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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6강 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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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1,000회 작성일 21-07-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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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강 돈오 


육조단경에서 오조 홍인대사가 혜능에게 금강경을 법문하는 것을 듣고 그 말끝에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는 내용이 돈오입니다. 바로 말을 한번 들음으로써 그 말 끝에 크게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견성했다고 하는 겁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경의 목적인 겁니다. 그러지 못할 때는 선지식을 찾아서 제대로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다음 글은 스티브 잡스가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입니다. 

‘나는 비즈니스 세상 속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그러니까 아마 갈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다 보았다. 타인의 눈에 내 인생은 성공의 상징이다. 어느 누가 보아도 나를 보면 가장 성공했다고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면 내 삶에 즐거움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죽음 앞에 내가 이제까지 쌓은 이 부라던가 이 명성, 이 사회적인 인정 이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 우리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스티브 잡스가 살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이 교훈은 정말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입니다. 삶의 끝에 인연이 다해서 한 줌의 제로 변할 때 훨씬 더 떳떳하게 죽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공부로 말미암아 세상의 어는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 되리라고 확신 합니다. 이것보다 세상에 더 귀한 가르침은 없어요.


매일 아침 108배를 하거나 기도를 할 거 같으면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결과는 우리 속에 쌓이고 누적되기 마련입니다.  했는 것만큼 뭐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도록 참선도 하고 공부도 해야 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돈과 무관한 일입니다. 그 나머지는 다 돈과 연관 된 일입니다.  혜능은 전생에 해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에 그냥 깨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생에서 쉽게 공부가 되는 사람은 전생에 누적되어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바로 깨쳐요. 그렇지만 누적 된 것이 없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가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공부는 죽을 때까지 그리고 내가 인식하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는 항상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집니다. 


돈오라는 말 자체가 깨치는 것입니다. 선불교에서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인 돈오는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언하에 대오하듯이,  바로 오조홍인이 금강경을 해설해가면서 읽어갑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혜능은 깨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하에 대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일초직입여래지. 바로 한 순간에, 한번에 당장 여래의 경지에까지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업장의 덩어리를 뚫고 제 팔식 아뢰야식까지, 본래 성품까지 들어가는 것을 바로 일초직입여래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하에 대오는 선불교에서 표현할 때 일초직입여래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사고는 분별과 직관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루 종일 머리를 굴려가면서 생각하고 하는 것은 대부분 분별입니다. 이러면 나한테 잘될까? 이러면 나한테 이익이 커질까? 하면서 하루 종일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에 바로 언하에 대오하는 것이 직관입니다. 그러니까 화두에서 문답은 묻는 순간 바로 답이 나와야 하는 거라요. 머리 속에서 생각을 하는 것은 제칠식 말라식이 작용해서 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분별이 일어나기 전에 답을 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별이라는 것은 끝도 없이 많은 생각을 하는 사려분별이며, 직관은 반야 직관입니다. 지혜, 정으로서 바로 뚫고 들어가 본질을 보는 반야직관입니다. 식에 해당하는 것이 분별이라고 한다면 직관에 해당하는 것은 공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연기가 곧 공이다. 했을 때, 이 공이 직관으로서 견성, 본래의 성품을 본 것입니다. 연기는 본래 성품에 대한 인식입니다. 똑같은 내용이 시기에 따라 표현이 다를 뿐입니다. 돈오라는 것을 잘 이 이해하기 위해서 분별과 직관, 사려와 반야, 식과 공을 비교해 이해하면 됩니다. 스티브 잡스가 이야기 했던 자기가 평생 써먹었던 이 사려분별에 의해서 부의 끝까지 가봤지만 그것은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을 내가 좀 더 일찍 알고 그것을 추구하고 살았더라면 이 생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고 회고하는 것이 반야직관인 것입니다. 

