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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23강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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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641회 작성일 22-05-24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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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강 수행 


우리가 감기에 걸렸다고 하면 병원에 가서 진료를 하고 처방전을 갖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서 먹고 낫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처방전이 있더라도 처방전만 들고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육조단경을 공부함으로써 처방전은 받았습니다. 처방전에 주어진 그 약을 사먹는 것이 수행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 공부만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제 21장 수행에 대해서입니다. 선지식들아 만약 수행하기를 바란다면 세속에서도 가능한 것이니. 절에 있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되는 것이 출가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세속에 있으면서도 부처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절에 있다고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절에 있든, 세속에 있든 공부할 자세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으면 서쪽 나라 사람의 마음이 악함과 같고, 세속에 있으면서도 수행하면 동쪽 나라 사람이 착함을 닦는 것과 같다. 절에 있어도 공부하지 않고 닦지 않는 것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갈 수 없는 것이고 지옥에 있더라도, 동쪽 나라에 있더라도 수행을 하면 극락에 가는 거와 같이 서방정토에 갈 수 있으며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바라건데, 자기 스스로 깨끗함을 닦아라, 그러면 이것이 곧 서쪽 나라이니라. 결국은 서쪽 나라는 내 스스로 깨끗함을 추구함으로써 그것이 서쪽 나라라는 것입니다. 죽어서 극락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으면서 수행하면 바로 거기가 극락이다 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의 중요한 내용은 스스로의 수행과 공부를 통해서 자성불을 닦자하는 것입니다. 자성불을 깨치자 입니다. 

위사군이 또 물었다. 화상이시여, 세속에 있으면서는 어떻게 닦습니까? 원하오니 가르쳐주십시오. 우리가 출가수행을 해서는 그 법도대로 따라서 공부하면 되지만 세속에 있으면 어떻게 닦아야 되겠습니까? 세속에 있으면서는 닦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육조혜능에게 묻는 겁니다. 혜능이 무상송으로 설명을 해줍니다.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 통달하고 보니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으며 오직 돈교의 법만을 전하며 세상에 나와 삿된 가르침을 쳐부수도다. 세속에 있으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설법도 통달해야 되고 마음도 통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공부해서 마음을 통달하느냐는 이제까지 배웠던 부처님의 법인 교리가 처방전이며 이 생에서 처방전이 없다면 부처가 될 방법이 없습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처방전, 이것은 부처님의 법문, 설법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친 연기는 모든 것에 적용이 됩니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했고 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같은 불변의 법칙 중에서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 사이에 어떤 법칙이 존재하는가? 그래서 나와 이 대상과 살아 있는, 존재하고 있는 것에는 무생물까지도 다 포함될 수 있습니다. 생물과 무생물까지 다 포함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 사이에는 연기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법칙을 깨치신 것입니다. 연기의 법칙은 나와 대상과의 관계법칙입니다. 나에게 있는 인식체는  안, 이, 비, 설, 신, 의의 육근이며 이에 대응하는 대상은 색, 성, 향, 미, 촉, 법의 육경입니다.  눈이 있어 형상을 볼 수 있고 귀가 있어 소리를 듣고 코가 있어 냄새를 맡고 혀가 있어 맛을 보고 몸뚱이가 있어 감촉을 느끼고 의, 뜻이 있어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육근과 육경이 부딪히면 식이 생깁니다. 눈으로 보면 안식, 보고 난 다음에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의식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6개 식이 생깁니다. 육근, 육경, 육식의 이 18개 변수들이 관계 속에서 어떤 법칙을 이루는가? 그것이 바로 연기의 법칙입니다. 바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연기의 법칙입니다. 바로 설법은 이 연기의 법칙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설법을 하는 것은 자기의 소리는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법을 설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우리의 마음의 심, 육근의 의, 육식의 식이 의식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세 가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의지를 갖고 있어요. 뭔가를 결정하고, 스스로 뭔가를 향하여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의지가 있고 그다음 어떤 상황을 봄으로써 일어나는 하나의 생각입니다. 이 생각이 식입니다. 일어나는 식의 총 집합체가 심입니다. 마음은 일어날 수 있는 식이 전부다 모여 있는 총 집합체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심, 의, 식인 것입니다. 설법과 심, 의, 식 이것을 잘 아는 것이 세속에서도 공부해야 될 내용인 것입니다. 공부해야 될 내용은 세속이나 출가나 똑같습니다. 세속에 있다 해서 출가했다고 해서 공부하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공부를 해야 되는데 세속에 있으면 공부하기가 힘이 드는 것이고 출가했으면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수월한 것입니다.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으며 오직 바로 깨치는 돈교의 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삿된 가르침들을 쳐부수도다. 


