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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21강 멸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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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833회 작성일 22-05-2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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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강 멸죄


부처님은 항상 처음 법을 청했을 때는 가만히 계세요. 또 한 번 청해도 가만히 계세요. 세 번 청해야 꼭 들어야 되겠다는 마음이구나 생각하며 법을 설하셨습니다. 법을 청할 때는 삼배를 올리고 인사할 때는 반배나 일배를 하면 되겠습니다. 

오늘 공부해야 될 내용이 멸죄입니다. 참회를 하면서 죄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잠깐 보면, ‘만약 견해가 같지 않거나 뜻과 원이 없다면 곳곳마다 망령되어 선전하여 저 앞사람을 손상케 하지 말라. 마침내 이익이 없느니라. 앞사람을 흔들지 마라. 만약 만나는 사람이 알지 못하여 이 법문을 업신여기면 백 겁 만 겁토록 부처의 종자를 끊게 된다.’ 누구를 비난하고 비방하고 악한 마음을 먹는 것은 모든 가능성이 있는 불성을 일으키는 선근을 없애게 됩니다. 씨앗은 항상 꽃을 피우게 되어 있는데 그 선근을 없앰으로써 부처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만큼 더 위험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업신여기고 비난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하고 맞으면 좋다고 칭찬하고 맞지 않으면 비난하고 헐뜯고 합니다. 자기하고 의견이 다르면 좋아도, 잘해도 칭찬에 인색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서로의 생각이 다 맞지는 않습니다. 자기의 생각이 60% 맞으면, 상대방의 생각도 50% 맞는 것입니다.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저런 생각도 하는구나. 그래서 비난하지 말고, 헐뜯지 말고, 원망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선지식들아 나의 무상송을 들으라. 너희 미혹한 사람들의 죄를 없앨 것이니 또한 죄를 없애는 게송을 무상송 혹은 멸죄송이라고 할 것이다. 18장에서는 이제까지 공부 했는 것을 정리하면서 죄를 없애는 법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에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청소를 합니다. 부처님이 오늘 여기로 오실려고 했다면 집안 청소를 하고 귀한 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집안도 깨끗하게 정돈하고 본인도 목욕재개 하고 단정하게 손님을 맞습니다. 

그다음 부처님이나 손님을 소개하며 공덕 및 업적을 찬탄하고 칭찬합니다. 그다음 부처님의 법문을 듣거나 또는 그 분이 갖고 있는 생각을 경청해서 듣고 난 다음에 들은 내용에 대해서 평가합니다. 토론도 하면서 자신을 참회하고 반성하는 겁니다. 설의 내용에 따라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참회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계획을 말합니다. 의식을 할 때마다 독송하는 천수경의 내용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천수경을 보면 먼저 개경을 하고, 계청을 하고, 업적능 칭찬하고, 부처님을 찬탄하고 그다음에 본론인 다라니가 나옵니다. 다라니를 독송하고 난 다음에 토론과 평가를 통하여 참회와 반성을 합니다. 

