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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12강 무념 무상 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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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4,704회 작성일 21-08-13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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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강 무념 무상 무주  


 우리나라 겨울기후의 특징은 삼한사온이었는데 지금은 일주일 내내 춥기도 하고 계속 따뜻하기도 합니다. 추우면 소련보다 더 추운 것 같으며 시베리아 고기압이 우리나라 창공에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 무념과 무상과 무주의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될 거 같습니다. 무념이 지속되면 삼매에 든다고 했습니다. 삼매가 지속되면 견성을 하게 되고 성불을 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들어갈 첫 관문이 바로 이 무념입니다. 무념이 어떤 내용을 이루고 있는지. 무념을 종으로 삼으며, 형상이 없는 무상을 본체로 삼고, 머무름없음인 무주를 근본으로 삼는다. 하는 것이 공부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무념무상이 되면 곧 무주가 되는 것입니다. 무주로써 세상을 볼 수 있고 일어나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가 있어요. 


중국의 염관스님은 그 당시 대단한 도인으로 수행자들이 800명이나 모여들어 염관스님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염관스님에게 휘일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수십 년 동안 스님 뒷바라지만 하고 있습니다. 50이 되도록 계속 수행자들 시중만 들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일과를 마치고 자는데 저승사자가 찾아와서 오늘 너를 데리고 가야겠다고 합니다. 휘일스님은 평생을 선방에 있었지만 한 번도 공부를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또 이렇게 갑자기 저승사자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스승님이 일주일만 공부하면 견성한다는 이야기가 번쩍 스쳐 저승사자한테 사정을 합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면 안 되나?  이제까지 선방에서 시중만 들다가 공부 한 번도 못 했다. 평생 선방에 있으면서 공부 한 번도 못하고 가면 얼마나 억울하냐? 나한테 딱 일주일만 시간을 다오. 딱 일주일만 공부하고 그때 네가 오면 따라갈께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승사자는 자기는 결정권이 없고 염라대왕이 결정한 것을 자기는 그냥 집행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염라대왕한테 가서 일주일만 휘일이 잡아가는 시간을 좀 늦춰 달라. 해보고 염라대왕이 허락을 안 해주면 내일 와서 잡아가면 되지 않느냐? 하고 사정합니다. 저승사자가 염라대왕한테 가서 상황을 설명하니 그놈 기특하다고 일주일 봐주라는 겁니다. 휘일스님은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다리 틀고 앉는 순간 얼마 안 돼 선정에 들어 그대로 일주일동안 계속 선정에 들어 있었어요. 바로 이 무념의 상태에 계속 들어있었습니다. 일주일이 되어 저승사자가 휘일스님을 잡으러 왔어요.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휘일스님이 없어요. 무념상태에 들면 육신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저승사자가 못 찾고 가버립니다. 휘일스님은 일주일동안 이 무념의 상태에서 선정에 들어 있다가 저승사자가 돌아가고 난 다음에 깨어나 그 후에 열심히 공부해서 견성하고 늙도록 살았다는 것입니다. 


