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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18강 최상승법과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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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290회 작성일 22-05-2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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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강 최상승법과 금강경 


 부처님 당시 한번은 여러 왕들이 회의를 하면서 부처님을 초대했습니다. 음식은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온갖 음악도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밥값은 해야 되니까 여러 왕들에게 묻습니다. 임금님이시여 이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어떤 왕은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연주만 들으면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은 게 없다고 하였고, 또 어떤 왕은 먹는 것이 좋아서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음미하면 이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왕들이 이야기합니다. 부처님께서 이야기를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난 다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하루정도는 행복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음악을 듣는 것이 좋다고 해도 음악만 듣고는 살 수 없는 것이고 또 먹는 것이 좋다고 계속 먹을 수는 없습니다. 한 번, 두 번, 하루 이틀은 행복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행복하기 위해서는 적정이 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적정을 밥값으로 내 놓으셨어요. 우리에게도 이 적정이라는 것이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말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면서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적정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근기는 하루아침에 단박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품은 긴 시간 동안 경험과 삶을 통해서 내 속에 축적된 업장의 내용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축적된 그 능력이 성품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성품의 용량을 근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잘 생각했다고 해서 근기가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 되는데 이 적정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적정입니다. 그래서 근기가 좋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이생에서 잘 살고, 못 살고, 이루고, 못 이루고는 근기의 차이입니다. 학교 다닐 때, 친구는 공부 안 하는 것 같은데 모두 만점입니다. 그 옆의 학생은 밤새워 가면서 공부하는데 시험치면  정답은 다 피해갑니다. 이와 같이 근기가 좋으면 본질도 잘 알 수 있고 이것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안 되어 있으면 밤새워 공부해도 뭐가 뭔지를 모릅니다. 근기는 적정을 통해서 꾸준하게 조금씩 향상되는 것입니다. 부처 될 수 있게 하고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결국 겁니다. 평생을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적정입니다.  

팔만사천의 근본 번뇌가 108번뇌입니다. 염주알이 108개인 것은 108번뇌를 상징한 것으로 이 번뇌를 전부다 소멸하자는 것입니다. 108염주를 돌리고, 절을 108배 하는 기본 구조 체제가 이 108로 되어 있습니다. 이몸의 색, 수, 상, 행, 식에서 수에서는 좋고 나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느낌에는 좋음과 나쁨이 있고 식에서는 고, 락, 사가 있습니다. 고통과 즐거움,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호오와 고락사를 곱하면 6개가 되고 이것이 안이비설신의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36개가 됩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곱하면 108개가 되어 108번뇌가 생깁니다. 108번뇌가 나누어져 팔만사천번뇌가 됩니다. 팔만사천번뇌를 전부다 없애기 위해 경전의 수도 팔만대장경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모든 번뇌의 총 집합체의 수가 팔만사천입니다. 

‘선지식들아 만약 매우 깊은 법의 세계인 반야삼매에 들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의 행을 닦을 것이며 금강반야바라밀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자성을 보아 반야삼매에 들어가게 된다.’ 육조단경을 이루고 있는 근간이 금강경입니다. 육조단경은 자성, 성품, 삼매, 돈오, 견성을 하고 난 후와 견성에 대한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견성을 해가는 과정과 견성을 하고 난 뒤의 상태와 견성을 한 것은 어떤 것이라고 하는가? 이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금강반야바라밀경에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육조단경에 설명해 놓은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고 방대한 내용이 금강반야바라밀경에 있는 것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한 권만 제대로 알면 바로 자성을 보아, 반야삼매에 들어가게 되어 그 공덕이 한량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궁극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마하반야바라밀이며, 이 마하반야바라밀의 근거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니, 금강반야바라밀경만 열심히 잘 독송하면 바로 자성을 보게 됩니다. 

