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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15강 사홍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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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971회 작성일 22-02-1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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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강 사홍서원 


오늘 강의는 원에 대해서 입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원을 세웠습니다. 그 원에 따라 지금 이 모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원이 커 이루지 못하더러도 그 원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 세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도 원을 세워서 부처가 되었고 누구든지 원을 세웠기 때문에 원에 따라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부처님의 제자 가섭의 전생을 한번 봅시다. 가섭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살았는데 그해는 인도 전역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수행자가 걸식을 하러 다녀도 흉년이 들어 어느 집이든 먹을 것이 없어 발우에 음식을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거룩한 수행자가 걸식을 하러 와서 몇 집을 돌다가 빈 발우만 들고 돌아갑니다. 가섭은 마침 자기가 먹으려고 피죽을 차려놓았는데 수행자가 빈 발우로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거룩하여 가섭은 그 수행자한테 다가가서 ‘수행자님이여, 지금 내가 먹으려는 피죽이 있는데 괜찮다면 제가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 피죽을 받아서 돌아가는 수행자의 거룩한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세세생생 저 수행자와 같은 거룩한 몸을 받아서 살고 싶다는 원을 세웁니다. 그 피죽을 받아간 수행자가 부처님의 전생이었고 바로 피죽을 나눠준 가난한 농부가 가섭의 전생이었습니다. 가섭은 수행자에게 피죽을 나눠준 인연공덕으로 그 다음 생에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자기가 원하는 데로 공부도 할 수 있고 수행자의 길을 꼿꼿하게 걸어갑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수행자의 귀감이 될 그런 삶을 걸어가신 분이 가섭입니다. 또 2016년 새해를 맞았습니다. 우리도 이 한 해 어떤 원을 세우면서 살 것인가?  또 삶을 돌아보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 왔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더 멋진 삶을 살 것인가? 한번 생각해봅시다. 생각한 대로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꼭 원을 세우고 사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에게 친숫한 네 가지 원, 사홍서원이 있습니다. 무량한 중생을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번뇌를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법문을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 없는 불도를 이루기를 서원합니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渡,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입니다. 이 네 가지 서원이 부처님의 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처님같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무량한 중생들을 전부다 제도하고 모든 번뇌를 전부다 끊어 부처 이루기를 원하고 모든 법문을 다 배우기를 원하고 꼭 부처이루기를 원하는 원을 꼭 실천하도록 합시다. 

원을 이야기 하면 법장비구의 48원이 있습니다. 법장비구는 아미타불의 전생입니다. 아미타불이 되기 전에 법장비구 시절에 세운 원이 법장비구 48원입니다. 법장비구는 이 원에 의해서 아미타 부처님을 이루게 됩니다. 법장비구 48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악취무명원, 지옥세상이 아예 없고 극락국토에 지옥, 아귀 축생이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무타악도원, 삼악도에 아니 나며 극락에 나는 자가 삼악도에 다시 떨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동진금색원, 금색 몸이 이루어지고 극락에 왕생하는 자가 몸이 금색으로 되기를 원합니다. 부처님 몸이 전부다 금색입니다. 도를 이루면 몸이 금색이 됩니다. 오늘 집에 가서 자신의 피부 색깔 한 번 확인 해보세요. 금색에 가까우면 부처에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모무차원, 모든 모습이 똑같으며 나라 안의 천인들의 형색이 좋고 추한 것이 모두 똑같은 거룩한 모습을 같게 하기를 원합니다. 성취숙명원, 모든 생명들의 전생을 아는 숙명통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생획천안원, 세상의 모든 원근인연과 고락인연과 추세인연을 아는 천안통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생획천이원,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아는 천이통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보지심행원은 타심통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신족초월원은 신족통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정무아상원, 아상 없이 깨끗함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부처를 이루면 생기는 여섯 신통이 숙명통,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신족통, 누진통입니다. 