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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27강 진가동정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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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830회 작성일 22-05-2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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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강 진가동정게 


1966년 스탠퍼드대학원의 심리학과 학생이었던 월터 미셀은 네 살짜리, 유치원생들을 대상으로 마시멜로 실험을 했습니다. 70 -80년대 전 세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자는 마시멜로였습니다. 전 세계 판매량 1위였던 먹음직스럽고, 맛있는 마시멜로를 책상 위에 놓아두고 15분만 참으면 하나 더 준다고 합니다. 이 실험결과 참지 못하고 그 과자를 먹었던 아이들, 그리고 또 15분 동안 참았다가 하나를 더 받은 아이들에 대해 15년간 행동발달에 대해서 추적을 합니다. 유혹을 뿌리치고 15분 동안 인내하고 참고 견디면서 하나를 더 받은 유치원생과 맛있는 것을 못 견디고 바로 먹어버린 유치원생의 차이점입니다. 15년간의 추적을 분석한 결과, 한 개를 더 받겠다고 인내하고, 참고, 견딘 아이들의 90% 이상이 우수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중, 고등학교 과정에서도 성공을 했고 대학도 성공하고 그리고 또 사회에 나와서도 성공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참지 못하고 바로 먹었던 아이들은 대부분 중, 고등학교 과정을 거치면서도 제대로 공부를 소화하지 못했으며, 거의 대부분이 대학 진학도 실패했고 사회에서도 성공을 못했습니다. 마시멜로 실험을 통해서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유치원생들에게 15분의 참고 견딤에서 보상을 더 받은 아이들은 정상적인 성장으로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15분을 참지 못하고 먹은 아이들은 실패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이 실험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육과정에서 가장 단순한 기본적인 것이지만 맛있는 것을 안먹고 15분을 참고 기다린 유치원생들은 자라서 대부분 성공을 하게 됩니다. 

2차 실험에서도 15분을 참고 견딘 아이에게 마시멜로를 하나 더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누어 a그룹은 약속한 대로 하나를 더 주었고, b그룹은 약속은 해 놓고 마시멜로를 하나 더 주지 않았습니다. 이 실험을 2번, 3번 반복을 합니다. a그룹은 15분 참고 견뎌 마시멜로를 받았고 b그룹은 이번에도 못 받고, 다음에도 못 받고, 그다음에도 못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배신, 거짓에 대한 비뚤어진 성격이 형성되어 버립니다. 이 실험에서 보상받지 못하고 배신당한 b그룹의 아이들은 참고 견디지 못한 아이들보다 훨씬 더 삐뚤어진 삶을 사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행동발달 과정에서 추적한 결과 준다고 약속을 해 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룹에 속한 아이들은 못 참고, 견디지 못한 아이들보다 훨씬 더 안 좋은 삶을 살았던 과정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내용이지만 우리가 이제까지 공부했던 내용들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공부가 참 쉬운 거 같아도 어렵고, 어려운 거 같으면서도 쉽지만 참고, 견디고,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한다면 성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제 27품, 참됨과 거짓에 대한 법문입니다. 대사께서는 현종 선천 2년 713년 8월 3일에 돌아가셨다. 육조혜능이 활동했던 시기가 원효와 비슷합니다. 중국의 육조와 한국의 원효를 비교해보면 원효도 결국은 스스로 깨칩니다. 스스로 마음을 깨치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중국화 된 불교가 아닌 스스로의 불교를 통해서 깨치고 나름의 한국의 불교사상을 전개한 것입니다. 역대 고승들 중에 원효만큼 뛰어난 많은 작품을 저술한 사람도 드뭅니다. 남아있는 것은 몇 안 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대승기신론의 소로 원효소입니다. 대승불교가 확립되면서 나온 논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대승기신론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이 마음을 가장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것이 구사론입니다. 2600년의 방대한 불교역사 속에서 지금과 같은 불교체계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세친이 지은 구사론과 마명보살이 지은 대승기신론, 그리고 용수가 지은 중론입니다. 대승기신론에 대해서 가장 뛰어난 설명을 붙인 사람이 원효입니다. 

