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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20강 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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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174회 작성일 22-05-2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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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강 돈오 


오늘은 부처님의 열반재일입니다. 절에서 공양할 때의 의식은 상당히 거룩하고 근엄하고 중요합니다. 소심경은 공양할 때 의식을 설명해 놓은 경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불생가비라/ 성도마갈타/ 설법바라나/ 입멸구시라/ 부처님께서는 카필라에서 탄생하였고/ 마갈타국에서 도를 이루었고/ 첫 설법을 바라나시에서 하였고/ 쿠시니가라에서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의 탄생부터 전법을 하다가 열반에 드신 그 상황을 떠올리면서 나도 부처님과 같은 수행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하며 공양을 받아먹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어느 날 아침공양을 마치고 차파라탑 앞에서 많은 제자가 있는데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 말씀을 하시고 마지막 여정지인 쿠시나가라까지 유행을 떠나십니다. 가는 도중에 파바성에서 춘다가 공양을 올립니다. 춘다는 쿠시나가라에 사는 백성인데 부처님께서 지금 유행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파바성까지 와서 부처님의 법을 듣고 간청을 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이제까지 어렵게 살다 보니까 제대로 한 번 보시를 한 적도 없습니다.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정성스럽게 한 번 공양을 올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허락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많은 제자와 함께 춘다집에서 공양을 했는데 다른 제자들은 멀쩡했지만 부처님께서는 복통을 일으키며 통증이 심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3개월 동안 안거를 하시면서 몸이 많이 쇠약하셨어요. 쇠약해진 그 몸을 조금 회복하셨는데 춘다가 올린 공양을 드시고 심하게 앓게 됩니다. 아픈 몸을 겨우 추스르면서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열반의 땅 쿠시나가라로 떠나십니다. 춘다는 평생 갈망을 해서 부처님을 한 번 뵙고 공양을 올렸는데 부처님의 건강을 해치게 되었으니 춘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피눈물로 울고 있는 춘다를 뒤로 하고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겠다는 쿠시나가라로 떠납니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해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들 준비를 합니다. 수바드라라는 외도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는 소문을 듣고 부처님을 찾아 와 뵙기를 청합다. 아난이 지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려고 준비중이시니까 제발 조용히 하라고 친견을 거부합니다. 수바드라가 떠드니까 그 소리가 부처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아난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누가 찾아와서 부처님께 법을 청한다고 합니다. 아난아 막지마라. 법을 물으러 왔지 않느냐? 하면서 수바드라를 부처님 계시는 곳으로 불러들입니다. 수바드라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물으라고 했을 때, 수바드라는 처음에는 얼토당토 한 질문을 합니다. 이 우주가 끝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또 누가 깨달음을 이루었느냐? 이름을 대면서 이 사람은 깨달음을 이루었나? 하면서 묻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빙그레 웃고 계시다가 수바드라여 정말 도를 닦는데 꼭 필요한 질문만 해라. 지금 그런 질문을 하면서 보낼 시간이 없다. 하니까 부처님이시여 도를 이루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면서 수바드라가 물었습니다. 부처님의 첫 설법도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인 수바드라에게 설한 법도 팔정도입니다. 수바드라에게 팔정도 법을 설하시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제자들이여 잘 들어라. 그 전에도 앞으로 어느 누구도 도를 이루려고 하면 팔정도를 벗어나서 도를 이룰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이 팔정도에 의지해서 도를 이룰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세상을 향해 해주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첫 설벌의 사연에서부터 45년 동안 설하신 모든 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이 사성제와 팔정도입니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바탕으로 연기는 깨친 내용입니다. 사성제는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진리입니다. 