금강경을 제 10분 정토장엄분에 나오는 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이생기심을 봅시다. 색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일으키면 청정한 마음이 일어나며, 그와같이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고 색성향미촉법에 주하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야 청정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심소에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색법은 11개가 있는데 안이비설신으로 나라고 하는 인식의 주체와 색성향미촉으로 인식의 대상 10개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입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무색표라하며 이것과 합해 색법이 11개입니다. 내 업에 축적되어 있는 것을 눈으로 대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는 것도 이것하고 작용해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물들지 않고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청정심으로 본래 성품인 자성인 것입니다. 자성은 물들기 전의 마음인데 우리는 지금 물들어 있는 것을 계속 끄집어내어 씁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물들어 있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물들어 있는 것을 벗어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공부를 통해서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수행하는 방법으로 지혜롭게 집중을 하면 여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혜롭게 집중을 하면 진리를 보게 되고, 통찰하게 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물맛을 모르면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물맛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물을 먹어본 사람은 물맛을 알아요. 물들기 전의 것이 어떤 것인지 보고 나면 바로 그 자성청정이 자기한테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원래 청정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물들기 전의 상태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청정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맛 같은 건지, 꿀맛 같은 건지 모르겠지만 물들기 전의 것을 청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들지 않는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청정이고 자성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인 것입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바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견성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견성에 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아는 것 없이 혼자 다리 틀고 앉아서 이뭣고 아무리 해봐야 어떻게 가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지금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능엄경이나 유식 등을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 선을 하면 가는 길을 알고, 가는 길에 함정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공부가 잘 되는 것만큼 또 마가 따라온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청정이라고 하는 처방전이 있으면 쉽게 청정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 색법에 물들지 않고 근본적으로 마음을 일으키는 청정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면 응무소주 이생기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혜능은 응무소주 이생기심에서 깨치게 됩니다. 우리도 공부를 하면서 도대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집중하는 겁니다. 집중하다 보면 방법이 생겨요. 추운 겨울에 꽁꽁 언 빙판을 한번 뚫어보세요. 계속 파 내려가면 그 얼음이 뚫려요. 뚫다보면 밑에 물기가 올라오고 뚫린 것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느낌이 있듯이 생각을 집중하다 보면 막혀 있던 것이 뚫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까 내가 덮어 쓰고 있는 번뇌망상들이 한 생각에 집중하다 보면 걷어지는 것 같이 훤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되고 맑은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청량한 느낌이 오게 됩니다. 빙판을 뚤고 들어가는 것과 같이 집중하다 보면 나를 둘러싸고 있던 업의 장막들이 번뇌망상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그냥 시원하게 벗겨지는 느낌으로 와 닿습니다. 우리의 인식이 생각을 의식하고, 판단하는 작용이 촉, 작의, 수, 상, 사를 거치면서 이루어집니다. 오로지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것은 바로 촉, 작의, 수, 상, 사만 거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심소의 창고와 결부되지 않으면 내가 쓰는 마음은 쓰는 순간 저장되지 않고 끝나버려요. 이 도표를 이해하시면 공부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금강경 삼십이분 결론의 내용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입니다. 일체의 인연 따라 이루어졌다 없어지는 이 모든 현상은 꿈이며 환상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이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고 느끼면 바로 자성을 본 것입니다. 자성을 본 이런 마음으로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렇게 보고, 느끼면 내 마음에는 자비 밖에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나의 길을 걸어가면 모든 것이 여야하게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느낌이 내 속에서 이루어지고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해탈과 편안이 이루어지고 세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딪힘, 판단, 결정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다 똑같이 겪습니다. 안 겪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겪는데 일어나는 경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누적되느냐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하나의 사건 때문에 자살하기도 하고 누구를 죽이기도 하며 오만가지 사건이 다 일어납니다. 그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나도 태평양에 바람 한줄기 부는 것같이 아무런 흔적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루어야 될 결론은 일체유위법, 인연따라 이루어졌다 없어지는 이 모든 것이 자성을 본 마음으로 본다면 꿈이고 환상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견성이나 삼매는 돈오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딱 깨치는 순간은 돈오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이 깨침이 오는 순간은 돈오입니다. 그러니까 끝도 없이 쭉 이렇게 되다가 어느 순간 탁 터지면서 깨치는 순간은 돈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금강경은 32분으로 분리를 하여 나누었지만 내용은 똑같습니다.  중국의 소명태자가 보기 쉽게 나누어 놓았습니다. 금강경에서 꼭 이해해야 될 내용은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는 응당히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고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부처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해줍니다. 