혜능은 7월 8일에 문인들을 불러 고별하고, 내 이제 열반에 들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선천 원년에 신주 국은사에 탑을 만들고 선천 2년 7월에 열반에 들겠다고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도인들은 열반에 들기 한, 두 달 전에 예언을 합니다. 부처님도 석 달 전에 열반을 예언하셨고, 선사들도 열반에 들기 한두 달 전에 이야기합니다. 한 달 이상의 여유를 두고 죽는 것입니다. 명이 끝날 때까지 사는 것보다 조금 일찍 생을 정리하면 좌탈입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열반에 들려면 삶과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나의 모든 에너지를 마지막까지 전부다 써버린 죽음 직전의 상태에서는 꼿꼿한 자세에서 열반에 들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수명의 한 달 전에는 열반에 든다고 생각을 해야 당당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대사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나는 8월이 되면 이 세상을 떠나고자 하니 의심이 있거든 빨리 물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의심을 부수어 마땅히 미혹을 다 없애어 너희들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는 너희들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 이 모습은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에 들으셨던 모습과 비슷하게 전개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에 들 때 모습이나 육조혜능이 한 달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니까 제자들에게 의심이 있으면 빨리 물으라고 한 것은 똑같은 상황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육조혜능의 제자가 10명입니다. 그 중에서 신회에 의해서 육조단경이 쓰여지고 선불교의 황금시대를 이루게 합니다. 선종을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나누면서 중국 천하에 남종선이 뿌리내리고 세계화하는데 큰 공을 세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역사 속에는 개인으로서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있고, 또 조직이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있습니다. 뛰어난 개인의 업적이 조직을 갖고, 그 조직이 이 세상에 기여하는 공덕이 가장 큽니다. 신회의 역할은 남종선이 새로운 중국불교를 열어갈 수 있는 시대의 흐름을 바꾸게 했습니다. 중국 교종이 완성되면서 선종으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선종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육조가 새로운 불교의 시발점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신회의 공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죽음을 맞이한 상태에서 신회는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평등함을 얻어, 헐뜯고 칭찬함에 움직이지 않으나, 너희들은 그렇지 못하는구나. 너희들은 여러 해 동안 이 산중에서 무슨 도를 닦았는가? 너희가 지금 슬피 우는 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나의 가는 곳을 너희가 몰라서 근심하는가? 내가 가는 곳을 모른다면 어떻게 너희들에게 고별하겠느냐?  만약 가는 곳을 안다면 슬피 울 필요가 없고 너희들이 왜 우느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만약 이 스승의 깨달음을 안다면 너희들이 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정은 남아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슬피 울 것이 아니라 너희들도 스승과 같은 경지가 되도록 아이쓰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자성의 본체는 남도, 태어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옴도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오온연기에서 공간에 대해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도윤회 하듯이 천상세계가 있고, 인간세계가 있고, 지옥, 아귀, 축생이 있듯이 이 층을 나눠 버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층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하에 있는 층이나 위에 있는 층은 보이지 않습니다. 죽는다는 것도 여기서 안 보이는 데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한 층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죽음이고 그 다음에 죽어 있다가 다시 이 층으로 올라오면 태어나서 사는 것입니다. 단지 보이는 세상으로 올라왔다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내려가고, 올라가고, 할 뿐이지 변화가 없이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모두 앉아라.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한 게송을 다시 주겠으니, 너희들이 다 외워 이 게송의 뜻을 알면 너희는 나와 더불어 함께 갈 것이고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하여 종지를 잃지 말라. 이 게송의 이름이 진가동정게이다. 


진가동정게


모든 것에 진실이 없으니 진실로 보려고 하지 말라.

만약 진실을 본다 해도 그 보는 것은 다 진실이 아니다.

 

만약 능히 자기에게 진실이 있다면 거짓을 떠나는 것이 곧 마음의 진실이다.

자기의 마음이 거짓을 여의지 않아 진실이 없거늘, 어느 곳에 진실이 있겠는가?

 

유정은 곧 움직일 줄을 알고 무정은 움직이지 않으니 

만약 움직이지 않는 행을 닦는다면 무정의 움직이지 않음과 같다.

 

만약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면 움직임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으니, 

움직이지 않음이 움직이지 않음이면 뜻도 없고 부처의 씨앗도 없도다.

 

능히 모양을 잘 분별하되 첫째 뜻은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깨쳐서 이 견해를 지으면 이것이 곧 진여의 말씀이니라.

