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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강 36대법으로 중도를 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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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856회 작성일 22-05-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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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강 36대법으로 중도를 설하라


오늘은 혜능대사가 법을 어떻게 전하는가?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대법, 참됨과 거짓, 게송을 전함, 법을 전한 계통, 참 부처, 멸도등  법을 전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혜능으로부터 토양을 쌓기 시작한 선불교에는 중국천하, 세계 유래 없는 가장 풍요로운 사상의 황금기를 연 위앙종, 조동종, 임제종, 운문종, 법안종과 조주중심이 있습니다. 혜능의 제자로는 법해, 지성, 법달, 지상, 지통, 지철, 지도, 법진, 법여, 그리고 신회가 있습니다. 이 10대 제자들을 불러서 법을 설하는 밥업을 설명해주는 내용입니다. 삼과와 동용삼십육대를 들어서 나오고 들어감에 곧 양변을 여의도록 하여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청하고,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때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깨친 연기와 무아와 무상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이 법의 본질을 포함하고 있는 법을 설하지 않으면 법이 될 수 없습니다. 법문을 할 때 자기의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내용을 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을 청할 때 삼배를 합니다. 묘법연화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처음 한 번 청할 때는 설법하시기를 거절합니다. 두 번 청해도 거절하고, 세 번 청해야 비로소 이 사람들이 정말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들으려고 하는구나 하고 법을 설합니다. 법을 청할 때 삼배하는 것이 여기에 연유합니다. 인사로 삼배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청할 때 삼배하는 것입니다. 스님에게 절을 할 때는 법을 청할 때만 삼배를 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인사는 반배나, 일 배로 예를 표하면 됩니다. 여기서는 연기, 무아, 무상의 내용을 혜능은 36가지의 내용을 갖고 구체적으로 법을 설하라. 모든 법을 설하되 성품과 모양을 떠나지 말라. 어떤 사람이 법을 묻거든 말을 다 쌍으로 해서 대법을 취하여라. 옳음과 그름. 선하고 악하고 처럼 대법을 취하여라. 가고 오는 것이 서로 인연하여 구경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 이렇게 대법을 이루면서 설해주면 상대방이 알아듣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 구경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그 두 가지 법이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 그래서 연기가 곧 공인 것을 설명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성규가 이렇게 생겼고 박선생인이 이렇게 생겼고 이것은 모양입니다. 이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성품입니다. 악하더라, 선하더라, 급하더라, 하고 표현하는 것은 안에 들어 있는 내용으로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양은 성품을 바탕으로 해서, 내가 살아오면서 전생에 물들었던 성품대로 이생의 이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나의 이 모습은 내 성품에서 만들어진 형상일 뿐입니다. 예뻐지려고 하면 선한 마음을 잘 써야 예뻐지는 것입니다. 성형으로 예쁘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1, 2년 지나면 더 추해지게 됩니다. 진정으로 예뻐지려고 하면 성품 자체가 예뻐져야 그 모양대로 예뻐집니다.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한 32가지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수행하고, 도를 구한 과보로 받아지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성품에 따라 모양은 나타날 뿐입니다. 이생에서 내 모습은 업이 그대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내 모습을 바꾸려면 업을 바꾸어야 됩니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참선을 한다는 것도 이제까지 쌓아 왔던 업을 바꾸는 방법입니다. 모양은 내 속에 들어 있는 업의 흔적대로 만들어 냅니다. 모습을 잘 받으려면 성품이 바르고, 곱고, 좋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들기 전의 것을 보고 제대로 알 것 같으면, 물들어 있는 이 모습 하고는 다른 차원의 인식에서 세상을 볼 수 있고, 자신을 볼 수 있고,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성품과 모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성품을 설명할 때 모양이 있으면 이해하고 인식하기가 쉽습니다. 형상이 없는 성품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양을 비유로 설명하면 훨씬 더 쉬워지는 것입니다. 


혜능이 설하기를 삼과법문은 음(陰)과 계(界)와 입(入)이다. 음은 오음(五陰)이며, 계는 십팔계(十八界)며, 입은 십이입(十二入)이다. 오음은 색음, 수음, 상음, 행음, 식음이다. 십팔계는 육진(六塵), 육문(六門), 육식(六識)이다. 십이입(十二入)은 바깥의 육진과 안의 육문으로 육진은 색, 성, 향, 미, 촉, 법이며, 육문은 눈, 귀, 코, 혀, 몸, 뜻이다.

