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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11강 일행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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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845회 작성일 21-08-13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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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강 일행삼매 



선불교의 최첨단에 서서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육조단경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혜능이 이곳 대범사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 도교인, 속인들과 오랜 전생부터 많은 인연이 있어서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신 것이다. 혜능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듣고 나서 스스로 미혹함을 없애어 옛 사람들의 깨침과 같기를 바란다. 혜능대사가 말하였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 선지식들아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룰 것이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서 근본을 삼는다. 첫 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정은 혜의 몸이요, 혜는 정의 씀이니 곧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는 것이다.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과 혜가 함께 함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에 두 모양이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혜와 정이 함께 함이 아니며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 가지면 정과 혜가 곧 함께 함이다.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 다투는데 있지 않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하는 것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이 생겨 내 모양을 버리지 못함이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일행삼매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도리어 법의 아집이 생겨 내 모양을 버리지 못함이다.” 내 모양은 우리가 태어나서 머물다가 멸하고 죽는 생주이멸을 이야기 합니다. 혹은 금강경에 나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사상을 생각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법의 아집이 생겨 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생주이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육조단경에 나오는 일행삼매의 삼매는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반야심경의 첫 구절에 나오는 이 내용이 결국은 반야심경의 결론이며 이 삼매를 의미합니다.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 다는 것은 우리가 선정삼매에 들어서 그렇게 살자는 것입니다. 삼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심리학자들은 삼매를 체득하는 방법으로 명상을 개발합니다. 이 세상에 끼친 가장 큰 혁명이 세계인을 명상에 미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약 2005년 미국의 뉴스위크지에 미국 성인의 1/3이 어떤 형태로든지 매일 명상하고 있다는 것을 통계로서 발표를 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이나 전 세계인들이 명상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삶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견성성불도 명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삼매를  현대용어로 표현하려고 하니 명상이라는 것이지, 결국 목적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단지 발을 조금만 담그고, 현대 옷을 입고, 힙합을 춰가면서 하는 거나 그렇지 않으면 옛날같이 다리 틀고 앉아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가는 거나 결국은 가야 될 목적지는 같은 겁니다. 현대인들에게 이렇게 쉽게 전파 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인 어려운 방법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걸어면서 생각하라는 겁니다. 밥 먹으면서 생각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명상이라는 것에 접근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새로운 트렌드로서 삶을 생각하는데 있어 매일 직장생활 마치고 명상이라는 항목이 삶의 일부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명상의 방법으로는 집중명상과 통찰명상이 있습니다. Insight Meditation통찰명상은 위빠사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Concentration Meditation집중명상은 사마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개를 현대용어로 표현 했을 뿐이고 삶 속에 쉽게 접목해서 그냥 하고 있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참선을 한다 혹은 좌선을 한다 또 명상을 한다 관조를 한다. 정념, 위빠사나를 하고 정정, 사마타를 한다 하는 모든 것이 추구하는 목적은 삼매에 들어 무념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어있는 상황이 지속되면 견성하여 본래의 성품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념을 해야 하고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견성을 하고 나면 자성인 본래 성품을 보게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고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의 법성,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성품을 깨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견성의 내용에는 두 가지 다가 있고 그래서 견성을 하고 나면 끊임없는, 끝도 없는 정견이 나옵니다. 정념과 정정을 통해서 정견이 되지만 또 정견은 정념과 정정의 내용으로 정견이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결국 자성과 법성을 깨치고 나면 내외명철이 이루어집니다.

