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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강설

8강 시각과 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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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1,956회 작성일 21-07-11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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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강


(3-1-1-3-3-3)  시각이 본각과 같음을 설하다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처음 모양을 알 수 있는 것은 없지 만 그러나 처음 모양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무념을 말하는 것 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체 중생을 깨달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본 래부터 생각 생각마다 상속하여 아직까지 망념을 떠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한다. 

무념을 얻은 자는 망념이 없어 심상(心相)의 생하고, 머무르고, 변하고, 멸함[生住異滅]을 알게 되어 무념(無念)과 같아진다. 실제로 시각(始覺)의 차별이 없어지면 사상(四相)이 동시에 있어 서 모두 자립함이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각(覺)인 것이다. 又心起者,無有初相可知,而言知初相者,即謂無念。是故一 切眾生不名為覺,以從本來念念相續未曾離念故,說無始無 明。若得無念者,則知心相生住異滅。以無念等故,而實無有 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皆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 

(3-1-1-3-3-4) 본각을 자세히 설하다

(3-1-1-3-3-41) 수염본각을 밝히다 

또한 본각이 오염된 분별을 따라서 두 가지의 모양을 내지만 본 각과 더불어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 첫째는 지정상이고 둘째는 부사의업상이다. 

復次,本覺隨染,分別生二種相,與彼本覺不相捨離。云何為 二?一者、智淨相,二者、不思議業相。

(3-1-1-3-3-411) 지정상을 밝히다 

지정상이라는 것은 법력의 훈습에 의지하여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는 까닭으로, 화합식의 모양을 깨뜨리고 상속상의 모양을 없애 법신을 나타내어, 지혜가 순정하게 된다. 

이 뜻은 어떠한가? 

일체 심식의 모양은 모두 무명이다. 무명의 모양은 깨달음의 성 품의 모양을 여의지 않으니 무너지는 것도 아니며 무너지지 않 는 것도 아니다.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으로 인하여 파도가 움직여 물의 모양 과 바람의 모양이 서로 버리지 않고 여의지 않지만, 물은 움직이 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만약에 바람이 그치면 움직이는 모양은 바로 없어지지만 습성은 무너지지 않는 까닭이다. 

이와 같아서 중생의 자성청정심이 무명풍으로 인하여 움직이지 만 마음과 무명 모두 형상이 없어서 서로 버리지 않고 여의지 않 지만, 마음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만약 무명이 없어지면 상속함이 없어지지만 지성 은 무너지지 않는다. 

智淨相者,謂依法力熏習,如實修行,滿足方便故,破和合識 相,滅相續心相,顯現法身,智淳淨故。此義云何?以一切心 識之相皆是無明,無明之相不離覺性,非可壞非不可壞。如大 海水因風波動,水相風相不相捨離,而水非動性,若風止滅動相則滅,濕性不壞故。如是眾生自性清淨心,因無明風動, 心與無明俱無形相、不相捨離,而心非動性。若無明滅相續則 滅,智性不壞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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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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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고 있는 불각이 그대로 구경각이고 본각입니다. 깨 달음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매일 느끼는 우 리의 삶 자체가 얼마나 거룩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임하는 자세도 진지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밥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이 거룩한 부처님의 깨침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불각 이 진여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면 내 삶은 의미가 있어질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삶은 뿌듯함으 로 공부를 안 해도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명의 세계에 살지만 부처의 세계와 다르지 않는 것을 느끼면 머지않 아 깨달음의 세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연기 공부할 때 심, 의, 식에 대해 다룹니다. 심은 제8식 아 뢰야식으로 표현되고 의는 제7식 말라식으로 표현됩니다. 식이 바로 제6식 의식입니다. 지난 시간에 6추와 3세를 설명했습니 다. 우리가 일으키는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입니다. 아뢰야식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모두 미세한 생각입니다. 움직임이 너무 적어서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처음 요동하는 움 직임이 너무 적어서 움직임을 모릅니다. 그러나 초전도 현상에 서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바람이 불어도 끓어 넘칩니다. 여기 서 미세한 움직임도 감지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뢰야식의 최초의 움직임은 모릅니다. 그것이 제7 말라식, 제6 의식까지 와야 감지하고 판단하고 분별합니다. 생각을 잘했는 지 못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점 하나 콕 찍은 것과 같은 미세한 생각이 말라식을 거쳐 현재식에 오면 겉으로 나타납니다. 움직 여도 알 수 없는 미세한 움직임이 우리의 삶을 만들어내고 우리 의 생각, 의식을 만들어냅니다. 보이지 않고 감지되지 않는 그 현상, 마음의 첫 움직임을 알아야 무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불각의 삶에서 각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불각과 각은 모두 일심 안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은 거룩하고 위대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시각의 세 가지 단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도랑에 물이 흘러가다가 놔두면 물이 말라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상사각입니다. 도랑보다 조금 크고 물이 비교적 많이 흐르는 것은 수분각입니다. 가물지 않는 한 마르지 않지만 멀리 가보면 물이 말라버립니다. 하지만 바다 나 큰 강은 물이 아무리 말라도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물이 흐릅 니다. 이것은 구경각입니다. 불각이나 본각이나 모두 부처이고 똑같은 세계입니다. 하지만 불각의 세계는 무명에 물들어 깜깜 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점점 밝게 깨우쳐 본각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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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명암으로 나타낸 불각과 시각과 본각의 관계 



