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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강 위빠사나를 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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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6,204회 작성일 21-07-12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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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강


(4-3-5-2-1-32) 마사와 대치를 자세히 밝히다

(4-3-5-2-1-321) 마사가 일어나는 차별을 밝히다

[진제80] 혹은 천상(天像)과 보살상을 나타내거나 여래의 모습을 지어서 상호(相好)가 구족하기도 한다. 

혹은 다라니를 설하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설 하기도 한다. 

혹은 평등하고 공(空)하며 모양이 없으며[無相] 원력도 없고[無 願] 원수도 없고[無怨], 친한 이도 없고[無親] 인과도 없어서[無 因無果] 마침내 공적(空寂)한 것이 참된 열반이라고 설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과거의 일을 알게 하며 또한 미래의 일도 알게 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智)를 얻으며 변재(辯 才)가 걸림이 없어서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의 명예나 이익되는 일에 탐착하게 한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성내고 기뻐하게 하여 성품에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하며, 혹은 많이 자애롭고 잠이 많고 병이 많아서 그 마음을 게으르게 하며, 혹은 갑자기 정진을 하다가 갑자기 그만 두어 믿지 않는 마음을 내어 의심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혹은 본 래의 수승한 행위를 버리고 다시 잡된 업[雜業]을 닦으며 세속의 일에 집착하여 갖가지에 매이고 얽히게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삼매를 얻게 하여 진여삼매에 든 것처럼 비슷하지만, 이는 다 외도가 얻은 것이지 참다운 삼매가 아닌 것이다. 또한 사람들에게 하루, 이틀, 사흘 내지 이레까지 선정[定] 속에 머물게 하여 자연히 향기롭고 맛난[香味] 음식을 얻어서 몸과 마 음이 쾌적하고 기뻐서 배가 고프지도 않고 목이 마르지도 않게 하여 그것에 애착하게 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먹는 양을 조절하지 못하게 하여 많이 먹었다 적게 먹었다 하여 안색이 변하여 달라진다. 

或現天像、菩薩像,亦作如來像相好具足,若說陀羅尼,若 說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或說平等、空、無 相、無願、無怨無親、無因無果、畢竟空寂是真涅槃。或令人 知宿命過去之事,亦知未來之事,得他心智辯才無礙,能令眾 生貪著世間名利之事。又令使人數瞋數喜,性無常准。或多慈 愛多睡多病,其心懈怠。或卒起精進後便休廢,生於不信多疑 多慮。或捨本勝行更修雜業。若著世事種種牽纏,亦能使人得 諸三昧少分相似,皆是外道所得,非真三昧。或復令人若一日 若二日若三日,乃至七日住於定中,得自然香美飲食,身心適 悅不飢不渴,使人愛著。或亦令人食無分齊,乍多乍少顏色變 異。

(4-3-5-2-1-322) 마사를 지혜로 대치하다

이러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사람은 항상 지혜로써 관찰하여 마음 을 삿된 번뇌의 그물(邪網: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부 지런히 바른 생각[正念]을 하여 취착하지 않으면 모든 업장을 멀 리 여읠 것이다. 

以是義故,行者常應智慧觀察,勿令此心墮於邪網。當勤正念不取不著,則能遠離是諸業障。

(4-3-5-2-1-323) 진여삼매와 외도삼매를 구별하다

외도(外道)가 가지는 삼매는 견(見)과 애(愛)와 아만(我慢)심을 여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그들의 삼매는 세간의 명 리와 공경에 탐착하기 때문이다. 

진여삼매(眞如三昧)란 보는 모양[相]에 머물지 않고 얻은 모양[ 相]에도 머물지 않으며  선정[定]에서 깨어나도 게으르고 교만함 이 없어서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된다. 

만약 범부가 이 삼매법을 닦지 않고 여래의 종성(如來種姓)에 들 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간의 선(禪)의 삼매를 닦으면  흔히 거기에 맛들여 아 견(我見)에 의지하여 삼계(三界)에 얽매여 외도와 더불어 함께 하니 만약 선지식의 보호하는 바를 여의면 곧 외도의 견해(見)을 일으키게 된다.

應知外道所有三昧,皆不離見愛我慢之心,貪著世間名利恭敬 故。真如三昧者,不住見相、不住得相,乃至出定亦無懈慢, 所有煩惱漸漸微薄。若諸凡夫不習此三昧法,得入如來種性, 無有是處。以修世間諸禪三昧多起味著,依於我見繫屬三界, 與外道共。若離善知識所護,則起外道見故。

(4-3-5-2-1-4) 사마타 수행으로 얻은 이익을 밝히다 

[진제81] 오로지 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이 삼매를 배우는 사람은 현세에서 마땅히 열 가지 이익을 얻는다. 

