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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30강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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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1,629회 작성일 22-05-24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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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강  총정리


육조혜능의 등신불입니다. CT를 통하여 등신불의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등신불은 1991년에 입적한 자명스님입니다. 스님이 열반에 드시면서 가부좌한 모습 그대로 항아리에 넣어두었다가 3년 후에 개봉을 하라고 당부를 합니다. 유언한대로 3년 후에 개봉을 하니까 열반할 때 모습 그대로 있었습니다. 제대로 수행하면 등신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자명스님이 20세기에 증명하고 가셨습니다. 등신불을 통하여 수행의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육조혜능이 최초로 설법한 것은 광동성 광주 법성사이며, 조계산 대범사에 오랫동안 머무셨습니다. 육조단경의 핵심 내용이 무념을 이루어서 견성을 하고 견성을 하면 내외명철이 되고 이것이 삼귀의로써 보편적인 사상 체계를 확립시켰습니다. 그리고 돈오, 깨달음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념의 내용을 무념, 무상, 무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무념을 종으로 삼고, 무상을 본체로 삼고, 무주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무념을 종으로 삼는다는 것은 조계종, 천태종, 태고종 등을 가리키며, 무상을 본체로 한다는 것은 조계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이며 천태종은 묘법연화경이며 태고종은 금강경인 것을 가리키며, 무주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경전의 내용이 무주입니다. 금강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육조단경도 무주를 근본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무주의 내용은 응무소주 이생기심입니다. 응당히 소所에 머무름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견성했을 때 일으키는 마음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입니다. 묘법연화경의 내용은 일불승사상입니다. 묘법연화경의 일불승사상은 회삼승이 귀일불하는 것으로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을 회귀해서 부처인 일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묘법연화경은 일불승을 근본으로 삼고 금강경은 무주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이런 내용이 무념과 무상과 무주입니다. 

무념이라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상이라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 예를 들어 박선생님은 이렇게 생겼고 양선생님은 저렇게 생겼다는 모양을 갖고 그 사람을 생각하는데 이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 무상입니다. 

무주는 머무름이 없다는 것으로 우리의 본래 성품이 생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머문다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 불교가 무엇인가? 했을 때, 머릿속에 설명할 무엇이 떠오릅니다. 떠오르는 생각은 그 생각에 머무는 것입니다. 뭔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그 생각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생각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무주입니다. 내 업의 창고에서 끊임없이 끄집어내서 씁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그 생각을 끄집어내서 쓰는 것이 머무는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머무름이 없는 무주입니다. 그래서 견성을 하면 무념이 되고, 무상이 되고, 무주가 됩니다. 


무념은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귀신이 여기 왔을 때, 귀신은 육신을 없기 때문에 육신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갖고 있어 육신을 통해 눈으로 보기 때문에 육신이 없는 귀신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는 생각은 귀신이 모두 아는 것입니다. 당나라 때, 염관선사 밑에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700명이나 되었습니다. 염관스님에게 휘일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스승의 명성을 듣고 참선하러 오는 스님들을 뒷바라지하다가 이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출가해서 참선공부 하겠다고 염관스님을 찾아 왔는데 공부는 한 번도 못하고 시중만 들다가 나이가 50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리에 누워 자고 있는데 저승사자가 찾아왔습니다. 너의 수명은 다 했다. 너를 데리고 염라대왕에게 가야  되겠다. 휘일이 퍼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출가해서 제대로 공부 한 번 못해보고 스님들  뒷바라지하다가 끝나버린 것입니다. 억울해서 저승사자에게 하소연 합니다. 일주일만 좀 늦추어 달라고 사정합니다. 출가해서 30년 동안 스님 시중들다가 공부 한 번 못했는데 7일만 공부다가 가겠다고 사정을 합니다. 스님에게  7일만 열심히 하면 견성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저승사자에게 7일만 봐달라고 사정한 것입니다. 저승사자는 심부름꾼이지, 결정권자가 아닙니다. 야 우리는 결정권이 없다. 너 잡아오라고 하니까 잡아가는 것이다. 염라대왕한테 여쭤보고 7일 봐주면 7일 후에 잡으러 오고 안 봐준다고 하면 다시 와서 잡아가라고 합니다. 저승사자가 염라대왕한테 사정을 말하니까 그놈 기특하네 하면서 7일 후에 잡아오라고 합니다. 휘일이는 저승사자가 가고 난 후에 그 자리에서 앉아서 선정삼매에 들어버립니다. 무념상태에 바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무념상태가 지속되면 삼매에 듭니다. 삼매가 지속되면 견성을 합니다. 휘일은 무념상태에 들어 일주일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7일 후 저승사자가 잡으러 오니까 휘일이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무념상태가 되어 있으니까 저승사자에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고 있으면 잡아 가겠는데 생각을 하지 않는 무념상태에 들어가 버리니까 휘일이라는 사람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참선한다고 앉아 있어도 귀신 눈에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저승사자가 염라대왕한테 가서 휘일이를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고 보고합니다. 이것이 무념입니다. 