법의 성품이 육식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육식과 육문과 육진을 일으키고 자성은 만법을 포함하니, 함장식(含藏識)이라 한다. 생각하면 식(識)이 작용하여 육식이 생겨 육문으로 나와 육진을 본다. 자성이 삿되면 열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正]을 포함하면 열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는 것이다. 악의 작용을 지니면 중생이며, 선이 작용하면 부처이다. 작용들은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는다.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에 다섯 대법이 있다. 하늘과 땅이 상대이며, 해와 달이 상대이며, 어둠과 밝음이 상대이며, 음과 양이 상대이며, 물과 불이 상대이다.

논란하는 말[語]과 직언하는 말[言]의 대법과 법과 형상의 대법에 열두 가지가 있다.

유위와 무위, 유색과 무색이 상대이며, 유상과 무상이 상대이며, 유루와 무루가 상대이며, 

현상[色]과 공이 상대이며, 움직임과 고요함이 상대이며, 맑음과 흐림이 상대이며, 범(凡)과 성(聖)이 상대이며, 승(僧)과 속이 상대이며, 늙음과 젊음이 상대이며, 큼과 작음이 상대이며, 길고 짧음이 상대이며, 높음과 낮음이 상대이다.

자성을 일으켜 작용하는 대법에 열아홉 가지가 있다. 삿됨과 바름이 상대이며, 어리석음과 지혜가 상대이며, 미련함과 슬기로움이 상대이며, 어지러움과 선정이 상대이며, 실(實)과 허(虛)가 상대이며, 험함과 평탄함이 상대이며,  번뇌와 보리가 상대이며, 사랑과 해침이 상대이며,  기쁨과 성냄이 상대이며, 버림과 아낌이 상대이며, 나아감과 물러남이 상대이며, 남(生)과 없어짐[滅}이 상대이며, 항상 함과 덧없음이 상대이며, 법신과 색신이 상대이며,    화신과 보신이 상대이며, 본체와 작용이 상대이며, 성품과 모양이 상대이다.

유정과 무정의 대법인 어(語), 언(言)과 법(法), 상(相)에 열두 가지 대법이 있고, 바깥 경계인 무정에 다섯 가지 대법이 있으며,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 데 열아홉 가지의 대법이 있어서 모두 서른여섯 가지 대법을 이루는 것이다. 이 삼십육 대법을 알아서 쓰면 일체의 경전에 통하여 출입에 곧 양변을 떠난다.

자성의 기용(起用)은 삼십육 대법을 사람의 언어와 더불어 하지만,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空)에서 공을 떠나며, 공에 집착하면 무명만 기르고, 모양에 집착하면 사견만 기르게 된다. 

법을 비방하면서 '문자는 쓰지 않는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려면 말하지도 않아야 옳은 것이다. 언어가 문자이기 때문이다.

자성에 대해서 공(空)을 말하나 바른말로 말하면 본래의 성품은 공하지 않으니 미혹하여 스스로 현혹됨은 말이 삿된 까닭이다.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으로써 변화하여 어둡고, 어둠으로써 밝음이 나타나니, 오고감이 서로 인연한 것이다. 삼십육 대법도 또한 이와 같다.


오음과 오온은 똑같은 개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업에 의해서 이 몸이 만들어 지는 것을 설명한 것이 오온연기입니다. 계는 18계입니다. 사람들이 부처님께 법을 물으러 왔을 때 던진 질문이 네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없다고 생각하느냐? 를 물었습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 해 보아라. 대답이 없으니 부처님께서 설명해줍니다. 너의 눈에 내가 보이느냐? 예 눈으로 부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눈이 있어봄으로써 너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이 들리느냐? 네 들립니다. 귀가 있어 들음으로써 너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코가 있어 냄새를 맡고, 혀가 있어 맛을 보고, 몸뚱이가 있어 감촉을 느끼고, 의가 있어 생각을 하고 이 여섯 가지 육근을 통해 인식함으로써 너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생명체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체를 근이라 하며 여섯 개라 육근입니다. 사람은 육근이고, 동물도 육근이고, 식물은 몸둥이 신과 의식의 의 두 개의 근을 가지고 있으며, 돌은 몸둥이 신만 있어 하나의 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등동물일 수록 의가 발달해 있습니다. 육문은 육근입니다. 색(형상), 성(소리), 향(냄새), 미(맛), 촉(감촉), 법(생각의 대상)의 육진은 육경입니다. 육식은 눈이 느끼는 안식, 귀가 느끼는 이식, 코가 느끼는 비식, 혀가 느끼는 설식, 몸이 느끼는 신식, 인식하고 분별하는 의식의 여섯 가지 식입니다. 앞에 있는 사진을 보세요. 눈으로 보는 순간, 안식이 생깁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똑같이 느끼는데 그다음 본 것이 내 속에 저장되어 있는 업과 관계하여  생각을 하고, 분별을 합니다. 그림이 너무 좋아 마음에 든다. 어릴 때 놀았던 동네 숲과 비슷하네. 그림을 보니까 초등학교 때 친구가 생각나네. 그림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생각은 다 다릅니다. 이것이 식입니다. 눈이 보는 순간까지는 다 똑같은데 저장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업과 부딪히는 순간, 다 다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육근과 육경이 부딪혀 육식을 일으키고. 이 18가지 변수가 만들어내는 함수가 연기법입니다. 18계의 변수에 대해 찾아낸 법칙이 연기의 법칙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운동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생물체인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법칙입니다. 무생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법칙을 넘어서 생명이 있는 것이 부딪힐 때는 어떤 법칙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연기의 법칙인 것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내용은 보복성의 법칙과 끌어당김의 법칙과 연속성의 법칙입니다. 

