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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강 법달이 법화경에 대해서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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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949회 작성일 22-05-24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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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강 법달이 법화경에 대해서 물음 

 


법달이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니 의심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제법 통달하였으나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나.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는 공부를 좀 했는데 아직까지 너의 마음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였구나. 경 자체에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경은 진리를 그대로 설하고 있을 뿐인데 네 마음이 그냥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지, 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네 마음을 밝히지 못 했기 때문에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네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바른 법을 구하는구나. 삿되다고 하는 말은 네가 네 마음이 바르고 밝고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네 마음속에서 그러한 삿됨이 일어나는 것이지. 그 삿됨 때문에, 삿됨을 갖고 있으면서 너는 바른 법을 구하니까 네 마음속에 의심이 있기 마련이다. 너의 마음 바른 정이 곧 경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바른 마음으로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 바르게 하는 것이다. 너의 마음이 견성하면 모든 것이 전부다 바르고 밝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한 평생 동안 문자를 모른다, 육조혜능은 평생, 제대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공부를 하지 않은 혜능이 견성을 하고 난 후에도 나는 평생 동안 문자를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제 들으면 안다는 것입니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다. 나는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네가 법화경을 갖고 와서 읽으면 내가 설명을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글을 모른다는 것 뿐이지 통상 이야기 하는 말은 다 통합니다. 문자를 모르더라도 내용은 알 수 있습니다. 법달이 법화경을 읽었습니다.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에서 직설로 한 것은 아함경 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 모든 경전은 비유와 은유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을 말씀하심은 다만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다. 법화경의 요지는 삼승을 회통하여 일불승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삼승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문승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성제법을 아는 것입니다. 사성제법을 따르면 연기법을 터득할 수가 있습니다. 사성제법은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사성제는 고, 집, 멸, 도입니다. 고는 나타난 현상이며, 집은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에 대한 설명이며,  멸은 문제가 해결된 상태이며, 도는 해결하기 위해서 실천하는 실천방법입니다. 이 내용만 분명하게 알면 어떠한 문제든지 전부다 해결할 수 있고 우리로 하여금 부처의 경지까지 가게 해줍니다. 연기를 터득한 수행자를 연각승이라고 합니다. 연기의 정확한 개념은 12연기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수행자 모델이 보살승입니다.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넘어 오면서 새로운 실천방법으로 확립되고 완성된 것이 바로 육바라밀입니다. 육바라밀을 실천하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밑으로도 모든 중생을 더불어 같이 부처가 되고자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목적이고 이 목적에 맞는 새로운 수행자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보살입니다.  이 시대를 구제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로 보살과 같은 새로운 이미지가 하나 만들어져야 됩니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똑같지만 부처가 시대에 따라 다른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맞는, 부처에게 새로운 옷을 입힐 수 있어야 불교가 사회성을 띄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은 시대에 따라 추구하는 목적이었지만 궁극적으로 설하고자 한 것은 일불승,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널리 삼승을 말씀하심은 다만 세상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설한 것이지, 원래 궁극적이 목적은 부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묘법연화경의 취지는 다른 승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는 것입니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을 듣고서 이불승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 내가 분명하게 우리의 목적이 부처라고 이야기하는데 너는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 중에 이승, 이런 것들을 추구하지 말라. 그런 것들에 현혹되지 말라. 경 가운데서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를 너에게 설명해주겠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께서는 오직 일대사 인연 때문에 이 세상에 나타나셨다. 내가 일불승이라고 이야기하는 이 구절이 일대사 인연이다. 