고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문제로서 과제의 제시입니다. 집은 고가 생긴 원인, 이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관찰을 하고 관조를 하고 깊이 생각을 하면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면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문제인 고가 해결된 상태가 멸입니다.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원인을 모르니까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멸을 하기 위한 실천 방법이 도입니다. 부처님께서 팔정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교의 인식체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고집은 일어난 현상에 대한 원인과 결과이며 멸도는 해결된 상태에 대한 결과와 원인입니다. 고가 해결된 상태가 멸이며 멸을 하기 위한 실천방법이 도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실천해야 됩니다. 정견은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견성을 하면 100%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육조단경을  시작하기 전에는 60% 바르게 봤지만 지금은 70%정도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정견은 결론입니다. 정사, 바르게 생각하고 정어, 바르게 말을 하고 정업, 바른 행위를 하고 정명, 바르게 살고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정진을 하고 정진의 내용인 정정과 정념입니다. 정념,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관조하고 정정, 바르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에서 주장하는 중요한 내용이 정정입니다. 집중을 통해서 무념에 다다르고 무념이 되면 삼매에 들고 삼매에 드는 순간 견성성불을 하는 것입니다. 무념에 들기 위해서 집중을 하다 보면 삼매로 이어지고 그 순간 견성을 하게 됩니다. 견성이라고 하는 깨달음은 순간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순간적으로 몰록 오는 돈오견성인 것입니다. 깨달음이 지속적으로 조금씩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우스함수와 같다고 했습니다. 가우스 함수 곡선은 값이 1보다 적을 때는 항상 0이 되는 것이며 1이 되는 순간 탁 1이 되어버립니다. 가우스 함수 그래프는 계단식으로 나타납니다. 깨달음에 있어 돈오를 설명 할 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씩, 조금씩 지속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 깨쳤다고 하는 순간 그대로 수직상승입니다. 순간입니다. 깨달음은 순간인 것입니다. 긴 시간동안 끊임없이 익어가다가 마지막 탁 순간 터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돈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육조단경에서 주장하고 있는 돈오는 공부를 하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결국은 누구나 다 공부해서 견성한 사람은 당연하게 돈오를 이룰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깨달음의 순간은 돈오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습에 따라 업력에 따라 공부가 더딘 사람도 있고 빠른 사람이 있습니다. 혜능의 경우도 정확하게는 이 생에서 공부한 내용이 없지만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깨칩니다. 그리고 오조홍인한테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고 하는 그 말을 듣고 또 깨치게 됩니다. 그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에서 깨친 그 내용에서 게송을 읊은 것을 보고 육조혜능이 깨쳤다고 인정을 합니다. 깨친 후 혜능은 14년 동안의 보림을 통해 충분히 깨침이 익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돈오라고 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올 수 밖에 없습니다. 깨달음 뿐만 아니라 간혹가다가 무릎 탁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하면 해결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무릎을 치는 경우에는 번쩍하며 순간 20000볼트 전류가 흐르는 그 순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돈오는 그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원래 선에서, 깨침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공부가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순간도 돈오돈수인 상황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의 순간은 돈오이며, 돈수와 점수는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나타나는 더딤과 빠름입니다. 그렇지만 깨침의 순간은 순간이라 것을 누구나 다 알 것입니다. 

깨달음은 집중하지 않으면 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다양하게 작용하는 마음을 어디 한 군데 계속 집중을 해야 됩니다. 집중하면 우리가 그냥 알고 있고 생각 하고 있는 것은 전부다 본질에 닿지 않은 피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뭔가 새로운 생각이 하나 탁 튈때 무릎을 탁 치듯이 바로 반짝하는 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끝도 없는 집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집중을 하다보면 무념에 다다르게 됩니다. 히말라야 산을 등정하는 산악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집중을 합니다. 0.01 초에 발을 잘못 디디면 죽어요.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그 상황이 0.01초입니다. 축구할 때, 골인하고 노골하는 것도 0.01초에 달렸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의 성패는 순간의 집중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바닥에 앉아서 공부를 하니까 집중을 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릅니다. 집중을 안 한다고 안 죽습니다. 그런데 히말라야 산에 가면 집중 안 하면 죽기 때문에 끝도 없는 집중이 이어집니다. 여기 앉아서 똑같이 집중을 하다보면 줄탁동시가 되어 터지게 됩니다. 집중하다보면 안과 밖이 순간적으로 공명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견성하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집중하지 않고 더 이상 변화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윤회하면서 끝도 없는 되풀이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집중을 통해서 도를 아루시고 45년 동안 법을 설하시고 열반에 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쿠시나가라에 있는 부처님의 열반상입니다. 쿠시나가라에 가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 계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화상의 회상에서 한 번 듣자 그 말 끝에 크게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다.’ 이것이 바로 한 번 듣자 그 말 끝에 크게 깨쳤다는 언하에 대오한 것입니다. 돈오는 어느 누구든 깨닫는 순간은 순간 깨치는 것입니다. 그 앞에 오는 많은 과정을 어떤 방법으로 거치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업에 따라 다 다르지만 마지막 깨치는 순간은 한 번 듣고 그 말 끝에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선불교가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선사들의 깨치는 그 순간은 이 우주에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영화 한 편 입니다. 그만큼 대단합니다. 어느 누구도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깨치고 나면 자기의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똥막대기나 마삼근이나 판치생모등과 같은 자신의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같은 소리입니다. 