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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강 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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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2-02-12 12:48 조회 14,44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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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강 좌선 



인생에서 이론적인 공부와 실제 실참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무엇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실천하면서 살 것인가? 우리 삶에 정답을 주는 이론적인 공부를 진행하면서 토요일에 철야 참선으로 실참을  해 두 가지가 병행됨으로써 멋진 삶이 이루어집니다. 해탈과 편안으로 뛰어난 삶으로 이끄는 육조단경 강의 13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며칠 동안 매우 추웠습니다. 근래 15년 동안 이만큼 추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삼사일씩 추웠다가 따뜻했다가 하는 삼한사온도 없어지면서 기후에 이상변화가 생겼습니다.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미국 갈 때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지구 상공에 흐르는 제트기류를 타고 갑니다. 제트기류는 북극을 중심으로 해서 둥글게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띠입니다. 비행기가 이 제트기류를 따라 흘러가면 연료가 절약됩니다. 이제까지 제트기류는 고위도 영역에 형성되어 있었어요. 북극을 중심으로 내려오는 추운 한파를 이 제트기류 안에 묶어놓고 있습니다. 이 제트기류가 우리나라보다 고위도 있으니까 아무리 추워도 우리나라는 그렇게 춥지가 않습니다. 시베리아만큼 추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제트기류가 타원형으로 우리나라 밑에 까지 내려와 있어서 그렇습니다.(그림1) 시베리아 한파가 우리나라에 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제트기류의 변화는 엘리뇨 현상과 더불어 지구의 가장 큰 기후이변을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북아메리카도 고위도에서  멈추어야 될 제트기류가 이 밑에까지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아시아나 유럽등 세계적인 기후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한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지구 온난화현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항상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우리는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는가? 자연 숲속에, 산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세포들이 덜 증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나 시간을 내어 한 번씩 산이나 숲속으로 가면 스트레스를 증식시키는 세포가 줄어들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덜 받고 기분도 좋고 즐겁고 산소공급이 잘 되니까 눈도 맑아지고 정신이 다 좋아집니다. 


오늘 공부해야될 내용은 좌선입니다. 좌선은 다리를 틀고 앉아 마음을 한 생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참구, 집중으로 풀어야 될 문제에 생각을 집중해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참선이라고 합니다. 참선이나 좌선은 같은 뜻으로는 쓰고 있지만 원래는 좌선으로부터 시작해서 참선을 추구하는  좌선법이 보편적으로 정착을 하면서 좌선이나 참선이나 같은 말로 쓰게 됩니다. 지난번 시간에 무념, 무상, 무주를 설명하고 이해를 했습니다.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다. 또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깨끗함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다고 했습니다. 본래 성품을 보고 나면 청정한 것을 깨끗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본래성품인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좌선을 통해서 먼저 추구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앉아 있음으로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육신과 정신을 한 군데에 집중해서 본래 자리로 들어가는 방법이 좌선입니다. 움직이지도 않는데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좌선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이 움직이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는데 이 마음을 본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결국은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됩니다. 좌선이나 참선이라는 것은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법성, 자성 이것을 내가 찾아 추구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집중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공부의 기본은 집중입니다. 집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바둑을 처음 배우고 나면 머릿속에 몇 달 동안은 바둑 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분명히 집중하는 겁니다. 화투나 포커도 재미가 있어 거기에 빠져들고 집중하게 됩니다. 과연 내가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 우리는 바둑에 집중 할 수 있고 화투에 집중 할 수도 있습니다. 집중을 하기는 하는데 알아차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부를 집중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사마타와 위빠사나입니다. 방향성 없이 집중만 한다면 악에도 집중을 할 수 있고 잡기에도 집중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공부에 집중하자고 하는 것은 지혜를 추구하고, 지혜를 모으는 것입니다. 