언하에 대오한다는 대표적인 예로서, 천태 덕소선사를 볼 수 있습니다. 천태 덕소는 891년에서 972년까지 살았던 중국 스님입니다. 육조혜능 이후로 중국은 선불교의 천하로 만들어 집니다. 이제까지 교종 중심의 불교에서 선불교로 이동하는 과정이 바로 육조혜능을 기점으로 이루어져요.  이때 선불교의 선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천태 덕소는 그 당시 견성했다는 많은 선지식을 찾아 다녀요. 그러나 선지식을 찾아 다니면서 한마디 묻고 그 선지식이 한마디 답을 주면 그 답이 자기한테 와 닿지 않았습니다.  50명의 선지식을 찾아 다녔지만 결국은 못 깨우칩니다. 깨치지 못하고 염천이라는 지방의 정혜선사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이 정혜선사에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법을 묻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정혜선사한테 법을 묻습니다. ‘어떤 것이 조원의 일적수입니까?’ 혜능이 살았던 데가 조계산입니다. 지금 선불교를 조계종이라고 하는 원유가 바로 혜능이 살았던 그 조계산입니다. 여기서 조원은 혜능이 살았던 조계산, 일적수는 물 한방울입니다. 조원의 일적수는 무엇입니까? 즉 선불교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선불교에서 추구하고 있는 본래 부처, 견성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었을 때 정혜선사는 그 스님에게 그냥 그 말 그대로 ‘이것이 조원의 일적수이다.’라고 말해줍니다. 멀리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태덕소가 바로 깨쳐버려요. 50명의 선지식을 그렇게 찾아다니면서 분별하고 고민하고 답을 알려고 애를 썼는데도 결국은 깨치지 못했는데 혼자 참선한다고 앉아 있는데 조원의 일적수가 뭐냐고 묻는 그 순간, 이것이 조원의 일적수다 라고 정혜선사가 던지는 순간 바로 그 말에 천태덕소는 견성을 해버려요. 이것이 바로 언하에 대오한다는 말이며 돈오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깨친 천태덕소는 유명한 선장 된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공부가 안된 것이 아니라 결과는 없지만 계속 누적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누적 되있던 공부가 어느 순간 탁 터진 것입니다. 50명의 이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묻고 고민했던 그 결과가 엉뚱한 말 한마디에 터지는 것이 공부입니다. 화두를 들고 있다면 그 들고 있는 화두가 어느 순간 결정적으로 나로 하여금 진리를 보게 해줍니다. 견성을 하게 해줘요. 본래 성품을 보게 해줍니다. 근본 무명을 타파하고 견성을 하는 것입니다. 근본 무념을 타파하면 연기적인 관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억 겁을 내려오면서 내가 행위 했던 결과로 누적되어 있는 모든 업을 깨트리는 순간 물들기 전의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견성입니다. 본래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려고 하니까 뚫고 들어가야해요. 뚫기 위해서 끝도없이 한 군데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을 하려고 해도 한 우물만 죽어라 파다보면 잃기도 하고 손해 보기도 하지만 계속 그 일을 하면 성공해요. 하다보면 물리가 트여 알게 됩니다. 언하에 대오한 겁니다. 우리가 돈을 벌려고 애쓰는데 누가 돈을 법니까? 돈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사람이 돈을 벌게 되어 있어요. 돈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은 물리가 트이기 위해서는 깊게 파고 들어갈 것 같으면 어느 순간 물리가 트여요. 물리가 트이는 순간 돈 벌려고 하면 돈이 벌어져요. 공부를 하려고 하면 공부가 되는 겁니다. 우리의 삶에서 공부하는 것만큼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공부하는 이것이 결국은 내 삶 전체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돼요. 이것으로 말미암아 내 삶의 뿌리를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면 이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물리가 트여 돈을 벌어도 자기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자기 그릇만큼 남아있게 됩니다. 전생에 내가 뿌렸던 내 씨앗들을 다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남아 있는 것은 업인 것입니다. 그래서 도인은 감정이든 재물이든 쌓아두지 않습니다.  


