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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19강 견성과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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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394회 작성일 22-05-20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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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강 견성과 집중  


오늘은 부처님의 출가일로 불교 4대 명절 중에 하나입니다. 인도에서 숫자 8은 좋은 것을 뜻합니다. 부처님 탄신일은 4월 8일이고, 출가일이 2월 8일이고, 성도일은 12월 8일이고, 마무리 하는 열반일만 2월 15일입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년도는 B.C. 624 입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출가일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열반일입니다. 출가에서 열반까지 일주일동안 정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은적사에서 이 일주일동안 매일 승만경을 강의하고 사백배하며 회향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사진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부처님의 16살 때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 고행상은 출가 하신 후 6년 고행 중에 5년 째 되던 그때의 사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때를 회상하며 그 전에도 이후로도 나와 같이 고행을 한 사람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목적을 향해서 이루려고 하는 내 의지가 확실하면 언젠가는 꼭 이루어집니다. 


육조단경 16장에 견성에 대해서 돈오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본래 성품을 보자는 것입니다. 모든 경서 및 문자와 소승과 대승과 십이부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이런 것들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내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며 일체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이나 만법도 내가 있음으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이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본래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견성에는 나의 본래 성품은 자성이고 법의 본래 성품은 법성입니다. 견성하는 내용에는 자성을 보고 견성하는 경우가 있고 법성을 보고 견성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성에는 자성과 법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견성을 의미할 때는 자성을 보면 견성이라고 합니다. 법성까지 보면 내외명철이 되고 철저하게 깨쳐 부처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견성이라면 많은 수행자가 견성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을 했지만 어떤 분은 목적을 이루었고 또 어떤 분은 목적지까지 못 가기도 합니다. 못 간 사람은 다음 생에는   쉽습니다. 혜능의 경우도 전생의 공부가 있으니까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쳤던 것입니다. 지금 가고 있는 이 모습이 이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에도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극복하고 넘어가야 그다음 문제가 전개되므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견성이라는 것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면 견성하게 됩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끝까지 견성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으면 되겠습니다. 오늘은 이 땅에 견성을 한 많은 분이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견성을 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견성을 하게 되면 분별심, 번뇌망상, 의혹, 의심 이런 것이 전부 다 해결됩니다. 우리의 번뇌에는 분별혹과 구생혹이 있습니다. 견성하게 되면 분별혹은 그냥 없어지지만 억겁의 업에 의해서 생긴 구생혹은 견성을 하고 끊임없이 보림하여 견성의 파이가 단단해져야 없어지게 됩니다. 이생에서의 습은 공부를 해서 견성해서 깨치면 번뇌망상이나 분별은 없어집니다. 그러나 까마득한 전생부터 쌓인 습은 견성해도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묵은 때가 낀 냄비를 한 번 쓱 씻는다고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벗기고, 아무리 벗겨도 잘 안 벗겨집니다. 마지막 남아 있는 그 때를 벗기려고 계속 끊임없이 애를 쓰는 것이 보림을 하는 것입니다. 견성하고 난 다음에도 끊임없이 계속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닦아야 묵은 때가 벗겨집니다. 그래서 구생혹까지 없어져야 번뇌망상이나 분별이 완전하게 없어진 것입니다. 견성했다고 해도 번뇌의 불씨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불씨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불을 껐다고 생각하고 퇴근했는데 다음 날 보면 다시 불이 붙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없애지 않으면 구생혹은 끝까지 남아있습니다. 