좌선은 본질을 추구하는 자성과 법성을 알아 가는데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즉 위빠사나와 사마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때  참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드는 것은 가장 잘 집중 할 수 있는 어느 한 곳에 집중을 지속적으로 해보자는 것입니다. 이 몸 받기 전에 나는 누구였던가? 전생에 나는 누구였던가? 조주는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는가? 왜 무라고 했는가? 하나의 주제를 갖고 그 하나의 물음에 지속적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다 보면 집중이 되고 이렇게 집중하다 보면 추구하는 본질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느냐? 공부에는 이론도 있고 실참도 있습니다. 어떤 누구는 공부한다고 평생을 선방에 앉아서 참선만 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경전만 갖고 공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는 실참하는 것이고 후자는 이론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론을 잘 이해하면 실참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요. 그렇지만 실참만 하다 보면 방향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잘 하고 있는 건지, 못 하고 있는 건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인 백두산 높이가 2744미터입니다. 백두산 꼭대기에는 천지가 있어요. 백두산 천지의 높이는 약 2500미터쯤 되겠지요. 백두산이 해발 2744미터라고 했을 때, 500미터, 1000미터, 1500미터, 2000미터, 2500미터를 지나 2744미터까지 갑니다. 밑에서부터 지상에서 보는 벌들이  500미터 까지는 있습니다. 1000미터 올라가면 흰줄 작은 꽃 벌이 있습니다. 1500미터 올라가면 큰칼벌이 있고 2000미터 올라가면 호박벌이 있고 2500미터 올라가면 들판 떡 벌이  있습니다. 이런 벌들이 어떻게 생겼다 하는 것을 알면 내가 지금 500미터 올라왔구나, 1000미터 정도 올라 왔구나를 알 수 있습니다. 흰줄 작은 꽃벌이 보이면 1000미터 정도 왔구나를 아는 것처럼 참선 공부해서 제1단계를 통과하는구나를 알 수 있습니다.  큰칼벌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 내가 공부해가지고 이 정도까지 왔구나. 호박벌이 띄기 시작하는 것처럼 이때 나타나는 상태를 알 거 같으면 내가 한 2000미터 정도 올라왔구나. 목적지가 바로 앞에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가 나타나면 목적지까지 다 왔구나를 알게 되고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론적인 공부를 알고 실제 참선을 하면서 어디를 가고 있는지, 가고 있는 길이 잘 되었는지, 잘못 되었는지 항상 상황을 점검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공부든 이론과 실참은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론적인 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실참을 할 거 같으면 어디까지 왔는지도 어떻게 잘 가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무식한 방법이 없습니다. 이론적인 충분한 백그라운드가 있고 실참을 할 때는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를 알면서 확신을 갖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론을 모르면 흰줄 작은 꽃벌이 나타나더라도 도대체 이게 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의 이론적인 공부가 되어있으면 실제 참선을 하더라도 훨씬 잘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 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으면 우리는 잘 못 가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으면 항상 머뭇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처음 시작 할 때는 확신을 갖고 했다가 직장 다니고 사업하다가 보니 확신은 서서히 무너져 버리고 없어져 버려요. 그냥 생활인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전생에 내가 갖고 있었던 만큼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내가 전생에 갖고 있었던 그 정도까지 가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인연이 되어서 쉽게 가요. 그런데 그 이상 넘어서려고 하면 발심이 필요하고 죽을힘을 다해서 가봐야 하고 이런 노력이 없으면 진도가 나가지를 않습니다. 인연을 잘 만나면 내가 한 번 공부를 해봐야 되겠다, 하다못해 이 생에 한 달 만이라고 문 걸어 놓고 죽든 살든 공부해봐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됩니다. 한 번 마음먹고 하고나면 이생에서 얻을 수 없는 가장 큰 보배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실참한다고 하는 것은 노력하는 것이며 노력은 같은 행위를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습관이 좋더라, 습관이 잘 돼 있더라는 사람은 공부하기가 쉽습니다. 습관이 잘 돼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성공을 하고 뭐든지 이룰 수가 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습관입니다. 습관이 잘 되어있는 사람은 생활이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습관이 나쁜 사람은 생활이 뒤죽박죽입니다. 이 친구가 술 먹자고 하면 이 친구따라 술 마시러 가고 다음날 모임 가서 또 한 잔하고 그렇게 삽니다. 그렇지만 아침에 4시에 일어나서 참선하고 일정이 분명한 사람은 저녁에 누가 아무리 유혹해도 술 먹을 수가 없습니다. 내일 아침 4시에 일어나서 참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직장에 목이 떨어지지 않는 한, 자신의 계획대로 삶을 이끌어 갑니다. 계속 반복을 하다 보면 알아집니다. 참선에서 움직이지 않는 다는 것은 육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됩니다. 마음을 한 생각에 집중해서 끊임없이 이어가야 합니다. 몸부터 움직이지 않아야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부좌 자세로 몸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몸이 익숙해지면 몸에 상관없이 마음은 언제든지, 자면서도 집중 할 수 있고 또 걸어 다니면서도 집중 할 수 있고 항상 집중 할 수 있는 단계까지만 가면 형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변화가 일어나면 그 변화를 또 인식하는 것이 공부해 가는 과정이고 공부입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반복해 가다가 서너 단계 올라가면 견성했다 하고 도가 터지는 것입니다. 