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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17강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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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531회 작성일 22-05-2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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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강 마하반야바라밀 



의식에는 알라야식 제팔식, 마나식 제칠식, 제육식 의식이 있습니다. 육식, 칠식,  팔식에 작용하는 것은 편행 다섯 개 밖에 없습니다. 촉, 작의, 수, 상, 사는 알라야식에도 작용하고 마나식도 이 다섯 개를 포함한 열일곱 개가 작용하고 육식은 이 다섯 개를 포함한 51심소법이 작용합니다. 팔식과 칠식과 육식에 모두 작용하는 것은 촉, 작, 의, 수, 상, 사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견성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TV에서 중국 화산을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화산은 절경이지만 험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화산에서 일하는 짐꾼들은 산 밑에서부터 정상까지 겨우 한사람 비켜갈만한 외길로 짐을 날라다 줍니다. 약 60KG의 짐을 지고 목적지 화산 정상의 절에 짐을 지고 날라다 주는 사십대 부부가 있었습니다. 화산 밑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부부가 되었는데 그 부부에게 산을 오르던 관광객이 묻습니다. 컸던 부부였는데 두 짐꾼이 하루 종일 짐을 날라 목적지까지 가져다주는데 짐을 지고 가니까 산에 올라가던 관광객들이 묻습니다. 이렇게 짐을 날라주면 하루 일당이 얼마냐고? 그러나 부부는 웃기만 합니다. 자꾸 물으니까 하루 일당이 70 몇 위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하루 일당이 13,000원입니다. 두 부부가 한 달 동안 일하면 40만 원정도 되었습니다. 선생이 되고 싶어하는 중학생 아들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14년째 짐을 지고 나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루 일당 13,000원을 벌기 위해서 이 산을 매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전생에 얼마나 많은 복을 지어 이렇게 편안하게 살면서 또 공부할 수 있는 인연을 지었을까?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공부 할 수 있는 기회와 인연이 주어졌을 때 목숨을 걸고 온 힘을 다해서 공부해야 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이 향해야 될 곳은 공부입니다. 견성할 때까지 공부해야 되고 그 공부가 결국은 세상을 복되게 하고 세상은 그 봉사 때문에 편안하고 행복한 극락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마하반야바라밀에서 마하는 설명했으며, 이번 시간에는 반야를 설명하겠습니다. 반야는 지혜이며 PRAJNA 입니다.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우리는 반야행이라고 한다. 지혜로써 행위를 하는 것을 반야행이라고 하며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타나거늘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스스로 수행하고 닦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마음속에는 탐, 진, 치의 어리석음으로 가득 채워 놓고 수행한다, 닦는다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참선한다고 앉아 있는 것만이 닦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닦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공부하는 것만큼 열심히 닦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어서 앉아 있는 것을 닦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채워 놓고 참선 잘 했다, 수행 잘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반야는 형상이 없습니다. 지혜의 성품입니다. 내가 지혜로우면 그것이 반야이고 어리석어 무명 때문에 일으키는 것이 치입니다. 무명으로 인하여 탐심과 진심이 일어납니다. 치는 지혜로우면 그냥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번뇌가 따로 있고 보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소멸 되면 그냥 보리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반야는 형상이 없으니 지혜의 성품이 반야라는 것입니다. 결국 반야가 깨달음입니다. 절에 다니면서 가장 많이 독송한 것이 반야심경일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반야가 이 반야입니다. 견성해서 반야 속에서 우리의 삶을 살자는 것이 반야심경의 내용입니다. 반야는 구체적으로 실상반야, 관조반야, 방편반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또 문자반야를 넣기도 하지만 방편반야에 넣습니다. 불교의 교리는 묘하게 삼박자입니다. 세 가지가 체, 상, 용으로 근본 체, 뿌리가 있으면, 그 근본의 모양이 있고 모양을 갖고 쓰임새가 있는 작용이 있습니다. 모든 경전에서도 불교가 표현되는 내용은 체, 상, 용의 내용입니다. 실상반야는 체에 해당됩니다. 지혜를 터득했을 때, 나에게 비치는 이 제법의 실상, 즉 진리 자체인 법신을 실상반야라고 합니다. 깨달음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볼 때, 그때 보이는 것이 실상반야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실상반야를 담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성규는 김성규대로의 형상을 갖고 있고 신선생님은 신성생님대로의 형상을 갖듯이 개별적인 형상을 갖는 것이 관조반야입니다. 지혜를 터득한 상태에서 어떤 형상을 깊이 관찰하는 것을 보신이라고 하고 보신은 본체를 나타내기 위한 어떤 형상이나 모양입니다. 그것이 바로 관조반야가 됩니다. 방편반야는 이것의 작용입니다. 김성규가 이렇게 강의를 한다거나 어떤 행위를 한다거나 누구를 도와주는 행위를 할 때, 작용하는 그 행위가 방편반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터득한 지혜를 현실에 적용시켜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구체적인 지혜의 작용을 화신이라고 하며 이것은 방편반야입니다. 