혜능은 견성을 두 번 합니다. 나무 해오다가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한 번 깨칩니다. 금강경을 독송한 선비를 찾아가 방금 읽은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 금강경이라고 하며 황매산에서 홍인대사가 이 경전을 가르친다고 일러줍니다. 혜능은 홀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 놓고 오조홍인을 찾아 갑니다. ‘부처가 되고자 찾아왔다’고 하니 ‘북쪽 오랑캐가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합니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지만 부처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합니다. 오조홍인이 시키는 대로 몇 개월 동안 방아를 찧고 일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홍인이 혜능을 불러서 금강경을 설해줍니다. 홍인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설할 때 혜능은 또 깨치게 됩니다. 혜능은 홍인한테 인가를 받고 충분히 수행을 익히고 보림을 하고 네가 법을 펴는 시기가 무르익으면 그때 법을 펴라고 하며 야밤에 떠나보냅니다. 그래서 혜능은 무려 14년 동안 보림을 합니다.  사냥꾼 속에 묻혀 있기도 하고 혼자서 수행하기도 합니다. 만약 14년 동안의 보림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말이 갖고 있는 피상적인 그 의미대로 이해를 하고 받아드리면 육조단경의 의미가 훨씬 떨어져 버립니다. 철저한 보림을 거쳐 결국 14년 후에 인연이 무르익어 법성사에서 첫 법문을 하게 됩니다. 혜능은 14년의 보림을 통하여 분별혹 뿐만 아니라 구생혹까지 완벽하게 없앤 상태에서 선불교를 새로 세우는 상황을 연출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견성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남악회양이나 향엄지한의 견성의 순간은 드라마틱하게 전해져옵니다. 누구나 공부가 충분히 익으면 어떠한 순간이나 계기를 만나 견성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경전에 해박했던 향엄지한이 하루는 스승 위산영우에게 ‘부모미생전, 이 몸 받기 전 너는 누구였는가?’는 질문을 받고 탁 막혀버립니다. 경전을 찾으며 한달을 씨름해도 결국 해답을 얻지 못합니다. 스승에게 답을 가르쳐달라고 애걸해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결국 이생에서는 수행의 인연이 없다고 탄식하며 절을 떠납니다. 3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다가 하루는 남양혜충의 부도탑에 이르게 됩니다. 풀만 무성한 부도탑을 청소하다가 기왓장을 던졌는데 그 기왓장이 대나무에 가서 탁 부딪칩니다. 부딪치는 ‘딱’하는 그 소리에 순간 생을 포기하고 방랑생활을 하게 했던 ‘부모미생전, 이 몸 받기 전에 나는 누구였던가?’ 화두가 터져버리고 깨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불교는 구한말 경허스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경허스님 밑에 뛰어난 제자 만공, 수월, 혜월 세 명이 나옵니다. 만공은 가득찬 달이며 혜월은 지혜로운 달이며 수월은 물같은 달입니다. 수월스님은 세속 공부가 짧아 글씨도 모르고 공부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천수경 읽는 소리를 듣고 그냥 외우는 겁니다. 하루는 저녁 공양을 지으면서 천수경을 계속 독송하다가 밥을 다 태워버립니다. 스승이 수월에게 제대로 천수경을 한번 해보라고 합니다. 수월은 일주일동안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도 않고 천수경에만 오로지 몰두합니다. 여기서 수월은 무엇이든 한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는 불망념지의 경지를 얻게 되고 평생 잠을 조복 받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을 얻게 됩니다. 수월스님은 천수경 다라니로써 깨친 분입니다. 수월스님에게 도를 닦는 것이 무엇인고? 하고 물으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라고 대답했습니다. 공부하고 도를 닦는 것이, 참선하는 것이 마음을 모으는 겁니다. 수월스님이 군말을 붙이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궁극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별거 아니여.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해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 거여.’ 마음만 모으면 되는 겁니다. 마음을 모으는 가장 좋은 방법이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염불을 해도 염불하는 이놈이 누구인가?로 귀착되며 경전을 보아도 오온이 공하다 하면  왜 오온이 공한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화두를 드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전생에 나는 뭐였는가? 하는 이 한 생각에 마음을 모으는 제일 좋은 방법이 화두입니다. 화두는 어떤 문제점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나는 뭐였던가?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기 가장 보편적이면서 쉽습니다. 누구나 다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갖고 계속 그 생각에 집중을 해야 되는데 방법이 안 쉽습니다. 전생을 생각하면 계속해서 많은 사건이 생각나기 때문에 한 생각에 깊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얼 해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 거여.’ 마음만 제대로 모으면 됩니다. 그 한 생각 밖에 없어야 하는 겁니다.  화두를 끝도 없이 들다 보면 그 생각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사무쳐 내 가슴 속에 하나가 쾅 맺혀야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어 가슴에 하나 쾅 맺혀서 그것이 내 것이 될 때까지 들어야 합니다. 화두를 들면 들렸다가 안 들렸다가 끝도 없이 반복합니다. 하다보면 이 마음이 모이는 것입니다. 마음만 잘 모으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화두를 들면 가장 쉽게 마음을 모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내 생각을 한 군데 집중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화두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화두에 접근을 해보았습니다. 팔정도의 마지막이 정념과 정정입니다. 정정을 하지 않고는 견성을 할 수 없습니다. 견성하려면 정념과 정정을 해야 합니다. 지혜롭고 집중을 해야합니다. 삿된 방법으로도 마음을 모을 수 있습니다. 도둑질 할 때 열쇠에 집중하다 보면 열쇠 따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삿된 방법으로도 마음을 모을 수 있지만  이렇게 해서는 견성할 수 없습니다. 삿된 방법으로는 기술은 터득할 수 있지만 바른 마음을 모을 수는 없습니다. 수월스님은 천수경 다라니로 힘을 얻어 일차 견성하고 난 다음, 스스로 이뭣고?라는 화두를 갖고 확철대오를 한 것 같습니다. 