한 번 듣자 그 말 끝에 크게 깨치는 것은 어느 누구나 다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고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마지막 한 번 듣자 크게 깨치는 과정은 죽다 깨어나도 오지 않습니다. 업이 두터운 사람은 이 생에 죽으라고 공부하다보면 이런 기연이 오는 것입니다. 전생에 공부 많이 한 사람은 공부했던 것이 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혜능의 경우도 정말 배우지 않은 일자무식이었지만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치게 됩니다. 혜능은 금강경뿐만 아니라 인연이 되면 깨치는 그런 선근입니다. 이것은 전생에 충분히 공부가 익어 있었기 때문에 기연이 쉽게 온 것입니다. 이 생에 공부를 잘해 놓으면 다음 생에 혜능과 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생에 공부 안 해 놓으면 아무리 해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연이 되었을 때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이런 공부할 수 있는 인연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마음을 내면 쉬운데 마음 내기가 어려워요. 핑계도 많고 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공부하는 수요일마다 일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수요일은 죽다 깨어나도 공부하러 오겠다고 딱 마음을 먹어 버리면 희한하게 일이 피해갑니다. 다음 생에 혜능과 같은 선근이 되기 위해서는 이 생에 닦아 놓은 것이 있어야 됩니다. 공부 하지 않고 잘 되기를 바라면 도둑놈 심보지요. 그래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공부하자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마지막 법문이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책에서 애벌레가 나비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비는 깨쳐 견성한 것이고 애벌레는 우리 중생의 삶입니다. 그래서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해야 되겠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공부하기가 쉽습니다. 학교 다닐 때 다 공부하기 싫어하지만 공부 잘 하는 친구는 앉아서 공부를 해요. 이 공부도 끝도 없는 자신과의 전쟁입니다. 우리한테는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 40% 들어 있고 선근인 계와 정과 혜도  60%들어 있습니다. 공부 좀 하려고 마음먹고 이삼일 하면 몸뚱이 좀 쉬어주라고 편한 쪽으로 계속 끌고 가는 겁니다. 계속하면 몸살난다 좀 쉬어가면서 하라고 막는 업이 올라옵니다. 계속하기가 쉽지 않아요. 습관이 잘 되어 이것을 이기면 성공하게 됩니다. 결국 습관이 잘 들어 있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견성하게 됩니다. 습관이 잘 못 들어 있는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습관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은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권력도 있습니다. 어쨌든 공부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 깨쳐서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 하는 것이다. 단박 깨친다는 말은 쉽지만 실제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끝도 없이 반복되는 학습을 통해서 어느 순간 단박 깨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는 학습을 통하지 않고, 반복되는 수행과정을 통하지 않고 단박 깨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볼 때, 이생에서 안 보인다고 해서 안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생에서 공부 열심히 했다고 하면 김성규 공부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생에서 공부 안 하고 깨쳐버렸다고 하면 공부 안 하고 깨쳤습니다. 그렇지만 들여다보면 전생에 목숨 걸고 공부했는 결과가 바로 깨치게 한 것입니다. 전생의 과정은 모르기 때문에 공부 안 한 것 같이 생각하지만 결국은 깨치는 데는 커트라인이 정해져 있습니다. 일정 이상 수행을 하지 않고는 깨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이생에 공부를 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이생에 해 놨던 공부가 다음 생에 결국 공부했는 결과로 쉽게 깨치게 되는 것입니다. 단박 깨친다고 했지만 깨치기 전까지의 과정은 끝도 없는 노력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의 삶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만이 견성성불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렇게까지 살아 있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DNA가 나름대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데 가장 적절하게 잘 적응했기 때문에 인간이 이만큼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똑같습니다. 새는 새대로, 개는 개대로,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모든 동물이 우리와 더불어 같이 사는 것은 나름대로 최고로 잘 적응하고 조화를 잘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니라. 스스로 깨치면 제일 좋고 스스로 깨치지 못하면 스승을 찾아 가서 지도를 받아서라도 꼭 자성을 보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세세생생 살아가는 우리의 목적은 이 자성을 깨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목적을 향하여 잘 할 수 있으면 독학할 수 있어요. 그렇지 못하면 먼저 공부 한 선지식한테 물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힘들게 깨쳤겠어요? 우리는 깨치기 쉽습니다. 부처님을 따라 하면 되니까 가르쳐 주는 대로 하면 됩니다. 어떤 것을 큰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최상승법이 바른 길을 곧게 가리키는 것임을 아는 것이 큰 선지식이고 큰 인연이다. 최상승법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이 반야바라밀을 깨치는 것이 최상승법입니다. 이렇게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는 전생도 보일 것이고, 공부가 익으면 견성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인연이 있어 이렇게 공부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면 재미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빙그레 미소가 지어집니다. 인연 없는 관계는 없습니다. 언제 어느 때 공부할 인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인과법은 전생에 뿌리지 않은 것은 절대로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은 내가 뭔가 줬기 때문에 그것이 이생에서 나한테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공부하는 인연이 되었겠습니까? 전생을 돌아보면 공부할 인연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수행자의 옆집에 살았거나 지나가면서 보시를 했던 등등의 인연이 된 사람이 여기에 붙잡혀서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부할 수 있는 인연보다 더 큰 인연은 없습니다. 이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선지식에게 배워야 할 것은 견성성불 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견성성불하게 되면 선지식이나 어느 누구나 전부다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와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말할지라도, 원래 이 부처의 성품인 불성은 그냥 있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충만한 본래 성품은 불성입니다. 그 불성이 나에게 속하면 자성이고 나 이외의 대상에는 법성이 됩니다. 내 자성을 보는 것이 견성입니다. 우리가 평생 쓰는 것은 그냥 뿌리 위에 올라 와 있는 줄기와 가지와 그 잎사귀를 보면서 평생 삽니다. 