결정정각원, 정각성취가 결정되어 꼭 부처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광명보조원, 우주에 대광명이 두루하며 부처님의 광명이 무량하여 시방 세계의 모든 불국토를 빛나게 하기를 원합니다. 수량무궁원, 목숨이 끝이 없기를 원합니다. 성문무수원, 무수히 많은 나한 성중이 살고 있는 나라에 태어나는 원합니다. 중생장수원, 중생의 수명이 끝이 없기를 원합니다. 개획선명원, 좋은 이름 다 얻기를 원합니다. 제불칭찬원, 모든 부처를 찬탄하기를 원합니다. 십념왕생원, 열 번만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극락왕생하기를 원합니다. 죽기 전에 열 번만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바로 아미타불의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난 다는 것입니다. 임종현전원, 임종시엔 아미타불을 뵙고 염불행자가 임종 때 나타나 아미타여래가 살고 있는 그 세계로 이끌어 주기를 원합니다. 회향개생원, 필경에는 극락에 가기를 원합니다. 구족묘상원, 좋은 상호를 다 갖추기를 원합니다. 함계보처원, 부처 자리에 오르시어 정토에 왕생하는 사람은 반드시 일생보처위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신공타방원, 사방제불을 공양하고 나라 안의 보살들을 무량국토에 두루 이르러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기를 원합니다. 소수만족원, 모든 것에 만족하기를 원합니다. 선입본지원, 근본지혜를 깨우치기를 원합니다. 나라연력원, 금강같이 큰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장엄무량원, 공덕장엄이 무량하기를 원합니다. 보수실지원, 보배나무를 모두 알며 나라 안의 보살과 공덕이 적은 자라도 그 도량수의 광명형색을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획승변재원, 말솜씨가 뛰어나기를 원합니다. 대변무변원, 변재능력이 가히 없기를 원합니다. 국정보조원, 나라마다 깨끗하기를 원합니다. 무량승향원, 좋은 법문이 무량하기를 원합니다. 몽광안락원, 광명을 받아 안락하기를 원합니다. 성취총지원, 모든 지혜를 성취하기를 원합니다. 영리여신원, 여자 몸을 받지 않기를 원합니다. 문명지과원, 명호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천인경례원, 천인들이 공경하기를 원합니다. 수의수념원, 생각 따라 옷을 입으지기를 원합니다. 자생심정원, 맑은 마음이 절로 나기를 원합니다. 수현불찰원, 불국토가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무제근결원, 육근에는 결함이 없기를 원합니다. 현증등지원, 대 해탈의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문생호귀원, 날때마다 부귀하기를 원합니다. 부자가 별거 아닌것 같아도 이 세상에 돈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돈을 얼마나 잘 써느냐가 문제입니다. 구족선근원, 모든 선근을 다 갖추기를 원합니다. 공불견고원, 부처님을 공경하기를 원합니다. 욕문자문원, 좋은 법문을 늘 듣기를 원합니다. 보리무퇴원, 깨달음의 길에 퇴보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현획인지원, 삼법인을 얻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법장비구의 48원으로 그 원에 따라 내 삶은 끊임 없이 바뀌어갈 것입니다. 


육조단경에서는 자성사홍서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성중생서원도, 자성번뇌서원단, 자성법문서원학, 자성불도서원성입니다. 부처님의 서원인 사홍서원을 자성에 비추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지식들아, 무량한 중생을 맹세코 다 제도 한다 함은 이 혜능이 선지식들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의 중생을 자기 몸에 있는 자기의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다. 혜능의 설명은 자신이 갖고 있는 마음 속의 중생을, 끝도 없이 일어나는 번뇌망상, 탐욕, 진심, 치심의 중생심을 전부다 제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중생심을 전부다 제거하고 나면 견성하게 되겠지요? 다른 사람들을 제도하겠다고 원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중생심부터 제도하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중생심을 제도하면 스스로가 견성하게 되고 견성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을 제도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견성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제도할 수가 없습니다. 삼매에 들면 견성이 됩니다.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무념에 들어야 되겠고 무념에 들기 위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했습니다. 사마타, 집중이었습니다. 집중을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이생에서 집중력을 향상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부처가 되겠다는 원을 세우고 나면 엄청나게 집중력이 향상 될 것입니다. 그 원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집중력이 향상되니까 우리의 삶은 결국 이 사마타에 의해 결정이 됩니다. 