경허스님은 마음을 모으는데 제 일인자가 수월이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수월은 평생 물속의 달과 같이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산 사람입니다. 혜월스님은 가장 지혜로운 달입니다. 

경허스님이 세 명의 제자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제자를 혜월스님이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혜월스님은 경허스님이 ‘즉심시불’ 하는 말을 ‘짚신이불’로 들었습니다. 스승님이 하신 말에 한 점의 의심도 없이 그날로부터 ‘짚신이 왜 불인가?’는 화두를 3년 동안 들었습니다. 스님은 짚신을 잘 쳤습니다. 매일 하는 일이 짚신 치는 일이었습니다.  ‘짚신이 왜 불인가?’하는 화두를 들고 매일 짚신을 쳤습니다. 하루는 짚신을 치다가 매듭에 걸리는 순간 화두가 터지게 됩니다. 무명을 깨트리고 견성을 하였습니다. 

깨치고는 경허스님을 찾아갑니다. 마침 경허스님이 편안하게 쉬고 계시는데 스님, 스님 하면서 혜월스님이 법거량을 합니다. 경허스님한테 묻습니다. ‘스님, 스님 관음보살이 북으로 향한 뜻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경허스님이 무슨 소리인지 잘 못 들었는데 다시 한 번 해보라고 하니까 ‘스님 관음보살이 북으로 향한 뜻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경허스님이 그거 말고 또 하는 겁니다. 그거 말고 또 물을게 뭐가 있느냐? 다른 것을 물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 말고 또’하니까 혜월스님이 그냥 주먹을 쥐고 손을 들고 딱 서 있었습니다. 경허스님이 ‘그것 말고 또’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겁니다. 한참 있다가 문을 열고 나와 보니까 혜월스님이 바깥에서 주먹을 쥐고 서 있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바로 인가를 해줍니다. 그러니까 화두에 대한 이런 문답이 오고가고 정확한 답을 서로 주고받아야 견성한 것에 대한 확인도 되고 인정이 됩니다. 혼자서 견성은 할 수 있지만 이런 과정이 없으면 견성한 마음을 사용할 줄 모릅니다. 확철대오 하지 못한 견성으로는 이 문턱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이 문턱만 넘기면 큰 소리 치는 확철대오로 발밑에 스프링을 달은 것처럼 현 상황을 뛰어넘게 됩니다. 이생에서 한 번은 이 문턱을 뛰어넘어야 해요. 혜월스님은 자기의 깨친 마음의 상태를 확실하게 경허스님한테 보인 것입니다. 자기가 깨쳤기 때문에 거꾸로 혜월스님한테 물었고 그리고 다시 경허스님이 또, 또 했을 때, 혜월은 정확하게 답을 한 것입니다. 