입은 처로 12처입니다. 부처님께서 불교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는 12처가 불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12처는 육근과 육경을 통하여 나나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식은 두 개가 부딪혀 일어나는 2차적인 생성물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더 선행해서 존재하는 것은 육근과 육경입니다. 바깥의 육진과 안의 육근이 바로 12처입니다. 육진은 색, 성, 향, 미, 촉, 법이고 육문은 안, 이, 비, 설, 신, 의입니다. 이것이 불교를 설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팩트, 내용들이고 이것이 갖고 있는 법칙의 설명이 불교입니다. 집약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연기의 법칙입니다. 삼과법문을 설명하라는 것은 불교의 가장 핵심인 연기법을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니까 성취되더라. 기도가 왜 성취가 되는지 본질을 알면 응용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모를 때는 주어진 것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절에 가면 관세음보살 기도가 영험이 있다, 또 어떤 도량은 신중기도가 영험이 있다고 할 때 그 기도만 해야 되는 줄 압니다. 본질을 모르면 나무의 줄기 하나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줄기 따라 내려오면 줄기도 있고, 잎도 있고 뿌리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공부든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원인규명을 하면 맞는 결과를 얻게 되고, 다른 문제에 부딪치더라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수학문제 하나를 푸는데 김은 3. 4시간 이나 걸려 겨우 풀었습니다. 그러나 박은 해답을 보고 금방 풀었습니다. 다음 김에게 유사한 문제가 주어졌을 때 풀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해답을 보고 문제를 푼 박은 비슷한 문제가 주어졌을 때 풀지 못합니다. 공부도 본질을 알아야 됩니다. 인과는 쉽습니다. 그렇지만 인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연기를 알아야 됩니다. 드러난 현상은 인과지만 그 밑에 흐르고 있는 법칙은 연기입니다. 우리가 근본을 알고, 뿌리를 알 때는 어디든지 적용을 하고 평생 내 것으로 써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기술을 익혔을 때는 거기 밖에 적용이 안되는 것입니다. 