 

모든 도를 배우는 이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힘써 뜻을 써서 

대승의 문에서 도리어 생사의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

 

앞의 사람이 서로 응하면 곧 함께 부처님 말씀을 의논하려니와 

만약 실제로 서로 응하지 않으면 합장하여 환희케 하라.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다. 다투게 되면 도의 뜻을 잃으리오.

미혹함에 집착하여 법문을 다투면 자성이 생사에 들어가느니라.


모든 것에 진실이 없으니 진실로 보려고 하지 말라. 만약 진실을 본다 해도 그 보는 것은 다 진실이 아니다. 금강경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사구게가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전부다 허망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전부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존재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상이 아님을, 존재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의 상에 집착하지 않고, 상에 빠지지 않고, 이 상을 벗어나서 본질을 제대로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눈에 보이는 상에 집착하고, 묶여 있고, 매여 있습니다. 형상으로 나타나 있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는 본질이 없으니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는 허망한 것입니다. 진실을 본다해도 보는 것이 다 진실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인식하는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안, 이, 비, 설, 신, 의를 떠나서 제대로 본질을 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본래 성품을 보아야 본질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에게 진실이 있다면 거짓을 떠나는 것이 곧 마음의 진실이다. 자기의 마음이 거짓을 여의지 않아 진실이 없으니, 어느 곳에 진실이 있겠는가? 능히 자기에게 진실이 있다면 거짓을 떠나는 것이 마음의 진실입니다. 오계 중에서 두 번째 계가 거짓말 하지 말라입니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가르침도 살생을 하지 말라고 시작하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최고의 축복을, 최고의 은혜를 부처님께서는 그것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마라. 모든 것의 본질에,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잘 살려고 하면 거짓을 안 하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속에 들어있는 것 하고 바깥으로 표현되는 것이 전부다 다릅니다. 평생 거짓말 안 하고 산다고 하지만 냉정하게 한 번 되돌아보세요. 우리가 공부를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여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잘 알아야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짓을 하지 않는 정직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공부하는 데 있어서, 정직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행위에서 거짓이 조금씩 포함되야 이익을 좀 더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이익은 덜 보는 것 같아도 상대방에게 베푸는 은혜를 생각하면 훨씬 더 큰 이익이 나에게 돌아옵니다. 세상을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또 자기 자신을 속인다 하더라도 인과는 정확합니다. 내가 다음 생에 어떤 몸 받아 태어나고, 어떻게 사는가? 그 과보는 정확한 것입니다. 지금 삶의 결과가 결국은 다음 생에 내 삶을 태어나게 하고 거기에 대한 정확한 답을 주는 것입니다. 공부를 좀 하여 다음 단계로 가는 경계선에 오면 공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수능시험에서 자기 틀린 것을 정확하게 알아요. 그렇지만 대충 공부한 학생은 시험치고 난 다음에 잘 친 것 같다고 하는데 채점해보면 형편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제대로 하면 조금만 달라져도 알 수 있습니다. 공부 안 한 사람은 멋대로 돌아다녀도 그것이 내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변화를 주는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계속 공부하는 사람은 하루의 흐트러짐으로도 내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놀려고 해도 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이만큼 중요합니다. 수행자로서 공부를 좀 하면 그런 것들이 전부다 보이기 시작하고 알아지게 됩니다. 정직하자. 이것은 공부해야만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이 삶에 얼마나 정직한가? 우리는 공부할 때는 공부에 정직해야 되고 일할 때는 일에 정직해야 되고 어느 상황에서든지 내가 속해 있는 그 상황에 정직해야만 본질에 나아갈 수 있고 견성을 할 수가 있습니다. 견성하는데 첫 번째 걸림돌은 살생이며 두 번째가 거짓말입니다. 