경허스님은 만공스님이 가장 덕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제 때, 조선불교를 살리고 오늘을 있게 한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스님이 만공스님입니다. 만공스님은 이 부분에 기여를 했고 혜월스님은 법이나 도로써 크게 기여를 했고 수월스님은 수행자로서의 자취도 없이 한 평생을 살다간 수행자로서의 귀감을 보여주었습니다. 

혜월스님은 이 세상 어느 누구 보다도 천진보살로 한생을 사신 분입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계산을 하면서 사신 스님입니다. 혜월스님은 몇 년 동안 노력하여 산을 개간하여 비옥한 논으로 만들었습니다. 밤에는 참선을 하고 낮에는 산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통도사 뒷산에 논을 개간해 놨더니 소출이 많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 논을 보고 탐이 나서 혜월스님께 시중 가격의 30프로도 안되는 가격에 팔아라고 하니 혜월스님은 두말하지 않고 팔았습니다. 논 세 마지기를 한 마지기 값으로 팔았던 것입니다. 저녁에 제자들에게 논을 팔았다고 자랑을 합니다. 제자들이 마을 사람들이 스님을 속였다고 하니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논에 내가 짓든 마을사람들이 짓든 소출은 똑같이 나오지, 나는 또 산을 개간하면 소출이 더 많아지니까 다 덕을 본거지. 마을 사람들은 땅이 생겼고 나는 돈이 생겨 다 좋아졌잖아.’

오늘이 부처님 출가일입니다. 우리도 오늘 출가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도록 합시다. 


한암스님은 견성을 네 차례나 합니다. 일차적으로 견성을 하고나면 평생 수행에서 물러나지 않는 득력을 얻게 됩니다. 이 이상의 다른 삶은 없다는 확고한 확신이 생깁니다. 확신이 서고 나면 세세생생 살아가더라도 어떠한 삶이 되더라도 자기가 걸어가고 싶은 삶을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자기 업과 습대로 살아갑니다. 경전을 보고 강의를 하며 이렇게 사는 것도 전생에 익힌 습인 것입니다. 많은 경전을 보면서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견성성불도 경전을 떠나서는 없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는 견성성불을 할 수가 없어요. 먼저 내 속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채울 때, 제대로 된 견성성불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구체적인 경전 내용을 공부하지 않고 다리 틀고 아무리 앉아있어 봐야 목적지도 없이 가는 배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인연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운입니다. 이것은 공부에 대한 확신이 생겨버리면 알게 됩니다. 

한암스님은 경허스님이 부러워한 수행자입니다. 경허스님에 대해서 싫다, 좋다를 분명하게 표현한 스님이 한암스님입니다. 경허스님이 한암스님을 한 철 같이 수행하며 살자고 해도 한암스님은 냉정하게 뿌리칩니다. 수행에 걸림돌이 되고 바르지 않는 것을 평생 안 하신 분입니다. 걸림이 없이 사신 분의 귀감은 수월이지만 수행자로서의 최고의 귀감 중에 한 분은 한암입니다.  ‘말 잘하는 앵무가 되기 보다는 차라리 천고에 말이 없는 바위가 되리라.’하시면서 종정을 그만두고 오대산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시는 오대산 밖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두 남쪽으로 피난을 갔던 6.25 때도 상원사를 떠나지 않고 지켰습니다. 상원사가 6.25때 불에 안 타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 한암스님의 은공입니다. 한암스님 혼자서 상원사를 지켰습니다. 스님은 중이 절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는가? 하면서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고 했습니다. 상원사를 북한에서 불을 태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남한에서 북한이 군사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불태우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상원사를 불태우라고 명령을 받았던 대위가 상원사에 갑니다. 다 피난가고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법당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스님 한 분이 앉아 계신 겁니다. 스님, 지금 저희들은 군사작전상 이 절을 불태우려고 왔으니 밖으로 나오시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은 한암스님이 처음에는 수행한다고 편한 승복을 입고 있었는데 다시 법복을 차려입고 법당으로 들어가 ‘대위 불을 지르게. 자네가 그 사명을 받았다면 자네는 군인으로서 이 절에 불을 질러 없애게. 나는 이 절을 지키는 스님으로서 이 절을 지키는 것이 내 임무네 하면서 법복을 입고 앉아 불을 지르라.’고 합니다. 아무리 말려도 스님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네는 자네 일하고, 나는 내 일하는 거라는 겁니다. 결국 몇 시간을 설득하다가 대위가 생각한 방법이 대웅전 문을 뜯어서 태웁니다. ‘스님, 저는 군인으로서 그냥 갈 수는 없고 대웅전 문이라도 태우고 가겠습니다.’ 하면서 문을 태우고 갔어요. 그래서 상원사가 6.25때 불에 안 타고 지금 그 옛날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6.25가 끝나고 피난 갔던 스님들이 올라 가보니까 스님이 법당에서 좌선한 자세로 열반에 든 좌탈입망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사진이 그때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평생 수행자로 산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경허스님이 한암스님과 김천 수도암에서 해인사로 넘어 가는 중이었습니다 