무념이 지속되면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면 언젠가는 깨치게 되어 견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발을 담궈야 할 것이 무념이고 이 무념이 지속되면 삼매에 들고 삼매가 지속되면 견성을 하게 됩니다. 무념, 무상 무주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돈오와 점오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법에는 단박 깨침과 점차로 깨침이 없다는 것이 육조단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입니다. 법에는 단박 깨침과 점차로 깨침이 없으며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을 뿐입니다. 학교에서 공부 할 때도 똑같이 한 시간 공부했는데 누구는 1등하고 누구는 꼴찌를 합니다. 사람에 따라, 전생에 그 사람이 닦았던 그 업에 의해가지고 영리하고 우둔함은이 따라 있는 것이지, 법에는 단박 깨침과 점차로 깨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치면 단박에 닦습니다. 수행하면서도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수행의 결과를 보지 못하는 것은 미혹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깨친 상태가 되면 돈수나 수행하면서 결과에 밝아 결과를 아는 것입니다. 지난번 에 백장선사의 여우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스님이 ‘깨친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인과불락,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그 잘못된 대답으로 500생 동안 여우 몸을 받고 있었습니다. 백장선사에게 물었을 때 ‘인과불매, 인과에 어둡지 않다.’라고 대답해 줍니다.  인과에 밝다, 인과를 안다, 인과 결과에 밝은 이 상태가 바로 깨친 상태입니다. 육조단경에서는 돈오만 있을 뿐이지 점오는 없다는 겁니다. 깨치면 사람에 따라서 혹은 빨리 깨칠 수도 있고, 늦게 깨칠 수는 있지만 법에는 돈과 점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본래로 차별이 없다는 것은 깨치고 나면 전부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불성 속에 다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면 다 아는 것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전부다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전부다 같은 답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이기 때문에 조주가 무라고 해도 혹은 뜰 앞의 작은 나무라고 해도 다 맞는 답이 되는 이유가 불성은 전부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의 불성이 우리한테 들어오면 사람이 되는 것이고 동물한테 들어가면 동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충만한 하나의 기운이 불성이며, 깨달으면 차별이 없고 하나입니다. 그리고 깨닫지 못하면 끊임없이 계속 모르기 때문에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윤회를 한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무지 때문에, 무명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윤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은 이 몸 받아서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었다가 또 모여진 인연에 따라, 태어나고, 멸하고 또 태어나고, 또 멸하고 이 생멸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여 일어납니다. 


무념, 무상, 무주에 대한 설명입니다. 무념을 종으로 삼고, 무상을 본체로 삼고, 무주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불교에 조계종도 있고 천태종도 있고 진각종도 있습니다. 그 본체는 무엇이냐? 했을 때 조계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이며, 천태종은 묘법연화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있느냐? 했을 때 금강경이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주이고 묘법연화경은 일불승입니다. 금강경에서 보시를 통해서 끊임없는 도를 이루겠다는 발심을 함으로서 결국은 마지막 도달해야 될 단계가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무주입니다. 묘법연화경에서 주장하는 것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회통하여 불로 회귀하는 일불승 사상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부처다 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나 묘법연화경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단지 포장을 다르게 했다 뿐이지 결과는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종으로 삼고, 본체로 삼고,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이렇게 이해하면 수월합니다. 육조단경에서는 무상에 대해서 상이 없는, 상이 아닌, 무엇을 무상하다고 하는가?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상이라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입니다. 무념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염라대왕이 와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못 잡아 가는 것입니다. 만약 생각을 일으켰다면 무념의 상태가 되지 못합니다.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바로 머무르지 않는 것이 무념입니다. 무주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염념상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념, 금념, 후념, 염념, 상속, 무유, 절단, 약일념, 단절, 법신, 적시, 이색신.  전념은 앞에 일어난 생각입니다. 금념은 지금 일으키는 생각입니다. 후념은 미래에 따라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에 올 이 생각이 염념상속으로 생각, 생각이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으니 무유절단으로 끊어짐 없이 그냥 계속 연결이 됩니다. 약일념, 만약 한 생각이 단절되어 끊어진다면 이 생각이 끊어지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무념인 상태가 되면 생각이 끊어진 상태가 됩니다. 궁극적으로 무념이라고 하는 것은 중유의 흐름에 의해서 한순간도 끊임없이 생각 속에는 생각이 끝도없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이 끝도 없이 일어나는 생각이 수행을 통하여 끊어버리면 이 중유의 흐름을, 생각의 흐름을 끊어버리면, 약일념단절을 하면 법신이 이색신, 색신을 떠나게 됩니다. 