공부하는 이유는 긍정성의 성숙에 있습니다. 이 법문을 통하여 삶을 한 번 되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사고의 폭을 넓히고, 마음을 엽니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 마음을 열기가 어렵습니다. 항상 자기의 테두리와 틀 안에서만 받아 들입니다. 그것에 어긋나는 것은 한 쪽 귀로 듣고 흘려버립니다. 그러면 평생을 살아도 성품의 파이가 안 커집니다. 책을 보는 이유는 많은 사람의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간접적인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파이를 키우지 않고는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이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이제까지 살아왔던 것의 연속이 바로 앞으로의 삶입니다. 다음 생은 달라지겠습니까? 이생에서 살았던 삶이 내생으로 연결된다면 또한 특별하게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변한 것도 없고 특별하게 한 것도 없고 그냥 이 삶의 연속이 다음 생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처음 만난 분들은 생소하지만 결국은 전생에 지어놓은 인연으로 만나지는 것입니다. 또 공부 한 번 해보겠다고 마음을 냈는데 특별하게 한 것도 없이 한 생이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다음 생에도 또 이 과정의 반복일 뿐입니다. 그래서 참회하는 이 기회를 잘 잡아야 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참회는 자신을 정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매일 50분 걸으면서 하루 일과를 생각해 보면 참회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하루 살았던 내 삶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화두 들고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통해서 자신을 변화 시키는 방법이 참회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1970년 대에 어떤 사찰 강원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절의 산에는 잣을 심어 수확을 하여 운영비로 썼습니다. 그래서 강원 스님들이 잣 수확 때가 되면 잣 따는 울력을 했습니다. 마침 그날도 점심공양을 하고 잣 따는 울력을 했습니다. 이 나무에 올라갔다가 잣을 따고 내려와 다음 나무에 올라가 잣을 땄습니다. 나무를 잘 타는 한 스님은 나무에 올라가서 잣을 따고 옆 나무로 날아서 넘어갔습니다. 실수하여 밑으로 떨어졌는데 기절을 했습니다. 기절이 연속되는 상황이었는데 외부에서 볼 때는 숨도 멈추고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죽었으니까 혼이 바깥으로 나와서 돌아다니는 겁니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집에 갔는데 마침 저녁 때여서 어머니와 누나가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반갑다고 누나를 만지는데 누나는 갑자기 어깨와 전신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누나가 데굴데굴 구르고 열이 나고 아프니 어머니는 딸이 귀신 씌였나? 하면서 칼로 귀신 물리치려고 하였습니다. 스님귀신은 어머니가 칼을 휘두르니 집을 나와 스님으로 살았던 절로 갑니다. 돌아가는 길에 젊은 남녀가 화려한 옷을 입고 놀면서 같이 놀자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스님생활을 해서 그런지 같이 놀자고 하는 젊은 남녀의 유혹에 별로 흥미가 없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또 한참 가다 보니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왜 자꾸 이런가 싶었지만 자신은 스님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세속적인 습에 물들어 있었다면 유혹에 넘어갔을 겁니다. 아무리 예쁘장한 여인이 유혹을 해도 스님생활을 하던 습 때문에 그냥 지나갔습니다. 계속 가다보니까 사낭꾼들이 노루고기를 구워먹고 같이 놀자고 잡아 댕깁니다. 생전에 육식을 많이 했으면 어울려서 고기도 구워먹고 놀았을텐데 평생 채식만 하여 고기냄새도 맡기 싫은 겁니다. 잡아 당겨도 결국 뿌리치고 절에 도착을 해서 보니까, 스님들이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비식을 치루려고 염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한 스님은 ‘은행나무 바리떼, 은행나무 바리떼’ 하고 또 한 스님은 ‘제경행상, 제경행상’ 하면서 염불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라고 염불 해야 하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가니까 깨어났어요. 기절했다가 일어난 것입니다. 죽었다고 울고불고 하고 있는데 갑자기 관 뚜껑을 열고 스님이 살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 일을 겪고, 며칠이 지나 스님이 정신을 차려 보니 아직까지 머릿속에는 지나간 일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염불한 스님을 찾아 갔습니다. 스님 염불할 때 ‘은행나무 바리떼, 은행나무 바리떼’하던데 무슨 말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입으로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했는데 머릿속에서는 이 스님이 갖고 있었던 은행나무로 만든 바리떼를 다비식 끝나면 자기가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귀신은 입으로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스님의 마음속에 생각한 은행나무 바리떼를 들은 것입니다. 다른 한 스님을 찾아가서 물어보니까 그 스님이 갖고 있었던 제경행상 이라는 책을 다비식 끝나면 자기가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육신이 없는 귀신에게는 입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생각하는 것이 들리는 것입니다. 집에서 절로 올 때까지 겪었던 일들을 더듬어 찾아가 보았습니다. 사냥꾼들이 노루고기 구워 먹으면서 같이 놀자고 했던 곳에 가보니까 큰 벌집이 있었습니다. 또 한 군데는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었고, 또 한 군데는 비단 개구리가 오글오글 모여가지고 개굴개굴하고 놀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있었을 때, 세속인으로 살았다면 이리로 빨려 들어갔을 것인데, 수행자 생활하면서 이런 것을 멀리 했기 때문에 다 물리치고 다시 자기 육신까지 찾아 갔으며 기절한 상태에서 깨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죽고 나면 자기의 업 따라, 이생에서 가장 좋아했던 색깔따라, 그 색깔따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착한 일 많이 했으면 극락에 테어날 것이고, 이생에 살았던 업따라 그 색깔을 찾아갑니다. 