삼매도 결국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육조단경에서 일행삼매, 삼매 앞에 한 가지 행, 삼매를 이루고 나면 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행 밖에 안 나타납니다. 이것을 여기에서는 곧은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행삼매란 일상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삼매의 상태에서 행위 하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항상 곧은 마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마경에 곧은 마음이 바로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라고 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자성과 법성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므로 곧은 마음이 바로 자성이고 곧은 마음이 바로 정토이며 법성입니다. 오직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성자로 추앙 받는 사람이 마하리쉬입니다. 마하리쉬는 삼매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 했느냐하면 “고요한 마음에 의해, 우리 존재와 의식,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의식, 존재하는 것들, 존재와 의식의 끊임없는, 간단없는 체험을 성취한 것이 바로 삼매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어있음, 알아차림, 이것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상태를 삼매라고 하면서 본연무상삼매, 합일무상삼매, 유상삼매 세 가지로 나눴습니다. 본연무상삼매(本然無相三昧, Sahaja nirvikalpa samadhi)는 본인의 에고를 최종적으로 완전히 소멸시켜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유식에서 모든 번뇌망상은 구생혹과 분별혹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분별혹은  초지보살만 되면 다 없어지는데 구생혹은 견성하고 난 다음에도 전생의 습이 남아 계속 남아있는 것입니다. 칠지보살을 넘어서야 구생혹이 소멸하기 시작합니다. 팔지보살인 부동지를 이루고 나면 구생혹이 모두 소멸하고 본연무상삼매가 되는 것입니다. 마하리쉬는 이 본연무상삼매에서 평생을 살으신 분입니다. 합일무상삼매는 견성했다고 했을 때 그냥 없어지는 것은 이 생에서 닦았거나 가벼운 번뇌망상이 다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득력을 했을 때, 간혹 4시간이나, 8시간동안 삼매에 들어보겠다고 앉아서 열심히 부동으로 있어 보면 순간적으로 삼매에 들 수 있는 상황에 도달하게 됩니다. 마음이 부동의 상태에 들어가려고 하면서 육체가 움직이고 있으면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먼저 육신을 참선을 하면서 부동의 상태로 만들고 화두를 들어 마음을 부동의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합리적이고 쉬운 방법은 육체도 참선이나 좌선의 자세로 정지 시켜놓으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한 군데에 집중시키기가 쉽다는 겁니다. 이 방법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다 가능하지만 그래도 가장 쉽고 합리적이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것은 좌선이나 참선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공부가 익으면 움직이면서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의 처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생에 공부를 많이 했던 사람들도 첫 삼매에 들기까지에는 최소한 8시간은 정신과 육체가 부동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어야 삼매에 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루 한 시간씩 참선을 하는 것이나, 하루 종일 참선을 해 본다거나 하는 것은 결국 삼매에 들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입니다. 한 번 삼매에 들고나면 그 다음은 삼매에 쉽게 들 수 있습니다. 첫 삼매에 든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힘이 들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다음부터 쉽게 삼매에 들 수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바로 이 삼매입니다. 공부를 왜 하느냐? 우리가 삼매에 가장 쉽게 합리적으로 잘 들 수 있는 방법을 생활과 삶 속에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상도 하고, 참선도 하지만 결국은 내가 꼭 해야되겠다는 의지를 갖고 행해야 되고 또 그렇게 하다보면 재미가 붙게 됩니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을 공부시킬 때 야 너 만점 받으면 돈 만원 줄게. 선물 사 줄게. 이렇게 해서 공부를 시키듯이. 처음에는 그렇게 공부를 했지만 재미가 붙으면 공부 하지말라고 해도 공부를 해요. 공부하는 것도 어느 단계까지 넘어가면 세상에 이 공부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다른 것보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뭔가 소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끝까지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공부는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하라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스승 없이 혼자서 하다 보면 조금만 가다가 못해요. 그러니까 삼매까지 가기 위해서는 여럿이 공부하고 또 스승과 더불어 같이 공부하다 보면 여기까지 가기가 쉬워요. 그래서 한 번 정도는 4시간 앉아 있어 봐야 되겠다고 목표를 세워 보세요. 다리가 깨지든 죽든, 머리가 깨지든 간에 한 번 4시간은 앉아 있어 봐야 보면 다음에는 문제 될 것이 없어요. 뭐든지 엄청나게 쉽습니다.