이 세상에는 바른 것도 있고 삿된 것도 있고 외도도 있어 다양합니다. 결국 바른 것이 삿된 가르침을 쳐부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해야 될 바른 것은 부처님의 법과 우리의 마음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처방전이고 이 처방전을 갖고 제대로 수행을 하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아무리 좋은 처방전을 갖고 있더라도 내 마음을 닦지 않으면 변화되는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이 처방전에 따라 마음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을 공부하면서 내 마음공부에 적용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처방전을 호주머니에서 썩히는 것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처방전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법에는 돈과 점이 없습니다. 미혹함과 깨침에 더디고 빠름이 있나니, 우리의 업에 따라 더딤과 빠름이 있는 것이지. 법 자체에는 돈과 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하는 친구도 있고 밤샘이 했는데도 공부 못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깨침에 더딤과 빠름은 우리의 업에 따라 달라집니다. 머리가 좋은 것은 전생에 잘 닦았기 때문에 좋은 머리를 타고 나서 공부가 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생에 공부한 이력이 없으면 이생에서 공부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공부가 쉽지 않다고 공부를 안 하면 내생에도 똑같이 어렵습니다. 우리는 공부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겨내고 해야 됩니다. 지금 공부가 수월한 사람은 전생에 공부를 좀 했던 것입니다. 공부하기 힘든 사람은 전생에 공부한 것이 없으며 다음 생에도 똑같이 공부하기가 어렵운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5%나 10% 밖에 능력이 안되지만 한 달만 지나면 다 알아듣게 됩니다. 묘한 것은 아무리 어렵다 싶어도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세 번 듣고, 네 법 듣고 지속적으로, 연속적으로 들으면 공부에 대한 체계가 알아지게 됩니다. 그다음부터 공부가 쉬워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 듣다보니까 힘들어서 결석하고 또 억지로 왔다가 또 결석합니다. 공부는 빠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했을 때 익어지는 것입니다. 했다, 빠졌다하면 공부가 안 익습니다. 

돈교의 법을 배우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하지 않으리라. 우리가 이 교리를, 이 부처님의 법을 통해서 진리를 접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내 것으로 만드는 순간이 돈교가 됩니다. 1년을 공부하는 동안 계속 알 것 같다가 어느 순간 탁 터져 알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돈교가 일어납니다. 사람에 따라 더디고 빠름이 있는 것입니다. 육조혜능은 듣자마자 깨쳐 돈교가 됩니다. 이것은 전생에 충분히 공부가 익어 있어 듣는 순간 깨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우리는 계속 듣고 생각하고 공부를 익혀 가다 보면 어느 순간 탁 터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업에 따라 더딤과 빠름이 있는 것이지 법에는 돈과 점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법이라도 깨치는 순간 돈법이 되는 것입니다. 모를 때는 만화책 보는 거나 경전 보는 거나 똑같은 것입니다. 알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힘이 들더라도 공부를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한 말씀이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해라.’입니다. 우리의 삶에 왕도는 없습니다.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는 것만이  삶의 정답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은 끝에 가면 빛을 발하게 되고 그러지 못한 삶은 순간적으로 괜찮다 싶어도 결국은 그냥 꺼져버려요. 

설명하면 일만 가지이나 그 낱낱을 합하면 다시 하나로 돌아오나니 번뇌의 어두운 집 속에서 항상 지혜의 해가 떠오르게 하라. 설명을 하면 일만 가지나 그 낱낱을 합하면 전부다 하나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원리를 알면 전부다 해결됩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해답보고 문제를 푸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 때 뿐입니다. 시간이 걸려도 낑낑거려 가면서 문제를 열심히 한 번 풀어보세요. 문제 푸는 원리, 방법을 고민해서 답을 얻었다고 하면 그와 같은 형태의 어떤 문제라도 다 풀 수 있어요. 원리를 알면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근본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내가 알아봐야 되겠다 싶어서 열심히 했던 부분들은 시간이 흘러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로 돌아온다는 것은 원리를 아는 겁니다. 모든 것은 원리를 알면 비록 일만 가지의 가지가 뻗어지더라도 전부다 알 수 있습니다. 수학문제 푸는 것도, 외우는 것도 지혜와 관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서로가 연관만 시킬 수 있으면 모든 공부는 화두 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단지 내가 어떤 한 목적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할 때는 그 목적을 위해서 한 것이지만 응용을 잘하면 참선하면서 드는 화두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리를 알면 지혜로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는 관조를 통해서 지혜로워져요. 그러니까 사물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지혜가 터득되지 않습니다. 지혜로우려면 사물에 대한 깊이 그 원리를 관조해야 됩니다. 