우리가 참회를 해야 되는 이유가 참회에 따라 업은 정화되고 부처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중생에서 부처로 나아가려면 끝도 없는 참회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이 무상송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닦지 않고 복을 구하면서 복을 닦음이 곧 도라고 말한다. 도하고 복은 다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공덕을 쌓아야 됩니다. 복덕성하고 공덕은 같은 것입니다. 거지에게 먹을 것을 준다거나 보시하는 행위는 복덕이 되며, 공부하여 자신의 본래의 성품을 찾으며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공덕이 되는 것이고 복덕성이 되는 것입니다. 즉 다음 생에 복덕을 받을 수 있는 원천을 만드는 것입니다. 뿌리를 만드는 작업이 바로 공덕입니다. 일회성으로 받거나 베푸는 것이 복덕이라면 공덕은 세세생생 끝없이 퐁퐁 솟아 올라오는 샘물과 같은 것입니다. 수학문제 풀 때 답을 보고 이해한 뒤 풀면 금방 풀 수 있지만 다음에 숫자가 바뀌거나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풀지 못합니다. 그러나 원리를 알고 풀면 다른 형태의 문제로 바뀌어도 풀 수 있는 것입니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끝이 없으나, 보시를 하는 마음속의 삼업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공덕은 복을 지어 놓은 것만큼 그 복을 받을 수 있지만 그 복을 변형시켜가면서 원래 갖고 있는 탐심, 진심, 치심의 근본적인 업을 소멸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다음 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가 어떻게 따르지 않겠는가. 남아 있는  탐, 진, 치 삼업은 그냥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보시를 하고  그만큼 복덕을 쌓는 것은 다음 생에 그 정도의 복덕은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베푼 것만큼은 받아요. 그렇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 공덕을 닦아야 복덕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공덕이 생기는 것은 경전을 공부하고, 참선을 하여 도를 닦고, 지혜를 가지고 집중할 때입니다. 공덕의 내용은 정념과 정정밖에 없습니다. 공부 하지 않고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덕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마음속에서 죄의 반연을 없앨 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니라. 나의 죄를 참회하면서 없앨 수 있다면 바로 나의 본래 성품을 보게 되고 그것이 결국 참된 참회입니다.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치면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행하여 죄가 없어진다. 결국은 탐, 진, 치에 의해서 짓는 불선이 없어지리니 도를 배우는 사람은 능히 스스로 보면 곧 깨친 사람과 더불어 같도다. 도를 배우고 공덕을 수행하다 보면 바로 깨친 사람과 같게 됩니다. 공덕을 쌓음으로써 언젠가는 깨쳐진다는 겁니다. 복덕을 쌓는 것은 그 복덕에 의해서 다음에 다시 내가 그 복덕을 돌려받을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이제까지 지었던 업은 소멸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업을 소멸해서 본질을 볼 수 있고 부처가 되게 하려면 공덕을 쌓아야 됩니다. 공덕을 쌓는 것은 진짜 참회를 해야 되는데 진짜 참회하는 것은 지혜로써 집중하는, 정념과 정정이 참된 참회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참회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 성품을 회복해 나가는 겁니다. 나의 본래 성품을 회복해 나가는 것이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오조께서 단박 깨치는 가르침을 전하심은 배우는 사람이 같은 한 몸 되기를 바라서이다. 이제까지 설명한 이 모든 내용이 공부를 해서 단박 깨치자는 것입니다. 나의 본래 성품을 바로 보아 단박 깨치고 알게 되면 배우는 사람이나 깨친 사람이나 전부다 똑같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본래의 몸을 찾고자 한다면 삼독의 나쁜 인연을 마음속에서 씻어 버려라. 우리가 지혜롭게 집중한다고 하는 것은 삼독의 탐, 진, 치를 소멸시켜 계, 정, 혜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계는 규칙적인 생활입니다. 매일 하는 이 규칙적인 생활만큼 중요한 것이 없어요. 공부가 우리의 삶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살아가는 우리의 하루 삶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상생활을 매일 규칙적으로 하면서 십 년을 이십 년을 보내는 것이 계입니다. 직장인은 직장을 그렇게 다니는 것이며, 공ㅈ부하는 수행자는 매일 수행하면서 그렇게 보내면 됩니다. 이런 규칙적인 생활이 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율입니다. 계율을 좀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살생도 하지 말고, 거짓말도 하지 말고, 도둑질도 하지 말고, 음행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화내는 것의 뿌리는 나하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하고 다르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화가 안나요. 바로 그 진심의 뿌리를 없애자 는 것입니다. 정은 한 가지 일에 집중적으로, 지속적으로 생각을 꾸준하게 하는 것입니다. 땅을 파보세요. 온 사방이 다 막혀있는 것 같은데 파 내려가면 어느 순간, 엄청난 넓은 공터가 생깁니다. 