이론과 실참이 병행되어야 만이 이생에서 우리가 원하는 멋진 삶을 살 수가 있어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본다면 내가 이제까지 무엇을 했던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생각해보면 남아있는 삶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크게 달라질 것도 없고 변화 될 것도 없고 지금과 같은 삶이 연속 될 뿐입니다. 한 번 결심을 하고 마음을 먹으면 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 속에 누적 되어 있는 전생의 업보다도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하면 이렇게 결심을 하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겁니다. 좌선은 본래청정을 추구합니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여가 덮인 것입니다.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한 것이 드러납니다. 진여가 허망한 것으로 덮여 있는 것입니다. 허망한 것으로 덮여 있는 내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행했던 그 업을 계속 끄집어내서 쓰고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허망한 것을 여의기만 하면 원래 그 안의 청정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걷어낼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생각을 한 군데 집중하자 하는 것이 허망한 것을 걷어내는 작업입니다.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않고 망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점심시간에 카레가 나왔어요. 카레 맛이 어떠한가? 하고 물으면 카레의 맛을 설명해야 돼요. 맵다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맵다는 맛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즉 우리는 청정의 상태를 말하면 되는데 청청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맛이 어떠하냐? 하고 물었을 때, 물맛이 쓰다 하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놈의 물맛을 자꾸 설명하려고 하니까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두에서 묻고 답하는 내용이 부처가 뭐냐고 했을 때, 본래청정, 자성청정, 법성청정한 그 청정한 상태를 나타내면 답이 되는 것입니다. 동산의 마삼근, 운문의 똥막대기가 그런 답인 것입니다.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이 생긴다는 것은 깨끗함이라는 것을 흰색이다, 검은색이다, 무슨 색이다로 자꾸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해서는 본질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깨끗함을 보고 느끼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깨끗한 것을 자꾸 생각하는 것은 화두를 들면서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 화두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을 집중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지 화두 자체가 부처가 아닙니다. 화두 자체가 깨친 성품이 아니라 단지 화두라는 그 매체를 통해서 목적지에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화두도 결국은 번뇌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수만 가지의 번뇌를 화두라고 하는 하나에 집중함으로써 번뇌를 하나에 모으는 것입니다. 번뇌를 한 군데에 모아 놓으니까 무거워서 떨어지거나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견성하는 겁니다. 무거우니까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마 밑에 물이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떨어지는 거 보세요. 그 빗물방울이 떨어져 어느 순간 구멍이 나있어요.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 하는 집중이고 그 상태가 되면 무념이 됩니다. 그 생각을 한 군데에 집중함으로써 무념에 들어갑니다. 무념이 되면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면 견성이 되는 것입니다. 법화경에 보면 물줄기를 찾아서 흙을 파고 들어갑니다. 한참 찾아 들어가다 보면 젖은 땅이 나오면 곧 물줄기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바닥까지 볼 수가 없으니까 이생에서 한 번 집중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집중을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하세요. 누구나 궁금해 하는 것인 자신의 전생을 알고 싶으면 과연 이 몸 받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던가? 전생에 나는 무엇이었던가?에 생각을 집중하시면 쉬울 것입니다. 자식을 대학에 진학시킬 때 인기 있는 과를 택해서 보내려고 합니다.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겠지요. 그렇지만 좀 능력 있는 아이가 평생 그 일을 계속 한다면 정말 세상에 엄청나게 보시할 수 있는, 기여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는 훨씬 더 잘 할 수 있어요. 화두를 들 때 자기한테 맞는 화두가 있어요. 딱 받치는 것이 있는 화두가 있습니다. 화두가 내 가슴에 와 부딪혔을 경우에는 그 화두를 들면 훨씬 더 집중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공부에는 커트라인이 있어 그것을 넘어야 합격을 합니다. 이생에서 우리가 해야 될 중요한 것은 공부시험에서 이 커트라인을 넘어야 됩니다. 커트라인을 넘어야 다음 생에 그것이 내 것이 돼요. 내 가슴에 와 닿은 화두를 들면 수월하게 그 단계를 넘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이 잡다한 번뇌망상을 끝까지 못 이겨내요. 자신의 전생을 생각한다면 생각을 좀 더 잘 집중 할 수 있어요. 내가 살아왔던 내 삶의 흔적이 있습니다. 집중하는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풍부한 재료가 있습니다. 경허스님도 책을 아무리 보아도 마음에 맺히는 화두가 없었는데, 영원스님의 ‘여사미거 마사도래 驢事未去 馬事到來’에 딱 마음이 꽂혔습니다. 이 화두를 들었고 화두를 타파하고 견성을 하게 됩니다. 