바로 이 법신이 색신을 떠나게 되니까 저승사자가 와도 못 찾고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삼매가 되고 견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색신을 떠나야 법신이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색신하고 더불어 있는 한 우리는 색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주는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습니다.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하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으로 무주라 합니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는 것입니다. 머무름이 없는 무주가 금강경 공부의 핵심입니다. 홍인이 혜능에게 금강경을 설법했을 때 ‘응무소주 이생기심’에서 혜능은 깨치게 됩니다. 이 무주의 정확한 이름은 응무소주입니다. 이런 용어의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식을 알면 훨씬 더 수월합니다. 유식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 무주라고 이야기 했을 때, 무주는 아무런 개념이 없어요. 그렇지만 선불교에서 나오는 이런 내용들은 유식을 정확하게 이해를 한다면 그 말뜻과 더불어 그 내용이 갖고 있는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네모 속에는 전생부터 많은 행위를 했던 것들이 전부다 누적되어있고, 축적되어있고, 들어있는 내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앞에 사진이 있는데 사진을 한번 보세요. 눈을 통해서 사진을 보고 귀를 통해서 강의를 듣습니다. 이 귀를 통해서, 눈을 통해서 보고 들었는 것이 내 저장창고에 누적되는 것입니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자기 나름대로 그 장면을 자기 저장창고에 넣어 놓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써먹습니다. 이렇게 강의한 내용들을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강의했는 내용들을 전부다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을 해놓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전부다 저장이 돼요. 지금 이렇게 강의를 듣고 설명한 내용을 우리 머릿속에 저장되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만큼, 생각만큼 저장이 됩니다. 바로 그 저장된다는 것이 내 속에 들어오면 나라는 공장에 이 재료가 들어가면,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에 따라자신의 제품을 만들어서 넣어 놓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육조단경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육조단경 이야기 할 때 내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끄집어 내서 사용하게 됩니다. 머무른다는 내용이 이런 내용입니다. 내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쓰는 것이 바로 머무르는 것입니다. 머무르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얽매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속박입니다. 유식에 보면 속박의 내용이 정확하게 설명을 해놨어요. 나는 행위를 하고 뭔가 생각을 하면서 내 업의 창고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물들기 전의 상태를 청정이라고 하고 내가 행위를 하고 생각을 하고 뭔가를 보고 내 속에 집어 넣어가지고 형상을 만드는 순간 물듬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전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갖고 있는 이 모든 행위에 의해서 내 저장창고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속박이라고 합니다. 마치 주물을 떠다가 만들어놓은 그 제품을 다음에 육조단경을 강의할 때 거기에 들었던 생각을 끄집어 내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머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저장창고의 것을 끄집어내서 쓰는 순간 거기에 얽매이게 됩니다. 거기에 속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주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을 끄집어 내서 쓰면 얽매임이고 이것을 끄집어내서 쓰지 않으면 무주가 되는 것입니다. 응무소주에서 소라고 하는 것은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소입니다. 들어 있는 그것에 머물지 않으면 무주인데 우리의 삶은 들어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쓰는 것입니다. 무엇을 결정하거나 생각할 때마다 항상 과거, 전생에 행했던 저장창고에 들어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현재 생각하고 결부시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마나식, 아뢰야식은 심왕이라고 하며 결정한 것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안식이 작용했고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하고 결부되어 마음에 든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하고 관계하여 뭔가 답을 내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저창창고에 들어 있는 소에 머물러 그것을 끄집어내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머무는 것이고 바로 여기에 있는 것에 얽매여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무주는 저창장고인 소에 있는 것 하고 상관없이, 내 저장창고에 무엇이 들었든 간에 촉, 작의, 수, 상, 사를 거치면서 보는 그 순간 그 의식에서 그냥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냥 생각이 나오는 겁니다. 물든 것을 끄집어내어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답이 나오는 것이 무주입니다. 그것이 응무소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친다는 것은 본래성품을 보고 나면 물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물든다고 하는 것은, 얽매인다고 하는 것은 내가 전생에 행했던 업과 습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무주입니다. 