유정은 곧 움직일 줄을 알고, 생명이 있는 생명체입니다. 무정은 움직이지 않으니, 무정, 정이 없는 것이며 무생물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크게 나누면 유정물과 무정물로. 생물과 무생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돌이나 책상은 생명이 없는 무정물입니다. 사람이나 새와 같이 움직일 줄 알고, 생각이 있는 것은 유정물입니다. 생물을 식물, 동물로 나눌 수 있으며, 식물은 덜 진화되어있는 생명체고 동물은 식물보다 훨씬 더 고등화 되어있는 생물체입니다. 식물은 생각은 하고, 반응은 하지만 움직일 수 없지만 동물은 움직입니다. 유정은 움직일 줄 알며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물도 유정에 속합니다. 무정은 움직이지 않으니 만약 움직이지 않는 행을 닦는다면 무정의 움직이지 않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를 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인데 오류에 빠지기 쉬운 것 중에 하나가 움직이지 않음이 유정으로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정물같이 죽어있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본질에 나아가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의식과 인식을 집중한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집중해 나가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집중하다 보면 모든 것이 하나로 포섭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정으로서의 움직이지 않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성적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데는 단계가 있습니다. 공부를 처음 시작하면서 책을 열심히 보면서 공부해야 되는 단계에서 책 보지 마라, 책 필요 없다하면 어떻게 공부합니까? 책을 봐야 하는 단계에서는 책을 열심히 보고, 다 보고 난 다음에는 책이 필요 없습니다. 그때 까지도 책을 붙잡고 늘어진다면 문제가 됩니다. 길을 가다가 은덩이 하나를 주웠어요. 무거운 은덩이를 겨우 들고 억지로 갑니다. 가다 보니까 금덩이가 있어요. 그러면 그 금덩이 보고 난 다음에 은덩이도 중요하다고 들고 가겠어요? 은은 버리고 금만 들고 가야 되겠지요. 더 소중한 것을 알았을 때는 버려야 될 것은 버려야 됩니다. 참선하면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처음 들어가는 단계입니다. 그 과정에서 정보도 익히고, 과정을 익히고, 조직도, 체계도 공부해서 채워야 되는 상황에서는 채워야 되는 것입니다. 물통에 물을 채워 놓고 물을 빼야 하는데 물도 채우지 않고 물을 뺄려고 해보세요. 일단은 채워야 되는 상황에서는 채워야 되는 것입니다. 

책보지 말라고 것과 공부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책을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책을 충분히 습득하고 알고 난 다음에는 책에서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무소유가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더라도 갖고 있는 그 돈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소유를 돈 벌지 말라는 것으로 생각하면 무소유에 대한 개념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 될 사람은 거지 밖에 없습니다. 참선자세에서 움직이지 않는 연습은 육신이 움직이면 거기에 따라 정신도, 마음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집중한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아야 집중이 됩니다. 그래서 참선하면서 1시간, 2시간, 3시간, 4시간 앉아있으라고 하는 것은 몸뚱이가 움직이지 않아야 그 속에 들어 있는 마음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그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에야 걸어다니면서도 생각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연습을 하고 과정을 거치면 충분히 가능하지만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는 책보지 말라고 해서 책 보기 전에 책을 버리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집중하여 움직이지 않는 연습은 참선하는 가장 좋은 자세입니다. 인류가 개발한 움직이지 않는 최고의 방법이 참선이고 화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선을 하면서 화두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참선공부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항상 과정이 중요합니다. 공부 잘하려고 하면 초등학교를 거치고, 중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교의 과정을 거쳐야 뭔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대학만 다니겠다는 것은 집을 지으면서 1층, 2층도 안 짓고 3층만 짓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과정을 거쳐야 우리는 목적지에 쉽게 갈 수가 있습니다.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려고 하면 불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화두 들고 참선한다고 하면서 밑바탕 작업을 하나도 해 놓지 않고 하는 것은 1, 2층은 짓지 않고 바로 3층 누각을 지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화두 들고 참선하는 것이 가장 명확한 방법인 줄 알면서도 어려운 것은 바탕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육조단경을 통한 선불교는 본질을 인식하는데 최고의 방법입니다. 인식론적인 방법 중에서. 목적지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잘 하기 위해서는 기초작업을 잘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교입선입니다. 교를 공부해 놓고 선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누구는 기초작업을 안 해도 잘 합니다. 그런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생에서 안 했을 뿐이지 전생에 그 과정을 다 거친 것입니다. 육조단경이 좋은 점도 있지만 잘못 이해하면 육조혜능 같은 사람도 깨치는데 우리도 공부 안하고 깨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깨치려고 하는 생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혜능은 불교를 접하기 전에 어떤 선비가 금강경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 깨칩니다. 먼저 마음이 열린 상태에서 불교에 입문한 것입니다.  

