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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22강 극락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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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046회 작성일 22-05-24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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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극락세계 


오늘은 제 20장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는 시간입니다. 59페이지를 같이 읽어봅시다. 

위사군이 예배하고 또 물었다. 제자가 보니 스님과 도교인과 속인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생각하면서 서쪽나라에 나기를 바랍니다. 청컨대 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거기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바라건데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사군아 들어라. 세존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서방정토로 인도하기 위하여 말씀하셨다. 경에 분명히 말씀하기를 여기서 멀지 않다고 하였다. 다만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멀다하고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지혜가 높은 사람 때문이다. 사람에게 자연히 두 가지가 있으니 법은 그렇지가 않다. 미혹함과 깨달음이 달라서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을 뿐이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곳에 나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의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땅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다.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허물이 있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가서 나기를 원하나 동방과 서방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다 한 가지다. 다만 마음에 더러움이 없으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마음에 더러운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하여 왕생하고자 하여도 이르기 어렵다. 십악을 제거하면 곧 십만리를 가고 팔사가 없으면 곧 팔천리를 지난 것이다. 다만 곧은 마음을 행하면 도달하는 것은 손가락 퉁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군아 다만 십선을 행하라. 어찌 새삼스럽게 왕생하기를 바랄 것인가, 십악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이하겠는가. 만약 남이 없는 돈법을 깨치면 서방정토를 찰나에 볼 것이며 만약 돈교의 큰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염불을 하여도 왕생할 길이 멀거니 어떻게 도달하겠는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대해서 위사군이 예배하면서 육조혜능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제자가 보니 스님과 도교인과 속인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생각 하면서 서쪽나라에 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죽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 나기를 원합니다. 석가모니불이 다스리는 이 세계는 우주에서 남쪽에 있는 남방화주세계입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이 계시고,  동방에는 약사유리광여래가 계시고, 북방에는 여래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낙이 극에 달한 극락에,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생각하면서 서쪽 나라에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청컨대 대사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 곳에 날 수가 있겠습니까? 경에 분명히 말씀하기를 여기서 멀지 않다고 하였지만 실제 거리로 따진다면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엄청나게 먼 거리입니다. 육조는 우리가 태어나려고 하는 서방정토는 내 마음이 청정하면 그것이 극락이고 내 마음이 탐, 진, 치에 물들어 있으면 그것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락과 지옥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세계가 아니라 내가 살아서 마음이 청정하면 극락을 이루고 있고 마음이 탐, 진, 치에 물들어 있으면 지옥을 지어놓고 살고 있다 는 것입니다. 평생을 극락에서 산 사람은 죽어도 극락에 갈 것이고 평생을 지옥에 산 사람은 죽어도 지옥에 가기가 쉬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이생에서 스스로 극락세계에 살아야 죽어서도 극락에 가는 것이고 이생에 지옥에 살던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고 해서 극락에 가겠습니까? 아무리 49재를 지내고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업에 따라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생에 살아 있는 이 삶에서 청정한 삶으로 극락을 이루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하루의 삶이 극락이면 극락에 사는 것이고 죽어서도 극락에 가는 것입니다. 나한테 축적된 그 기운만큼 다음 생에도 몸 받는 것입니다. 연기의 내용 중 하나가 연속성의 법칙입니다. 이 연속성의 법칙에 의해 이생에 행했던 대로 몸 받아서 다음 생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업의 중요한 성분 중에 하나가 행위한 것을 지속적으로 하려는 습성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면서 청정하게 살자는 것이며,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입니다. 서방정토가 멀지 않다는 것은 곧 내 마음이 청정하면 멀지않고 내 마음이 탐, 진, 치에 물들어 있으면 끝도 없이 멀어질 뿐입니다. 사람에는 자연히 두 가지가 있으니 법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미혹함과 깨달음이 달라서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을 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목적지에 빨리 다다를 수 있고 미혹한 어리석은 사람은 늦게 갈 뿐이지, 방향만 잘 잡고 가면 우리는 목적지에 똑같이 도달할 수 있습니다. 더디고 빠름이 있을 뿐이지 다른 것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충만한 것은 하나의 기운 밖에 없습니다. 바로 청정법신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될 목적지는 청정법신입니다. 수억 겁 동안 살아오면서 누적 되어 있는, 물들어 있는 더러움을 걷어 내버리면 그냥 청정법신의 세계가 드러납니다. 