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강 용훈습, 체용훈습을 합하여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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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강
(3-1-1-3-5-432) 용훈습을 밝히다
[진제50] 용훈습(用熏習)은 중생의 외연(外緣)의 힘으로 한량없 는 뜻이 있으나 대략 말하자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차별연(差 別緣)이고, 둘째는 평등연(平等緣)이다.
用熏習者,即是眾生外緣之力。如是外緣有無量義,略說二 種。云何為二?一者、差別緣,二者、平等緣。 (3-1-1-3-5-4321) 차별연을 밝히다
차별연이란 어떤 사람이 부처와 보살에 의지하여 처음 발심하여 도를 구하는 때이다. 부처를 증득하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 에서 부처를 보기도 하고 혹은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권속(眷屬)과 부모와 여러 친척이 되기도 하며, 어 떤 경우는 일을 도와주는 급사(給使)가 되며, 어떤 경우는 벗이 되며, 어떤 경우는 원수가 되며, 어떤 경우는 사섭(四攝)을 일으 키며, 이것은 일체의 작용의 한량없는 행위의 연(緣)에 이르기까 지 대비(大悲)심으로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서 능히 중생의 선근 을 증장시켜 보거나 혹은 들어서 이익을 얻게 한다.
이 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까운 인연(近緣)이니 빨리 제 도를 얻는 까닭이며 둘째는 먼 인연(遠緣)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 야 제도를 얻는 까닭이다.
이 근원(近遠)과 원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증장행연(增長行緣)으로 수행을 증장시키는 연이고, 둘째는 수도연(受道緣)으로 도를 수지하는 연이다.
差別緣者,此人依於諸佛菩薩等,從初發意始求道時乃至得 佛,於中若見若念,或為眷屬父母諸親,或為給使,或為知 友,或為怨家,或起四攝,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以起大悲 熏習之力,能令眾生增長善根,若見若聞得利益故。此緣有二 種。云何為二?一者、近緣,速得度故。二者、遠緣,久遠得 度故。是近遠二緣,分別復有二種。云何為二?一者、增長行 緣,二者、受道緣。
(3-1-1-3-5-4322) 평등연을 밝히다
평등연(平等緣)이란 일체의 모든 부처와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 기를 원하여 자연히 이들을 훈습하여 항상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동체의 지혜력[同體智力]으로써 중생의 보고 들음(見聞)에 따라 응하여 업을 짓고 나타내는 것이다. 중생은 삼매에 의하여 평등을 얻어야 모든 부처를 볼 수 있게 된다.
平等緣者,一切諸佛菩薩,皆願度脫一切眾生,自然熏習恒常 不捨。以同體智力故,隨應見聞而現作業。所謂眾生依於三 昧,乃得平等見諸佛故。
(3-1-1-3-5-433) 체용훈습을 합하여 밝히다
[진제51] 이 자체와 작용[體用]의 훈습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 가 있다.
此體用熏習,分別復有二種。云何為二?
(3-1-1-3-5-4331) 미상응을 밝히다
첫째 미상응(未相應)은 아직 상응하지 못한 것이니, 범부와 이승과 초발심보살 등이 의(意)와 의식(意識)의 훈습으로 믿는 힘(信 力)에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은 하지만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 으로 자체와 함께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자재한 업(自 在業)의 수행이 작용(用)과 더불어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一者、未相應,謂凡夫、二乘、初發意菩薩等,以意.意識熏 習,依信力故而能修行;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故,未得自在 業修行與用相應故。
(3-1-1-3-5-4332) 기상응을 밝히다
둘째 기상응(已相應)은 이미 상응한 것이니, 법신보살이 무분별 심을 얻어 모든 부처의 지혜와 작용(智用)에 상응하여 오직 법력 에 의지하여 저절로 수행하게 되며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멸 하는 까닭이다.
二者、已相應,謂法身菩薩得無分別心,與諸佛智用相應,唯 依法力自然修行,熏習真如,滅無明故。
(3-1-1-3-5-4) 염훈의 단절과 정훈의 상속을 설하다
[진제52] 또한 염법(染法)은 무시이래로 훈습하여 끊어지지 않 다가 부처가 된 후에는 곧 끊어지며, 청정한 법의 훈습(淨法熏 習)은 곧 끊어짐이 없어서 미래까지 다하는 것이니, 이 뜻이 무 엇인가?
