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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강 삿된 집착을 대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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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134회 작성일 21-07-1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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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강


(3-1-1-4)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들어가다 

[진제56] 또한 생멸문(生滅門)으로부터 곧 진여문(眞如門)에 들 어가는 것을 나타낸다. 

이른바 오음(五陰)은 물질(色)과 마음(心)이다. 

육진경계(六塵境界)가 결국에는 무념이고 마음에는 형상이 없어 서 시방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미혹하여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지만 방향 자체 는 실제로 바뀌지 않는다.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念)이 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만약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念)이 없는 것을 알면 곧 수순하게 되 어 진여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復次,顯示從生滅門即入真如門。所謂推求五陰色之與心,六 塵境界畢竟無念,以心無形相,十方求之終不可得。如人迷故 謂東為西,方實不轉。眾生亦爾,無明迷故謂心為念,心實不 動。若能觀察知心無念,即得隨順入真如門故。

(3-2) 삿된 집착을 대치하다 

(3-2-1) 대치사집 대의를 총히 표하다 

[진제57] 삿된 집착[邪執]을 대치한다는 것은 일체의 삿된 집착 이 모두 아견(我見)에 의지하는 것이니, 만약 나(我)를 여의면 곧삿된 집착이 없는 것이다. 

對治邪執者,一切邪執皆依我見,若離於我則無邪執。 

(3-2-2) 대치사집을 별도로 해석하다 

[진제58] 아견(我見)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며,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 是我見有二種。云何為二?一者、人我見,二者、法我見。 

(3-2-2-1) 인아견을 대치하다

[진제59] 인아견(人我見)이란 모든 범부에 의하여 말해지는 것으 로 다섯 가지가 있다. 

人我見者,依諸凡夫說有五種。云何為五? 

(3-2-2-1-1) 법신이 허공과 같다함을 대치하다 

첫째는 경(經)에서 '여래 법신이 마침내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 라는 말을 듣고도 이것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허공이 여래의 성품(如來性)이라고 여기는 것이니, 이 를 어떻게 대치하는가? 

허공상(虛空相)은 허망한 법(妄法)이다. 본체가 없어서 여실하지 못하지만, 색을 상대하기 때문에 볼만한 상이 있어서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색법(色法)이 본래 마음이며 실제로 바깥의 색이 없 는 것이니, 바깥의 색이 없다면 허공의 모양도 없는 것이다. 소위 일체의 경계는 오직 마음에서 망령되이 일어나기 때문에 있 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가 멸하고, 오직 하나의 진심(眞心)으로서 두루하지 않은 것 이 없게 된다. 이것은 여래의 광대한 성품의 지혜(性智)의 완전한 뜻을 말한 것으로 허공의 모양과 같지 않는 까닭이다. 

一者、聞修多羅說如來法身畢竟寂寞猶如虛空,以不知為破 著故,即謂虛空是如來性。云何對治?明虛空相是其妄法、體 無不實,以對色故有,是可見相令心生滅。以一切色法本來是 心,實無外色。若無色者,則無虛空之相。所謂一切境界唯心 妄起故有,若心離於妄動則一切境界滅,唯一真心無所不遍。 此謂如來廣大性智究竟之義,非如虛空相故。

(3-2-2-1-2) 세, 출세법이 공하다함을 대치하다

두 번째는 경(脩多羅)에서 '세간의 모든 법이 마침내 자체(體)가 공(空)하며, 열반진여의 법도 공하여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여 일 체의 상(相)을 여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집착을 깨뜨리기 위 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진여열반의 본성이 오직 공하다고 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설명하면 진여법신은 자체가 공하지 아니하여 한량없는 공덕의 성품(性功德)을 구족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二者、聞修多羅說世間諸法畢竟體空,乃至涅槃真如之法亦畢 竟空,從本已來自空離一切相。以不知為破著故,即謂真如、 涅槃之性唯是其空。云何對治?明真如法身自體不空,具足無 量性功德故。

(3-2-2-1-3) 여래장에 염법차별이 있다함을 대치하다

세 번째는 경에서 '여래장은 더하거나 줄어듬이 없어서 체가 일 체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여래장은 색법과 심법의 자상(自相)과 차별이 있다고 여기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직 진여의 뜻에 의지하여 설한 까닭이며 생멸에 오염[生滅染] 되는 뜻에 의하여 나타남에 차별을 설한 까닭이다. 

