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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14강 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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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4,187회 작성일 22-02-12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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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강 삼신


 육조단경강의로 말미암아 참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공부할 내용은 삼신입니다. 국가 구조를 보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삼발체제로 되어있습니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조직이나 세상을 지배하는 조직의 안정은 발이 세 개가 있는 체제입니다. 육조혜능은 삼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지식들아 모두 모름지기 자기의 몸으로 무상계를 받되, 다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삼신불을 보게 할 것이다.” 삼신은 청정법신, 원만보신, 천백억화신으로 표현됩니다. 우주계 전체를 청정법신과 천백억화신과 원만보신으로 이야기 했는 것을 혜능은 나의 색신의 청정법신에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화신에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보신불에 귀의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 자성의 법신, 화신, 보신에 귀의하겠다는 것이 바로 삼신에 대한 설명입니다. 육조혜능이 자성에도 삼신의 체제를 확립한 것이 육조단경에서의 주장 중에 하나입니다. 이 삼신이 재미있는 것이 기독교에서도 삼위일체설입니다. 성부, 성자, 성신, 혹은 성령이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근본, 법성, 성품이 기독교에서는 성신, 성령으로 표현합니다. 성부, 하나님 아버지. 성자,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러니까 형상을 갖고 있는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지상으로 내려 보냄으로써 결국은 이 땅에 사랑의 열쇠가 주어졌고 그 사랑의 열쇠로서 사랑을 실천한 복음을 전파함으로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이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설입니다. 기독교에서 성부, 성자, 성신을 불교의 삼신에 대비해 보면 법신, 보신, 화신과 같은 맥락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직선적이고 수직적인 구조라면 불교에서는 수직적인 구조가 없습니다. 삼신인 법신, 보신, 화신의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면 이 법신은 우주에 충만한 성품입니다. 법신이 나에게 들어오면 자성이 되는 것입니다. 법성은 원래 청정하니까 자성도 청정한 것입니다. 청정하다는 것은 물들기 전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흰색인지 무슨 색인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물들기 전의 것이라서 청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성이 나에게 들어오면 자성이 되므로 법성이나 자성은 같은 것입니다. 이 논리를 잘 이해하면 깨치고 난 다음에 신통이 생길 수 있고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게 되는 체제가 이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법성을 법신과 화신과 보신으로 나눴을 때, 법신은 우주에 충만한 근본, 물들기 전의 성품입니다. 법신이 이제 작용을 합니다. 작용하는 것으로 보신과 화신이 있습니다. 이 모양을 한 번 보세요. 동그랗게도 그려놨고, 세모지게도 그려놨고, 네모지게도 그려놨는데 모양대로 되는 것이 원만한 보신입니다. 보신의 모양은 원만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들어오면 인간의 성품을 갖게 되고, 개에게 들어가면 개의 성품을 갖게 되고, 나무에게 들어가면 나무의 성품을 갖게 되듯이 어디 가든지 원만보신이 하는 것은 그 종에 따라서 맞는 성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다 만들어내는 것이 천백억화신입니다. 우주에 충만한 법신을 갖고 있는 상태에 따라, 능력에 따라 보신을 만들어냅니다. 있는 모양을 그 상황에 맞게끔 끊임없이 작용하고 써먹는 것이 화신입니다. 이 우주의 진리인 본래 성품이 청정법신입니다. 우주의 어떤 상황에서든지 거기에 맞는 원만한 성품을 갖는 것이 원만보신입니다. 이 땅에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끝없는 자비를 베푼 천백억화신이 바로 석가모니불입니다. 불교의 삼신사상은 법신, 보신, 화신의 체제인데 육조혜능은 이것을 자성에 비유해서 표현을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거대한 법신과 보신과 화신이라는 이 구조를, 법성에도 이런 모양을 갖고 있지만 자성에도 이런 형태의 모양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자성도 원래 청정하고 또 상황에 따라 그 모양을 갖고 작용을 합니다. 거지를 만나면 거지에 맞는 몸으로 제도하고 돈 많은 상인을 만나면 상인의 몸으로서 제도하는 것이 화신입니다. 