일대사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전부다 부처로 만들기 위해서, 부처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하는 것입니다. 물들기 전의 세상, 본래의 세상,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입니다. 바로 부처의 세상을 만들고 내가 부처되고 이 세상을 부처의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일대사 인연입니다. 법화경에서 주장하는 취지는 삼승을 회통하여 일불승으로 돌아가고 그 일불승을 설하는 내용을 일대사 인연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혜능은 법화경을 글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법달이 읽는 것을 듣고 법화경의 취지를 정확하게 집어서 설명을 해준 것입니다. 이 내용을 봄으로써 법화경에서 추구하고 있는 사상이 대승불교의 완성점이 보살을 넘어서 부처라는 것입니다. 대승불교가 너무 번창하다 보니까 우리의 목적이 보살로 잘 못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될 목적은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 아니고 부처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 법을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나의 말을 들어라. 사람의 마음이 생각을 하지 않으면 본래의 근본이 비고 고요하여 삿된 견해를 떠난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했는데 우리의 마음이 무심의 경지에 다다르면, 삿된 경계를 떠나게  됩니다.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혜롭게 제대로 잘 집중을 하여 삼매에 들고 삼매의 경지에 들면 무심이 됩니다. 그래서 무심의 경지에 들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하여 삿된 생각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은 오염된,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나에게 축적되어 있는 오염되어 있는 그 생각을 따라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가 대상을 얼마만큼 믿을까? 얼마큼 받아들일까? 하는 것도 전부다 내 속에 들어 있는 업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딪히는 모든 일, 생활하는 모든 것도 부딪히는 경계는 내 속에 들어 있는 업의 흔적에 의해 분별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 난 것을 보더라도 자기 분별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어떤 과보가 있어서 몸을 다치는 교통사고가 일어났는가? 기도하고 지나가면 될 것인데, 여기서도 우리는 자기의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끝도 없이 자기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제대로  시키지 않는다고 상사에 대해서 끝도 없이 분별합니다. 이유가 있어서 이것을 시켰구나 하면 되는데 자기의 생각 속에서 판단해서 결정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은 근원이 비고 고요해야 하는데 우리는 근원이 비고 고요한 데까지 못 가기 때문에 세세생생 지어온 그 업을 갖고 써먹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의 삶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이 이것을 깨뜨리자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 몸뚱이 받아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생 동안 자기 나름대로의 아집을 꽉 채우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렇구나하고 수긍해야 하는데 자기 생각대로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하여 여기까지 가보자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비고 고요하여 무심의 경지에 다다르면 본래 성품을 보게 됩니다. 본래 성품을 보기 위해서 집중을 해서 번뇌망상을 뚫고 들어가야 됩니다. 지금 여기는 단단한 것으로 싸여있어서 어떠한 것으로도 못 깨뜨립니다. 나라고 생각하면서 평생 내 주위를 떠나지 않고 내 것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아집, 아만, 아애입니다. 내가 평생 동안 하는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아만, 자기만이 맞고 최고이고, 아애, 자기만을 끝도 없이 사랑하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내 삶이고 생각하는 모든 근거의 바탕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사는가? 끝도 없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견성을 하는 것입니다. 아집을 한 번 깨뜨려 보라는 것입니다. 싸여 있는 것을 깨뜨려 보고 뚫고 들어가 바닥을 한 번 보아라는 것입니다. 그 바닥을 보려고 하니까 집중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음으로 꽝꽝 얼어있는 것을 깨뜨리려고 해보세요. 얼마나 힘이 들어요? 그래도 계속 두드리면 깨뜨려집니다. 한 곳을 끝도 없이 파고 들어가면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대사 인연입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고 어떻게 인연이 되었느냐? 이루어진 모든 인연의 주체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부처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되면 이 세상을 그냥 부처인 것입니다. 연기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끝도 없이 변해가는 성기연기가 있으며, 또 그냥 그대로 다 만들어져 있는 성구연기가 있습니다. 성기연기는 화엄경의 기본 사상이며, 시간연기입니다. 끝도 없이 변해가는 이사법계, 사사법계, 사사무애법계 등 끝도 없이 변해가는 법계연기를 설명한 것입니다. 시간적인 관점이라고 해서 공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중심이 되어 법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구연기는 공간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공간을 중심으로  시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다 설명하고 있는데 어느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구연기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부처다, 원래 부처의 세상으로 다 이루어져 있는데 단지 우리가 물들어 있어서 못 볼 뿐입니다. 우리 눈에는 오염되어 있는 세상 밖에 안 보이기 때문에 예토에서 중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되고 보니까 세상 그대로가 부처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대사 인연입니다. 