청정한 것은 그냥 드러나는 것으로 물들기 전의 세계이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악한 사람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고 지혜로운 사람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있지만 법은 전부다 청정 하나입니다. 그 법은 하나이기 때문에 좀 더 빠르고 더딤이 있을 뿐이지 어느 누구든 방향만 똑바로 잡아 나아가기만 하면 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그곳에 나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 공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염불하여 목적지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경전을 보고도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를 열심히 하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참선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본래 성품인 청정한 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든 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그 곳에 가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합니다. 염불이나 참선은 방법일 뿐이지 내용은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합니다. 염불하거나 경전 독송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이며 경전을 보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것도 결국은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은 오염되어 있는 이 마음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직시하고 보는 것입니다. 보면 없어져요.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는 다는 말이 없습니다. 단지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을 쓰지만 결국은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알면 전부다 해결이 됩니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혹시 하는 의심하는 마음도 생기지만 알고 나면 의심은 안 생깁니다. 지금 주먹 안에 열쇠가 있는데 보는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돈을 쥐고 있을 것이다, 구슬을 쥐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을 합니다. 그러나 주먹을 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보고 나면 누가 뭐라 해도 믿게 됩니다. 직접 보고 나면 여기에는 열쇠가 있구나, 천국으로 극락으로 갈 수 있는 열쇠가 여기 들어있구나. 알게 됩니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습니다. 알면 100% 확신이 생깁니다. 공부하면서 전생이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전생을 한 번 보고 알게 되면  100% 믿게 됩니다. 염불이나 경전이나 참선등은 마음을 깨끗이 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목적은 본래 성품인 그 청정한 성품을 보자는 것이지 염불하는 것이 목적도 아니고 참선하는 것이 목적도 아니고 경전을 보는 것이 목적도 아닌 것입니다. 경전을 공부하는 것은 이 경전을 통해서 목적지에 도달하자는 것입니다. 결국은 물들어 있는 이 마음의 탐, 진, 치를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산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처음에는 보물이 드러나 있어 괜찮았는데 살면서 업을 짓다 보니까 산속에 숨겨져 있는 보물 같이 업에 덮여있어 안 보입니다. 보물을 드러나게 하려면 산을 허물고 굴을 파야 됩니다. 청청을 보는 방법이 집중하는 것입니다. 염불로써 집중할 수 있는 것이며 기도를 통해서 집중할 수 있는 것이며 경전을 보면서 집중할 수도 있는 것이며 참선을 하면서 집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깨친 사람들이 참선을 권하는 것은 참선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염불하면서도 청정을 볼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청정을 보고 견성성불 한다는 것은 염불을 하여 청정까지 가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청정을 볼 수 있는 집중하는 힘은 염불로는, 경전으로는 잘 생기지 않습니다. 생각을 집중해서 모으는 데는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면 모든 것을 깡그리채 집중 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은 생기기가 어렵습니다. 묘법연화경을 보면 제7품 화성유품이 있습니다.   

오늘 팔공산 정상을 향해 출발을 했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는 가까운 거리로 여겼는데 가보니까 너무 먼 거리였습니다. 모두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하니까 중간에 가짜 목적지인 화성을 만들어 목적지에 다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전부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하면서 하루 쉬고 난 다음에는 에너지를 충전시켰으니까 여기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진짜 목적지 아니다, 우리가 가야 될 목적지는 여기서 조금 더 가야 된다. 하루 쉬고 보니 목적지 가는데도 하루 걸리고 다시 돌아 내려가는데도 하루 걸려요. 이왕이면 목적지에 가자. 하면서 다시 힘을 얻어서 모두 목적지에 갑니다. 염불이라든가 기도라든가 경전은 화성과 같은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목적지로 바로 가게는 하지 못합니다. 전생이나 그 전생에 쌓였던 일반 번뇌는 기도나 염불로 녹여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뿌리 깊은 구생혹은 핵폭탄과 같은 의심덩어리가 아니고는 깨뜨릴 수 없습니다. 염불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염불하면서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결국 화두를 든다는 것은 도저히 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의심덩어리가 있어야 됩니다. 의심만큼 엄청난 힘으로 집중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의심에 꽂혀야 그 의심을 풀어야 되겠다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쏟아져요. 육조 혜능도 세 번을 견성합니다. 금강경을 듣고 견성하고, 오조 홍인을 만나 견성하고, 홍인이 금강경을 가르칠 때 응무소주 이생기심 구절에서 견성을 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의 염불로도 집중을 할 수 있고 청정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지금 상태보다는 좀 더 나은 상태가 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근본 무명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염불도 염불선을 해야 하고, 경전도 경전선을 해야 가능합니다. 