육조단경에서는 자성에서 법신과 보신과 화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삼신체제에서 비로자나불이 법신입니다. 우주의 중심에 비로자나불이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이 남방에 화현하면 남방화주석가모니인 보생여래 석가모니불이 됩니다. 동방에 화현하면 동방약사유리광여래, 아촉여래가 됩니다. 서방에 화현하면 서방정토아미타여래가 됩니다. 우리가 죽어서 태어나는 서방정토극락세계를 다스리는 부처가 아미타여래입니다. 붉은색이 서쪽을 나타냅니다. 북쪽에 화현하면 불공성취여래가 됩니다. 연두색은 북쪽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지권을 살펴보면 비로자나불은 지권인을 하고 있으며, 대웅전의 석가부처님은 선정인이나 항마촉진을 하고 있습니다. 남방 보생여래는 여원인을 하고 있고 북쪽 불공성취여래는 시무외인을 하고 있습니다. 천수경에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반메훔’이 있습니다. 우주의 거룩한 자비심이 이 진언에 모두 들어있습니다. 우주의 근본 소리는 옴 하나입니다. 옴이 비로자나불을 나타내며 마는 동방, 니는 서방, 반은 남방, 메는 북방, 훔은 이 세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은 법신부터 우주의 동, 서, 남, 북의 사방을 모두 포함하고 있고 마지막 훔은 성취를 나타내며 현상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 원하는 것을 이룸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중앙은 백색, 동방은 청색, 서방은 적색, 남방은 황색, 북방은 연두색으로 나타내고 있어 색깔을 보고도 어느 세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공, 지, 수, 화, 풍의 이 현상세계는 식의 세계입니다. 유식, 의식, 제칠식, 제팔식, 바로 이 식으로서 이 세상을 나타내고 유지합니다. 색신은 몸뚱이로 집에 해당하며 그 속에 법신과 보신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미혹하여 색신 속에 있는 법신과 보신은 보지 못합니다. 내 속에 있는 이 부처도 원래 청정합니다. 그래서 청정한 것을 상황에 따라 끝도 없이 자비를 베푸는 색신이 천백억화신입니다. 우리는 자기 속의 부처는 보지 못하고 바깥에서만 부처를 찾습니다. 자기 부처만큼 더 중요한 부처가 없습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기본적으로 관계속에서의 관계를 규정합니다. 나와 타자, 대상, 조직 그 속에서의 관계를 설정하고 규정을 합니다. 불교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문제입니다. 관계학도 자기 자신이 해결되면 다 해결 되는 것입니다. 불교공부를 하다가 빠지는 딜레마가 모든 문제가 자기 자신에게 귀속되어 있는데 불교로써 세상을 어떻게 구하는가? 내가 지극하면 어떻게 세상이 달라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좀 더 생각해보면 나라고 하는 이 하나가 모든 조직과 관계되는 전부도 결국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인식하면 그 속에서의 체계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선지식들아 들어라, 선지식들에게 말하여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색신에 있는 자기의 법성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할 것이다. 당신들이 엉뚱하게 외부에서 부처를 구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부처를 구하라는 것이 바로 이 삼신사상입니다. 그래서 삼신사상은 외부의 부처에 주어져 있는 것이 내 색신에도 법신과 보신과 화신이 다 있으니까 바로 자기 자신의 부처를 찾고 자기 자신의 부처로서 세상에 자비를 행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덕산선감은 평생 경전을 공부해도 부처가 못 되는데 어떻게 참선을 하여 공부를 한다고 부처가 될 수 있는가? 라고 의심하면서 남방 오랑캐들을 쳐부수러 갔습니다. 남방에 도착하여 용담선사가 계시는 절에서 저녁 공양을 하고 차 한잔 하고 방으로 가려고 나왔는데 달빛도 없어 캄캄했습니다. 용담스님이 촛불을 들고 가라고 촛불을 주었습니다. 덕산스님이 촛불을 받는 순간 스님이 불을 훅 꺼버려 천지가 캄캄해졌습니다. 그 순간 덕산은 선에서 이야기하는 참 나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서 금강경소초를 법당에서 다 태워버립니다. ‘밖에서 나를 찾는다고 평생을 우주 끝까지 찾아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자기의 허망 생각 속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귀속됩니다. 육조혜능은 그 문제를 자신이 갖고 있는 내부의 삼신사상으로 돌린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우주에서 삼신사상을 이야기 하지 말고 너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라는 겁니다. 원래 청정한 자성을 얼마든지 천백억화신으로 잘 쓸 수 있고 또 내가 갖고 있는 원만한 성품도 거기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우주라는 것입니다. 몸뚱이와 우주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신에게서 찾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 몸의 부처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의 부처라고 하는가? 선지식들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의 성품에 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 본래 성품은 스스로 깨끗한데, 깨끗하여 모든 것이 내 성품 속에 있다.