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강 단박에 닦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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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강 단박에 닦음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까 카이스트 교수가, 국회의원선거에서 누가 당선될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연결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흩어져 있는 존재나 정보를 엮어 보면 새로운 관점이 열립니다. 이런 흩어져 있는 정보를 서로 엮어 보면 이번 국회의원선거에서도 누가 당선될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에콰도르 지진의 문제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잘 활용해서 새로운 관점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보 때문에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많은 편리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의술에서도 인체에 적용하는 등 많은 부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21세기를 이끌어 갈 중요한 사상이 프랙탈이론과 DNA에 관한 연구라고 석학들이 말했습니다. 프랙탈이론에서 나비효과가 설명됩니다. 향을 하나 피웠습니다. 지금 향 연기가 피어올라갑니다. 올라가고 있는 향 연기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향이 있는 위치와 온도 등 모든 정보를 대입하면 향 연기가 올라가는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공부하러 오면서 어떤 분은 택시타고 왔고, 어떤 분은 지하철을 타고 왔고, 어떤 분은 차를 몰고 왔고, 또 어떤 분은 걸어서 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왔는데 내가 오늘 온 이 방법은 그렇게 밖에 올 수 없었다는 것이 프랙탈이론입니다. 평소에는 걸어서 왔었지만 오늘은 모임에 갔다가 지각하지 않으려고 택시를 타고 왔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렇게 올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 세상에는 일어날 일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랙탈이론입니다. 일어날 일만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정보를 엮어보면 새로운 관점이 열립니다. 불성이나 법성도 전부다 연결되어 있는 하나입니다. 전부다 연결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 상대방이나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개미집들은 거대 도시가 위성도시를 거느리고 있는 구조처럼 띄엄띄엄 있고 굴을 따라 가다보면 이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주 전체가 연결되어 있듯이 정보만 안다면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의 모든 내용이 프랙탈이론이라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랙탈이론을 좀 더 깊이 이해하면 불성이나 법성을 설명하는 것과 똑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프랙탈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다양한 그림들입니다. 곡선도 잘게 나누면 직선이 됩니다. 아무리 굽은 곡선이라도 잘게 나누면 모두 직선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캠브리지대학교 교수가 어느 날 영국의 바닷가에서 엄청나게 굴곡이 심한 해안선을 바라보면서 영국의 총 해안선 길이를 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의 길이를 구한 것이 프랙탈이론입니다. 프랙탈이론의 응용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나비효과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의 조그만 바람이 북경에서는 태풍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정보를 제대로 알고 있으면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사건까지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다 연관되어 있고 하나 속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이 단절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전부다 연관된 그 흐름을 볼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의 삶과 진리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는 다 통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교화를 행하심에 대해서 공부할 차례입니다. 육조가 돈법을 깨치고 난 다음 돈수로서 많은 제자를 접합니다. 선지식들아 너희들은 다들 이 게송을 외워 가져라. 무상송을 외워 가지면 세속에 있던 출가해 있던 간에 돈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혜능과 떨어져 있더라도 항상 혜능의 곁에 있는 것이요.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천리나 떨어져 있는 것이다. 결국 수행자로써 열심히 공부하면 아무리 떨어져 있더라도 같이 보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방에서 공부하는 것 같아도 수행하지 않고 한 쪽 귀로 듣고 흘리면 천년만년을 같이 있더라도 혜능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각각 스스로 수행하면 법을 서로 지님이 아니겠는가. 결국 수행을 떠난 공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것은 수행으로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수행해야 됩니다. 조금씩 수행을 행한다는 것이 결국은 지혜롭게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익혀가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은 그만 흩어져라. 혜능은 조계산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만약 대중 가운데 큰 의심이 있거든 조계산으로 와서 물어라. 너희를 위하여 의심을 쳐부수고 같이 부처의 성품을 보게 할 것이다. 조금의 의심이 있더라도 그냥 있지 말고 조계산으로 찾아와서 물어라는 것입니다. 대사께서는 조계산으로 돌아가서 소주와 광주, 보림사에 평생 머물렀던 것입니다.