법성, 불성 이것은 차별이 없다. 하나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다라고 하는 말은 같다는 말입니다. 다 같기 때문에 부처가 뭐냐? 하고 물었을 때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는 답이나 동산의 ‘마서근’ 이라는 답이나 운문의 ‘똥막대기’라는 답이 전부다 다르지만 맞는 답인 것입니다. 그 답은 여기에서 나온 답이 아니고 청정한 본래 자리에서 나온 답입니다. 바로 이것이 무주가 됩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금강경의 구절을 홍인이 설명하는 순간 혜능이 바로 깨친 것입니다. 깨치게 되면 바로 이 청정한 마음자리에서 답이 나오게 됩니다. 본래성품인 청정에서는 자비심 밖에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동체대비라는 것은 우리가 모를 때는 다 떨어져 있습니다. 알고 나면 전부다 하나입니다. 끝도없는 자비심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한테는 매우 관대합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라고 하는 것을 알았으니까 자기한테 하는 것만큼 모든 생명에게 똑같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기와 분별과 모든 것을 떠났기 때문에 자비 밖에 없습니다. 무주가 되면 바로 자비 밖에 없어요.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는 것이다.’ 하고 무상을 설명을 했어요. 이 내용이 지금 육조단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무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조금 전에 사진을 본다고 했습니다. 강의를 듣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강의를 듣고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다 잊어버린 것 같지만 내가 듣고 이해한 것만큼 그 하나의 그림을 내 속에 저장을 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어요. 뭔가 보는 순간, 뭔가 듣는 순간, 냄새 맡는 순간. 그 냄새만 맡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언젠가 한번 맛보고 먹어 봤던 맛있는 청국장 한 그림이 내 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달콤하고 맛있는 감을 먹어본 사람은 감을 보는 순간 정말 감이 맛있겠다고 생각 할 것이고 떫은 감을 먹은 사람은 감을 보는 순간 감에 대한 떫은 맛이 내 사진 속에 저장되어 있어서 감은 떫은데 하고 먹기 싫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눈으로 보든, 귀로 듣든, 코로 냄새를 맡든, 몸에 부딪혔든. 이 모든 내용은 저장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눈을 통하여 보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일정한 형태를 가진, 일정한 모양을 가진 것으로 우리 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저장되어 있는 그 모양을 갖고 생각을 하고 결정을 하고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순간 내 것이 맞다, 네 것이 맞다라고 하는 것은 저장창고에  저장 되어 있는 필름의 한 컷트를 바탕으로 내 생각이 맞다, 내 주장이 맞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자 안에 온갖 모양의 것이 다 들어있어요.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내가 행했던 모든 행위가 한 컷트 사진으로 다 저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끝도없이 끄집어 내서 쓰는 것입니다. 만약 이 저장창고에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성품을 많이 저장해 놓았으면 이 생에 태어나서 공부 하려고 하면 쉽게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 하려고 하는 성품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공부를 쉽게도 하지만 공부 잘하는 쪽의 인연으로 쉽게 찾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에 적당하게 놀고 세월만 보냈던 업의 필름들이 저장되어있다면 공부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공부 잘 할 수 있는 성품을 내가 전생에서부터 크게 저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똑같이 한시간을 공부해도 누구는 1등하는데 30등하는 것입니다.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그 사진 모든 컷트들이 그렇게 작용하게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지금 공부하면 그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하는 데도 확신을 못합니다. 내가 전생에 무엇을 했는지 한번 알아보면 내가 전생에 그렇게 살았구나. 이게 내 전생이구나. 그러니 이 생에, 내 삶도 이런거구나. 알고나면 공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알고나면 그 다음부터는 목숨 걸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저장창고에는 내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행했던 모든 행위가 전부다 하나의 사진 컷트로 저장되어있습니다. 일정한 형태를 가진 것으로 저장되어 있어요. 우리는 항상 저장 되어 있는 그 형상을 모든 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와 생각이 그 형상으로 저장되어 있어요. 색깔도, 맛도, 모양도 모두 그 하나의 형상으로서 전부다 저장되어 있습니다. 염력을 체크 할 수 있는 사진으로 찍어보니까 수행을 잘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한테는 흰 색깔의 사진이 많이 나오고 대충 좋은 대로 평생을 즐기면서 산 사람을 보니까 지옥에 갈 수 있는 검은 색깔의 사진이 많습니다. 이것은 현대 과학이 발달해서 염력도 사진을 찍어서 확인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일정한 모양으로 저장되어 있는데 이 모양을 여의는 것이 무상입니다. 모양을 여의려면 무주가 되어야 합니다. 무주일 때는 내 저장창고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안 써먹습니다. 모양을 여의는 상태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무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념무상이 되면 바로 삼매에 들어서 견성을 한 상태인 것입니다. 모양을 여의면 무상입니다.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하며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를 떠나고 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무념이다. 백 가지 사물을 모두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제거 다 했다고 말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테어남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 상자안에 내가 세세생생 행했던 모든 업이 전부다 여기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상자 안의 것을 끊임없이 끄집어내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평생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형태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물든 내 행위에 의해서 저장되어 있는 그 사진들을 계속 끄집어내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칠식을 우리는 평생 쓰는 것이며,그 모양을 인식한 대로 우리는 사용합니다. 그 모양대로, 인식된 대로 사용하는 것을 우리는 경계에 물든다고 합니다. 경계에 물든다는 것은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업에 의해만들어진 사진을 끄집어내어 쓰는 상태를 말합니다.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고 합니다. 왜 바로 무념이 되어야 하는가? 무념이 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념으로 가지 않는 한 우리는 경계에 물들어 있는, 내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쓰기 마련입니다. 위빠사나나 사마타를 통해서 무념으로 가야 될 이유는 경계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념상태가 되면 바로 내가 물들여 놓은 그 물들은 것을 거둬내고 그 밑의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생에 나는 뭐였던가? 이 몸 받기 전에 나는 누구였던가? 하는 이런 화두를 들면서 생각을 그 한 곳에 집중하는 겁니다. 한 곳에 집중한다는 것 자체가 무념의 상태로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이 생각에서 벗어나는 방법, 이 생각에 물들지 않는 방법입니다. 참선한다고 앉아있어 보세요. 