오염되어 더럽혀진 이 산을 깨뜨리는 데는 염불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근본 무명을 깨뜨리고 궁극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내 마음을 철저하게 청정하게 하는 모든 에너지를 전부다 모을 수 있는 집중을 해야 가능합니다. 그것은 화두 밖에 없습니다. 어떤 문제에 의심을 가져야 됩니다. 의심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의심의 포인트는 한점이며 하나입니다. 화두 공안이 1700개나 되지만 자신에게 맞는 화두 공안의 포인트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화두 공안을 받을 때는 견성한 스승에게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찾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 방법대로 잘 풀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음악을 잘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수학을 잘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어학에 뛰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암기능력이 뛰어납니다. 나름대로 능력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 능력분야를 전공하여 평생 할 때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성적에 맞추어 대학과 전공을 정하여 입학해서 졸업하여 취직할 때는 내 취미가, 특성이 어떤 것이든 크게 관계가 없어요. 그냥 공부하고 졸업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한 분야에 엄청나게 몰두할 수 있고 그 분야에 오로지 몰두할 수 있는 그런 힘이 분명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음악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대금 부는 소리 듣고 잠 못 자고 몇 날 며칠 어떻게 하면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고민을 합니다. 수학에 관심 있는 사람은 미분, 적분 문제가 풀리는 것을 보고 신비해서 며칠 동안 그 과정에 빠져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미칠 수 있는 그런 성품은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화두를 준다는 것은 계속 그 문제를 풀면 그런 의심덩어리를 갖게 하여 가슴에 맺힐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맺혀 의정이 되어야 진짜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안의 포인트를 주는 것입니다. 지금 대충 화두를 다 들어도 크게 심각하지 않아요. 내가 이 화두를 안 풀면 죽을 만큼 절실하다면 분명히 이 화두가 엄청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 힘을 집중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과연 전생에 나는 무엇이었는가? 이 물음은 누구나 다 쉽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한 번쯤 고민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오염되어 있는 이놈의 산을 무너뜨리고 청정한 마음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것을 무너뜨리는 방법으로서는 목숨 걸고 집중할 수 있는 그 힘만이 가능합니다. 그것만이 나를 거기에 가게 만듭니다. 그것에 한 번 맺혀 놓으면 1년을 들고, 2년을 들고 있으면 가슴에 딱 맺혀 자나 깨나 무엇을 하더라도 내 것이 되어 있습니다. 의심의 덩어리인 의정이 나한테 딱 맺혀 있습니다. 의심의 덩어리가 나한테 생길 수 있도록 하면 결국 견성하게 됩니다. 그렇게 가기 까지가 어려운 것이고 그렇게까지 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엄청난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어야 됩니다. 바둑을 잘 두는 기사가 바둑 둘 때 집중력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도인 아니고는 그런 집중력이 나오기가 힘들어요. 마음 쓰는 방법을 돌을 놓다 보니까 본질은 알아도 마음 쓰는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둑에는 지혜는 있지만 도인은 못 되는 겁니다. 덕이 없는 겁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깨치면 지혜와 덕을 겸비하게 됩니다. 마음을 안 닦으면 지혜만 있어 한 분야에는 엄청난 업적을 남길 수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나름대로 마음을 깨친 분들입니다. 그렇게 불멸의 업적을 남겼는데 그 사람의 삶은 도인과 같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도인과 같이 덕을 안 쌓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교를 알기 때문에 지혜로우며 덕도 같이 겸비해야 됩니다. 그것이 결국은 마음을 깨끗이 해야 될 궁극적인 이유가 지혜와 덕이 함께 충만하게 됩니다. 덕이 바로 자비입니다. 두 개를 다 겸비해야 진정으로 깨끗한 마음이 보석과 같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마음이 깨끗하면 부처의 땅도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지옥에 간다고 해서 그곳이 지옥이겠어요? 지옥이 그대로 불국토가 되는 것입니다. 간혹 명당이 있습니다. 명당이라고 하는 곳이 다른 곳 보다 훨씬 더 좋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명당을 진정으로 명당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고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덕이 있고 깨끗해야 어디가도 자비가 흘러나옵니다. 부처님이 지옥가면 지옥이 극락이 되듯이 깨끗한 사람이 가는 곳마다 명당이고 극락입니다. 지옥에 사는 사람이 극락에 가 보세요. 그 사람은 극락에 살아도 그 극락이 지옥일 뿐입니다. 내가 지옥에 있느냐? 극락에 있느냐? 지금 태어나느냐? 천 년 전에 태어나느냐? 천 년 후에 태어나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이 깨끗하면 이것으로 모든 것은 다 해결 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깨끗하면 어디에 있더라도 그 곳이 바로 극락입니다. 