 화두타파를 한다는 것은 근본 무명을 타파한다는 것이며, 무명이 명이 된다는 것이며, 본래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견성은 깨끗함을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함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깨끗함의 상태와 느낌을 그 맛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될 본질을 청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질이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갖고 있었던 업으로 덮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탐, 진, 치로 덮여있고 이것이 오만 것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허망한 번뇌망상들입니다. 빨강, 노랑, 파랑 세 가지 색깔만 섞으면 모든 색깔을 만들어 냅니다. 바로 이 빨강이 탐이고 노랑이 진이고 파랑이 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탐진치를 계, 정, 혜로 바꾸는 것입니다. 탐욕을 없애는 방법은 계입니다. 계는 규칙적인 생각과 생활입니다. 어릴 때 부모가 공부해라, 공부 열심히 해라. 하는 것은 습관 잘 들이라는 것입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그 습관이 평생 살아가면서 이어질 때 자기의 삶에도 만족을 하고 세상에도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규칙적인 생활, 규칙적인 습관, 이것이 결국은 탐을 소멸시킵니다. 화내는 것은 진심으로 화를 가라앉히면 정이 됩니다. 화를 내는 것은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이 긍정하지 않을 때 화가 납니다. 나는 맞는데 상대방은 틀린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화를 소멸시키는 것은 올바름입니다. 내 생각이 올바름으로 가득 차 버리면 화는 없어집니다. 올바름은 어떤 것이 오더라도 다 녹여버립니다. 내가 올바르지 못할 때는 뭐든지 들어오면 다 부딪힙니다. 내 색깔을 상대방에게 강요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를 때는 무엇이든지 다 녹여서 상대방에게 맞는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혜는 지혜로서 치를 소멸시킵니다. 팔정도, 육바라밀, 계정혜, 삼학이라는 것은 견성성불하는데 있어서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팩트입니다. 이것들에 의해 탐, 진, 치가 소멸되고 청정이 드러나게 됩니다. 

