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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16강 삼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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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879회 작성일 22-02-12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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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강  삼귀의



 오늘은 삼귀의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혜능대사가 말합니다. 지금 이미 참회하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무상삼귀의계를 줄 것이다. 선지식들아 깨달음의 양족존께 귀의하며 바름의 이욕존께 귀의하며 깨끗함의 중중존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으며 바라건대 자성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의 삼보에게 귀의하게 하니, 부처란 다름이 아니라 깨달음이며 법이란 다름이 아니라 올바름이며 승이란 다름이 아니라 깨끗함이다.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는 것을 양족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음으로 곧 애착이 없으며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이라고 한다. 


선불교가 인류에게 기여한 많은 부분 중에서 정신세계를 확장시킨 것이 가장 큰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불자가 되고 불법에 귀의한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삼귀의계와 오계를 수계합니다. 삼귀의계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께서 깨친 법에 귀의하고, 부처가 되고자 수행하는 집단인 승가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계를 지켜야 합니다.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세상 어느 종교에도 없는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 불교의 가장 큰 장점이며 특색입니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음행을 하지 말라, 술을 먹지 말라, 즉 정신이 항상 맑게 깨어있어라. 이것이 불자들이 지켜야 될 삶의 생활윤리인 오계가 되겠습니다. 

육조혜능은 삼귀의인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과 부처가 되고자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있는 승가에 귀의한다는 것을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치환시키고, 부처님의 법을, 진리를 올바름으로 치환시키고, 부처가 되고자 수행하는 승가를 깨끗함으로 치환함으로써 불교를 보편화시키고 세계화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혜능은 형상이 없는 삼귀의계인 무상삼귀의계를 설합니다. 깨달음의 양족존께 귀의하며 올바름의 이욕존께 귀의하며 깨끗함의 중중존께 귀의합니다. 귀의하는 것은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어디에 돌아가 의지하는가? 젊은 시절에 대승기신론을 보다가 이 목숨을 거두어 부처님에, 진리의 바다에, 수행자의 집단에, 돌아간다는 글귀에서 새로운 세계에 눈 떠게 되었습니다. 온 마음과 육신이 녹아내리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진지하고 지극하면 이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겠습니까? 궁극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될 진정한 곳은 깨달음이며 올바름이며 깨끗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 이 목숨을 거두어 하는 그 말을 한 번 체험하고부터는 절을 하면서도 이 목숨을 거두어, 온 힘을 다해서, 온 정성을 다해서 그렇게 절을 하도록 항상 노력을 했습니다.  이 지극한 마음이라면 못 이룰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숨을 거두어 부처님의 세계에 돌아갑니다. 이 목숨을 거두어 진리의 바다에 돌아갑니다. 이 목숨을 거두어 수행자의 무리에 돌아갑니다. 지금 이러한 마음으로 한 번 불교를 보고, 내 삶을 되돌아보고, 주위를 한 번 돌아보세요. 부처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목숨을 거두어 돌아갈 만큼 그렇게 지극한 마음이고, 긍정적인 마음이고, 모든 것이 하나 된 그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이 공부하는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겠습니다. 혜능은 바로 자성삼보에 귀의하게 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으며 바라건대 자성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의 삼보에게 귀의하게 하니, 바로 부처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며, 법이란 무엇인가? 올바름이며, 승이란 무엇인가? 깨끗함이다.’  바로 불교는 부처님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이 문제를 10살 때부터 갖고 있었던 화두였습니다. 어린 시절 누구나 다 한 번씩 가져봤던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10살의 어린 나이에 왜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이 문제를 갖고 결국은 29살 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6년의 고행을 거쳐서 깨치게 됩니다. 