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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29강 참 부처와 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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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761회 작성일 22-05-2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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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강 참 부처와 멸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먼저 생각을 집중해서 삼매에 들 수 있어야 되겠고 삼매에 들음으로써 무념, 무상, 무주가 되고 견성을 하고 나면 내외명철이 됩니다. 이런 내용들은 육조단경의 핵심 내용입니다. 

육조단경은 전반적인 내용이 머리말로 시작했고 혜능의 행적과 불연, 어떻게 해서 불법과 인연이 되었고 처음 법을 들으러 올 때까지, 견성할 때까지의 행적을 기록해 놓았고 그리고 첫 법문이 이루어집니다. 법문의 주요 내용이 정혜, 무념, 좌선, 삼신, 참회, 삼귀의, 성품, 반야, 근기, 견성, 돈오 등 입니다. 견성하는 내용이 돈오라는 것입니다. 돈오란 어떤 깨달음이라도 깨달음은 순간입니다. 깨닫기 전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일단은 깨달음이 오는 것은 순간입니다. 어떤 법이라도 돈오일 수밖에 없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법에 대해 제자들이 묻습니다. 


깊은 산 속에 두 스님이 목숨을 걸고 열심히 수행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어느 봄날에 마을 처녀가 나물 캐러 스님 두 분이 수행하고 있는 깊은 산 속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두 스님은 견성하기 전에는 이 산을 나가지 말자고 결심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한명이 먼저 견성하면 상대방을 견성하게 해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어느 날, 마을 처녀가 나물 캐러 왔다가 이 절까지 왔는데, 둘 중에 잘 생긴 스님과 눈이 맞아 버렸습니다. 스님 한 분이 처녀를 따라 마을로 내려 가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 스님은 이번 생에 공부 못하면 다음 생에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결혼 해서 둘이 사는데 자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10년이 지날 때까지 자식이 없었는데 자식이 생겼습니다. 아들을 낳아 금지옥엽같이 키웠습니다. 아이의 발이 땅바닥에 닿을 새도 없이 업고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5살 되는 이른 봄날에 아버지가 아이를 업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저것, 저것하면서 손으로 가리키며 저것 달라고 하면서 숨이 넘어갔습니다. 애가 죽어 버렸습니다. 저것 저것 할 때 아버지가 뭐?뭐? 하는데 급한 성질에 애가 말라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얻은 자식을 귀하게 키우고 있었는데 청천벼락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례를 치러놓고 아버지는 아이가 저것 저것하고 가리킨 곳에 앉아 도대체 무엇을 보고 저것 했는지 몇 날을 식음도 전폐하고  저것? 하는 생각에 빠졌습니다. 어느 순간 저것 일념이 되어 깨치게 됩니다. 깨치고 보니 같이 수행하던 도반이 견성하여 자기 집에 아이로 태어난 것입니다. 먼저 견성한 사람이 상대방을 도와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려고 이 부부 집에 온 것입니다. 결국 저것?에 몰두하여 화두일념이 되어 깨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공부한 내용의 핵심이 바로 집중입니다. 모든 공부의 출발은 집중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생각을 모아 집중하는 좋은 방법은 하나를 계속 생각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면서 집중하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집중을 했는지가 문제입니다. 얼마만큼 공부로써 접근하고 다가갔는지 점검도 해봐야 합니다. 이 육조단경이 끝나고 나면 집중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하나씩 갖고 있어야 됩니다. 화두를 들면서 집중을 하든, 본인에게 일어난 어떤 문제를 갖고 집중을 하든, 어떠한 형태로든 집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집중을 해야 공부가 익어가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돈오가 되는 것입니다. 견성은 순간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돈오의 내용이 무념이고 무상이고 무주인 것입니다. 견성한 상태는 내외명철인 것입니다. 견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화두를 드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잠 자기 전에 직장에서나 모임에서나 그날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는 것도 집중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육조단경을 7개월 동안 공부했으니까 무엇인가 이득이 있어야 됩니다. 그 이득으로 공부 잘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30장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너희들은 들어라. 뒤 세상의 미혹한 사람이 중생을 알면 곧 능히 부처를 볼 것이다. 우리가 중생이고 깨친 사람이 부처입니다. 깨치지 못한 미혹한 우리는 중생이고 이 미혹한 것을 깨친 사람은 부처입니다. 미혹한 사람이 중생을 알면, 우리가 중생인 것을 알면 능히 부처를 볼 것이고, 중생을 알지 못하면 수천 년, 수만 년을 공부하더라도 부처를 찾지 못할 것이다. 부처와 중생은 손바닥의 앞면과 뒷면인 것입니다. 부처가 따로 있고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중생인 것을 알면 부처가 되는 것이고 중생이 중생인 것을 모르면 중생으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너희로 하여금 중생을 알아 부처를 보게 하려고 ‘견진불해탈송見眞佛解脫頌’을 읊을테니 미혹하면 부처를 보지 못하고 깨친 자는 곧 부처를 볼 것이다. 뒷세상 사람이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오직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면 바로 부처를 보게 된다. 그러면 능히 부처를 알게 될 것이며, 중생의 있음을 인연하기 때문에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의 마음이 없다. 중생을 떠나서 부처가 없고 부처를 찾기 위해서는 중생 속에서 부처를 찾아라. 우리가 중생이면서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부처가 아니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부처 될 수가 없습니다. 마조를 찾아간 남악회양이 하루 종일 기다려 마조가 선방에서 나오자 법당 앞 바위에 돌을 갈고 있으니까 묻습니다. 스님 돌 갈아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마조가 피식 웃으며 스님 돌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회양스님이 그러면 앉아 있는다고 부처가 되느냐? 고 한마디 던집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조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순간 부처를 찾을 수 있는 문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만들어집니다. 이와 같이 물들어 중생인 이 속에 부처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물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중생입니다. 이 몸둥이 속에 있는 평생 쓰는 것은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는 아치입니다.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내 속에 축적되어 있는 업을 내가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업에 의해 오염되어 있습니다. 물들어있는 것입니다. 물들어 있는 것을 걷어내면 물들기 전의 것을 보게 되고 알 수 있게 됩니다. 견성을 하여 본래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원래 부처와 중생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물들어 있는 상태에서는 중생이지만 물들어 있는 것을 알면 바로 부처가 됩니다. 