  “시각이 본각과 같음을 설하다.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처음 모양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처음 모양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무념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체 중생이 깨달았다 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생각 생각마다 상속하여 아직 까지 망념을 떠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무시무명(無始無 明)이라 한다.” 처음 마음을 일으키는 제8아뢰야식에서 처음 일 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의 모습을 압니까? 모릅니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의 우리 모습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처음 일 어나는 것은 무념이 되면 알게 됩니다. 미세한 움직임은 번뇌망 상이 미세한 움직임보다 움직임이 크기 때문에 못 느낍니다. 우 리가 가만히 있으면 끝없이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일 에 집중할 때는 생각이 일어나는지 잘 모릅니다. 끝없이 일어나 는 온갖 생각을 화두를 통해 계속 하나로 모으다 보면 무념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무념이 되는 방법입니다. 마지막 화두마저 사라진 상태가 무념입니다. 무념이 지속되면 삼매라고 하며, 견 성한 상태입니다. 최소한 이런 상태를 한번이라도 경험해본 것 이 상사각입니다. 한 번이라도 무념 상태를 인식한 상태입니다. 무념의 상태를 한번 본 것은 처음 일어나는 미세한 마음의 움 직임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무념의 상태가 되어야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을 알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견성(내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됩니다. 견성을 하기 위한 관문이 무념입니다. 우리 의 생각을 끝도 없이 가라앉히다 보면 어느 순간 무념이 됩니다. 우리 속에는 끝도 없이 망념이 일어납니다. 유식에 나오는 중류 의 흐름은 끝없이 연결되어 흐르기 때문에 우리는 망념을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무념이 되는 순간 망념을 떠나게 됩니다. 우 리 중생은 이 몸을 받을 때 시작이 없는 그 때부터 무명(無明)의 움직임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삶, 모습들을 만들어 영위해가고 끝없이 중생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무념을 얻은 자는 망념이 없어 심상(心相)의 생하고 머무르 고 변하고 멸함[生住異滅]을 알게 되어 무념(無念)과 같아진다. 실제로 시각(始覺)의 차별이 없어지면 사상(四相)이 동시에 있어서 모두 자립함이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각(覺)인 것이다.” 우리 마음이 일어나고 머무르고 변하고 멸하는 것은 무념일 때 알 수 있습니다. 무념인 사람은 마음의 흐름을 전부 다 압니다. 그러 니 숙명통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번뇌망상 속 에 있기 때문에 집착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자기 밖에 못 봅니다. 이것을 끝도 없이 가라앉혀야 무 념의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본래 의 모습도 알게 되고 그 본래의 모습 속에서 부처님의 6가지 신 통도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각(始覺)은 완벽한 깨달음이 아 니라 조금씩 깨쳐진 상태입니다. 사상(四相)은 상사각, 수분각, 구경각, 불각 네 가지를 말합니다. ‘시각의 차별이 없어진다’는 말은 상사각, 수분각, 구경각, 불각의 차별이 없어져 모두 같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념이 되면 불각과 구경각이 다른 것 이 아니라 공존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각은 본각이 되는 것입니 다. ‘자립함이 없다’는 말은 서로 자기가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 는 것입니다. ‘각(覺)’은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본각을 이 루면 각의 상태로 부처가 됩니다. 무념은 부처로 가는 관문입니 다. 반야심경 처음에 ‘삼매 속에서 살자’라고 합니다. 삼매는 앞 에서도 말했듯이 무념이 지속된 상태로 깨달음 속에서 삶을 살 아가자는 말입니다.