본래성품인 청정을 보려면 산의 깊숙한 중앙부에 들어가야 합니다.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굴을 파서 중앙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경전을 공부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화두를 든다는 것이 굴을 뚫는 방법인 것입니다.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극대화 시키는데 있어서 인간이 발견한 최고의 걸작품이 화두입니다. 그러면 화두를 들어야만 견성을 할 수 있는가? 화두를 들지 않고도 견성을 할 수 있느냐? 는 또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공자나 예수나 이런 분들이 견성을 했다고 한다면 이 분들도 화두를 들었겠는가? 입니다. 화두를 들지 않고도 견성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견성 하는 것은 화두를 들든, 들지 않든 다른 방법이지만 갈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은 화두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것은 화두를 드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부처라고 할 때, 예수는 화두를 들었겠는가? 천국으로 가는 그 열쇠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풀었기 때문에 천국을 외치는 것이고 천국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에서든지 가장 철저한 삶의 확신은 화두를 타파하지 않고는 생기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육조단경강의를 하면서 참선공부를 같이 시작해야 하느냐? 이 처방전을 가지고 약을 지어 먹고 중생병을 낫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평생 빨강, 노랑, 파랑 이것만 맛 볼것인가? 그 속에 묻혀 있는 청정한 맛도 볼 것인가?입니다.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겁니다. 본질을 생각하면 뭐든지 더 잘 되고, 잘 할 수 있어요. 확신이 서면 우리는 계속 명상도 하고 화두도 들고 자기의 삶을 성찰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회를 안 합니다. 참회하지 않고는 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참회를 해야 만이 빨강, 노랑, 파랑의 색깔이 조금씩 옅어지고 없어집니다. 청정한 색깔이 더 가까워지고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들기 전의 것이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 청정이 진짜 청정인지 아닌지는 안 가본 사람은 몰라요. 단지 우리가 청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물들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망상은 처소가 없다. 본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허망함임을 알아야합니다. 깨끗함을 볼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허망된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깨끗함은 모양이 없으므로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는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됩니다.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적정이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죽어있는 움직임 없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으면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품을 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견성인데 성품이 무엇인지 알아야 본던지 말던지 할 것입니다. 성품이 청정하다고 하던데? 그럼 공기 같은 것일까? 투명할까? 흰색일까? 하는 이런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망상을 일으키는 거고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화두를 들고 본질을 볼려고 하면서 깨끗함이 무엇인가? 본질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은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 화두와 더, 공부와 더, 본질과 더 멀어진 다는 겁니다. 결국은 그 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월스님은 세속의 공부가 짧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바로 출가 하였습니다. 은사스님이 부처가 무엇이냐하고 물으니 수월스님이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때 은사스님이 즉심시불이라고 말했는데, 수월스님은 즉심시불을 짚신데기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스님이 내가 부처가 뭐냐고 물었는데 왜 짚신데기라고 했는가? 왜 짚신데기라고 했는가를 갖고 계속 화두를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몇 년을 왜 짚신데기인가? 묻지도 않고 그냥 혼자서 생각하니까 경허스님도 수월스님이 뭐를 생각하고 있는지 뭐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수월스님이 혼자서 계속 짚신데기가 왜 부처인가? 혼자서 계속 몇 년동안 그 화두를 들은 것입니다. 수월스님이 짚신을 잘 쳤어요. 짚신치기 선수권 대회에 나가면 수월스님은 금메달 감이었습니다. 그 날도 왜 부처가 짚신데기일까 짚신데기, 짚신데기를 생각하면서 짚신을 치다가 순간 탁 걸려 버린 것입니다. 그 순간 탁 부처를 깨쳐버린 것입니다. 본래 성품을 본 겁니다. 본래성품을 보는 것은 어떤 것을 매게로 해서 끝도 없는 집중을 할 수 있으면 그 세계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수월스님은 스승이 한 말에 100% 확신을 갖고 ‘왜 부처가 짚신데기인 것인가’에 대해 오로지 탐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하는 일이 짚신 치는 일 밖에 없으니까 집중이 바로 극에 달해가지고 어느 순간 딱 계기가 되니까 터진 것입니다. 집중하다보면 바람소리에도 터지고 시계 째각, 째각거리는 소리에도 계기가 되어서 터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한 것으로 가기 위해서 집중을 해야 하는데 깨끗함이 뭔가? 