앞에서 제팔식 알라야식, 제칠식 마나식, 제육식, 의식을 설명했는데 우리는 근본 체를 모릅니다. 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내 행위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는, 저장되어 있는 그 업을 평생 끄집어내 쓰는 것입니다. 그 업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뚫고 들어가 보면 물들기 전의 본래 본성인 알라야식이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한 번 제대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상반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본체만 잘 이해할 것 같으면 견성입니다. 견성에 다다르기 위해서 사마타 집중을 하면 됩니다. 모든 공부는 집중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공부의 처음도 집중이고 끝도 집중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법을 설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어느 누구든 이전에도, 앞으로 천 년 후나 만 년 후에도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팔정도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팔정도가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정념과 정정입니다. 정념은 지혜로와야 하고 정정은 집중을 해야 됩니다. 지혜롭게 집중을 하는 것이 바로 견성 할 수 있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부처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생에 이렇게 몸 받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멋지게, 가장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지혜롭게 집중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목적지인 부처까지 가면 더 좋지만 부처까지 못 가더라도 이 공부는 내 삶에 매일매일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내가 업대로 행위를 하면서 직업을 갖습니다. 이때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지혜롭게 집중을 하면 됩니다. 일 잘하면 돈은 그냥 벌려요. 다른 일도 그냥 다 이루어져요. 지혜롭게 하는 것은 방향성이 바르다는 것입니다. 집중을 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있지만 우리는 지혜롭게 집중해야 부처가 됩니다. 집중하다 보면 무념에 들고, 무념에 들면 결국 삼매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면 견성하게 하게 되고 부처가 됩니다. 이제까지 육조단경을 보면서 공부했던 중심 되는 내용이 바로 이것 입니다. 견성인 자성을 보고 좀 더 크게 깨쳐 나아가면 법성도 보게 되고 결국 본래 성품인 불성을 보게 됩니다. 자성을 보는 것을 견성이라고 하고 좀 더 크고 넓게 법에 대한 성품을 보게 되면 법성을 본다고 하고 자성과 법성을 보는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외명철이 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요. 

반야라고 하는 것은 직관이고 공이며 직관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수행하고 생각하고 노력함으로써 획득되는 능력입니다. 세상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끝도 없는 분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분별을 잘하면 돈도 벌지만 분별을 못하면 망하게 됩니다. 누구나 다 사업하면서 계획을 잘 세워 시대에 맞는 인기 있는 물건을 만들어내면 사업이 번창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게임 하지마라고 해도 아이는 어떻게라도 게임을 합니다. 그런데 게임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하고 내버려두면 실컷 하다보면 이거는 아니구나 하며 스스로 안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게임을 한 번도 안 해 보면 하지마라, 하지마라 아무리 해도 거기에 뭐가 있나 싶어서 계속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무리 하지마라 해도 본인이 체험하고 경험을 해보아야 끝이 납니다. 한생 실컷 돈을 벌어보아야 탐욕이 없어지고, 또 한생은 권력을 누려보면 그 생각들이 없어지게 됩니다. 분별은 분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이해가 되기 위해서는 충분히 해보고 정리가 되어야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리가 될 때 분별은 반야로 들어가게 됩니다. 본인이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 그냥 스스로 포기 한 것은 결국 찌꺼기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면 분별과 반야라고 하는 것은 전혀 동 떨어진 것일까요?