임제선사는 선불교에서 육조혜능 이후로 선불교를 전 중국으로 확산하면서 선불교의 시대를 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선불교의 족보는 초조 달마부터 시작서 이조혜가, 삼조승찬, 사조도신, 오조홍인, 육조혜능으로 이어집니다. 조사는 육조혜능까지이고 칠조 부터는 많습니다. 육조까지만 한 명씩이며 칠조부터는 혜능에서 다섯 명 제자가 나오고 그 제자 밑에 수십 명의 견성한 제자들이 나와팔조는 수십 명이 되어 선의 숲을 이루게 됩니다. 육조혜능 밑에서 남악회양이 있고 남악회양 밑에 중국을 선불교 천하로 만든 일등공신인 마조도일이 있습니다. 부처님 이후 가장 많은 견성자를 낸 사람이 마조도일입니다. 마조도일 밑에서 80명에서 100명 정도 견성한 사람이 나옵니다. 마조도일의 제자가 백장회해입니다.  백장회해 때 비로소 체계화된 선불교가 확립됩니다. 백장회해 밑에서 황벽희운이 나오고 황벽희운 밑에서 임제의현이 나옵니다. 이 황벽희운 밑에 목주도명이라는 제자가 있어요. 이 목주도명은 임제의현을 깨치게 만들고 또 운문문언도 깨치게 만듭니다. 역사에서 나타난 가장 걸출한 선장인 임제의현과 운문문언을 깨치게 한 본장인이 목주도명입니다. 임제의현이 황벽희운 밑에서 밤잠 안자가면서 3년 동안 죽으라고 공부했어요. 목주도명이 ‘너 스승님한테 가서 불법이 뭔지, 부처가 뭔지 물어봤느냐?’ 하니까 한 번도 안 물어보았다 하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던데 가서 ‘한번 물어봐라. 물어보면 단박에 알 수 있을 거다.’ 합니다. 임제가 황벽한테 불법을 물으러 갑니다. ‘스승님 불법의 골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순간, 볼떼기를 30방 얻어맞았어요. 말도 떨어지기 전에 뺨만 실컷 맞고 나옵니다. 며칠 동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며칠 후 목주도명이 찾아와서 ‘잘 말해주더냐?’하고 물으니까 뺨만 실컷 맞고 왔다고 하니까 또 한번 가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갔습니다. 또 가니까 말이 떨어지기 전에 또 뺨만 실컷 맞고 나옵니다. 맞고 나와서도 도대체 왜 말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때리는가. 며칠 후 또 목주도명이 찾아옵니다. 저번에 가서 답 잘 들었나, 잘 해주더냐? 하니까 또 실컷 두들겨 맞았다고 하니 그래도 삼세판인데 한 번만 더 가봐라. 하니까 임제의현은 그렇게 두들겨 맞았지만 또 정말 그럴까 하고 또 갔어요. 또 전번과 같이 두들겨 맞고 왔습니다. 3년 동안 밤잠 안자가면서 화두를 들고 열심히 참선을 했는데, 불법을 물었을 때 그냥 뺨만 실컷 맞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임제는 목주도명에게 ‘저는 스승님하고는 인연이 안 맞는 거 같습니다. 떠나야 되겠습니다.’ 하니까 떠나라고 하면서 이 해안을 따라 가면 조그마한 암자에 혼자 살고 있는 대우선사라는 스님이 계신다. 그 절에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임제는 해안가 내려가면서 두들겨 맞았던 것, 화두를 들었던 것을 생각 하면서 며칠을 걸어서 마침 대우선사가 계시는 그 절에 도착했습니다. 대우가 스승에게서 어떤 가르침이 있었나하고 물으니까 속에 차있던 울분이 터져 스승에게 따귀를 맞았던 일을 넉두리 합니다. 그 순간 임제는 대오를 하고 일초직입여래지에 들게 됩니다. ‘황벽의 불법도 별거 아니군.’ 하면서 대우선사한테 한 마디 합니다. 그러니까 대우선사가 너 뭐 봤노? 그게 뭐고? 하니까 대우 옆구리를 꾹꾹 세 번 찔러요. 그러니까 대우가 깨친 것을 인정하고 너의 스승은 내가 아니고 황벽이다 하면서 황벽한테 보냅니다. 

임제도 황벽 밑에서 그렇게 공부했고 배운 것이 이제 마지막 목구멍까지 차올라 건드리기만 해도 터지는 순간입니다. 그 건들림을 해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매일 한 시간씩 앉아서 참선하는 것도 내 속에 돈오할 수 있는 그런 기운들을 끊임없이 축적시키는 것입니다. 축적시키다 보면 시절인연이 되어 터지는 것입니다. 일초직입여래지라던가 언하에 대오라는 것들이 내가 터지는 순간이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든지 그것이 터지기 직전까지 가야해요. 위대한 과학자의 대발명이 이루어진 것도 평생을 몰두해서 어느 순간 그 결과를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삶도 다 똑같습니다. 