한암스님 밑에 탄허스님, 보문스님 두 분의 제자가 있습니다. 한암의 경맥은 탄허로 내려오고, 선맥은 보문으로 내려옵니다. 팔만대장경을 다 외웠다고 할 정도로 살아 있는 보물이었던 탄허스님입니다. 출가하여 한암스님 밑에서 한철만에 깨친 분이 보문스님입니다. 대구 앞산에 있는 보문사도 초우스님이 보문스님을 존경하여 은혜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절입니다. 수행자로서는 최고라고 인정하는 분이 바로 보문스님이었습니다. 

 최근세에 우리 한국불교 역사상 이렇게 자탈임망하신 분은 아마 한암스님이 처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 후로도 많은 스님들이 계셨지만 과연 그 분들이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정말 수행자로서 떳떳하게 돌아가셨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어요. 수행자는 수행자답게 마무리를 할 수 있어야합니다. 철저한 자기의 삶의 결과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수행자의 삶이든, 우리의 삶이든 다 똑같습니다. 수행자의 단면을 통해서 이것이 남의 삶이 아니라 나도 이 길을 걸어가야 될 삶이 아니겠는가? 한 번 생각해봅니다. 김천에 있는 수도암은 청암사에서 산길로 계속 올라가면 있습니다. 말은 수도암인데 보통 큰 절만큼 규모가 크고 좋습니다. 수도암에서 보면 가야산 정상이 연꽃모양으로 일몰 때는 붉게 물들어서 진짜 연꽃으로 보입니다. 김천은 대구에서 가깝기도 하고 또 그때  선원장스님이 또 제가 또 굉장히 좋아하시는 분이라서 토요일에 가장 많이 갔던 곳이 수도암이었어요. 이 수도암에서 한암스님이 하룻밤을 묵고나서 다음 날, 경허화상을 따라 합천 해인사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경허스님이 스승뻘이지만 두 분이 매우 사이가 좋아요. 그러니까 경허스님이 볼 때는 한암스님이 부러웠고 한암스님이 경허스님을 볼 때는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두 분은  관계가 좋으면서도 묘해 평생 한 번 같이 안 살아요. 살자고 하는데도 한암스님이 거절을 합니다. 문득 경허스님이 한암스님에게 ‘고인이 이르기를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가네.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네. 이것이 무슨 뜻인가?’하고 묻습니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데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는 유명한 화두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자 한암스님이 ‘물은 진이요, 망입니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경허스님께서 이치로 보면 그럴 수는 있지만 물은 밤낮으로 흘러도 흐르지 않는 이치가 있고 다리는 밤낮으로 서 있어도 서 있지 않는 이치가 있는 것이네. 하며 설명을 해줍니다. 그러자 한암스님이 다시 여쭙니다. ‘일체만물은 시작과 끝, 본과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마음은 탁 트여서 처음과 끝, 본질과 말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 이치가 결국은 어떠한 것입니까?’ 하고 다시 스님한테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원각경계이다. 원각, 깨치고 난 경계다. 경에 이르기를 사유심으로 여래의 원각경계를 헤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반딧불로써, 우리가 생각하는 것으로서 깨달음, 견성한 그 세상을 헤아리고자 한다는 것은 반딧불로써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끝내 태울 수가 없다. 아무리 태우려고 해도 태울 수가 없고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견성하지 않는 마음으로 견성한 마음을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알려고 하면 할수록 머리만 더 아픕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여래의 원각경계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까 ‘화두를 들어서 계속 참구해가면 끝내는 원각경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공부는 의문과 앎을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익어가는 것입니다. 일본 선불교의 조동종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매일 참선하고 참선을 마치고 나면 거기에 대해서 스승이 묻고 제자가 답을 합니다. 이런 문답과 확인 과정을 끝도 없이 거칩니다. 공부에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 