지옥에 가도 극락이고 내 직장에 가도 극락이고 집에 가도 극락이고 어디에 있더라도 극락일 뿐입니다. 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면 어디에 가더라도 그 곳은 지옥일 뿐입니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 혹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내 마음이 어떻게 되는 지 한 번 살펴보세요. 그냥 양보해버리고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 버리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대긍정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긍정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그냥 그대로 극락이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마음의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땅도 깨끗하다. 내 마음이 깨끗하면 내가 가는 곳마다 깨끗하다고 하신 겁니다. 지금보다 좀 더 좋은 세상에서 태어났으면?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점, 이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삶일 때, 내 삶은 항상 최고의 삶이 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내가 지금 이 순간 최고의 삶이 되지 못하면 내 삶은 지옥이나 아귀세계에 들락날락하면서 살 뿐입니다. 지금 부처가 되자는 것입니다.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우리가 이 사바세계에 살더라도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다는 겁니다. 서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허물이 있다. 마음이 오염되어 있으면 그 사람이 비록 몸은 극락에 있지만, 그 사람은 지옥에 산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옥에 사느냐? 극락에 사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깨끗하냐? 깨끗하지 못하냐? 내 마음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100% 부정인 나라가 지옥입니다. 100% 긍정인 나라가 부처의 나라이고 극락입니다. 우리는 60 - 70점 극락에 사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 받아들이고 내 마음이 열려 있는 만큼만 맞습니다. 다른 어디에 극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 땅, 이 순간이 극락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통해서 스스로 대긍정적인 마인드, 깨끗한 마음. 물들지 않는 마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불성이며 하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물들어있는 업만큼 토막을 내 놓고 있습니다. 네 것, 내 것 토막 내고 오염되어 있는 마음을 다 걷어내고 나면 하나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손이 나쁜 짓을 해보세요. 밉는가? 내 것은 절대 밉지 않습니다. 고슴도치가 자기 새끼 보면 똑같이 귀여운 것입니다. 열린 마음일 때는 모든 것이 귀여울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이 우리를 볼 때는 얼마나 귀엽겠어요? 모든 것이 부처나라로 가려고 열심히 애를 쓰고 있는 이 중생들을 보면 얼마나 귀엽고 대견하겠어요. 목적지인 부처를 향해 가는데 어떤 사람은 저 멀리 100m 떨어져 오고 있고 어떤 사람은 조금 앞에 가고 그렇게 갈 뿐입니다. 부처님이 우리를 보면 자비마음 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비일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견성을 하고 해탈을 하고 끝도 없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십악과 팔사에서 십악을 제거하면 십만 리를 갑니다. 십만 리를 가려고 하면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십악만 없애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팔사가 없으면 팔천 리를 가서 십만 팔천 리를 가니까 십만 팔천 리 떨어져 있는 극락에 간 것입니다. 십악과 팔사만 없애면 바로 그곳이 극락인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악한 마음과 삿된 마음을 없애 버리면 거기가 바로 극락인 겁니다. 곧은 마음을 행하면 극락에 가는 것이 손가락 퉁기는 것과 같이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쉬운데 우리는 죽다 깨어나도 안 되지요? 통섭불교원에서 공부를 하고 나설 때는 부처 마음인데 집에 가면 짜증 밖에 안 나고 부딪히는 것밖에 없고 이기밖에 안 일어납니다. 우리는 끝도 없이 일어나는 이기를 이길 방법이 없어요. 그것을 이기는 제일 좋은 방법이 위빠사나를 하면서 관조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지 열심히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냥 놔두면 안 변하고 똑같아요. 왜 그런 마음이 일어났을까? 되돌아보면 결국은 이기심 때문에, 탐욕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리석음이 많으면 더 많은 것을 잃습니다. 그것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많으면 적게 잃고 화내는 마음이 많으면 적당하게 잃으며 마음에 따라 잃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마음만 없으면 그대로 극락입니다. 깨끗한 마음이 그냥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아는 순간 단박에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먼 전생부터 오랫동안 누적된 습들이 있습니다. 덜 익은 습은 한 번 알아버리면 바로 없어지지만 오래된 습은 시간이 걸립니다. 이것이 견성을 하고도 보림을 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가벼운 습은 금방 해결되지만 무거운 습은 한 번 해 놓고 또 반성해 놓고 또 후회하고  몇 번 하면 해결됩니다. 