임제의현은 깨달은 사람을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 표현했습니다. 무위진인은 차별 없는 참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임제의현은 무위진인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금강석 같이 빛나지 않는 삶이 어디 있느냐, 어느 누구의 삶이든 최고의 삶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 이것이 바로 무위진인입니다. 

분별을 이해해야만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응무소주 할 때 그 소가 무슨 뜻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기름통에 기름이 가득 차 있을 때는 기름 밖에 안 나옵니다. 우유가 가득 차 있으면 우유 밖에 안 나와요. 여기에 만약 부처가 가득 차 있다고 하면 끄집어내는 것마다 전부 부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번뇌망상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끄집어내어 쓰는 것마다 집착이고 욕망이고 욕심밖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로 채워놓으면 그 통에는 자비 밖에 없습니다. 자비 밖에 없는데 어떻게 살생이 나와요? 원효가 벌레를 죽이는데 옆에 있던 스님이 왜 살생해요? 하니까 내가 하면 살생이 아니다 합니다. 보살에게는 자비 밖에 없어요. 그 자비 밖에 없는 마음에서 어떻게 살생이 나와요? 모든 행위는 전부다 자비 일 뿐입니다. 죽여도 자비이고, 살려도 자비이고 전부다 자비인 것입니다. 

우리가 왜 참선을 합니까? 우리의 삶에 도움이 안 되고 득이 안 된다면 견성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사는 것이 훨씬 더 좋다면 견성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견성을 하고 나니까 내 본래의 성품을 보고 나니까 내 것을 알고 나니까 나에게 자비 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원래 청정한 그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끄집어내어 쓰는 것이 모두 다 자비입니다. 견성을 하고 나면 자비 밖에 없으니까 지옥에 가도 부처고 부처나라에 가도 부처고 어디에 있어도 부처인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견성하지 못하고 무명에 가려 있으면 집착과 탐욕이 내 것인 줄 알고 그것을 계속 끄집어내어 쓰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분별은 내 속에 누적되어 있는 내 업장을 가져다 평생 끄집어내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을 뚫고 들어가서 그것이 쌓이기 전의 것을, 그 업장이 쌓이기 전의 것을 보니까 원래 청정했던 것이 자비인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견성 하고 나면 나한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자비밖에 없습니다. 