三者、聞修多羅說如來之藏無有增減,體備一切功德之法。以 不解故,即謂如來之藏有色心法自相差別。云何對治?以唯依 真如義說故,因生滅染義示現說差別故。

(3-2-2-1-4) 여래장에 생사법이 있다함을 대치하다

네 번째는 경에서 '일체 세간의 생사의 염법이 모두 여래장에 의 지하기에 일체의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의 법 이 갖추어져 있다고 여기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본래부터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청정한 공덕(淨功德) 이 있어서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지도 않아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번뇌의 염법이 오직 망령되이 있는 것이 며, 그 자성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니, 무시(無始)로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상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장의 자체(體)에 허망한 법[妄法]이 있다면 증득하여 알아서[證會] 영원히 허망을 없앤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까 닭이다. 

四者、聞修多羅說一切世間生死染法皆依如來藏而有,一切諸 法不離真如。以不解故,謂如來藏自體具有一切世間生死等 法。云何對治?以如來藏從本已來唯有過恒沙等諸淨功德,不 離、不斷、不異真如義故。以過恒沙等煩惱染法,唯是妄有, 性自本無,從無始世來未曾與如來藏相應故。若如來藏體有妄法,而使證會永息妄者,則無是處故。

(3-2-2-1-5) 중생유시, 열반유종이라함을 대치하다

다섯 번째는 경에서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는다'고 하는 말을 이해하 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은 처음이 있다고 하고, 처음을 보기 때문 에 또한 여래가 얻은 열반의 마침이 있어서 다시 중생이 된다고 하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전제(前際: 시초)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모양(相)도 시 작도 없다. 만약 삼계(三界)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 일어남이 있 다고 한다면 이것은 외도경전(外道經)의 설이다.

또 여래장은 후제(後際: 마지막)가 없으니 모든 부처가 얻은 열반 이 그것과 상응하기 때문에 후제가 없다.

五者、聞修多羅說依如來藏故有生死,依如來藏故得涅槃。以 不解故,謂眾生有始。以見始故,復謂如來所得涅槃,有其終 盡,還作眾生。云何對治?以如來藏無前際故,無明之相亦無 有始。若說三界外更有眾生始起者,即是外道經說。又如來藏 無有後際,諸佛所得涅槃與之相應則無後際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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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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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부터 생사문에서 진여문으로 갑니다. “생멸문에서 진여 문으로 들어가다. 이른바 오음(五陰)은 물질[色]과 마음[心]이다. 육진경계(六塵境界)가 결국에는 무념이고 마음에는 형상이 없어 서 시방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미혹하여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지만 방향 자체는 실제로 바뀌 지 않는다.” 오음은 오온으로 물질[色] 다음에 나오는 마음[心]은 수, 상, 행, 식으로 나누어집니다. 색과 심의 네 가지 요소들은 몸과 마음을 이루고 있는 오온입니다. 여기서 육진은 육경입니 다. 육진경계는 존재하는 모든 대상의 경계를 말합니다. 육진경 계는 무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이지만 우리 눈으로 보 면 모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북쪽을 남쪽이라 우겨도 남쪽이 되지 않습니다. 우긴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진리나 존 재의 기본적인 원리는 누가 우겨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권위가 높은 사람이 우겨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무념의 상태에서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없는 것을 있다 고 우기며 집착을 하는데, 진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음, 오온에 대해 자세히 살펴봅시다. 오음, 오온은 물질[ 色]과 마음[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색(色)은 rupa(루파)로 물질입니다. 제8아뢰야식으로 볼 때 아집이 됩니다. 수(受)는 vedana(베다나)로 접촉의 결과로 발생되는 느낌입니다. 희노 애락 등의 감정입니다. 접촉이란 나의 감각기관이 대상과 부딪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느낌이 발생합니다. 상은 samjna( 상즌냐)로 합쳐서 판단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로 판단하는 것 입니다. 느낌을 받으면 형상이 생깁니다. 그 형상을 업 속에 저 장을 합니다. 이 업 속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듭니다. 행은 samskara(상스카라)로 상은 ‘하나로’란 뜻이고 스카라는 ‘만들 다’는 뜻입니다. 행은 구체적으로 행동을 옮기는 것입니다. 하나 로 만들다는 말은 하나의 행위로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내 속의 업과 감각과 접촉한 것이랑 결합해서 분별된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식은 vijnana(뷔즌야나)로 뷔는 ‘다르게’라는 뜻이고 즌야나는 ‘알다’라는 뜻입니다. 식에서 전부 다르게 압 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합니다. 중생들은 갖고 있 는 업과 결부되어 다르게 압니다.