옛날 한 수행자가 참선하다가 ‘내가 이렇게 참선하면서 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보다 정치를 해서 복되게 하는 것이, 베푸는 것이 훨씬 더 클 것이다.’는 한 생각을 일으킵니다. 다음 생에 황제의 몸 받아서 전쟁을 해 계속 땅 따먹기나 하면서 평생을 보내다가 하루는 전생에 했던 습에 따라 참선을 하는데 전생에 자기가 수행자였던 것입니다. 이생에 태어나서 이거 뭐하는 짓인가? 그래서 평생을 잘한다고 했던 이런 일들이 수행자의 한 나절보다 못하는구나 하면서 황제 자리를 버리고 다시 출가의 길을 갑니다. 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내 속에서 체험을 통한 모든 분별에 대해서 평정이 되었을 때 반야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다양합니다. 내 머리 속을 텅 비워놓고 앉아 있어보세요. 소발에 쥐잡기 식으로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은 확률이 더 크고 높은 쪽으로 해야 됩니다. 불교에 대한 무식자 보다 내 머릿속에 불교라는 것을 채워 놓고 공부를 하는 것이 깨달음의 확률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불교에 대한 무식자가 참선한다고 평생을 앉아있어 보세요. 뭐가 되는가? 분별이라는 것도 나한테 충분히 가득 찼을 때, 그것이 반야로 바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없으면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습을 통해서 분별을 모든 차별을 해 보았을 때 평등을 알게 되고 반야직관이 됩니다. 차별도 하지 않으면서 평등은 알 수 없습니다. 견성하면 평등이 됩니다. 법성이나 자성은 하나입니다. 평등하지 말라고 해도 평등이 될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 대한 예를 임제선사를 통해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불교 법맥은 달마- 혜가- 승찬- 도신- 홍인- 육조혜능으로 이어집니다. 초조부터 시작해서 이조, 삼조, 사조, 오조, 육조입니다. 육조까지는 한 명인데 칠조부터는 법맥이 갈라집니다. 남양도 칠조고, 청원행사도 칠조고, 영가현각도 칠조고, 남악회양도 칠조고, 하택신회도 칠조입니다. 그다음 팔조는 수십 명이 법을 이어 내려오는 겁니다. 육조 밑에 남악회양이 있고, 남악회양 밑에 마조도일이 있고, 마조도일 밑에 백장회해가 있고, 황벽희운, 임제의현으로 이어집니다. 임제의현에 와서 선종 오가중 하나인 임제종이 창립됩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선불교에 아직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분이 임제의현입니다. 얼마나 독창적이면서도 대단한 생각을 갖고 계셨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되어야 하고 임제 같이 되어야 합니다. 공부하다 보면 내 파이가 점점 더 커지고 깊이도 깊어집니다. 임제가 따로 있고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내가 부처입니다. 임제스님과 수백 명의 스님들이 부처가 되려고 황벽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황벽 밑 제 1 수좌로 목주도명이 있었습니다. 목주도명은 임제와 운문을 깨치게 합니다. 선불교의 역사 속에서 들어나지 않으면서 가장 빛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목주도명입니다. 황벽 밑에서 임제는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목주도명이 3년을 지켜보니까 어느 누구도 따라 갈 수 없을 만큼 엄청나고 대단한 근기를 가진 임제였습니다. 하루는 목주도명이 임제에게 스승님께 부처가 무엇인지 한번 물어보았느냐고 묻습니다. 임제는 아직 한번도 안 물어보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럼 앉아서 공부만 하지말고 물어보아라 하며 임제를 황벽에게 보냅니다. 임제가 황벽에게 인사드리고 부처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부처가 뭐냐고 묻자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따귀 30대를 맞고 물러났어요. 며칠 후 또 갔습니다. 도대체 부처가 뭔데 또 묻자마자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따귀 30대를 맞고 쫓겨났습니다. 3번을 그렇게 하고 임제는 더 이상 자신은 공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목주도명을 찾아갑니다. 저는 황벽스님하고는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푸념을 하고 스승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니까 이 강변따라 쭈욱 가면 고안에 대우스님이 머무는 절이 있는데 그곳에 들렸다 가라고 합니다. 특별히 갈 데도 없어 그냥 시키는 대로 대우스님이 계시는 절에 갑니다. 혼자 공부하는 조그마한 암자였습니다. 

젊은 스님이 들어서자 ‘어디서 공부했는고?’ 하니까  ‘황벽스님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하면서 북받쳤던 억울함이 올라와서 하소연합니다. 공부하다가 황벽스님한테 부처가 무엇인지?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따귀만 실컷 맞았고 원통해서 그만두고 나왔다 푸념을 했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갑자기 인자하게 보이던 고우스님이 멱살을 잡으며 황벽이 너를 위해서 그토록 간절하게 불법을 일러주었는데 뭐 아무 잘못도 없는데 황벽이 너를 때렸다고? 여기까지 와서도 허물이 없다고 하느냐고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임제는 그 순간 깨쳐버렸습니다. 황벽한테 실컷 맞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맞고 원통해서 몇 날을 고민하고 생각도 했지만 답을 못 얻었는데 대우스님한테 와서 그 울분을 토하고 있는데 대우스님의 그 한마디 하는 순간, 탁 터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임제는 그놈의 황벽의 불법도 별 게 아니구나 하였습니다. 듣고 있던 대우스님이 갑자기 임제의 그 말을 듣고 ‘이런 오줌싸게 같은 놈, 조금 전에는 허물이 있느니 없느니 하더니 이제 와서는 뭐? 황벽의 불법이 별 거 아니라고? 빨리 한 마디 일러봐?’ 하면서 한 마디 하라고 합니다. 그럴 때 임제는 대우의 옆구리를 팍, 팍, 팍 세 번 찔러요. 그러니까 대우스님은 임제가 깨친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임제가 대우스님께 예를 올리려고 하자 대우스님이 ‘너의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황벽 때문에 깨친 것이지 나는 황벽이 한 일에 젓가락 하나 얹었는 것 밖에 없다 하면서 다시 황벽한테 돌려보냅니다. 임제는 깨치고 난 다음에 다시 황벽에게 갔습니다. 