진여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곧 멸하고 법신이 밝게 나타나 용(用)의 훈습을 일으키므로 끊어짐이 없다.
復次,染法從無始已來熏習不斷,乃至得佛後則有斷。淨法熏 習則無有斷,盡於未來。此義云何?以真如法常熏習故,妄心 則滅、法身顯現,起用熏習,故無有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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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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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 바로 훈습의 연속입니다. 공부를 계속 훈습하면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고, 번뇌망상을 훈습하면 무명으로 나아 가는 것입니다. 자각을 하면 진여의 세계로 훈습해가는 것이고 자각을 못하면 무명의 세계로 훈습해가는 것입니다. 오늘 공부 의 시작은 진여훈습 가운데 용훈습으로 할 것입니다. 용은 체상 용의 용으로 우리 삶의 작용입니다. 견성을 한 뒤에 하는 훈습은 정훈습이 됩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모두 용의 작용 들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선승들이 살다 갔습니다. 근래의 선 승들 가운데 진여의 용훈습을 하며 살았던 선사가 보문입니다.
보문 선사는 정말 신화처럼 사라진 선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보문 스님은 한암 스님 밑에서 한 철만에 견성을 하고 평생 견성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암 스님은 “내 상좌 가운데 선에 대 한 지견이 투철한 이는 보문뿐이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은 무 소유의 삶을 사셨습니다. 보문 스님은 탁발을 해서 거처할 수 행처를 직접 일구고, 필요한 물품을 살 돈 이외에는 모두 거리 의 거지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탁발도 시장터와 길거리에서 만 했는데, 보문 스님이 반야심경을 외우며 발우를 들고 시장통 을 걸어가면 시장터의 모든 사람이 보시를 하고 길가에 엎드렸 다고 합니다. 발우에 담긴 지폐들이 바람에 날려 떨어져도 절대 줍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거지들이 스님의 주위를 따라다니며 떨어진 지폐를 주워갔다고 합니다. 본인 공양할 양만 받거 나 먹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렇 듯 보문 스님은 철저하게 수행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수행에 관 한 일화도 있는데 서암 스님께서 하루는 작은 토굴에 어떤 수좌 가 정진을 잘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근처를 지나가다 들렸습 니다. 가보니 보문 스님이 꼼짝 않고 정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 다. 그래서 옆에 앉아서 같이 정진을 하며 보니 몇 시간이 지나 도 그대로고 저녁에도 그대로고 그 다음 날 새벽에도 같은 모습 이었습니다. 이틀을 같이 있어보니 내내 선정에 든 그 모습이었 습니다. 이런 보문 스님의 수행은 그의 정신력에서도 나타났습 니다. 스님께서 보현사에 계실 때 갈빗대 수술을 했습니다. 스 님은 마취도 하지 않고 갈빗대 부위를 자르는 수술을 했습니다. 그것은 강한 정신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용훈습(用熏習)을 밝히다. 용훈습은 중생의 외연(外緣)의 힘 으로 한량없는 뜻이 있으나 대략 말하자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는 차별연(差別緣)이고 둘째는 평등연(平等緣)이다.” 각자의 모 습을 보면 전부 다릅니다. 누구는 잘 생겼고 누구는 못생겼고 누 구는 머리가 좋고 누구는 머리가 나쁩니다. 이러한 것들이 차별 연입니다. 갖고 있는 것이 모두 다른 이것이 차별연입니다. 이렇 게 다 모양은 다르지만 실제 본래 성품은 다 같습니다. 다 같은 본래 성품을 자신의 업으로 물들였기 때문에 모양이 다 다른 것 입니다. 물들기 전의 본래 성품은 다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평등연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업의 껍질을 벗겨내면 다 같아집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섞으면 하나입니다. 물에 아무 리 물을 부어넣어도 물입니다. 본질로 가면 하나, 일심입니다. 내 것 다르고 남 것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차별연, 평 등연 둘 다 있습니다.