  육진은 대상으로 무엇이 인식되는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눈은 색, 형상을 인식하여 안식이 되고 귀는 성, 소리를 인식하 여 이식이 되고 코는 향, 냄새를 인식하여 비식이 되고 혀는 미, 맛을 인식하여 설식이 되고 몸은 촉, 감촉을 인식하여 신식이 되 고 뜻, 의지는 법, 생각을 인식하여 의식이 됩니다. 여기서 육진 이란 색, 성, 향, 미, 촉, 법입니다. 대상입니다. 형상에 대한 대 상, 소리에 대한 대상, 냄새에 대한 대상, 맛에 대한 대상, 감촉 에 대한 대상, 생각에 대한 대상입니다. 이것이 부딪힘으로써 느 낌을 받고 생각을 하게 되고 분별을 하게 됩니다. 이런 작용에 의해 어떤 법칙이 만들어집니다. 나와 대상과 나와 대상이 부딪 혀 만들어내는 식으로 바로 연기의 법칙이 만들어집니다. 부처 님께서 깨치신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에 따라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염과 무념.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 을 망념[念]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만 약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이 없는 것[無念]을 알면 곧 수순하게 되어 진여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부딪치면 생각이 일어납니다. 중생이 일으키는 생각들은 전부 망념입니다. 이것 은 파도와 같아 파도 밑의 물은 잠잠한데 겉의 파도는 끊임없이 일어나 철썩거립니다. 그래서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파도만 보기 때문에 망념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 뿌리는 열반적정, 진여 속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일으키는 염 (念)에 대해 바른 생각을 일으키는 정념(正念)이란 말이 있습니 다. 사실 정념보다 더 좋은 것이 무념(無念)입니다. 진리에 들어 가면 무념이 됩니다. 진여의 문에 들어가는 문지기는 무념이 되 는 셈입니다. 무념을 통과하면 진여문에서 살게 되고 무념을 통 과하지 못하면 생사문에서 살게 됩니다. 이왕 살 것 무념을 통 과하여 진여문에 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반야심경 첫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 ‘깊은 반야를 행할 때’, ‘무념에서 삶을 살 때’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적인 무 념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이 무념의 예로 1910년에 태어나신 해산 스님은 표충사에서 오래 기거하셨던 스님입니다. 스님은 24세였던 1934년 표충사 뒤의 진불암에서 참선하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수행하다보니 밥을 직접 지어서 먹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밥을 먹고 참선을 했는데 선정에 들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 르겠지만 머리에 물 같은 것이 떨어지자 깼습니다. 보니 눈이 내 려 소복이 쌓여있었습니다. 본인은 눈이 온 것도 모르고 며칠 동 안 선정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 각하며 부엌에 가보니 밥이 상해서 먹지도 못할 상태였습니다.