내가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이 생각의 크기가 깊이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엄청나게 커집니다. 정을 하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진은 정을 함으로써 소멸되는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뿌리가 치,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이 어리석은 생각을 분별을 하면서 평생 살아갑니다. 자기 생각이 맞다고 평생을 분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은 이 탐, 진, 치를 계, 정, 혜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규칙적인 생활이 필요한 것이고 이상을 갖고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틈틈이 방향이 맞는지 살펴보면서 가는 것입니다. 목적이 확실하다면 그 삶을 위해서 줄기차게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대학 졸업하기 전에 고시에 합격해야 겠다고 목표를 세워 놓아 보세요. 대학교 4년 동안 도서관에 박혀 죽으라고 공부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입니다. 집중은 불교 공부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다 있습니다. 잘 하려면 집중을 해야 합니다. 직장생활에서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대우받고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은 뛰어난 집중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집중하니까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고 일을 잘하고 능률이 오르고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떠나서 견성은 없습니다. 부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이 삶은 부처되는 연습장입니다. 부처되는 연습장에서 하루에 한 시간 매일 규칙적으로 집중 공부를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루의 삶이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처마 밑의 돌을 뚫듯이 매일 지속되는 공부가 결국 견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운동이 절입니다. 불자는 육체적인 운동에다가 정신적인 참회를 함께하니 세상에서 최고의 보약입니다. 절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108배를 할 수 있으면 반드시 합시다. 삼독의 나쁜 인연을 마음속에서 씻어내는 방법이 하루 한 시간 집중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하면 자신의 삶을 공부 연습장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루의 생활을 떠나서 따로 부처는 없습니다. 이것을 포기하고 어디 가서 부처가 되겠어요? 내 삶 속에서 부처가 되고 깨달아야 됩니다. 오조께서 단박 깨치는 이 법을 공부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뭔가 아! 할 때 공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연습하지 않으면 방법이 안 생깁니다. 밥도 그렇고, 반찬도 그렇고, 잠도 그렇습니다. 잠도 적게 자면서 확실하게 잘 잘 수 있는 방법이 생겨요. 그래서 연습을 하다 보면 반드시 부처가 됩니다. 힘써 도를 닦아 허송하며 지내지 말라. 지금은 힘써 도를 닦아야 할 때입니다. 어느덧 헛되이 한 세상 끝나게 됩니다. 참선하면서 죽을 수 있겠나? 간혹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대승의 단박 깨치는 법을 만났거든 정성들여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라.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게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회가 오고 인연이 와도 내가 소중하다고 못 느끼면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는 안 옵니다. 이 생에서 안 오면 다음 생에도 쉽지 않습니다. 기회가 주어지고 인연이 될 때는 무조건 그 인연을 잡아야 됩니다. 한 번 쯤은 지극한 마음을 내봐야 합니다. 이생에서 지극한 마음 한 번 못 내면 이보다 더 슬픈 게 없어요. 지극한 마음을 한 번 내 이 생을 멋지게 살도록 합시다.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팩트 하나가 지극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빠져봐야 돼요, 짦으면 일주일도 좋고 길면 3년 정도가 적절합니다. 3년만 이 생, 일찍 죽은 셈치고 공부를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런 공부를 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으면 기회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내 삶을 지극하게 사는 것이 바로 참회입니다. 천수경에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이란 구절 나옵니다. 죄와 업은 자성이 없어 마음따라 일어난 것, 자성은 무기입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죄와 업이 물들은 대로 일어나니까 죄가 되고 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 한 번 쉬고 원래 성품 쪽으로 돌아가 보니까 죄라고 생각한 것이 그냥 없어지는 것입니다. 단박 깨치고 나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왜 생각이 중요합니까? 