묘법연화경의 특징은 비유입니다. 법화경에는 칠유, 일곱 가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부처를 설명하고 삼승을 회통해서 부처가 되는 내용에 대해서 일곱 가지의 중요한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법화칠유 중에 장자궁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돌아온 탕자의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그 내용의 근거가 법화경의 장자궁자의 비유에서 전형을 따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예수의 보이지 않는 십 수 년의 삶이라든가 또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성경의 내용에서 새로운 이견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1980년대 민희식교수가 솔로몬대학에서 신약성서와 법화경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내용입니다.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을 떠난다. 불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사상이 중도사상입니다. 팔정도의 정도는 중도입니다. 양변을 떠나는 것이 중도사상의 핵심입니다. 양변을 떠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에서, 안은 나가 안, 이, 비, 설, 신, 의가 미혹하지 않는 것이며, 밖은 대상으로 색, 성, 향, 미, 촉, 법에 미혹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과 법신이 미혹하지 않으면 양변을 떠난 것이며, 그것이 중도라는 것입니다. 양변을 떠나는 것이 중도인데 중도의 개념이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나에 대해서 깨어있고 세상에 대해서, 대상에 대해서, 법에 대해서 깨어있는 것입니다.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은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며, 안으로 미혹하면 공에 집착하여 아공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공을 이해하면 아공도 법공도 아닙니다. 그래서 묘유입니다. 진공묘유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공을 잘 이해하면 진공인데 공을 잘못 이해하여 나도 없다, 법도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진공이라고 하는 것은 끝도 없는 묘유로 그 속에 모든 것을 전부다 갖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게 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에 집착하게 됩니다.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는 것이 미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바로 중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견성을 해야 안팎에 미혹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견성하지 않으면 우리는 외부 대상에도 집착하게 되고 나에게도 집착하게 되어 본질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양변을 떠나게 되는 것은 안팎에 대해서 제대로 깨어있을 때, 견성을 하여 정도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양변을 떠나고 난 거기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본래 성품에서 일어난 생각이고 그것이 부처의 생각입니다.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입니다. 아집을, 전생에 행한 업의 흔적들을  끄집어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내 속에 누적되어 있는 그 업의 흔적들을 끄집어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업의 흔적들을 알 수는 없지만 사건을 접해 보면 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을 보고 내가 어떤 생각을 떠올릴 때, 내가 떠올리는 그 생각이 내 업 속에 들어있는 것의 표현입니다. 어떤 작품을 보고 일으키는 그 생각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눈으로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내 속에 들어 있는 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업은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 누적되어 있습니다. 똑같이 공부한 사람이라도 어떤 사람은 좀 더 빠르게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좀 더 느리게 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공부를 하고도 어떤 사람은 감탄하면서 혹하고 어떤 사람은 들은 둥, 마는 둥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듣고도 받아들이는 것은 다 다릅니다. 업의 창고에 들어 있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업의 창고에 들어 있는 것을 평생 끄집어내서 쓰고 그것이 나인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생도 이렇게 살고 전생에도 또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다음 생에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 삶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드려야 본래의 성품이 드러나 부처의 지견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는다는 것은 오염되어 있는 것을 깨뜨리고 오염되기 전의 본래 상태의 것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깨닫는 것을 네 문으로 나누면,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침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개, 시, 오, 입으로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기 얼음이 꽝꽝 얼어 있어요. 이 얼음 밑에 맑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놀고 있고 있는데, 그곳까지 들어가야 됩니다. 깨서 들어가는 것이 열고입니다. 수행해서 더럽혀져 있는, 둘러싸여 있는 것을 깨뜨리고 들어가는 것이 열고입니다. 