견진불해탈송見眞佛解脫頌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치면 중생이 부처이며

 

우치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이니라.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마음이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이니

 

한 평생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 속에 있도다.

 

만약 한 생각 깨쳐 평등하면/ 곧 중생이 스스로 부처이니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음이라/ 자기 부처가 참 부처이니

 

만약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리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깨쳤느냐, 미혹하냐의 문제입니다. 부처와 중생은 똑같이 한 몸인데 내가 깨치면, 내가 바르면, 내가 제대로 인식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고, 그러지 못하고 미혹하면 그냥 중생인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사이에는 단지 우리의 인식이 달라질 뿐입니다. 우치하고 어리석으면 중생이고. 깨달아 지혜로우면 중생이 바로 부처입니다. 

평생 이 몸뚱이를 갖고 살면서 어떤 경우는 부처로 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중생으로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래 내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물들어 있는 상태에서 나를 보고 세상을 봅니다. 물들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아치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어리석음으로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치이기 때문에 아집으로 관계 속에서 무엇을 이해하고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중심입니다. 아만으로 자기혼자 맞고, 자기만 똑똑하고 최고입니다. 아애이기 때문에 자기만 끝도 없이 사랑합니다. 

공부 많이 했다는 스님의 성격이 괴팍하고 혼자 밖에 모르고 말을 험하게 하면 그 사람은 부처가 아니고 중생인 것입니다. 공양간에 있는 보살님이 공양 지어 누구라도 더 주고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공양을 지어 공양을 올리면 그 사람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같은 절에 한 사람은 주지로 앉아 있으면서도 부처인 척하면서 중생이고 공양간에서 땀 뻘뻘 흘려가면서 뭐 하나라도 맛있게 해 먹어야겠다고 열심히 일하는 공양주는 중생이면서 부처인 것입니다. 만약 한 생각 깨쳐 스스로 평등하면 중생이지만 부처로 사는 것입니다. 부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참 부처를 제대로 찾으면 바로 그것이 부처입니다. 