한 시간 동안 앉아 있어보세요. 끝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단절시키고 막는 방법은 한 가지 생각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끝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한 가지 생각에 계속 모으는 것입니다. 끝도없이 해 볼 것 같으면 생각이 한 군데로 모여요. 모이면 힘이 생겨 뚫고 들어갑니다. 저 창문에 모래를 던져보세요. 저 창문이 깨져요? 안 깨집니다. 그렇지만 큰 돌을 던지면 깨집니다. 끝도없이 일어나는 이 생각이 무분별하게 일어날 때는 아무런 힘도 없어요. 그렇지만 이것을 모아서 하나로 만들어 버리면 모래가 큰 돌이 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한번 푹 던지면 깨지는 순간 도가 터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 견성하여 안보이던 밑에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칠식을 깨고 바로 그 밑에 물들기 전의 것이 올라오게 됩니다. 물들어 있는 상태를 깨뜨리고 나면 물들기 전의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물들기 전의 것은 내나, 도경선생이나, 여래성선생이나 혹은 조금 전 꼼지락 했던 고양이나 이 우주에 있는 자연이나 다 똑같은 겁니다. 바로 원래 있었던 그 하나. 바로 그것은 물들기 전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청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정법신입니다. 


경계에 물들지 않으면 무념이라고 합니다. 무념무상의 상태가 지속이 되기까지는 무념이 산발적으로 끝도없이 일어나는 내 생각을 조금씩 모으다 보니까 한 생각에 모이는 것입니다. 모이면 의심의 덩어리인 의단이 되어 힘이 됩니다. 뭔가 덩어리가 되어서 내속에 딱 들어앉아있어요. 그것이 될 때까지는 우리는 끝도없이 일어나는 이 생각이 멈추지를 않습니다. 그 생각을 제어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뭔가 계속 하다보면 생각이 모아져서 바위가 되는 순간 나한테 훅 덩어리가 생겨버려요. 그대부터 화두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뭔가 이제 하나로 모아져가지고 무념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려요. 그래서 이 공부가 분명히 결과가 안 보이는 거 같지만 우리는 좋아져요. 그 공부 아무리 해봐도 뭔가 결과가 없더라, 이득이 없더라. 하지만 이 세상에 제일 정확한 것은 공부 한 것 만큼 득이 있기 마련입니다. 득이 있습니다. 그 득은 내가 알던, 모르던 계기가 되면 그 득을 써먹을 데가 있습니다. 


무념무상이 되면 무주가 되고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게 됩니다. 제칠식이나 내 생각 위에서 경계를 떠나고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그 생각을 안써먹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떠나는 겁니다. 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 대상에 대해서도 나의 물든 것을 떠났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대상이 되는 경계, 법에 대해서도 생각이 나지 않는 상태가 되며 이것이 바로 무념입니다. 나도 없고, 대상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보이지 않게 되고 저승사자가 잡으러 와도 못잡고 가는 것입니다. ‘공부하다 보면 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는다.’ 는 것은 조금 무념의 상태가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제거해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조금 생각이 안난다고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공부가 충분히 익어 견성을 해야 끝나는 건데 조금 공부한 것은 한 생각 바뀌고 나면 본전치기라는 겁니다. 다시 또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공부라는 것은 충분히 익었을 때 내 것이 되는데 조금 하는 것은 공부가 안돼요. 