십선을 행하라. 어찌 새삼스럽게 왕생하기를 바라는가, 십선만 행하면 그냥 그대로 극락인데 왜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는가? 입니다. 십악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느 부처가 와서 그대를 맞이하겠는가. 십악의 마음이 내 속에 있는 한 죽다 깨어나도 극락에 왕생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마음에 십악만 끊어 버리면 남이 없는 돈법을 깨쳐 서방정토를 찰나에 볼 것입니다. 만약 돈교의 큰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염불을 하여도 왕생할 길이 멀어서 어떻게 도달하겠습니까. 염불 잘 하면 극락을 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 견성한 것은 아닙니다. 극락 정도는 염불해서 가겠지만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돈교의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염불해도 별 볼일 없다는 겁니다. 결국 돈교의 큰 가르침인 마음을 깨끗이 하는 법을 깨쳐야 모든 문제가 해결 될 수가 있습니다. 천수경에 십악참회가 있습니다. 살생중죄금일참회, 투도중죄금일참회, 사음중죄금일참회, 망어중죄금일참회, 기어중죄금일참회, 양설중죄금일참회, 악구중죄금일참회, 탐애중죄금일참회, 진에중죄금일참회, 치암중죄금일참회. 십악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에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안, 이, 비, 설, 신, 의의 육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육근의 대상이 되는 것이 색, 성, 향, 미, 촉, 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습니다. 코가 있어서 냄새를 맡습니다. 혀가 있어서 맛을 봅니다. 몸뚱이가 있어서 감촉을 느낍니다. 뜻이 있어서 생각의 대상인 법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안, 이, 비, 설, 신, 의는 나이고 색, 성, 향, 미, 촉, 법은 대상입니다. 이 육근의 몸뚱이가 자신이며 이것의 성품이 자성이며 자성을 깨끗이 하여 보는 것이 견성입니다. 대상은 법신이며 이 법신의 성품이 법성입니다. 자성과 법성을 통틀어 불성이라고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자성은 법성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법성=불성이라고 합니다. 살생중죄금일참회, 모든 생명을 죽인 것을 참회합니다. 이 세상에 살생죄 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세상에 살생을 하지마라는 종교는 없습니다. 타 종교는 인간에게만 국한되어 있지만 불교는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서 궁극적인 진리를 생각할 때, 불살생이라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을 복 되게 합니다. 그렇지만 살생을 하지마라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복되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살생을 안 할려면 첫 째, 내가 스스로 나를 살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대상을 살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내가 깨어 있어야 하고 깨끗해야 살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죽여가고 있습니다. 나를 죽이지 않는 방법은 내 자신을 깨끗이 하고 내 자신이 깨어있으면 살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불살생은 본질적으로 모든 생명에게 복과 이익을 주는 것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투도, 도둑질 하지말라는 것은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음, 삿된 음행을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몸뚱이를 갖고 짓는 죄가 살생죄와 투도죄와 사음죄입니다. 입으로 짓는 죄가 망어, 기어, 양설, 악구죄 입니다. 망어는 거짓말 하는 것이며, 기어는 사실이 아닌 말로 아첨하는 것이며, 양설은 이간질하는 것이며, 악구는 악담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한테 정직한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으면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반성을 하거나 한 번씩 되돌아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한테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살생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 정직해야 됩니다. 

의가 짓는 죄가 탐애와 진에와 치암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업이 탐심과 진심과 치심입니다. 탐애는 탐욕이며, 진에는 화내는 마음이며, 치암은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 모든 문제의 뿌리는 치,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은 나에 대한 어리석음인 치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입니다. 생명이 생기는 순간,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이 아치. 나에 대한 어리석음이 생겨납니다. 무아인데 형상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것을 나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끝도 없이 탐욕과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욕심이 탐이며, 정신적인 욕심이 진입니다. 어리석음을 분류하면 물질적인 내용과 정신적인 내용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물질적인 내용의 탐욕은 탐이고 정신적인 내용에 대한 탐은 진입니다. 그래서 의지에 의하여 생기는 죄가 치암이며 진에이며 탐애입니다. 안, 이, 비, 설, 신, 의의 이 여섯 가지 중에서 설신의가 죄를 짓습니다. 나머지 세 개 안, 이, 비를  한 번 보세요. 눈은 봅니다. 눈은 보기만 하고 귀는 듣기만 하고 코는 냄새를 맡기도 하고 숨을 쉬면서 내놓기도 하고 숨을 통하여 바깥 것이 안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는데 있어 혹은 나를 깨끗하게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로 쓰이는 것이 숨인 것입니다. 숨은 나와 대상을 연결해 주는 가교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쉬는 숨이 우주 끝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또 숨을 통하여 우주에 있는 것을 내 속으로 다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안팎이 공감하는 숨을 통해서 내 마음에 일어나는 자비가 우주에 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할 때 호흡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은 보기만 하고 귀는 듣기만 하고 코는 주고받고를 합니다. 혀와 몸과 의지는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코인 숨을 잘하면 부처가 될 수 있고 설신의를 잘못 쓰면 지옥에 갑니다. 몸뚱이도 살생하지 않고 잘만 쓰면 얼마든지 자비를 베풀 수가 있습니다. 