끝도 없이 마음을 모으다 보면 무념과 삼매에 듭니다. 무념상태가 지속되면 삼매에 들고 깨쳐져요. 깨치고 난 다음에는 끝도 없이 삼매를 지속적으로 유지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집중하다 보면 그 집중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바로 무념에 들어가게 됩니다. 무념에 들어가게 되면 던진 기와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에도 깨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사들이 깨치는 것은 무념이 지속되다 어느 순간 딱 깨치게 돼요. 이것을 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니까 기와를 던졌는데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에 깨쳤다, 낙엽 떨어지는 순간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깨쳤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모아 무념에 이르러서 그 무념이 지속되다 보면 깨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무념에 들 수 있도록 생각을 끝도 없이 모을 수 있어야 돼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집중하는 것입니다. 집중하는 능력으로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한다, 교수를 한다, 의사를 한다, 판검사를 한다, 사장을 한다는 것은 집중한 그 능력이 이 세상에 표현되는 방법일 뿐입니다. 내가 세상에 봉사하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을 교수로서 봉사하는 것이고, 누구는 판사로서 봉사하는 것이며, 누구는 권력으로서 봉사하는 것이며, 누구는 돈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더불어 같이 사는 이 세상에 나름대로 하나의 봉사하는 방법일 뿐이지 궁극적인 것은 마음을 모으고 집중 했는 그 능력인 것입니다. 마음을 모으는 가장 쉬운 방법, 보편화된 방법이 법칙인 것입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몇 생을 살아도 나와 상대방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입하면 작용하는 힘의 크기가 얼마인지 알 수 있습니다.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된 상황을 가장 쉽게 성취할 수 있도록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연기의 법칙은 부처님이 깨친 인과의 법칙이며 존재의 법칙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안 깨쳤으면 세세생생 공부해도 이 좋은 진리를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 깨쳐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공부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쉽게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어요. 오히려 너무 쉬워서 안 하려고 합니다. 깨달음의 법칙은 화두를 들어서 계속 참구해가면 끝내는 견성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계속 화두를 들다보면 무념에 다다르고 무념이 되면 어느 순간 탁 터지게 돼요. 깨치는 순간 제 팔식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움직임을 다 볼 수 있게 됩니다. 점이 투사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림이 되었을 때 그림은 알지만 점은 알지 못합니다. 이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깨치는 것은 의식 밑에 흐름인 팔식을 보고 아는 것입니다. 생각을 집중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모으면 번뇌망상을 소멸하고 끝도 없이 적정의 상태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수만 가지 번뇌를 한 군데로 모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끝도 없이 가라앉히는 겁니다. 내 마음에 일어나는 미세한 움직임과 흐름을 보게 되는 것이 견성입니다. 견성 본다는 것은 없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본래의 것을 본다는 것으로 그 미세한 움직임과 흐름을 내가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무명을 깨트리는 순간으로 제팔식을 보는 것입니다. 화두도 마지막 망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번뇌망상을 화두라는 하나의 번뇌에 모으고 참구하다 보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화두도 본질에 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결국 망은 망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서 설명한 것은 망이라고 그것을 포기를 하면 더 이상 갈 수가 없어요. 망이지만 끝까지 가면 본래 성품이 보이게 됩니다. 