첫째 항상 시방의 모든 부처와 보살에게 호념(護念)하는 것이 된 다. 

둘째 모든 마구니와 악귀에 의하여 두려움을 받지 않는다. 셋째 구십오 종의 외도와 귀신에 의하여 혹란(惑亂)되지 않는다. 넷째 깊고 미묘한 불법을 비방함을 떠나 무거운 죄업장이 점점 엷어지게 된다. 

다섯째 일체의 의심과 모든 못된 분별심이 없어진다. 여섯째 여래의 경계에 대한 믿음이 증장된다. 

일곱째 근심과 후회를 여의어 생멸법 가운데 용맹하여 겁내지 않는다.

여덟째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교만함을 버려 다른 사람들 로부터 괴롭힘을 받지 않는다.  

아홉째 비록 선정(定)를 얻지 못하였으나 때와 경계처(境界處)에 대하여 번뇌가 줄어들어 세속적인 일을 즐기지 않는다. 열째 삼매를 얻으면 바깥으로 반연하는[外緣] 모든 소리에 의하 여 놀라지 않게 된다.

復次,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現世當得十種利益。云何為 十?一者、常為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二者、不為諸魔惡鬼 所能恐怖。三者、不為九十五種外道鬼神之所惑亂。四者、遠 離誹謗甚深之法重罪,業障漸漸微薄。五者、滅一切疑諸惡 覺觀。六者、於如來境界信得增長。七者、遠離憂悔,於生死 中勇猛不怯。八者、其心柔和,捨於憍慢,不為他人所惱。九 者、雖未得定,於一切時一切境界處,則能減損煩惱、不樂世 間。十者、若得三昧,不為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 

(4-3-5-2-2) 위빠사나를 닦다

(4-3-5-2-2-1) 위빠사나 닦는 뜻을 밝히다 

[진제82] 어떤 사람이 오직 사마타 지(止)만을 닦으면 곧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선행(善)을 즐기지 않고 대비심을 여의게 되니, 이러한 까닭으로 위빠사나 관(觀)를 닦 는 것이다. 

復次,若人唯修於止,則心沈沒或起懈怠,不樂眾善、遠離大 悲,是故修觀。

(4-3-5-2-2-2) 위빠사나 닦는 방법을 밝히다 

(4-3-5-2-2-21) 법상관을 밝히다

관(觀)를 닦아 익히는 이는 마땅히 세간의 유위(有爲)의 법이 오 래 머무름이 없어 잠깐 동안에 변하여 없어지며[무상관], 마음의 작용이 생각마다 생멸하기 때문에 이것이 고(苦)인 줄 알 아야 하며[고관],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어슴푸레하여 꿈과 같은 줄 알아야 하 며,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개와 같음을 알아야 하며, 미래 에 생각할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아서 갑자기 일어나는 것임 을 알아야 하며[무아관], 

세간의 몸뚱이가 다 깨끗하지 못하고 가지가지로 더러워서 하나 도 좋아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부정관]. 

修習觀者,當觀一切世間有為之法,無得久停須臾變壞,一切 心行念念生滅,以是故苦。應觀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應觀 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於雲忽爾而 起,應觀世間一切有身悉皆不淨,種種穢污無一可樂。
(4-3-5-2-2-22) 대비관을 밝히다

이와 같이 일체의 중생이 무시(無始)로부터 모두 무명의 훈습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을 생멸케 하여 이미 모든 신심(身心)의 큰 고 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통도 한량이 없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렵다. 이것을 알지 못 하니 중생이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如是當念:「一切眾生從無始世來,皆因無明所熏習故令心生 滅,已受一切身心大苦。現在即有無量逼迫,未來所苦亦無分 齊,難捨難離而不覺知。眾生如是,甚為可愍。」 

(4-3-5-2-2-23) 서원관을 밝히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큰 서원[大誓願]을 세워야 한 다. 원컨대 내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여의게 하여 시방에 두루 한 일체의 모든 선한 공덕을 수행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 는 방편으로 일체의 고뇌하는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에게 열반의 제일의의 낙[第一義樂]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作此思惟,即應勇猛立大誓願:「願令我心離分別故,遍於十 方修行一切諸善功德,盡其未來,以無量方便救拔一切苦惱眾 生,令得涅槃第一義樂。」

(4-3-5-2-2-24) 정진관을 밝히다

이러한 원력(願)을 일으키기 때문에 때와 곳에 있는 여러 선행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닦고 배워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다. 以起如是願故,於一切時、一切處,所有眾善,隨已堪能不捨 修學,心無懈怠,

(4-3-5-2-2-3) 위빠사나 닦는 것을 총결하다

오직 좌선할 때 사마타 지(止)에 전념하는 것 외에는 나머지 일 체에서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한다.