깨달음, 견성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따귀를 때린다거나 할!하며 고함을 지르는 것은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듯이 극한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사유와 분별을 넘어선 직관이라는 것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깊이 숨어있는 본성을 끄집어내기 위한 적업들이 이런 것입니다. 집중을 하다 보면 이런 상황이 되는 겁니다. 풍선 터지듯이 결정적인 어떤 순간에 다다르는 겁니다. 안과 밖이 공명하는 줄탁동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깨치는 것은 순간입니다. 깨침이 올 때까지는 긴 터널을 지나가서 마지막으로 깨침이 오는 순간은 알라야식이 보이기 시작하고, 열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두다 생각으로 압니다. 그렇지만 미세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이 생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적정인 것입니다. 이 생각의 뿌리가 진공인 것입니다. 견성한다는 것은 알라야식을 봄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집중하는 것은 나를 끝도 없이 가라앉히는 작업입니다. 생각을 한 군데 모으는 것이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가라앉히다 보면 무념이 되고 무념이 되면 삼매에 들게 되고 삼매에 들면 가라앉음이 극에 달하는 됩니다. 극에 다다르면 아무리 미세한 움직임도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의 뿌리에서 일어나는 촉, 작의, 수, 상, 사가 보이기 시작해요. 그것이 바로 견성입니다. 터지는 순간에 바로 무명이 깨지는 것입니다. 임제가 황벽한테 따귀를 실컷 맞은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직관이 나올 수 있도록 잠잠한 상태를 벼랑 끝에 서는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두를 들고 사마타 집중을 하는 것도 똑같은 것입니다. 집중만 하고 있으면 시절인연이 되어 계기가 되면 터지게 됩니다. 따귀를 때리는 것이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깨치고 난 다음 깨침을 확인해주는 과정이 묻고 대답하게 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깨치고 난 다음에는 다 알 것 같이 훤합니다. 그런데 막상 물으면 대답을 못 해요. 머리 속에서 답이 뱅뱅 도는데도 막상 부딪히면 답이 안 나와요. 

견성은 바로 이런 풍선을 부는 것과 같이 풍선이 터질 거 같이 크게 불어 놓은 상태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따귀를 때리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라 풍선을 터질 것같이 부는 것과 같은 작업입니다. 바늘로 찌르기만 하면 터집니다. 바로 대우스님이 한껏 커진 풍선에 바늘을 갖다 댄 것입니다. 풍선을 끝도 없이 불어 놓은 것은 황벽이 해 놨고 그다음 살짝 건드려서 터지게 한 것은 대우가 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견성을 하게 합니다. 이 1초 순간 반야직관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바로 답이 나와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사량으로 생각으로 나오는 답은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량으로 나오는 답은 제칠식이 작용해서 나오는 답입니다. 조주는 ‘왜 뜰 앞의 작은 나무라고 했는가?’ 하는 답을 구하려고 우리는 끝도 없이 이 생각, 저 생각 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을 굴려요. 결국 그것은 본래 성품을 본 데서 나오는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량에서 나오는 답일 뿐입니다. 그렇게 나온 답은 정답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선사들이 대답할 때 제일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묻는 것에 대한 것을 그냥 그대로 답으로 대답하는 경우가 제일 많습니다. 다른 답도 많지만 반야직관에 의해서 제칠식의 저장창고를 거치지 않고 머물지 않고 제팔식 알라야식으로 통하여 바로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입니다. 자동차 시동을 걸 때 시동 거는 것에 해당합니다. 시동을 걸고 나면 연료탱크로 연결되어 기름을 공급받아 차가 움직입니다. 시동 걸 때는 연료탱크와 연결되지 않습니다. 의식이 처음 일어나는 오편행인 촉, 작의, 수, 상, 사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입니다. 

대우가 다시 항벽에게 돌아가라고 하니까 임제는 황벽한테로 갔습니다. 며칠 만에 임제가 들어오자마자 황벽은 어디를 왔다 갔다 하느냐? 불법의 골수는 개똥도 모를 것이다 하면서 임제한테 달려듭니다. 그런 상황에서 임제는 느긋하기만 합니다. 임제도 이제 깨쳤습니다. 옛날 임제가 아닌 겁니다. 임제는 오직 스승님의 간절한 노파심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춰서 다시 돌아왔는 겁니다. 스승님이 따귀를 때리고, 또 때려준 그 간절한 노파심 때문에 이렇게 내가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한 마디에 황벽이 갑자기 수다스러운 대우놈 오기만 해봐라, 당장 묵사발을 내 줄 것이다 하고 소리칩니다. 임제가 옆에 있다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 뭐 있습니까? 지금 당장 묵사발내지요 하면서 황벽한테 달려들어 황벽 따귀를 때립니다.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감히 범의 수염을 잡다니 하면서 한 마디 할 때 바로 임제가 악! 하면서 할을 하는 겁니다. 황벽 스승은 인정하고 나가 버립니다. 며칠 후 공양간 사건으로 또 황벽하고 임제가 부딪힙니다. 황 벽이 말을 하자마자 임제가 먼저 황벽의 따귀를 때립니다. 황벽이 임제한테 또 따귀를 맞습니다. 맞으면서 황벽이 한 말이 ‘그놈 모양만 빨간 수염인줄 알았더니 속속들이 빨간 수염이네.’ 하면서 진정으로 깨친 것을 인가해 줍니다. 그러니까 1차 시험이 끝나고 그다음 2차 시험에서 임제는 통과한 것입니다. 제자에게 따귀 맞고 황벽이 한 말이 그놈의 색깔만 붉은 수염인줄 알았는데 보니 속속들이 붉은 수염이구나 하면서 임제의 깨친 바를 확실하게 인가해 준 것입니다. 