유정의 움직임 속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성성적적입니다. 고요하지만 살아있는 고요입니다. 잠자는 것은 상황과 분위기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이 그냥 잠자는 것일 뿐입니다. 적적만 있을 뿐입니다. 고요하면서도 모든 상황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어야만 유정이 무정의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당송 7대가 중에 한 명인 소동파가 상총선사를 찾아서 이 무정설법을 묻습니다. 스님, 경전을 보면 무정설법에 대해서 나오는데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내가 하는 유정설법도 모르면서 무정설법을 알려고 하느냐? 고 한마디 합니다. 도대체 뭐가 무정이고 뭐가 유정이고 납득이 안가는 상태에서 그 한 마디 듣고, 밤 늦게 산 속을 되돌아서서 나옵니다. 정신없이 거기에 빠져서 걷다 보니 어느 순간 폭포 앞에 다다른 것입니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순간적으로 탁 깨쳐 버린 것입니다. 무정설법이 뭔지 고민하고 물어도 대답도 안해주고 설명해줘도 모르던 것이 산길을 생각에 빠져 내려 오다가 폭포 앞에 도달했는데, 순간 폭포에서 떨어지는 그 물소리에 딱 깨쳐 버린 것입니다. 유명한 소동파의 견성시가 거기에서 나옵니다. 


계곡 물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이고 溪聲便是廣場舌

산의 모습은 청정한 법신인데 山色豈非淸淨身

밤새 설한 팔만사천 게송 夜來八萬四千偈 

다른 날 누구에게 일러줄꼬. 他日如何擧似人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면 움직임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습니다. 적적이 공부의 본질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고 깨어있는 성성적적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움직이지 않는 것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요하고 적적하고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본 뜻은 육체를 움직이지 않아야 그 속에 들어 있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집중하려고 육체를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를 통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고 확인하고 움직이지 않아야 깊이 집중해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걸어가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라고 하는 것은 인식하는 방법부터 익히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익어지면 본인 스스로 하게 됩니다. 공부의 본질을 알게 되면 마음이 집중하는 방법을 스스로 알아가게 됩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움직이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집중을 하는 것이고 깊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움직이지 않음이 움직이지 않음이면 뜻도 없고 부처의 씨앗도 없다. 무정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거기에는 뜻도 없고, 부처의 씨앗도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하다 혼침에 빠진다거나 무정의 움직이지 않음에 빠지는 것이 경책해야 될 내용입니다. 

능히 모양을 잘 분별하되 뜻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모양을 분별하고 알지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안다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인식하게 되면 생각이 요동을 치며 일어납니다. 무엇이든지 보게 되면 보는 것에서 내 생각을 덧붙여 새로운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능히 모양을 잘 분별하되 움직이는 것입니다. 내 인식이 끝도 없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깊은 본질까지 인식이 닿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깊이가 있는 강물이 흘러갈 때, 위에 있는 부분은 계속 움직이지만 밑에 있는 부분은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바다 윗 부분은 파도가 철썩이고 끝도 없이 움직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밑에 들어가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능히 모양을 잘 분별하되 본질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견성해서 본질을 보고 이런 견해를 지으면 이것이 곧 진여인 것입니다. 바로 여래이고, 깨침의 내용입니다. 육식인 현재의식과 칠식 마나식인 잠재의식은  우리가 평생 사용하는 것으로, 이것은 모양을 잘 분별하지만 분별한 모양과 더불어 끝도 없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움직이는 것의 깊은 뿌리에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들기 전의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곧 팔식 아뢰야식인 진여입니다. 