唯除坐時專念於止。若餘一切,悉當觀察應作不應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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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강설_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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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와 대치를 자세히 밝히다. 천상(天像)과 보살상을 나타 내거나 여래의 모습을 지어서 상호(相好)가 구족하기도 한다. 혹 은 다라니를 설하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설하 기도 한다. 혹은 평등하고 공(空)하며 모양이 없으며[無相] 원력 도 없고[無願] 원수도 없고[無怨], 친한 이도 없고[無親] 인과도 없어서[無因無果] 마침내 공적(空寂)한 것이 참된 열반이라고 설 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과거의 일을 알게 하며 또한 미래의 일도 알게 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智)를 얻으며 변재 (辯才)가 걸림이 없어서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의 명예나 이익되 는 일에 탐착하게 한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성내고 기뻐하게 하여 성품에 일정 한 기준이 없게 하며, 많이 자애롭고 잠이 많고 병이 많아서 그 마음을 게으르게 하며, 정진을 하다가 갑자기 그만두어 믿지 않 는 마음을 내어 의심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본래의 수승한 행 위를 버리고 잡된 업[雜業]을 닦으며 세속의 일에 집착하여 갖가 지에 매이고 얽히게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삼매를 얻게 하여 진여삼매에 든 것처럼 하지만, 이는 외도가 얻은 것이지 참다운 삼매가 아닌 것이다. 또 한 사람들에게 하루, 이틀, 사흘 내지 이레까지 선정[定] 속에 머 물게 하여 자연히 향기롭고 맛난[香味] 음식을 얻어서 몸과 마음 이 쾌적하고 기뻐서 배가 고프지도 않고 목이 마르지도 않게 하 여 그것에 애착하게 한다.” 화두를 들면서 마음을 집중하고 있 으면 현상의 의식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기도 하며 볼 수 없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산란한 마음이 가라앉으니 천상의 세 계가 나타나기도 하고 불보살님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과가 없다거나 세상의 명리를 추구하거나 변덕을 부리거나 게으르거나 의심이 많고 근심이 많거나 잡된 일에 종사하거나 맛난 음식에 애착하게 하는 마구니나 외도에 끌리는 마음을 일 어나는 순간 바로 알아 바르게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마사를 지혜로 대치하다. 이러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사람은 항상 지혜로써 관찰하여 마음을 삿된 번뇌의 그물(邪網:삿된 그 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부지런히 바른 생각[正念]을 하여 취 착하지 않으면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읠 것이다.” 마구니나 외도 의 생각이 일어났을 때 삿된 번뇌의 그물에 떨어지지 않도록 바 르게 잘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할 때는 지관, 집중 과 관조를 함께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지어갈 때 스승이나 선지식이 필요한 이유가 외도의 선정에 들어 외도의 길로 나아 가고 있는지, 바르게 선정에 들어 부처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지 판단하여 인도해줄 고수가 있어야 부처될 때까지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얻은 이익을 밝히다. 첫째 항상 시방의 모든 부처와 보살에게 호념(護念)하는 것이 된다. 둘째 모든 마구 니와 악귀에 의하여 두려움을 받지 않는다. 셋째 구십오 종의 외 도와 귀신에 의하여 미혹하거나 혼란스럽게[惑亂]되지 않는다. 넷째 깊고 미묘한 불법을 비방함을 떠나 무거운 죄업장이 점점 엷어지게 된다. 다섯째 일체의 의심과 모든 잘못된 분별심이 없 어진다.” 사마타를 열심히 하고 있으면 어떤 마귀든 잡념이든 방해하지 못합니다. 사마타를 잘하고 있으면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만큼 부처와 보살이 호념을 해줍니다. 이 생에서 사마타와 윗빠사나를 잘하면 전생의 과보에 의해 아무리 힘든 삶을 살더 라도 그것을 비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공포심은 전생부터 내려온 거짓말, 살생 과보 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통해 내 속에 맑고 깨끗한 기운 밖에 없으면 공포심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삶이 당 당해집니다. 우리는 죽음에 임박했을 때 엄청난 공포심을 느낍 니다. 공부하지 않은 일반 중생들은 마지막 순간에 굉장한 공포 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수행자들은 수행의 힘에 의해 죽을 때에 도 공포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상태가 변할 때 공포감 을 느낍니다. 죽음의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는 상태에 서 죽은 상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사마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이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사마타를 하면 어떤 귀신들이 와서 혼란스럽게 해도 방해받 지 않습니다. 사마타를 통해 내 마음이 안정되면 어떤 귀신들도 나를 혼란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황룡선사가 참선하고 있는데 머리없는 귀신이 방안으로 쑥 들어옵니다. 선사가 ‘야 너는 머리가 없으니 두통이 없어 좋겠구나.(如無頭하니 如無頭痛者)’ 합 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물러갑니다. 가끔씩 귀신 꿈도 꿀 수 있 습니다. 사마타를 하면 그런 꿈을 꾸지 않을뿐더러 설령 꾼다고 해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런 꿈을 꾸는 자체가 내가 불안하다 는 증거입니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온갖 것이 다 보입니다. 현 재 의식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면 보이 기 시작합니다. 어떤 때는 부처님이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방 해하는 마귀가 보이기도 합니다. 