한암스님은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스님이 설한 금강경의 경구를 듣고서 처음으로 깨쳤고, 통도사 백운암에서 수행하던 중 입선을 알리는 죽비 소리를 듣고 또 한 번 깨쳤고, 해인사에서 하안거를 지낸 뒤 전등록에서 약산화상과 석두화상의 대화 중에 ‘한 물건도 작용하지 않는다’ 는 대목에서 또 한 번 깨쳤고, 나이 37세 되던 1912년 우두암에서 겨울을 지내던 중 어느 날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이렇게 한암스님은 네 번을 깨치게 됩니다. 깨달음은 끝도 없이 계속 올 수도 있습니다. 견성은 확철대오 하면 한번 만에 끝나지만 확철대오를 하지 않는 견성은 계속 일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이 벽을 뛰어 넘어야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벽을 뛰어 넘어야합니다. 어떤 사건에 어떻게 부딪히든 간에 그것을 뛰어넘고 나면 탁 터져 버립니다. 터지는 것이 크게 터져 버리면 괜찮은데 적게 터지니까 금방 없어져 버려요. 또 터지고, 또 터지고 이렇게 터지디가 확철대오 할 때까지 터지는 것입니다. 수행을 진지하게 하다 보면 조금씩 오는 이런 견성은 끝도 없이 계속 옵니다. 이런 체험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견성은 진지하게 수행하는 수행자의 것입니다.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동양의 것도 아니고 서양의 것도 아니고 스님 것도 아니고 신부님 것도 아니고 어느 누구 것도 아닙니다.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경험하고 체험하고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견성을 하고 나면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달라져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 달라져요. 꽉 막혀있는 내 것, 네 것이 어느 순간 허물어져 버리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갖 환희가, 온갖 부처님께서 다 출현하고 좋은 기운들이 막 솟아나는 것입니다.  


최근세에 한국불교를 바꾼 최대 사건이 봉암사 결사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에 보문스님도 참가했습니다. 한 철 만에 깨치고 봉암사 결사에 참석하신 것입니다.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신 분이 성철스님과 향곡스님입니다. 보문스님이 성철스님과 향곡스님에게 법거량을 합니다. 성철스님에게 묻습니다. ‘사시에 부처님께 마지 공양을 올리면 부처님은 어떻게 잡수십니까?’ 성철스님이 했는 대답이 ‘내가 이야기하면 너가 알아듣겠느냐?’ 다음날  보문스님은 봇짐 싸들고 떠나 버립니다. 못 깨쳤으면 다시 묻든지, 안 그러면 대답을 하던지 깨친 자의 소리가 정당하게 안 나오니까 그 다음날 조용하게 짐 싸들고 보문스님은 떠납니다. 

보문스님의 일화 중에 마취를 안 한 상태에서 폐 수술을 한 것입니다. 관우도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수술을 마치고 나서 스님이 하신 말씀이 그것이 아프면 얼마나 아픈데 자칫 내가 화두를 놓칠 뻔 했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보문스님의 평생 삶이 쌀 두지 바닥이 안 보이는 날이 없었어요. 먹을 것이 힘들 때 마을에서 절로 올라오면서 쌀을 달라고 하면 다 주고 옵니다. 그러니 어떻게 쌀 두지에 쌀이 차 있겠습니까. 끝도 없는 보살행으로 평생을 사신 분입니다. 대구 앞산에 있는 보문사를 창건한 스님이 보문스님의 자비로움에 감동을 받아 절 이름을 보문사로 했다는 것입니다.  