그 다음 열은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열고 본 것을 보이고, 바로 그것을 보는 순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게 깨달음이구나, 나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보게 되는, 깨달음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거기에 풍덩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풍덩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이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들어간다는 것이 이 세상에 그 진리의 세계를 그대로 다시 구현하는 것입니다. 개, 시, 오, 입은 진리의 세계를 열어 진리를 보이고 함께 들어가 진리를 이 세상에 다시 환원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향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회향입니다. 바로 보시입니다.  팔정도는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그런데 육바라밀은 먼저 보시부터 나옵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입니다. 팔정도와 욱바라밀에서 끼워 맞춰보면 비슷하게 다 맞출 수 있는데 전혀 생뚱맞은 것은 보시입니다. 깨치고 나서 팔정도가 다 이루어지면 마지막 나타나는 결론이 정견입니다. 부처가 되고 난 다음에 이 세상에 그냥 나타내 보이는 것이 보시입니다. 중생은 보시를 연습하지만 부처는 보시를 그냥 행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자꾸 연습을 해서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부처되는 항목 중에 하나가 보시입니다. 진정으로 보시라고 하는 것은 깨치고 나면 그냥 행해지는 행위 자체 입니다. 그래서 팔정도와 육바라밀을 제대로 이해를 하면 정견으로 나타나는 행위가 바로 보시인 것입니다. 부처를 나타내는 궁극적인 표현이 보시입니다. 우리의 삶이 마지막으로 회향되어야 할 곳이 보시인 것입니다. 모든 공부의 끝에는 깨치고 난 다음에 세상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깨닫고 나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세상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철저한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과 접근해 가는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모든 학문은 나와 대상과의 관계를 설정해서 나도 이만큼 하고 대상도 이만큼 하면서 좋은 방법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의 개념은 내가 50하면 상대방도 50을 하고, 관계속에서 내가 70을 하면 상대방은  30을 해야 되는 서로 주고받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교는 철저한 자기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면 대상의 문제도 더불어 해결됩니다. 내가 10% 양보 할테니 너도 10% 양보해라가 아닙니다. 불교의 개념은 그냥 내가 100%하는 것입니다. 내가 100%하면 상대방도 따라 바뀐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이 상의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바뀌면 거기에 따라 객체도 바뀌는 형태가 불교가 세상을 풀어가는 문제해결 방법입니다. 내가 돈 천 만원 보시하니까 너도 천 만원 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던진 행위에 스스로 교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공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했으니까 너도 해라는 식은 불교에서는 없습니다. 내가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어떤 학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교의 특출함입니다. 내 문제가 결국 세상의 문제고 내가 해결되면 세상 문제가 전부다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의 핵심입니다. 홀로 선정에 들어있는데 바람은 숨을 죽이고 나무는 춤을 추는 것입니다. 조건에 대한 요구가 없습니다. 그냥 행하면 행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관계설정에서는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되었지만 다음 다른 상황에서는 또 달라지는 것입니다. 변화는 끝도 없이 이루어져 항상 똑같은 대상이 똑같이 관계하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바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철저한 자기의 성찰, 자기의 통찰, 자기의 문제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개인의 문제라고 오해를 합니다. 세상 전부가 자기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불교는 전혀 대상을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만큼 철저하게 대상을 생각하는 사상과 학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이 속에 모든 것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나와 대상이 분리되어 있는 이분법입니다. 그렇지만 불교는 나와 세상이 하나입니다. 본질에 대해서 내가 이해하는 것만큼 세상은 내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견성하고 깨치고 나면 세상 전부다가 나와 하나가 됩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세상이 내 것으로 인식하는 폭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 살아가면서 느끼고,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것만큼 내 것으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업이 되는 것입니다. 깨치고 난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이 회향하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면서 기도할 때, 남편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합니다. 자식 좋은 대학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불교를 제대로 안다면 그 기도 속에는 회항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내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그 능력이 부처님 세상을 만드는데 잘 쓰일 수 있도록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남편 돈 많이 벌어서 우리 집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도 베풀어 이득이 될 수 있도록 회항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끝도 없는 회향입니다. 회향이 바로 보시입니다. 보시가 엉뚱하게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본질을 알고 나면 바로 정견이 보시입니다.