우리가 지금 일으키고 있는 의식은 현재 의식이며 이것의 바탕이 되는 제 칠식, 잠재의식, 마나식은 의식의 저장창고입니다. 의식이 일어나게 하는 근거이며 전생에 내가 행했던 업이 저장되어 있는 창고인 제 칠식의 근거가 제 팔식인 아뢰야식입니다. 제 팔식의 작용은 너무나 미세해서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제 칠식과 제 육식 밖에 모릅니다. 제 팔식의 작용은 우리가 볼 수가 없습니다. 견성, 본래 성품을 본다는 것이 제 팔식을 보는 것입니다. 집중해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번뇌망상을 끝도 없이 가라앉히는 겁니다. 이 끝도 없는 번뇌망상을 가라앉히는 작업이 집중하는 것입니다. 집중하다 보면 번뇌망상이 가라앉아서 지금 갖고 있는 육식과 칠식에서 벗어나 무념에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그 상태에서 삼매에 들게 됩니다. 생각을 일으키게하는 뿌리인 미세한 움직임과 흐름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견성이며 견성성불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성품을 본다는 것은 무명을 타파하고 미세하게 움직이는 그 뿌리를 보는 것입니다. 뿌리의 움직임을 보고 모양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견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 고유의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이 견성을 맛보게 됩니다. 불교적인 입장에서 견성을 이야기 하니까 우리의 것 같지만 이 세상에 위대한 지도자나, 과학자나, 화가나, 누구나 자기의 삶에 집중해서 몰두한 사람은 이런 경지를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목숨보다도 더 지중한, 더 강한 힘의 집중에 의해서 그런 것들이 나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엄청난 바닥의 세계를 보고 있는 겁니다.  불교에서 이야기 할 때는 견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며, 기독교에서 볼 때는 천국의 열쇠를 얻은 사람입니다. 꼭 불교만 견성하겠어요? 천주교에서도, 기독교에서도, 과학에서도, 세상 어디에서든 다 견성할 수 있습니다.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견성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불교 경전에 버금가는 좋은 말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감정에 호소하는 글이 아니라 마음의 뿌리를 건드리고 흔드는 그런 글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는 그 뿌리의 세계를 본 사람입니다. 만유인력 법칙도 몇 생을 집중한 그런 힘에 의해서  나와요. 한 생을 집중해가지고 그렇게 엄청난 법칙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지금 이 세상에 남아있는 아름답다고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그냥 이루어지고 그냥 만들어 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지함으로 뿌리를 본 그 사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피라밋이나 타지마할 같은 것을 구상을 하고 작업했던 사람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엄청난 더 깊은 내면의 세계, 뿌리를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꼭 자성을 봐야 된다. 우리는 부처님 이후로 어느 누구든 전부다 선지식한테서 제대로 바르게 가는 법을 다 배웁니다. 그래서 쉽게 갈 수 있어요. 부처님께서 백의 노력을 했다면 우리는 그 부처님의 은혜 때문에 30에서 40의 노력만으로도 견성을 할 수 있어요. 처음 그 길을 간 분은 우리가 겪는 것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 큰 어려움을 겪고 끝까지 간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그 길을 간다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우리에게는 교과서가 있어 돈오법에서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옵니다. 선불교의 초조를 달마라고 합니다. 달마 밑에 혜가가 있고 혜가 밑에 승찬이 있고 승찬 밑에 도신, 도신 밑에 오조홍인, 육조혜능으로 이어집니다. 육조혜능까지 이 달마의 법이 돈오법으로 훨씬 더 체계화됩니다. 마음을 깨치고, 마음을 볼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혜능까지를 조사선이라고 합니다. 바로 일조, 이조, 삼조, 사조, 오조 조사들입니다. 혜능까지를 조사선이라고 이야기하고 혜능 밑에 화두를 들고 깨치게 하는 간화선이 체계화 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다양한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두선의 역할이 바로 불교를 통해서, 선을 통해서 인간들의 정신능력을 끝도 없이 향상시킨 것입니다.  