삿됨은 번뇌를 인연하여 오고 바름이 오면 번뇌가 없어지나니. 삿됨과 바름을 다 버리면 깨끗하여 남음 없음에 이르도다. 우리는 삿된 것과 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 옳고 바르게 살아야 되고 좀 더 궁극적으로는 바른 것까지, 옳은 것까지 다 버리는 것입니다. 본래 성품은 무기입니다. 선과 악의 개념으로 볼 때는 불선보다는 선이 좋지만.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좀 더 본질적인 개념은 이 상대를 넘어선 것입니다. 상대를 다 포용하는 무기인 것입니다. 본래 성품은 선도, 악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하여 남음 없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본래 성품에 이르고 보면 삿된 것도, 바른 것도 다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삿됨은 번뇌를 인연하여 오고, 번뇌가 없어지면 바른 것이 스스로 드러나게 된다. 번뇌망상,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아집들, 이런 것이 삿됨을 유발시키는 것이고, 우리는 옳고 그름을 떠난 본래 성품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진, 선, 미를 뽑습니다. 미, 아름다운 것은 마지막이며, 그 다음은 선, 선한 것입니다. 선보다 더 위에는 진으로 진리입니다. 진은 바로 본래 성품인 깨끗함으로 선과 악을 떠난 자리입니다. 세상 살 때는 선하면 좋다고 하지만 당당하게 진리의 세계를 걸어가는 것은 선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의 정과 선악이 없는 경지이며 우리가 다다라야 될 경지가 됩니다. 보리는 본래 깨끗하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곧 망상입니다. 본래 성품은 청정이며, 물들기 전의 것이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합니다. 보리는 본래 깨끗하나,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물들기 전의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체험해봐야 깨끗한지 어떤 색깔을 갖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마음은 전부다 망상으로 본래 성품을 보고, 본래 성품에 의거해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업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끄집어 올려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 칠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으키는 마음은 전부다 망상 밖에 없는 것입니다. 

깨끗한 성품이 망념 가운데 있으니 오직 바르기만 하면 세 가지의 장애를 없애도다. 비록 망상 가운데 있지만 바르게 나아가기만 하면 탐 진 치 세 가지 장애를 없앨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장애는 탐, 진, 치에다 견, 의, 만을 더 하여 여섯 가지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 내가 어떤 성품을 많이 갖고 있는가? 자기 자신의 허물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르기만 하면 탐, 진, 치가 없어지고 계, 정, 혜가 생기게 됩니다. 결국은 탐, 진, 치를 없애는 것은 계, 정, 혜로 없앨 수 있고 바르기만 하면 이 세 가지 장애를 모두 없앨 수가 있습니다. 만약 세간에서 도를 닦더라도, 모든 것이 다 방해롭지 않으니, 세간에서도 충분히 도를 닦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도록 하면 도와 더불어 서로 합하도다. 항상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일기를 쓰는 것은 자기 자신의 하루의 일상의 행위와 자기 자신의 생각을 나름대로 기록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허물을 한 번 돌아볼 수가 있습니다. 매일 반성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참회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더 이상 발전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허물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편하게 한 시간 걸으면서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을 잘 되돌아보며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내일 죽는다면. 오늘같이 살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삶이 하루 밖에 남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분명히 우리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진지할 것입니다. 내가 내일 죽는다고 하면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마음으로 오늘을 산다면 우리는 분명히 잘 살 수 있어요. 허물을 드러내면 내 삶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내 생각이 바뀌기 시작해요. 허물을 드러내지 않으면 아집에 갇혀 아만에 갇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반성하고 허물을 끊임없이 되돌아봄으로써 발전하고 변화하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형상이 있는 것에는 스스로 도가 있거늘 도를 떠나 따로 도를 찾는지라, 도를 찾아도 도를 찾지 못하나니 필경에는 도리어 고뇌하도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현상에 도가 있는 것이지 이것을 떠나서는 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를 추구하기 위해 출가를 해서 어떤 행위를 해야만 도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딪히는 모든 현상 속에서 항상 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못 느끼고 모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뿐입니다. 본래의 마음을, 본래 성품을 보게 되면 이것을 반추해서 밖으로 드러나 있는 모든 것을 도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에 도가 들어있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는 법성 즉 불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나무의 성품을 갖고 있고 개는 개의 성품을 갖고 있고 사람은 사람의 성품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성품을 알고보니 하나에서 나와 모두 같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매일 부딪히는 경계마다 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한 번 잘 쓰면 되는 것입니다. 도가 어렵다고 생각하면 평생을 추구해도 다다를 수가 없습니다. 도가 뭔지를 모르니까 목적지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도가 뭔지를 알면 처방전을 갖고 있으면 도에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은 세수 하다가 깨칩니다. 형상이 있는 것에는 도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에, 경계가 일어나는 모든 것에 도가 있는 것을 잘 볼 수만 있으면 도가 있는데 우리는 보지 못하니까 도를 보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행동의 바름이 곧 도이다. 내 생각이 바르면 거기에서부터 바른 말이 나오고 바른 행위가 나와서 축적되어 바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만약 바른 마음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를 보지 못하느니라. 내 마음속에 바른 것이 없으면, 공부를 하면서 바르지 못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마음공부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허물을 볼 수 있어야 되고 허물을 본다는 것은 내 스스로가 바르고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맞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우리의 삶은 변화가 없습니다. 