  마하리쉬도 무념에 빠진 사람입니다. 마하리쉬는 17세였던 1896년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서 가방을 놓고 혼자서 아루나찰 라산으로 갑니다. 그 때 무념의 상태에 들고 평생 그 산을 벗어 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무념에 빠졌던 상황을 자세히 묘사된 부 분 입니다. “그의 참된 성품은 무형의 내재적인 의식이라는 자 각 속으로 몰입해 갔다. 몰입이 너무나 강렬해 그는 자신의 몸뚱 이와 바깥 세상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앉아 있는 두 다리는 곤충 들이 갉아 먹었고 3년이 지나서야 서서히 깨어났다...”

  염관 선사의 제자 휘일 스님도 무념에 빠진 이야기가 있습니 다. 휘일 스님은 염관 선사의 명성을 듣고 출가를 했습니다. 하 지만 수행은 커녕 염관 선사 뒷바라지를 한다고 제대로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앞에 저승사자가 나타났습니 다. 저승사자가 가자고 하자 휘일 스님은 자신은 출가한 뒤로 한 번도 공부를 못했으니 못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휘일 스님 은 말합니다. “내가 스승님께 들으니 7일만 열심히 공부하면 견 성한다고 했으니 7일의 시간을 주시게.” 저승사자가 염라대왕에 게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7일이 연기가 됩니다. 휘일은 그 순 간부터 무념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7일 후 저승사자가 와서 휘일 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승사자는 휘일을 찾지 못해서 못 데려갑니다. 무념상태가 되면 육신이 있어도 안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귀신에게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 눈 에는 무념에 들어도 육신이 있으니 모습이 보이는 것이며, 귀신 은 마음을 보는데 마음이 무념에 들었으니 안보이는 것입니다. 


  “삿된 집착[邪執]을 대치하다. 삿된 집착을 대치한다는 것은 일체의 삿된 집착이 모두 아견(我見)에 의지하는 것이니, 만약 나(我)를 여의면 곧 삿된 집착이 없는 것이다. 아견(我見)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며, 둘째는 법아견(法我 見)이다. 이것은 아집과 법집이다.” 잘못된 집착을 없애라는 말 입니다. 진여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삿된 집착을 여의어야 합니 다. 아견(我見)이란 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중생은 평생 아견 속에서 이기적으로 삽니다. 아견이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모 습입니다. 내 삶이 어떤지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곱씹어 보면 무언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형체가 없어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를 안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 입니다. 인아견의 인은 ‘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법아견의 법은 ‘대상’을 가리킵니다. ‘세상 에 있는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고 생 각하는 것이 아집이고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법집입니 다. 이것이 모두 아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무념으로 가는 돌파구를 찾은 셈입니다.

  아견이란 말라식이고 이것은 아치, 아집, 아만, 아애로 나눌 수 있습니다. 6근 가운데 안이비설신을 전5식이라 하는데 대상을 받아들이는 창구입니다. 의식이 생기는데 이것은 6식, 7식, 8식으로 나누어집니다. 6식은 현재 의식이고 7식은 무의식, 잠 재의식입니다. 말라식은 제7식으로 중생이 평생 쓰는 것입니 다. 이 7식의 근원에는 아치, 아집, 아만, 아애가 있습니다. 생명 은 암수의 교접에 의해 생기는 순간 원래 무아인데 내가 있다고 생각해버립니다. 이것이 아치입니다. 그래서 아집이 생기고 자 기가 잘났다고 생각해서 아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자기 밖에 모 르고 자기만 사랑하는 아애가 생깁니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것을 벗어나는가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 다. 삶 속의 중독이란 전생의 업입니다. 업을 깨끗하게 하는 것 이 삶을 바르게 하는 길입니다.