달마로부터 오조까지 스승들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달마는 나뭇잎을 타고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위대한 수행승이 인도에서 왔다는 소문에 양무제한테 불려갑니다. 양무제가 먼저 말하기를 ‘스님 내가 전국에 절을 많이 지었는데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달마 대답이 ‘무공덕’ 한 마디로 끊어버려요. 양무제 당신이 했는 그 일은 공덕이 없다는 겁니다. 달마는 양무제의 초대에서 쫓겨나 소림굴로 떠납니다. 거기서 면벽 구 년을 합니다. 면벽을 하고 있는데 신광이라고 하는 유학자가 소문을 듣고 찾아 옵니다. 굴 밖에서 불법을 한마디 일러달라고 해도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저녁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을 맞으면서도 계속 무릎 꿇고 앉아서 불법을 일러달라고 합니다. 달마가 몇 시간을 지켜보다가 ‘무엇을 구하려고 왔느냐?’ 하고 물으니까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하고 신광이 한 마디 합니다. 그러자 달마가 ‘불법을 얻기 위해서는 경전에만 매여도 안되며 한량없는 긴 세월동안 목숨바쳐 수행해야 된다.’ 고 말 합니다. 경전을 본다고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끝도 없이 긴 시간동안 목숨 바쳐 수행하여 불법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자 신광은 자기의 왼팔을 잘라 불법을 구하려고 하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목숨을 걸고 불법을 구하려고 하는 단비구법으로 팔을 잘라 달마한테 증명을 합니다. 결국 신광을 제자로 받아들여 혜가라는 법명을 줍니다. 구 년 면벽이 끝나고 달마가 제자를 맞는 시기입니다. 혜가는 스승을 모시고 3년 동안 열심히 했는 대도 별로 성취가 없었고 불안했습니다. 하루는 혜가가 달마를 찾아갑니다.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마음을 좀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달마가 너의 편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 오너라, 네 마음 내놓아 봐라. 그럼 내가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겠다. 합니다. 이제까지 스승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를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편치 않는 마음이 없어요. 혜가는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가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고 한마디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3년 동안 뭔가 이루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불안했던 그 마음이 싹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불안한 그 마음을 내 놓으라는 한 마디에 자기가 이제까지 허망한 것을 쫓아 무엇을 했는지 그 순간 알아 버린 것입니다. 그 순간이 돈오입니다. 그러니까 스승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바로 뭔가 이루어지면 그 순간이 돈오가 되는 것입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답이 나왔을 때 빙그레 웃든지 무릎을 칩니다. 그 순간이 돈오입니다. 돈오는 연습을 거쳐야 제대로 공부를 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들이  공부해라 한 것은 연습, 복습, 예습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씩 공부했던 용들을 되씹어보고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공부는 익어 가는 것입니다. 혜가가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이 마음의 실체를 본 이 상황과 같습니다. 삼조는 승찬입니다. 최고의 명문인 심신명을 쓴 주인공이 바로 승찬입니다. 승찬은 문둥병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다가 도저히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병은 점점 더 깊어지고 오래 살지 못 살것 같은 생각에, 소림굴에 도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조혜가를 찾아갑니다. 저는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화상께서는 저의 죄를 참회케 해주십시오. 도저히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까 혜가를 찾아 와서 병 좀 낫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는 겁니다. 혜가가 찾아온 승찬에게 한 말이, 그대의 죄를 갖고 오너라. 그놈의 죄를 내 놓으면 그 죄를 참회 시켜주마. 하고 말합니다. 마음속에 죄가 있어 문둥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죄를 내 놓으면 참회 시켜준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문둥병에 걸릴 죄 때문에 평생을 고민하고, 고뇌하고, 마음에 상처를 받았는데 그 죄를 가져 오라고 하여 깊이 살펴보고 관조해보아도 죄가 없어요. 그 죄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속에 죄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찾아보아도 그 죄의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승찬이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니 혜가가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모두 참회 되었느니라. 그대는 이제 불, 법, 승 삼보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그렇게 지내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문둥병 환자였던 승찬이 혜가가 이야기하는 그 말을 듣고, 승보인 수행자가 어떤 것인 가를 직감적으로 느낍니다. 지금 화상을 뵙고 승보는 알았으나 어떤 것이 불보이며 법보입니까? 그 때 혜가가 한 말이 마음을 깨치면 부처며 깨친 마음의 내용이 법이다. 그것이 불이며 법이다.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 승보도 또한 그러하다는 그 한마디에 마음의 병이 다 녹아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승은 부처가 되려고 무지무지하게 애를 쓰는 수행자입니다. 열심히 하면 시간만 지나면 부처 되겠지요. 그래서 부처와 수행자, 불과 승은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결과는 분명하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생에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몰라도 다음 생에 자기의 삶을 보면 분명히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공부도 너무 늙어버리면 힘이 없어서 못합니다. 그래도 기력이 있을 때,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예언을 합니다. 저금통장에 있는 돈도 바닥까지 쓰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남겨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도  숨이 넘어갈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달이나 두 달을 남겨 놓으면 삶은 엄청나게 넉넉해집니다. 내가 의도한 대로 깨끗하게 살다가 갈 수가 있어요. 