼의 화살 은 돌에 맞아 튕겨 형이 화살에 맞아 죽게 됩니다. 형은 원망하 는 마음을 품고 죽어서 뱀의 몸을 받습니다. 뱀이 되어서도 우바 사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못버리고 우바사 주위를 맴돕니다. 어 느 날 우바사가 있는 곳에 문이 열려있어 뱀이 우바사를 죽이러 들어갔지만,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문이 닫히는 바람에 문에 끼여 뱀은 죽고 맙니다. 이 뱀은 죽어 독벌레의 몸을 받습니다. 독벌 레의 몸을 받고 다시 동생 주위를 맴돕니다. 결국 선정에 든 우 바사의 정수리를 공격해 죽이고 맙니다. 환생해서 아무 것도 모 르는 상태지만 원망하는 마음은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원망의 마음만큼 지독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로 가까이 있 는 사람을 원망합니다. 평생 원망하다 갑니다. 다음 생에 몸 받 아도 똑같습니다. 자기 주변 사람을 원망하다 한 생 살다 갑니 다. 우리는 공부를 한 이상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줄도 알 아야 합니다.

  다음은 미묘 비구니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신 통 제일은 목건련 존자입니다. 비구니 중에 신통 제일은 미묘 비구니입니다. 미묘 비구니는 상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바라문 의 아내였습니다. 어느 날 미묘 비구니는 둘째 아이를 출산하러 남편과 함께 친정으로 가는 도중 물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됩니 다. 물가에서 묵는 도중 갑자기 아기를 낳게 됩니다. 피 냄새를 맡고 뱀이 몰려오게 되고 남편은 뱀에게 물려 죽습니다. 둘째를 낳은 미묘 비구니는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넙니다. 두 아이를 한꺼번에 데리고 건널 수 없어 갓난 둘째 를 먼저 건너편에 갖다 놓고 첫째에게 손을 흔듭니다. 아이는 자 기더러 오라고 하는 것인 줄 알고 강으로 들어가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맙니다. 겨우 첫째 아이의 시신을 건져 건너편으로 가니까 갓난 아이는 이미 들짐승에게 물려 죽어있었습니다. 온갖 슬픔 을 겪고 겨우 친정에 가보니까 사람들이 집이 불타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가족을 잃고 미쳐버린 미묘 비구니는 마 을을 뛰쳐나와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어떤 남자가 그녀를 데 리고 삽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순장하 는 풍습이 있어 남편이 죽자 같이 묻히고 맙니다. 무덤 속에 생 매장 당해 죽을 판이었는데 마침 도굴꾼들이 묘를 파다가 그녀 를 발견해냅니다. 그렇게 도굴꾼이 그녀를 데려다 삽니다. 하지 만 도굴꾼은 죄가 들통나 감옥에 가게 되고 혼자 남겨진 미묘 비 구니는 다시 미쳐 여기저기를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부처님 을 만나게 됩니다. 부처님을 만난 순간 미쳐있던 정신이 제대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출가를 합니다. 출가하고 수행을 해서 자신의 전생을 보니까 전생의 미묘 비구니는 돈 많은 바라문에게 시 집을 간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 서 남편은 새로운 부인을 들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전생의 미 묘 비구니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둘째 부인이 외출한 사이에 아 이의 정수리에 바늘을 찔러 죽입니다. 둘째 부인이 아이가 죽은 것을 보고 죽일 사람이 첫째 부인 밖에 없다고 남편에게 말합니 다. 남편이 다그치자 전생의 미묘 비구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 만약 내가 아이를 죽였다면 부모는 불타 죽을 것이고 남편은 뱀 에게 물려 죽고 아이는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그것을 이 생에 그대로 다 받은 것입니다. 게다가 전생에 아이를 바늘로 찔러 죽 인 과보로 미묘 비구니는 선정에 들 때마다 발바닥을 바늘로 찌 르는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바사 비구나 미묘 비구니의 이야기처럼 전생의 인과는 이 런 식으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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