금강경에는 세 분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어떤 사람과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와 보살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교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며,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는 신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견성을 한 사람은 보살입니다. 그래서 공덕을 쌓는 방법은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견성성불하는 방법이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보시에는 물질적인 보시와 정신적인 보시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보시는 돈이나 물건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며 정신적인 보시는 경전 공부를 하거나 수행을 하거나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보시, 경제행위를 통해서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보시,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질적인 보시를 하는 것과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가 정신적인 보시를 하는 것을 비교해보면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가 정신적인 보시를 하는 것이 공덕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서 보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교공부를 제대로 해서 가르쳐주는 것이 더 큰 보시라는 겁니다. 정신적인 보시를 하려면 먼저 내가 알아야 됩니다. 알아야 베풀어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하는 물질적인 보시보다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의 정신적인 보시가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우리는 수행하고, 경전을 공부하고, 불교교리 공부를 해야 내 속이 차게되고 차야 넘칩니다. 넘쳐야 다른 사람한테 베풀게 됩니다. 돈 없을 때는 베풀 수 있다는 생각을 잘합니다. 막상 돈이 생겨 베풀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발동하는 겁니다. 물질에 대한 애착이나 정신에 대한 애착은 똑같은 것입니다. 끝없이 넓은 우주에 가득 찬 보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물질적인 보시이고 금강경에 나오는 한 문장만이라도 읽고, 외워 깨달아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는 것이 정신적인 보시입니다. 금강경 24분에는 공덕을 어떻게 쌓을 것인가? 어떻게 수행해서 부처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비교해 놓았습니다. 28분에 보면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와 보살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금강경에는 24분이나 28분의 내용에 대해 주체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산스크리어로 된 금강경에는 이 두 부분에 대한 내용이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가 물질적인 보시를 하는 것과 보살이 정신적인 보시를 하는 것을 비교해 볼 때, 보살의 정신적인 보시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공덕을 쌓는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보시는 끝없이 넓은 우주에 가득 찬 보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며, 정신적인 보시는 모든 형상있는 것에는 나라는 실체가 없으며 생기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히 알아 깨달아 다른 사람에게 전법하는 것입니다. 보살의 정신적인 보시는 다른 것이 아니라 형상있는 것에는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를 철저하게 깨달아 아는 것이 정신적인 보시의 내용입니다. 보살의 보시는 견성을 하는 것입니다. 28분에 보면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의 물질적인 보시보다 보살의 정신적인 보시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공덕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보살의 정신적 보시를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32분에 보면 보살과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와 비교해 놓았습니다. 보살이 끝없이 넓은 우주에 가득 찬 보물을 다른 사람에게 이 나누어주는 물질적인 보시를 하는 것보다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의 반야바리밀인 지혜의 완성이라는 법문을 깨달아 아는 정신적인 보시가 비교가 안 될 만큼 보시의 공덕이 크다는 것입니다. 바로 반야바라밀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의 정신적 보시입니다. 결국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의 정신적인 보시가 보살의 물질적인 보시와 비교해도 비교가 안 될 만큼 공덕이 크다는 겁니다. 물질적인 보시도 중요하지만 더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금강경의 결론은 공을 깨치는 것이고 깨친 공대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24분, 28분, 32분에서 물질적인 보시와 정신적인 보시를 비교함으로써 누구나 다 공부를 하여 견성하고 부처님의 근본적인 깨침인 연기와 무아를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보시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공을 깨쳐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공을 깨치는 구체적인 내용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되면 바로 공을 깨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구절의 즉비卽非의 논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금강경에 즉비가 36군데 나옵니다. 여래가 말한 착한 법은 착한 법이 아니라 이름이 착한 법이다. 즉비선법, 여래가 말한 선법은 선법이 아니고 이름이 선법이다. 금강경에서 이 즉비의 논리가 모든 내용을 이해하는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것이라고 했다가 그것이 아니고 이름이 그것이라고 하는 논리입니다. 이 부분만 이해되면 금강경을 이해하기가 훨씬 더 수월해집니다. 

23분에 보면 소원선법자여래설 즉비선법 심형선법입니다. 선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여래에 의해 선법이 아니라고 말해졌다. 이름이 선법이다.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성품, 견성했는 상태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실상이고 견성의 내용입니다. 선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선법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선법이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법의 실상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본래 청정한 그 내용을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선법의 실상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냥 선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즉비의 논리를 이렇게 풀어서 이해하면 수월해집니다. 내용을 그대로 전부다 써 놓으면 복잡합니다. 이렇게 복잡하니까 생략하고 선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선법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다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36군데 나오는 즉비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구체적으로 어떤사람,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 보살의 세 부류에게 법을 설합니다. 그 내용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이해해야 됩니다. 