  “인아견을 대치하다. 법신이 허공과 같다는 말은 허공을 여래 성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공하다는 말 은 열반과 진여의 법도 공하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법신 의 무량한 공덕성을 밝힌다. 여래장에 염법차별이 있다는 말은 색법과 심법의 자상과 차별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생멸염에 의하여 나타냄을 차별이라 한다. 여래장에 생사법이 있다는 말 은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갖추고 있다는 말 이다. 하지만 그 자성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다. 열반유종, 열반 이 있다는 말은 여래가 얻은 열반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 래장은 시작과 마지막이 없다.”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잘못 일 어나는 생각이 이 다섯 가지입니다. 열반이 있다는 생각, 여래 장에는 생사법이 있다는 생각, 여래장에는 염법차별이 있다는 생각,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공하다는 생각, 법신이 허공과 같다 는 생각입니다. 허공을 여래성이라고 여긴다는 것은 허공을 본 래 성품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열반과 진여의 법도 공하다 고 여긴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법신에는 무량한 공덕과 복 덕이 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법신을 공하다고 착각합니다. 그 리고 여래장은 색법과 심법의 자상과 차별이 있다고 착각하는 데 원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문에 있는 모든 것 때 문에 차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래 여래장에는 차별이 없습 니다.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갖추고 있다 고 착각하는데 그 자성은 본래부터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는 나고 죽는 것 등의 일체 세간의 모든 것을 여래장이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것은 생사법에 의해 이런 것들이 생길 뿐입니다. 우리는 여래가 얻은 열반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열반의 시작과 끝도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여래장은 본래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이것들이 아견에서 일으키는 잘못 된 생각들입니다.


  “법신이 허공과 같다함을 대치하다. 경(經)에서 ‘여래 법신이 마침내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라는 말을 듣고도 이것이 집착을 깨트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허공이 여래의 성품[ 如來性]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대치하는가?” 우리 는 있다고 생각하고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집착합니다. 집착 을 깨트리기 위해 허공과 같다고 말한 것이지 진짜 그런 것인 줄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바깥의 색이 없는 것이니. 허공상(虛空相)은 허망한 법[妄法] 이다. 본체가 없어서 여실하지 못하지만, 색을 상대하기 때문에 볼만한 상이 있어서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하는 것이다. 그런 데 모든 색법(色法)이 본래 마음이며 실제로 바깥의 색이 없는 것이니, 바깥의 색이 없다면 허공의 모양도 없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색을 상대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상이 있어, 세상에 존 재하는 모든 것은 생멸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래 바 깥에는 색이 없는데 내 마음에서 색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 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깥의 색이 없다면 허공이라는 모양 자체 도 없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허공도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 다. 색법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일으키는 것으 로 바깥에 있는 모양들과 형상들은 없는 것입니다. 이 없다는 것 은 허공이 아닌 것입니다. 허공은 단지 우리 마음속의 집착을 깨 트리기 위한 말일 뿐입니다. 잘못하면 이 허공에 빠져버립니다.