모든 도를 배우는 이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힘써 뜻을 써서 대승의 문에서 도리어 생사의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 생사라는 자체가 결국은 끝도 없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바로 생사에 집착하지 않으면 생사를 벗어난, 생사의 근원에 닿을 수 있는 그 뿌리까지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도를 닦는 사람은 모름지기 생사나 모든 번뇌망상에 집착하지 말라. 끝도 없이 일어나는 번뇌망상, 우리의 생각, 의식 이것은 내가 결정하고, 판단하는 모든 생각, 모든 의식, 이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고, 결국 거기에 집착해서 분별하고, 판단하고, 내 것이다, 네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집착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상이나, 모양을 봤을 때, 거기에 집착하지 않아야 보리를 볼 수 있고 본질을 볼 수 있고 부처까지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망상에 집착하는 것은 번뇌이지만, 번뇌망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보리이고, 지혜이고 깨달음입니다. 우리의 삶을 떠나서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에 끝도 없는 번뇌망상과 집착에 빠져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은 중생이지만 바로 그 번뇌망상에 집착하지 않고 거기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보리를 이루고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과 부처는 손의 손등과 손바닥과 같은 것입니다. 이 손바닥이 끝도 없는 번뇌망상이라면 이것을 놓아 버리면 부처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번뇌와 보리, 이것은 똑같은 양 쪽 날개일 뿐입니다. 움켜쥐고 있으면 번뇌지만 놓아 버리면 보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중생이지만 이 삶을 떠나서 부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전부다 움켜쥐고, 집착하는 이것을 어떻게 잘 버리느냐에 따라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의 사람이 서로 응하면 곧 함께 부처님 말씀을 의논하려니와 만약 실제로 서로 응하지 않으면 합장하여 환희케 하라. 말이 통하거나 말이 되면 말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냥 합장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말을 섞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을 섞으면 결국 번뇌망상만 더해질 뿐입니다.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음이라, 다투지 않으면 도의 뜻을 잃으리오. 미혹함에 집착하여 법문을 다투면 자성이 생사에 들어가느니라.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습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전부다 다투는 것입니다. 집착을 떠나 버리면 다툼이 없습니다.  집착하여 다투면 자성을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생사 윤회하는 생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인식이나 본질은 다툼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항상 다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 삶이 다툼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것이라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일기를 쓰는 것은 우리의 삶은 끝도 없는 다툼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연습을 하다 보면 본질에 갈 수 있습니다. 공부 잘 하려면 예습과 복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끝도 없는 예습과 복습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견성을 합니다. 


곧은 나무는 곧은 나무대로, 굽은 나무는 굽은 나무대로 다 쓰임새가 있습니다. 곧은 나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꾸불꾸불 굽은 나무도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곧은 나무는 팔지만 굽은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산을 지킵니다. 부처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 상태에서 부처의 세계를 여는 것입니다. 부처 될 사람만 챙기는 거이 아니라 전부다 끌어안는 것입니다. 부처만 전부다 데리고 와서 이것이 부처라고 하면 누가 못해요. 전부다 있는 상태 그대로 최고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다툼이 없습니다. 집에서도  다툼이 없고, 직장에서도 다툼이 없고, 세상 어디에서도 다툼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인식하고 이해하고 잘 알 때, 자신의 삶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끝도 없는 다툼 속에서 도인이 나타나면 안 부딪히는 것입니다. 다툼이 없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면 부처도 되지만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가장 효과적인 묘답입니다.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습니다. 미혹함에 집착하여 법문을 다투면 자성이 생사에 들어가느니라. 

세상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툼으로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됩니다. 승단에서는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것은 세속법에 물들여 있습니다. 세상 천지에 진리를 수행하는 수행자집단에 있을 수 없는 세속법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불교가 살아 있다면 다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공부는 누구를 따라서 하면 잘하지 못합니다. 내가 서있는 지점에서 출발해서 목적지인 부처까지 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대구에 서 있으면 대구에서 출발해서 서울 가려고 해야지 부산 가서 서울 가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상태에서 바로 부처로 갈 수 있는 것이 최고의 방법인 것입니다. 


스님이시여, 스님께서 가신 뒤에 가사와 법을 마땅히 누구에게 부촉하시겠습니까? 대사께서 말하였다. 법은 전하며 마쳤으니 너희는 모름지기, 내가 법을 너희들한테 다 전했으니까 가사와 법을 누구한테 전하고 달고 묻지 마라. 내가 떠나고 20여년 뒤에 삿된 법이 요란하니, 나의 종지를 혹란케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와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불교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여 종지를 세울 것이니, 이것이 곧 나의 바른 법이다.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바른 법이라고 하는 것은 목숨 걸고 그 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열심히 지키고 살아가는 그 사람이 결국은 바른 법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든지 진리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바른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사를 전하지 않는 것이 옳다. 도가 전승되는 것은 바로 깨달은 사람에게로 도가 전승되는 것이며, 목숨을 걸고 열심히 수행정진 하는 사람에게 그 법이 전해지는 것이며 그 법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가사 때문에 법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전승은 육조혜능으로 끝나 버립니다. 윗대부터 내려온 가사를 육조가 증명을 하고 없아이버립니다. 깨달음의 징표가 육조까지만 전해지고 그 다음부터는 없습니다. 육조단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만들며 선불교 천하를 만드는 또 하나의 묘수가 거기에 숨어 있습니다. 