보문스님이 법주사에서 공양주를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스니이 공양주하고 있으니 견성한 분인지,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하루는 조실스님이 법단에 올라와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보문스님이 뒤에 듣고 있다가 앞으로 나와 내가 법문을 할 테니까 한 번 들어 보시오. 하면서 이곳이 충정북도지요? 네 하니까, 예로부터 충청도는 나라에 충성하는 고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라에 충성한 이는 누구입니까? 하니까 아무 말도 없는 겁니다. 이곳이 보은군이지요. 예로부터 은혜에 보답하는 곳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불보살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여기 있는 분들 중에서 불보살님께 보답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이곳은 속리산면이지요. 세속을 떠나 도를 구하는 곳인데 여기에 세속을 떠나 진심으로 출가한 이는 누가 있습니까? 이 곳이 법주사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머무는 도량이라고 하는데 과연 정법에 머무는 이는 누구입니까? 이렇게 한 소리 하고 스님은 법주사를 떠나 버립니다. 대구 보현사에서도 꽤 오래 사셨습니다. 


일제시대 때, 판사를 하다가 출가를 하신 분이 효봉스님입니다. 늦은 나이에 출가한 효봉스님은 공부하러 금강산에 들어갑니다. 내가 견성하지 못하면 토굴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갑니다. 1년 6개월이 지나고 토굴이 무너지면서 스님이 읊으신 오도송이 바로 이겁니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 소식 뉘라서 알꼬?/ 흰 구름 서로 날고 달은 동으로 달리네./ 흰 구름 서로 날고 달은 동으로 달리네. 하는 구절에서 견성한 내용을 표현 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하신 말씀인 열반송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 모두가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다면/ 달이 일천 강에 비치네./ 경봉스님은 장수하셨고 어느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있어서 많은 선객과 신도가 스님을 찾았습니다. 다음은 경봉스님의 열반송입니다. 야반 삼경에/ 빗장문을 만져 보아라/ 

사람 가운데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탐, 진, 치가 많은 사람을 소인이라고 하고 좀 된 사람을 대인이라고 합니다.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음을 위하여 법을 설하라.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을 열리게 해야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바로 지혜를 가진 사람과 차별이 없다. 깨치면 어리석은 사람도 지혜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깨치지 못하면 부처라도 중생이고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부처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깨치면 부처인 겁니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어찌 자기의 마음을 쫓아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만법이 본래의 성품이 내 마음 가운데에 있는데 어찌 이것을 단박 나타내지 못하는가? 들어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말씀하시기를 나의 본래 근본인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원래 자성이 청정하다고 했는데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게 된다. 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찾아야 된다. 자성이 청정하다는 것은 물들기 전의 상태입니다. 물들기 전의 상태를 표현하는 방법이 청정하다는 겁니다. 청정한지, 노란색인지, 검은 색인지, 빨간 색깔인지 깨쳐보면 알아요.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는 겁니다. 청정한 자성을 보기 위해서 마음을 모아라는 겁니다. 삶의 성공 여부는  마음을 얼마나 잘 모으느냐에 달렸습니다. 모은 마음을 얼마나 잘 쓰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취 정도는 달라집니다. 누구는 성취를 잘해서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됩니다. 집중을 공부에 활용하면 교수가 되고 권력에 활용하면 정치가가 되는 겁니다. 깨쳐서 알고 보니까 결국 인과법입니다.  내가 베풀지 않은 것은 절대로 나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전생에 베풀었던 것이 이생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풀 수 있는 마음과 여유를 항상 가져야 돼요. 어릴 때부터 베푸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견성하는 것도 교육이 있기 때문에 쉽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16대만 같이 살면 돼지가 됩니다. 오랑우탄이 인간과 같이 16대만 내려가면 언어도 익히고 인간같이 됩니다. 돼지우리 속에서 16대만 같이 살게 되면 인간이 어떤 것인가 다 잊어버리고 돼지같이 살게 됩니다. 왜 인간이 위대합니까?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법을 알고 우리의 삶에 적용했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영장류가 세상을 지배합니다. 우리도 교육을 못하면 다른 동물들과 똑같습니다. 인간이 호랑이한테 잡아먹히지 이기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호랑이도 이기고 모든 동물을 다 이겨요. 우리는 교육을 통해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교육 때문에 우리가 인간같이 사는 겁니다. 교육을 통해서 아집도 깨뜨리고 잘못된 것을 허물어  뜨립니다. 자기 것만 고집하면 자기의 틀에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발전 할 수가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집중하는 힘을 교육을 통해 배우다 보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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