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악을 행하게 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착한 행동을 닦게 되는 것이다.’ 원래 청정한 성품 속에서 청정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물들어 있는 것만 계속 쓰는 것입니다. 물들기 전의 것은 청정한데, 물들기 전의 것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세세생생 윤회를 하면서 그 행위에 의해서 물들고 오염된 것을 끝도 없이 일으켜 쓰는 것입니다. 원래 깨끗한데 내가 물들여져 있는 것에 따라서 어떤 것을 보면 선한 생각도 일으키고 또 어떤 경우는 악한 생각도 일으키는 것입니다. 선한 생각, 착한 생각을 일으켜 착한 행위를 하게 되면 부처로 가는 것이고 악한 생각을 일으켜 악한 행위를 하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원래 청정함 속에 청정한 것만 있으면 우리는 끝도 없이 선한 행위 밖에 안 합니다. 청정이 물들여져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70%는 선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속에는 끝도 없는 이기심이 있어 작용하지만 공부하려고 마음을 낸 상황에서는 내 생각 자체가 선한 쪽으로 흘러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70점 짜리 삶은 전생의 업대로 사는 것입니다. 공부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과 생활은 어느 정도 일정한 규칙을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당장 부처는 못 된다고 하더라도 공부를 함으로써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게 애 써는 마음이 있는 한 악으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내 속에 중생의 업들이 용솟음 쳐 흘러가고 하지만 선한 쪽으로 끝없이 이끌어 가는 것은 공부하려고 하는 의지 때문입니다. 이 생에서 많은 공부를 이루면 그 과보가 현생에 당장 나타나는 것도 있습니다. 오늘 공부해서 저녁에 바로 결과를 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참선하다보니까 기분이 좋아가지고 일요일인데도 바깥에 안 나가고 계속 참선하고 책을 봅니다. 나갔다하면 사고 쳐야 하는데 참선 때문에 그 일이 안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그 참선한 복이 저녁에 생기는 것입니다. 선한 과보는 바로 오늘 당장 생길 수도 있고 또 이 생에서 받을 수도 있어요. 또 다음 생에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인연은, 어떤 결과는 몇 생을 지나고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 속에 씨앗을 한 번 뿌려놓으면 그것은 영원히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공부하는 선업을 한 번 뿌려 놓으면 이것은 내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음 생에  교수가 되었다, 판검사가 되었다. 의사가 되었다했을 때 모두 공부한 과보입니다. 공부했는 인연공덕으로 머릿속에 공부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자꾸 공부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뿌려놓은 씨앗은 언젠가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확률이 가장 큰 것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고가 난다해도 집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릇 하나 깨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에서의 인과는 확률론적인 인과입니다. 확률이 큰 쪽으로 나타납니다. 확률이 큰 쪽으로 나타났을 때, 나타난 상황에서는 1이 됩니다. 인과라고 하는 이 자체가 내가 어떤 행위를 했더라면 그 행위에 대한 결과가 반드시 있습니다. 누군가 이생에서 전생에 살았던 업에 의해 암에 걸릴 확률이 51%입니다. 이 사람은 나이가 들면 암에 걸리게 되어 있어요.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절을 갔다가 불교에 반해 출가를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암에 걸릴 확률이 51%지만 전생 어느 생에 공부했던 공덕으로 어머니 손잡고 절을 왔다가 그 인연으로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51% 암이 걸릴 확률이 출가 생활을 하다 보니 47%가 되어 정상으로 잘 살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사회생활을 했다고 하면 직장 다니고 업무 관계로 자주 술을 마시게 되어 암에 걸릴 확률에 의해서 그대로 암에 걸리는 겁니다. 그래서 사소한 기회라도 일어날 확률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기회를 내가 잘 포착하고, 잘 성숙시키면 분명히 이생에서 받아야 될 그 과보를 소멸시키거나 줄여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생을 그렇게 살게 되면 암에 걸릴 확률은 47%로 되고 그다음 생에도 암에 안 걸리게 됩니다. 우리는 암에 걸릴 확률이 47%쯤 됩니다. 51%로 태어난 사람은 암에 걸리는 것입니다. 한 생 삐끗해서 잘못 살아가면 그 확률이 51%로 넘어버리는 것입니다. 착한 행위를 한다, 착한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은 바깥으로 향했던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로 돌려서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법신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자성 속에 있어서 자성은 항상 깨끗함을 알라.’ 이것이 물들어 버리면 깨끗하지 않습니다. 