가사와 법을 마땅히 누구에게 부촉하겠습니까? 부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처님이 금강경을 설했습니다. 수보리가 금강경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금강경을 부촉합니다. 그러면 수보리가 설법할 기회가 있으면 부처님 대신 금강경을 설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부촉한다는 말은 부처님께서 이해하는 것과 똑같이 그 법을 알고 있으니까 이 법은 네가 설해도 좋다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금강경 설법 자격증 같은 것입니다. 

가사와 발우를 없애는 저의도 그 후에 많은 수행자에 의해 이 돈법이 전해집니다. 결국 한 대, 두 대 내려가면서 중국천하가 선불교의 천하가 됩니다. 만약 가사와 발우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었겠어요? 한 군데에서만 그 법의 전통이 인정이 되고 나머지는 그 법의 전통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사와 발우가 없으니까 청원행사는 청원행사대로, 남악회양은 남악회양대로, 남양혜충은 남양혜충대로 자신이 육조혜능의 전통인 것입니다. 혜능의 법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모두다 전통이 되는 것입니다. 가사와 발우가 없기 때문에 전부다 전통이 되어서 돈법을 전하게 됩니다. 

육조혜능은 가사와 발우를 받았지만 없아이는 것에 대해 좀 더 신뢰성을 갖기 위해 달마부터 홍인까지 오조의 전법송을 설명해줌으로써 이 가사와 발우를 없아이도 괜찮다, 이것이 내 뜻이 아니고 초조달마부터 그 뜻을 밝힌 것이다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법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조 달마대사

내 본시 당나라에 와서/ 불법을 전하여 중생을 구하니/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리어/ 그 결과가 자연히 이루리로다.

 

제이 조 혜가대사

본래 땅이 있는 까닭에/ 땅으로 부터 씨앗 꽃 피니/ 만약 본래 땅이 없다면/ 꽃이 어느 곳으로부터 피어나리오.

 

제삼 조 승찬대사

꽃씨가 비록 땅을 인연하여/ 땅 위에 씨앗 꽃을 피우나/ 꽃씨는 나는 성품이 없으니/ 땅에도 또한 남이 없도다.

 

제사 조 도신대사

꽃씨에 나는 성품 있어/ 땅을 인연하여 씨앗 꽃이 피나/ 앞의 인연이 화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나지 않는다.

 

제오 조 홍인대사

유정이 와서 씨를 뿌리니/ 무정이 꽃을 피우고/ 정도 없고 씨앗도 없으니/ 마음 땅에 또한 남이 없도다.

 

제육 조 혜능

마음의 땅이 씨앗의 뜻을 머금으니/ 법의 비가 꽃을 피운다./ 스스로 꽃의 뜻을 씨앗이 깨달으니/ 보리의 열매가 스스로 이루도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였다.

너희들은 내가 지은 두 게송을 들어라. 달마스님의 게송의 뜻을 취하였으니 너희 미혹한 사람들은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그러면 반드시 자성을 볼 것이다.

 첫째 게송에 말씀하였다.

 마음 땅에 삿된 꽃이 피니/ 다섯 잎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무명의 업을 지어/ 업의 바람에 나부낌을 보다.

 둘째 게송에 말씀하였다. 

 마음 땅에 바른 꽃이 피니/ 다섯 잎이 뿌리를 쫓아 따르고,/ 함께 반야의 지혜를 닦으니/ 장차 오실 부처님의 깨달음이다.


이 마음 땅에 삿된 꽃을 피울래? 그렇지 않으면 바른 꽃을 피울래? 바른 꽃을 피우면 바로 부처의 세계로 가는 것이고 삿된 꽃을 피우게 되면 중생의 세계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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