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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육조단경 제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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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899회 작성일 21-07-2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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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제1강 


불교에 있어서 어떤 삶이 가장 바른 삶일까요. 

오늘부터 해탈과 편안으로 자유와 평등으로 뛰어난 삶을 살도록 이끌어가는 육조단경 강의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깊은 성찰을 통해서 한번 생각해보고 되돌아보면서 육조단경 강의를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육조단경은 1940년대에 돈황본 육조단경이 발견됨으로써 세상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한국에서 성철스님께서 돈과 점의 문제에서 불교의 깨우침은 돈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선불교의 지평을 확인했습니다.

돈황본 육조단경의 내용은 성철스님 번역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그리고 또 이 내용을 우리 현대인들이 읽어도 쉽게 접할 수 있고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제가 매끄럽게 문장을 다듬었습니다. 저도 상당히 급하게 했기 때문에 잘못된 부분들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통해서 미흡한 부분들은 조금 보충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스님들이 주고받는 화두중에서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인가?‘하는 뜻입니다. 6개월동안 행복한 화두 공부를 하면서 선불교를 공부하면서 문득문득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이숙제를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풀고 여기에 뭔가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에 근거한 답을 하나씩 내놓을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를 해봅시다. 


선불교라는 자체가 문자를 배제합니다. 문자를 떠나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문자를 갖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있고 문자를 떠나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있어요. 선불교를 이해하는데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책이 대념처경입니다. 대념처경과 안반수의경은 부처님 당시 초기 경전입니다. 달마는 중국 선불교의 초조입니다. 달마는 인도에서 약 500년경에 중국으로 건너옵니다. 달마에 의해서 중국에서 새로운 선불교의 씨앗을 뿌리게 됩니다. 이 달마가 지은 책으로서 혈맥론, 관심론, 이입사행론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책들은 잔잔하게 뭔가를 우리에게 전한다면 이런 책들은 정말 큰 파도와 같이  깜짝 놀랄 정도로 아 이런 세계가 있구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전해옵니다. 저도 혈맥론을 처음 접했을 때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관심론도 최고의 명문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삼조 승찬이 지은 신심명의 짦은 문장이 우리의 개우침, 깨끗한 마음을, 깨달음에 갈 수 있는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가 현각이 지은 증도가가 있습니다. 또 벽암록과 무문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산대사 청허가 지은 선가귀감이 있습니다. 한국 승려로서는 선불교에 대한 길잡이인 선가귀감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선문에서 화두에 대한 것을 총 망라해놓은 책이 바로 선문염송입니다. 


육조대사법보단경은 681년 육조혜능이 저술한 책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지 않는 것으로서 경이 붙은 것은 육조대사법보단경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가 중국에 넘어와서 선불교를 이루면서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선불교는 불교의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와 중국의 도교, 중국의 유교, 중국의 사상과 결합된 인류역사에 새로운 흐름을 던진 사상이 선불교입니다. 

선종 6조 혜능이 소주의 대범사에서 설법한 내용을 소주자사인 위거의 명에 의해 태능의 제자 법해가 집록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돈황본, 헤흔본, 존중본, 덕이본 들이 있어요. 돈황본이 나오기 전에 일반적으로 헤흔본이나 존중본이나 덕이본에 근거해서 육조단경을 이해했습니다. 돈황본 육조단경이 돈황석불에서 두루마리식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돈황본이 육조단경의 가장 원본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본들은 앞부분의 내용은 거의 비슷한데 본들에 따라 비슷한 내용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돈황본 육조단경을 가장 주본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에 근거해서 공부를 하면 되지 않겠나싶습니다. 