  “경계는 마음에서 일어난다. 소위 일체의 경계는 오직 마음 에서 망령되이 일어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망령 되이 움직이는 것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가 멸하고, 오직 하나의 진심(眞心)으로서 두루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은 여래의 광대한 성품의 지혜[性智]의 완전한 뜻을 말한 것으로 허공의 모 양과 같지 않는 까닭이다.” 어떤 사물을 보고 생각을 일으킨다 고 할 때 이것도 마음에서 망령되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중생이 일으키는 경계는 업과 결부되어 일어납니다. 이것을 여의지 못 하기 때문에 우리는 중생입니다. 이것을 여의면 부처가 됩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경계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마음의 망령된움직임을 여의면 경계가 멸하고 진여, 일심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여래성(如來性)으로 허공과 다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경전에서 여래법신이 허공이라고 한 것은 형상에 집착하지 않 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허공이라는 형상에 집착하게 됩니다. 여래법신은 허공이 아니 라 일심입니다. 이것을 허공과 구별하여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 다. 일심은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포 섭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고 하는 상태와는 다릅니다.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공하다함을 대치하다. 경(脩多羅)에서 ‘세간의 모든 법이 마침내 자체(體)가 공(空)하며, 열반진여의 법 도 공하여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여 일체의 상(相)을 여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집착을 깨트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진여열반의 본성이 오직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간의 모든 법이란 생멸법을 말합니다. 진여열반의 법도 공하다고 하 는데 이것은 집착을 깨트리기 위해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진여 열반의 본성은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진공에서 끝나는 것 이 아니라 끝없는 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덕의 성품을 구족) 어떻게 대 치하는가? ‘진여법신은 자체가 공하지 아니하며 한량없는 공덕 의 성품[性功德]을 구족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바로 묘유가 진정한 의미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공이다, 허공이다고 하는 것 은 중생의 집착을 깨트리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본질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래장에 염법차별이 있다함을 대치하다. 경에서 ‘여래장은 더하거나 줄어듬이 없어서 체가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여래장은 색법과 심법의 자상(自相)과 차별이 있다고 여긴다. 이를 어떻게 대처 하는가? ‘오직 진여의 뜻에 의지하여 설한 까닭이며 생멸에 오 염[生滅染]되는 뜻에 의하여 나타남에 차별을 설한 까닭이다.’” 우리는 각각 갖고 있는 모양들이 다릅니다. 중생들은 색법의 형 상과 심법의 마음에 차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차별이 있겠는가’하고 묻습니다. 모두 다른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은 생멸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 진여는 차 별이 없습니다. 원래 진여는 일심으로 하나입니다. 우리는 차별 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원래 이것은 생멸에 오염된 모양을 보 기 때문입니다. 원래 본질의 모양은 하나입니다.

“여래장에 생사법이 있다함을 대치하다. 경에서 ‘일체 세간 의 생사의 염법이 모두 여래장에 의지하기에 일체의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 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의 법이 갖추어져 있다고 여긴다.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과 상응한 적이 없다. 여래장은 본래 부터 갠지스 강의 모래보다 많은 청정한 공덕[淨功德]이 있어서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지도 않아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 이며, 갠지스 강의 모래보다 많은 번뇌의 염법이 오직 망령되이 있는 것이며, 그 자성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니, 무시(無始)로부 터 일찍이 여래장과 상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래장에 일 체 세간의 생사법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래장은 오염된 것과 상응하지 않습니다. 번뇌의 염법에 의해 나타나는 수 많은 다른 모습은 자성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염된 모습이 나타 난 것일 뿐 진여가 아닙니다. 오염된 것은 업에 의해 나타난 것 일 뿐이지 여래장, 진여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들어 있는 것은 차별이 있지만 여래장은 이런 것들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오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여 자체가 물드는 것이 아니라 염법 에 의해 오염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여래장에는 허망한 법이 없다. 만약 여래장의 자체[體]에 허 망한 법[妄法]이 있다면 증득하여 알아서[證會] 영원히 허망을 없앤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만약 여래장에 허망 한 법이 있다면 없애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원래 청정한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중생유시, 열반유종이라함을 대치하다. 다섯째는 경에서 '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는다'고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 생은 처음이 있다고 하고, 처음을 보기 때문에 또한 여래가 얻 은 열반의 끝이 있어서 다시 중생이 된다고 하니, 어떻게 대치 하는가? 여래장은 전제(前際: 시초)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모양( 相)도 시작도 없다. 만약 삼계(三界)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 일어 남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외도경전(外道經)의 설이다. 또 여래 장은 후제(後際: 마지막)가 없으니 모든 부처가 얻은 열반이 그 것과 상응하기 때문에 후제가 없다.” 원래 부처는 여여할 뿐입 니다. 나무를 알고 있으면 꽃도 보아도 나무를 보고, 잎을 보아도 나무을 보고, 줄기를 보아도 나무를 보고, 뿌리도 나무를 봅 니다. 나무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꽃과 잎과 줄기와 뿌리는 각각 별개입니다. 부처를 보면 처음도 끝도 알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윈도우 스핑으로 파도를 타면 파고가 아무 리 거세도 파도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일 때는 시작과 끝이 있고 윤회하지만 열반을 증득하면 여여하며, 적정일 뿐입니다. 