우리가 참선한다고 앉아 있어도 잠시도 무념의 상태가 되지 않습니다. 끝도 없이 생각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숨이 멈추어도 죽고 심장이 멈추어도 죽고 생각이 끊어져도 죽습니다. 생각을 제대로 멈추려면 선정에 들어 무념상태가 되면 됩니다. 본래 성품을 보는 방법 중에 하나가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집중을 하다 보면 무념이 되고 삼매에 들어갑니다. 견성을 하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칠식의 업의 덩어리를 깨고 들어가야 합니다. 깨고 들어간다는 무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집중하여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끝도 없이 가라앉히면, 고요하여 모든 것이 보이고 들립니다. 뚫고 들어간다는 상태나 끝도 없이 고요해지는 상태는 같은 것입니다. 전부다 가라앉아 고요해지면 미세한 흔적의 움직임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가 일으키는 칠식의 거친 생각은 그냥 눈에 보입니다. 팔식은 끝도 없이 고요해지지 않으면 흔적이 너무나 미세하여 안 보입니다. 끝도 없이 무념상태가 되어 적정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의 설명입니다. 그렇게 되면 번뇌망상에 의해 가려졌던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견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되어야 본래 성품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념이 지속적으로 연결이 되는 삼매가 되면 어느 순간 탁 터지는 것입니다. 무념, 무상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을 무심도인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무주에서 사는 것입니다. 무주를 근본으로 하며 사는 것입니다. 업의 창고에 있는 것을 꺼집어내어 쓰지 않는 것이 머무르지 않는 상태이며 바로 무주입니다. 응무소주의 소는 업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저장창고의 것에 머물지 않는 상태가 무주입니다. 집중해서 뚫고 지나간다는 것은 칠식에 머물지 않고 지나는 것입니다. 집중을 해서 뚫고 지나간다는 것이 끝도 없이 고요해져서 무념상태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뚫고 지나간다는 것은 칠식을 지나 제 팔식 근본 창고에 직접 연결되는 것이며, 고요해져 무념이 되는 것은 제팔식이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본다면 김성규는 김성규로, 김재훈은 김재훈으로, 양우석은 양우석으로 보이며 자기 것을 갖고 평생 써먹습니다. 이것을 깨뜨리고, 뚫고 지나가서, 끝도 없이 가라앉히면 바닥에 깔려 있는 청정이라는 공통 내용을 보는 것입니다. 무념이 되면 김성규도 이 바닥에 발을 딛고 있고 김재훈도, 양우석도 전부다 이 바닥에 발을 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닥을 보면 전부다 연결되어 있고 다 같은 것입니다. 공부하기 쉬운 방법이 이뭐고? 화두를 들거나 전생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끝도 없이 하다 보면 생각의 뿌리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이 없어져 버리고 무념에 들어갑니다. 집중이 목적이 아니라 집중을 하다 무념상태가 됩니다. 무념상태가 지속적으로 되면 바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드러나는 것은 제 팔식을 보는 것입니다. 제 팔식의 움직임은 너무 미세하여 감지가 안 됩니다. 염념상속,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생각, 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으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육신을 떠나게 됩니다. 바로 한 생각이 끊어지는 순간 법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지나간 생각, 지금 생각, 다음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제 칠식이라는 중류의 흐름이 끝도 없이 연결됩니다. 생각을 집중하자는 것은 이 중류의 흐름을 끊는 작업입니다. 끊고 보면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새로운 본래의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상은 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세상은 전부다 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을 갖고 판단합니다. 밖으로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이 무상입니다. 우리는 상에 집착을 합니다. 모양을 여의면 무상인데 모양을 여의지 못하고 그 모양을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가 청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상으로 본체를 삼는 것인데, 우리는 물들어 있는 모양대로 보는 것입니다. 물들어져 있는 모양대로 인식을 합니다. 무상은 물들기 전의 원래 청정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눈을 통하여 보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일정한 모양의 형태로 업의 창고에 저장합니다. 창고 속에는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행위한 모든 것이 나름대로의 모양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계속 그것을 끄집어내 씁니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그것을 내 것으로 생각하고 누구는 틀리고 누구는 안되고 등으로 분별합니다. 