삼과법문의 내용이 불교의 가장 핵심내용입니다. 앞에서 말한 육식과 의식을 좀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의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내용이 상당히 복잡합니다. 의식에는 현재 의식이라는 육식이 있고 잠재의인 제 칠식 마나식이 있고 무의식이라는 제 팔식 알라야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제칠식을 갖고 평생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난 다음, 내 속에 저장되어 있는 업이 제 칠식입니다. 불교공부를 하자는 것은 제 칠식이 저장되어 있는 저장창고를 제대로 한 번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바로 제 팔식인 알라야식을 알자는 것입니다. 법의 성품이 육근과 육진이 부딪혀 육식을 일으키고, 육식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자성은 만법을 포함하여, 내 속에 만법이 전부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육근이고 대상은 육경입니다. 그런데 왜 눈은 보기만 합니까? 눈으로는 못 듣습니다. 귀는 죽다 깨어나도 못 봅니다. 듣기만 합니다. 활동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깨치고 나면 육근과 육경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안으로 들어오니까 육근이 되는 것이고 바깥으로 내뿜으니까 육경이 되는 것입니다. 눈과 색은 같은 것이며, 귀와 성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로 듣고 알며 보고 아는 것입니다. 견성하고 나면 신통이 생깁니다. 신통이 생기는 것은 스스로가 눈과 색이 같은 것임을 알아 안 보아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단절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으니까 모르지만 이것이 하나로 통해 있을 때는 그냥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혀있으니까 경계 안에 있는 것만 볼 수 있지만 터져버리면 바깥에 있는 것도 눈과 색은 같은 것이니까 다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면 생기는 것이 신통입니다. 견성하면 신통으로 밖의 세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안에 깊숙이 있는 장식인 알라야식을 알게 됩니다. 알라야식을 보고 아는 것이 견성입니다. 알라야식을 깊이 함장되어 있어서 장식이라고 하며, 들어 있는 업이 다르게 익는 다고 이숙식이라고도 합니다. 이생에서 박선생님한테 돈을 천만 원 빌려줬습니다. 그러면 다음 생에 돈 천만 원 갚아야하는데 천만 원을 갚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해당하는 땅이나 직장으로 갚는다고 이숙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 귀로 소리를 듣는 것 등 육근, 육경, 육식이 화합하여 이루어지는 이것을 (3x6 = 18개로) 18계라 합니다. 내가 삿된 생각을 일으키면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18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바른 생각을 일으키면 자성이 바르기 때문에 18가지 바름이 일어납니다. 악의 작용을 지니면 중생이고 선이 작용하면 부처다. 중생과 부처가 다른 것이 아니라 선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순간 부처 되는 것이고 악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순간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원래 부처가 아니면 죽다 깨어나도 부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나타나면 그것이 악이지만, 선으로 나타나면 부처인 것입니다. 어둠이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둡다가 불을 키면 환하게 밝아집니다. 밝아지면 어둠이 그냥 없어집니다. 바로 똑같은 동체인 것입니다. 하나의 동체 속에 악이 되기도 하고 선이 되기도 하며, 이것의 뿌리가 무기입니다. 원래 알라야식 속에는 그냥 무기일 뿐입니다.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닙니다. 그냥 있을 때는 무기인데 작용을 일으키면 선이고 악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사용할 때는 선이 되고 악이 되지만 사용하기 전 창고에 들어 있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닌 것입니다. 원래 무부무기입니다. 선도 악도 아닌 그 성품이 본래 성품인 것입니다. 이 작용들은 무엇으로 말미암는가하면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습니다. 바깥 경계의 무정은 다섯입니다. 무정은 정이 없는 것으로 생명이 없는 무생물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정이 있는 것입니다. 무생물은 생명이 없는 죽어 있는 것으로 정이 없어 무정이라 합니다. 무정물입니다. 무생물도 넓게는 생물에 포함시켜도 됩니다. 무생물은 의지가 없는 생물인 것입니다. 신, 몸둥이만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생물까지도 연기의 법칙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무정의 다섯 대법인 하늘을 이야기하면 땅을 이야기하고, 해와 달은 서로 상대로 이야기하고, 어둠과 밝음은 상대이며, 양과 음이 상대이고, 물과 불이 상대입니다. 이렇게 무정물은 다섯 개로서, 상대로서 설명하면 됩니다. 논란하는 말, 직언하는 말인 대법과 법과 형상의 대법에는 12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이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유위법과 무위법입니다. 

우리가 살아서 깨치지 못한 상황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에는 인과가 따르게 됩니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과보가 있는 모든 것을 유위법이라고 합니다. 다음 생에 몸을 받는 업을 축적시키는 행위가 유위법인 것입니다. 모든 법은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은 깨치기 전의 상태에서 행위와 거기에 따른 업 등을 유위법이라고 하고 깨친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인식하는 것을 무위라고 합니다. 유식에서 법을 5위 100법으로 나눕니다. 유위법의 심왕법, 색법, 심소법, 심불상응행법과 무위법을 합하여 5위라 하며 구체적으로 이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내용을 100가지로 나누어 마음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우주를 표현할 때 삼계라고 합니다.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입니다.  유색이라고 하는 것은 욕계와 색계이며, 무색을 무색계입니다. 유상과 무상은 형상이 있는 것과 어떤 형상이 없는 것을 나타냅니다. 지옥 축생 인간은 유상이고, 아귀 아수라 천상은 무상입니다. 유루와 무루에서 루는 번뇌와 업을 뜻하며, 다음 생에 태어날 업이 되는 것은 유루이며, 다음 세상에 태어날 업이 되지 않는 것은 무루입니다. 유루는 세간법이며, 무루는 출세간법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부모가 자식을 택한 것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택한 것입니다. 자기의 업에 맞는 장소를 찾아 간 것입니다. 그 장소에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든 것입니다. 자식이 자기의 업에 따라 그 업의 맞는 장소에 찾아간 것입니다.