조계산의 보림사, 소주, 광주 두 고을에서 교화하기를 40년 동안 하였다. 만약 문인을 말한다면 스님과 속인이 삼,오천 명이라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당시에 3천명의 많은 스님이 와서 물었고 속인도 5천명이 와서 육조한테 법을 물었습니다. 만약 종지를 말한다면 단경을 전수하여 이로써 의지하여 믿음을 삼게 하셨다. 이 단경으로 돈법을 설하셨고 또 돈법을 중국 천하에 전도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단경에 의지하여서 돈법을 설했습니다. 만약 단경을 얻지 못하면 곧 법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나에게 와서 법을 듣고 배우더라도 단경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법을 이어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법을 얻은 사람에게만 돈교의 법을 수행함을 권하라. 다툼은 이기고 지는 마음이니 도와는 어긋나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분별하는 마음은 결국은 도와 어긋나는 마음이니 이런 마음을 지니는 것은 도와 어긋나는 것입니다. 많은 문인과 속인과 스님들에게 이 돈법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조의 남종선이 중국 천하를 선불교로 만들어 갑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사상의 황금시대를 열어가는 준비를 육조로부터 시작하게 되고 여기서부터 약 한 300년 동안 가장 풍요로운 사상의 황금기가 이어집니다. 많은 스님이 육조로부터 법을 이어받게 됩니다. 달마로부터 이어진 법이 이조혜가, 삼조승찬, 사조도신에서 오조홍인으로 내려와서 육조혜능으로 이어지고 혜능까지는 육조라고 합니다. 그다음부터는 법을 이은 많은 스님이 다 칠조입니다. 다음 팔조에도 수십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9조, 10, 11, 12, 13, 14조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전법은 부처님부터 시작해가지고 1조 가섭, 2조 아난, 이렇게 전해져서 78대 누구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부처님부터 혜능까지만 단일 법맥이고 그 후로는 나뭇가지처럼 많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을 보면 몇 대 조상으로 하여 내가 몇 대인지 붙여서 알고 있으니까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스님들도 속가에 무슨 김씨, 무슨 파 몇 대손 하듯이 법맥으로 이어져옵니다. 법맥은 정확하게 조직입니다. 세상을 이루어 가는 두 개의 큰 줄인 가로줄과 세로줄, 실과 날에서 하나는 개인이고 또 하나는 조직입니다. 이 두 개가 잘 조화 될 때는 극락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조화롭지 못할 때는 지옥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조직이 없어도 세상이 유지되기가 어렵고 또 개인의 뛰어난 능력이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할 때도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합니다. 이 두 개가 조화로울 때 세상은 가장 밝게 빛날 수가 있습니다.
육조혜능 밑에서 약 3천명이나 되는 많은 스님이 배웠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제자로 혜능의 법을 이은 스님으로 남양혜충, 청원행사, 영가현각, 남악회양, 하택신회를 들 수 있습니다. 육조혜능의 법을 이은 스님 중에 하택신회는 실질적으로 육조혜능의 문중입니다. 육조혜능과 더불어 법을 묻은 이런 제자들 속에서 법이 이어집니다. 묘한 것은 육조혜능의 직계가 법을 이은 것이 아니라 육조혜능과 더불어 법을 논해 견성한 사람들의 법이 중국 천하를 선불교로 만들어 갑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정말 제대로 깨치고 집안이 잘 이루어졌다면 분명히 육조혜능 문중이 가장 잘 번성해서 주류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육조혜능의 문중은 육조혜능의 육조단경으로 끝나버리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앞으로 선불교를 공부하면서 개인의 능력과 조직이 갖고 있는 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육조혜능의 법을 이은 남양혜충과 같은 뛰어난 분들에 의해 중국 을 남종선의 천하로 만들어 가는 밑거름이 됩니다.
남양혜충과 관계되는 모든 기록을 다 찾아봐도 육조혜능을 찾아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은 남아있지 않는데 항상 남양혜충을 집어 넣습니다. 아마 남양혜충의 능력이나 위치가 너무나 막중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임금과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최고의 수행자이면서, 승려로써 지위를 누렸던, 혜충이었기 때문에 육조를 찾아 깨달음을 얻었다에 포함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입니다. 또 남양혜충은 당 숙종이 국사로 추존을 하여 황궁에 머물면서 숙종에게 법도 설해주고 가르침을 내려 달라고 했지만 콧방귀도 끼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황궁에서 신하들이 몇 번이나 왔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려가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남양혜충입니다. 임금은 임금대로 할 일이 있는 것이고 나는 수행자로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며 박애산에서 40년 동안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던 남양혜충입니다. 역사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삶의 자취에서 선불교를 더욱 빛나게 하는,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숨어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 9/10의 피나는 노력과 정성에 의해서 1/10이 빛나는 것입니다. 혼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겠어요? 그 사람 하나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9/10의 노력이 결국 1/10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고 그런 비율로 세상이 흘러가고 움직일 때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 되는 것입니다. 남양혜충의 박애산에서 40년 수행이 결국 선불교를 세계사상사 가장 우뚝 서게 만든 주춧돌이 된 것입니다. 이 좋은 귀감이 앞으로의 많은 선수행자들이 남양혜충과 같은 삶을 살도록 유도 합니다. 실질적으로 육조혜능의 시대를 여는 데 있어 남양혜충이 한 역할이 얼마나 큰 지 알 수가 있습니다.