사마타가 잘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어떤 것을 자기의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한다고 하는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와 번뇌와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의 깨달음의 성품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므로 바른 생각으로 제도하는 것이다. 바른 생각이 자기 육신 속에 있는 삿된 견해, 번뇌, 어리석음, 탐, 진, 치를 없애는 것입니다. 근본 번뇌가 탐 진, 치, 망, 견, 의입니다. 이 의심은 이뭐고?하는 의심과는 다름니다. 이 여섯 가지가 근본번뇌입니다. 바른 생각을 하면 그것은 스스로 없어집니다. 바른생각, 지혜를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모든 삿된 것을, 모든 번뇌를, 모든 미망을 전부다 소멸시키고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집중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위빠사나와 사마타,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떤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하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고시에 합격했다하면 3년 동안 죽으라고 거기에 몰두해서 공부만 한 결과입니다. 히말라야 산을 등정을 할 때 1초의 순간에 우리는 절명을 하게 됩니다. 그 눈보라 속에서. 집중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엄청난 집중을, 그 짧은 시간에 전부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자성번뇌서원단, 스스로의 번뇌를 없애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번뇌가 없으지면 세상은 편안할 뿐입니다. 자성을 알면 번뇌는 스스로 없어집니다. 내 본래 성품을 알고 나면 모든 번뇌는 스스로 없어집니다. 내가 물에 빠져 놓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다고 허우적거려 보세요. 건질 수 없습니다. 내가 물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수 없습니다. 자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먼저 부처가 되어야 전부다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에서 더불어 하는 삶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어쩌면 뛰어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어요. 뛰어난 한 사람의 삶이 역사에 남을 수도 있지만 중생들을 더불어 이끌어 가는 그 능력도 뛰어난 것입니다. 자성이 본질적인 문제에서는  깨달음이겠지만 좀 더 우리의 삶에서 생각해본다면 깨달음에 이르는 제도와 조직의 모든 것을 전부다 포함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성법문서원학, 법을 배워 알아야 자성을 본다. 배우고 안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 없이는 건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삶을 이렇게 까지 만들어 온데에는 자기 나름대로 전공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뭔가 새로운 것을 이루어 갑니다. 알아야 뭔가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연기의 거대한 불교의 체계를 알면 공부가 엄청나게 쉽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으면 세세생생 살더라도 불교하고 멀어지지를 않습니다. 한 번 알아야 내 속에 알고 있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 할 때는 고개를 끄덕, 끄덕해놓고 저 문을 열고 나갈 때는 전부다 잊어버립니다. 그래도 법을 배워 알아야 자성을 알 수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만 해도 공부는 엄청나게 쉽습니다. 평생 공부를 해도 이 체계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뭐를 하고 있는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나와 대상으로, 주관과 객관으로, 주체와 객체로 나눠집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내 몸뚱이, 몸뚱이 속에 들어 있는 정신, 이 두 개가 나입니다. 명색이 나입니다. 명은 정신이고 색은 육신입니다. 여기에서 정신이 자성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본래 성품이 자성입니다. 육신은 내 자신의 육신입니다. 법은 대상들이 갖고 있는 성품으로 법성이 법의 성품이고 법신이 이 법의 대상의 몸뚱이입니다. 육신과 법신. 자성과 법성. 자신과 법신. 자성과 법성. 이렇게 연결지어 놓으면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내 자신의 성품을 보는 것이 바로 견성입니다. 자성을 보는 것이 견성입니다. 더 나아가서 견성 속에는 법성을 보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견성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견성을 생각한다면 법성을 보는 것입니다. 우주에 충만되어 있는 본래 갖고 있는 성품인 불성은 자성과 법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성을 깨치면 열반이고 해탈이라고 합니다. 해탈을 이루어 열반에 듭니다. 번뇌를 끊어 자성을 보면 해탈을 이루고 열반에 듭니다. 내 속에 포함되어 있는 번뇌는 자성입니다. 대상을 봄으로써 일어나는 번뇌인 소지장을 깨치면 보리를 이루고 정각을 이루고 부처가 됩니다. 보통  견성했다고 할 때는 자성을 보는 것이고 크게 견성 했을 때는 자성과 법성을 다 깨친 상태를 말하며 불성을 깨쳐 부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성과 법성을 깨치고 나면 나와 대상이 같아져 하나가 됩니다. 