이 육조단경을 강의하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몇몇 부분을 먼저 강의하여 견성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 식심견성입니다.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본다는 뜻입니다. 견성 즉 본래 성품을 보아 마음을 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 육조단경에서는 “모든 법이 모두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모든 법이 전부다 우리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 자기의 마음을 따라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는 내 본래의 성품을 단박에 못깨우치고 못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교공부를 하다보면 항상 부딪히는 문제가 심의식문제입니다. 부처님께서 내가 있다 생각했을 때 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그것을 증명해보아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무엇이냐면 너는 눈이 있느냐 없느냐 예 눈이 있습니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봅니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봄으로써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부처님께서 그것을 물어보러 온 사람에게 설명한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존재에 대해서 인식시킨 첫 설법입니다. 귀가 있어 소리를 들음으로서 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코가 있어 냄새를 맡음으로써 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몸뚱이가 있어 감촉을 느낌으로서 뜻이 있어 의의가 있어서 생각을 함으로써 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에서 이 의가 바로 심의식할 때 의입니다. 결국은 가장 중요한 것이 인식하는 모든 것이 이 의라는 것으로 통섭됩니다. 그래서 나의 출발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의가 됩니다. 그리고 나외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은 색성향미촉법입니다. 그래서 색이라 하는 것은 바로 형상있는 대상의 모든 것이 색이고 성은 소리, 향은 냄새 미는 맛, 촉은 감촉, 법은 법으로 생각의 대상입니다. 불교는 의의 종교이고 불교는 식의 종교이고 불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심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이라고 할 때에 내가 일으키는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생각의 전부 다의 집합체가 마음입니다. 식은 내가 일으키는 생각 하나하나가 식입니다. 그래서 심의식 이것을 제대로 알면 우리는 본래의 성품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육조단경의 돈황본 내용은 33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해 놨습니다. 육조단경의 본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뭔가 제대로 인식해야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초기 불교에서는 연기로 표현합니다. 연기를 설명하면 나의 인식체는 안이비설신의입니다. 나 외 대상은 색성향미촉법입니다. 나와 대상이 부딪히면 식이 생깁니다. 안이비설신의식이 생겨요. 그래서 이세상에는 안이비설신의가 있고, 색성향미촉법이 있고,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18계입니다. 이18계에 관계되어있는 어떤 일정한 법칙이 연기의 법칙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깨우친 불교의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으로 존재합니다.  