지금이나 초등학교 때 생각이나 크게 변화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크게 변화된 것이 없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때 마음이나 지금 마음이나 갈고 닦지 않았으면 똑같을 뿐입니다. 언제 마음공부를 했습니까? 그러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이 육조단경을 계기로 마음공부를 해야 됩니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행동의 바름이 곧 도이니, 스스로에게 만약 바른 마음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바른 생각이 중요하고 바른 행위가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탐, 진, 치, 만, 의, 견 중에 어느 것이 많은지 생각해보세요. 1탐욕이 많은 사람, 2화냄이 많은 사람, 3어리석은 사람, 4혼자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아만, 자만이 많은 사람, 5의심이 많은 사람, 6삿되 견해, 생각이 바르지 못한 사람.  1, 2, 3, 4, 5, 6 번호를 매겨보면 자신에게 무엇이 많은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반대의 마음을 채워나가야 됩니다. 이것들을 한꺼번에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경전공부를 한다 하면 관조를 통해 지혜가 생겨 치가 없어집니다. 관조를 하면 치가 없어지고 의심하는 삿된 견해도 없어집니다. 공부라는 것은 한 가지를 잘하면 연계되어 다 잘할 수 있습니다. 치, 어리석음만 잘 다스리면 탐, 진은 그냥 없어집니다. 탐, 진이 없어져버리면 마음도 없어져 버립니다. 서로 연관되서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삶을 한 번 되돌아보면 나름대로 내가 전생에 무엇을 가장 많이 고집 부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고는 공부의 진전이 없습니다. 판단이 정확해야 그 판단에 따라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해서 바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시험을 칩니다. 채점을 해보면 70점 맞고 틀린 것은 30%입니다. 왜 틀렸는가? 무엇을 생각 못했는가? 이렇게 함으로써 틀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은 여기에 주어져 있는 이런 문제을 잘 하기 위해서는 정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70점인데도 시험 안치면 다 아는 것 같이 공부를 안합니다. 절에 10년, 20년 다니는 분들 불교를 다 아는 척 합니다. 실제 물어보면 잘 모릅니다. 불교용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도 없으면서 혼자 다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못 배웠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만약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나니 만약 세간의 잘못을 보면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 도리어 허물이 된다.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든, 내가 공부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공부를 잘 못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 따라 가야 되는 것 같고 다른 사람 안 따라가면 자신이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따라 가는 것은 세간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아야 됩니다.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일어나는 시시비비, 잘, 잘못을 따지고 할 겨를이 없습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관세음보살하고 기도 한번 하고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이처럼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에 일어나는 어리석음을 보지 않는다. 세간의 어리석음을 본다는 것은 시시비비를 따지는 겁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고 득이 되는 것을 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간에 살지만 도를 닦으면 그런 부분에 대해서 초연해 질 수 있고 포용할 수가 있습니다. 세간에 일어나는 일이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내 잘못입니다.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해서 나라가 이런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되어 있어서 나라가 이런 것입니다. 공부 안하면 책임은 다른 데 있고 공부하면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됩니다. 