이 손으로 도둑질 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또 싸움을 하지 않으면 좋은 행위를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많은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바르게 잘만 쓰면 엄청난 복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바르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부처지만 내 생각이 바르지 못하면 내가 쓰는 모든 것이 지옥일 뿐입니다. 그래서 숨으로 출발을 해서 숨이 뿌리가 되어 뜻과 입과 몸뚱이를 잘 쓰면 그냥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살생중죄금일참회, 망어중죄금일참회, 탐애중죄금일참회를 한번 생각하면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잘 하면 십만리를 갑니다. 팔사를 없애면 팔천 리를 갑니다. 팔정도에서 정이 아닌 것이 사입니다. 사는 바르지 못한 삿된 것입니다.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잘하면 팔천 리를 가서 결국 십만 팔천 리를 가게 되어 극락에 가는 것입니다. 십선을 행하며 팔정도를 행하는 것이 부처되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 방법은 팔정도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견, 바르게 본다는 것은 모든 것의 결론입니다. 정견만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견만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데 정견이 되기 위해서 일곱 가지를 행해야 합니다. 정사, 바르게 한 번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바르지 못한 생각은 부정사유로 삿된 사유입니다. 의도하지도 않는 무작위로 일어나는 생각이 결국 우리의 업을 만들어 냅니다. 생각이 바른 데서 정어, 바른 말이 나옵니다. 바른 말이 되면 정업, 바른 행위가 따라 됩니다. 바른 행위가 이어지면 정명, 바른 삶이 됩니다. 바른 삶은 바른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대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정사에서 정명까지 가고 어떤 경우는 부정사유에서 삿된 하루를 살게 됩니다. 60 - 70% 정도는 적당히 괜찮게 살지만 30 - 40% 정도는 욕심도 부리고 다른 사람을 상하게도 하고 해치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삽니다. 평생을 산다고 해도 우리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삶의 모든 것을 한 번 되돌아보세요. 내 점수와 비슷하게 살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른 쪽으로 나아가 한 단계 더 높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정정진을 해야 합니다. 바른 정진을 하자는 것입니다. 염불하는 것도 정진에 속할 것이고 기도하는 것도 정진에 속할 것이고 참선하는 것도 경전 보는 것도 다 정진에 속합니다. 고스톱 치는 것이나 게임하는 것도 정진이긴 하지만 정정진은 아닙니다. 고스톱 쳐서 부처 됐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지요. 바르게 정진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정진은 정념과 정정으로 바르게 관조하면서 집중하는 것입니다. 일 년이나 이년이나 짧은 기간 동안 목적을 하나 설정해놓고 내 삶을 거기에 집중시켜 보세요. 이것을 통해 정진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을 발견합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난 전대미문의 뛰어난 과학자입니다. 명문가에 태어난 아르키메데스는 어릴 때 로마로 유학을 갑니다. 20세에 유학을 마치고 시칠리아로 돌아와 왕에게 인사를 갑니다. 마침 그 때 왕은 전쟁을 해서 영토를 많이 넓혔습니다. 전쟁승리 기념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금세공에게 100냥 금을 주면서 왕관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금세공이 금을 떼먹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금을 빼돌렸다는 소문이 왕의 귀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왕관의 무게는 왕이 준 금 100냥의 무게와 같았습니다. 왕관을 녹여 보면 바로 알수 있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이 왕관을 도저히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아르키메데스가 유학 갔다가 돌아 와서 왕에게 인사를 하러 갑니다. 히에론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이 왕관에 불순물을 섞었다고 하는데 이 문제 풀라는 숙제를 줍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잠도 자지 않고 6개월 동안 이 문제에 매달립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서 목욕을 갔습니다. 아침에 일찍 갔더니 마침 목욕탕 탕에 물을 가득 담아 놓았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탕에 들어가는데 물이 넘칩니다. 그 순간 십만 볼트가 머리를 관통하여 흘렀습니다. 왕관을 부수지 않고도 내용물을 알 수 있는 힌트가 스쳐간 것입니다. 발가벗은 몸으로 왕에게 뛰어갑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달려 가면서 ‘유레카, 유레카’를 알았다를 외쳤습니다. 아직도 아르키메데스가 왕에게로 달려갔던 그 길은 아직까지 유레카 길로 남아있습니다. 흘러넘치는 물은 부피의 크기에 따라 결정됩니다. 크기가 가로 세로 높이가 10 cm 인 금을 넣든 철을 넣든 흘러넘치는 물의 양은 같습니다. 금과 철의 부피는 같더라도 무게는 다릅니다. 이 사건으로 아르키메데스는 부력을 발견한 것입니다. 왕관을 확인해보니 금이 아닌 다른 불순물을 섞은 것입니다. 금세공은 재산을 몰수 당하고 유배를 갑니다. 

바로 이런 것이 정진입니다. 우리는 이 생에서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됩니다. 기회를 가지지 못하면 이 삶은 본전치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집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이 생에서 최고의 삶을 사는데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정진하는 내용이 정념이고 정정입니다. 정념은 위빠사나이며 지혜이며 깨어있는 것입니다. 정정은 사마타이며 바르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혜롭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어느 생에서든지 내 삶을 용수철같이 튀어 오르게 하여 부처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육조단경 공부를 통해서 이러한 기회를 갖기 위해서  매일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하루의 삶이 바로 연습장입니다. 연습을 하다보면 잘 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고 계기도 만들어집니다.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않고는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의 습성, 능력. 성품이 커서도 그대로입니다. 달라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산을 무너뜨리고 깨뜨리는 것입니다. 바로 산을 무너뜨리고 깨뜨리는 방법이 정념과 정정입니다. 지혜롭게 집중하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해야 될 집중입니다. 목적지는 정해 놓으면 가는 방향만 바로 잡으면 언젠가는 목적지까지 갑니다.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르게 잡아 목적지까지 가는 삶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로 향하여 나아가는 매일 우리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삶을 떠나서 부처는 없습니다. 