불교의 교리가 체계화되면서 대승불교는 유가와 중관으로 나뉩니다. 유가라고 하는 것은 안이비설신의식이 있었죠. 이 의식에 대해서 좀더 집중적으로 연구를 합니다. 의식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다보니까 우리의 의식은 제육식, 제칠식, 제팔식으로 나눌 수 있는겁니다. 제육식 현재의식과  제칠식 잠재의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을 본다던가 느낀다던가 안다고 했을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도 알 수 있고 또 적용도 합니다. 내속의 저장창고 속에 들어있는 것이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그생각과 결합되어 같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동안 써먹는 것은 내 저장창고에 들어있는 이 잠재의식 제칠식을 써먹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고 집착하는 것이 제칠식인 것입니다. 이 칠식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뿌리가 바로 제팔식 아뢰야식입니다. 그럼 우리가 깨닫는다, 깨우친다, 안다고 했을 때 바로 제칠식의 근거가 되는 이 팔식에 대한  인식이 바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관파에서는 공이라고 이야기하고 선불교로 넘어오면 화두라는 것을 들고 화두라는 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의식을 집중하고 모으면 무명을 타파하고 바로 공을 인식할 수 있고 연기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연기를 인식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선불교에서는 화두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초기불교에서 연기라는 것이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연기는 곧 공이 됩니다. 연기와 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본질적인 어떤 본래의 성품을 우리가 인식하고 보면 그것이 공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통해서 도달한 세계가 바로 공의 세계입니다. 초기불교의 사념처나 대승불교의 육다라밀이나 선불교의 화두는 모두 다른 것이 아닌 부처를 보고 부처가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서울에 간다고 합시다. 서울에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고 고속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공부를 통해서 누구나 다 목적지 서울에 갈 수 있는 겁니다. 부처라는 목적지도 같습니다. 화두라는 공부를 하면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하느냐 입니다. 부산에 있는 사람은 어디서 출발해요. 부산에서 출발합니다. 대전에 있는 사람은 어디에서 출발해요. 대전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대전에 있는 사람도 대구있는 사람도 대구에 와서 부산있는 사람도 대구에 와서 서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산에 있는 사람은 부산에서 서울가면 되는 것이고 대구에 있는 사람은 대구에서 서울 가면 되는 것이고 대전있는 사람은 대전에서 서울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두 공부를 하면서 어려운 것중에 하나입니다. 화두는 탄탄한 불교적인 바탕이 없으면 다 각개전투입니다, 개인적인 깨달음이 개인적인 성찰을 통해서 개인적인 그 깨달음이 보편화 되기가 쉽지않습니다. 그러니까 잘못하면 대전에 있는 사람도  자기가 깨우친 방법대로 하기위해서는 대구에 데려와서 서울에 가려고 합니다. 부산에 있는 사람도 자기가 깨우친 그 방법밖에 알 수 없으니까 대구에 데려와서 서울에 갈려고 합니다. 이것이 화두가 가지고 있는 장점 중에 하나이면서  가장 큰 맹점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선불교가 어려운가하는 것은 우리가 불교공부를 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선불교는 그냥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초기불교라든가 유식이라든가 다양한 불교를 섭렵한 상태에서 선불교를 이해하면 쉽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이해하지 않고 선불교를 이해하려고 하면 너무나 험난한 길을 가야됩니다. 그래서 선불교는 잘못하면 평생 공부를 하더라도 소득이 없는 겁니다. 부처님 공부는 했는 것만큼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옵니다. 부처님의 수제자 가섭이 1대조사이며 27대 조사 달마가 중국으로 넘어와 선불교의 초조가 됩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 된 것은 약AD. 64년입니다. 전래되고 중국화 되는 과정이 500년의 긴 시간을 거치게 됩니다. 중국에 전래된 교종이 500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면서 중국의 토양속에서 선불교가 일어납니다, 초조달마는 520년 대 사람입니다. 달마는 소림사에 들어가서 면벽 구 년을 합니다. 제자들이 모여들어 이조혜가, 삼조승찬. 사조도신, 오조홍인, 육조혜능으로 법맥이 이어집니다. 혜능에게서 육조단경이 나옵니다. 육조 밑에 남양혜충, 청원행사, 영가현각, 남악회양, 하택신회등 이 사람들이 칠조가 되는데 정확하게 조사 불교는 육조로 끝나버려요,  조사선은 육조로 끝나버리고 그다음 육조 밑에서부터 많은 선사들이 나오면서 중국불교를 선불교 천하로 만들어요. 육조까지는 조사선이라고 말하고 혜능 밑에부터 시작해가지고 화두가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좀 더 체계적으로 잘 깨우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을 체계화시킵니다. 그래서 이 후로는 간화선이라고 합니다. 

조사선과 간화선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하면 달마가 소림굴에서 9년동안 면벽하면서 좌선하고 있었습닉다. 그때 신광이라는 유학자가 달마를 찾아옵니다. 신광의 법명이 혜가입니다. 혜가는 오랫동안 시중을 들고 공부를 합니다. 오랫동안 공부를 하지만 공부가 되었는지 몰라요. 항상 마음이 불편했어요. 하루는 달마한테 묻습니다. 스님스님 제 마음이 아직도 불편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달마한테 물었어요. 그러니까 무엇이 너를 불편하게 하느냐. 너를 불편하게 하는 그 마음을 내놔봐라.고 합니다. 혜가는 아무리 찾아봐도 불편한 마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있지도 않은 불편한 그 마음을 있다고 생각하고 불편해 했는데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깨닫게 됩니다. 바로 편안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상태를 편안하게 하고 해탈하게 하는 이런 방법이 구체화되지 않는 형태의 물음이 조사선입니다. 이것이 간화선으로 넘어오면서 묻고 답하는 것이 분명해져요.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을 때 마삼근이다. 뜰앞의 잣나무다. 라는 대답이 나오게 됩니다. 조사선을 힘이 있고 핵이 있고 강력한 뭔가로 집중시킨 것이 바로 간화선입니다. 간화선의 맹점은 공부를 하면 쉬운데 공부의 바탕이 없으면 어마어마하게 어려워요. 