청원행사와 남악회양 밑에서 많은 제자가 나옵니다. 이 뛰어난 제자들이 선불교의 천하를 만들어 갑니다. 집안이 잘 되려면 아버지 혼자서 아무리 잘해도 힘겹습니다. 아들이 잘해야 아버지를 빛나게 합니다. 조선을 연 이성계도 나라를 만들어가는 모든 일에서 실제적으로 자식들이 거의 다 했지만 초대 왕은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그 아들들이 이씨 조선을 한 나라의 주인이 되게끔 만들어 갑니다. 항상 자식이 번성해야 그 집안이 잘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밑에 제자들이 뛰어나야 됩니다. 그래야 여기에 공부하는 사람들도 모여들고 번창해 가는 것입니다. 청원행사가 광동으로 육조혜능을 찾아갔을 때, 육조가 묻습니다. 그대는 여태껏 무엇을 했던고?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을 했는가? 청원행사는 상제역불위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행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앞으로 만들어지는 선문답의 가장 초기의 형태입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부처님의 행위도 나는 행하지 않았다. 당신이 묻고 있는 그런 부분들은 나는 벌써 넘어섰다 라는 것입니다. 육조가 다시 묻기를, 너는 어느 단계에 떨어졌는고? 부처나 보살이나 깨달음의 어느 단계에 떨어졌는가? 부처의 말씀을 행하는 모든 단계를 벌써 뛰어넘은 단계라라 뜻이 대답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행사가 한 말이 부처의 말씀도 따르지 않았고 진리도 따르지 않았는데 무슨 단계를 따지겠는가? 혜능한테 거꾸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따르지 않으면서 평생을 살아온 이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단계를 따지고 있는가? 이 말에 혜능이 청원행사가 깨친 것을 인정하고 육조 밑에서 제 1수좌가 됩니다. 선방에 가면 조실이 있습니다. 깨친 스승이 조실입니다. 그 스승의 법을 이어가고 무리를 이끌어 가는 사람 중에서 최고 우두머리를 수좌라고 합니다. 육조는 청원행사를 자기가 수행하고 있는 수행처에 당장 제 1수자로 인정하고 머물게 합니다. 이 청원행사의 능력을, 깨달음의 단계를 육조는 충분히 인정하고 최고로 대우를 합니다. 어떤 스님이 청원행사한테 묻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뭐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행사가 그 스님한테 노릉의 쌀값이 얼마인고? 하고 묻습니다. 노릉은 쌀산지의 지명입니다. 경주, 대구, 부산하는 지명의 이름이 노릉인데 노릉의 쌀값이 얼마인고? 하고 거꾸로 청원행사는 그 사람한테 되물었습니다. 행사는 그 스님한테 이렇게 선문답을 던진것입니다. 이 노릉의 쌀값이 얼마인고? 여기에 맞는 답을 하면 깨친 것이 되는 것이고 답을 못하면 공부를 더 해야 되는 것입니다. 노릉의 쌀값이 얼마인고? 많은 스님들한테 묻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답이 잘 안 나옵니다. 백 년이 흐르고 난 다음에 선종이 꽃을 피우는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선종의 오종을 이룹니다.
중국의 불교는 500년 동안 교학의 불교가 완성이 됩니다. 교학의 불교가 완성 되면서 총 14종의 종파 불교가 이루어집니다. 이 선종이라고 하는 것은 그 14종 종파불교 중에 하나가 선종입니다. 선종이 중국을 불교 천하를 만들어 가면서 선종에서 오종 칠가라고 하는 새로운 종파가 만들어집니다. 선의 종지와 깨친 사람들의 근기와 능력과 규모에 따라 새로운 종파들이 만들어집니다. 선종이 오종으로 나누어집니다. 청원행사, 남악회양의 제자들의 밑으로 내려가면서 오종이라는 선의 대종장들이 나타납니다. 또 오종 중에 한 종이 두 개로 갈라져 7개가 됩니다. 선종의 황금기는 오종 칠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칠가를 연 선사 중에 한 명이 황룡혜남선사입니다. 그 수행의 능력이 참 대단했습니다. 절의 천장이 다 떨어져 비가 오면 스님이 앉아 있는 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있는 그릇 다 내서 받아도 모자를 정도로 빗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앉아서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하고 있는데 목이 없는 귀신이 나타납니다. 너는 목이 없어 머리 안 아파서 좋겠구나 합니다. 또 밑이 없는 귀신이 오니까 너는 바지를 안 입어서 좋겠구나 하면서 오는 귀신마다 한 마디씩 하니까 귀신들이 전부다 놀래 도망가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황룡혜남선사가 청원행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토를 답니다. 노릉의 쌀값이 얼마인고? 노릉의 쌀값은 풍년이 들면 쌀값은 내려갈 것이고 흉년이 들면 쌀값은 올라가 해마다 쌀값은 달라지는데 길에서 듣고 헛투로 전하면 다 옳지는 않다고 한마디 합니다. 대의는 갈래길에서 물어서는 안 되고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본성, 불성은 마땅히 본래 사람을 만나야 된다. 견성하고 깨친 사람을 만나서 제대로 한 마디 듣고 서로 나누어야된다 하는 것을 노릉의 쌀값에 토를 단 것입니다. 뛰어난 선사의 한 마디에 많은 선사가 토를 달아서 노릉의 쌀값은 얼마인고? 하는 이 화두를 더욱더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불법이 뭐냐고 물었을 때, 동산은 마삼근이라고 합니다. 마로 만든 옷 서근, 이렇게 이야기한 것과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노릉의 쌀값은 얼마인고? 이런 물음이 앞으로 전개되는 선불교의 본질을 더욱더 탄탄하게 만들어갑니다.