“차별연을 밝히다. 차별연이란 어떤 사람이 부처와 보살에 의 지하여 처음 발심하여 도를 구하는 때이다. 부처를 증득하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에서 부처를 보기도 하고 혹은 생각하기 도 한다. 어떤 경우는 권속(眷屬)과 부모와 여러 친척이 되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일을 도와주는 동료[給使]가 되며, 어떤 경우 는 벗이 되며, 어떤 경우는 원수가 되며, 어떤 경우는 사섭(四攝) 을 일으킨다.” 평등연은 나름 경지에 들어간 것이라면 차별연은 일반 중생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물들지 않는 깨끗한 본 성, 진리의 세상을 부처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물든 것에서 벗어나서 물들기 전의 것을 보는 것 입니다. ‘익은 것을 설게하고 설은 것을 익게하라.’는 화두가 있 습니다. 우리는 현재 오염된 것에 익어 있습니다. 이것이 차별연 에 물든 우리의 삶입니다. 오염된 것을 없애는 것이 설게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설은 것은 물들기 전의 진리, 진여입니다. 이 것들은 우리 안에 덜 익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부하고 수행 을 하여 진리 쪽으로 나아가면 익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향한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부모, 친 척, 동료, 벗 심지어 원수도 깨달음을 주는 도반이 되지만 그렇 지 않으면 모두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사섭이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입니다. 보시는 베푸는 것입니다. 항상 베풀 수 있는 자세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누구는 100만원 을 벌지만 누구는 천만원, 1억을 법니다. 이것은 전생에 베푼 것 이 돌아온 것일 뿐입니다. 전생에 베풀지 않았다면 이 생에 절 대로 오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베풀어 지지 않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진심으로 베풀 수 있습니 다. 억지로 베푸는 것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애어는 좋은 말 로 법(法)입니다.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행은 타인을 이롭게 하는 행동입니다.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도 같이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동사는 어떤 일이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삶은 일심으로 통합니다. 일심에서 일어 나는 주파수는 세상 어디에든 다 전해집니다. 그래서 선정에 들 어 한마음 고요하게 모으면 나만 맑고 깨끗한 것이 아니라 그 주 파수가 세상 어디든 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차별연에서 평등연으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일체의 작용의 한량없는 행위의 연(緣)에 이르기까지 대비(大悲)심으로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서 능히 중생의 선근을 증장시켜 보거나 혹은 들어서 이익을 얻게 한다. 이 연은 두 가 지로 첫째는 가까운 인연[近緣]이니 빨리 제도를 얻는 까닭이며, 둘째는 먼 인연[遠緣]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야 제도를 얻는 까닭 이다.” 어떤 공부든 바탕은 대자대비입니다. 마음에서 대자대비 의 마음을 낼 수 있어야 진정한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 행은 열심히 했는데 괴팍하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수행자가 아닌 것입니다. 마음속에 대비의 마음을 가득 채워 넣으면 대비심 이 증가합니다. 바탕이 대비심이라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위 하려는 마음이 앞섭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이 마음에 가득 하기 때문에 화가 나고 짜증이 납니다. 아만, 아집을 그대로 갖 고 있는 상태에서 다리 틀고 아무리 앉아 있어 봤자 변화가 없 습니다. 공부하면서 자신의 이기만 더 커진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닙니다. 제대로 된 종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집단 이기만 키울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공부를 하든 대자대비심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가까운 인연은 바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고 먼 인연은 결과 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로 부처가 되는 것과 다음 생, 다다음 생에 부처가 되는 차이입니다.
“이 근연(近緣)과 원연(遠緣)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 니, 첫째는 증장행연(增長行緣)으로 수행을 증장시키는 연이고, 둘째는 수도연(受道緣)으로 도를 수지하는 연이다.” 여기서 공 부를 얕게 하면 증장행연을 만나고 공부를 깊게 하면 수도연을 만나게 됩니다. 이왕이면 원연보다 근연이 낫습니다.