부처님께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예언한 것은 수행자로서 상당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도 공부를 잘하면 침대에 누워 숨 끊어질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오는 예감이 들면 그때부터는 다리 틀고 앉아서 평생 삶의 흔적을 되돌아보면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선지식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깨친 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 얻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다. 깨달음은 스스로 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해요. 깨달음의 대상은 절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성은 자성이 익으면 그냥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법성을 깨치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봐야 자성을 깨치지 않고는 법성은 깨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으로 파고들어야 됩니다. 바깥으로 향하는 것은 몇 생을 파고 나가도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보려고 한다면 안으로 파고 들어야  됩니다.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을 얻기를 바란다면 옳지않다. 자기 마음속의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느니라. 내부세계를 관찰하고 관조하면 그냥 그대로 해탈을 하고, 견성을 하고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의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전도되어 있으면 제대로 맞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도몽상입니다. 바른 것을, 맞는 것을 제대로 못 받아들여요. 내 업에 쌓여 있어 아집 때문에 내가 맞다고 옳다고 주장하는 그것 속에 쌓여가지고 항상 제대로 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유명한 불교학자가 도대체 선사가 어느 정도 불교를 아는가 싶어서 하루는 테스트하러갑니다. 유명세가 있는 선사를 찾아 갑니다. 자기가 누구다하고 소개를 하니까 그런가? 차나 한 잔 하자면서 차를 찻잔에 따라줍니다. 찻잔이 넘치는데 계속 따루고 있습니다. 스님, 스님 차가 넘칩니다. 그래! 하면서 차가 넘친다고 하는데도 계속 따룹니다. 자네는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자네하고 불법을 논하겠는가? 우리가 공부를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항상 자기 생각으로 가득 채워놓고 판단을 합니다. 공부하다보면 어느 것은 맞고, 어느 것은 틀린지 자기 스스로 알게 돼요. 자기 생각으로 판단을 해버리니까 법을 보려고 해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져 버려요. 공부할 때 중요한 것은 자기 생각을 좀 버려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그 아집을 못 버립니다. 평생 아집 속에서 살아왔고 그것을 나라고 인식하고 살아왔습니다. 공부는 익숙하지 않는 설은 것을 익게 하고 익은 것을 설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한테 설은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집중하고 보시하고 베푸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익게 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욕심내고 탐욕하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탐, 진, 치 마음을 좀 더 설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소멸시키자는 것입니다. 올해 자식이 고3입니다. 열심히 기도합니다. 기도해서 손해는 없습니다. 내가 기도했으니까 애가 공부 잘하겠지 하는 자기 위안입니다. 진정으로 기도를 잘하려면 애가 공부 잘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기도를 잘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한다고 해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진정한 기도는 고3이 제대로 공부 잘 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과 환경을 살펴보면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더불어 같이 네가 공부하는 것만큼 엄마도 이렇게 열심히 한다. 이렇게 접근해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만약 자기의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이 상태입니다. 어떠한 상황을 제대로 잘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있는 그대로 못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업입니다. 그것을 깨뜨려야 뭔가 이루어집니다. 마땅히 반야의 관조를 일으키라.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다. 바로 그 망념 없애는 것이 일입니다. 그 망념을 없애려고 하니까 관조하고 집중하고 살펴라는 것입니다. 지혜를 갖고 관조를 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니라.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알게 된다. 번뇌망상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순간, 부처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끝도 없는 중류가 흘러요. 중류가 흐르는 것을 끊어야, 막아야 되는데 그냥은 안 끊기고 안 막혀요. 그냥 흐를 뿐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계속 끝도 없이 연속 되고 나의 업도 끝없이 흘러 나와요. 그게 바로 나입니다. 집중만이 이 중류의 흐름을 끊을 수가 있어요. 집중하다 보면 폭포같이 흐르는 중류의 흐름을 어느 순간 끊을 수가 있어요. 폭포 밑에서 떨어지는 물을 한 번 쳐다보세요. 쏟아지는 물줄기를 어떻게 끊을 수 있으며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폭포에서 떨어지는 그 물을 끊는 것이 집중하는 힘입니다. 그것을 끊어 내는 순간 부처를 보게 됩니다. 끊는 순간, 그 틈으로 바로 부처가 보여요.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성의 마음자리를 지혜로써 관조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도에 이르는 방법은 정정과 정념 두 개를 해야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정념을 먼저 하고 정정을 합니다. 지혜로써 먼저 관조를 하고 그다음 집중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집중을 먼저 하고 관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두 개 같이 합니다. 하나로써는 부처에 갈 수가 없어요, 두 개 다를 다 해야 됩니다.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알게 된다. 결국 안의 이 본래 성품은 불성이 안으로 들어오면 자성이 되는 것이고 바깥으로 나가면 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자성과 법성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성품은 전부다 하나입니다. 모든 생명도 하나로 출발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전부다 하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똑같은 것입니다. 