깨치고 보니까 왜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거기에 대한 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뭔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는 것이며 깨달음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입니다. 무엇 때문에 죽는가? 우리는 죽는 원인과 결과를 모르고 죽습니다. 그래서 항상 무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무명 속에 있는 상태에서 밝게 되고 알게 되는 상태인 명이 되는 것이 법을 아는 것입니다. 무명은 모르는 상태인데 알게 되는 상태인 명이 됩니다. 무명에서 명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진리의 내용인 것입니다. 명이 되고 보니까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이 무상이고 무아라는 겁니다.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것도 항상 일정한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커 왔을 때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주위를 흐르고 있는 저 신천도 우리가 어릴 때나 지금 볼 때 다르고 또 천 년 후에 또 봤을 때 또 다르고, 이 모든 것이 저렇게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이 무상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무상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생, 태어났다가 그리고 존속하다가 어느 순간은 멸합니다. 생멸을 하게 됩니다. 무상이기 때문에 생멸을 하게 되고 이 생멸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무아입니다. 원래 무상이고 무아인데 우리는 전부다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여 모든 것을 내 것으로 해야 되겠다는 욕심을 내고, 물욕도, 재욕도, 명예욕도 전부다 내 것이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삶의 과정입니다. 무아라는 것을 모르고 아가 있다고, 내가 있다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무아인데, 왜 우리는 무아가 못 되는가? 남녀가 교합을 하거나 +, -가 교합할 때, 새로운 뭔가가 탄생되는 순간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 물질, 색이 인연에 의해 조건이 주어지면 그 색에 맞는 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색이 생기는 순간, 거기에 합당하는 명이 교합을 해요. 교합을 해서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명색이고,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가장 비슷한 인연끼리 만들어지고, 인연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원래 무아인데 생명이 만들어지는 순간, 무아라고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아치 때문에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나라는 것은 평생 아집, 내 자신에 집착하고, 애착하고, 아만, 내 자신만이 맞고, 내 자신이 최고고, 자기가 업 속에 들어있던 그것을 끄집어내어 쓰는 자기만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아애, 상대방을 위해주는 것 같지만 평생 자기 자신 밖에 사랑할 줄 모릅니다. 아애라고 하는 것은 제 팔지, 부동지에 가야 이 아애가 깨뜨려집니다. 아애가 깨뜨려진 상태에서는 끝도 없는 자비 밖에 안 일어납니다. 모든 것을 위하고, 원하는 대로 해주는 그 마음 밖에 안 일어납니다. 아애가 깨뜨려지지 않는 한은 항상 대상, 상대방을 위한다고 해주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아인데 무아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아치가 생기고, 아집이 생기고, 아만이 생기고, 아애, 이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무아와 무상을 바로 아는 것이 올바름입니다. 이것이 법의 내용이고 올바름이 되겠습니다. 승이라는 것은 깨끗함을 추구하는 집단, 무리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물들어있습니다. 내가 살아왔던 업에 물들어서 아치가 되는 순간,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끄집어내어 씁니다. 그래서 그 물들기 전의 나를 찾아가는 것을 깨끗함이라고 하고 나의 본래 성품을 본다고 합니다. 견성을 하면 물듬에서 벗어나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는 것이 바로 승의 목적입니다. 수행하는 수행자 집단의 목적이 바로 깨끗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과 올바름과 깨끗함이 불교가 추구하는 중요한 목적이 되어 불자가 되기 위해서 이 삼귀의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 법과 부처를 따르는 집단인 승가에 매여 있는 불교를 육조혜능은 세계화시키는데 성공을 하게 됩니다. 깨달음, 올바름, 깨끗함으로 표현함으로써 불교를 보편화시키고 세계화를 시키게 됩니다. 삼보에 대한 혁명적인 생각을 혜능이 함으로써 불, 부처님, 법, 부처님의 가르침, 승, 부처가 되고자 수행하는 수행자의 집단을 육조혜능은 깨달음으로 표현하고, 올바름으로 표현하고, 깨끗함으로 표현합니다. 깨달음, 올바름, 깨끗함으로 각, 정, 정이 불교를 가장 명확하게, 명쾌하게 표현하는 삼귀의가 되는 것이 혜능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육조단경의 중요한 성과입니다. 