 커트라인이라는 것은 묘한 겁니다. 커트라인만 넘어버리면 1등을 하든, 꼴지를 하든 합격입니다. 그것을 못 넘기면 떨어져요. 불합격입니다. 합격하고 불합격은 천지차이인 겁니다. 바로 공부라는 것이 이런 장치입니다. 합격한 거와 같이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공부가 되어버리면 그 다음 생에 태어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단계를 못 넘어버리면 공부했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공부해도 다음 생에 그 커트라인을 넘어서 합격한 것 만큼 하면 이 생에 공부한 것이 남아있게 됩니다. 백 가지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만하고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좀 더 철저하게 해서 무념상태가 이루어져야, 자기 것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커트라인을 넘어선 상태입니다. 합격한 상태입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와서 이 공부를 하느냐?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세요. 공부인연이 지어진 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공부 인연이 그냥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공부하는 인연만큼 좋은 인연은 없습니다. 이렇게 공부할 인연이 주어졌을 때 목숨걸고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무념이 조금 됐다고 자만하지 말고 커트라인에 합격 할 때까지 열심히 그 단계는 넘어서야 되는 겁니다. 


‘무념을 종으로 삼는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만들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니,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무념상태가 되지 못하면 도를 배우는 사람은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무념상태를 이루도록 노력을 하라는 것인데. 도를 배우는 사람은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합니다. 내 속에 저장되어 있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나 외의 대상이 전부 법입니다.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생각이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이 다 법입니다. 그러니까 이 대상을 전부다 쉬도록 하는 것은 내 속에 저장되어 있는 그런 것들을 전부다 쉬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내 자신을 그렇게 못하면서 다른 사람도 똑같이 그렇게 하게 만들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자기가 모른다고 해서 경전에 나오는 법의 내용을 비방하지 마라. 자기가 모를 뿐이지 경전에서 나오는 내용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바로 이 경전들의 내용들을 무념상태로 보면 전부다 진리인 것을,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보니까  경전의 법을 비방하게 됩니다. 바로 내가 무념이 되면 경전이 갖고 있는 그 내용의 본질을 제대로 다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해서 무념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무념이 못되면 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대상도 죄를 짓게 만듭니다.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결국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이 지금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념이 되지 못한, 삼매가 되지 못한, 선정에 들지 못한 미혹한 중생들이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그러니까 우리 앞에서 했던 무념이 되지 못하면 내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들이 전부다 그런 경계 위에 생각을 두는 겁니다.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바로 거기에서 결정 되는 것이 전부다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또 반연하여 끊임없이 이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저장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이것을 무념과 무상의 상태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끄집어내서 쓰면 삿된 견해가 되고 그 삿된 견해가 다시 또 반연해서 끊임없이 부딪히는 모든 것에 번뇌를 일으키고 또 망령된 생각을, 잘못된 생각을 끝도 없이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내 속에 물들어 있는 이 생각을 계속 끄집어내서 씁니다. 우리는 60%, 70% 맞는 것을 100% 맞다고 생각하고 계속 끄집어내어 씁니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쓰니까 삿된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반연해 끝도 없는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또 생기게 되는 겁니다.  염념상속으로 내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이 물들어 있는 것으로부터 생각을 일으키니까 계속 물들어 있는 생각이 일어날 뿐입니다. 번뇌망상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끝도 없이 흐르는 이 중류의 흐름을 끊어야 하고 단절을 시키면 물들어 있는 그 경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되어야만 비로소 바른 것이, 청정한 것이 진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는다. 라는 겁니다.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이 무념상태가 되면 내 자신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일 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한 것이다.’ 