육문을 보겠습니다. 대중은 정신 차리고 들어라, 세상 사람의 자기 색신은 성이요. 바로 이 몸뚱이는 성이요, 눈, 귀, 코, 혀, 몸은 곧 성의 문이다. 성에 가면 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동, 서, 남, 북에 있습니다. 그 문을 통해 들어가면 성 안이고, 바깥으로 나오면 성 밖입니다. 바로 그 문이 성의 안과 밖을 경계지어주는 것과 같이 이 몸뚱이가 성이라면 눈, 귀, 코, 혀, 몸은 성의 문이니 밖으로 다섯 문이 있고 안으로 뜻의 문이 있습니다. 안, 이, 비, 설, 신이라는 바깥으로, 외부로 향하는 다섯 개의 문이 있고 이 안에 이것을 관리하는 뜻의 문이 들어 있습니다. 눈으로 한 번 보세요. 앞쪽에 있는 소나무 사진이 눈을 통하여 들어오는 순간 안식이 생깁니다. 눈이 이 사진을 보는 순간은 어느 누구나 다 똑같이 봅니다. 그런데 보고 난 다음에 의식이 일어나는 것은 다 다르게 생각합니다. 저 사진을 보고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 일어나요. 초등학교 때 소풍갔던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고, 등산 갔을 때 모습이 생각나기도 하듯이 다 다릅니다. 눈으로 들어오는 것, 귀로, 코로, 혀로, 몸뚱이로 들어오는 것을 관장하고 있는 의지는 다 다릅니다. 바깥으로 이 몸뚱이에는 다섯 개의 문이 붙어있고 안에는 관장하는 하나의 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총 육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근입니다.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체는 여섯 가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물체는 육근을 갖고 있는데 가장 발달된 생명체는 육근을 다 갖고 있고 덜 발달된 것은 육근 중에 서 너 개를 갖고 있습니다. 나무는 의와 신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몸뚱이는 더 발달되어 있어 여섯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곧 땅이요. 성품은 곧 왕이니 성품이 있으면 왕이 있고 성품이 가면 왕은 없느니라. 결국 성품이 있을 때는 왕이 있는 것이고 성품이 가고 나면 왕이 없습니다. 성품이 있으면 몸과 마음이 있고 성품이 가면 몸과 마음도 무너지게 됩니다.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다. 그러니까 성품을 깨치면 부처고 성품이 미혹하면 중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은 성품을 보자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오염되어 있는 그 산을 무너뜨리고 보물을 꺼내보자는 것입니다. 내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견성입니다. 보면 알게 되고 알면 다 해결됩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다릅니다. 확실하게 봐 버리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어요. 그런데 보지 않고는 아무리 믿어라 해도 의심이 남아 있습니다. 교인들이 하느님을 100% 믿으면 전부다 천국에 갑니다. 못 가는 이유는 100% 못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보는 것만큼 만 믿습니다. 부활을 믿는 다는 것은 자기가 부활을 알아야 믿을 수가 있습니다. 100%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 때 생기는 믿음입니다. 바로 그 100%의 믿음이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육문상방자금광이란 여섯 개의 문에서 금색 광명이 빛나는 것입니다. 자비는 이 몸뚱이의 여섯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재하방, 아미타불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추구하는 극락인 세계가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착득심두절막망,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말 것이니, 착득심두. 마음에, 득, 얻어. 마음에 간직하여, 절막망, 잊지 말 것이니. 염도념궁무념처, 생각하고, 염도념궁, 생각하고 생각해서 끝없이 생각해서, 무념처, 생각 없는 곳에 이르면, 바로 무념에 이르면 육문상방자금광, 이 몸뚱이에서 끝도 없는 금색 광명이 흘러나옵니다. 끝도 없는 지혜의 자비가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이 금색 광명이 자비이고 지혜입니다. 결국은 100%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이것입니다. 육문에서 항상 금색 광명이, 지혜와 자비가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무념에 이르러 진리를 봤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한테 흘러나오는 것이 자비뿐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자비는 관음이요. 희사는 세지이며. 세지는 대세지보살입니다. 천수경에 관세음보살 명호가 열 가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소리를 듣고 세상에 자비를 베푸는 보살입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조해서 이 세상을 꿰뚫어 보는 보살입니다. 지혜의 상징입니다. 지혜와 자비가 바로  관자재보살과 관세음보살입니다. 대세지보살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희사, 끝도 없이 베풀어 주는 보살입니다. 모두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깨끗함, 본질은 석가입니다. 미래에 나타날 깨끗함을 실천하는 평등과 곧음은 미륵보살입니다. 인상과 아상, 내가 맞니, 네가 맞니, 내가 옳니, 네가 옳니, 끝도 없는 인상과 아상은 수미산입니다. 나의 집착, 고집, 내가 맞고, 네가 맞고 하는 것이 수미산과 같은 것이며 우리가 일으키는 삿된 마음은 바다입니다. 