오계를 열심히 외워서 지키는 것은 하나 지키면 하나는 잊어버리고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을 깊이 해서 이거 잘못됐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다시는 안 합니다. 이렇게 참회해서 깊이 생각하고 반성해서 내 생각 속에서 일어나 결론이 난 것은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무자성종심기가 되고 심약멸시죄역망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따라 일어난 죄와 업을 참회하고 깊이 생각해서 다시는 안 하겠다고 철저하게 아는 순간 그것은 없어져 버립니다. 너를 번뇌하게 하는 그 마음을 내놔 봐라. 참회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다 해결돼요. 철저하게 느끼는 순간 바로 그것이 돈법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다보면 딱 느껴지는 순간 해결이 됩니다. 유마경에서 유마와 우바리의 문답이 있습니다. 우바리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지계제일입니다. 우바리는 궁궐의 이발사였어요. 부처님께서 계를 줄 때마다 우바리는 항상 옆에서 삭발을 시키고 머리를 깎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십대 제자로서 지계제일 우바리가 됩니다. 갓 출가한 젊은 비구가 계율을 어겼다고 우바리에게 어떻게 하면 참회할 수 있는가? 하면서 참회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우바리가 오계를 설해줍니다. 오계를 설하고 있는데 유마가 나타나서 죄가 생기는 것은 간접의 원인인 인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죄 자체는 없다고 우바리에게 바른 소리를 합니다. 본래 성품은 무기입니다. 그런데 간접의 인연 때문에. 제 칠식에서 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가 생기는 것은 간접의 원인인 인연 때문이며 죄 자체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을 해서 자성을 보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돼요. 원래 죄 없는,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가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사소한 것부터라도 공부를 해서 알자는 것입니다. 수학문제를 풀다가도 깨칠 수 있고 역사책 보면서 왜 역사가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다보면 역사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고민하다 보면 문제가 깨쳐지고 알아집니다. 우리는 연습하지 않고 절대 결론에 다다를 수 없어요. 매일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문제부터 사성제로 해결해봅시다. 이런 문제를 해결 잘 하면 부처되는데 까지 쉽게 갈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모든 문제는 고, 집, 멸. 도 사성제로 출발해서 다 해결됩니다. 모든 문제의 출발은 집성제입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 원인을 아는 것이 집성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왜 일이 일어났는가? 오늘 직장생활하면서 왜 일이 일어났는가? 집에서 왜 아이들이 싸움을 했는가? 수입 좀 올라야 하는데 왜 안 오르는가? 원인을 자꾸 생각하다 보면 답이 생겨요. 원인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정답이 없어요. 어떠한 삶에서든지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면 정답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왜 그 일이 일어났느냐를 완벽하게 푼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 우리는 풀 때도 있고 못 풀 때도 있고 또 그냥 넘어가니까 70점짜리 삶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달라지려면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공부의 전부입니다. 참회하자, 공부하자, 집중하자,  그래서 공부 잘 하면 다 잘 할 수 있어요.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돈이 들어와도 돈을 잘 쓸 수 있어요. 권력이 와도 권력을 잘 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권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권력이 나한테 왔을 때 권력을 잘 쓰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돈이 나한테 왔을 때 잘 쓰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바로 내가 쓰는 이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54페이지 마지막 구절을 한 번 볼까요? 정성들여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라. 대사께서 법을 설하여 마치니 위사군과 관료와 스님들과 도교인과 속인들이 찬탄하는 말이 끊이지 않았으며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법문이 끝나고 위사군이 질문을 합니다. 육조대사께서 위사군에게 말씀하였다. 의심이 있거든 물어라. 어찌 두 번, 세 번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위사군이 달마대사께서 양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무제가 달마대사께 묻기를 짐이 평생 동안 절을 짓고 보시를 하며 공양을 올렸는데 공덕이 얼마나 큽니까? 