그것을 찾다가 결국 허망한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화두를 분석하려고 합니다. 화두를 따지려고 해요. 화두를 처음 들 때는 따질거 따지고, 생각할거 생각하고, 분석할거 분석하고, 오만 것 다해도 관계없습니다. 일단은 그것을 갖고 얼마나 깊이 끊임없이 갈 것인가 하는 과정을 만드는 작업은 필요합니다. 그 작업이 끝나면 오로지 깨끗함이라고 하는 그 맛이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 그거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짚신데기 하나만 들면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생각에 탐, 진, 치, 빨강, 노랑, 파랑이 모두 녹아내리고 결국은 청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정상을 등정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내 생각이 0.1초만 흩트려저도 죽어요. 얼마나 엄청난 고도의 집중을 합니까? 그렇게 집중하다 보면 다음 생에 대통령도 될 수 있고, 장관도 될 수 있고, 엄청난 부를 이루는 사장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집중하는 능력만큼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이생에서 인연이 되어서 알게 되어 집중해 보면 나날이 자신의 삶은 달라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집중을 하기 위해서 좌선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목적이 정해지면, 교수를 하고 싶다, 판사를 하고 싶다는 목적으로 가기 위한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대학교 졸업을 하고 시험을 합격해서 교수도 될 수 있고 판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그냥 목적만 갖고 있다 하면 목적지에 갈 수 있어요? 우리가 불교공부 하는 것을 착각하면 안됩니다. 육조단경의 경우 혜능스님이 일자무식꾼이었다. 공부도 안 한 사람이 견성했으니까 어느 누구나 다 견성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확률입니다. 원래 연기의 정확한 표현은 활률론적 연기라고 해야 맞습니다. 공부 안 한 사람이 견성 할 수 있으면 공부 한 사람은 견성할 수 있는 확률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육조단경을 한 번 보세요. 나는 전생에 양반이었고, 전생에 대단한 집안이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조상을 설명하면서 다 설명을 하고 있어요. 이 생에서 비록 잘못되어 공부를 못 했지만 집안 자체는 괜찮은 집안이고 아버지 때도 괜찮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과정을 잘 거치고 잘 밟으면 훨씬 더 목적지에 도달하기가 쉽습니다. 좌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실제적으로 정통적으로 정상적인 방법을 알고 행함으로써 시간이 지나고 익혀지면 좌선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과정을 거치고, 과정을 밟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 당장은 잘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초공사의 과정입니다. 기초공사를 잘 해놨을 때는 집을 잘 지을 수 있습니다. 기초공사 안 해두면 처음에는 집을 잘 짓는 것 같지만 무너지기도 하고, 어떻게 지어야 될지 모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도면에 따라 기초공사를 튼튼하게 해놓고 올리는 집은 처음에는 늦게 짓는 것 같지만 결국 완성하는 것은 기초공사 잘 되어있고 도면을 보고 하는 집은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공부가 충분히 잘 습득했을 때는 형식대로 안 해도 됩니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않으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니, 도와는 어긋나고 등지는 것이다.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 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고 깨끗함을 본다는 것이 이와 같이 입만 열고 생각이 움직이면서 생각을 집중하지 못하면서 하는 것은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 됩니다.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이다.’ 그러니까 바깥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돼요. 또 안으로 본래의 성품을 보아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아야 됩니다. 어지럽지 않은 것이 밖도, 안도 적적하고 성성해야 만이 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거나, 생각을 하나에 집중하거나 좌선이 될려고 하면 바깥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백두산을 보나, 금강산을 보나, TV에서 연예인을 보나 모든 경계 위에 내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형상을 만들어 버립니다. 바로 무상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경계에 물들지 않아야 하고 안으로 본래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좌선입니다. 안이비설신의라는 나와 나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이 있습니다. 혀나 몸뚱이나 뜻은 죄를 짓습니다. 혀는 악한 말, 온갖 말을 다 해서 죄를 지어요. 몸뚱이도 온갖 나쁜 짓을 해서 죄를 지어요. 생각도 온갖 나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설신의는 업을 짓게 됩니다. 안, 눈으로 보는 것과 이, 귀로 듣는 것은 보기만 하고 듣기만 합니다. 비, 코는 냄새를 맡고 호흡을 합니다. 근과 경을 집접 통하게 하는 것은 비, 코 밖에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호흡을 통해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공부는 호흡을 바탕으로 합니다. 호흡은 수행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처음 시작 할 때도 호흡으로 시작하고 마지막 끝날 때도 호흡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몸뚱이의 자세는 가부좌 자세를 하거나 반가부좌 자세를 합니다. 