무념상태가 되지 않으면 경계에 물들지만 무념상태가 되면 경계에 물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무념과 무상에 대해서 삼매에 들어서 무주가 되는 것은 바로 촉, 작의, 수, 상, 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소에 머물지 않고 바로 나오는 것입니다. 무주가 되는 방법은 깨치고 나면 일만 경계를 본다고 하더라도 이 경계에 물들지 않고 자재한다는 겁니다. 모르면 물들지만 알면 물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모르고 짓는 죄가 알고 짓는 죄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알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모르고 짓는 죄는 끝도 없이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알고 짓는 죄는 내가 그것이 죄라고 아는 순간, 멈춰버립니다. 그러니까 모르고 짓는 죄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알면 멈춰지고 해결이 됩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무주라고 하는 것은 내 속에 저장되어 있는 이 저장창고에 물들어 있는 것을 쓰지 않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이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알고 쓰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모를 때는 끝도 없이 여기에 것을 맞다고 생각하고 끄집어내서 쓰지만 이것을 내가 알 때는 아는 것을 끄집어내서 쓰더라도 아는 것은 여기에 물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를 때는 내가 행 했는 그 행위에 의해서 계속 끊임없이 물들지만 내가 이것을 알고 난 뒤에는 여기에 있는 것에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경계에 아무리 끄집어내서 쓰더라도 자재하다는 겁니다. 알면 경계에 물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끄집어내서 쓰든, 끄집어내서 쓰지 않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 이것을 모를 때는 내가 끄집어내서 쓰는 거만큼 계속 내가 물드는 겁니다. 끄집어내서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고. 끄집어내서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안 끄집어내서 쓰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끄집어내서 쓰더라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경계에. 그러니까 알면 물들지 않는데 모르면 물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성을 한 상태에서는 갖고 있는,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쓰더라도 여기에 내가 물들지 않는 다는 겁니다. 무념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는 여기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쓸 때는 그 끄집어내서 쓰는 것만큼 내가 물들어 버리는 것이며 그 업이 저장창고에 저장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내가 그것을 끄집어내서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저장창고에 저장이 안 된다는 겁니다. 다음 생에 또 그 행위를 일으키는 업의 뿌리가 되지 않는 겁니다. 일 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내가 알 때는 그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그냥 적적합니다. 자재한 그대로입니다. 바로 열반적정할 때, 항상 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유마경에서는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밖으로는 모든 법의 분별을,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지만 안으로 제일의는, 내 안에서 제일의, 첫 째 가는 것은 부동,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을 전부다 끄집어내 써가지고 이 법의 모양들을 잘 분별한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변화가 없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대로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이 무념의 일만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한다는 이 말이나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지만 안으로 제일의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 말하고 똑같은 내용으로 지금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념이 지속되어 삼매에 들면 견성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무념이 지속되면 삼매에 든다. 이것이 바로 움직임이 없는것 같은 극미세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무념입니다. 제팔식을 본다는 것은 지금 일으키는 이 모든 생각을 일으켜서 생각하는 것을 전부다 알아요. 그렇지만 이것의 뿌리에서는 생각이 일어나는지, 무엇이 움직이는지, 요동하는지 감지를 못합니다. 제팔식에 뭔가 보여야 감지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칠식에 싸여 있어 팔식이라는 것을 어떻게 작용을 하고 작동을 하는지는 전혀 몰라요. 무념이 되어 삼매에 든다고 하는 것은 끝도 없이 가라앉히고 가라앉혀서 요동을 없게 만드는 부동의 상태로 들어 갑니다. 많은 생각이 일어나니까 그 생각의 뿌리가, 그 생각이 멈춘 상태가 어떤지 모릅니다. 계속 번뇌망상이 일어나요. 이것을 계속 잠재우고 무념의 상태가 되면 움직임이 없는 것 같은 극미세의 제팔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내릴 수 있는 한계온도까지 끝도 없이 계속 온도를 내려가면 극저온의 상태가 됩니다. 번뇌망상이 일어나면 그 번뇌망상 때문에 바닥에서 움직이는 미세한 움직임을 우리는 포착을 못해요. 그러니까 제팔식, 아뢰야식의 움직임은 모릅니다. 그런데 끝도 없이 온도를 낮춰가요. 이 번뇌망상을 끝도 없이 제거해 갑니다. 우리가 화두를 들면서 한 생각에 계속 모아간다는 것이 결국은 무념의 상태와 삼매 상태로 갈 거 같으면 온도를 끝도 없이 내리는 상황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끝도 없이 온도를 내리면 물질들이 갖고 있는 본질의 미세한 운동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극저온의 상태에서 우리가 물체 고유의 성질들을 알 수가 있어요. 