진리와 인연을 맺게 되면 생각하고 체득해갈 수 있습니다. 이 것은 세 가지 지혜와 연결됩니다. 세 가지 지혜는 문혜(聞慧), 사 혜(思慧), 수혜(修慧)입니다. 근연과 원연을 익힐 수 있는 지혜입 니다. 문혜는 스승의 교훈을 듣고 그대로 닦아가는 지혜이고 사 혜는 듣고 배운 바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서 옳다고 믿게 되는 지혜이고 수혜는 얻어진 지혜를 실천을 통해 체득해가는 지혜입니다. 문혜는 듣고 아는 것입니다. 사혜는 내 속에서 맞구나라고 생각되는 무언가가 서게되는 것입니다. 수혜는 실천 을 통해 체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전을 보고 수업을 듣 습니다. 하지만 그것에서 끝나면 문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한 것을 토대로 ‘이렇게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 각한다면 이것은 사혜에 이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실천을 한 다면 수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공부할 인연을 지어놓는다면 다음에 또 공부할 인연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믿음이 가게 해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는 것까지 가지 못합 니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색수상행식 가운데 수까지만 받습 니다. 그래서 감정만 툭 튀어나와서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수는 내 속에 누적된 나의 업입니다. 업을 일으켜다 쓰는 것 입니다. 여기서 좀 더 나아지려면 ‘사(思)’ 생각을 해야합니다. 생각을 하면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믿음이 생기는데 그곳에서 실천을 통해 체득을 합니다. 그래서 공부는 공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문사수 이 세 가지 지혜가 우 리의 삶을 부처로 이끌게 합니다.
“평등연(平等緣)을 밝히다. 평등연이란 일체의 모든 부처와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를 원하여 자연히 이들을 훈습하여 항 상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동체의 지혜력[同體智力]으로써 중 생의 보고 들음[見聞]에 따라 응하여 업을 짓고 나타내는 것이 다. 중생은 삼매에 의하여 평등을 얻어야 모든 부처를 볼 수 있 게 된다.” 차별연은 진리를 만나고 불법을 만나서 점점 진리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끝까지 나아가면 견성하게 됩니다. 견성을 한 사람이 존재들에 대한 차별이 없음을 아는 것이 평등연입니 다. 이것은 일심입니다. 차별이 없기 때문에 나와 남이 동체(同 體)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평등연에서는 모두 나와 너의 본질을 보니까 겉으로는 다 분별되어 있는데 바닥을 보니 모두 똑같은 바닥에 서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인 것입니다. 진리를 알 면 모두가 하나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의식적으로 남을 도와줘야 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보다 더 강하 고 순수한 자비심이 마음에 가득차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방향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평등연 에서는 자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도 가득 차 있습니다. 모 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자비가 베풀어집니다. 하지만 이것도 중생의 보고 들음에 따라 응하게 됩니다. 거지와 국왕에 게 대하는 대응이 다른 것이 그런 예입니다. 부처와 같은 수행 자가 국왕을 만나면 정치를 잘하고 백성들에게 베풀어라고 말 할 것이고 거지에게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자립하라 고 말할 것입니다. 똑같은 평등연이라도 방편은 다릅니다. 상황 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선정삼매에 들지 않고는 평등한 마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은 삼매에 의해 평등을 얻어야 모든 부처를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반야심경 첫 구절은 바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입니다. 반야의 지혜를 터득해서 선정 삼매에 든 마음으로 살자 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목적입니다. 부딪히는 모두에 게 평등연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선정삼매가 되 어야 합니다. 선정삼매에 든 사람은 무엇을 하건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승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부처와 중생이 다 있습니다. 내 속에 진여 부처의 마 음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부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자라고 잡다한 생각도 부처의 세계로 통섭되는 것입니다. 바 른 것만 부처라고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부처일 뿐입니 다. 진여를 보면 우리의 세상은 법열(法悅)의 향연입니다. 부처 님 제자 가운데 누군가 법열에 겨워 거리에서 정신없이 춤을 춥 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처님께 미친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 러자 부처님은 “그대로 두거라. 저것은 미친 것이 아니라 법열 이 넘쳐 이 세상 온통 즐거운 것 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표 현하지 않고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법열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부처 속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끝없는 시시비비 속 에 있습니다. 내가 맞고 네가 틀리고 내 것은 이 정도고 네 것 은 저 정도라고 분별합니다. 이것이 무너지려면 선정삼매에 들 어야 합니다. 선정삼매에 들면 자비와 베품 속에서 살아갑니다.