돈오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삶에 불교의 목적을 세계화한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양족존은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내가 꼭 진리를 추구하겠다. 지극한 마음을 내어서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욕심이 없어집니다. 욕심이 없어지면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게 되는 것을 양족존이라고 합니다. 깨닫게 되면 양족존이 이루어집니다. 재물도 떠나고, 색도 떠나고, 존재하는 형상있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진 깨달음의 상태를 이룬 것이 양족존입니다. 이욕존은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이라고 합니다. 아치 때문에 아집이고, 아만이고, 아애라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끝도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떠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의 업에 의한 그 생각을 맞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집착을 떠나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되고, 수행하는 내용인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제대로 하면 이욕존이 됩니다. 지혜롭게 집중을 하면 진리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바로 돈오가 이루어집니다. 마음이 바른 것은 집착을 떠나는 것이며 올바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집착에서 벗어나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불교의 본질은 신信, 믿음이 아니라 지知,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알 때, 그냥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애착을 벗어나야지, 집착에서 벗어나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애착은 내 속에 그냥 있을 뿐입니다. 집착이 왜 생기는 것인가? 애착이 생기는 원인을 알아야 됩니다. 연기를 제대로 체험을 하고, 알게 되면 집착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으며 이것이 올바름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자기가 아무리 파리를 죽이고, 모기를 죽여도 살생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팔지보살 부동지 이상이면 그 마음속에서는 자비 밖에 없고 아애가 다 깨뜨려져 없습니다. 지금 모기장을 치고 또 모기를 잡고, 파리를 잡을 때 모기를 위해서, 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혹시 모기한테 물릴까봐 모기를 잡고, 파리를 쫒고, 파리를 잡습니다. 나를 위해서 하는 행위이지, 모기와 파리를 위해서 하는 행위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전부다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입니다. 자기 자신이 행하는 행위는 올바름이 100%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60% 정도의 올바름을 갖고 살아갑니다. 아애를 깨뜨리고, 아치를 깨뜨리고, 아만, 아집이 깨뜨려진 상태에서는 집착이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위한다는 아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행복과 편안을 위해서 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원효가 모기를 죽이든, 파리를 죽이든 자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을 위해서 끝없는 자비를 베푸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의 세상에는 부처 밖에 없는 겁니다. 올바름이라는 것은 집착에서 벗어난, 아애를 다 깨뜨리고 나면 세상은 그냥 올바름으로 물들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이욕존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이라고 합니다. 결국 수행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수행하는 목적은 원래 깨끗함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물들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입니다. 수행자들이 수행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물들지 않는 원래 상태, 깨끗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행했던 모든 업에 의해서 물들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평생 물들어져 있는 그것을 난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물들어져 있는 그것을 걷어내고 물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깨끗함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본래 청정할 때 청정이라는 것은 물들기 전의 것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견성한다고 하는 것은 내 본래의 성품을 본다는 것으로 물들기 전의 내 성품을 본다는 것입니다. 바로 수행의 목적이 깨끗함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깨끗함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을 덮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물들지 않고 본래 성품을 보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물들지 않게 됩니다. 그것을 중중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성품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만약 부처를 보지 못 한다면 귀의할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처를 보지 못하면, 깨닫지 못하면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될 곳, 귀의해야 할 곳은 깨달음으로써 진리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귀의해야 할 것은 부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어디에 있든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부처를 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부처를 봐야 만이 돌아갈 곳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귀의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귀의할 곳이 없는데 귀의한다고 말하는 것은 허망한 말일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말에 있지 않고 내가 체험하는 것에 있게 됩니다. 내가 체험해 깨달음을 얻게 되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게 됩니다. 