양무제는 자신의 공덕이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공덕이 얼마나 큽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실로 공덕은 없으니 위사군은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삿된 길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한 그 행위가 공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양무제는 평생 절을 짓고, 스님한테 보시를 했는데 이 평생의 일이 복만 지었지 공덕은 짓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제가 삿된 길에 집착하여 복덕을 공덕으로 착각하였습니다. 자기의 마음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그냥 베푸는 것이 마음공부를 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에 대해 위사군에게 설명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하고 다시 묻습니다. 육조대사께서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복을 짓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는 말라. 공덕은 법신에 있고 복밭에 있지 않다. 공덕을 지으려면 뿌리까지 제대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유니세프라는 단체를 통하여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보시하거나 난민들에게 보시하는 마음을 내는 것은 그런 마음을 안 내는 것보다 훨씬 더 선입니다. 그렇지만 그 선한 마음을 냈다고 해서 공덕은 아니라는 겁니다. 공덕을 제대로 잘 지어 놓으면 복덕은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베푸는 것입니다. 베푸는 삶이 불교 전용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만 보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품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으면 삶에 대해서 끝도 없는 보시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빌 게이츠한테 돈을 갖다 주기도 하지만 빌 게이츠는 세상에 엄청난 많은 보시를 합니다. 깨달음을 추구하고 본질을 추구하는 이 세상을 선하게 만들고자 하는 모든 사람한테는 보시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습니다. 성품이 바르면 당연하게 베푸는 것이 내 본질의 삶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 하면 베푸는데 엄청나게 인색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본질을 알면 베푸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짓는 것입니다. 복을 공덕이라고 말하지 말라. 공덕은 법신에 있고 복밭에 있지 않느니라. 자기의 법성에 공덕이 있나니 견성이 곧 공이요. 평등하고 곧음이 곧 덕이다. 공덕이라고 하는 것은 견성을 하는 것입니다. 내 본래 성품을 찾기 위한, 내 본래 성품을 회복하기 위한, 내 본래 성품을 보기위한 끝없는 노력이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뿌리만 제대로 되어 있으면 다른 것은 다 스스로 해결이 됩니다. 내가 베푸는 것만큼만 나한테 생기는 것이 복덕입니다. 베풀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으면 평생을 더 나아가 세세생생을 베푸는 삶이 됩니다. 선도 악도 아닌 무기의 본래 성품을 보고 알아야 되고 그것이 내 마음일 때는 베푸는 마음 밖에 없습니다. 베풀어야 할 때, 그냥 베풀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베풀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돈으로 베풀기도 하고, 행위로 베푸는 등 방법은 다양합니다. 어떤 것으로든 베풀 수 있습니다. 공덕이 되기 위해서는 견성을 해야 됩니다.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 언젠가는 부처가 됩니다. 언젠가는 내 본래 성품을 보는 견성을 할 수 있습니다. 열반경에 일체중생 실유불성이 나옵니다. 일체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는 불성이 있다는 겁니다. 불성은 자성과 법성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내가 주체면 나 외의 모든 것은 객체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본래성품은 자성이며, 나 이외의 모든 것의 본래 성품은 법성인 것입니다. 나 이외의 대상이 갖고 있는 본래 성품을 법성이라고 하고 이 대상의 몸덩어리를 법신이라고 합니다. 나의 본래 성품은 자성이고 몸덩어리는 자신이며 육신이고 육체인 것입니다. 자신, 자성, 법신, 법성, 이 두 개가 합하면 불성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는 불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견성을 하게 되면 자신의 본래 성품을 보게 되고 공부가 더 깊어지면 법성까지 보게 되어 성불하여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견성하여 자성만 보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초기불교에서 해탈한 자를 아라한이라고 하였습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전부다 무엇인가에 연관되어 있으며 관계 속에 있는 것을 연기라고 하며 이것을 철저하게 체험하면 공이 되고 부처가 됩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고 보니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존재하며 독립되어 떨어져 있는 생명체는 없더라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생명체 속에는 무생물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체라고 하는 것에는 산도 포함되고 돌도, 물도 전부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식물에서 동물로 인간으로 가면서 의의 의지가 강해집니다. 