“체용훈습을 합하여 밝히다. 자체와 작용[體用]의 훈습을 분 별하면 두 가지가 있다. 미상응과 기상응이다.” 체상용 가운데 자체가 체상에 해당하고 작용이 용에 해당합니다. 미상응은 상 응하지 못하는 것이고 기상응은 이미 상응한 것입니다. 미상응 은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하여 일으키는 마음이고 기상응은 부처 가 된 뒤에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미상응(未相應)을 밝히다. 미상응은 아직 상응하지 못한 것이니, 범부와 이승과 초발심 보살 등이 의(意)와 의식(意識)의 훈 습으로 믿는 힘[信力]에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은 하지만 아직 무 분별심(無分別心)으로 자체와 함께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자재한 업[自在業]의 수행이 작용[用]과 더불어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 중생은 이 미상응에 해당합니다. 그런 데 여기에 초발심 보살도 속하는데 보살이 되었다고 잘난 체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공부해야 합니다. 이승은 성문, 연각입니다. 의는 제7식이고 의식은 제6식입니다. 믿기는 믿지만 진리와 상 응하지(개합하지) 못한 상태가 바로 미상응입니다. 떨어져 노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진여의 모습이 내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 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과 나타나는 것이 별개 로 노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는 힘은 있지만 아직 익지 않은 상 태입니다. 중생들이 일으키는 모든 마음은 미상응입니다. 진지 하게 수행하여 기상응이 되게 해야합니다.
“기상응(已相應)을 밝히다. 기상응은 이미 상응한 것이니, 법 신보살이 무분별심을 얻어 모든 부처의 지혜와 작용[智用]에 상 응하여 오직 법력에 의지하여 저절로 수행하게 되며 진여를 훈 습하여 무명을 멸하는 까닭이다.” 기상응은 내 속에 있는 진여 를 그대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끝도 없이 일으키는 분별 심은 제6식, 제7식입니다. 이 분별심을 벗어난 것이 무분별심입 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작용이 진여와 개합하여 일으키는 것입 니다. 이미 상응하여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절로 수행하게 되며 진여를 훈습하고 결국 무명을 멸하게 됩니다. 기 상응은 진여와 하나된 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하는 삶이 됩니다. 반면 미상응은 무명을 훈습하는 삶입니다. 그 래서 항상 자각하여 진리 쪽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합니 다. 미상응에서 기상응으로 가야하며 내 속의 진여와 나타나는 삶의 모습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염훈의 단절과 정훈의 상속을 설하다. 염법(染法)은 무시 이 래로 훈습하여 끊어지지 않다가 부처가 된 후에는 끊어지며, 청 정한 법의 훈습[淨法熏習]은 곧 끊어짐이 없어서 미래까지 다하 는 것이니, 이 뜻이 무엇인가? 진여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곧 멸하고 법신이 밝게 나타나 용(用)의 훈습을 일으키므 로 끊어짐이 없다.” 염훈은 오염된 훈습이고 정훈은 맑고 깨끗 한 훈습입니다. 진여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염훈을 단절시키고 정훈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보살, 부처의 삶입 니다. 중생은 이와 반대입니다. 염법은 탐진치, 번뇌망상에 오 염된 것입니다. 제7식에 우리의 행위가 저장되어 있는데 이것 은 모두 오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끊임 없이 오염된 것을 쓰게 됩니다. 이 염법은 내 속에 훈습되어 끊 어지지 않다가 부처가 된 후에야 끊어집니다. 견성을 해서 내 본 래 성품을 봐야 끊어집니다. 무명이 타파되어야 끊어집니다. 중 생은 오염된 제7식 말라식을 평생 씁니다. 선정삼매에 드는 것 은 무명을 타파하고 본래성품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선 정삼매에 들며 끝없이 공부하고 수행하면 본래성품으로의 길이 열립니다. 그렇게 되면 물들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본래 성품을 꺼내 쓸 수 있게 됩니다. 