교육이 위대한 것은 한 사람이 바뀌어도 세상은 변화됩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제도를 바꾸고 제도 속에서 뭔가 이루어지면 대단하게 바뀐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바뀌지 않는 한 어떤 제도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소득 삼만 불시대나 이전 만 불시대일 때나 뭐가 달라졌어요? 우리가 바뀌는 것은 교육에 의해서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한 사람이라도 바꿀 수 있는 것은 교육 밖에 없습니다. 교육을 통해서 공부를 통해서 한 사람이라도 바뀌면 그것이 결국은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정치가 세상을 바꾼다고 큰 소리 치지만 진정으로 한 사람이라도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남의 잘못은 나의 죄과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 나하고 무관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남의 잘못이 나의 잘못이고 나의 잘못은 스스로 죄가 있음이니, 전부다 잘못된 것은 원인이 나한테 있으니 오로지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번뇌를 쳐부수어 버리도다. 나에게서 일어나는 번뇌를 쳐부수어버리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말라. 이는 곧 보리가 나타남이로다. 의심을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곧 보리가 나타납니다. 의문이 없는 한 보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포교하자면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됩니다. 공부하자 하면 공부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노래방에 가서 놀자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나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공부하는 것이 필요 없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 같이 공부해보자 하면 누가 공부해요? 이런 세상에는 아무리 방편을 써도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때는 방편보다 직공법이 더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공부하자고 해서 공부하는 사람만 공부하는 것입니다. 한 명이라도 공부하다 보면 두 명되고, 두 명이 네 명되는 것입니다. 공부에 대한 연민의 생각이 일어나면 데리고 올 사람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전도했습니까? 진정으로 내가 알면 나만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 됩니다. 전도를 해야 됩니다. 법을 전하는 것보다 더 큰 복과 덕은 없습니다. 이런 좋은 가르침을, 진리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나한테 있으면 언젠가는 데리고 올 사람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마음이 안 생기니까 데리고 올 사람이 눈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딱 들어보세요. 세상에 전부다 데리고 올 사람입니다. 

법은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을 벗어나나니, 세간을 떠나지 말며 밖에서 출세간의 법을 구하지 말라. 세간에 살면서 원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간에 있는 것이지 출세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간에 법이 있는데 이 세간을 떠나서 어떻게 법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바로 보기만 하면 우리 주의는 모두 도입니다. 오로지 그 마음이 익어 가면 모두 도로 보이는데 그 생각이 없으면 전혀 도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슬프다고 해도 그냥 슬프지 얼마나 슬픈지 느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느껴본 만큼 슬퍼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느끼는 것만큼 내 것입니다. 천 년 전이나 만 년 후나 세상은 그냥 세상으로 있을 뿐입니다. 내가 느끼는 것만큼 내 것으로 갖고 갈 뿐입니다. 부처되면 이 세상 전부다 자기 것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고 지옥에 사는 사람은 그 지옥만 자기 것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것, 느끼는 것만큼만 내 것으로 갖고 가는 것입니다. 슬픈 것도 내가 느껴본 것만큼 슬프고, 기쁨도 내가 느껴본 만큼 기뻐요. 