임제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했던 말입니다. ‘도를 이루려고 몸부림치는 수행자들이여! 우리가 가족을 버리고 출가 한 것은 진리를 깨치기 위해서였다. 나의 경우를 한 번 예를 들어보자. 처음에 나는 엄격한 계율이 전부인줄 알고 계율 지키기에만 전념하였고 또한 경전과 그 주석서들을 심히 뒤적이면서 그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다 훗날에야 나는 모든 계율과 종교의식, 경전들은 병자를 고치는 약 처방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약 처방전과 같은 것입니다. 처방전 갖고 병이 낫습니까? 처방전대로 처방을 해서 약을 먹어야 낫습니다. 결국 경전은 우리가 공부하는 데 필요한 처방전일 뿐입니다. ‘경전은 약 처방전처럼 단지 속세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일 뿐임을 알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그 방편들을 모두 다 던져버리고 직접 진리와 부딪혔다.’ 직접 수행을 하고, 체험을 하고 수행장에 직접 뛰어든 것입니다. ‘다행히 나는 위대한 선지식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비로소 눈이 뜨였고 스승들이 깨달은 바를 이해하여 쉽게 참과 거짓을 분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평생 잘못하다 보면 처방전만 붙들고 갈 수도 있습니다. 처방전도 중요합니다. 처방전 없이 우리가 약을 지을 수 없습니다. 처방전도 중요한데 결국은 처방전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처방전을 갖고 약을 처방 받아서 그것을 내가 먹어야 돼요. 모든 경전이 처방전임을 알고 그 처방전대로 약을 먹어야 된다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참선 수행을 하지 않고는 그 처방전의 처방된 약을 우리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참선수행을 함으로써 그 처방전의 약을 먹는 것입니다. 경전을 보기 전에 경전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다 보고 난 다음에 경전을 버려야 됩니다. 금강경에도 내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 라고 했습니다.  뗏목은 목적지로 건너가고 난 다음에 뗏목을 버려야 됩니다. 건너기 전에 뗏목을 버리면 못 건너갑니다. 공부를 잘 하려면 먼저 처방전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처방전만 받아 놓으면 처방전대로 하면 되지만 처방전도 없다면 우리는 세세생생가도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처방전을 받는 것입니다. 처방전을 받고 나면 처방전대로 수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처방전만 갖고 있어도 얼마나 좋습니까. 공부에 대한 확신이 서 있으면 언젠가 공부는 하게 되어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깨쳐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부해야 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끝없이 공부해야 하는 이것이 바로 결론입니다. 우리는 부처되기 위해서 공부해야 되고 부처 되고 난 뒤에도 할 게 공부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끝없이 공부해야 되는 삶인 것입니다. 습이 잘 들여 있으면 공부하기가 수월합니다. 좋은 습 드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던 불교하고 인연이 되고 이렇게 공부하는 인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가져야 될 가장 중요한 생각은 죽을 때까지 공부할거라는 것입니다. 현생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죽고 난 다음 생에도 공부하게 됩니다. 내 몸에 붙어있는 손은 안 불편합니다. 그런데 손에 장갑을 끼고 있으면 장갑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공부한다? 수행한다?는 것은 내 몸의 손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각인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도 똑같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할 때 애를 써도 들릴까 말까 합니다. 그렇지만 화두가 바로 내 손과 같이 내 가슴속에 딱 들어 있으면 끝도 없이 그 화두를 들고 있는 것이 됩니다. 화두가 그렇게 심어지면 이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화두가 의정이 되고 의단이 된 것입니다.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내 것이 아닙니다. 확신이 서고 나면 어느 누가, 어떻게 나를 흔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삶이 됩니다. 그냥 조금 물들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런 연후에라야 비로소 깨달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끝도 없이 공부를 하다 보면 뭔가 보이고 열려요. 이렇게 하는 것이 엄청나게 어려울 것 같은데 지금 어려운 것이 다음 생에는 쉬워지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내가 다음 생에 어떻게 살 것인가? 만약 내가 전생에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모습을 보면 다음 생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어요. 고등학교 때 못 풀었던 수학 문제는 지금도 못 풉니다. 그때 몰랐던 것은 지금도 모를 뿐입니다. 내가 몰랐던 것이, 내것이 아닌 것이 시간이 지나고 알아지고 내 것이 된다고 하면 공부 안 해도 됩니다. 공부하면 했는 것만큼 좋아져요. 공부를 하지 않고 다음 생에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생에 살았던 이 모습대로 내가 다음 생에 또 이렇게 산다면 좋아요? 뭔가 지금 보다는 훨씬 더 능력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 능력을 갖고 싶으면 공부를 해야 됩니다. 