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감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세상에 나오는 것입니다. 견성은 자기의 견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 견성이 중요합니까? 세상을 복 되게하는 최고의 빅 카드가 견성입니다. 견성한 한 사람만 있어도 이 세상의 수명이 몇백 년은 더 길어집니다. 세상은 끝도 없는 엔트로피의 증가에 의해서 어느 순간 멸망할지 모르지만 계속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구세주는 견성입니다. 돈과 권력과 모든 것은 주어진 세상 안에서의 쓰임새입니다. 누구한테 가면 누구는 부자가 되고 거기서 떠나면 가난뱅이고, 권력이 누구한테 가면 권력자가 되고 권력이 떠나면 없어지는 것이고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그냥 써먹는 것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지수가 52라면 권력을 잘 사용함으로써 53에 될 수 있게 하고 54가 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도 좋은 것이고, 돈도 좋은 것입니다. 돈을 한 군데에 집중시키면 돈 없는 것 보다 못한 것이 됩니다. 부자가 세상에 끼치는 득도 있지만 세상에 끼치는 해도 큽니다. 뭔가를 한 곳에 모아두면 그것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피해를 입는 것입니다. 조직사회만큼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밑에서는 고생하지만 위에 올라가면 편해집니다. 밑에서는 10을 해도 7을 얻는데 위에서는 1를 하고도 100을 얻습니다. 조직사회나 계급사회가 허물어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조직은 많은 장점도 있지만, 맹점도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성품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해야 됩니다.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적으니까 자꾸 지옥으로 물들어 가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쪽으로 한 명이라도 끌고 오는 것이 결국 세상을 극락으로 만드는 방법이고, 복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은 예수님이 태어난 때이며, 2천 6백 년 전에는 부처님이 태어난 때입니다. 그때는 과학적이고 논리족인 근거 없이도 믿음이 쉬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한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제대로  정리, 분별되어 있어야 합니다. 알면 믿어집니다. 지금 세상에는 맹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된다. 주체적인 삶을 사느냐, 피동적인 삶을 사느냐? 입니다.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는 것이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마음이 바르고,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내 삶이 굴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부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써 법대로 수행하면 경을 굴리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삶을 살자. 긍정적인 삶을 살자. 세상을 전부다 받아들이는 삶을 살자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을 아는 것이 말로써 아는 것이 아니라 법화경의 내용을 행하면서 사는 것이 법화경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법화경 공부하는 것을 쉽게 생각하면 안돼요.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인연이 잘 주어지질 않습니다. 어느 생이든지 한 번 마음먹고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황이든 공부해야 되겠다, 부처가 되어야 되겠다, 분명한 목적이 서면 거기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부처되는 것은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부처되기 위해서 우리는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초등학생이면 초등학생대로의 목적이 있는 것이고, 중학생이면 중학생대로의 목적이 있는 것이고, 고등학생들은 고등학생들대로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잘 수행해야 궁극적인 목적인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거쳐야 할 과정을 엉터리로 해 놓고 목적지에 가겠지 하면 가겠습니까?  목적지에 가려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잘 해야 됩니다. 하는 과정에서 부지런히 못하고 열심히 못했다 면 그것을 돌아보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반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후회하는 것으로 끝냅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후회하는 것입니다. 후회하면 다음부터는 안 그래야 됩니다. 공부를 해야 된단 말입니다. 나이 들면 공부해라, 공부해라 해도 힘이 없어서 공부하지 못할 때가 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은 괜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법화경을 굴리는 것이며, 법화경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어야 되고 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법화경의 삶입니다. 부처되는 것이 별 것 아닙니다. 어린아이 때의 부처는 어린 아이에 맞는 부처가 있는 것이고, 초등학생은 초등학생에게 맞는 부처가 있는 것처럼, 단계에 따라, 최선을 다 해서 뭔가를 성취하면 거기에서 부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5장에서, 지상스님이 예배하고 법을 묻습니다. 부처님은 삼승을 말씀하시고 또 최상승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알지 못하겠으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너는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바깥 법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본래 사승법이란 없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네 가지로 나누어 법에 사승이 있을 뿐이다. 보고, 듣고, 읽고, 욈은 소승이요. 법을 깨쳐 뜻을 아는 것은 중승이다. 일만 가지 법을 다 통달하고 일만 가지 행을 갖추어 일체를 떠남이 없되 오직 법의 모양을 떠나고 짓되 얻는 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이니라.