삿된 견해가 세간이요. 바른 견해는 세간을 벗어남이니. 삿됨과 바름을 물리치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히 나타나도다. 도라는 것이 세간에 있는데 삿된 생각으로 다가가면 그것은 세간에 머무는 것이고 바른 견해로 다가가면 세간을 벗어난 진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삿됨과 바름을 따질 때는 따져야 하지만 궁극적인 진리의 자리에서는 바름까지도 물리쳐야 보리의 본래 성품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만 단박 깨치는 가르침이며 대승이라 이름하나니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니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깨치는 것은 가우스함수와 같다고 했습니다. 가우스함수는 0에서 1까지는 0으로 가다가 1이 되는 순간 1이 됩니다. 이렇게 탁 끊어지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되는지, 안 되는 지, 끝도 없이 가다가 어느 순간 탁 깨칩니다. 내가 깨치지 못할 때는 항상 깨치지 못한 상태로 가다가 어느 순간 이것이 탁 깨쳐집니다. 충분히 익으면 터지게 되어있습니다. 풍선을 불어보세요. 끝도 없이 불리는 풍선은 없습니다. 한참 불다 보면 견딜 만큼 견디다가 어느 순간 탁 터져요. 바로 그렇습니다. 공부라는 것도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고 끝도 없이 하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탁 터집니다. 수행에 대한 처방전을 살펴보니 집집마다 다 다릅니다. 음식점에 한 번 가보세요. 똑같은 된장찌개라도 음식점마다 다 다릅니다. 똑같은 부처님 법을 설명해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제대로 된 처방전 하나 가지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처방전을 가져야 되겠고 그 처방전대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회가 오면 만사 제치고 공부를 해야 됩니다. 따지다 보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바로 내가 마음을 먹는 순간 공부해야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공부라도 한 달만 꾸준하게 들어보세요. 그때부터는 개념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중간에 한 번 빠져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부는 연속성이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연속성입니다. 우리의 삶도 연속성의 흐름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도, 견성도 이 연속성의 법칙에 따라 가다보면 어느 순간 깨치는 것입니다. 풍선을 불다보면 탁 터지는 그 순간이 바로 돈교입니다. 더딤과 빠름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법에는 더딤과 빠름이 없습니다. 깨치기 직전까지 걸리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더딤과 빠름이 있습니다. 깨치는 순간 돈법입니다. 천년이 걸려도 깨치는 것은 깨치는 그 순간입니다. 혜능이 깨치는 그 순간이나 누군가가 천년을 공부해서 깨치는 그 순간이나 다 똑같은 순간인 것입니다. 돈법은 순간이지만 이것의 더디고 빠름은 우리의 업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업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내가 이루어 왔던 삶의 연속성에 의해 축적되는 것입니다. 나한테 축적되어 있는 것에 따라서 깨침에 대한 더딤과 빠름이 있는 것입니다. 누구는 수학 잘하고, 누구는 어학 잘하고, 누구는 과학 잘하고, 또 누구는 사회적인 것을 잘합니다. 자기가 속해 왔고 자기가 관심이 있었던 부분들에 대해서는 수월하게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생에서도 지속적으로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돈법이 되는 것입니다. 돈법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갖고 있는 수억 겁동안 쌓여있는 업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계속 한다면 목적한 것이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생에서 그래도 무엇인가 이루어보자 하는 목적을 분명하게 세우면 훨씬 더 가기가 쉽습니다. 

미혹하면 수 많은 세월이 지나나, 이생도 지나고 저 생도 지나고 수많은 세월이 지나도 언제 깨칠지 모릅니다. 바른 법 만나 좋은 인연 만나면 그 순간 깨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는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두 번 다시 오기 힘듭니다. 


다음은 같이 공부했던 어떤 분의 수행일지입니다. 

부처님과 스승님께 삼배 올립니다. 호흡관찰을 하며 수를 헤아리며 차례 반복하다보면 수 헤아리는 것을 놓아버리고 호흡이 잦아들어 고요하게 됩니다. 호흡을 관찰하며 호흡조차 점점 약해져 버리고 호흡을 멈추듯 고요해집니다. 숨을 멈추면 죽는다는 생각이 올라와서 다시 호흡을 해봅니다. 귀에 동맥혈이 뛰는 소리가 거치게 들리다가 잦아듭니다. 호흡이 고요하여 몸도 마음도 평안하여 편안함에 머물러봅니다. 이 내용은 참선하면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앞으로 가고 초점은 앞을 향해 곡선의 터널을 빠져나가듯 끝없이 달려 나갑니다.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앞으로 가고 초점이 지나간 터널 속의 벽은 고기비늘 같기도 하고 대국꽃잎 같기도 하며 반짝거리며 빛이 나기도 합니다. 초점을 따라 가다가 지루하여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참선하다가 번뇌망상 따라가다가 다시 또 화두 들다가 그 화두가 들리지 않고 일어났던 번뇌망상을 따라 갔다가 또 다시 본래 화두로 돌아오는 겁니다. 호흡이 미세하고 몸을 살펴보니 손의 감각도 없고 엉덩이의 감촉만 느껴집니다. 무엇을 해야하나? 우왕좌왕하다가 쿤달리니 각성을 위해서 차크라를 열기 위해 랑, 방, 뢍, 양. 허리가 곧게 펴지고 목부위에서 머리 위로 찌릿찌릿한 전율이 올라와서 빠져 나가버리고 시원해집니다. 바로 이 차크라를 열기 위해 수행자들이 머리를 깍는 이유입니다. 차크라는 우주하고 기운이 통하는 문을 열기 위해서입니다. 척추를 따라 전율이 자꾸 올라옵니다. 한 번 일어나니까 척추를 따라 전율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주십시오. 

저녁으로 참선을 한 시간씩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한 시간씩 하다가 몸이 조복되면 점점 늘어가려고 합니다. 