깨달음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매일 깨닫는 연습을 하고 매일 깨닫고 있고 매일 깨달아야 됩니다. 견성을 엄청나게 힘든 것으로 생각하면 평생 공부해도 견성을 못합니다. 그렇지만 견성하는 방법을 제대로만 배우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견성자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도인 스님은 많은 견성자를 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부해서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100km에 도달해도 목적지이고 90km에 도달해도 목적지입니다. 매일 살아가는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견성이라고 하는 문제도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삶 속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TV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카이스트 대학교 교수님이 나오는 프로를 본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바로 뉴욕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10년 동안 하루에 3, 4시간 자면서 온 힘을 다해 대학원의 석,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디자인 수업을 하고 디자인에 몰두를 했다고 합니다.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대학교 교수로 오라고 하고 세계 최고의 디자인회사에서도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공을 앞둔 어느 날 밤 이제까지 공부한 것과 미래를 생각하면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미국에서의 성공이 보장된 삶을 뿌리치고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카이스트 대학 디자인전공 교수로 채용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이용을 하고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아프리카에서는 많은 어린아이들이 말라리아 때문에 죽습니다. 그래서 모기를 퇴치시키는 방법으로 모기들이 가장 싫어하는 주파수를 찾아 흔들기만 하면 그 주파수를 발생시키는 기구를 만들어 말라리아 퇴치에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화랑세속 오계의 첫 계가 사군이충으로 임금에게 충성하자 입니다. 이것을 요즘 말로 풀면 임금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충성하자, 모든 생명에게 보시하자는 것입니다. 


위사군의 질문에 대해서 견성이 공이며, 평등하고 곧음이 덕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공덕을 지으려고 하면 견성을 해라, 공부를 해라 이것밖에 없습니다.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공덕이 가볍지 않느니라. 그러면 공덕이 쌓이고 크게 된다. 그냥 마음은 평등해지지 않습니다. 견성 하면 높고, 낮음이 없고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에 평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공덕이 엄청나게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공경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공이요. 수행하고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덕이다. 몸을 닦는 것이 공이고 마음을 닦는 것이 덕입니다. 옛날에 임금이 되려면 덕이 있어야 잘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라에서는 이빨이 많으면 덕이 있다고 하여 이빨 의 수가 많은 사람이 왕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 근본자리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정치가 바로 덕치라고 하였습니다. 바른 것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 덕입니다. 공덕은 자기의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이같이 복과 공덕이 다르거늘 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요. 달마대사께 허물 있는 것이 아니다. 달마대사는 무제가 베푼 보시에 대해서 무공덕, 공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제는 복덕은 지었지만 공덕을 지은 것은 아닙니다. 연기의 기본 속성은 인과응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이 몇 가지 진리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주를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상수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뉴턴의 운동의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이 있습니다. 연기의 법칙도 똑같은 것입니다. 뉴턴은 물체 사이에 존재하는 위대한 법칙을 발견하였고, 부처님께서는 생명체가 있는, 마음과 마음의 인식이 오고감 속에도 그런 법칙이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이 연기의 법칙입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해당하는 것이 인과응보의 법칙입니다. 인과는 항상 연속성의 법칙을 갖고 있고 응보는 보복성의 법칙을 갖고 있습니다. 인과응보의 법칙 속에는 작용, 반작욕의 법칙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행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관성의 법칙입니다. 