소승, 대승, 중승을 넘어서 최상승을 이야기합니다. 선불교에서 지향하는 것은 대승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삼승을 이야기하고 또 최상승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삼승을 회통해서 일불승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최상승법은 바로 일불승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너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바깥에 일어나는 현상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래 사승이라고 하는 네 가지가 없는데 우리의 마음이 네 가지로 나누어 사승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승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읽고, 외우는 것이 모든 공부의 출발입니다. 이것이 공부하는 첫째 단계이고, 이것이 소승입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잘 모르면 무조건 외우면 됩니다. 외우고 나면 뜻을 알고 깨치게 됩니다. 수학문제 풀 때도 모를 때는 무조건 외워 놓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머릿속에 외워져 있으면 그 다음에는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하다 보면 원리를 깨치게 됩니다. 외우는 것이 뭐 대수냐고 하지만 모든 공부의 출발점은 외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머릿속에 외워져 있으면 수시로 그게 왜 그런가? 생각을 합니다. 외운 것을 깨쳐, 뜻을 아는 것은 그다음 단계입니다. 법에 의지하여 수행함은 그다음 단계입니다.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그다음 단계입니다. 외우고 나면 그다음에 그 뜻을 깨치고, 뜻을 깨치고 나면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이 소승이고, 중승이고  대승입니다. 실천을 넘어 견성한 상태가 최상승이라는 것입니다. 법을 의지하여 수행함이 대승이고 대승을 지속적으로 하면 언젠가는 견성하게 되고, 본래 성품에 도달하게 됩니다. 견성한 상태가 되는 것이 최상승법입니다. 


부처님 당시, 초기의 가르침을 근본불교라고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에 500년 동안 행해진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합니다. 소승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 국한된 문제에만 집약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이 문제를 나와 대상에게까지 확대한 것을 대승이라고 합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대승을 넘어서서 중국에서 일어난 선불교를 최상승법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자기 것이 최고라고 고집하고 있지만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연기를 깨침으로써 시대에 따라 시대성을 갖는 옷으로 바꾸어 입은 것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는 연기와 사성제라는 옷을 입었고, 500년이 지난 후에는 대승이라는 옷을 입었고, 그 후에는 밀교라는 옷을 입었습니다. 이 시기를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라고 하며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오백 년 동안 대승불교가 종파불교로 확립되고, 그 후에 선불교가 일어납니다. 서불교를 최상승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승은 행한다는 뜻이요 입으로 다투는 것에 있지 않다. 너는 모름지기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라. 자기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스스로 닦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자기 자신한테 보이는 대로 판단합니다. 모든 것은 자기 자신에게 누적되어 있는 업을 바탕으로 뭐가 좋다, 뭐가 나쁘다 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나쁘고, 누구한테 좋고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는 스스로 닦고 보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지금 돈이 만 원 있습니다. 돈 백 만 원 갖고 있는 박선생님을 보고 돈 많구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원 있던 돈이 천만 원이 되었습니다. 박선생님이 갖고 있는 백 만 원을 보고 백 만 원 밖에 없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내 자신이 기준이 되어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되고, 내 자신이 변해야 되고,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하지만 상구보리되면 하화중생은 그냥 되는 것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표현일 뿐입니다. 승은 행한다는 뜻입니다. 승은 수렛바퀴입니다. 소승, 대승은 실어 나르는 것으로 소승은 조금 실어 나르는 것이고, 대승은 많이 실어 나르는 것입니다. 조금 실어 나르든 많이 실어 나르든 자기 자신만 실어 나르면 전부다 실어 나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대승이라고 하면서 초기불교를 비하시켜서 소승이라고 한 것입니다. 어릴 때 그렇게 커 보이던 초등학교를 어른 되어 가 보면 매우 작습니다. 어릴 때는 그때의 모습이 최고이며, 커서는 또 그때의 모습이 최고인 것입니다. 모습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2600년 전의 불교는 그때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천 년 전의 불교는 천 년 전의 불교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이 시대에 맞는 불교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공부해야 그 불교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입은 불교 옷은 공부하는 대로 입게 됩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벌거숭이가 되어 아무도 없게 됩니다. 2000년 전에는 대승의 옷을 입었는데 지금은 다 낡아서 없어졌는데도 대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시대에 맞는 옷을 우리가 만들어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육조단경이 왜 유명해졌습니까?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에 비해 볼 거 같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금강경의 일부분을 갖고 육조단경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그 시대의 인물인 육조를 위대한 스승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백장이 설한 백장록, 운문이 설한 운문록과 같이 육조 혜능이 설한 육조록이나 혜능록이었으면 지금 선불교가 갖고 있는 가치는 또 달라집니다. 육조록을 육조단경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불교 역사상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 외에 경으로 이름 붙은 것은 육조단경이 유일합니다. 육조혜능은 600년대 사람입니다. 불멸 2000년 후에 한 명 나와서 설한 법문을 경이라고 붙여 놓은 것입니다. 아마 중국사람 아니면 불가능할 사건입니다. 우리는 원효스님을 원효대사라 부르지 원효보살이라고 하는 않습니다. 