연기의 법칙이 있듯이 간화선에도 3법칙이 있습니다. 바로 신심과 분심과 의심입니다. 부처님께서 첫 설법부터 마지막 설법까지 사성제와 팔정도를 가르쳤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수바드라에게 가르친 것도 팔정도였습니다. 팔정도의 마지막 결론이 정념과 정정입니다. 정념은 바르게 생각, 바르게 관찰하고 관조하는 것이며 정정은 바르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간화선이라는 것도 정념과 정정을 좀더 체계화, 구체화시킨 말이 바로 신심이고 분심이고 의심이라는 것입니다. 내 성적에 맞춰 대충 대학가겠다고 생각하고 공부하는거와 나는 죽어도 일류대에 가겠다는 것과 이왕 공부해야될거 죽을동살동해서 세계최고 대학에 한번 가보겠다는 목적이 분명한 것과 결과가 같겠습니까? 세상살이에 목적이 분명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요,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어떻게 살더라도 그 목적을 이룰 수가 있어요. 나는 무엇을 하겠다 무엇이 되겠다. 하는 이 분명한 목적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가 되겠다하는 그 믿음, 그 확신이 신심입니다. 목적없이 그냥 사는 것보다 올해 2021년 나는 무엇을 얼마만큼 하겠다. 통장에 천만 원을 모아보겠다는 그 목적을 갖고 살면 어떻게해서라도 돈 천만 원 모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목적 없었을 때는 통장에 돈 안모여요. 그래서 해마다의 목적도 중요한거고 궁극적으로 인생에 있어 나는 부처가 되겠다. 나는 최고의 삶을 한번 살아보겠다. 이런 분명한 신심을 갖는것보다 더 중요한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평생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다음 분심이 있어야 됩니다. 폭발하는 듯한, 공부라는 것은 오늘도 했는둥마는둥, 내일도 했는둥마는둥, 10년 더 해도 했는둥마는둥, 밑도끝도없이 했는지 안했는지 그냥 꾸준하게 공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폭발할 듯이 집중하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분명히 성적이 올랐다고 생각했을 때는 다른 때보다 시험칠 때 훨씬 더 집중했기 때문에 성적이 오를 수 있었어요. 100M 달리기 할 때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은 없지요. 죽을 힘을 다해서 뛰어가죠. 학교과정을 12년 하면 얼마나 지겨워요. 초등학교 6년 졸업하니까 또 시험쳐서 중학교 들어가고 또 시험쳐서 고등학교 들어가고 적당하게 한번씩 그 목적을 주니까  마지막에 죽을동살동 폭발적으로 공부해서 합격하려고 애를 쓴 거에요.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런 폭발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집중적으로 단기간동안 이렇게 공부를 해야만 뭔가 조금 공부가 돼요. 일주일 집중적으로 하는 공부는 한 달 공부하는 것보다 더 공부가 많이 돼요. 매일매일 똑같이 하는 공부는 한치도 더 땅을 파고 못들가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폭발적으로 하는 공부는 소가 뒷발에 쥐잡는 식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계기를 순간적으로 만들어냅니다. 공부하다 보면 전혀 생각도 안했는데 뭔가 를 알게 되요. 전생에 뭔가 공부했던 것들이 나타나 알 수도 있고 그런 힘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처마 밑에 돌을 보면 구멍이 나 있습니다. 한방울한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결국은 구멍을 내요. 언제 어떻게 날지는 모르지만 한방울한방울 떨어지다 보면 구멍이 나요. 이런 과정이 없으면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의식을 뚫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기억 못한다고 해서 전생이 없지는 않습니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부딪혀 안식부터 해서 의식이 생겼습니다. 이 세 개가 부딪히는 것이 촉입니다. 촉이 깨어져버리면 식이 생긴 것이 잘 기억이 안나요. 있었던 내용들이 희미해져요. 우리가 오랫동안 쓰다보니까 세포가 꽉 차기도하고 깨져 잘 인식못하고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촉이 완벽하게 깨지는 상태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상태의 변화입니다. 이생에서 살다가 죽고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거에요. 바로 그 순간이 나의 모든 촉이 깨어져버립니다. 우리가 전생을 왜 기억못하냐 하면 촉이 다 깨어져 있는 상태라서 기억못할 뿐이에요.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 어느 순간 깨어진 바닥 밑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그 순간 전생이 생각나요. 흙탕물일 때는 깨어져 혼란된 상태인데 참선한다고 앉아서 가라앉히다보면 흙탕물이 다 가라앉으면 물이 맑아지면 바닥이 보여요. 바로 참선하면서 그 바닥이 보이면 전생이 보이는 거에요, 촉이 깨어진 것이 전부 다 새로 재결합해서 의식을 되살려주는 것을 뚫고 넘어가야합니다. 뚫고 넘어가는 것이 폭발하는 듯한 분심과 끝도없는 의심으로 집중하는 힘이 없으면 뚫고 지나갈 수 없어요. 이론적으로 연기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면 아는 것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실천함으로서 우리는 견성할 수 있어요. 그리고 또 이렇게 체계화된 이것을 바탕으로 집중적으로 공부함으로서 쉽게 뚫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이것이 바로 화두라는 것입니다. 만법귀일이라는 존재하는 모든 법은 전부 하나로 돌아가고 그 하나는 과연 그 돌아가는 목적지는 어디인가. 어디로 돌아가는가. 이 생각을 밑도끝도없이 집중하다보면 끝없는 적정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다보면 끝도없이 번뇌망상이 일어나요. 일어나는 이 번뇌망상을 화두라는 한군데 집중하는 겁니다. 집중하다보면 어느 순간 탁 터지는 거에요. 풍선 불어보았지요. 풍선을 불다불다보면 견딜만큼 견디다가 어느 순간 탁 터져버리지요. 바로 그 순간이 견성했다고 하는 그 순간입니다. 화두에 집중하다보면 어느 순간 도가 넘어버려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벽을 뚫고 밑으로 지나가는 겁니다. 제 팔식 아뢰야식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에요. 죽다 깨어나도 이 상태로는 안보여요, 뚫고 지나가가야 아뢰야식을 봅니다. 연기를 인식하며,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본래 성품을 보게 되면 끝도없는 청정 자비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결국 본래성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청정하고 자비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청정하고 자비일 수밖에 없어요. 