법장비구 48원에 숙명통, 신족통, 타심통 육신통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육신통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자성과 법성이 같아져 하나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안이비설신의이고 대상은 색성향미촉법입니다. 깨치고 나면 안과 색이 같아져 눈이 있으면 색,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그대로 알아져버려요. 이 구조를 잘 이해하면 법이 갖고 있는 규칙성인 법칙으로 그것이 연기입니다. 예를 들어 뉴턴이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객관적인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운동의 법칙,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의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갖고 있는 법칙도 거기에 똑같이 준하는 겁니다. 연기의 법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과응보의 법칙은 관성의 법칙에 따릅니다. 공부한 사람은 다음 생에도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놀던 사람은 다음 생에도 그냥 놀기를 좋아합니다. 우리의 삶은 끝도 없는 연속성의 법칙 위에 있습니다. 인과는 연속성의 법칙입니다. 응보는 반작용을 합니다. 응보는 반작용의 법칙입니다. 내가 준 것만큼 돌려줍니다. 연기의 법칙이 뉴턴이 발견한 운동의 법칙과 똑같은 겁니다. 뉴턴이 물질에서, 무생물에서 발견한 그 법칙이 우리의 생명에도 적용이 되는 것임을 부처님께서 밝힌 것입니다. 그것이 연기의 법칙입니다. 운동의 법칙이 맞으면 연기의 법칙도 맞는 것입니다. 성립의 바탕이 통계이고 확률입니다. 선한 행위를 했을 때는 선한 과보를 받고 악한 행위를 했을 때는 악한 과보가 돌아온다는 것, 이 보편적인 진리가 맞나? 하는 겁니다. 확률적으로 보니까 맞더라는 겁니다. 순간적으로는 틀릴 수가 있지만 여러 번 시행하면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뺨을 한 대 맞았을 때 기분 좋아서 웃을 사람은 없습니다. 다 화납니다. 지나가다가 누구한테 돈 십 만원 받았어요. 기분이 좋습니다. 돈을 받아서 기분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이 보편적인 생각이 수백만 사람 중에 안 그런 사람이 한, 두명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따르더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운동의 법칙이 맞듯이 연기의 법칙도 맞는 것입니다. 


자성불도서원성, 부처가 되겠다고 서원을 하면 자성은 스스로 알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중생심을 다 끊어도 부처가 되고, 번뇌를 다 끊고 나면 부처가 되고, 다 배워야 되겠다고 원을 세우면 그것도 부처가 되고, 또 부처를 이루겠다고 하니까 부처가 됩니다. 결국 우리는 원에 따라 부처가 됩니다. 부처 되겠다고 원을 세워 놓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부처 되겠다고 원을 세우면 이것으로써 공부가 끝납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공부가 없습니다. 그 원이 내게 확실하게 박혀버리면 세세생생 불법하고 멀어지지 않습니다. 아침 예불할 때 종성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문아명자삼악도, 문아, 내 소리를 듣는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가 멸해진다. 내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삼악도가 면해지니까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플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목소리만 들어도 삼악도를 면하는 것입니다. 견아형자득해탈, 내 모습을 보기만 봐도 상대방이 해탈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가 되겠다고 하는 마음이 이런 마음입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 듣고, 내 모습을 보기만 해도 해탈하고 탐, 진, 치가 사라져 삼악도를 면하게 됩니다. 저절로 깨끗하고 바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모습을 봄으로써 그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 사람이 삼배 올리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럼 마음을 상대방이 일으킨다면 이것보다 더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바로 내가 부처 되겠다고 원을 세워 놓으면 내 목소리도 변하고, 내 모습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혜능이 제도한 방법은 명쾌합니다. 삿된 것이 오면 바름으로 제도하고, 미혹함이 오면 깨침으로 제도하고,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악함이 오면 착함으로 제도하고, 번뇌가 오면 보리로 제도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내가 바르면 삿됨이 와도 물들지 않고 상대방을 바름으로 제도합니다. 내가 깨쳐 있으면 미혹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상대방의 미혹함을 깨달음으로, 깨침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혜로우면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그 어리석음을 깨고 지혜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내가 착하고 자비로우면 악함이 오더라도 상황에 변함이 없습니다. 자비무적입니다. 이 세상에 자비만큼 대단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부처를 이루겠다고 원을 세우는 순간 자비가 꽉 차버립니다. 그 자비가 바깥으로 확산되면 세상에 자비의 비를 뿌리는 것이고, 내 속으로 모여 들면 내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견성해서 보리의 세계에 있으면 번뇌에 물들지가 않습니다. 