내가 공부했는 것도 전부다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다음 생에 부딪히면 익숙합니다. 한 번 들었는데 외우기도 합니다. 혜능은 금강경 한 마디 듣고 깨쳤습니다. 전생에 깨쳐서 알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지나가면서 들어도 깨친 것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어떻게 변할까? 무엇이든지 전부다 정답이 있는데 그것을 모릅니다. 혜능은  전생에 다 보았던 것이기 때문에 지나가면서 소리만 듣고도 알았던 것입니다. 전생에 공부했던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생에서 공부하기 훨씬 쉬운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끄집어내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양을 여의는 것을 무상이라고 합니다. 


무상은 내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들을 넘어서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 한 무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항상 우리는 그것을 갖다가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제 칠식인 마나식의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을 내 것으로 평생동안 써먹는 것입니다. 그 모양으로 인식된 대로 사용합니다. 경계에 물든다는 것은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그 모양 그대로를 인식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경계에 물들지 않으면 바로 무념이 되는 것입니다. 집중해서 끝도 없이 고요해지고 가라앉히다 보면  무념에 다다르게 되고 마나식을 뚫고 지나가 바닥에 닿게 되어 아뢰야식을 보게 됩니다. 이 상태를 경험해보지 않으면 똑같습니다. 이론적으로 안다고 하는 것은 실습하기가 쉽습니다. 생각을 하다가도 거기에 가게 됩니다. 모르면 거기를 가도 무엇인지 모릅니다. 무념이 지속되면 견성이 옵니다. 세상은 자신과 법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의 몸뚱이가 자신입니다. 나 이외의 대상은 전부다 법신입니다. 세상은 나와 대상 두 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의 본래 성품이 자성이고, 법신의 본래 성품이 법성입니다. 두 개를 합한 것이 불성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성은 법성에 속합니다. 그래서 법성 = 불성이 되는 것입니다. 


무주는 응무소주입니다. 소에 응당히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소는 심소법입니다. 나라는 창고에는 전생에 행했던 업이 저장되어 있고 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과 눈을 통해 그림을 본다거나, 귀를 통해서 강의를 듣는다거나 하면 주물을 떠 놓은 대로 제품을 만들어냅니다. 머문다고 하는 것은 그 생각에 얽매여 있는 것이고 얽매이지 않는 것은 머물지 않는 것으로 무주입니다. 

어떤 사건을 보면 내가 갖고 있는 저장창고에 머물지 말고 바닥으로 보아라. 색칠해진 것을 보지 말고 색칠하기 전의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대로 반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근을 통해서 무엇을 감지하면 내가 갖고 있는 저장창고와 작용하여 자기 제품을 만들어서 냅니다. 이것이 평생의 삶입니다. 무주는 무엇이 들어오면 내가 갖고 있는 저장창고를 통과하여 들어온 것이 그냥 투사되는 것입니다. 견성한 상태에서는 무주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습니다. 이때 뜰 앞의 잣나무는 조주가 갖고 있는 업의 창고를 거치지 않고 무주에서 나온 소리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동산은 마삼근이라 했습니다. 이 마삼근도 동산의 저장창고를 거치지 않고 무주에서 나온 소리입니다.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나 동산의 마삼근이나 무슨 답을 했던 간에 그 답은 모두 같은 소리인 것입니다. 다르면서도 같은 것입니다. 내 업에 물들어서 나온 소리라면 다 틀립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고 물었을 때 본래성품을 보고 한 소리는  ‘김성규는 앞에 서 있네’와 ‘김재훈은 왼쪽 구석에 있네’ 둘 다가 정답이며 다르면서 같은 답인 것입니다. 응무소주가 되면 화두에서 나온 답들이 다 다른 양상을 갖고 있지만 전부다 같은 소리인 것입니다. 6x6은 36으로 맞는 것이고 7x7은 49로 맞다는 것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누구는 6x6은 36이라 하고 누구는 7x7은 49다 합니다. 다르지만 둘 다 맞는 답인 것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과 결합함으로써 머무는 것이 됩니다. 얽매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뇌망상을 일으키고 끝없이 얽매이고 머무르게 됩니다. 내가 갖고 있는 업의 창고에 머물지 말고 무주가 되어 본래 성품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은 들어있는 것에 결합이나 변화가 없이 그대로 반사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무거운 장애,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번뇌망상, 제 칠식,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나면, 번뇌장을 끊고, 여의고, 무념이 되고, 본래 성품을 보게 되면 해탈을 하며 열반을 증득합니다. 바로 아라한이 됩니다. 초기 불교에서의 목적이 번뇌장을 끊음으로써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법신의 무거운 장애. 나 이외의 대상의 무거운 장애를 해결하는 것을 소지장이라 합니다. 나는 주체고, 나 이외의 대상은 객체입니다. 이 객체가 갖고 있는,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번뇌를 끊는 것은 보리이며 성불이라고 합니다. 이때 깨달음은 나와 대상 전부를 깨친 견성성불의 상태의 깨달음입니다. 성불한다는 것은 부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자성과 법성, 두 개 다를 보는 것이 성불입니다. 견성을 하고 보림을 하여 깨달음이 자신을 넘어 법신도 같이 알게 됩니다. 나의 본래 성품, 자성을 보는 것이 견성입니다. 자성을 본다는 것은 무념이 되어 열반적정이 되면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미세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 팔식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견성은 원래 성품, 제 팔식의 움직임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평생 행위 했던 업에, 그 오염에 물들지 않은 상태를 청정이라고 합니다. 