호흡을 통한 알아차림 공부를 하셨네요. 어떤 공부든 부처되는 공부는 처음도 사성제고 마지막도 사성제입니다. 들숨을 쉬며 들숨을 쉰다고 알아차리고 날숨을 쉬면서 날숨을 쉰다고 알아차리는 것은 무엇 때문에 알아차리라고 할까요? 부처되는데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알아차림은 무엇을 특징으로 할까요? 너무나 잘 알 것 같지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우주의 모든 기운이 열리는 3시부터 5시까지가 참선수행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참선과 108배 하는 것을 바꾸어서 하면 어떨까요? 스승님께 삼배합장 올립니다. 가르치심대로 몸을 잘 다스려서 참선하는 시간을 바꾸겠습니다. 어제 오늘은 마음이 행복하여 들떠있습니다. 이 행복감은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며느리가 뱃속의 아이 초음파 동영상을 찍어왔습니다. 12주가 되었는데 손가락을 빨기도 하고 탯줄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기지개를 켜기도 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고 너무 귀엽습니다. 우리 때는 이런 사진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는 수행을 해서 행복감이 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슴속에서 행복감이 마구 뻗어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침에 출근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행복하세요. 제가 오늘 너무 행복하니까 행복을 나누어 드립니다. 라고 인사를 하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왜 행복하냐고 묻기에 손주가 생겼답니다. 라고 대답을 할 수밖에요. 어머니에게도 행복을 드리는 기도를 하면서 울기도 하였습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무상한 감정이라서 이 들뜸을 갈아 앉혀야겠는데 이 행복감을 놓치고 싶지 않는 마음도 있습니다. 

어제 퇴근길에 북한에서 연평도포탄 사건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넘치던 행복감이 이 일로 얌전해졌습니다. 오늘 새벽 3시에 일어나 창문열고 이불개고 세수하고 들어와서 1시간 30분 참선하고, 차크라 명상하고 50분, 108배하고, 경 읽고 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맑고 맑은 기운으로 졸지않고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건강과 비결이 잠을 푹자는 것이어서 어느 듯 습이 되어 잠을 좋아하고 몸을 아끼다보니 감히 새벽3시에 일어나 수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는데 스승님 가르침에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듭니다. 당분감은 컨디션 관리를 잘해서 모든 에너지를 수행하는데 전념을 하려고 합니다. 하다가 나태해지고 힘들어하면 도와주십시오. 수행을 하기 전에 우주에 가득하신 불보살과 역대 선지식님께 깨달음을 달라는 기도를 먼저 하였습니다. 때로는 관세음보살님을 청하여 제 정수리위에 올려놓고 수행을 하면 가피를 입는 거 같습니다. 차크라 명상을 하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하고 있는데 이런 저의 행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여쭈어봅니다. 가부좌를 함에 있어서 한 쪽 발이 높은 구두를 너무 오래 신어서 기형이 와서 왼쪽 발을 위로 놓으면 통증이 심합니다. 왼쪽 발을 위로 올려놓았더니 통증이 심해서 통증의 변화를 알아차리며 통증이 잦아들면 호흡관찰을 하였습니다. 50분간 버티다가 결국 다리를 바꾸고 30분간 참선을 더 하였습니다. 주신 숙제를 사유하여 나름대로 답을 썼습니다. 무엇 때문에 알아차리라고 할까요? 부처되는데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는 것이며 현재만 있으니 현재도 영원하지 않으니 끝 없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며 무상과 무아를 관찰하기 위해서 알아차림을 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허상에서 집착을 놓으며 업을 짓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 스스로 전부다 답을 내보세요. 알아차림은 무엇을 특징으로 할까요? 알아차림은 지금 이 순간 변화하는 대상에 몸이나 마음이나 법 집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손주에게 무한한 축복이 있기를, 부처님의 가피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3시에 일어남을 축하드립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이몸이 멸할 때까지 수행할 수 있겠습니다. 명상을 하든 어떠한 형태든 하는 것만큼 이득은 있습니다. 업이 없어지면 몸은 그냥 좋아집니다. 전생의 업으로 굳어진 상태로 몸에 나타나 있으면 암 등의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화는 할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하면서 우주의 중심이 밖에 있는 것보다 단전에 있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깨달음의 가피는 외부의 불보살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정에 드는 순간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까지 했던 공부를 긍정하고 받아드리면서 참선 쪽으로 이동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참선은 위빠사나와 사마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명상법입니다. 