  사마타를 열심히 하다보면 세세생생 지었던 내 업장이 점점 옅어집니다. 참선이나 절도 일종의 사마타입니다. 참선과 절 에 열중하다 보면 잡생각이 그치게 되고 내 업장도 점점 옅어 집니다. 

  사마타를 열심히 하면 일체의 의심과 잘못된 분별심이 없어 집니다. 중생이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분별입니다. 내 업장을 거쳐 분별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기적인 생각에 갇혀 살게 됩니다. 내 입장에서는 맞아도 상대방 입장에 서는 맞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사마타를 하면 이런 잘못된 분 별심이 없어집니다. 어렸을 때의 생각이 평생동안 거의 바뀌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안에 들어가면 똑같습 니다. 이것을 다 끄집어내어 쓰면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 없습 니다. 이것을 변하게 하려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해야합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얻은 이익을 밝히다. 여섯째 여래의 경계에 대한 믿음이 증장된다. 일곱째 근심과 후회를 여의어 생멸법 가 운데 용맹하여 겁내지 않는다. 여덟째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교만함을 버려 다른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지 않는다. 아홉째 비록 선정[定]에 들지 못하였으나 때와 경계처(境界處)에 대하여 번뇌가 줄어들어 세속적인 일을 즐기지 않는다. 열 번째 삼매를 얻으면 바깥으로 반연하는[外緣] 모든 소리에 의하여 놀 라지 않게 된다.” 여래의 경계란 바로 부처, 도, 진리, 진여를 말 합니다. 사마타를 하면 진리에 대한 믿음이 커집니다. 그 믿음 이 커질수록 공부가 수월해집니다.

  사마타를 하면 진리에 대한 믿음이 커지기 때문에 내가 걸어 가는 삶에 대해 근심이나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생멸법 생사 가 운데 있어도 용맹하게 그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내 삶에 대한 확신이 증장됩니다.

사마타를 하면 이기적인 자기 생각이 없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 맞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이 있으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시기, 질투를 받 습니다. 사마타를 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만큼 여유가 있어집 니다.

  세속적인 일을 즐기지 않고 수행에 전념한다면 이것도 사마 타 수행의 효과입니다. 세속적인 일이 얼마나 좋으냐 정도를 자 신의 수행 척도로 봐도 될 것입니다.

  바깥으로 반연한다는 말은 세상과 통한다는 것입니다. 바깥 으로 반연하는 모든 소리에 의하여 놀라지 않는다는 말은 세속 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에 놀라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 상에 한 생명이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소리입 니다. 그리고 죽을 때 가장 마지막에 느끼는 것도 소리입니다. 

소리가 가장 먼저 들어와서 가장 늦게 나갑니다. 

  “무명과 지혜. 비구들이여, 참 나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인 무명이 먼저 있기 때문에 좋지 못한 생각이 생기며 이것으로 말 미암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겸손해 하지도 않는다. 비구들 이여, 참 나를 볼 수 있는 밝은 지혜가 먼저 있기 때문에 좋은 생 각이 생기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며, 겸손해 하는 마 음이 생긴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지혜고 끝없이 방해하는 것 은 무명입니다. 불교는 결국 무명과 지혜의 문제입니다. 무명을 깨뜨려 얻는 깨달음으로 지혜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무명과 지혜. 비구들이여, 밝음을 따르는 지혜 있는 사람에 게는 존재하고 있는 모습들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는 정견이 생 긴다. 정견이 있으면 바른 생각이 생기고, 바른 생각이 있으면 바른 말이 생기고, 바른 말이 있으면 바른 행위가 생기고, 바른 행위가 있으면 바른 생활이 생기고, 바른 생활이 있으면 바른 정 진이 생기고, 바른 정진이 있으면 깨닫기 위하여 정신을 올바른 곳으로 향하게 하는 정념이 생기고, 정념이 있으면 모든 집착과 분별심을 여의고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정정이 생긴 다.” 정견이 가장 중요합니다.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 에서도 바르게만 볼 수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팔정도를 통해 결론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정견입니다. 정정이 바로 사마 타를 의미합니다.