‘선지식들아 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스스로 관찰하여, 관조하여 바로 법의 내용, 바름을 알게 되면 이 마음을 그릇되게 쓸 수 없습니다. 덮여 있는, 물들어 있는 바로 거기에 물들지 않으면 마음을 아무리 쓰더라도 그릇된 마음이 되지 않습니다. 물들어 있는 상태에서는 그 물들어져 있는 것을 아무리 우리가 잘 쓰더라도 그것은 이미 그릇되어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이 다른 것이 아니라 원래 깨끗한, 본래 상태로 돌아가자 하는 것이 바로 공부하자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이생에서 무엇보다도 공부할 인연만 주어진다면, 공부할 인연을 만난다면 그것보다 더 큰 행운은 없습니다. 그래서 공부할 인연이 주어졌을 때, 목숨 걸고, 그냥 들어오는 것입니다. 분리되지 않은 그 한 마음을 일으키면 모든 것이 다 끝납니다. 그 한 마음을 일으키지를 못하고 60%, 70% 마음을 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는 자기보다 상대방을 더 좋아할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없습니다. 부처를 이루어야, 깨끗함을 보아야, 견성을 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견성하여 부처가 되자는 겁니다.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않으면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돌아가는 것이, 내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최고의 금의환향입니다. 견성성불 한다는 것이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부처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써 깨달음과 올바름과 깨끗함에 귀의를 했으니까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과 목적지인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육조혜능께서는 설하겠다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법, 마하, 크다. 반야, 프라냐, 지혜. 바라밀, 파라미타, 완성, 경, 법. 큰 지혜의 완성입니다. 큰 지혜의 완성은 깨달음에 이르는 법인 마하반야바라밀법만 알면 견성을 하게 되고,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육조혜능은 선지식들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합니다. 우리 마음속으로는 깨달음을 생각하고 있지만 깨달음을 알지 못하므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혜능이 설명하여 줄 것이 잘 들어라. 는 겁니다. 공부하는 내용이 뭔지를 알면 공부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왜 불교를 알아야 되는가? 참선한다고 평생을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선한다고 평생을 앉아 있더라도 목적지가 뭔지를 모르면 엉뚱한 곳에 도착해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달렸는데 방향은 정 반대로 달려가 엉뚱한 곳에 우리는 도착해 있습니다. 또 가려고 하면 다시 되돌아와서 거기 까지 가야 됩니다. 그래서 참선한다고 앉아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교 공부를 제대로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참선을 잘 하기 위해서는 불교 공부를 잘 해야만 합니다. 불교가 무엇인지? 그 내용을 분명하게, 명쾌하게 알아야 만이 이것을 바탕으로 부처가 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견성성불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법, 큰 지혜의 완성을 하는 법을 내가 이제 설할 테니, 잘 들어 전부다 부처가 되라는 겁니다. ‘마하 프라냐 파라미타란 서쪽 나라의 범어이다. 당나라 말로는 마하반야바라밀이며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 법은 모름지기 실행하는 것이며 입으로 외우는데 있지 않다.’ 결국 진리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입으로 해봐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면서 집중을 하고 선정에 들려고 하는 것보다 ‘이뭣고?’ 화두를 들면서 참선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수 있고,  염불하는 것보다 절을 함으로써 훨씬 더 업장소멸을 잘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몸과 마음이 같이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법은 모름지기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론적으로 열심히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다는 것의 의미에는 지행입니다. 안다는 것은 항상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안다고 했을 때, 지극하게, 제대로, 바르게, 잘 알고 있으면 그것은 행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항상 지는 행과 다르지 않고 잘 알고 있으면 행을 수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법은 모름지기 실행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외우는데 있지 않습니다. ‘입으로 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꼭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나 닦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와 같다.’ 결국 우리의 삶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매일 살아가면서 매일 걸어가는 것이 삶입니다. 그래서 닦고 행하는 이는 바로 법신이고 부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올바름으로 하루를 잘 살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또 성내고, 집착하고, 화내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살면 지옥에서 사는 겁니다. 하루를 부처로 산다면, 언젠가는 부처 될 수 있는 겁니다. 공부 잘 하기 위해서 예습, 복습을 합니다. 그리고 또 공부를 합니다. 