‘도를 구하는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로 외부의 것, 다른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든지 간에 한시 바삐 그에게서 떠나라. 어떤 누구의 말에도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최상의 자유인 대해탈을 이룰 수 있다. 그때 비로소 그대는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자기 공부가 확신이 서고 확실해지면 다른 사람의, 어느 누구의 말도 자기의 확신을 흔들 수가 없습니다. 임제가 한 말 중에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말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일지라도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이라해도 모두 죽여라 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말입니다. 어느 누구든 고질화되어 있는 것은 무조건 깨드리는 것이 임제가 갖고 있는 깨달음의 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어떠한 타성과 어떠한 간섭에도 물들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의 체험에 의해서, 자기의 경험에 의해서, 자기의 깊은 관조에 의해서 얻은 것만이 자기 것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입니다. 이 말이 갖는 뜻이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최상의 자유인 대해탈이 바로 견성성불한 것입니다. 자성과 법성을 다 본 것입니다. 해탈은 견성이고 자유인은 법성입니다. 자성을 보면 해탈을 하게 되고 열반에 듭니다. 그리고 법성을 보게 되면 보리를 얻어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임제할과 덕산방은 유명합니다. 임제는 할! 하면서 덕산은 방망이로 때리면서 진리에 들게 합니다. 임제가 할!을 하니까 온 절이 할! 밖에 없습니다. 내가 보니 너희들은 내가 할 하니까 너희들이 무턱대고 할을 모방하는데 어디 한 번 시험해보자고 합니다. 한 쪽 사람은 동쪽에서 걸어오고 있고 또 한 쪽 사람은 반대편, 서쪽에서 둘이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둘이 똑같이 마주쳤을 때, 둘 다 동시에 할!을 했습니다. 이때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가? 하고 임제가 물었어요. 아무도 대답을 못해 임제한테 방망이 맞고 쫓겨났습니다. 

임제에게 깨달음은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모두 독창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있는 그대로인 체하고 억지로 독창적이려 한다면 진짜 독창성은 사라지고 본래 면목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데서 임제의 독창성, 임제의 깨달음의 그 내용이 나옵니다. 전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개별적인 독창성을 이해한다면 가장 귀한 보물인 본래 면목의 차별없는 참사람은 바로 자신 안에서 울려 나오는 공명일 뿐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수천 년을 헤매도 찾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독창성은 내 자성과 공명에서 나오는 내 소리다 하는 겁니다. 인식은 그대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조차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찾아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식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것은 우리가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인식되어져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선사들을 보면 깨달음에 대해서 좀 체계적으로 설명을 해놓으신 분이 동산스님과 임제스님입니다. 임제는 사료간으로 깨달음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객체를 버리고 주체를 남겨두는 경우, 주체를 버리고 객체를 남겨두는 경우, 주체와 객체를 다 버리는 경우, 반대로 주체와 객체를 모두 다 남겨 두는 경우 이 네 단계로 깨달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청원선사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 다음 단계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도 물이 아니다.’ 그러다가 더 깊이 깨치니 ‘산은 원래 그대로 산이고 물도 그대로 물이더라’ 라고 했습니다. 주체를 버리고 객체를 남겨두는 경우는 처음  발심해서 열심히 공부하면 산은 산이요, 그 물은 물인 단계입니다. 주체를 버리고 객체를 남겨 두는 경우는 산을 산으로 보고 강을 강으로 볼만큼 내면이 익은 정상적인 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상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우리의 미세한 마음 작용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둘째 단계가 익어지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였는데 수행이 깊어져 집중이 깊어지면 산을 보아도 이미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이미 물이 아니고가 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한 군데에 몰두해 있으면 뭔가 마음이 열리는 경우가 있어요. 집중의 도가 지나칠 것 같으면 뭔가 느낌이 오는 것이 온 천지가 그냥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그냥 산이었는데 그것이 산이 아니고 온 세상의 생명이 거기에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임제는 ‘수행자들이여 내가 밖에 법이 없다고 말하면 수행하는 이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안에서 찾으려고 생각을 내어 윗잇몸에 혀를 찰싹 붙이고 꼼작하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다. 그리고 이것을 조사문중의 불법이라 여기는데 이것은 정말 잘못 된 생각이다. 만약 움직이지 않는 청정한 경계를 옳다고 여긴다면 무명을 주인으로 잘못 아는 것이다. 옛 스승들이 이르기를 답답하고 캄캄한 구덩이가 참으로 두렵도다.’고 했습니다. 그냥 꼼작하지 않고 앉아 있는 이런 상태인 무명을 화두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꼼작하지 않고 앉아있으라고 하는 것은 움직이면 집중할 수 없으니 하는 소리입니다. 집중하는 방법으로 첫째 이 육신을 움직이지 않음으로서 마음도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선하면서 그냥 움직이지 않는 일정한 자세를 유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본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참선한다고 이뭣고 하면서 앉아 있다 보면 무명을 주인으로 잘못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육체든, 몸이든, 이 마음이든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 그 본래의 뜻은 끝도 없이 집중하는 화두를 들면서 성정적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체와 객체를 다 버리는 경우는 주관과 객관의 혼연일체로, 공명을 일으켜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하든지 조화를 이루어 거슬리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 견성한 단계에 들어갑니다. 이 단계에 들어가면 어떤 무엇과도 공명을 일으키며 무엇을 하든지 조화를 이루어 거슬리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용아선사가 임제선사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임제가 용아선사한테 저쪽으로 가서 선판을 가져오게 합니다. 자선할 때 몸을 기대어서 쓰는 판자가 선판입니다. 용아가 갖다 주니까 그것으로 임제가 용아를 때립니다. 한 방 맞은 용아가 스님 그렇게 때려도 거기에는 조사의  뜻이 없습니다 하고 한 마디 합니다. 주관과 객관의 혼연일체로서 바로 묻는 사람이나 답을 하는 사람이나 바로 거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공명을 일으켜 정답을 이야기하는 상황입니다. 두드려 맞고도 용아가 한 말이, 달마가 서역으로부터 중국으로 온 뜻을 일러봐라. 부처가 뭐냐고 물었을 때, 선판으로 두드려 맞으면서 또 용아가 했는 말이 스님이 아무리 때려봐야 스님이 때린 선판에는 조사가 온 뜻은 없다고 하면서 한 마디 하는 것입니다. 