내가 깨쳐 지혜롭고 착하면 나쁜 것에 물들지 않고 다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혜능이 가르친 방법이 악이 오면 반대 것으로 막아라는 겁니다. 이렇게 제도함을 진실한 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삿됨이 오면 똑같이 삿됨으로 싸움합니다. 둘 다 미혹함으로 내가 맞다, 네가 맞다고 싸움을 합니다. 60점 짜리 삶을 살면서 서로가 자신이 맞다고 하는 것에 갇혀 있는 겁니다. 상대방이 삿됨으로 오든, 미혹함으로 오든, 어리석음으로 오든 내가 깨쳐있고 바르고 지혜로우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부처가 되겠다는 원을 세워 놓으면 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을 실천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애들 공부를 제대로 공부를 잘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먼저 준호야 너 뭐하고 싶으냐? 의사가 되고 싶다. 의사가 되고 싶으면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공부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원을 세우라고 하는 것이 스스로 공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준호야 네가 앞으로 무엇을 할래? 네가 무엇을 해서 이 세상에 봉사하고, 너의 삶을 살게 할래? 그 삶을 네가 실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성사홍서원입니다. 공부해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해주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는 잘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변합니다. 묘한 존재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어요. 내가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할 수가 있어요. 부모가 아무리 시켜도 안 하던 공부를 스스로 의사가 되려면 공부를 해야 되겠구나 하는 그 마음이 딱 드는 순간 공부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꿈을 심어줘야 합니다. 사홍서원은 스스로에게 부처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잘 살고, 불국토가 되는 것이 딴 거 없습니다. 열심히 잘하면 그게 불국토입니다. 자성사홍서원은 내가 부처가 되겠다고 원을 세우는 것은 스스로 그 길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큰일을 하려면 참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반면에 잘못도 저지르면서 살아왔습니다. 

육조단경의 내용에서 보면 ‘선지식들아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우치, 어리석음과 미혹에 물들지 않고 지난날의 나쁜 행동을 일시에 영원히 끊어서 자기의 성품에서 없애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인 것이다.’ 지난날의 나쁜 행동을 일시에 끊어 영원히 끊어서 자기의 성품에서 바로 이 어리석고 미혹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참회인 것입니다.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지난날의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없애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끊음을 이름 하여 자성의 참회라고 한다.’ 우리가 자기의 성품에서 이 나쁜 행동을 영원히 끊어버리고 생각마다 어리석음과 지난날의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없애버리면 이것이 참회입니다. 나는 거짓말도 안하고 속이지도 않은 것 같지만 우리 속에는 중생이 있는 한, 나에 대한 어리석음이 있는 한 아집이 생기고 아만이 생기고 아애가 생겨 거짓을 하게 만들고 속이게 만들고 또 나쁜 행동을 일어나게 만듭니다. 깨치지 못하는 한, 자기 자신을 아애, 사랑하고 아만, 자기 자신만 최고라고 생각하고 아집,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이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참회를 거치지 않으면 발전과 변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면 이런 참회가 이루어집니다. 참회에 가까운 것은 매일 반성하는 겁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40분 걸으면서 이 생각, 저 생각하는 것이 반성입니다. 그것이 참회입니다. 내가 오늘 상대방한테 부드럽게 말해 줬으면 상대방의 마음이 조금 더 편했을 텐데 하는 마음이 참회입니다. 참회는 거창한 것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부터 전부다 참회인 것입니다. 부처가 될 때까지 내 속에는 아집과 아만과 탐, 진, 치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뿌리가 쉽게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초지보살에서 십지보살까지 팔지보살, 부동지까지 가야 이것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참회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삶이 없습니다. 참회가 최고입니다. 참회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삶이 없는 것입니다. 참회함으로써 나날이 아름다워지고 더 멋진 삶, 더 행복한 삶이 됩니다. 바로 부처에 가까워지는 삶으로 다가갑니다. 원을 세웠으니까 그 원이 이루어지려면 참회를 해야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참회 중에는 십악참회가 있습니다. 우리 몸뚱이 중에서 의식을 주체할 수 있는 것이 눈, 귀, 코, 혀, 몸, 뜻. 