육조단경에서는 최상승법으로 돈오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최상승법은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바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이지지 학이진이언’ 공부를 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생에 공부를 잘한 사람은 태어나면서 아는 ‘생이지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입니다. 절대로 공부했는거 남 안 줍니다. 자기한테 다 그대로 있어요. 공부 안하고도 시간이 지나 안다면 공부할 필요 없습니다. 죽다 깨어나도 몰랐는 것이 시간이 지난다고 알아지지 않습니다. 높은 근기, 큰 지혜의 사람을 위해서 이 반야바라밀법을 설한 것입니다. 만약 근기가 약하고 지혜가 적은 사람이 이 법을 들으면 마음에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경전이 쉽지는 않습니다. 긴 시간동안 금강경도 보고, 묘법연화경도 보고 화엄경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전에서 무엇을 주장하는지 이해하기가 싶지 않을 것입니다. 경전은 고약과 같은 것입니다. 고약은 대부분 뭔가에 싸 놓습니다. 성분을 감추기 위해서 뭔가에 싸놓은 것입니다. 무엇에 둘러 쌓여 알맹이는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냥 읽으면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알면 신뢰가 되고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초기에 설한 아함경은 포장이 없이 직설을 한 것입니다. 그대로 읽고, 들으면 알 수 있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함경을 알고 있으면 최상승법도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최상승법은 반야바라밀법으로 금강경과 같은 대승경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견성성불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전을 보아도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알면 믿음이 생겨요. 

그런데 이제까지 한문으로 독송을 해 오다보니 한글보다 편해요. 한문은 모르니까 그냥 읽으면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말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 보면 지나가버립니다. 우리말로 번역이 잘 되어 있으면 독송하면서 뜻을 바로 알 수 있어서 훨씬 좋습니다. 최상승법은 비유로 설명되어 있고 고약같이, 포장을 해 놓아 읽어도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안 생기는 겁니다. 마치 용이 큰 비를 바다에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용이 큰 비를 바다에 내리면 그 비가 줄었는지, 늘었는지, 오는지, 안 오는지 잘 모릅니다. 이 비가 육지에 내리면 풀잎이 떠다니기도 하고 웅덩이에 고이기도 합니다. 조그마한 것은 흔적이 나타나 바로 보이지만 큰 것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최상승법은 바다에 내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우리가 알기 어렵습니다. 직설은 생각하는 것 없이 쉽게 알지만 파괴력이 약합니다. 책을 보면서 은유나 비유로 되어 있는 것은 그 내용을 알 때는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진짜 대단하다, 이렇게 멋지게 표현을 해 놓았구나 하면서 더 깊은 인식까지 울리게 됩니다. 느낌의 파괴력은 직설하고 비교가 안 될 만큼 큽니다. 직설은 꾸준하게 믿음이 생기겠지만 비유로 되어 있는 것을 번갯불 스치듯이 알게 되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이나 묘법연화경 등의 대승경전은 비유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독송을 함으로써 힘이 생기고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다 보면 이해를 하는 순간이 생깁니다. 그러면 죽다 깨어나도 안 잊어버려요. 다음 생에도 내 것이 됩니다. 조그맣게 흘러가는 강은 낙엽이 조금만 쌓여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렇지만 큰 강은 비가 몇 년 동안 안 와도 그냥 똑같이 흘러갑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를 통해서 깨친 것은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나한테 그런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문자를 떠나고 문자를 빌리지 않음을 알라.’ 대승을 공부하는 사람이 금강경을 설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치면 문자를 떠납니다.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가 대승을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최상승법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근기가 높은 사람이 대승의 사람입니다. 혜능과 같은 근기는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치고 바로 알게 된다는 겁니다. 본래 성품이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서 문자를 빌리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혜능은 공부를 해서 깨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금강경 독송하는 것을 듣고 바로 깨쳐버렸어요. 본래 성품은 스스로 깨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자를 빌리지 않더라도 그냥 깨쳐 안다는 겁니다. 경전을 읽고 외워가지고 이해하고 알아야 깨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칠 수 있는 능력을 그 속에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근기가 높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전생에 공부 다 해서 알고 있는 겁니다. 이생에서 보면 공부를 안 했지만 전생을 통 틀어 볼 것 같으면 공부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김성규라고 하는 사람의 한 생에서의 삶만 볼 거 같으면 이생에 몸 받아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이 형태입니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알고 있는 것은 이생에서 몸 받아서 살았던 흔적입니다. 