  고봉 원묘(1238~1295)는 선요를 지은 스님입니다. 스님은 여러 번 깨우친 분으로, 깨칠 때 마다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상사각, 수분각으로 깨쳤다가 구경

각으로 깨우친 것입니다. 처음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구경 각을 깨우치면 더 이상 깨우칠 것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재차 깨치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수분각이나 상사각을 깨우쳤을 때는 좀 더 보림을 하면 완벽한 깨우침이 일어납니다. 깨치고 더 깊이 공부를 해야 구경각까지 깨우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 번 깨치면 착각을 해서 다시 물들어 버립니다. 고 봉 원묘 스님은 15세에 출가해서 20세에서 23세까지 장자사에 서 3년 동안 정진을 합니다. 3년 기한을 세워놓고 견성하지 못 하면 죽겠다고 하고 정진을 했습니다. 3년 정도 목숨 걸고 죽어 라고 하면 뭐가 되어도 됩니다. 내가 공부하겠다는 생각이 있으 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아무튼 고봉 원묘 스님은 3 년 수행을 통해 상사각을 깨우치게 됩니다. 스님은 다시 24세에 서 43세까지 깨달음을 얻고 더욱 정진했습니다. 이 때 두 번을 깨치게 됩니다. 먼저 한 번은 수분각이고 마지막은 구경각을 깨 치게 됩니다. 그리고 44세부터 58세까지 사관에 들어가 후학을 제접했습니다. 이것이 고봉 원묘의 일생입니다. 평생을 부처님 공부를 하고 부처님 공부를 가르치다가 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각이 본각이 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고봉 원묘는 1259년(21세)에 단교 묘륜 선사에게 “태어날 때 는 어디에서 와서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를 받습니 다. 이 질문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갖는 의문입니다. 이것의 답 을 모르면 무명입니다. 그리고 설암 조흠 선사에게 ‘무’ 자 화두 를 받았습니다. ‘무’자 화두는 조주 스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생물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 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무(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무’자 화두로 많은 사 람이 깨우쳤다고 합니다. 설암 본인도 ‘무’ 자 화두로 깨달았기 때문에 고봉 원묘에게 ‘무’ 자 화두를 준 것이었습니다. 고봉 본 인은 공부하고 수련하다가 본인만의 화두를 만들어내기도 했습 니다.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다니는가?”입니다. 그 후 23살 때인 1261년 3월 16일 단교 화상에게 받은 화두 “만법귀일 일 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에 몰입하여 일주일 동안 식음, 잠도 잊은 채 화두에 몰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념의 상태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 때 무념이 지속되어 삼매의 상태가 되며 우리 의 본래 성품을 보게 됩니다. 초전도체처럼 모든 것이 0으로 가 라앉는 상태입니다. 어떤 미세한 움직임도 보일만큼 투명하게 맑아지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에 오염이 있으면 무념의 상태에 갈 수 없습니다. 원묘스님이 무념의 상태에 있는데 법당 한 쪽에 오조 법연의 영정이 있었습니다. 그 영정 밑에 글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백 년 3만 6천 일 반복하는 것이 원래 이놈이다!”이었습 니다. 한 평생인 100년 동안 3만 6천 일을 똑같은 일을 반복하 는 그것이 이 놈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본 순간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다니는가?”의 화두를 타파하였습니다. 본인이 원 래 들고 있었던 화두를 깨치게 됩니다. 자신이 들고 있던 화두 로 깨칠 수도 있지만 다른 화두로 깨칠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수 분각이 옵니다. 1274년 36세 때는 견성한 상태에서 계속 공부 를 했습니다. 어느 날 함께 잠자던 도반이 몸부림을 쳐서 목침 이 떨어졌습니다. 그 목침 떨어지는 소리에 고봉 원묘 스님은 크 게 깨닫습니다. 이 때 확철대오하게 됩니다. 공부는 한 살이라도 젊을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묘 스님도 36세에 크게 깨우쳤지 만 부처님께서는 35세 때 견성했습니다. 인간의 감정, 지성, 이 성이 원만하고 완벽한 때가 삼십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봉 원묘는 36세 때 구경각을 깨치게 됩니다. 깨우친 후에 “사주에 서 대성인을 뵌 듯하고 멀리 떠났던 길손이 고향에 돌아온 듯하 며, 원래 옛적 그 사람이고 옛날 살던 곳을 바꾼 바 없다.”고 말 합니다. 사주는 동서남북 온 세계를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은 원 래 내 것이더라는 말입니다. 오염되어 무엇인지 몰랐는데 깨치 고 나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원래 내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견 성은 원래 내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옛적 그 사람이나 옛날 살 던 곳이 원래 내 성품인 것입니다. 1279년 41세 때 사관을 걸어 놓고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래 질문들을 통과해야 고 봉 스님에게 갈 수 있었습니다.


  1. 깨치면 생사를 초월하는데 무엇 때문에 명근을 끊지 못하 는가?