미혹한 것을 걷어내면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깁니다. 미혹한 부분을 걷어내고 나면 원래 맑고, 물들기 전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잘하면 부처 되는 것이고 생각이 미혹하면 그대로 중생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리오. 내 속에서 부처를 찾지 못하면 이 세상 어디에도 부처는 없습니다. 나를 포기하고는 어디에도 부처는 없습니다. 세상을 부처 만들기 보다는 내 자신을 부처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그래서 견성하는 것이 쉽습니다. 견성하고 나면 성불까지 할 수 있습니다. 견성은 내 자신의 본래 성품을 아는 것이고 성불은 나와 법신 전부를 깨쳐 아는 것입니다. 나를 알아버리면 대상은 그냥 알아집니다. 모든 공부의 초점은 자신입니다. 불교는 자신의 문제 밖에 없어요. 일반 다른 학문은 관계 속에서, 관계를 해결하면서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며, 불교는 모든 문제를 내 자신의 문제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로 끝납니다. 자신이 우뚝 서면 모든 관계가 원만하게 다 잘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구조는 관계 속에서의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음으로써 모든 관계가 원만해지고 평등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자성진불해탈송’이라는 게송 하나를 남기니 뒤 세상에 미혹한 사람이 이 게송의 뜻을 들으면 곧 자기의 마음, 자기의 성품의 참 부처를 볼 것이다. 너희에게 이 게송을 주면 이제 작별이다.

 

자성진불해탈송


진여의 깨끗한 성품이 참 부처요

삿된 견해의 삼독이 곧 참 마군(魔軍)이니라.

삿된 생각 가진 사람은 마군이 집에 있고,

바른 생각 한 사람은 부처가 곧 찾아오도다.

 

성품 가운데서 삿된 생각인 삼독이 나나니,

곧 마왕이 와서 집에 살고

바른 생각이 삼독의 마음을 스스로 없애면

마군이 변하여 부처 되나니, 참되어 거짓이 없도다.

 

화신과 보신과 정신이여,

세 몸이 원래로 한 몸이니

만약 자신(自身)에게서 스스로 보는 것을 찾는다면 

곧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씨앗이니라.

 

본래 화신으로부터 깨끗한 성품 나는지라,

깨끗한 성품은 항상 화신 속에 있고

성품이 화신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행하게 하면

장차 원만하여 참됨이 다함 없도다.

 

음욕의 성품은 본래 몸의 깨끗한 씨앗이니,

음욕을 없애고는 깨끗한 성품의 몸이 없다.

다만 성품 가운데 있는 다섯 가지 욕심을 스스로 여의면

찰나에 성품을 보나니, 그것이 곧 참[眞]이로다.

 

만약 금생에 돈교의 법문을 깨치면 

곧 눈앞에 세존을 보려니와

만약 수행하여 부처를 찾는다고 할진대 

어느 곳에서 참됨을 구해야 할지 모르도다.

 

만약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 있다면

그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이니라.

스스로 참됨을 구하지 않고 밖으로 부처를 찾으면,

가서 찾음은 곧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돈교의 법문을 이제 남겼나니

세상 사람을 구제하고 모름지기 스스로 닦아라.

이제 세간의 도를 배우는 이에게 알리노니,

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크게 부질없으리로다.


진여의 깨끗한 성품이 참 부처며, 삿된 견해의 삼독이 마군이입니다. 근본 번뇌는 치, 어리석음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나누어집니다. 치가 근본 무명입니다. 치가 있기 때문에 탐과 진이 생깁니다. 탐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욕망이며, 진은 정신적인 욕심입니다. 탐욕이 많은 사람은 계로써 다스립니다. 생활이 규칙적이어야 됩니다. 규칙적인 생활이 우리의 삶을 용수철처럼 뛰어나게 하여 부처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면 계율을 지키게 만드는 좋은 습을 축적시킵니다. 정은 바른 것입니다. 바르면 화내는 마음도 자기 중심적인 생각도 다 없어집니다. 바른 생각, 바른 것에서 부처가 이루어집니다. 혜, 지혜로워야 어리석음이 사라집니다. 탐, 진, 치가 가득찬 사람은 마군이 사는 집이고 계, 정, 혜가 가득 차면 부처가 사는 집입니다. 부처 따로, 중생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속에 무엇을 채워 놓느냐에 따라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전생에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내 속에 들어 있는 업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내가 사는 모습은 내 속에 전생에 들어있던 업을 끄집어내어 쓰는 것입니다. 또 한 생 살고나면 그 축적되어 있는 것으로 다음 생을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면 내가 대단하게 변할 것 같은데 한 평생을 살아 놓고 보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 몸 받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던가? 누구였던가? 