안팎이 사무쳐 밝은 것이 내외명철입니다. 안이라고 하는 것은 안, 이, 비, 설, 신, 의의 나 자신입니다. 밖이라고 하는 것은 색, 성, 향, 미, 촉, 법.의 대상입니다. 자성도 알고 법성도 아는 것이 바로 내외명철입니다. 안팎이 사무쳐 밝다고 하는 것은 안과 색이 하나이며 이와 성이 하나이며 비와 향이 하나이며 설과 미가 하나이며 신과 촉이 하나이며 의와 법이 하나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외명철이 되면 눈이라고 하는 것과 대상인 모양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아는 것입니다. 안과 색은 원래 같은 것입니다. 나에게 들어와서 사무치니까 눈이 되고 귀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깥으로 나와 흩어지면 대상이 되고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눈과 대상, 형상은 하나이기 때문에 보면 아는 것입니다. 부처를 이루고 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인과를 알게 됩니다. 모든 생물의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내외명철입니다. 우리는 대상과 분리가 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은 내 눈이고, 보이는 것은 대상이고 두 개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대상을 볼뿐 대상을 알지는 못합니다. 내외명철이 되면 눈과 색이 하나이며 내 마음 속 생각을 알듯이 눈으로 보면 대상을 그냥 알게 됩니다. 내외명철이 되면 전생이나 인과 등을 보면 그냥 아는 것입니다. 내외명철이기 때문에 숙명통이 열립니다. 자신의 전생만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전생도 보면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외명철의 상태는 견성성불한 상태입니다. 육신통도 다 이루어지게 됩니다. 


삼귀의는 자성삼귀의입니다. 삼귀의의 불법승이 깨달음, 올바름, 순수함으로 확장 보편화됩니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께서 깨친 법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는 삼귀의가 깨달음에 귀의하고, 올바름에 귀의하고, 순수함에 귀의하는 것으로 자성삼귀의로 해석함으로써 불교에 머물지 않고 불교사상을 세계의 사상으로 확대시킵니다. 


돈오, 육조혜능이 누군가가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칩니다. 깨달음이란  순간에 일어나는 돈오입니다. 공부도 하는 과정에서는 공부가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지만 계속 하다보면 어느 순간 터지게 됩니다. 바로 돈오가 일어납니다. 공부가 안되는 것 같지만 조금씩 쌓이는 것입니다. 쌓이는 것이 경계를 넘어서면 그 순간 터지는 것입니다. 돈오는 가우스 함수와 같은 것입니다. 가우스 함수는0부터 0.999까지 갈 때는 계속 0입니다. 그러다가 1이 되는 순간에 1이 됩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이 딱 오는 순간 깨닫는 것이지 깨달음이 오기 전까지는 끝도 없이 공부가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은 바로 탁, 탁, 탁 튀는 것입니다. 가우스함수와 같이 뚝, 뚝, 뚝 이렇게 됩니다. (그림) 이 생각, 저 생각, 오만 생각 다 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가 되며 무념이 됩니다. 무념이 되면 무념을 깨뜨리는 계기가 생깁니다. 무념상태가 계속되면 줄탁동시가 일어나 그것이 딱 깨뜨려지는 순간이 옵니다. 병아리가 부화를 해서 밖으로 튀어 나와야 되는데 어미 닭이 탁 껍질을 깨는 순간 병아리와 줄탁동시가 이루어질 때 병아리는 부화해서 튀어나오게 됩니다. 무념이 지속되다가 어느 순간은 탁 터집니다. 그 터지는 순간이 돈오의 순간입니다. 순간적으로 깨달음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부는 근기에 따라 빨리 되는 사람도 있고, 늦게 되는 사람도 있고, 집중이 잘 되는 사람도 있고, 안 되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은 깨달음에 다다라서 깨닫는 순간은 다 한순간입니다. 바로 돈오입니다. 혜능도 오조홍인 밑에서 한 번 듣자 그 말끝에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던 것입니다. 