신심, 분심, 의심. 이것만 제대로 하면은 바로 부처가 된다. 얼마나 쉽습니까. 누가 간암에 걸려 죽었다. 왜 간암에 걸렸는지 우리가 한번 생각해본다면 그사람 가족력도 있을 것이고 그사람의 성격이나 평생 살았던 생활태도나 생활방법이 있을 것이고 이렇게 살펴본다면 간암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현 생에서의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뭔가 간암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전생에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간암에 걸려서 죽었다 했을 때 왜 이 사람이 간암에 걸려서 죽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런데 누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는데 반대편 차선에서 중앙선을 침범해서 넘어와서 정면충돌을 해서 죽었어요. 이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원인과 이유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요.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암내 낸 암소 한 마리 때문에 왕사성에서 세 사람이 죽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왜 죽었는가. 도대체 한 마리 소 때문에 전혀 관계없는 세명이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을 찾아가요. 부처님께서는 왜 그 세사람이 죽었는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전생에 이 세명이 보부상 하는 동료였는데 이 소는 그 동료들한테 억울하게 당한 노파가 원수를 갚으려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소의 몸을 받아 세명을 죽인 것입니다. 죽고 죽이고하는 문제는 전생의 살생의 인연과보 없이는 일아나지 않습니다. 전생에 자기를 죽였던 원수가 앞에 있으니까 뵈는 게 없는거에요. 이런 것들은 전생의 인과를 이해 못하면 풀 수없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도 분명한 원인이 있어 이런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어요. 분명하게 어떤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생긴겁니다. 결국은 더 뿌리깊은 전생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연기는 간단명료해요.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고 이것 없어짐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명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연기입니다. 이것이 무아와 무상, 상대론, 운동의 법칙등이 법칙화하고 수식화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든지 꼭 원인이 있어  결과가 생기는데 이것이 인과론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인과론을 적확하게 표현한다면 확률론적인 인과론입니다.