이렇게 공부하는 인연은 세세생생 살아도 이 순간 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앞으로 다시 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이 소중한 시간에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인연이 정말 제대로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나는 누구인가? 내가 왜 이렇게 사는가? 이런 문제를 고민하면 됩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되돌아 볼 때. 공부는 그냥 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부처성품을 53% 갖고 있고, 탐진치의 지옥성품을 47%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부처성품이 많으니까 공부하려고 애를 씁니다. 공부하지 않고 저녁마다 술을 마시며 노래방 가고 노는 사람은 부처성품이 47% 밖에 안 되고 지옥성품이 53% 됩니다. 그렇게 평생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공부가 인연이 되었기 때문에 한 생 공부하면서 멋진 삶을 살고 갈 수 있습니다. 화신과 보신과 청정법신이여, 세 몸이 원래 하나입니다. 진리의 본체는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며, 청정법신이 나타내는 모양이 원만보신이며, 청정법신의 작용이 천백억화신입니다. 세상의 본질이 청정법신인데 원만한 진리의 모양을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화신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세 개가 하나인데, 본체고 본체의 모양이고 본체의 작용일 뿐입니다. 자신에게서 스스로 보는 것을 찾는다면 부처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씨앗이 될 것입니다. 화살을 외부로 돌리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야 됩니다. 본래 화신으로부터 깨끗한 성품이 나는 것이며, 깨끗한 성품은 화신 속에 있고 화신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행하게 하면 원만하여 참됨으로 덮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 속에 들어 있는 것이 화신을 통해서, 작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작용이 끝도 없이 바르다 보면 그 속에 들어 있는 물들어 있는 것을 다 걷어내고 진리의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견성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음욕의 성품은 본래 몸의 깨끗한 씨앗이니 음욕을 없애고는 깨끗한 성품의 몸이 없습니다. 다만 성품 가운데 있는 다섯 가지 욕심을 스스로 여의면 찰나에 본래성품을 보게 되며 그것이 곧 진리인 것입니다. 다섯 가지 욕심은 탐심, 진심, 치심입니다. 


수면욕은 치, 어리석음, 깨어있지 못한 무명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언가 추구하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고,  편안하려고 하는 것. 모두가 여기에 속합니다. 육신은 편하게 해주면 해줄 수록 좋다고 합니다. 일요일에 8시간, 9시간 자 보세요. 더 좋다고 합니다. 육신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면 평생 게을러지고, 나태해집니다. 공부하는 데 일요일이 어디 있어? 4시간이나 5시간 자고 일어나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육신은 내가 길들이는 대로 따라오게 됩니다. 지금이라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5시간만 자고 평생을 살겠다고 결심하면 충분히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무명으로부터 깨어나는 방법입니다. 이 육신은 많이 자고, 많이 쉬어주고, 게으르면 게으를수록 좋아합니다. 육신하자는 대로 따라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은 내가 길들이는 대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2시간, 3시간 자도 평생 이 육신 갖고 잘 살 수 있고 게으른 사람은 하루에 8시간 안자면 못 견딥니다. 8시간 자고, 육신 하자는 대로 하다보면 무엇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깨어있기 위해서는 육신부터 조복을 받아야 됩니다. 육신을 조복 받는 방법은 규칙적인 생활입니다. 

치에 의해서 물질적인 욕망과 정신적인 욕망이 생기게 됩니다. 탐심이 물질적인 욕망입니다. 생명체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욕심이 식욕입니다. 식욕은 물질적인 욕망 중에 내 몸뚱이를 잘 먹여주고 좋아하는 것을 먹으려고 하는 욕망입니다. 물욕이나 재물욕 등도 식욕과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모으려고 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아집에서 작용하는 집착은 탐욕을 키워나가게 합니다. 식욕이 떨어진 사람은 물욕도 떠나게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나와 대상이 있습니다. 나에 해당하는 욕심이 식욕이며 대상에 해당하는 물질적인 욕심이 물욕인 것입니다. 