우리가 부처되려고 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출가해서 멋모르고 앉아있다고 부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하루의 삶 속에 부처는 그냥 들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루 부처 옷을 입혀 놓으면 내가 하루 부처로 사는 것입니다. 부처로 살다보면 언젠가는 온전히 부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탁 터져 바로 돈오가 되는 겁니다. 아는 것은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으로 이어지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마하,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 큰 것이며 이것이 의미하는 자성은 만법을 포함하니 곧 자성이 법성인 것입니다. 법성과 자성이 같으니까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자성과 법성이 하나 되는 것이 바로 내외명철이고 결국 하나 되기 때문에 모든 신통도 가능하고 모든 것을 전부다 알 수 있게 되고 지혜가 폭포처럼 생기는 것입니다. 보기만 하면 모든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아 크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악한 것도 있고 착한 것도 있고 악한 법도 있고 착한 법도 있고 그 모든 것이 같이 들어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버리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버리지도 않고 또 버리지 않는다고 해서 물들지도 않습니다. 물들어 버리면 어떻습니까? 내가 착한 법에 물들면 착한 것을 끄집어내서 쓸 것이고 악한 법에 물들면 악한 것을 끄집어내서 쓸 것인데 자성을 보고 나면, 본성을 보고 나면 거기에 물들지 않습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심소법, 내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행했던 이 업의 축적되어 있는 것을 항상 끄집어내서 쓴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끄집어내서 쓰지 않는 것이 오변행의 촉, 작의, 수, 상, 사만 쓰는 것입니다. 오변행에서만 움직이면 됩니다. 나와 대상이 부딪히면 촉입니다.  근과 경과 식이 부딪히는 것이 촉입니다. 항상 근은 경으로 나아갑니다. 작의, 의지를 갖고 의도한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작의입니다. 대상이 나한테 오지는 않고 항상 내가 주체라고 하는 것이 객체로 나아갑니다. 안근이 색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가 생기고 다음 상으로 어떤 형상이 만들어 지고 다음 사로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 속에는 모든 것이 형상으로, 모양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내가 세세생생 행했던 모든 것이 전부다 모양으로 저장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그 모양을 끄집어내서 쓰는 겁니다. ‘물들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버리지도 않기 때문에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큰 실행이라고 이야기한다. 큰 실행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만법, 자성과 법성이 같도록 열심히 수행하고 정진하고 집중하여 삼매에 들어 그렇게 되는 것을 큰 실행이라고 이야기한다.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 있는 이는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스님이 염불해라 하기도 하고 참선해라 하기도 하고 경전공부해라 하기도 하고 다양하게 가르칩니다. 항상 그 사람의 근기와 능력과 상황에 따라서 가르쳐야 합니다. 아직까지 준비가 안 된 사람한테는 불교 교리 공부를 시켜야 되겠고 또 집중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한테는 염불부터 시켜서 참선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염불을 하다보면 염불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는 중학교 졸업 하고, 고등학교 가고, 고등학교 졸업해서 대학교 가듯이 자기가 갖고 있는 능력에 따라 맞는 것을 택해서 그것을 계속해서 해야 되고 또 어느 정도 상황에 따라 조금씩 익어지면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는데 근본적으로 입으로 외워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지혜 있는 이는 마음으로 행합니다.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크다고 하나, 이도 또한 옳지 않다.’ 무기에 빠진 생각을 잘못 생각하면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떠한 행위든지 마음으로 행하는, 실행하는 이 공부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실행하는 것은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겁니다. 집중에는 인류가 개발한 방법 중에서 화두만큼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생각을 집중하는 데 있어 화두만큼 확실하고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단언하건데 견성정도는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화두를 들고 들지 않고는 견성성불은 불가능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화두를 들지 말라고 해도 들고 들어가게 됩니다. 뭔가 본질적인 문제를, 의문을 갖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왜 죽어야만 하는가? 내가 이 몸 받기 전에 누구였는가? 부처는 무엇인가?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이 깊어지고 어느 정도 수준 이상 올라가 버리면 스스로 그 본질적인 문제에 의심을 갖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 죽으라고 목숨을 걸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궁극적인 문제는 화두를 갖고 들어 가야만이 뚫릴 수가 있고 터질 수가 있습니다. 화두를 들어야 엄청난 폭발력이 있는 힘이 생기고 그 힘으로 견성성불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 반야. 반야는 지혜다. 이때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반야행이라고 한다. 지혜를 갖고 행위를 하는 것을 우리는 반야행이라고 한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생기거늘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한다.’ 바로 우리가 공부를 잘못하면 항상 이렇다는 겁니다.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평생 이렇게 닦아봐야 크게 닦인 것이 없다는 겁니다. 