주체와 객체를 모두 남겨 두는 경우는 자신이 참 나와 하나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주체와 객체가 다 허물어져 버리고 다시 새롭게 재구성되어집니다. 여기서는 현상계로 돌아와 산을 보더라도 다시 산이고 강을 보더라도 다시 강인 것입니다. 산의 정상에 머물지 않고 슬쩍이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 세상과 계합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이 법을 펴듯이, 세상에 슬쩍이 내려와 세상과 계합하는 것이 바로 주체와 객체를 모두 남겨두는 경우입니다. 도가 충분히 익으면 주체와 객체를 모두 남겨두는 거고 익기 전에는 주체와 객체를 모두 버리는 단계가 됩니다. 임제가 이야기한 무위진인은 차별 없는 참 사람이며 바로 무위진인은 이 경지에서는 집을 떠나지 않고서도 세상 어디든지 갈 수도 있습니다. 임제의 참 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습니다.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는 단계는 제 사선에 들어가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가장 무서운 무기는 물, 불, 바람입니다. 물, 불, 바람에도 결국 타지 않고 허물어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은 제 사선의 단계에 들어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객체와 주체를 모두 남겨두는 이 단계는 제 사선을 이루는 단계입니다. 영원불멸의 참 사람은 무상한 변화 속에 있으면서도 무상하지 않고 나라고 하는 영원한 실체가 없는 육신 속에 있으면서도 나가 없지 않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차별 없는 참 사람의 실체를 임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펼치면 우주만물을 덮고, 접으면 터럭 하나도 그 위에 서지 못한다. 홀로 밝히는 빛이지만 온 우주를 비추고도 부족함이 없다. 눈에도 안 보이고, 귀에도 안 들리니 이를 무엇이라 이름 하는가? 우리가 펼치면 우주만물을 덮고, 접으면 터럭 하나도 그 위에 서지 못 한다. 홀로 밝히는 빛이지만 온 우주를 비추고도 부족함이 없다. 눈에도 안 보이고, 귀에도 안 들리니 이를 무엇이라 이름 하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는다. 는 옛 스승의 말 그대로다.’ 임제는 진리를 무위진인이다. 하고 이름을 딱 붙여 놓은 것입니다. 스스로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들여다 보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물맛이 어떤지? 아무리 설명 해봐도 물맛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먹어봐야 됩니다. 딴 방법 없습니다. 바로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다. 우리가 그 뜻을 어떻게 알겠어요? 스스로 해가지고 그 말이 무엇인지 알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째 하겠느냐? 스스로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결국 이것이 본론입니다. 죽으라고 한 공부의 결론은 그 맛이 어떤지 본인이 스스로 체험해보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처방전 하나씩 갖고 가는 것도 이  생에 더 없는 보람이지만 더 큰 보람은 그 처방전대로 우리는 따라 해보는 것입니다. 도가 되든, 모가 되든 따라 하다 보면 뭔가 결론이 나게 됩니다. 