법신, 보신, 화신에서, 법신은 이 우주에 충만한 어떤 성품 덩어리, 하나인 것이 법신입니다. 이것이 나한테 들어오면 사람이 되어 나름대로 바탕으로 써먹다가 또 소멸해서 갑니다. 그것이 고양이한테 들어가면 똑같은 법성이지만 고양이가 됩니다. 그것을 또 나름대로 써먹다가 소멸됩니다. 원래 법성은 사람 다르고, 고양이 다르고, 개 다르고, 나무 다른 것이 아니라 다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작용은 사람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고양이로도 나타날 수도 있고 개로도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작용을 조합하고 발달시킬 수 있는 강력한 의지가 있습니다. 의가 강력하기 때문에 자성을 볼 수 있고, 살필 수 있고 그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있는 것입니다. 의지가 명확하지 않는 개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은 스스로 자성을 볼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몸 받아야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늘나라에 가보세요. 형체가 없기 때문에 자성을 관찰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육신은 뭔가 모으는 통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 싶어 천당에 가보니까 거기에는 육신이 없으니까 집중을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도를 윤회합니다. 탐, 진, 치가 강하면 지옥, 아귀, 축생의 몸을 받고 탐, 진, 치가 미약한 사람들은 아수라, 인간, 천상의 몸을 받습니다. 우리는 인간 몸 받았으니까 괜찮게 살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인간만이 지, 정, 의를 갖고 있습니다. 또 몸뚱이를 갖고 있어요. 천상인 하늘나라는 사천왕천, 도리천, 도솔천으로 올라갑니다. 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사천왕문이 나옵니다. 천국의 입구입니다. 선행을 많이 하여 더 높은 천국에 가면 도리천, 도솔천이 있습니다. 중생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가는 문이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부처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천왕문까지 올 때는 탐, 진, 치를 다 씻어내고 사천왕문을 통과할 때는 부처의 마음으로 통과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계시는 대웅전까지 그런 마음으로 가는 겁니다. 선업을 많이 지어 극락에 갔어요. 극락에 가서 편안하고 잘 지낼 수는 있지만 부처는 될 수가 없어요. 부처가 되려고 하면 인간세상에 내려와 몸뚱이가 있어야 이 몸뚱이에 의해 집중을 통해 자성을 보게 됩니다. 자성을 보게 되고 법성을 보게 되고 안팎이 사무쳐 밝아집니다. 본래의 마음을 알고 바로 사무쳐 밝아져서 본래의 마음을 아는 것이 견성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 아라한은 해탈입니다. 초기불교 수행의 과정에서는 자성 밖에 없어요. 내 성품을 보는 것이 바로 해탈이고 아라한입니다. 번뇌가 소멸되면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다. 해탈한다는 그 자체가 무명을 깨뜨리고 삼매에 드는 상태입니다. 해탈을 얻으면 삼매를 얻었기 때문에 그것이 반야삼매입니다.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이다. 그래서 무념, 삼매, 반야삼매 중에 하나가 이루어지면 연속적으로 이루어져요. 모두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연속성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집중해서 어느 순간 집중이 딱 경계를 넘어서면 바로 그 순간 무념이 되고 무념이 지속되는 것이 삼매입니다. 그 순간에 해탈이 일어나고 견성을 하게 됩니다. 이 모두가 똑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념이 된 상태가 무심이며, 도를 이룬 자를 무심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아집은 모든 것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으려고 하면 아집을 되돌려 볼 수 있어야 자유로워집니다. 아집이라는 것을 바로 보면 무상이고 무아인 것입니다. 아집에서 벗어나야 무아가 됩니다. 원래 무아인데 생명이 딱 생기는 순간, 이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아집 때문에 평생을 집착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평생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치 때문에 아집하고 아만하고 아애하고 이것으로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잘 한 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사는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거 같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 뿐입니다. 남편을 위해서 사는 거 같고, 자식을 위해서 사는 거 같지만 결국 자신을 위한 삶일 뿐입니다. 아집과 아만 때문에 정직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각 속에서 평생을 살다 가요. 그리고 아애때문에 자기 자신을 평생 사랑합니다.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의  평생의 삶은 아집 때문에 집착의 연속입니다. 심신명 첫구절을 보면 지도무난 유렴간택입니다.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부처 되는 거 쉬워요. 옳다, 그르다 선택만 안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분별심만 안 일으키면 됩니다. 그게 바로 도입니다. 