영가현각도 깨치고 난 다음 보림사로 찾아갑니다. 혜능이 법을 설하고 있는 그 주의를 빙글빙글 세 바퀴 돌고 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자 혜능이 승이라면 삼천 가지 존엄과 팔만 가지 계율을 갖춰야 하는 데, 위의를 갖추고 예의도 갖추어야 하는데 인사도 하지 않고 주의를 빙글빙글 돌면서 그리 오만하냐? 영가현각이 한 말이 사람의 생사란 단지 호흡지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생사라고 하는 것은 단지 호흡지간이고 만물의 변화도 몹시 빠른데 그토록 많은 것을 돌볼 수가 없습니다. 당신한테 예의 차리고 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빨리 돌아가고 생사도 호흡지간인데 당신한테 절을 하고 예의를 갖추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의 갖추는 것이 도냐? 도를 보는 것이 도지 라고 한 마디 하고 딱 버티고 섰는 것입니다. 혜능이 생사가 걱정되면 불생불멸을 깨치면 되는데 도를 이루면, 불생불멸의 경지에 다다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겠는데 뭣 하러 생사를 걱정하느냐? 영가현각이 대도란 본래 불생불멸이요. 만물도 본래는 늦고 빠름을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혜능이 손뼉을 치면서 옳도다, 옳도다, 그대의 견해가 정말로 옳도다 하면서 영가현각이 혜능에게 인가를 받습니다. 깨쳤다고 견성했다고 인가를 받은 것입니다. 인가를 해주니까 영가현각은 그냥 짐 싸들고 돌아서 갑니다. 혜능이 어찌 그렇게 총망하게 가느냐? 도를 인가 받았으면 여기 더 머물다 가지 왜 그렇게 그냥 가느냐? 저는 아예 움직인 일이 없는데 어찌 총망이 있겠습니까? 오고감이 없는데 간들 가는 것인가? 있는 다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원래 움직인 일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총망하게 간다고 야단입니까? 움직인 적이 없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한 번 보여 보아라. 그것은 대사께서 스스로 낳은 분별이요. 관념입니다. 너가 움직인 적이 없다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 하니까 영가현각은 대사가 알던 모르던 그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대사 스스로의 분별이고 스스로의 관념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무생의 의미를 터득하였는가? 하고 혜능한테 다시 묻습니다. 무생이라면 깨치면 그만이지, 또 무슨 의미를 들추고 있습니까? 무생의 의미가 없다면 어이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이미 무생이거늘 또 무슨 분별이 있으며 따진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고 영가현각이 혜능의 묻는 말에 정확하게 어긋남 없이 대답합니다. 혜능의 생각 이상으로 영가현각은 깨침의 상황에서 정확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문답에서 누가 어느 정도 깨쳤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혜능이 영가현각의 손을 잡으면서 하룻밤만 묵고 떠나라고 사정합니다. 영가현각이 보림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갑니다. 그래서 영가현각을 일숙각이라고도 합니다. 육조혜능이 붙잡아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고 해가지고 영가현각을 일숙각이라고 합니다. 영가현각이 저술한 선종영가집이라는 법문집이 있고 또 유명한 증도가가 있습니다. 인류가 만들어 놓은 최대의 명문, 열 개를 꼽으라고 하면 3조 승찬의 심신명, 그리고 영각현각의 증도가도 꼽힐 것입니다. 증도가는 깨달음의 경지와 본래 성품을 명쾌하게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책을 보면 한문이 참 좋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군불견君不見,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얼마나 멋진 문장입니까.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배움이 끊어진 할 일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려 하지 않고 진리도 구하지 않는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중도가입니다. 선종사상사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심신명과 증도가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배움이 끊어진 할 일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려 하지 않고 진리도 구하지 않는다. 오늘 집에 돌아가시면서 이 내용 하나만 생각하면서 가 보세요. 영가현각 밑에는 제자가 없습니다. 물살이 빠른 곳에는 고기가 안 모이지만 옹달 같은 웅덩이에는 고기가 많이 모여 있습니다. 청원행사와 남악회양에게는 많은 제자가 모여 든 것을 보면 웅덩이를 이룬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영가현각이나 남양혜충은 물살 빠른 그런 부분에 속한 도인들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남악회양도 젊을 때 육조혜능을 찾아갑니다. 남방에 도인이 있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견성할 수 있다고 하는 그 말을 듣고 남악회양이 육조를 찾아갑니다. 육조혜능이 남악회양한테 던진 말은 어떤 한 물건이 왔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에 딱 막혀버린 것입니다. 뭔가 대답을 해야 되겠는데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돌아 나옵니다, 도대체 어떤 한 물건이 왔는가? 이 문제를 갖고 남악회양이 8년을 고민 합니다. 