장시간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 척추가 꼿꼿이 곧아 있는 자세는 가부좌 자세 밖에 없습니다. 척추가 곧아야 성성합니다. 척추가 꾸부러지면 절대 생각이 깨어있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쉽게 몸이 허물어져 버려요. 오장육부가 다칩니다. 공부는 건강하고 잘 되자고 하는 것인데 몸이 상하고 다치면 안됩니다. 척추가 곧으면 오장육부도  더불어 편안해지고 좋아집니다. 이것이 좌선을 할 때 가부좌 자세를 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어릴 때 출가를 하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어릴 때부터 가부좌 자세를 해 놓으면 나이가 들더라도 가부좌 자세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몸이 말랐고 다리가 긴 사람은 전생에 참선을 많이 해서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이가 들어 가부좌 자세를 해도 쉽게 됩니다. 반가부좌 자세는 가부좌 자세만큼은 되지 않더라도 그래도 어느 일정 시간동안은 척추가 휘어지지 않고 곧은 자세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무념, 무상을 무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견성한 수행자를 무심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념, 무상 상태가 된 것을 무심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무념, 무상이 되면 무주가 가능합니다. 무주가 되니까 바로 무심이 됩니다. 그래서 견성한 도인을 무심도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참선공부를 시작 할 때, 처음 한 달에서 석 달이 제일 중요합니다. 처음 시작하면서 제대로 기초를 잡고 참선을 할 수 있으면 참선하기가 수월해집니다. 그렇지만 이 시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그냥 해버리면 아무리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참선이 쉽지가 않아요. 참선에 들어가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자신 제대로 바라보기부터 해야 합니다. 이 문제가 선행되지 않고는 참선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내가 이제까지 갖고 있던 모든 아집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생명이 탄생되는 순간 전생에 행했던 업에 의해서 나라고 규정짓는 그 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치입니다. 내가 원래 없는데 형상을 이루는 순간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치가 생겨요. 그 아치 때문에 내가 있다는 아집이 있습니다. 나만이 맞고 자기중심의 모든 생각이 일어나게 하는 아만이 생깁니다. 이어서 끝도 없는 자기 밖에 사랑하지 않는 아애가 생깁니다. 그래서 아치, 아집, 아만, 아애 이것이 중생에 머물게 하는 네 가지 속성입니다. 아집이라는 것을 생각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됩니다. 그냥 참선한다고 앉아 있을 때, 밑불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불을 끈다고 물을 붓거나 바람을 불거나 할 때 그 밑불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니까 이 아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않고 참선한다고 앉아있으면 밑불이 있는 상태에서 불을 끈다고 바람을 부치는 경우하고 같은 경우가 됩니다. 대부분 참선을 시작하면서 이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참선을 한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참선을 시작할 때 화두를 받고 그냥 시작을 합니다. 화두를 들고 아무것도 없는 장치 속에서 공부 하려고 앉아있으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대학만 만들어 놓고 너희들 여기에서 공부해라, 공부는 자유입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가 얻어 들었던 지식을 갖고 4년 동안 거기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공부를 얼마나 잘 하겠어요? 공부를 얼마나 바르게 하겠어요? 이것이 현재 우리의 상황입니다. 참선을 시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한 번 보고, 새로 시작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냥 그대로 하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참선하는데 아집을 보는 순간 아집에서 벗어난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참선을 하면 수월해집니다. 

참선을 시작하고 한 달에서 석 달 동안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일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렵고 가슴 아팠던 일이 있을 생각해 봅니다. 내가 겪었던 것이기 때문에 상황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루에 60분씩 한 달 동안 생각을 해보세요. 쉬운 것 같지만 이 과정을 대부분 잘 하지 못합니다. 이 과정을 안 거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을 때에 참선을 아무리 해봐도 밑불 놔 놓고 불 끄는 경우와 같은 겁니다. 일단은 철저한 자기점검을, 자기반성을, 자기참회를 거치고 새로운 자기를 만나게 되는 계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 과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선을 잘 할 수가 있어요. 그 과정에서 정말 가슴 아팠던 일에 대부분 자기 생각대로 했을 때는 자기가 옳은 것 같고 다 잘한 거 같아요. 어떤 일도 뼈 아프게 제대로 알고 나면 내가 잘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1% 내가 잘못해도 결국 그 1%가 100%입니다. 그 1% 때문에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철저한 과정을, 검정을, 참회를 거치지 않고는 공부 할 수가 없습니다. 공부가 안돼요. 참선을 가르치는 사람마다 다른 방법으로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그 사람의 본질 속에서 이제까지 갖고 있었던 업 속에서 그 업을 정리 정돈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습니다. 