삼계 중에 밑에 있는 2개인 욕계, 색계를 유색이라 표현하고 그 위에 세계를 무색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위, 무위, 유색, 무색, 유루와 무루입니다. 무루법은 출세간법입니다. 출세간법이 법이면서 무루입니다. 우리가 몸을 받는 것은 업에 의한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한 번 보세요. 결국은 부모가 자식을 택한 것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택한 것입니다. 자기의 업에 맞는 장소를 찾아 간 것입니다. 그 장소에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서 그 업의 맞는 장소에 찾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내 업만큼의 몸을 받아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처와 같이 견성한 사람은 원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처는 세상에 태어날 때 윤회의 구속에서,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만 중생의 구제를 위하여 윤회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원으로 이 세상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는 방법은 유루일 때는 업으로 오지만 무루일 때는 원으로 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현상으로 색입니다. 색이 갖고 있는 본질이 공입니다. 본질이 나타나는 모양은 현상, 색을 갖고 있는데 그 본질의 원래 성품은 공하더라는 것입니다. 공인데 진공묘유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공이 아니라 묘유, 거기에 끝도 없는 온세상이 전부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움직임과 고요함. 움직이지 않는 즉 적정. 맑음과 흐림. 평범한 것과 성인. 성과 속. 출가자와 재가자. 늙음과 젊음, 크고 작고, 길고 짧고, 높고 낮고. 이와 같이 대법을 갖고 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법을 설하면 상대방이 알아듣기 쉽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자성을 일으켜 작용하는 대법에는 19가지가 있습니다. 삿됨과 바름 이것이 서로 상대가 되고. 어리석음과 지혜, 근본적으로 치는 본질에 대한 앎이 없으면 우리는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것이 치이며, 지혜는 무아와 무상을 아는 것입니다. 미련함과 슬기로움, 어지러움과 선정, 우리는 항상 어지럽고 계속 산만합니다. 끝도 없이 산만한데도 못 느낍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 속에는 항상 많은 생각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못 느낄 뿐입니다. TV 열심히 보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안 일어납니다. 그것은 내가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의식이 깨어있어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객관에 몰두하다 보니까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끊임없이 번뇌망상이 일어나는지, 어떤지 못 느낄 뿐입니다. 다리 틀고 앉아서 한 생각에 집중해보면 온갖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내가 집중을 안 할 때는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마음을 먹고 해보니까 다른 생각이 끝도 없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하는 방법으로 부모미생전(이 몸 받기 전 나는 무엇이였는가?)과 같은 화두를 들고 거기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불법에서 나오는 그 내용만이 불법이 아니라 존재하는 전부다 불법인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어리석을 때는 불법이 하나도 없지만 지혜로우면 전부다 불법인 것입니다. 험함과 평탄함이 대가 되고, 번뇌와 보리가 대가 됩니다. 깨닫지 못한 상태가 번뇌이고 깨달은 상태가 보리입니다. 사랑과 해침이 상대가 되고, 사랑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익되게 하고 기쁘게 해주는 것이며, 상대에게 해를 입히고 손해되게 하는 것이 해침입니다. 기쁨과 성냄이 상대입니다. 상대가 되는 모든 것은 똑같은 뿌리에서 같이 올라오는 것인데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기쁨도 될 수 있고, 성냄도 될 수 있습니다. TV를 보니까 어떤 나라에 지진이 일어나 난민들이 생기고 난리입니다. 안타까워서 백만 원 보시하고 기분 좋게 집에 왔습니다. 집에 와서 이야기 하니까 가족들이 백만 원이나 되는 큰 돈을  보시했다고 야단을 합니다. 똑같은 상황인데 하나는 기쁨이고 하나는 성냄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내용이라도 기쁨과 성냄도, 사랑과 해침도, 번뇌와 보리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뿌리 속에서 있습니다. 마음 잘 쓰면 사랑이 되고 마음을 잘 못쓰면 해침이 되고, 마음 잘 쓰면 기쁨이 되고 못 쓰면 성냄이 됩니다. 버림과 아낌이 상대고, 나아감과 물러감이 상대고, 태어남과 없어짐이 상대고, 항상함과 덧없음이 상대입니다. 모든 것은 덧없다, 부지런히 노력하라. 우리 삶이 무엇인가? 며칠 있으면 부처님오신 날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에 드시면서 하신 말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라. 입니다. 우리의 삶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는 거기에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화살의 과녁, 조준만 잘 하면 10KM 밖에 있는 과녁을 정확하게 맞춥니다. 조준을 잘못하면 아무리 해도 빗나갈 뿐입니다.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정확하게 과녁을 맞추는 정답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왕도가 없고, 공부에도 왕도가 없습니다.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는 것보다 좋은 게 없습니다. 법신과 색신이 상대입니다. 이때의 법신이라고 하는 것은 나 이외의 모든 것이며, 색신은 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성은 나의 본래 성품이며, 이것을 보는 것이 견성입니다. 나 이외의 대상은 법신입니다. 자성과 법성. 자신과 법신에서 법성과 법신은 대부분 같은 말로 써입니다. 나를 표현할 때는 자신과 자성은 전혀 별개지만 나의 형상을 자신이라 하고 내 성품을 자성이라 합니다. 법신과 법성이라고 하는 것은 법성으로도 잘 씁니다. 자성과 법성을 합하여 불성이라고 합니다. 자성과 법성을 다 깨칠 때,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만 깨치는 것을 견성이라 합니다. 견성성불 하는 거는 자성과 법성을 다 깨쳤을 때,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라고 합니다. 화신이라고 하는 것은 나타내는 모든 작용입니다. 우리의 삶이 화신이고 화신의 모양이 보신이고 이것의 본체가 법신입니다. 법신은 본질, 본체를 상징하고 보신은 어떤 모양, 형상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사람의 형상, 동물이라면 동물의 형상, 이것이 작용하는 것, 사람으로서 깨닫기도 하고 베풀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이 모든 작용을 화신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법신, 보신, 화신이며,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신입니다. 종교의 체계가 전혀 별개인 것 같아도 똑같은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체계를 잡는 데는 자기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먼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본체와 작용, 우리가 나타내는 모든 것은 작용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있는 것은 본체입니다. 본체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행하는 작용을 보고 김성규는 저런 사람이구나, 박선생은 그런 사람이구나. 짐작하는 것입니다. 작용을 통해서 본체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품과 모양은 상대이며, 유정과 무정이 대법입니다. 