안, 이, 비, 설, 신, 의. 여섯 가지 입니다. 이 중에서 눈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이거는 보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귀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것도 듣기만 합니다. 코는 냄새를 맡기만 합니다. 혀는 온갖 나쁜 말을 다 내뱉습니다. 바로 입으로 죄를 짓습니다. 네 가지나 짓습니다. 몸은 세가지 죄를 짓습니다. 의. 뜻은 탐, 진, 치 죄를 짓습니다. 몸뚱이로 짓고 입으로 짓고 뜻으로 짓는 죄를 참회하자는 겁니다. 살생중죄금일참회, 투도중죄금일참회, 사음중죄금일참회, 망어중죄금일참회, 기어중죄금일참회, 양설중죄금일참회, 악구중죄금일참회, 탐애중죄금일참회, 진에중죄금일참회, 치암중죄금일참회입니다. 여기서 탐, 진, 치는 근본적인 번뇌이며 뜻으로 짓는 죄가 탐, 진, 치 세 개입니다. 몸뚱이로 살생을 하지마라. 투도, 도둑질을 하지마라. 사음, 음행을 하지마라입니다. 말로는 망어, 거짓말을 하지마라. 기어, 남을 속이는 말을 하지마라. 양설은 여기서 저 말, 저기서 이 말 두 소리를 하지마라. 악구, 나쁜 말을 하지마라입니다. 불교의 근본인 5계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 1계인 살생을 하지마라는 세상 어떤 종교에도 없는 계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는 다 있지만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은 없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혹은 거기에 무생물까지 포함시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이지 말라가 살생 하지 말라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거짓말 하면 도를 못 이룹니다. 정직한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반성하는 것은 정직하라는 겁니다. 내가 아는 것만큼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서 전부다 아는 척합니다. 공부하면 서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직해야 만이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 음행을 하지 말라 이 네 가지를 행하지 않아야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죄를 지을 때는 같이 공부할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추방을 시켰습니다. 이 네가지는 근본 죄입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 이것은 쫓아 낼 만큼 큰 죄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술을 무작정 마셔서는 안 되겠지요. 왜? 화합을 깨뜨리니까. 지혜를 소멸시키니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술은 마취제입니다. 아픈 사람은 술을 먹음으로써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환자, 병자가 술을 먹는 것은 허락 했습니다. 부처님 교단의 의술을 담당했던 기바는 장 수술을 할 때 술로써 마취시킵니다. 중국에 화타가 뇌수술을 했듯이 기바도 맹장 수술, 뇌 수술, 장이 꼬였는 것도 수술했습니다. 그때도 암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벌레가 먹었는 것처럼 뇌에서 끄집어내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호흡을 통해서 우리는 공부를 합니다. 부처를 이루는 데는 호흡이 제일 중요합니다. 나와 대상을 연결시키고 나와 대상을 하나로 만들게 하는 것은 호흡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부처를 이루는 것은 호흡이고 눈과 귀는 잘 활용하면 득이고 잘 못 활용하면 손해 보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참회입니다. ‘죄와 업은 자성 없이 마음 따라 일어난 것. 딴 것이 아니라 이 죄와 업은 자성이 없어 이 마음을 따라 일어난 것. 마음 한 번 쉬고 나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죄와 마음 없어져 둘이 함께 공해지면 이것들을 이름 하여 참참회라 이름 하네.’ 결국은 ‘뭐하지 마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 한 번 쉬고 나면 다 끝난다는 겁니다. 내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적적하게 하고 내 마음을 다스리면 모든 죄는 없어집니다. 그것이 진정한 참회라는 것입니다. 죄무자성종심기, 심양멸시제역망, 제망심멸양구공, 시적명위진참회, 이것이 진참회입니다. 내 마음 한 번 쉬어가지고 이 죄와 업이 그냥 사라지면 이것이 정말 진정한 참회입니다. 결국 우리가 참선을 하면서 마음 한 번 쉬고 나면,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없애는 겁니다. 끝도 없이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한다고 했습니다. 한 생각에 모은다고 했습니다. 일어나는 이것을 한 생각에 집중하고 모으는 것이 마음 한 번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 할 때, 단순하게 이뭐고?하는 한 생각에 집중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번뇌망상을 소멸시켜서 근본적으로 참회하게 만드는 겁니다. 참회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방법이 참선과 절하는 것입니다. 108배 절을 하는 것입니다. 절은 형식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운동이 절입니다. 모든 기운은 머리로 들어와서 발바닥으로 나갑니다. 수행자들이 머리를 깎는 가장 큰 이유는 기운이 들어오는 구멍이 머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공부하다 보면 입구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도 있고 창문도 있습니다. 