도대체 한 뭐가 한 물건인가? 여기에 화살이 꽂혀 8년 동안 이 화두를 들고, 집중을 하고 올인을 했는데, 어느 날 저녁공양을 하고 선방 문을 열고 마루에 섰는데 낙엽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그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한 물건 하는 그것에 대해서 딱 깨친 것입니다. 견성을 하고 육조혜능을 찾아 갑니다. 깨치고 보니까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하고 육조혜능한테 말합니다. 육조혜능이 깨쳤으면 되었지 뭐 하러 찾아 왔느냐? 한 마디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앞으로 고민해 보아야 될 화두입니다. 과연 한 물건이라고 하는 나는 무엇인가? 이런 것이 앞으로 화두를 만들어 가는 내용이 됩니다. 그래서 청원행사와 남악회양 밑에는 많은 제자가 나와 선불교의 숲을 이루게 됩니다. 남악회양 밑에서 선불교사상 최대의 거장중인 한명인 마조도일이 나옵니다. 부처님 당시 아라한과를 터득한 제자들이 약 700명 정도입니다, 그 중에 신통까지 갖고 있는 아라한이 반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반 정도는 신통이 없고 반은 신통이 있다고 추정을 합니다. 마조도일 밑에서 견성한 사람이 84명이 나옵니다. 부처님 이후 한 사람 밑에서 최대 다수의 견성자가 마조도일 밑에서 나옵니다. 선불교 최대의 황금기는 남악회양에 이어 마조도일이 있는 이 시기입니다. 이 시대에 약 130명에서 150명 정도의 견성한 수행자들이 탄생했습니다. 하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정신의 가장 황금기가 이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약 200명 이상의 견성한 사람이 탄생하게 됩니다. 세상 어디엔가 항상 견성한 사람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단지 견성한 사람이 법맥을 이어서 내려오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꽃이 줄기를 갖고 쭉 피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견성자는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육조혜능이 한 가장 큰 역할은 돈법을 전하면서 많은 선사를 배출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전도의 성과입니다.
하택신회는 매우 영리합니다. 중국은 최초의 통일 왕조를 진시왕이 이루게 됩니다. 진나라의 시황이 통일하는데 삼국지는 그 후의 역사이야기입니다. 위 오 촉의 삼국이 됩니다. 조조의 위나라와 손견의 오나라, 유비의 촉나라. 세 나라로 이루어지고 결국 위가 중국 천하를 통일합니다. 초기의 촉나라는 거의 유명무실하고 나라로 이루어갈 만큼 능력도 안 되는 별 볼일 없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갈공명을 등용하면서 중국천하를 삼분을 합니다. 제갈공명이 중국을 위나라와 오나라와 촉나라로 삼분을 합니다. 제갈공명이 삼분을 하면서 중국 역사는 정말 흥미진진하게 됩니다. 불교사에서 선불교는 사실 역사적인 상황에서는 육조혜능이 활동할 무렵에는 북종선 천하입니다. 측천무후가 황제였을 때 남종선, 북종선이 활동할 무렵입니다. 측천무후가 신수를 예방하고 황궁으로 초대하여 절을 네 번이나 하고 계속 최고의 국사로 모셨습니다. 북종선에 해당하는 신수가 그 당시 가장 명망을 받고 있던 선사였습니다. 이때 하택신회는 중국의 선불교를 남북으로 나눴습니다. 남북으로 나눔으로써 육조혜능의 남종선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돈오돈수입니다. 그리고 신수의 북종선, 점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하택신회의 작품입니다. 그 당시에는 신수의 천하였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남종선 천하가 되는데 불교사의 한 획을 그은 것은 하택신회입니다. 하택신회는 조직을 이루는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원행사 밑에서 께친 단하 천연선사가 있습니다. 불교의 역사상 가장 특이한 선사 중 한 분이 단하천연입니다. 추운 겨울 날, 유행을 하다가 절에 들어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는데 주지가 얼마나 인색하게 구는지, 추워 죽겠는데 방에 불도 안 넣어줍니다. 추워서 도저히 견디다 못해 단하는 법당에 가서 부처님을 보니까 목불인 것입니다. 목불로 군불도 때고 불을 쬐고 앉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예불 올린다고 보니까 법당에 있어야 할 부처님이 없는 것입니다. 부엌에 탄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자고 있는 단하를 깨워서 도대체 밤에 무슨 일을 했느냐고? 하니까 법당에 있는 부처님한테 사리가 나오나 싶어 확인 해봤다고 천연스럽게 말합니다. 주지기 화를 내자, 진짜 부처님이면 사리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 사리가 안 나오면 목불은 나무인데 불 떼든, 뭐 하든 무슨 상관있느냐? 내가 사리가 나오나? 안 나오나? 확인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단하스님의 한 면목입니다. 목불은 아무리 뛰어나도 불을 지나지 못하고, 흙으로 만든 소불은 아무리 뛰어나도 물을 지나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고 해보지 않았던 신선한 말들이 화두의 문답에서 오고 갑니다. 단박에 닦음. 어떤 것을 점과 돈이라고 하는가? 법은 한 가지로되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기 때문이다. 법에는 돈과 점이 없다고 했습니다. 단지 그 법을 익히는 우리에게 더디고 빠름이 있을 뿐입니다. 견해가 더디면 점이요, 견해가 빠르면 돈이다. 법에는 점과 돈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는 까닭으로 돈과 점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다. 시대를 거치고 내려오면서 돈법이 선불교를 이루는 주류가 되는 것입니다. 법에는 돈과 점이 없다. 사람에 따라 점, 돈이 있을 뿐입니다.