  “위빠사나를 닦다. 위빠사나를 닦는 뜻을 밝히다. 어떤 사람 이 오직 사마타 지(止)만을 닦으면 곧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선행[善]을 즐기지 않고 대비심을 여의게 되니, 이러한 까닭으로 위빠사나 관(觀)을 닦는 것이다.” 사마타 만 공부하고 위빠사나를 하지 않으면 선행을 즐기지 않고 자비 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에너지와 엔트로피가 있 습니다. 에너지는 양이고 엔트로피는 방향성입니다. 에너지에 해당하는 것이 사마타라면 엔트로피는 부처쪽으로 방향키를 터 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끝임 없이 관조하고 관찰하고 생각하 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위빠사나 닦는 방법을 밝히다. 법상관을 밝히다. 관(觀)을 닦 아 익히는 이는 마땅히 세간의 유위(有爲)의 법이 오래 머무름이 없이 잠깐 동안에 변하여 없어지며[無常觀], 마음의 작용이 생각 마다 생멸하기 때문에 이것이 고(苦)인 줄 알아야 하며[苦觀],” 법상관은 법을 살펴본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 무상관입니다. 부 모님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정정하시다가 나이를 먹으면 돌아가십니다. 생한 것은 언젠가 멸합니다. 무상 관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바른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멸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고임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 고관입 니다. 이것이 락(樂)이 됩니다. 고가 고인 줄 모르면 고이지만 고 가 고인 줄 알면 락이 됩니다.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어슴푸레하여 꿈과 같은 줄 알아야 하며,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개와 같음을 알아야 하며, 미 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아서 갑자기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無我觀], 세간의 몸뚱이가 다 깨끗하지 못하고 가지가지로 더러워서 하나도 좋아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不淨觀]” 나라고 주장할만한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 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 무아관입니다. 

  몸속에 있을 때 더러운 줄 모르지만 나오면 다 더러워집니다. 지금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죽으면 육체가 허물어지고 백 골만 남아 더럽고 흉측한 모습이 됩니다. 그리고 무지, 무명에 서 나오는 번뇌망상에 의해 생각도 더럽습니다. 이런 사실을 관 찰하여 아는 것이 부정관입니다.

  “대비관을 밝히다. 일체의 중생이 무시(無始)로부터 모두 무 명의 훈습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을 생멸케 하여 이미 모든 신심 의 큰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 에 받을 고통도 한량이 없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렵다. 이것을 알지 못하니 중생이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법성관 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알아, 세상의 모든 중생을 불쌍하고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이 대비관입니다.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자비가 나옵니다. 

  “서원관을 밝히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큰 서 원[大誓願]을 세워야 한다. 원컨대 내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여의게 하여 시방에 두루한 일체의 모든 선한 공덕을 수행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일체의 고뇌하는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에게 열반의 제일의의 낙[第一義樂]을 얻기를 바 라는 것이다.”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이 바로 목표입니다. 목표가 없는 삶은 방향성과 발전이 없습니다. 목표가 있 으면 매일매일 내 삶을 되돌아보고 갈고 닦을 수 있습니다. 불교 에서는 고를 여의고 진리, 해탈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만 열반에 들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 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부처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목표입니다.

  “정진관을 밝히다. 이러한 원력(願)을 일으키기 때문에 때와 곳에 있는 여러 선행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닦고 배워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다.” 이런 원력,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 이 필요하다는 점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 정진관입니다. 이 정진 관을 통해 원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향해 정진 이외의 왕도는 없습니다.

  “위빠사나 닦는 것을 총결하다. 오직 좌선할 때 사마타 지(止) 에 전념하는 것 외에는 나머지 일체에서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한다.” 생각을 집중할 때 행해야 할 것 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집중하는 것 이외 의 모든 것이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육조단경에서는 지와 관이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중 어 느것을 먼저 닦아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 면 더욱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바퀴가 굴러가듯이 위빠 사나와 사마타를 같이 닦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직종이든 잘 하려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본질은 다 같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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