그냥 살아도 살아가는 흔적에 삶의 모습이 전부다 들어나게 됩니다. 내 속에 불선이 가득 차 있다면 끄집어 내 쓰는 것마다 불선입니다. 부처나라에 있어도 불선입니다. 성품이 제대로 된 사람이나 선한 것이 많은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불선은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옥입니다. 전쟁 밖에 없어요. 우리는 사바세계에 살면서 극락에서 살 수도 있고 지옥에서 살 수도 있어요. 매일매일 끊임없이 전쟁 하면서 사는 사람은 지옥에서 사는 것이고 매일매일 선으로 가득 채우면서 세상을 편하게 하고 세상에 이익되게 하고 그 생각 밖에 없는 사람은 항상 극락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선만 가득 찬 것이 보살이고 부처인데 공부하다 보면 불선은 점점 줄어들고 선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충 살아도 60점 삶을 살아요. 60점 삶에서 80점 짜리 삶을 살려면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것입니다. 업장 속에서 선이 60%인 사람이 80점이 되려면 내 속에 선이 80% 차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엄청 어려운 것입니다. 이생 죽어라고 공부해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전생에 뭔가 해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공부를 쉽게 잘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경전을 보니까 한번 본 거 같고 쉽게 잘 이해가 되더라, 내가 전생에 좀 봤기 때문에 쉬운 것입니다. 수학. 절대 안 되더라, 왜? 전생에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전혀 안했기 때문에 수학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공부를 했더라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것들이 쉽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보고 듣고 생기는 의식이 바로 현재의식인 육식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내 창고에 들어있는 것과 결부되어 나올 때는 마나식인 제 칠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생에 배우지도 안았는데도 잘하는 것은 저장창고에 그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수년 동안 불교를 통해서 같이 공부를 해왔던 선생님인데 철저한 가톨릭이 모태신앙인 집안에서 태어난 분입니다. 40세쯤 되어 어느 순간 꿈에 자꾸 스님이 나타나고 전생의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평생 그림을 한 번도 그려 본적도 없고 배워 본 적도 없는데 상상을 초월한 만다라를 그리고 유럽에서도 몇 번 전시회를 가지곤 했습니다. 자기는 전생에 티베트 승려였고 그때 만다라를 그렸다고 했습니다. 티베트 승려로서 만다라를 그렸던 전생의 능력이 그냥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전생을 알게 되면 전생에 체험했던 것들이 쌓여있는 제칠식을 알게 되고 그 능력을 자신의 현재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생을 모를 때는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을 1-2% 끄집어내어 쓰지만 전생을 보게 되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을 100% 끄집어내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저 산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알려고 하면 뚫고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습니다. 공부하자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한 생각에 집중해서 반야직관으로 뚫고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뚫고 들어가는 것은 제칠식에 덮여 싸여 있는 무명을 깨뜨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명을 깨뜨리면 제 팔식인 아뢰야식을 보게 되는 겁니다. 본질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돈오하는 순간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눈먼 봉사한테 이 방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하면 봉사가 설명을 할 수 있겠어요? 간혹 소발에 쥐 잡는 식으로 한 두 부분은 맞출 수 있을지 몰라도 정확하게 맞출 수는 없어요. 눈이 있어 훤히 보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보이는 대로 다 알 수 있어요. 이 길을 통해서 나가라고 하면 안 부딪히고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여기 앉아있고 저 사람은 저기 앉아 있는 것은 같은 방에서의 다른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둘 다 맞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가 무엇인가?’ 물었을 때 ‘마삼근’, ‘무’, ‘판치생모’ 하는 것도 다 맞는 답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부처님 당시 왕사성에서 암소 한 마리 때문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세 사람이 죽게 됩니다. 암소 때문에 왜 세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설명이 안돼요. 이것을 풀 수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이 전생에 살아왔던 삶의 흔적들을 보면 왜 이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암소가 비록 이 생에서 연관이 없었지만 자기가 떠받아 죽인 사람을 보는 순간 자기 잠재의식 속에 있었던 원한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뿔로 받아 죽인 것입니다. 인과가 어떻게 형성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보는 순간 상대방한테 원한이 일어나서 그 원한이 얼마나 컸으면 죽였겠어요. 자기가 살생의 과보를 안 당했더라면 그런 원한은 안 일어납니다. 자신도 상대방한테 살생을 당했기 때문에 그 상대방을 보는 순간 그 원한이 상대방한테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누적 되어있던 제칠식이 작동해서 분별심을 일으켜서 그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내가 일으키는 생각이 견분이며, 대상이 일으키는 생각이 상분입니다.  견분에서 내가 일으키는 번뇌장을 깨뜨리면 해탈, 아라한이라고 하고 상분에서 소지장을 깨뜨리면 보리를 이루어 부처와 보살이 됩니다. 