분별은 아집 때문에,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이것만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간단하고 쉬운데 평생을 해도 못 벗어나요. 업 속에 빠져있기 때문에 못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아집과 아만과 아애를 깨뜨리지 못하는 한 내 삶의 평생 모습은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념이 되면 깨뜨려져요. 모든 곳에 두루하되 집착하지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 나가게 한다. 이 여섯 도적이 안, 이, 비, 설, 신, 의입니다. 나 속에서 인식할 수 있는 주재성을 갖고 있는 것은 이 여섯 개 밖에 없어요. 이것을 육근이라고 합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인식체가 육근입니다. 안, 눈이 있어 대상을 봅니다. 우리가 평생 짓는 업과 죄의 70%는 눈이 지어요. 귀로 듣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양반입니다.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부딪히고 또 뜻으로, 생각으로 짓습니다. 이 모든 것 중에서 약 70%가 눈이 근본이 됩니다. 눈의 경계가 되는 것은 어떤 형상, 모양 갖고 있는 전부 다입니다. 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성, 소리입니다. 눈이 나아가 어떤 형상을 봅니다. 보는 순간 식이 일어납니다. 근과 경이 부딪히면 식이 일어납니다. 육식이 생겨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불교가 뭐냐고 물었을 때 십이처가 불교니라. 하신 것입니다. 십이처라고 하는 것이 육근과 육경이며, 육근과 육경이 부딪히면 육식이 생깁니다. 이것이 십팔계입니다. 이것이 만들어 내는 법칙이 바로 연기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무엇인가?  바로 연기입니다. 연기는 불교 밖에 없는가? 이 세상 어디에든 있습니다. 불교입장에서 볼 때는 견성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세상의 어느 학문이든 어느 종교든 다 같이 공존해 있다 겁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곳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 진리를 열심히 추구합니다. 우리는 불교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고 본질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몸담았으면 몸 담았는 곳에서 그 방법으로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불교를 알면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본질을 보는 데는 부처님만큼 명쾌하게, 명확하게 잘 설명하신 분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자들은 행운아입니다. 불교하고 인연이 된 것은 세세생생 얼마나 큰 행운이고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회가 자주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기회는 안 와요. 이 여섯 도적들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 나가게 하나 육진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 감에 자유롭게 됩니다. 무아와 무상을 제대로 인식하면 대상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대상에 물들지 않고도 오고감에 자유롭습니다. 내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거기에 자유로운 것입니다. 귀로 어떤 소리를 듣더라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거기에 떠나지 않으면서도 자유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애욕을 일으켜 집착을 합니다. 무념이 되면 좋은 것을 느껴도 집착하지 않고 좋은 것으로 끝나 버려요. 육진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지만 오고감도 자유롭습니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합니다. 무념 속에서 행하는 반야심경의 첫 시작이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바로 무념행입니다. 삼매를 얻어서 삼매 속에서 살자. 무념을 얻어서 무념행 속에서 살자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돈을 벌지 말라는 이야기는 절대 안 하셨어요. 돈을 벌더라도 돈을 제대로 잘 쓰라는 겁니다. 권력을 가지되 권력을 많은 생명들을 위해서 제대로 잘 베풀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베푸는 것이지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것은 아무리 가져도 좋아요, 가지는 것을 제때 적절하게 잘 베풀 수만 있다면 가지는 것은 결국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돈을 벌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되 돈을 적절하게 잘 써라, 잘 베풀어라. 잘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 어디에든지 그런 베풀수 있는 마음이 생기면 자비입니다. 공부 했는 것만큼 자비가 생겨요. 바로 자비가 생기지 않으면 내가 공부를 잘못했구나하고 알아야 됩니다. 죽으라고 공부해서 부처가 되고 보니까 그것보다 더 멋지고 좋은 삶은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베푸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요. 깨달아야 제대로 잘 베풀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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