제 23품 단박에 닦음을 마무리하도록 합시다. 신수스님은 문인 지성스님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하여 조계산으로 가라. 가서 혜능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예배하고 듣기만 하되, 내가 보내서 왔다고 하지 말라. 들은 대로 그 뜻을 기억하여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여라. 그래서 혜능스님의 견해와 나의 견해 중, 누가 빠르고 더딘지를 보게 하여라. 너는 빨리 오너라. 그래서 나로 하여금 괴이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라. 이 품을 보면 과연 신수가 이렇게 했겠는가? 육조가 이렇게 했겠는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 당시 신수는 혜능보다 모든 면에서 많이 누리고 있었습니다. 대우도 받고 모든 조건이 더 좋았는데 구태여 이렇게 할 이유도 없습니다. 측천무후가 묻습니다. 내가 당신을 최고의 수행자,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는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하니까 신수가 나보다 혜능이 더 뛰어나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도 존경을 받을 만큼 뛰어난 수행자이지만 나보다 혜능이 더 뛰어나다고 할 만큼 정직한 사람입니다. 혜능이 도인이었다고 하면 이런 부분들이 필요하겠는가? 신수가 그 당시 누렸던 상황으로 보아서 이렇게 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수가 보내서 지성이 혜능한테 갑니다. 지성은 기쁘게 분부를 받들어 반달쯤 걸려서 조계산에 도착하였다. 그는 혜능스님을 뵙고 예배하여 법문을 들었으나 온 곳을 말하지 않았다. 지성은 법문을 듣고 그 말끝에 문득 깨달아 곧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다. 바로 견성에 대한 문턱에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는 일어서서 예배하고 말하였다. 스님이시여 제자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스님이 계시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스님 밑에서는 깨치지 못하였으나 스님의 법문을 듣고 문득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혜능께서 네가 거기서 왔다면 너는 마땅히 염탐꾼이렸다. 하니까 지성이 말을 하기 전에는 염탐꾼이지만 말씀을 드렸으니 이미 아닙니다. 육조가 이야기합니다. 번뇌가 곧 보리임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내가 들으니 너의 스님이 사람을 가르치기를 오직 계, 정, 혜를 전한다고 하는데 너의 스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계, 정, 혜는 어떤 것인가? 마땅히 나를 위해 말해보아라. 신수스님은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을 계라고 하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라고 하고,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을 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수스님은 계, 정, 혜를 설명합니다. 하니까, 너는 나의 말을 듣고서 나의 소견을 한 번 보라고 합니다. 마음의 땅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요, 마음의 땅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정이요, 마음의 땅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혜이니라. 자성의 계, 자성의 정, 자성의 혜로써 설명을 합니다. 이 부분에서 혜능은 계, 정, 혜를 자성에 비추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팔정도로 설명한 것이 선불교에서는 계, 정, 혜로 집약됩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어느 누구든 깨치려고 하면 팔정도에 의지한다. 고 했습니다. 앞으로 어느 누가 깨치더라도 팔정도를 벗어나서는 깨칠 수가 없다는 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팔정도의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약 500년 동안은 부파불교가 시작됩니다. 부파불교를 거쳐 약 500년은 대승불교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 다음 약 500년 동안은 밀교 시대가 열립니다. 대승불교 시대 때, 새로운 불교 흐름을 창출한 것이 상구보리 하화중생 하는 보살사상입니다. 이 보살상으로 대표되는 대승불교의 실천 강령이 육바라밀입니다. 부처님 당시 실천강령인 팔정도에서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로 바뀝니다. 이 육바라밀이 중국에서 꽃 피운 선불교로 넘어오면서 계, 정, 혜 삼학으로 바뀌게 됩니다. 팔정도나 육바라밀이나 삼학은 똑같은 맥락에서 존재하는 가르침이 좀 더 집약되고 축약시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난 다음, 약 500년 동안의 이 부파불교시대는 인도불교의 황금시기입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경전이 만들어 질 수 있는 근거가 500년 동안 익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장례의 절차를 너희들이 하지 말고 재가 신도들에게 일임해라. 이 내용은 부처님이 앞으로 일어날 역동적인 불교를 예고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앞으로 일어날 부파불교와 대승불교가 연결되는 인도에서의 불교운동이 부처님의 장례식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장례식을 재가신도에게 맡김으로써 불교는 끝도 없이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함경에 국한 되어 있는 그 가르침이 인류사상 가장 방대한 사상의 보고인 대승불교의 경전들이 이루어집니다. 그 많은 대승불교의 경전이 전부다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부파불교의 500년 동안 일어난 일이고 이것이 불교의 새로운 실천 사상으로서 대승불교가 완성이 되고 중국으로 넘어가서 500년 동안 중국불교의 토양을 만들어 갑니다. 500년 동안 대승불교 모든 경전이 중국으로 넘어옵니다. 중국불교의 근간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경전들이 전부다 한문으로 번역되어 종파불교 교학불교가 완성됩니다.