물들여져 있는 상태를 우리는 나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물들어 있는 그것이 나인 줄 압니다. 불교와 인연이 되어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이 삶에 좀 더 본질적인 것이 있음을 알게 되고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물들기 전의 나를 한 번 찾아보자고 하는 것이 자신을 가라앉히는 작업입니다. 나 자신을 정화시키는 작업입니다. 공부하는 모든 것은 전부다 집중으로 귀결됩니다. 집중을 하다보면 자신을 가라앉히는 작업을 끝도 없이 하는 것입니다. 물들어 있는 것도 다 가라앉히고 보니까 맑고 청정한 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힘이 생겨서 더 뚫고 들어가보니 물들어 있는 그 밑에는 물들기 전의 청정한 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1000미터 보다 더 깊이 바닷속에 들어가 보니까 원래 청정한, 오염되지 않은 그대로의 바닷물이 있더라는 겁니다. 내 자성이 항상 그렇게 청정하다는 것을 알아라하는 겁니다. 물들기 전의 성품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면 끝도 없는 자기성찰과 자기관조와 자기발전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결국은 이생에서 내 삶도 풍요롭게 하고 원만하게 잘 살게 만듭니다. 또 이것이뿌리가 되어서 다음 생도 멋지게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한 생에 끝나버리는 공부는 없습니다. 우리가 끝없이 윤회를 하는 것과 같이 끝도 없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공부 안하고 세월만 지나가도 알게 된다면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생에 몰랐던 것이 다음 생에 알아진다면 공부할 필요 없습니다. 풀지 못했던 미분적분 문제가 10년 지났다고 풀리겠습니까? 그때 못 풀은 문제는 지금도 똑같이 못 풀어요. 그때 몰랐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음 생에 가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음 생에 가도 쉽게 알게 됩니다. 누가 공부를 잘 한다면 그 사람은 전생에 그만큼 했기 때문에 이생에서 공부하는 것이 쉽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입니다. 공부 한다는 것이 능력을 키우는 겁니다. 대통령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싶다면 키워 놓은 능력이 대통령이 될 만큼 되면 대통령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관 하고 싶다, 교수 하고 싶다, 의사 하고 싶다면 그 능력이 되는 사람은 할 수 있지만 능력이 안되면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공부한다는 것은 불교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능력을 집중시키고, 키우는 작업입니다. 불교의 본질만 잘 이해하면 돈 벌려고 하면 돈 벌고, 권력 가지고 싶으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법신과 보신만 확실히 알면 천백억화신은 그냥 써먹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 능력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에 따라서 뭐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공부한다는 것은 그릇을 키우고 밝히는 작업입니다.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해와 달은 항상 밝고 맑게 빛날 뿐입니다. 구름이 가려있으면 못 보고 구름이 걷히면 보게 됩니다.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구름을 걷어내야 합니다. 원래 청정한 성품을 본다는 것은 구름을 걷어내는 작업입니다. 물들어져 있는 그 상황을 걷어내고 나면 항상  구름 위에 빛나는 별과 달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지헤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는 것이다.’  참선을 하여 무념무상에 들어가고 삼매에 들어 견성을 하게 되면 바로 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희미하고 불투명한 이 세상이 투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소중한 보물을 얻게 됩니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다.’ 우리는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인 수억 겁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지은 그 행위에 물들어 있는 거기에 갇혀 있어 그 경계만 끄집어내서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아집이고 아만이고 아애인 이것을 나라고 착각을 합니다. 

‘선지식이 참 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쳐 밝아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며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 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청정법신, 원래 내가 갖고 있는 이 자재한 성품, 물들기 전의 나를 알아버리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될 겁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착한 생각을 일으키라고 했어요. 착한 생각을 일으키다 보면 거기에 물이 듧니다. 공부에는 항상 계기가 있어요. 매일, 매주 하다 보면 나름의 어떤 순간, 결정적인 계기가 오면 신심이 생기게 됩니다. 