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스리는 선생이라는 경칭입니다. 라마나는 이름입니다. 웨까따라만이라는 이름을 줄여서 라마나라고 부른 것입니다. 마하리쉬는 성자, 대각자라는 뜻입니다. 1896년 십칠 세의 소년인 웨까따라만은 갑자기 내적인 충동에 이끌려 집을 나와 아루나찰나에 도착한 그는 무형의 내재적인 의식이라는 자각속으로 몰입해 들어갔습니다. 몰입이 너무 강렬해 바깥 세상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앉아 있는 그의 두 다리는 곤충들이 갈아먹어 들어갔고 음식을 먹을 의식도 없었습니다. 삼년정도를 거의 이렇게 선정삼매에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 라마나 마하리쉬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3년이 지나고 난 다음  그의 몸이 서서히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더 보탠 것도 없고 실질적으로 본인이 겪었고 그리고 또 1900년대 우리와 동시대에 살았던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 다 잘 압니다. 1950년 까지 살아 계셨는데 바로 이 분이 계셨던 아루나찰나에 있는 아쉬람에는 세계 최고의 석학들, 수행자들, 능력자들 다 모여들었습니다.  한 분의 대각자의 능력이 결국은 세상의 트렌드를 바꾸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명상의 붐을 일으키게 만든 그 뿌리가 이런 분들이 크게 기여를 했다는 겁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의 원천은 견성성불입니다. 마하리쉬가 이런 선정삼매에 들었다는 것은 어느 누구든 공부하다 미치면 이렇게 될 수 있는 건데 이렇게 한 번만 발 들여놓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이 정도 능력 이라면 전생에 부처님의 10대 제자였거나 이에 준하는 대단한 능력을 갖고 계셨던 분이 아니였겠나 싶습니다. 궁금하면 우리가 또 공부해서 알아보면 됩니다.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행과 말이 다른 것은 바로 삼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바로 부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결국 불교의 모든 것은 아는 것으로 끝나요. 행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의 몫입니다. 행하지 않는 것은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잘 알면 아는 것은 바로 제대로 행을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100%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이 육신은 평생을 데리고 있어도 제 편한대로 하려고하기 때문에 주인이 이 육신을 이기려고 하면 이 습을 이겨내야 됩니다. 이 육신은 아무리 잘해줘도 더 누워있고 싶어하고 더 쉬고싶어하고 더 자고싶어하고 제 편한대로 하기 위해서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석달만 해보세요. 그다음부터는 4시간만 자도, 평생을 그렇게 자도 크게 불편한 게 없습니다. 우리는 추구하는 삶이 육신의 삶이 아닙니다. 육신도 건강해야하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는 정신이 바르고 건강해야 결국은 정신을 끌고 다니는 육신도 건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다를 잘 해야 합니다. 



조선시대 진묵대사는 신통제일이었습니다.  타고나면서부터 신통을 갖고 있었고 평생을 그 신통을 써먹으면서도 수행자로서 멋드러자게 사신 분이 진묵대사입니다. 조선시대 역사에 남아있는 수행자 중에서 한 달 이상 삼매에 들어있었던 유일한 기록을 가진 스님이 진묵대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7살 때 스스로 봉서사를 찾아가서 출가를 합니다. 이 봉서사의 교구 본사인 큰 절이 대흥사입니다.  봉서사에서 7살에 출가해서 7, 8년 불교공부를 하면서 스승 시중을 들면서 사미시절을 보냈는데 한 15살 즈음에 어느 날 점심 공양시간입니다. 점심공양으로 상추를 씻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스님들이 맛있게 먹는다고 기다리고 있는데 진묵스님이 상추를 씻고 있다가 갑자기 상추에 물을 묻여서 계속 뿌리는 겁니다. 옆에서 지금 스님들 기다리신다고 빨리 상추 씻어서 가지고 오라고 해도 기다리라고 하고 계속 공중으로 물을 뿌리는 것입니다. 30분 정도 뿌리더니 땀 닦으면서 ‘이제 큰 불은 껐네.’ 하면서 ‘무슨 일 있습니까?’하니 지금 스님들이 점심공양 상추 씻어오도록 기다리고 있는데 30분이 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묵스님이 상추 씻어가지고 들어가니까 기다리던 스님들이 화를 내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하니까, 진묵스님이 마침 대흥사 큰 절에 불이 나서 지금 불 끈다고 좀 늦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7살 때부터 신통을 부렸지만 어떻게 대흥사에 불이 난 것을 여기에서 불을 껐겠는가? 이것이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확인하기 위해 스님 두 명을 대흥사로 보냅니다. 실제 봉서사에서 대흥사까지는 한 200리 밖에 안되어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확인하기 위해서 승려 두 명이 떠나려고 하는데 진묵스님 뛰어나와 ‘사형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 부고장 좀 전해주세요.’ 합니다. 부고장, 지금 무슨 부고장이냐고 하니까 우리 스승님이 10일 후에 돌아가시는데 사형들 갔다가 와서 다시 가려고 하면 힘이 드니까 이왕 가는 길에 이 부고장 좀 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3일이면 도착하는 대흥사인데 10일 후에 일어날 부고장을 사형들이 거기에 도착하면 바로 주지스님한테 전해주면 바로 그 시간에 스승님이 열반에 드신다는 것입니다. 첫 째날, 둘 째날은 잘 갔습니다.그런데 셋 째날 갑자기 홍수가 나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일주일을 기다렸다가 대흥사에 도착한 것은 10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대웅전에서 참배를 하고 주지스님한테 진위를 여쭈러 간 시간이 딱 12시입니다. 