혜능의 제자 중에 신회라고 하는 남양사람이 있었다. 조계산에 와서 혜능한테 묻습니다. 스님은 좌선을 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혜능스님께서 일어나서 신회에게 꿀밤을 세 차례 때립니다. 그리고 신회한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꿀밤을 세 대 줬는데 아프냐? 안 아프냐? 신회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라고 맹랑한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혜능스님께서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하고 대답합니다. 스님은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합니까? 원인을 묻습니다. 혜능이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본다는 것이며,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냐? 다시 묻습니다.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무정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고 하면 법부와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고 신회가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혜능께서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변이다.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이다. 나는 양변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너는 생멸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려 드느냐? 하고 신회한테 한 소리 하였습니다. 신회가 참 맹랑하구나. 분별하는 분별력이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구나. 네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라. 마음을 깨쳐서 스스로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그다음에 수행을 해라.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와서 혜능을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라 너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공부지, 내가 안다고 다른 사람한테 그 알음을 줄 수는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미혹함을 내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네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혹함을 대신하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신회한테 호되게 한 소리 한 것입니다. 그 물음에 한 방 맞고 신회가 절하고 바로 문인이 되어 조계산을 떠나지 않고 항상 죄우에서 모셨다. 결국 신회가 혜능의 제자가 됩니다. 신회가 혜능의 제자가 됨으로서 선불교의 시대를 열게 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신회가 남종선과 북종선을 가름으로써, 북종선은 신수에 의해서 흥하게 되지만 신수가 죽고 나면서 힘이 미약하게 됩니다. 거기에 비해 육조혜능 밑에서 공부하는 많은 사람이 나오면서 전국으로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중국 천하가 남종선 천하로 바뀌는 것입니다. 혜능의 법문이 어떻게 육조단경이 되었겠습니까? 이것도 신회의 공이 제일 컸던 것입니다. 김성규가 유명해졌어요. 그러면 앞으로 불교 역사책을 쓸 때, 김성규라는 이름이 나오고  통섭불교원은 김성규와 더불어 엄청난 불교활동을 한 중요한 단체가 되어 버립니다. 지금 시대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세요. 대구 시내에 절이 100개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순위로 따지면 100번 째입니다. 제일 꼴찌인데 우리 앞에 99개나 있는 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통섭불교는 역사 속에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판단됩니다. 그 당시의 북종선과 남종선과 신수와 혜능의 관계는 그 당시에는 중요하지만 1500년 지나서 지금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역사 속의 흔적에 의해서 그 사람의 삶의 기록과, 흔적을 더듬어 보는 것입니다. 신회가 역사 속에서 엄청남 새로운 파문을 던졌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회가 육조단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선불교라고 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게 됩니다. 육조단경이 없었다면 앞으로 전개되는 중국에서 교종 중심의 종파불교, 거기에 똑같은 하나의 선종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종으로 이 선불교가 끝났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불교의 획을 그은 중국화 된 선불교를 열어가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육조단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육조단경을 중심으로 선불교가 새로운 꽃을 피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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