‘진정한 구도자는 부처도, 보살도, 나한도,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에서의 어떠한 영광도 취하지 않는다. 진정한 구도자, 부처는 바로 부처도, 보살도, 나한도,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에서의 어떠한 영광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의연히 이 속세를 초탈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기에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천지가 무너져도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천지사방에 부처가 나타나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또 지옥에서 온갖 귀신들이 뛰쳐나오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 그는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는가? 결국 견성하고 나면 지구가 멸망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이렇게 태연작약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 모든 실체를 이루고 있는 공의 원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태연작약하냐? 공의 원리, 견성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들은 변화하는 것에 홀려있는 눈에는 실체로 보이지만 껍데기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지혜의 눈에는 이미 실체가 아니라 단지 관계일 뿐입니다. 연기를 장확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과거, 현재, 미래는 다만 마음의 작용이고 세상 만물도 다 알음알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이나 환상, 허공에 핀 한 송이 꽃에 집착하여 무엇 하겠는가. 오직 실제하는 단 한 사람은 바로 지금 행위하고 있는 자신일 뿐입니다. 지금 생각하고 지금 서 있는 이 순간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세세생생 흘러가는 이 시간 속에서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이 제일 소중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바로 행위하고 있는 자신일 뿐입니다. 

반야 바라밀에서 반야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라밀, 어떤 것을 파라미타라고 하는가? ‘서쪽 나라의 법음으로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뜻을 알면  바로 생멸을 떠나게 됩니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나니, 이는 곧 언덕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언덕에 이른다고 이름 하여 그러므로 저 파라미타, 바라밀이라고 한다.’ 반야바라밀은 바로 지혜의 언덕. 지혜의 완성입니다. 바로 견성성불하는 겁니다.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이 언덕에서 저 언덕에 이르는 것입니다. 완성하는 것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지혜의 완성, 보시의 완성 바로 완성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바라밀입니다. 이루어 다 성취한 단계입니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는 거고 이 경계를 떠나면 바로 생멸을 떠난 것이 됩니다. 미혹한 사람은 이 바라밀을 입으로 외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행합니다. 지혜를 완성하려고 하면 마음으로 행해야 됩니다. 생각할 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마다 행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있다고 합니다. 이 법을 깨친 이는 반야의 법을 깨친 것이며 반야의 행을 닦는 것입니다. ‘닦지 않으면 범부요 한 생각 수행을 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다.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보리니, 앞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그것이 부처다.’ 삿된 생각 일어나면 그냥 그대로 범부고 지금 지혜로운 생각 일어나면 그냥 그대로 부처인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와 보리는 두 개가 아니라 바로 번뇌가 곧 보리가 되고 번뇌를 잘 쓰면 보리가 됩니다. 그냥 번뇌는 없어져 버려요. 그래서 ‘선지식들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다. 머무름 없이 가고 옴이 없는 것이 마하반야바라밀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다 이 가운데로부터 나왔으며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르러 오음의 번뇌와 진로, 화내는 것, 진로를, 번뇌, 망상을 쳐부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인 것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이다.’ 모든 부처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마하반야바라밀로부터 나온겁니다. 결국 지혜의 완성이 부처입니다. 

이 반야바라밀다는 시대신주, 이 신비한 주문입니다. 이것은  성문의 깨달음을 우리는 시대신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시대명주, 이 밝은 것은 연기를 아는 것입니다. 연각의 깨달음을 시대명주라고 합니다. 시무상주는 보살의 깨달음입니다. 시무등등주, 부처의 깨달음으로 깨달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더 오를 데가 없는 최상의 깨달음, 최상의 법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마한반야바라밀법은 시대신주고 시대명주고 시무상주고 시무등등주입니다. 성문의 깨달음과 연각의 깨달음과 보살의 깨달음을 전부다 포함하고 있으면서 부처의 깨달음으로서 깨달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마하반야바라밀은 이런 뜻을 갖고 있어요. 여기서 궁극적으로 마하반야바라밀을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됩니다. 최상승법, 가장 으뜸임을 찬탄하여 최상승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내왕 또한 없습니다. 이는 정과 혜가 함께 하여 일체법의 물들지 않음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이 변하게 계, 정, 혜 삼학으로 바뀌게 됩니다. 육바라밀의 실천이고 팔정도의 실천과 똑같은 겁니다. 선불에서는 계, 정, 혜로 집약해 놓은 겁니다. 정과 혜를 하기 위해서는 좋은 습관을 익히면 됩니다. 계라고 하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 중에 오계를 지키면 부처가 됩니다. 부처 되는 직접적인 방법은 좋은 습관 밖에 없습니다. 세세생생 나를 끝도 없이 부처의 나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 좋은 습관 밖에 없습니다. 다음 생에 내가 태어나도 이생에 했는 습대로 살아갑니다, 전생에도 어떻게 살았겠어요? 지금과 비슷한 습대로 살았어요. 공부하고 노력했는 것만큼 해결되고 달라지고 그것이 내것이 되고 그것이 세상에 봉사를 하고 세상을 더욱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빛나게 만듭니다. 내가 사는 삶이 바로 세상입니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팔만 사천의 지혜를 쫓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팔만 사천의 진로가, 번뇌 망상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라.’ 무념이 되면 이런 내용을 깨치고 알게 된다는 겁니다.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이 곧 진여의 성품이다.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으니 이것이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부처의 도를 이루는 것이다.’ 바로 반야바라밀을 결론지으면서 혜능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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