열심히 노력해 이만큼 이루었는데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본래 성품이 스스로 반야 지혜를 지니고 있어 스스로 지혜를 보고 비추어 전생에 수행했던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김성규가 노력했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면 전생에 닦아 놓은 것이 있으면 그만큼 노력해도 터져 알아진다는 것입니다. 혜능은 분명히 이생에서 공부를 안 했지만 전생 해놓은 공부로 어느 정도 익어있는 것입니다. 지나가다가 돌부리에 툭 치여도 견성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치게 된 것입니다. 경전을 읽어서 터지는 것도 있고 가다가 돌부리에 부딪혀 넘어져 깨칠 수도 있고 그냥 하늘 쳐다보고 있는데 새 지나가는 것을 보고 깨칠 수 있는 것이고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인연이 계합하면 깨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혜능은 지나가다가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쳤던 것입니다. 금강경 읽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혜능은 분명히 깨쳤을 것입니다. 인과법은 내가 했는 것만큼 내가 지었는 것만큼 내 속에서 형성되어 있고 내 것이 되어 있는데 인연이 계합하면 본래 성품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성품은 실제적으로 표면에 나타나 있는 금맥만 보였는데 견성해서 보니까 금맥이 끝도 없으며 어마어마한 이 지구를 전부다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견성한 것만큼 인데 그 밑에 들어가 보니까 어마어마한 금맥이 있는 것입니다. 본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깨치고 나니까 어마어마한 세계가 그대로 알아지더라는 것입니다. 

내외명철이 되면 나와 대상이 두 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본래성품은 하나입니다. 나와 대상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니까 그냥 아는 겁니다. 김성규는 배가 아픈데 양선생님은 배가 아픕니까? 양선생님이 배가 아픈 것은 몰라요. 그렇지만 내 배가 아픈 것은 압니다. 분리가 되어 내 것만 알아요. 나와 대상이 하나 일때는 내 것을 알 듯이 전부다 알게 됩니다. 내외명철이 되면 세상은 온통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대로 다 와닿고, 전부다 아는 겁니다. 신통이 그냥 생겨버려요. 나 외의 대상의 뜻을 알고 생각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니까 신통이라고 하는데 그 능력이 그냥 생겨버립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몸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기운을 외부에 이 우주에 빼앗깁니다. 훨씬 더 몸이 힘이 들어요. ‘그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모든 초목과 모든 유정, 무정을 다 윤택하게 한다.’ 원래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와 강에 있는 물이 온도가 올라가면 수증기가 되어 하늘에 올라가고 구름이 되었다가 비를 뿌리는 것을 용왕이 끄집어 올려 비를 뿌림으로써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이 있는 초목부터 시작해서 유정, 무정에게 그 비를 뿌림으로써 다 윤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를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초목부터 시작해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게 골고루 다 베푼다는 겁니다. 비를 뿌림으로써 전부다 베푸는 것입니다. 모든 물의 흐름이 다시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 들여 한 몸으로 합쳐지는 것과 같나니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본래 성품을 깨치기 전에는 전부다 분별로 나눠져 있지만 깨치고 나면 하나이고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네 것, 내 것이 다 나눠져 있습니다. 나눠져 있는 이것은 우리가 아직까지 깨치지 못한 중생의 상태이고 이것을 깨친 반야의 지혜가 생기면 모든 물이 바다에 흘러 하나가 되는 것처럼 하나일 뿐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생기기 전에는 분리가 되어 있는 것이 반야의 지혜가 생겨서 견성을 하게 되면 전부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한 몸이니까 그냥 알아지는 것입니다. ‘근기가 작은 사람은 단박에 깨치는 이 가르침을 들으면 마치 근성이 작은 대지의 초목이 큰 비를 맞고 모두 다 저절로 거꾸러져 자라지 못함과 같으며 작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이와 같다.’ 큰 근기의 사람은 단박에 깨치는데 근기가 적은 사람이나 근성이 약한 사람이나 능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들어도 모릅니다. 조그마한 나무나 초목들은 비를 맞고 거꾸러지는 것과 같이 근기가 약한 사람은 최상승법을 듣고 자기 것인 것처럼  흉내 내다가 바로 거꾸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최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을 공부하면 됩니다. 최고 좋은 공부가 뭔지 모를 때는 근기에 맞는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절에 가면 염불이 제일 좋으니 염불해라. 기도가 제일 좋으니 기도해라. 그냥 앉아서 관세음보살만 염송하라고 합니다. 어떤 절은 참회가 제일 좋으니 절을 하라고 합니다. 어떤 절은 참선을 하라고 합니다. 자기 근기에 맞게 본인이 한 번 체험해 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 상대방의 근기에 맞춰서 가르쳐 줄 수도 있습니다.  참선을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바로 참선을 시키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면 참선을 할 수 있게 틀을 만드는 공부를 시킨 후에 참선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있으면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차별이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곧 깨치지 못하는가?’ 