종교나 어떤 사상이든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면 제일 먼저 선행되는 것이 그 지역의 언어로 번역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역경 사업이 중국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만들어진 모든 경전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한문으로 번역됩니다. 중국에서 생각할 때, 부처님께서는 도대체 이 많은 경전을 어느 시기에 어떻게 설했는가? 하는 교상판석이 중국 500년 교학불교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경전에 대해서 연구하고 또 경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파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많은 종파의 끝에 중국화된 새로운 불교가 나타나는 것이 선종으로 선불교입니다. 선불교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경전들이 500년 동안 중국 토양에서 익어 새롭게 싹을 틔운 것이 선불교입니다. 인도에서 전래된 부처님의 가르침이 500년 동안 중국 토양과 중국의 사상과 융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선불교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선불교의 초조인 달마가 출현하는 시기는 교종이 완성 단계에 이르러가는 그 시점이 됩니다. 그래서 중국화된 새로운 불교가 나타나는 것이 달마를 중심으로 선불교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교사상의 흐름으로 볼 때, 새로운 큰 맥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 인도에서는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이며 이것이 중국으로 넘어 와서는 종파불교 500년, 새로운 선불교 500년 시대를 이루어 갑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하는 시기는 1203년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종교는 멸망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완전하게 없어지는 상황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남아서 그 종교를 믿고 뿌리가 연결되어 갑니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불교가 회교도의 침략에 의해 뿌리까지 철저하게, 완전하게 소멸됩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불교의 멸망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인도불교는 멸망하면서 그 당시에 인도의 승려들은 모두 티벳으로 망명을 갑니다. 그래서 티벳에서 불교가 새롭게 활불사상으로 일어나고 린포체사상이 토착화 됩니다. 이 사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밀교에 근거를 둔 불교의 흐름이 티벳불교로 이어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이루어진 불교와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불교가 티벳에서 일어납니다. 중국에는 부처님 경전에 근거한 교종불교에서 선불교로 이어지고 티벳에서는 대승과 밀교를 거쳐 이 밀교를 믿던 그 많은 승려들이 티벳에 망명함으로써 티벳불교인 린포체 사상에 바탕을 둔 활불사상의 티벳불교가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의 흐름은 남방불교입니다. 예수가 탄생한 B.C. 원년 무렵 남방으로 간 불교는 부처님 당시의 불교 그대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남방불교입니다. 중국불교와 남방불교의 큰 차이점은 바로 문화의 차이입니다. 세계의 모든 문화는 문화충돌을 일으키면서 발전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문화를 살펴보면 그 당시 인도 문화권과 중국 문화권의 수준은 거의 대등합니다. 대등한 입장이기 때문에 두 문화가 충돌할 때는 서로가 변화를 일으키면서 융화되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져 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선불교 형태로 만들어진 인류사상 유래 없는 불교의 최고봉을 이룬 선불교가 여기서 꽃을 피운 것입니다. 하지만 선불교가 흘러오면서 잘못 오해되고 더 성장을 못하니까 엉뚱한 식으로 부패되고 타락한 형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종교든 국가든 상승세를 이어갈 때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새로운 비전이 좋은 쪽으로 더 커가는 쪽으로 이끌어가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부패되고 타락되고 잘못된 것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새로운 틀을 찾으며, 나라는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는 것입니다.