정훈이 상속되는 것입니다. 결국 공부를 해서 그 마음을 쓰자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달해도 모든 것을 이롭게 하는 마음은 오염 되지 않는 깨끗한 마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가 되면 청정한 법의 훈습밖에 없으며 이 청정법이 끊어짐 없이 이어지 게 됩니다. 무명이 타파되어 정훈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원 력으로 몸을 받아도 정훈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시 공부 를 하여 견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목적은 염훈을 단 절하고 정훈을 상속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충족된 진여를 끝없 이 쓰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진여를 터득해서 진여의 마음을 갖고 진여로 살아야 하며, 더 나아가 부처와 같이 세상 을 진여로 물들여야 합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
오늘은 우바리의 전생 이야기를 봅시다. 우바리는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 계율, 지계 제일이라고 일컬어지던 수행자입 니다. 부처님의 집안에서는 64명이 출가를 했습니다. 부처님이 아버지 정반왕을 찾아가 설법을 하자 모두 다 출가합니다. 우바 리는 그 나라의 이발사였는데 왕족들을 따라 같이 출가를 합니 다. 왕자들은 함께 준비하느라 출가가 늦었지만 우바리는 일찍 출가 준비를 마치고 혼자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당시 부처님 교 단에서는 인도의 네 가지 신분제도를 타파하였기 때문에 출가 한 순서에 따라 형님, 동생이 정해졌습니다. 우바리가 사형이 되니까 부처님의 친척들이었던 왕자들이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3개월 후 가섭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제자들을 소집합니다. 이 때 1차 결집이 일어납니다. 당시 집결 장소는 칠엽굴이었는 데 아라한과를 터득한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인 500제자 가운데 499명은 들어갔는데 다문 제일 아난만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그렇게 많이 들었지만 아 난은 듣기만 했지 문사수를 실천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래서 아난은 7일 동안 용맹정진하여 결국 아라한 과를 터득해 칠엽굴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차 결집 때는 책으로 기록을 한 것이 아니라 누가 선창을 하면 따라서 후창을 하는 송의 형 식이었습니다. 그 때 가섭이 의장을 하고 다문 제일, 기억력이 좋았던 아난이 법을 송출하고 지계 제일이었던 우바리가 계율 을 선창합니다. 단체를 가만히 놔두면 혼란스럽게 되기 때문에 계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부처님 제자들은 그 법과 계율들을 기억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바리와 같이 이발 사였으면 전생에도 이발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과는 연 속성과 보복성을 갖습니다. 기존에 행동했던 것을 계속하려고 하는 연속성과 무언가 상대방에게 작용을 했을 때 상대방도 나 에게 작용을 하는 보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는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지 않으면 그것이 돌아오 지 않으니 빈곤하게 됩니다. 내가 행한 만큼, 내가 베푼 만큼 내 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베푼 사람은 큰 돈을 담을 그릇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돈이 모여 큰 돈이 쌓이게 됩니다. 그 렇지 않은 사람은 설령 큰 돈을 벌어도 어느새 다 사라져버리고 자신의 손을 떠납니다. 그래서 선을 베풀고 자비가 가득 찬 사 람은 세상 어디에 가도 살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해꼬지를 당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불안한 것은 전생에 지은 잘못 때 문입니다. 내가 당당하면 어떤 상황에도 불안함이 일어나지 않 습니다.