공부하는 방법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생에서 공부하는 방법에 확신이 서버리면 우리는 그것을 평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확신이 서지 않으면 끊임없이 계속 바꿉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친구는 다양하게 하는 것이 좋은가 싶어 영어도 조금, 불어도 조금, 독어도 조금, 결국은 지나고 보면 영어도 못하고, 불어도 못하고, 독어도 못하고, 써먹을 데가 하나도 없어요. 어떤 친구는 러시아어 하나를 꾸준하게 계속 파고 들어가 한 십년은 지나고 보니까 러시아어 하나는 도가 트인 겁니다. 어학도 똑같습니다. 영어나 한문이나 어느 하나만 잘하면 다른 어학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런데 다양하게 배웠다고 해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 못합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잘 하는 사람은 다 잘할 수가 있어요. 어학이라고 하는 것은 구조가 묘하게 되어 있어요.  소리글자나 뜻글자나 본질적으로 똑같습니다. 성대를 울려서 나오는 거기에서는 뜻글자나, 소리글자나 전부다 본질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다 똑같습니다. 뜻글자를 잘하여 물 리가 트이면 모르는 글자도 알게 됩니다. 소리글자도 똑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이해를 하면 따라서 엄청난 많은 단어들을 쉽게 알아요.  뜻글자나 소리글자나 똑같습니다. 소리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성대와 기관을 울려가지고 나오는 것을  글을 만들었을 때, 그 글을 만들 수 있는 종족은 뛰어난 종족이고 그 글은 근원적으로 따지고 보면 전혀 다르게 만든 거 같지만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어요.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반야가 나거늘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한다.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은 바로 그것이다.’ 형상이 있다고 하면 형상이 정해져 그 형상 밖에 맞지 않습니다. 형상이 없기 때문에 어떤 형상을 갖다 놓더라도 그 형상하고 계합하여 어떤 형상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 지혜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반야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반야를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어보면 실상반야, 관조반야, 방편반야 혹은 문자반야가 있습니다. 실상반야는 지혜를 터득했을 때 나에게 비치는 제법의 실상으로 이것이 실상반야로 진리 자체인 법신이 됩니다. 관조반야는 지혜를 터득하는 상태에서 어떤 현상을 깊이 관찰하는 것으로 어떤 한 형상의 내용을 제대로 철저하게 아는 겁니다. 바로 보신입니다. 법신과 보신과 방편반야는 터득한 지혜를 현실에 적용시켜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구체적인 지혜로서 화신입니다. 실상반야가 거지에게 적용 될 때는 관조반야, 그다음에 왕에게 적용 될 때도 관조반야, 어느 누구에게 특수한 하나의 형상을 갖는 것은 법신이 어떤 특정한 하나의 형상을 갖는 것으로 관조반야입니다. 그 관조반야가 실제적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 행위를 하는 것이 방편반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체, 상, 용의 이 도리는 바로 불법성의 관점이나 체, 상, 용이나 법신, 화신, 보신이라고 하는 것은 다 똑같은 체계 속에 있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은 화신입니다. 부처님도 결국은 이 세상에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 화신불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화신입니다. 우리가 견성하면 화신불이 되는 것이고 견성하지 못하는 우리는 화신중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될 가장 기본적인 이것이 나에게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어도 우리가 갈 수 없는 것,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견성인 것이 아니라 노력하면 얼마든지 견성 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 할 때는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능하다고 생각 할 때는 노력하는 것만큼 또 우연한 기회에 터집니다. 가능성을 갖고 살아야 우리의 삶이 바로 본질에 다가갈 수 있고 또 긍정적인 삶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마인드입니다. 끝도 없는 긍정이 바로 부처입니다. 끝도 없는 자비로 채워진 것이 부처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에 싫어하는 것, 그것을 내서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이 바로 방편반야이고 화신입니다. 반야 자체를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 보신입니다. 나는 대통령이 되겠다. 나는 돈 많은 사장이 되겠다. 이것이 바로 보신입니다. 내 삶의 형태를 어떻게 형상화 할 것인가? 법신이 형상하는 하나의 어떠한 특수한 형태로 형상화 된 것이 보신입니다. 그것으로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 바로 화신입니다. 우리가 끝도 없이 공부해야 되는 것이 결국은 내가 베푸는 것이 온전하게 잘 베풀어지게 하려면 스스로 이 자비로 채워야 합니다. 물들지 않는 깨끗함으로 채워야 됩니다.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은 온전한 베품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한다고 하면 끝도 없는 분별로 출발을 합니다. 분별하는 것은 모든 것을 차별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야는 모든 것을 한 덩어리로 보는 평등입니다. 우리가 반야라고 하는 것은 반야직관을 이야기합니다. 정확하게 견성이라고 하는 것은 반야직관의 상태에 다다른 견성입니다. 부처가 뭐냐?고  물었을 때, 생각을 해보고 답을 안 합니다.  생각해서 답하는 것은 학습으로서 나한테서 생기는 겁니다. 이것은 본질하고 다릅니다. 생각하지 않고도 그냥 나오는 것이 바로 본질입니다. 그것을 반야직관이라고 합니다. 직관은 내가 의식하고, 살피고, 생각하기 전에 나오는 소리입니다. 분별과 차별을 무수하게 연습하고 통과하고 난 뒤 반야에 다다를 수 있고, 전체가 한 덩어리라고 하는 평등에서 알 수 있습니다. 차별을 알면 평등이 돼요. 차별을 모르면 끝도 없는 차별일 뿐입니다. 차별을 차별인 것으로 알 때 비로소 평등에 다다른 다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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