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비슷한 문화권의 충돌에 의해 만들어진 인류 역사상 가장 멋진 사상의 보고를 만들어 간 쪽이고. 스리랑카, 미얀마 쪽으로 흘러간 남방불교는 부처님 당시에 전해진 그 경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인도 문화권과 그 당시 남방 문화권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우열에 차이가 났습니다. 그래서 인도불교가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화충돌에 의해서 불교는 융합하고 순화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갑니다. 불교에 바탕을 둔 문화권의 충돌에서는 거의 대부분 전쟁을 동반하지 않는 사상의 융화를, 새로운 사상으로 조화롭게 이루어갑니다. 기독교 문화권이 전래되는 과정에서는 계속 전쟁입니다. 그 지역에서 본래부터 갖고 있는 특성과 모든 조건을 무시해버립니다. 새로 들어가는 것을 거기에 심으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불교는 들어가는 그 문화를 심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 변모를 시켜 나갑니다. 그냥 형식으로 볼 때는 수천 년 동안 우리 인간의 삶에 영향을 어떻게 미치면서 변모되어 왔는가를 생각해 볼 때, 과연 어떤 사상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미쳤는가를 생각을 해보면, 이 두 문화권이 흘러가면서 부딪히는 양상은 전혀 다릅니다. 모든 문화권은 항상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 문화가 어디 있어요? 서구문화권의 일방적인 침탈입니다. 일본은 유일하게 동양이 갖고 있는 동양문화권의 특성을 지키면서 서구문화권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것 자체를 부정하면서 서구에서 들어오는 것만 무조건식의 우상숭배로 받아들인 실정입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전혀 달랐습니다. 또 중국은 엄청난 능력으로 서구사회에 대응해서 새로운 하나의 동양사회를 이끌어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으로만 부족하지만 중국은 사상이나 문화 부분에서 충분히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종교나 사상이나 문화는 결국 어떤 식으로 흘러와서 어떻게 매듭을 짓느냐 하는 것이 크게는 종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 간의 갈등이 가장 큰 것이 회교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가 중동을 용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종교적인, 신앙적인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회교를 못 따라갑니다. 회교는 지금도 마호멧의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구사회를 이끌어 가는 기독교 문화권은 현대 문화권에 전부다 희석이 되어버리고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동의 석유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회교의 그 사상이, 정신이 무서운 것입니다. 왜 중동전쟁에서 철저하게 회교 문화권을 말살시키려고 한 것은 이 문제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 갈 사상들의 전개방향입니다. 과연 인간들의 삶에 어느 것이 맞는가? 어느 것이 더 큰 기여를 하는가? 결국 큰 것은 적은 것보다 좋을 수 있고 큰 것은 잘 쓸 때 적은 것보다 좋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조직만큼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조직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쉽게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직이 갖고 있는 힘으로 자유를 깡그리채 말살시킬 수 있는 것이 조직의 횡포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문제를 놓고 종교적인 문제를 볼 때,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선불교가 갖고 있는 사상의 풍요로움은 빛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삶이 점점 획일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획일화 되어 가는 것을 탈피하려고 하는 하나의 방법이 통섭입니다. 통섭이 합하자고 하는 의미보다 소통을 위해 융합을 위해 뚫자고 하는 것입니다. 단절되어 있는 것을 통하게 하자 하는 것입니다. 단절된 것을 통하게 하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정신의 새로운 황금시대를 열 수 있는 것은 하나로 합하는 것이 아니라 막혀 있는 것을 뚫음으로써, 연결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공유하고 바라봄으로써 더 큰 파이가 되고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또한 계, 정, 혜는 세우지 않느니라. 스님께서 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뜻은 어떤 것입니까? 자기의 성품은 그릇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다. 생각마다 지혜로 관조하여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났는데 무엇을 세우겠는가. 자기의 성품을 단박에 닦으라. 세우면 점차가 있으니 그러므로 세우지 않느니라. 세우면 점과 돈과 점차가 있기 때문에 세우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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