부고장에 적어 놓은 시간. 우리 스승님 열반에 드신다고 하는 그 시간에 봉투가 주지스님한테 주어진 것입니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진묵스님은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할 만큼 신통이 뛰어났습니다. 아들 못 놓는 사람들에게 아들을 낳게도 해주었습니다. 신장들한테 기합을 넣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들 하나 점지해 주라고 할 만큼 대단한 신통력을 가졌다는 겁니다. 한 번 보기만 보면 전부 다 기억을 해요. 마을에서 사서삼경을  빌려 절까지 가면서 쭉 훑어보고는 다 보았다는 겁니다. 이 정도로 뛰어놨던 분입니다. 진묵대사의 전기를 보면 한달 이상 삼매에 들어있었던 기록이 나와요. 한국에 태어난 그 많은 수행자들 중에는 이런 삼매나 선정이나 신통을 실제 보였던 대단한 분이 바로 진묵대사입니다. 이런 것들은 삼매라는 힘을 통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신통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르면 신통이고 알면 신통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모르니까 그게 신통같이 보이는데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다보면 결국은 집중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삼매에 든다는 것이 결국은 사마타입니다. 사마타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을 한 군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한 군데에 집중하는 방법으로 제일 좋은 것이 한 생각에 모으는 겁니다. 이것을 모으지 않으면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나요. 끊임없이 제멋대로 일어나는 이 생각을 한 가지 생각으로 계속 끝도없이 모으는 것입니다. 끝도 없이 모으다 보면 일이 터져요. 선정에 들고, 삼매에 들고 결국 일이 터져 견성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집중하다 보면 지혜가 생기는 겁니다. 지혜인 위빠사나는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명상을 하느냐? 결국 이런 것들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통찰과 집중을 특징으로 하면 깨어있음이 소득과 이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도없이 위빠사나를 통해서 통찰과 집중을 하고 이 통찰과 집중을 함으로써 결국은 마지막 깨어있음의 목적이 바로 부처입니다. 목적지가 바로 부처입니다.  


불교가 전래된 경로는 중국을 통하여 한국 일본으로 전해진 북방전래와 스리랑카를 통해서 동남아시아 쪽으로 전해진 남방전래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전래 중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은 남방불교 쪽입니다. 그래서 비록 5세기경에 청정도론, 윗수디막가가 완성되었지만, 부처님 당시의 그 내용을 그대로 갖고 있다고 우리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부처님의 원음에 가장 가까운 것을  찾을 때 이 청정도론을 참고로 합니다. 

최근에 발견된 것 중에 무애해도, 빠디삼바다막가라가 있습니다. 무애해도는 B.C. 250년경에 성립된 아비달마시대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부처님의 원음이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경전입니다. 무애해도에서 부처님 당시에 어떻게 신, 수, 심, 법의 사념처를 설명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서 호흡을 가르쳤고, 알아차림을 가르쳤던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본다면 부처님 당시에 가르쳤던 가르침들이 얼마나 뛰어나고 명쾌했느냐 하면 지금 우리가 배우는 거나 그때 그 당시 가르침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때도 수행자들이 어떻게 집중하고 관조할 수 있도록 가르쳤는가, 알아차림을 이렇게 쉽게, 우리의 생활 속에, 우리의 삶 속에 적응 될 수 있게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무애해도의 내용입니다. ‘삼매를 닦을 지어다,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을 지어다. 비구들이여 삼매에 든 비구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어떠한가? 무엇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고 하는가? 눈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시각대상인 눈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시각대상인 색에 대해서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의식, 안의 안식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접촉인 촉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수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18계의 근, 경, 식이 합해져 부딪히는 것이 촉입니다. 의식이 생기는 모든 것은 바로 촉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촉이 되면 그다음에는 수가 생깁니다. 눈으로 봐도, 눈으로 본 것의 수가 생기고 귀로 들어도 귀로 듣는 것에 대한 수가 생기고 코로 냄새를 맡아도 냄새 맡는 것에 대한 수가 생기고 어떻게 하든 촉 다음에는 수가 일어나게 됩니다. 눈의 접촉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눈의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즐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느낌인 수가 그다음에 일어납니다. 촉 다음에는 수가 유발되고 수가 생기는 것입니다. 수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사념처를 통해서 무념과 삼매를 공부한 것이고 결국 무념과 삼매를 통해서 해탈과 열반을 얻게 되는 것임을 가르쳤습니다. 