  2. 모든 공안은 하나의 도리인데 무엇 때문에 밝힘(깨침)과 밝 히지 못함(깨치지 못함)이 있는가?

  3. 수행인은 마땅히 부처의 행을 따라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계율(5계)을 지키지 않는가?


  이것은 견성을 해야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공부를 하면 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고봉 원묘 스님의 열반 송을 살펴봅시다.


  와도 사관에 들어오지 않았고(來不入死關)

  가도 사관을 벗어나지 않았다(去不出死關)

  쇠뱀이 바다를 뚫고 들어가(鐵蛇鑽入海)

  수미산을 쳐서 무너뜨리도다(撞倒須彌山)


  모든 번뇌망상을 다 쳐서 무너뜨리고 본래 성품 자리를 본 것 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봉 원묘의 인생은 상사각, 수분각, 구경각을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됩니다.

  

  경허 선사도 다른 화두로 깨우친 예가 있습니다. 경허 선사는 수없이 많은 경전을 보았고 동학사에서 10년 동안 경전을 가르 치는 일을 합니다. 경허 선사는 오랫동안 스승을 뵙지 못해 어느 여름에 서울 청계산을 찾아갑니다. 가는 도중 천안 즈음에 갑자 기 소나기가 쏟아져 어느 마을로 피했습니다. 그 마을에 전염병 콜레라가 돌아 들어가면 죽어서 나왔습니다. 경허 스님은 집집 마다 내놓은 시체들을 본 순간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동안 자신만만하게 부처님 경전을 잘 안 다고 가르쳐왔던 것이 말 뿐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부 처님 공부는 죽음이 내게 닥치더라도 당당하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 서 가던 발길을 돌립니다. 돌아가서 화두집을 찾아 그 가운데 영 원 선사의 화두였던 “나귀의 일이 아직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찾아온다.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에 딱 걸립니

大乘起信論 講說 _ 161다. 골방에 들어가 그 화두를 듭니다. 졸면 송곳에 찔리게 해놓 고 수행을 했습니다. 사미승이 하루는 마을에 갔습니다. 마을에 는 경허 스님의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선비어른 이 사미승에게  “코뚜레 뚫은 자국이 없는 소를 아느냐?”하고 묻 습니다. 사미승은 그 뜻을 몰라서 절에 돌아가자마자 다른 스님 들에게 물었는데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미승은 이것을 노래 가사로 삼아 노래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코뚜레 뚫은 흔 적이 없는 소”라고 노래부르며 다닙니다. 어느 날 사미승이 경 허 스님께서 수행하시던 곳을 지나갔는데 경허 스님이 그 노래 를 듣자마자 견성해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어딘가에 몰두하고 있으면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화두가 타파될 수 있는 것입니다. 


  깨우치고 난 후의 보이지 않는 원래 세계인 ‘본각’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살펴봅시다. 본각은 수염본각과 성정본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염본각은 물든 것을 따른 본각으로, 상과 용에 해당되고 지정상(상)과 부사의업상(용)으로 이루어져 있습 니다. 성정본각은 체에 해당하며 여실공경, 인훈습경, 법출리 경, 연훈습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본각의 본체는 성정본각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질이 있고 본 질의 모양이 있고 본질의 작용이 있습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부사의업상은 이 세상 어떠한 작용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모 든 작용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지정상은 맑고 깨끗하고 투 명해서 어떤 모양이라도 이룰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수염 본각이고 수염본각의 뿌리가 성정본각입니다.

  진리는 본체와 모양과 작용이 있습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 불이 체에 해당하고 원만보신 노사나불이 모양(상)에 해당하고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 작용(용)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우주 법계의 체제, 진리의 체제를 나타냅니다. 본체는 원래 물들지 않 은 청정한 모든 것의 모양이고 본체가 나타내는 모습은 어떠한 모양이든지 나타내고 만들 수 있는 원만한 모양입니다. 본체의 작용, 용도는 이 세상 어디에도 두루 미치고 화현해서 중생을 제 도하는 천백억화신입니다. 

  “수염본각을 밝히다. 본각이 오염된 분별을 따라서 두 가지의 모양을 내지만 본각과 더불어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 첫 째는 지정상이고 둘째는 부사의업상이다.” 대승기신론에서 중 요한 것은 모두 일심(一心)으로 회통해있다는 것입니다. 불각이 나 시각이나 본각이나 모두가 그렇습니다. 