36대법을 알아서 쓰면 일체의 경전에 통하여 출입에 곧 양변을 떠난다. 양변을 떠난다는 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어떻게 자성이 기용을 하는가? 36대법은 사람의 언어와 더불어 함께하나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에서) 모양을 떠납니다. 바깥으로 나와서, 바로 법신에서는 전부다 형상, 모양입니다. 그 형상을 이루고 있지만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형상이 갖고 있는 본질을 보아라. 모양을 보지만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야 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자성은 연기는 공이라고 했듯이 바로 본래 성품이 공하다는 것에서, 공에서 공을 떠나야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공에 집착하면 무명만 기르고, 모양에 집착하면 사견만 기르게 됩니다. 나와 대상이 갖고 있는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 나는 무명이고 대상은 사견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상의 본체인 모양의 집착에서 떠나야 하고 나의 본체인 공에 집착하지 말고 공에서 벗어나라. 법을 비방하면서 말하기를, 문자는 쓰지 않는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할진대 사람이 말하지 않아야 옳은 것이다. 문자나 말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언어가 곧 문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성에 대해서 공을 말하나 바른 말을 하면 본래의 성품은 공하지 않으니 미혹하여 스스로 현혹됨은 말들이 삿된 까닭이다. 말의 잘못이라 하면 이 말의 장난에 빠지게 되는데 이 말에 현혹되지 마라.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어둠은 어둠대로 있고 밝음은 밝음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밝으면 어둠은 없어지므로 밝음 때문에 어둠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어둡지도 않고 그냥 우리가 어둠이라고 할 뿐인데 밝음 때문에 어둠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으로 해서 변화하여 어둡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으로써 밝음은 나타나니 오고감이 서로 인연한 것입니다. 이 36대를  쓰는 것도 이렇게 쓰면 바른 법을 설하게 됩니다. 혜능이 제자들에게 양변을 설명하면서 양변을 떠나는 법인 중도를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선을 설명할 때는 선의 대법이 되는 악과 선을 설명하면서 둘 다 떠나는 중도를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깨친 연기의 내용은 중도로써 설명하고, 중도로써 표현하고, 중도로써 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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