공부가 익으면 어느 순간 이 상태가 됩니다. 공부가 익기 전까지가 문제입니다. 공부하자 하는 것도 어느 순간 올 돈오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달음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육조단경에서도 돈오일 뿐입니다. 원래 돈오일 뿐인데 긴 세월을 거치면서 불교의 깨달음을 육조단경으로 한 번 더 돈오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에 깨쳐서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에 깨치게 하는 것이 육조단경을 설하는 목적입니다. 단박에 가는 방법은 화두입니다. 본질에 들어갈 수 있는 많은 연구도 했고 방법도 제시했지만 화두법만큼 쉬운 방법이 없습니다.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방법입니다. 화두가 어려운 것은 화두를 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화두를 드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미분, 적분을 배우고 미분, 적분을 이용한 문제를 풀면 됩니다. 미분, 적분도 배우지 않고 미분, 적분을 이용한 문제를 풀려고 하면 문제가 풀리겠습니까. 화두라는 것도 불교가 무엇인지 알고 화두를 들면 엄청 쉽습니다. 불교가 뭔지도 잘 모르고 화두를 들 때는 세상에서 이것보다 황당한 공부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연기도 공부하고 구사론이나 유식도 공부하고 금강경도 공부하여 불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상태에서 선불교의 화두법을 접하게 되면 쉬워집니다. 무념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이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생각을 집중하고 모으는 데 화두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전공부나 기도나 화두나 공부하는 모든 것은 깨달음에 가는 방법이고 도구일 뿐입니다. 화두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일어나는 모든 번뇌망상을 화두 하나에 모으는 것입니다. 딱 모이는 순간, 돈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깨치기 전까지 화두도 팔만사천번뇌와 같은 하나의 번뇌일 뿐입니다. 모든 번뇌를 이 하나에 모으는 도구일 뿐입니다. 모으다 보면 무념에 이르게 되고 좋은 결과가 생기게 됩니다. 


육조 밑에는 견성한, 걸출한 다섯 명의 제자가 있습니다. 남양혜충이 그 중 한분입니다. 남양혜충은 박애산에 들어가서 40년 동안 문 밖을 나오지 않은 전설적인 수행자입니다. 그 당시 남양혜충이 수행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남전, 귀종, 마곡이 남양혜충을 찾아갑니다. 남전은 조주의 스승입니다. 남양혜충한테 가는 길은 너무 멀어요. 한참 가다가 남전이 꾀를 냅니다. 길 바닥에 원을 그려 놓습니다. 스님들 제가 원을 그렸는데 이 화두를 풀면 남양혜충 선사한테 갈 것이고 못 풀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귀종은 원 안에 들어가 큰 절 올립니다. 그러자 마곡은 원 안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앉는 것입니다. 남전은 두 분 다 틀렸다고 하면서 남양혜충에게 가지 않고 절로 돌아옵니다. 남전이 낸 이 원상화두는 가장 절묘한 화두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유명한 화두입니다. 여기 원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후기를 보면서 마무리합니다. 

이 단경은 상좌인 법해스님이 모은 것이다. 법해스님이 돌아가니 같이 배운 도제스님에게 부촉하였고, 도제스님이 돌아가니 문인 오진스님에게 부촉하였는데 오진스님은 영남 조계산 법흥사에서 지금 이 법을 전수하고 있다. 만약 이 법을 부촉하려면 모름지기 상근기의 지혜라야 하며 마음으로 불법을 믿어 큰 자비를 세우고 이 경을 지니고 읽어 의지를 삼아 이어 받아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법해스님은 본래 소주 곡강현 사람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시고 법의 가르침이 동쪽 땅으로 흘러서 머무름이 없음을 함께 전하니 곧 나의 마음이 머무름이 없다. 진정한 보살이 참됨 종취를 설하고 진실한 비유를 하여 오직 큰 지혜의 사람만을 가르치니 이것이 뜻을 의지하는 바이다. 무릇 제도하기를 서원하고, 수행하고 수행하되 어려움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않고 괴로움을 만나서도 능히 참아 복과 덕이 깊고 두터워야만 비로소 이 법을 전할 것이다. 만약 근성이 감내하지 못하고 재량이 좋지 못하면 모름지기 이 법을 구하더라도 법을 어긴 적 없는 이에게는 망령되어 단경을 부촉하지 말 것이니, 도를 같이 하는 모든 이에게 알려 비밀한 뜻을 알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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