일반적인 내가 지금 일으키는 모든 번뇌망상을 없애고 보니까 원래 있던 그 뿌리에서 움직이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끝도 없는 무념의 상태로 가면 제팔식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입니다. 극미세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무념성태가 되어야만이 가능한 겁니다. 왜 우리가 무념이 되야 하는가?  이제 제팔식을 보게 됩니다. 참선이나 화두를 통하여 정신을 집중하여 무념이 되고 삼매에 드는 것도 바로 우리가 극저온으로 내려가 물질의 본래 물성을 알 수 있는 그런 상황에 도달하는 것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념의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생각을 한 군데에 모아놓으면 이면에 있던 보이지 않던 미세한 극미의 운동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흔적에는 전생도 보이고 다른 것도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제칠식이 요동치는 이 상태에서는 우리는 현재의식 받고, 지금 현재 내가 받은 이 몸뚱이를 갖고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고 그냥 끄집어내서 씁니다. 지금 우리 상태는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쓸 뿐이지 여기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몰라요. 무념의 상태로 간다는 것은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 아는 것이 바로 이 미세운동, 본질, 물성을 볼 수 있는 그 상태에 다다르면 그 극미의 운동이 이생에 포착되지 않았던 전생의 운동이라던가 그 본질이라던가 이런 것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무념무상이 된 것이 바로 무심도인입니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안이비설신의는 나 자신이고, 이 자신의 본래 성품은 자성이고 생성향미촉법은 나 이외의 대상은 법신이고 이 법신의 본래의 성품은 법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들기 전의 것을 자성이나 법성이나 청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아니라 전부다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법성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될 깨달음,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확하게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법성입니다. 불성의 내용은 자성과 법성 두 가지인데 자성은 물들기 전의 청정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번뇌를 소멸시켜 버리면 해탈한다고 합니다. 초기불교에서 아라한의 목적은 바로 해탈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 넘어오면서 더 확대된 불교에서는 자성청정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법성적정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소지장을 소멸하여 열반에 드는 것입니다. 열반적정이 되는 것입니다. 해탈과 열반이 이 불성의 내용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나만 깨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성과 법성을 다 깨쳐야 성불했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자성만 깨치는 순간부터 우리는 견성이라고 이야기해요. 그 단계까지 깊이 들어가야 자성과 법성이 하나라는 것을 알면 신통도 생기고 전부 다 알아지는 겁니다. 견성했을 때 신통이 생기는 사람이 있고 안 생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외명철이 되어 나와 대상이 하나가 되는 순간은 전부다가 이루어집니다. 그게 바로 부처가 되는 겁니다. 부처가 되기 전에 견성은 누구나 다 쉽게 할 수 있어요. 부처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자성과 법성을 다 깨쳐야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자성만 깨쳐도 견성이라고 이야기하고 법성까지 깨치면 더욱더 좋은 것이고. 이때부터 견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성이 청정하면 바로 해탈을 이루고 법성이 적정하면 열반을 이루게 됩니다. 깨친 상태에서는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나도 항상 적정할 뿐입니다. 고요하고 적정할 뿐입니다.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생각 없음도 또한 서지 않는다. 없다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이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함은 두 모양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며 생각함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이며 생각은 진여의 작용인 것이다.’ 무념상태에서 삼매에서 나오는 그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진여의 작용이 되는 겁니다. 이 본체는 그것이 본체이며 바로 우리가 일으키는 그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니까 무념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그냥 그대로 화두이고 진리 일 뿐입니다.  무상을 이루었을 때, 무념이 되었을 때, 무주일 때, 바로 진여는 생각의 본체가 되고 내가 일으키는 그 생각은 바로 진여의 작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여의 작용인 화두는 어느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공통적인 정답이 되는 것입니다. 공개된 답입니다. 누가 어떻게 하더라도 똑같은 답입니다. 내가 하는 답이나 다른 사람이 깨쳐 하는 답은 공개된 비밀입니다. 다 알아요. 혼자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화두를 깨치고 난 다음에 화두문답에 나오는 그 답은 어느 누가 어떻게 하더라도 전부다 정답이 되는 것이 본체에서 나오는 진여의 작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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