  “지정상을 밝히다. 지정상은 법력의 훈습에 의지하여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는 까닭으로, 화합식의 모양을 깨뜨리 고 상속상의 모양을 없애 법신을 나타내어 지혜가 순정하게 된 다.” 법력의 훈습에 의지한다는 말은 법이 물들었다는 것입니 다. 묘법연화경과 같이 이 세상에 모양을 나타내는 것은 전부 방편입니다. 그 방편의 모양에 따라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화 합식의 모양을 깨뜨린다는 것은 진여의 모양을 깨뜨린다는 것 입니다. 상속상의 모양을 없앤다는 것은 물들어있는 모양을 없 앤다는 것입니다. 지정상이 이 세상의 모양을 나타내지만 상속 상의 모양(중류)을 없애 법신(원만보신 노사나불)의 모양을 그 대로 나타나게 합니다.

  “이 뜻은 어떠한가? 일체 심식의 모양은 모두 무명이다. 무 명의 모양은 깨달음의 성품의 모양을 여의지 않으니 무너지는 것도 아니며 무너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으로 인하여 파도가 움직여 물의 모양과 바람의 모양이 서 로 버리지 않고 여의지 않지만,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 것 이다.” 이것이 지정상을 나타내는 내용입니다. 바닷물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됩니다. 물은 본체이자 자성청정심이고 파도는 지 성, 바람은 무명을 의미합니다. 지성은 지정상을 말하는데, 무 명의 바람에 의하여 모양을 나타내지만 무명이 사라져도 모양 은 그대로 있습니다. 물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는데, 바 람이 없어져도 물은 그대로 있습니다. 물과 파도가 같은 것이 됩 니다. 물과 파도는 원래 같은 것입니다. 본체와 지성은 원래 같 은 것입니다. 본체가 무명에 의해서 각자의 모양을 이루고 있는 데 이것이 원만 보신임을 알면 바로 시각이 되는 것입니다. 우 리가 깨달음(진리, 진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하나의 모습임 을 인식하게 됩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 


  이번 이야기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신통 제일 목련 존 자의 이야기입니다. 백중의 유래와 목련의 전생과 관련된 이야 기입니다. 목련 존자는 이교도의 돌에 맞아 죽습니다. 원래 목 련 존자는 마가다 국 수도 왕사성 근처 코올리타 마을의 부유한 바라문의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홀어 머니와 살게 되었는데 1년 동안 여행을 떠납니다. 목련의 어머니는 아들 몰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목련이 여행에서 돌아온 얼마 후에 죽습니다. 그리고 목련은 산자야 밑으로 출가합니다. 목련은 사리불과 함께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부처님께 귀의합니 다. 인도에서는 승려들이 우기 때 3개월 안거를 합니다. 불교에 포살과 자자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포살이란 1달에 한 번 보름 때 행해지는데 자신의 잘못된 생각, 행동을 고백하고 의논하는 것입니다. 자자란 3개월 안거 중 마지막 날에 하는데 이것도 자 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검증받는 행사입니다. 목련은 자자를 하 던 어느 날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선정 에 들게 됩니다. 어머니가 아비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 있 었습니다. 목련이 보다 못해 부처님을 찾아가서 어머니를 지옥 에서 구할 방법을 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날을 잡아 천도재를 행하자고 합니다. 수행자들이 수행을 마무리하는 회향날은 아 주 맑고 좋은 기운이 흐르는 날입니다. 그래서 그 날 목련 존자 의 어머니의 천도재를 지내기로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목련 존자는 걸식을 하여 얻어온 음식들을 모든 수행자에게 나 누어 줍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 문을 하십니다. 지옥에 있던 목련의 어머니를 천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백중의 유래입니다.

  목련 존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목련 존자 사후의 이야기입니다. 목련 존자는 이교도의 돌에 맞아 죽 습니다. 목련 같이 훌륭한 사람이 비참한 죽음을 맞자 제자들이 부처님께 목련 존자의 전생을 묻습니다. 전생의 목련 존자는 어 여쁜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부인에게 빠져 어머니를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원통하여 힘센 장사가 아들을 쳐 죽 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아들만 바라보 고 키웠는데 여우같은 며느리가 온 후로 아들이 어머니를 거들 떠보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악에 받혔으면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바로 목련이 전생에 어머니에게 잘못 한 인과에 의해 어머니와의 관계가 나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삶에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고부 문제를 잘 푼 사람은 인생의 반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풀면 매일 천당이고 못 풀면 매일 지옥입니다. 부 모 자식 가운데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맺는 인연 가운데 가장 지중한 인연입니다. 그 지중한 인연에 돌 이 굴러들어오니까 서로 원망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목 련을 통해 우리는 가족 문제를 되짚어볼 수 있고 업보, 인과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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