삿된 마음은 바다만큼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번뇌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랑이고 독한 마음은 악한 용이고 괴로움은 고기와 자라고 허망함은 귀신이고 삼독은 지옥이며 어리석음은 짐승입니다. 바로 우리 몸에 일어나는 전생의 습에 의해서, 업에 의해서 생긴 탐, 진, 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깨뜨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뜨리면 청정이 나타나며 계, 정, 혜가 되는 것입니다. 계, 정, 혜가 없어지면 탐, 진, 치가 생겨나는 것이고, 계, 정, 혜가 생기면 탐, 진, 치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손의 앞면과 뒷면과 같은 것입니다. 계, 정, 혜를 떠나서 탐, 진, 치가 있고 탐, 진, 치를 떠나서 계, 정, 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탐, 진, 치도 계, 정, 혜가 되는 것이고 아무리 계, 정, 혜를 해도 이것을 잘못쓰면 탐, 진, 치가 되는 것입니다. 십선이 곧 천당입니다. 내 것이 맞다, 네가 옳다, 내 것이 맞고 너는 틀리고, 나만 옳고 하는 아상과 인상이 없으면 그대로 수미산은 저절로 없어지고 삿된 마음이 없으면 바다는 말라 버립니다. 내 속에서 삿된 마음이 없어지면 바닷물은 마르고 번뇌가 없으면 파랑은 없어지고 독이 제거되면 고기와 용은 없어지게 됩니다. 탐, 진, 치만 없애 버리면 계, 정, 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탐, 진, 치도 있고 계, 정, 혜도 있어 손의 양면과 같으며, 칼의 양날과 같습니다. 그래서 집중을 하다 보면 지혜, 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각을 잘못하면 탐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규칙적인 생활이 바로 계율입니다. 계입니다. 정신적인 것에 대한 탐이 화내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다스리는 것은 정입니다. 바르게 되면 화내는 마음은 사라집니다. 지혜로우면 치, 어리석음이 없어져요. 근본적인 치, 어리석음은 무아와 무명을 알아 버리면 해결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본질적으로 치, 어리석음으로 돌아가고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것이 바로 치인 무명입니다. 무명을 제대로 아는 것이 명입니다. 바로 연기입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 깨끗함입니다. 깨끗함이란 무명과 무상을 아는 것입니다. 알면 깨끗해져요. 모르면 더러워요. 그래서 깨끗함과 아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명, 밝다, 안다는 것이 연기고 그것이 견성으로 본래 성품을 보니까 깨끗하더라는 것입니다. 

내외명철로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가자는 것입니다. 깨달은 성품의 부처가 큰 지혜를 놓아서 그 광명이 비추어 여섯 문이 청정하게 되고 이 성품을 바르게 보면 육근의 여섯 문이 청정하게 됩니다. 욕계의 여섯 하늘들을 비추어 부수고 아래로 비추어 삼독을 제거하면 지옥이 일시에 사라지고 안팎으로 사무쳐 밝으면 서쪽 나라와 다르지 않다. 안팎으로, 안과 육근과 육경을 사무쳐 밝으면, 두 개가 사무쳐 밝으면 그것이 극락입니다. 서쪽나라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수행을 닦지 아니하고 어찌 극락에, 피안의 세계에 이르겠는가. 수행을 함으로써 극락에 다다를 수 있고 깨끗함을 정득할 수 있고 부처를 볼 수 있고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수행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정념과 정정을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108배 하는 것은 이 몸뚱이로 공부하기 좋은 조건으로 만드는 겁니다, 참회하고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절을 한다는 것은 내 자신을 끝도 없이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지었던 업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절은 하면 할 수록 내 몸이 가벼워집니다. 내 생각이 깨끗한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전생이 무엇인가? 오늘은 무엇을 할까? 어제 내가 했던 것을 되돌아봅니다. 그때 화내는 마음이 안 일어나야 하는데 왜 그런 마음이 일어났는가? 한 번 살펴봅니다. 반성하고 참회하고 되돌아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경전 한 구절을 독송합니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을 하면 그 수행의 힘이, 그 공덕이 하루 종일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내 마음에 감응하고 반응하는 대상은 거기에 움직여 일어납니다. 공부 잘하면 그곳이 명당이 된다고 했습니다. 공부 못하면 아무리 명당이라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곳이 됩니다. 명당이라고 하는 것도 수행하고 내 마음이 깨끗함으로써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깨끗하면 어디에 가더라도 그곳이 명당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은 부처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부처면 내일은 그냥 부처 되는 것이며, 그 다음 날도 부처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에 목숨을 걸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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