유식삼십송에서 5위100법을 이해하면 불교가 수월해집니다. 그림에서 육식과 칠식 마나식과 팔식 아뢰야식에서 모두 작동을 하는 것은  편행 5개 촉, 작의, 수, 상, 사뿐입니다. 전생에 행했던 업의 저장창고라는 것이 심소법입니다. 혜능이 깨친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히 머무르는 곳 없이 마음을 일으켜라’는 응무소주에서 소는 다름이 아니라 심소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소에 머물지 말고 하는 것이 이 심소법에 머물지 말고 하는 것입니다. 견성한다는 것은 무명을 깨트리고 본래 성품인 제팔식을 보는 것이며, 미세한 움직임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팔식에서의 촉, 작의, 수, 상, 사의 작동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심소법의 저장창고를 거치지 않고  촉, 작의, 수, 상, 사로만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라앉혀서 무념의 상태로 가면 비로소 그 섬광같은, 빛이 지나가는 것처럼 조그마한 움직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 개념이 이해가 되면 견성을 이해하기가 수월해집니다. 우리 중생은 자신이 갖고 있는 업과 결부되어 분별을 합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물었을 때 ‘뜰 앞의 잣나무’했을 때 ‘왜 뜰 앞의 잣나무인가?’ 하는 것을 내가 갖고 있는 업하고 결부되어 ‘왜 뜰 앞의 작은 나무인가?’를 합니다. 견성한 사람은 업과 관계없이 ‘뜰 앞의 잣나무’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업하고 관계없이 일어나는 뜰 앞의 잣나무는 조주가 하던 지금 우리가 하던 천 년 후에 누가 하든 똑같은 답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업하고 결부 될 때는 자기 색깔의 말이 되고 답이 되는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는 것은 견성하고 나니까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더라.는 것입니다. 견성을 한 화두의 답은 자신의 업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 편행, 여기에서만 일어나는, 주고받는 문답이기 때문에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든 똑같은 것입니다. 분별과 직관에서 왜 우리가 직관을 해야하는가? 왜 언하에 대오인가? 하는 것은 이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본질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아집으로 나한테 집착하고 내가 맞다고 생각하고 내가 최고이며 아애. 평생 자기만 좋아합니다. 중생의 속성은 아치, 아집, 아만, 아애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도 자기만 좋아해요. 주위의 가족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도 자기 자신을 더 좋아합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면 돈오라는 개념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법인 제법은 무위법과 유위법으로 나눠어지며 이것을 유식에서는 5위 100법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법이 전부다 유위법이며, 견성성불한 상태에서 보면 모든 것은 무위법입니다. 유위법의 본질을 알고 보면 그것이 전부다 무위법이고 본질을 모르고 그냥 주어진 형상을 볼 때는 전부다 유위법인 것입니다. 유위법을 좀 더 나누면 심왕법, 심소법, 색법, 불상응행법이며, 심왕이 8개인데 전오식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과 육식, 칠식, 팔식으로 8개입니다. 왕은 무엇을 할 때 집행하고 하는 것이 왕입니다. 안,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그것을 나타내고 할 수 있는 대장이 바로 왕입니다. 왕이 집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하에 해당합니다. 이 신하들이 안이비설신과 색성향미촉과 여기에 속하지 않는 무색표를 합하여 색법은 11개입니다. 수 억겁을 살아오면서 누적되어 들어있는 업의 창고가 심소법입니다. 이 창고에는 선한 행위에 의해 쌓여있는 선법과 악한 행위에 의해 쌓여있는 불선법이 들어 있습니다. 


 서언에서 혜능대사가 대범사 강당의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를 주시니 그 때 강당에는 스님, 비구니, 도교인, 속인 등 일천여 명이 있었습니다. 경전이라고 하면 전부다 부처님이 설하신 것입니다. 설하신 것 중에서 아함경과 같은 초기경전은 부처님 직설이며,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은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된 경전들입니다. 육조단경은 600년대에 육조혜능에 의해서 설해진 법문을 기록한 것입니다. 

육조단경에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반야경입니다. 반야경은 대승경전 중에서 가장 방대한 경전으로 600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반야경에서 가장 짧은 경전이 우리가 매일 독송하고 있는 마하반야바라밀경이며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독송하고 반야경의 대표라고 하는 것이 금강반야바라밀경입니다. 마하는 크다는 의미이며, 금강은 깨뜨려지지 않는 의미입니다. 마하든 금강이든 의미하는 것은 단지 수식어일 뿐이고 반야바라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야는 지혜를 뜻하고 바라밀다는 파라미타이며 저 언덕에 이른다는 의미로 ‘지혜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견성한다는 것이 바로 저 언덕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언덕에서 바로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경은 가장 뛰어난 지혜의 완성을 이루는 데 핵심되는 말씀이며 또는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부처님의 핵심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가장 요체이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첫머리에 나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하고 그 다음에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으로 이것이 반야심경의 전부다 입니다. 그다음에는 이 내용에 대한 설명일 뿐입니다. 지혜의 완성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행심으로 즉 선정삼매에 들어 있습니다. 깨달음을 성취한거나 지혜의 완성이나 선정삼매에 들어있는 거나 다 똑같은 말들입니다. 조견오온개공, 존재의 실상인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본질인 진여를 보게됨으로써 존재하고 있는 모든 실상을 알게 됨으로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전부 입니다. 결국 반야심경의 핵심은 선정삼매에 들어서 살자하는 겁니다. 선정삼매에 들어보니까 존재하는 모든 실상이, 이 오온이 전부다 공한 것을 알게 되니까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나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다 아는 것입니다. 견성도 본래 성품을 봄으로서 그냥 아는 겁니다.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알면 믿음은 생기는 것입니다.  불교가 위대한 것은 어떤 것을 어떻게 조작하고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되면 모든 것들을 전부다 알고 바르게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법은 무념을 통해서 견성을 하고 견성을 함으로써 내외명철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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