잡다하게 주워듣고 분별없이 헤매고 있었는데 점검해주시는 말씀을 들으니 답답함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우주의 중심을 단전에 두고 어제의 가르침대로 호흡관찰을 하겠습니다. 두루뭉실하지 않기 위해 여쭙습니다. 수식관을 하면서 몸에 대한 마음지킴만 계속된다면 그대로 수행하면 되는지요? 아니면 32가지 신수심법의 각 4단계에 따라 외워서 순서대로 익혀야 하는지요? 잠시 수행해보니까 이런 구체적인 방법은 처음이라서 한 가지에 머물러서 넘어가질 않습니다. 어쨌던 스승님 바른 가르침을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초발심으로 돌아가서 차곡차곡 올라가보겠습니다. 부처님 되십시요. 

희와 락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세요. 희는 깨달음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행복과 기쁨, 즐거움 등으로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수 있다. 락은 깨달음으로 오는 선정상태의 고요함과 평안함으로 구경각에 이르려면 깨달은 자가 스스로 놓아버린다. 부처님의 자비가. 몸에 대한 마음지킴만 연습하면 됩니다. 희와 락은 좀 더 생각해보시고 깨달은 자가 스스로 놓아버린다에서 무엇을 놓을까요? 이제 본인이 희와 락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 또 깨달은 자가 스스로 놓아버린다고 하는데 무엇을 놓아버린다고 하는 걸까요? 

2년 전에 A 스님께서 하시는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그동안 춤테라피 명상도 참석해보았고 만트라 명상법에 참석하였는데 그때는 수억  겁의 전생을 보았습니다. 전생에 어느 때인지 대장군이었는데 전쟁을 하며 살생을 많이 한 과보로 끝없이 동물로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았고 저의 수억 겁의 전생은 사람으로 산 행동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 난 뒤에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윤회의 고리를 끊어야 하겠다는 발심도 생겼습니다. 오늘 새벽에는 일어나서 반은 졸고 반은 앉아서 화두를 들었습니다. 졸고 있는 제 자신이 하도 한심하여 호되게 나무랐더니 잠이 확 달아났지만 어느새 몸을 못 이기고 또 졸게 됩니다. 습이 되지 않아서 몸을 조복받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 여겨집니다. 시간을 정하라고 하셨습니다. 몸에 대한 마음지킴 호흡법에서 온 우주의 맑은 기운 자비와 사랑을 우주 끝까지 내보내며 내쉬겠노라고 익히는 호흡을 하니까 행복함과 희열로 가득함이 느껴집니다. 내가 우주에 자비와 사랑을 준다는 그 마음가짐이 이렇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주신 화두를 의심하면서 매달려보겠습니다. 알듯하면서도 엄청 어렵습니다. 부처님의 자비가 충만하시기를. 

몸뚱이가 반기를 들었군요. 푸대접하면 안됩니다. 감기가 걸린 상황, 몸이 안 좋은 상황, 환자에 대한 연민과 고마운 마음은 알겠습니다. 복수가 차기 시작하면 오래 못갑니다. 의사의 소견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좋은 경험을 하셨군요. 본인의 살생과보를 인정하니 공부하기가 수월하겠습니다. 또한 과보는 전생의 일, 현생의 나의 생각이 전생의 살생의 과보도 만들고 내가 베풀어준 보시의 공덕도 만들어 냅니다. 나의 생각 속에는 지옥부터 부처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일념돈탕진, 전생의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마시고 그냥 공부하면 됩니다. 전생에 자기의 살생과보를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감사합니다. 살짝 허덕이는데 스승님 말씀에 용기가 솟습니다. 늦은 나이지만 부처님의 법안에 살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2003년도에 병이 있어서 수술을 받았고 부처님의 가피로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몸 잃고 나면 그곳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불생불멸의 법문을 말씀 해 주실 때 눈앞이 확 열리는 듯 하였습니다. 죽음이랑 몸을 바꾸는 것뿐이로구나. 문득 두려움이 사라지는 듯 느껴졌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치심대로 전생은 전생일 뿐 오직 공부할 뿐입니다. 일귀하처는 불래 불거이며 그대로 그 자리인 듯합니다. 

보살님의 아픈 부분을 얘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한한 자비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몸이 아팠기 때문에 한 생 수행 잘 하고 갈 수 있는 인연이 되었지만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아집과 짜증들을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다 버린 것 같은데 불씨만 있어도 다시 불이 붙듯, 화두 들고 공부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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