공부하는 것은 컴퓨터 한 번씩 정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공부는 내 능력을 정리하는 겁니다. 내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입니다. 하다보면 본래 청정한 청정법신까지 보게 됩니다. 이생에서 우리의 삶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제까지 살아왔던 내 삶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얼마나 바뀌겠어요? 또 불안해서 못 바꿔요. 누가 옆에서 아무리 멋진 옷이라고 해도 자기가 입고 다니는 옷을 입고 다녀요. 자기 스타일에서 조금만 달라지면 불안해서 겁이 납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이생에서 죽으라고 공부한다고 해도 얼마나 바뀌겠어요? 방향이 1도 바뀌는 그것이 바로 나를 부처로 만드는 것입니다. 1도 바뀐 상태로 계속 가다보면 부처가 됩니다. 그냥 그대로 가다보면 죽다 깨어나도 끝도 없는 윤회 밖에 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지만 선업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돌아보세요.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 자기와 가족들을 위해 살았고 도둑질 안 했고 크게 다른 사람한테 손해 끼치는 일 안 했기 때문에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끝도 없는 자기 중심의 삶에서 우리는 벗어나지를 못해요. 자비가 일어나는 삶이 착한 삶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자비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원래 청정하다는 것만 알아버리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자성은 곧 비어 고요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바로 무념으로 자성은 적정하지만 생각하여 무념이 되지 못하면 이것은 끝도 없이 번뇌망상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지옥으로 갑니다. 착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고, 극락이 됩니다. 독과 해침은 변화하여 축생이 됩니다. 진심인 독, 해침은 나를 축생으로 만들고 자비는 변화하여 나를 보살이 되도록 하고 지혜는 변화하여 천상세계가 되게 하고 혹은 보살, 부처가 되게 하고 우치함은 변화하여 아래 나라인 지옥, 축생이 됩니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으며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한 생각이 착하면 지혜가 생기고 이것을 자성의 화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성의 화신은 이 세상 살아있으면서 극락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 속에는 지옥부터 극락까지 끝도 없이 요동을 칩니다. 평생 극락에 한 번도 못 가본 사람이 누가 옆에서 극락가라고 기도해주면 극락 가겠어요? 평생 극락에서 산 사람은 가만히 놔둬도 극락 갑니다.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어떤 세계에 가느냐? 하는 것은 평생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가에 의해 그 마음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신은 내 마음 속에 지옥부터 극락까지 육도윤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근복적인 번뇌는 탐, 진, 치입니다. 탐신과 진심과 치심입니다. 탐은 물질적인 탐욕입니다. 진은 정신적인 형체가 없는 것에 대한 탐욕입니다. 치, 어리석음은 탐욕과 진심을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전부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요. 탐심이 강하면 지옥에 살고, 진심이 강하면 아귀로 살고, 치심이 강하면 축생으로 삽니다. 신경질이 나 화를 내는 것은 그 순간 아귀가 되는 겁니다. 끝도 없는 선한 생각을 일으키면서 극락의 즐거움에 있게 됩니다. 이 세계를 열 가지 세계로 나눠보면 육도의 여섯 가지의 세계에다 성문, 연각, 보살, 불 하여 열가지 세계가 됩니다. 사성제의 진리를 이해하고 그렇게 생활하면 성문이 됩니다. 연각은 십이연기의 도리를 터득하고 그렇게 삶을 살아가면 연각이 됩니다. 보살은 육바라밀을 실천하면서 끝없는 자비를 행하면 보살이 됩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부처가 됩니다. 성문, 연각, 보살, 불. 이 네 개가 극락 위에 있는 세계입니다. 


빨, 주, 노, 초, 파, 남 이 여섯 가지 색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색깔이라면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극락세계에 해당하는 행위인 끝없는 자비를 베풀고 지혜롭게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면 내 속에는 남색이 가장 많이 축적되어 있겠지요. 그러면 죽어도 남색을 따라 가서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끝도 없이 탐욕만 내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평생을, 그 탐욕을 부리면서 살았다면 내 속에는 빨강색만 축적되어 죽고 나서 빨강색 따라가다  보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죽어서는 자기가 좋아했던 그 색깔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고 난 다음에 어디 가느냐? 내가 그냥 좋아했던 색깔을 그냥 따라 갈 뿐입니다. 따라가다 보니까 지옥이 되고 극락이 되는 것입니다. 육도윤회 한다고 하는 것은 죽어서 태어나는 세상도 육도윤회가 되지만 더 분명한 것은 천백억화신하는 내 몸속에 육도가 다 들어있습니다. 천백억화신 속에서 지옥부터 부처까지 다 포함되어 그것을 끄집어내서 쓰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왕이면 부처를 끄집어내서 쓰자는 겁니다. 내 속에 부처 색깔 밖에 없으면 무엇을 끄집어내서 써도 부처밖에 없는 것입니다. 끝없는 자비가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내 속에 자비로 채워지지 않으면 변화가 없습니다. 공부해서 변화가 된다? 변화가 일어난다? 다른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자비로 채워지면 그게 바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끄집어내어 써보면 자비 밖에 안 나옵니다. 딴 마음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속에 축적되어 있는, 내 속에 들어 있는 그 색깔이 나올 뿐입니다. 공부를 할수록 채워지는 것은 자비 밖에 없습니다. 여유가 생기고 다른 사람을 위해주는 마음이 생기고 앞, 뒤를 분간 할 줄 아는 것이 자비가 생겼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6시간을 걸어 봉정암에 갑니다. 좁은 법당에 들어가서 옆에 누가 자기 자리 차지할까 싶어서 오지도 못하게 하고 자리 차지하려고 야단입니다. 기도 잘 하고 왔으면서 어처구니없게도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지옥으로 변해버립니다. 공부하면 자비가 채워집니다. 