  *머리 식히면서 한번 보기


  업의 작용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 당시 코살라 국의 왕이었습니다.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의 후원자 였 습니다. 그는 왕으로서의 권력과 쾌락을 즐겼습니다. 이것은 과 거에 보시와 지계 그리고 다른 공덕을 닦은 결과였습니다. 그는 과거에 지은 공덕으로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후원자가 됩니다. 하지만 지혜를 닦는 통찰명상을 하지 않았으 므로 지혜가 충분하지 않아서 확실하게 법을 볼 수가 없었습니 다. 그래서 그는 도과의 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비록 경전에 는 부처님과 법에 관하여 토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그것 은 단지 개념적 수준에 불과한 피상적인 토론이었을 뿐입니다.

  통찰명상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는 것으로 정 념 정정입니다.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 옆에서 많은 후원을 했음 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도과도 얻지 못 했습니다.

  아자타삿뚜 왕은 예류자[수다원]로 부처님과 승가에 아주 큰 후원자였던 빔비사라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위하여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밤에 부처님을 찾아왔 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과경이라는 위대한 가르침을 설하였 습니다. 왕은 그의 아버지처럼 예류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른 조 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공덕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피 할 수 없는 무거운 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과보로 내생에 지 옥에 태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자타삿뚜 왕 은 도과를 성취할 수 없었고 범부로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사띠 비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띠 비구는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과거에 지은 공덕 덕분에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비구로서 계를 받고 계, 정, 혜 삼학을 닦았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과거 생 에 대하여 비구들에게 설하실 때 사띠 비구는 잘 이해할 수 없 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한 생이 끝나면 다음 생으로 마음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과거의 해롭고 유익한 업 의 과보를 경험한 어떤 마음이 생에서 생으로 이동하는 것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충분하게 닦지 않았기 때문에 법 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현명한 비구들이 자기 주변에 많이 있 고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주신다고 해도 사띠 비구는 12연 기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하다나 영주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도 봅시다. 그는 바라나 시의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주 부유한 집안의 처녀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를 지키지 않고 전 재산을 마시고 치장하고 향수와 노래, 음악과 춤에 탕진하여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는데 그와 그의 부인은 이 미 늙은 몸이었습니다. 그들은 늙은 나이로 이시빠타나 수도원 에 음식을 구걸하러 갔다가 불교를 접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 께서 그들을 보시고 아난 존자에게 만약 그가 젊었을 때 사업을 열심히 했다면 지금은 바라나시의 재정관이 되었을 것이고, 젊 었을 때 수행을 했다면 지금은 아라한 과를 얻었을 것이며 그의 부인은 불환자[아나함]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밀린다왕문경에서도 밀린다 왕이 묻습니다. “당신들 수행자 들이 젊었을 때부터 수행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왜 그런 가?” 그러자 나가세나 비구가 대답합니다. “왕이시여. 전쟁에 서 이기는 비결이 뭡니까?”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군량을 비 축해놓고 성을 쌓아놓고 군대를 미리 훈련시켜 놓는 것이다. 갑 자기 적이 공격해 와도 이길 수 있다.” “수행하는 것도 같은 이 치입니다. 항상 준비가 되어 있으면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당당 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젊어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 기에 있습니다.

철학자 사짜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지은 공덕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서 법에 대하여 토론하고 부처님을 존경하 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혜를 닦음이 불충분하였기 때문에 부처 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에게 귀의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스승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부 처님을 만나 법에 관한 토론을 하는 예가 많습니다. 이들은 부처 님의 가르침이 수승하다고 인정하지만 자기가 갖고 있는 견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심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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