큰 대문으로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창문으로도 보고 문 틈으로도 봅니다. 몸 전신, 어디든지 기운이 들어오긴 하지만 미미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입구뿐만 아니라 온 전신으로 다 받아들임니다. 발바닥으로 기운이 나갑니다. 옛날 사람들은 맨발로 돌을 밟는데 발바닥에 기운 나가는 그 부분을 계속 마사지해서 잘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 와서 항문으로 나갑니다. 모든 기운은 머리로 들어와서 발바닥으로 나가고 이 몸을 지탱하는 모든 음식은 입으로 들어와서 항문으로 나갑니다. 입을 막고 항문을 막으면 의식도 없어져서 죽습니다. 그러니까 입으로 들어오는 데 항문이 닫히면 죽지만, 열려도 죽어요. 마지막 의식이 없어 소멸될 때, 항문이 열립니다. 곡기를 끊으면 항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육체운동을 하는 가장 좋은 절을 하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가장 원만해집니다. 들어오는 기운과 나가는 기운을 가장 적절하게 잘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공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정신만 잘 조복하고 육신이 아파서 힘이 없으면 공부를 못합니다. 육신도 적당하게 건강해야 되고 정신도 적당하게 잘 훈련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항상 같이 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그 수준이 넘어가면 뭐든지 하나해도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두 개를 다 같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도의 불법이 중국으로 넘어와서 중국 선불교의 초조가 달마입니다. 초조 달마 밑에 이조 혜가가 있고 혜가의 법을 이어 받은 삼조 승찬, 사조 도신, 오조 홍인, 육조 혜능입니다. 삼조 승찬이 한번은 이조 혜가에게 묻습니다. 스님, 저는 항상 죄스러운 마음이 가득 차있습니다. 죄스러운 마음만 없어지면 좀 편히 살겠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너의 그 죄스러운 마음 한 번 내놔봐라.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항상 죄스러운 마음이 가득차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까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못 찾겠습니다. 그럼 바로 너의 그 죄스러운 마음을 내가 없앴다. 그 순간 다 해결 된 것입니다. 삼조승찬이 지은 심신명만큼 대단한 책이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도무난 유렴간택.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거다 저거다 분별심만 일으키지 않으면 바로 그게 도입니다. 우리는 끝도 없는 분별심 속에 살아갑니다. 분별심만 없애면 그것이 바로 도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심신명입니다. 질투에 물들지 않아서 지난날의 질투하는 마음도 없애도록 하라. 참회하는 것은 내 속에 지금 일어나는 질투 뿐만 아니라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진심을 없애라. 자기의 성품에서 없애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인 것이다. 참이라고 하는 것은 종신토록 잘못을 짓지 않는 것이며 회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아는 것이다. 불교가 묘한 것은 전부다 아는 겁니다. 우리의 문제는 모르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되는 것으로 알면 전부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과거에 잘못 했던 것을 알면 그대로 해결 돼 버립니다. 내가 잘못 했는지, 잘 했는지 모를 때는 그냥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전생에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이생에서 자기의 삶 되돌아보면 무엇을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은 해도 뼛속 까지 생각을 안합니다. 부정하기가 싫습니다. 내가 이만큼 살았는데 이 생각 때문에 뼛속 까지의 참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겁니다. 한 가지에 몰두해서 계속 생각하다 보면 뼛속 까지 참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참회가 일어나야 진정으로 참회가 되는 겁니다. 소멸이 되어 아는 겁니다. 안다고 하는 것이 그 뼛속 까지 참회하는 그 순간 알아지는 것입니다. 나쁜 죄업을 마음에서 버리지 않고 모든 부처님 앞에서 입으로 말하여도 이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참회하지 않으면서 절에 가서 기도를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이 법문 가운데는 영원히 끊어서 짓지 않음을 이름 하여 참회라 한다. 바로 탐, 진, 치를 영원히 끊어 다시는 짓지 않는 것을 참회라고 이야기한다. 바로 견성해야 그런 마음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견성하기 전까지는 끝도 없이 그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유식에서 구생혹을 배웠습니다. 구생혹, 번뇌라고 하는 것은 깨치고 난 후에도 남아있는 번뇌의 뿌리가 있습니다. 팔지보살 부동지라고 하여 칠지보살을 넘어서야 구생혹이 비로소 소멸합니다. 견성을 하고 난 다음에 진정으로 견성을 하기 위해서 보림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또 그 깨달음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그 번뇌의 뿌리를 없애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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