육조단경에서는 누구든지 바로 깨치는 돈오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긴 시간을 공부하면서 깨치지 못하는가? 단박에 깨칠 수 있는 법을 설하는데도 깨치지 못하는가?  삿된 소견 때문에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공부하려고 해도 공부가 잘 안돼요. 그것은 내 속에 축적되어 있는 삿된 소견의 장애가 너무나 중첩되어 있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에 그냥 생각으로는 안 없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공부했다 싶어도 그 다음날 보면 똑같은 상태가 됩니다. 번뇌망상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나한테 축적되어 있는 뿌리가 깊은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을 하고 나서도 구생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번뇌는 제8지 보살인 부동지에 가야 없어집니다. 내가 갖고 있는 번뇌가 견성을 하고 나면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견성을 하고 나서도 전생의 뿌리 깊은 습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을 하고 난 다음에도 보림을 하는 것입니다. 보림을 통해서 전생에 익혔던 그 습을 소멸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제 칠지 보살까지 가야만 구생혹이 없어집니다. 그만큼 전생부터 갖고 있는 번뇌의 뿌리는 깊습니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큰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습니다. 요지부동입니다. 해가 안 나타납니다. 엄청난 큰 바람이 불어서 구름을 밀쳐내야 해가 나타나는데 그러지 못하는 한 해는 구름에 가려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번뇌의 뿌리는 깊고 깊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보면 내가 공부를 잘하는지, 못 하는지 잘 모릅니다. 내가 시험을 잘 쳤는지, 못 쳤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공부 잘 하는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정확하게 내가 시험 잘 쳤는지, 못 쳤는지를 압니다. 공부를 잘 못하면 커트라인에 내 점수가 접근했는지 쳐졌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가 공부를 잘 하면 커트라인에 접근했다, 1점 차로 내가 된다, 1점 차로 떨어진다를 정확하게 압니다. 번뇌의 뿌리가 깊어서 잘 모르지만 어느 정도 번뇌의 뿌리를 솎아내면 그때는 상황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뭔가 탁 트인다, 머리에 덮어 쓰여져 있는 것이 벗겨지는 것 같고, 모든 것이 알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옵니다. 견성을 해서 100% 확실하게 벗겨지지 않더라도 계속 집중하다 보면 그 집중하는 힘에 의해서 공부가 열리게 됩니다.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공부한다고 해놓고 공부를 못하는 겁니다. 지혜로운 집중, 이것이 공부의 처음이자 전부 입니다. 집중한다는 것은 끝도 없이 자기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고 자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은 미혹하여 마음이 자꾸 밖으로 향하게 됩니다. 마음을 닦는다고 하면서 밖으로 향하고 부처를 밖에서 찾을 때는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번뇌망상이 하는 작용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대응하는 방법이 집중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공부가 좀 익어야 생각이 집중이 되었구나, 번뇌 망상이 덜 일어났구나 하는 것이 보입니다. 

번뇌 망상을 없애는 묘약은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집중하는 것만이 번뇌 망상을 깨트리고 자성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자성을 보면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며 오고감에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어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어서 마음으로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경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 돈오해서 견성한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아는 것이 돈오해서 견성하는 것입니다.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고 오고감에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어,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는 이런 마음이 되는 것은 자성을 보면 그냥 이런 마음이 됩니다. 결국 이 마음이 반야바라밀경과 더불어 차별이 없으며 자성을 보면 누구나 다 똑같은 것입니다. 내 자성, 네 자성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자비 밖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끝도 없는 자비심이 우주를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냥 마음으로 일으키는 자비심이 아니라 자비가 넘쳐나게 됩니다. 본래 성품, 견성을 하면 그 성품의 내용이 자비입니다. 자비가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지혜입니다. 공부하면 자비가 익어야 되고 자비가 터져야 하고 내 속에 자비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심, 이것은 끝도 없는 분별과, 이기심은 공부를 하는 척하는 것이지 공부가 되어있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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