하던 것을 지속적으로 하려는 행위가 바로 관성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연속성의 법칙입니다. 이생에서 공부 했는 사람은 다음 생에 또 공부하기 쉽습니다. 이생에서 돈 번 사람은 다음에 또 벌기 쉽습니다. 자기가 했던 업을 그대로 계속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관성의 연속성의 법칙이 바로 인과의 법칙입니다. 공부하라는 이유는 이생에서 공부 해 놓으면 다음 생에 공부할 수 있는 인연이 훨씬 더 많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인과응보 법칙에는 인과는 연속성의 법칙이었고 응보의 법칙은 보복성의 법칙입니다. 내가 지금 박선생님한테 돈 천 만원 빌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박선생님은 돈을 받고 가만히 있겠어요? 이생에서도 좋고 다음 생에서라도 그것을 나한테 갚는 것입니다. 보복성에서 나는 인과지만 상대방은 응보입니다. 나한테 천 만 원 빌려갔으면 다음 생에 그 천 만 원에 해당하는 것을 나한테 갚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복성의 법칙입니다. 이생에서 고마웠으면 다음 생에 고마운 것으로 갚을 것이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다음 생에 원망하는 것으로 갚을 것입니다. 보복성의 법칙은 자기가 받은 것만큼을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이 생, 삼 생 전에 지었던  업은 견성하고 나면 금방 없어집니다. 그렇지만 억겁을 내려오면서 지은 오래된 업인 구생혹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견성하고 나도 잘못하면 그 습에 따라 업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응보는 당연히 받지요. 응보라고 하는 것은 달라질 수도 있고, 다르게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숙식이라고 합니다. 내가 돈 천 만원을 박선생에게 빌려줬다고 해서 다음 생에 돈 천 만원을 받는 게 아니라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박선생이 돈 빌려준 것에 대해 엄청나게 고마웠으면, 다음 생에 나한테 천만 원에 해당하는 땅을 팔았는데 그것이 수 십 억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런 땅을 나한테 팔았겠어요. 응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다르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논길을 지나가다가 논두렁에 돌이 있어서 툭 쳤는데 옆에 있는 소가 그 돌에 맞아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나는 돌을 찼지만 소는 다리가 부러졌으며 다음 생에 뭔가 보복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다음 생에 그 보복에 의해서 소의 다리를 부러뜨렸듯이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차의 범퍼가 조금 상하고 끝날 수가 있고 혹은 또 손발이 다치는 치명적인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행한 행위에 대한 그 과보가 나한테 돌아오는 것입니다.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다 보면 그 과보가 나한테 돌아오더라도 훨씬 더 가볍게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계, 정, 혜에 따라 생활이 일정하고 흐트러짐이 없기 때문에 보복이 온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보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행원이 되어서 저녁마다 고객들 접대한다고 술을 자주 먹는 생활을 합니다. 술 먹고 차를 몰고 가다가 목숨이 위태로운 치명적인 손상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생에 받는 그 삶에, 내가 살아가는 모습에 따라 받는 그 응보는 달라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사촌이었던 제바달다는 부처님을 모함해서 살해하려고 여러 번 시도합니다. 코끼리에 술을 먹여서 부처님 오시는 그 길에서 돌진해 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시는 그 길에 술 취한 코끼리가 돌진해오다가 부처님 앞에서 그대로 멉춥니다. 산 위에서 돌을 굴러 부처님 가는 길에 떨어뜨리느데 그 돌이 결국 다 피해갑니다. 그러다가 바닥에 부딪혀 깨진 돌 하나가 부처님 발톱에 부딪혀 피가 났습니다. 부처님께서 전생의 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몸에는 상처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바달다에 의해 상처가 났어요. 행한 것은 언젠가 그 보복성에 의해 되돌아오게 되어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받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전생이나 내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의 모습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평생 가르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전생을 알려고 하는가? 이 생에 대한 확고한, 지금 삶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전생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바로 이 순간 밖에 없습니다. 이 순간 깨어있으면 부처고 이 순간 흐트러지면 지옥인 것입니다. 이 순간의 생각에 따라 우리의 삶은 부처에서 지옥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나를 해치지 못하고, 나를 침범하지 못합니다. 공부하다 보면 확신이 딱 생길 때가 있습니다. 공부가 익으면 신장님이 지켜줍니다. 이론적인 공부는 아무리 해도 그런 힘이 없습니다. 수행하고 생각을 집중하면 그런 힘들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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