성철스님의 법문중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요.‘가  있었죠. 아마 초등학생들까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요‘하고 따라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뿐인데 하는 이 말은 송나라 청원 유신선사가 처음 했습니다. 처음 출가해서 세상을 바라봤을 때 그냥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은 산은 산으로 보였고 물은 물로 보였습니다. 분심으로 몇 년동안 미쳐 공부를 하고 나니까 아 세상에 보이는 것이 다 달라졌어요. 그놈의 산은, 산을 아무리 산으로 봐도 산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도 아무리 봐도 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부에 미쳐있었을 때 이랬는데 공부가 익어 견성하고 세월이 지나고 보니 또 ’산은 그대로 산일 뿐이요 물은 그대로 물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의 화두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볼 때 그냥 대상은 대상인거 뿐인데 조금 공부가 익어보세요. 공부에 미쳐서 밤잠안자가면서 참선한다, 책본다, 하다보면 세상 전부다 부처로 보여요. 전부다 부처인 겁니다. 눈에 보이는 전부가 부처인거예요. 바로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데. 단계입니다. 공부가 익고익어 견성을 하고 보니까 다시 다 본래대로 보이더라는 겁니다. 산은 그대로 산일 뿐이고 물은 그대로 물일 뿐이더라. 이겁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뿐인데. 주체에 따라서 전부 다 다르게 인식될 뿐입니다. 

삼법인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입니다. 무상이란 내눈을 통해서 보이는 대상 전부다 무상하고 그래서 이 대상 전부가 무상하고 대상을 보고 일으키는 생각도 전부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색도 무상하고 수상행식도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이 내용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눈의 접촉. 촉이라고 하는 것은 육근과 경과 식이 부딪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 촉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통해서 대상을 봅니다. 눈을 통해서 대상을 보는데 눈을 통해서 대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대상이 안보여요, 눈은 대상을 다 봅니다. 대상을 향하여 나아가기 때문에 대상이 보입니다. 왜 안은 색으로만 나아갈까요? 원래 안과 색은 하나였습니다. 안으로 들어와 안이 되었고 밖으로 나아가 색이 된 것입니다. 대상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근과 경이 부딪히는 촉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식은 어떻게 생깁니까? 근과 경이 부딪혀야 생깁니다. 그래서 근과 경과 식이 부딪히는 것을 촉이라고 합니다. 눈의 접촉에 대해서 무상하다고 근본적으로 접근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눈의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즐겁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는 느낌 수에 대해서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바로 이것이 삼 법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삼법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설명이 눈을 통해서 인식되어지는 근도 무상하고 경도 무상하고 두 개가 부딪히는 식도 무상하고 그래서 촉에 의해서 생기는 느낌 수, 상, 행, 식 전부다 무상하다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무상하다고 알아차림으로서 시작됩니다. 연기라고 하는 것의 속성이 무상과 무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연기의 법칙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연기의 법칙을 체험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아라한이 되고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것을 타파하면서 무명을 깨트리면 명이 되고, 연기를 알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고 했을 때 이것의 첫출발은 무엇이며 이것과 저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아는 것입니다. 무명을 깨트리면 거기서 생기는 것이 명입니다. 명이 곧 연기입니다. 초기불교부터 시작해서 대승불교, 밀교,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부처이며 이 목적을 어떠한 방법으로 인식하느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만 내용은 똑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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