다시 우바리의 전생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어느 날 누군가 가 부처님께 우바리는 전생에 무엇을 했기에 저렇게 수행을 잘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우바리의 전생 이야 기를 해줍니다. 옛날 바라나 성에 범덕왕이 있었는데 대지가 뜨 겁게 불타고 있는 여름 날 그는 왕궁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한 사나이가 왕궁 근처를 지나가며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 니다.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혼자서 빈둥거리며 음탕한 노 래를 부르고 있으니 풍속을 해칠 것 같아 왕은 신하에게 명하 여 그를 잡아오게 하여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며 어떤 일을 하길래 한낮에 그런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그러 자 사나이가 말했습니다. “저는 우바가라고 하오며 친구에게 빌 려준 금화 한 닢을 받으러 가는 중입니다.” 왕은 저렇게 내버려 두면 사방에 음탕한 노래를 퍼트릴 것 같아 말합니다. “우바가 여 내가 그대에게 금화 두 닢을 줄테니 가지 말고 여기에 있거 라.” “훌륭하십니다. 대왕이시여, 두 닢을 주실 바에 이왕 한 닢 을 더해 세 닢을 주시옵소서. 그럼 저는 마을에 가 빌려준 한 닢 을 받고 금화 네 잎으로 저의 부인과 함께 오욕락을 즐기겠습니 다.” 그러자 범덕왕이 마을에 가지말고 자신과 함께 있으면 금 화 여덟 닢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우바가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착하신 대왕이시여. 크게 기뻐하소서. 저는 다시 한 닢을 더 원하옵니다. 그러면 아홉 닢이 되고 저는 마을에 내려가 한 닢을 받아 열 닢으로 부인과 함께 오욕락을 즐기겠습니다.” 왕 은 우바가란 인물에 대해 흥미가 점점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 런 이야기가 계속되어 금화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범덕 왕은 우바가에게 마을에 가지말고 자신과 함께 있으면 한 고을 을 주겠다고까지 합니다. 그제서야 우바가는 승낙하고 한 고을 을 다스리게 되자 일찍 일어나고 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며 성 심으로 대왕을 섬겼습니다. 대왕은 우바가를 진심으로 믿고 나 라의 반을 다스리게 하였고 왕궁 창고의 반도 우바가에게 주었 습니다. 하루는 범덕왕이 우바가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었는데 우바가가 생각을 합니다. ‘어찌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있 는가? 내가 그를 죽이면 왕위를 취하여 혼자서 이 나라를 다스 릴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칼을 빼려고 하다가 대왕이 지금 까지 베풀어준 은혜를 생각하자 마음을 돌려먹었습니다. 그렇 게 두 번이나 망설이다 우바가는 마침내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대왕이 잠에서 깨어 이유를 물었습니다. 우바가는 자신이 나쁜 마음을 먹고 대왕을 해칠 생각을 하였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 바가는 나쁜 마음을 참회하고 출가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은혜 를 생각 못하고 악한 마음이 일어났다는 것에 견디지 못해 출가 한 우바가는 결국 수행 끝에 벽지불 연각의 단계를 이루게 됩니 다. 그렇게 도를 이루게 되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때 범덕왕의 이발사인 항가바라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성실하여 우바가가 떠난 후 대왕의 관심은 항가바라에게 쏠렸습니다. 대왕은 그를 매우 좋아해 많은 재산을 준다고 하였지만 항가바라는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우바가에게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항가바라가 여러 차례 청한 끝에 결국 범덕왕은 항가바라의 출가를 허락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벗들이여, 잘 들어라. 그 때 우바 가가 지금의 나이며, 범덕왕은 나의 부친이신 정반왕의 전생이 며, 우바가 밑에서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며 수행정진한 항가바 라는 우바리의 전생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우바리는 오백 대신 들과 정반왕의 예배를 받았느니라. 또한 비구들이여, 나의 제자 들 중에서 계율을 갖는데 가장 으뜸인 사람은 우바리 비구임을 알지니라. 그는 혼란과 암흑이 난무하는 시대일 수록 더욱 더 빛날 것이니라. 계율은 인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무적이니 라.” 규칙적이고 질서 있는 매일매일의 삶이 계율입니다. 수행 이란 이 규칙적인 삶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과연 이 생에 서 어떻게 하는 것이 위대한 삶일까요. 독일 철학자 칸트는 평 생 1초의 시간도 어긋남 없이 살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흩어진 생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 계율을 지키는 것 만큼 빠른 길은 없을 것입니다. 계율은 출가 수행자만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도 계율을 지키며 질서있게 산다면 더 좋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흐트러진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는 계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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