 

진, 화내는 마음의 뿌리는 색욕입니다. 몸뚱이를 바탕으로 일어나는 정신적인 욕망 중에 하나가 화내는 것입니다. 화내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며 이것이 정신적인 욕망입니다. 정신적인 욕망 중에서 나에 해당하는 것이 색욕이며 나 외의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 명예욕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갖는 오욕의 뿌리가 탐, 진, 치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탐, 진, 치에 뿌리를 둔 내용들입니다. 이것을 잘 다스리면 본래 성품, 견성을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적당하게 제어를 하고 부처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성품 가운데 있는 다섯 가지 욕심을 스스로 여의면 찰나에 내 본래 성품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이며 진리인 것입니다. 금생에 돈교의 법문을 깨치면 눈앞에 부처를 봅니다. 수행하여 부처를 찾는다고 해도 어느 곳에서 참됨을 구해야 할지 모릅니다. 바깥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부처를 볼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내 속으로 깊이 들어올 때 비로소 부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품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나 나이가 들어 늙었을 때나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품은 아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깨뜨린다는 것이 안 쉽습니다. 그래서 공부하여 한 번 깨뜨려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뜨리지 못하는 한 평생 내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이 삶을 살며 마무리하고 갑니다. 공부를 통해서 나를 제대로 알고, 내 속에서 본질을 찾음으로써,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아는 것을 어떻게 할 팔요가 없습니다. 알면 다 해결됩니다. 


참선한다고 한 번 앉아 보세요. 한 생각 집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다 일어납니다. 화두는 이것을 한가지 생각에 모으는 것입니다. 집중하여 모아지게 되면 화두는 마지막 남은 하나의 번뇌입니다. 이것만 깨뜨리면 부처가 됩니다. 이 생각을 깨뜨리고 순간순간 몰두를 하지 않으면 깊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철옹성같이 둘러싸여 있는 이것을 깨뜨려야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처마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듯이 공부도 그렇습니다. 공부도 시절인연이 잇습니다. 인연이 되었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인연이 되어 금생에 돈교의 법문을 깨치면 눈앞에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몸 가운데 참됨 있다면 그것이 부처의 씨앗으로 성불할 수 있게 됩니다. 참됨에 집중하는 힘을 알아서 집중을 하면 성불하는 씨앗이 됩니다. 스스로 참됨을 구하지 않고 밖으로 부처를 찾는다면 크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바깥으로 아무리 찾으려 해봐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갇혀있는 여기서 문을 찾아야 나갈 수 있습니다. 진리에 다다르려고 하면 나를 깊이깊이 들어다 보아야 합니다. 나를 깊이 보는 방법이 집중하는 것입니다. 집중을 하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수천 년을 살아도 변하지 않을 내 삶이 재대로 인연을 만나면 그 순간 바뀌는 것입니다. 인식하는 그 순간부터 바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속되면 끝나는 것입니다. 한 방울의 물이 얼마나 떨어져서 바위가 뚫어지겠나 싶지만 우리는 그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 년을 가든, 만 년을 가든 내가 인식하는 순간 모든 게 다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돈교입니다. 