숨을 내 쉴 때는 이 우주의 충만한 모든 기운을 내 속으로 빨아들이는 기분으로 숨을 들어마십니다. 이 우주의 충만한 모든 기운을 전부다 내 속으로 빨아들이는 기분으로 천천히 숨을 들어 마십니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맑은 기운들을 내가 전부다 들어 마시는데 병이 생기겠습니까? 숨을 내 쉴 때는 내 속에 있는 맑고 깨끗한 기운이 이 우주 끝까지 편안하고 잘 되라고 생각하면서 숨을 내쉽니다. 스님이 산 속에 혼자 공부하면서 지극정성으로 이 우주가 편안하라고 기도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생각 같기도 하지만 그 기운은 반드시 이 우주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호흡을 하면서 내가 갖고 있는 바르고 거룩하고 깨끗한 생각이 이 우주 끝까지 다 미쳐서 모든 사람에게 그 기운이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한테 축복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참선하면서 참회도 하고 자기 정화도 하지만 바로 더 큰 것은 맑은 기운을 이 세상에 회향 하는 것입니다. 기도로써 회양도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여 나와 우주가 교감하게 됩니다. 이 우주의 기운이 들어오는 문이 머리입니다. 기운이 나가는 문이 발바닥입니다. 그래서 항상 모든 기운은 머리로 들어와서 발바닥으로 나갑니다. 우리가 공부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과 문입니다. 그리고 또 문이 어디에 있어요? 입으로 먹는 문이 하나있고 항문으로 나가는 문이 있습니다. 공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들어오는 문으로 우주의 바깥 기운은 끝도 없이 들어오도록 해야 하고 죄를 지은 이것은 입을 닫아 버려야 합니다. 나가는 기운은 발바닥은 통해서 나갑니다. 괄약근 운동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절입니다.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운동으로 절만 잘 하면 평생 건강합니다. 항문이 열리면 죽습니다. 참선하고 절하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운동 중에 이것보다 더 좋은 운동이 없습니다. 이것만 제대로 되어도 평생 몸에 병 없이 잘 살 수 있습니다. 


아집이 깨어져야 무념에 다다르고 삼매에 들어 견성성불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길을 모르고 방법을 모를 때는 엄청나게 어렵지만 알면은 생각보다 쉽습니다.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그래서 좌선이나 참선이나 선정이나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인 것이다.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는 것이 곧 정인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좌선과 선정을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참선을, 좌선을 통해서 도달하는 단계가 선정입니다. 선정은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있는데 처음에는 청정해야 하고 중간에는 청정이 지속되는 평정을 이루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즐거움, 낙입니다. 바로 극락입니다. 선정 잘하면 가는 세계가 바로 극락입니다. 죽어서 가는 세계가 극락이 아니라 살아서 최고의 삶을 이루는 상태가 극락입니다. 초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이 있는데, 초선정에서는 심사희락을 느낍니다. 심, 우리가 거친 생각, 사, 미세한 생각, 끝도 없이 가라앉히다 보면 보이지 않던 미세한 이 흐름까지도 보이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사입니다. 심사희, 기쁘고 즐거운 것, 초선정에는 심사희락을 전부다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 한 번 공부에 딱 맛을 들여 보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뭐 돌아다녀도 좋고, 뭐 봐도 좋고, 뭐 누워도 좋고 이 세상에 전부다가 이것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초선정입니다. 스님들이 공부를 하면서 묵언을 합니다. 묵언하는 이유가 공부 한 번 잘해보자는 겁니다. 바로 초선정에 들면 말을 하라고 해도 말을 멸하는 겁니다. 2선정에 들면 감각기관과 관찰을 멸하고 3선정에 들면 기쁨을 멸하고 4선정에 들면 즐거움도 멸하고 모든 것도 다 멸합니다. 이것이 전부다 멸해진 상태가 청정입니다. 그럴 때는 숨결도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가사상태에 들면 6개월이고 1년이고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먹지도 않고 아무것도 안 한 그 상태에서 계속 선정에 들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공부 잘하면 말만 멸하는 것이 아니라 숨결도 멈추게 됩니다. 공부 못하면 죽고 공부 잘하면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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