발우공양 할 때 보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 나옵니다. 무엇을 원만보신불이라고 합니까? 한 등불이 능히 천 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 년의 어리석음을 없앱니다.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세요.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보신이라 합니다.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 년의 착함을 물리쳐 그치게 합니다. 한 순간, 착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순간 나는 부처이며, 한 순간, 악한 생각 일으키면 바로 그 순간 지옥이 되는 겁니다. 과거로부터,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의 그 한 생각, 착한 것을 보신불이라 합니다. 착한 것이 자비고, 원만이고 항상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거기에 적응해서 거기에 맞는 그 상황을 창출하므로 원만보신입니다. 

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체, 상, 용에서 체는 본질이며, 상은 본질의 모양인 형상입니다. 용은 본질의 작용인 쓰임새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체, 상, 용으로 이루어져있어요. 우주에 가득한 그 본래의 성품이 법신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면 사람, 동물이면 동물, 나무면 나무 어디에든 거기에 맞는 그 형상을 이루고 있는, 그 모양을 이루고 있는 원만한 모양이 바로 보신입니다. 그것의 쓰임새가 용인 천백억화신입니다. 이 체, 상, 용의 도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법신이 청정하면 이 청정한 것의 모양은 보신이고, 청정한 것의 작용은 화신입니다. 법신의 모양이 보신이며 법신의 작용이 화신입니다. 그러므로 법신과 보신과 화신은 하나일 뿐입니다. 법신을 쫓아 생각함이 곧 화신이며 순간, 순간의 생각마다 착한 것이 보신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충족되어 있는 자비의 모양이 보신이며, 자비의 작용이 화신입니다. 

‘스스로 깨쳐 스스로 닦음이 곧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치고 스스로 닦음이 돌아가 바로 법신에 의지하는 것이다.’ 엔트로피를 끊임없이 낮추는 작업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가죽과 살은 색신이며 집이며 귀의할 곳이 아닙니다. 청정한 법신과 보신과 화신에 비록 이 몸뚱이를 빌어서 이야기하지만 몸뚱이 속에 들어 있는 깨달음, 바름, 깨끗함에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육조단경 내용을 한번 독송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무리 합시다. 


‘선지식들아 모두 모름지기 자기의 몸으로 무상계를 받되 다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신의 삼신불을 보게 할 것이다. 나의 색신의 청정법신에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화신불에 귀의하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보신불에 귀의합니다. 색신은 집이므로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앞에 세 몸은 자기의 법성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세 몸의 부처를 찾고 자기 색신 속에 있는 세 성품의 부처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선지식들은 들어라. 선지식들에게 말하여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색신에 있는 자기의 법성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할 것이다. 이 세 몸의 부처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의 부처라 하는가? 선지식들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의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함을 행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착한 행동을 닦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속에 있어서 자성은 항상 깨끗함을 알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을, 안개를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들의 자성도 깨끗함이 맑은 하늘과 같아서 혜는 해와 같고 지는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 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쳐 밝아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며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 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고 이야기 한다. 어떤 것을 천백억화신불이라고 하는가? 생각하지 않으면 자성은 곧 비어 고요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착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고 독과 해침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윗 세계가 되고 우치함은 변화하여 아랫 나라가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으며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한다. 한 생각이 착하면 지혜가 생기며 이것을 이름 하여 자성의 화신이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원만보신불이라고 하는가? 한 등불이 능히 천 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 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며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고 한다.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착함을 물리쳐 그치게 하고 한 생각의 착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며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착함을 보신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다. 법신을 쫓아 생각함이 곧 화신이며 순간, 순간의 생각마다 착한 것이 곧 보신이며 스스로 깨쳐 스스로 닦음이 곧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다. 가죽과 살은 색신이며 집이므로 귀의할 곳이 아니다. 다만 세 몸을 깨치면 곧 큰 뜻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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