돈교의 법문을 이제 남겼으니 세상 사람을 구제하고 모름지기 스스로 닦아라. 모든 공부는 스르로 닦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돈 천만 원은 내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백만 원보다 못한 것입니다. 내 보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대주혜해스님이 법을 물으러 많은 선사를 찾아다닙니다. 마조를 찾아 갔을 때, 마조스님이 네 속에 보배를 두고 어디 쓸데없이 다니느냐? 그 말 듣고 바깥으로 쫓았던 마음을 쉬고 산에 들어 평생을 수행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찾는 공부는 본인이 인식하고, 이해하는 순간 끝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본질은 바깥으로 아무리 찾아봐야 이생에서 얻어 갈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나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죽다 깨어나도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가 부처되어 버리면 세상은 부처입니다. 내가 중생이면 세상은 그냥 중생일 뿐입니다. 세상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누구는 정치해서 구하고, 누구는 사업해서 구한다고 하지만 말뿐이고 결국 한 사람이 부처 되면 세상을 구하게 됩니다.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서 출발해서 세상 한 바퀴 돌아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31장 멸도를 봅시다. 법문 다 설하고 난 다음, 너희들은 잘 있거라, 나는 이제 간다. 이제 너희들과 작별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 세상의 인정으로 슬피 울거나 사람들의 조문과 돈과 비단을 받지 말라. 상복도 입지 말라. 성인의 법이 아니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 세속의 법에서는 그렇게 할 지 몰라도 내가 너희들 스승으로서 내가 어디 가는지 내가 아는데 왜 너희들이 슬퍼서 우느냐? 세상의 삶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상복입고 끝났다고 하지마라. 살아 있던 날과 마찬가지로 멸하는 것도 똑같은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며 상태가 달라질 뿐입니다. 지금 살아있으니까 여기 있는 것이고  죽고 나면 보이지 않는 데 있다가 다시 또 생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여기에 올라오는 것 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니까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눈에 안 보이니까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다. 내가 살아있던 날과 똑같이 해라.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으며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어서 즉 단연히 적정하면 그것이 바로 도니라. 동산양개스님이 3일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하니까 수백 명의 제자가 울고불고 야단이 났습니다. 스님 조금만 더 계시라고. 하니까, 알았다 그러면 내가 일주일만 더 있다가 갈게. 일주일 더 세상에 머무시다가 간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오직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내가 있던 날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만약 세상에 있더라도 너희가 가르치는 법을 어기면 내가 있은들 이익이 없느니라. 내가 있든, 없든, 수행을 잘하고 가르친 대로 이 돈교의 법을 알아서 열심히 수행하면 바로 이것이 진리에 드는 길이다. 대사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밤 삼경에 이르러 문득 돌아가시니, 바로 육조혜능 대사의 춘추는 일흔여섯 이었다. 육조단경이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대사께서 돌아가신 날, 절 안에 기이한 향내가 가득하여 여러 날이 지나도록 흩어지지 않았고 산이 무너지고 땅이 진동하며 숲의 나무가 희게 변하고 해와 달은 광채를 잃었다. 8월 3일에 돌아가시고 동짓날에 이르러 스님의 영구를 모시어 조계산에 장사지내니 용감 속에서 흰빛이 나타나 곧장 하늘 위로 솟구치다가 이틀 만에 비로소 흩어졌으며 소주 자사 위거는 비를 세우고 지금까지 공양을 올리고 있다. 

첫 장에 있는 이 모습이 등신불 육조혜능의 모습입니다. 살아생전의 모습 그대로 옻칠을 하여 모셔놓은 모습입니다. 중국에는 등신불이 몇 분 계십니다. 신라의 김교각스님도 등신불로 계시고 최근에 발견된 스님도 등신불로 계십니다. 최근에 발견된 스님도 결가부좌자세로 열반에 드신 것을 함에 넣어 놓았다가  3년 후에 개봉했는데 썩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있어 등신불로 만들었습니다. 

어머니 모태 속에 있을 때, 약 99% 이상의 물 속에서 살아요. 그래서 몸 바깥에서 나오면 약 한 90% 정도의 물을 유지하다가 성장하면서 계속 수분의 함유량이 줄어듭니다. 그러다가 물 함유량이 64% 밑으로 떨어지면 죽습니다. 등신불 스님은 남아있는 수분이 3년 동안 다 빠져 나가고 결가부좌 자세로 그대로 함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법당에는 부처 밖에 없습니다. 중국에는 실제 중국 역사 속에서 살았던 위대한 스님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훨씬 더 생동감 있는 불교의 부분도 있습니다. 삼매에 든 상태에서 열반에 든 스님은 등신불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끝도 없는 수행에서만 가능합니다. 열반에 드는 순간 삼매에 든 상태에서 그대로 열반에 들어야 몸이 썩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겨울잠을 잡니다. 몇 개월동안 먹지도 않고 그대로 견디다가 동면에서 깨어납니다. 삼매에 들어 있으면 그 상태가 그대로 유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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