삼매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우리가 인식을 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현량이 있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속에서 그것을 판단하여 인식하는 비량이 있습니다. 지금 물고기가 떼를 지어서 흘러가요. 움직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림을 전부 다 보았습니다. 물고기가 이동하는 그림을 전부 다 똑같이 봤는데 우리 눈으로 저 물고기에 딱 부딪히는 순간은 눈이 저 그림을 보는 순간으로 안식이 일어납니다. 안식이 작용하고 난 다음에는 저 물고기 형태를 보면서 물고기들이 아름답네?  물고기들이 어떻게 질서정연하게 잘 움직이지? 안식의 내용을 보고 내가 뭔가 판단을 일으키는 의식이 작용합니다. 저 물고기를 보는 순간 우리는 내 의식 속에 들어있는 과거의 생각을 한다거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또 결부시켜 생각한다거나, 어릴때 친구들하고 초등학교 시절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던 생각을 순간 떠올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고기 그림을 보는 안식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데, 다음 일으키는 의식은 모두가 다릅니다. 현재의식이나 내 저장창고에 들어있는 것을 끄집어내서(마나식, 제7식) 생각할 때는 전부다 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은 있는 것을 있는 것대로 보는 현량이고, 제 6식인 현재의식과 제7식인 마나식은 있는 것을 다르게 보는 비량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쳐서 보려고 하는 본래성품인 제8식인 아뢰야식은 물들기 전의 인식이니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현량입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내 눈이 닿는 순간인 안식은 여기 있는 모두 다 똑같이 인식합니다. 그다음 의식은 모두 다 다릅니다. 자기 속에 저장되어 있는 저장창고에 있는 것을 끄집어 내어 생각할 때도 또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육식과 칠식은 항상 우리의 분별심에 의해서 다 다르게 판단합니다. 이것이 비량입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비량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청정한 겁니다. 물들기 전의 것을 보자는 겁니다. 우리는 수십 생을 살아오면서 전부다 물들어져 있는 것만이 지금 내 속에 다 저장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물들어있는, 어떤 경험에 의해서, 어떤 삶에 의해서 저장되어 있는 그 모양들이, 형상들이 전부다 내 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끄집어냈으니 전부다 사람마다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들었다, 오염되어 있는 것을 걷어버리면 전부다 똑같아요. 물들기 전의 본래 성품은 다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현량입니다. 전5식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까지는 물들기 전이니까 다 똑같습니다. 이것도 현량인 것입니다. 업에 의해 물들어 내 분별심으로 번뇌망상을 끝도 없이 일으키는 것이 제육식이고 제칠식이며, 살아가는 평생 삶은 바로 이 제칠식에 대한 삶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끝도없는 내 저장창고에 들어 있는 것을 맞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평생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룬 내 모습이 바로 내 저장창고의 것을 끄집어 내어 쓰면서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현량과 비량에서 결국은  우리가 추구하자고 하는 것은 물들기 전의 것, 청정한 것, 본래 것을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들고 나면 다 다르지만 물들기 전의 것은 다 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청정법신은 하나입니다. 깨치기 전의 이것이 개한테도 들어갈 수가 있고, 우리 사람한테도 들어올 수도 있고, 사람한테 들어와서는 사람같이 써먹는 것이고 개한테 들어가면 개같이 써먹는 것이지만, 깨치고 나면 바로 그 법성이라는 것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깨치기 전에는 전부 분리된 다 다른 것입니다. 문제는 같다는 것만 알아버리면 됩니다. 신통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생깁니다. 원래 다 같은거니까. 그냥 아는 겁니다. 


같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집중해서 삼매에 들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육식과 칠식을 뚫고 제팔식까지 갈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하기 위해서는 삼매에 드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이것은 세상 어느 누가 어떤 가르침을 어떻게 편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문제에 도달하는 방법은 삼매에 드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삼매라는 것은 순수함, 본래청정, 물들기 전의 것,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삼매를 들어야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생각하는 것, 명상하는 것, 뭔가 마음을 쓰는 것, 전부다 결국은 삼매의 흔적들입니다. 삼매로부터 나오는 삶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생각하면 생각 안 하는 사람보다 조금 더 잘 살 수 있어요. 이것을 제대로 뿌리까지 아는 것. 그것이 결국은 우리가 삼매까지 가는 겁니다. 삼매에서 하는 행동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일행삼매입니다. 삼매에 들면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몸둥이는 안이비설신의로 이루어져 있고 대상은 색석향미촉법입니다. 눈은 어때요? 형상을 보기만 봐요. 귀는 소리를 듣기만 들어요. 결국 모를 때는 이게 두 개지만 알고 나면 안과 색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니까 형상을 보고 아는 겁니다. 집중을 통해서 삼매에 들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정과 혜에 의해서 삼매에 들며 정과 혜는 같은 것입니다. 정이 나무의 뿌리와 줄기에 해당하며 혜는 나무의 가지나 잎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뿌리는 본체에 해당하고 잎은 작용에 해당합니다. 뿌리가 튼튼한 사람은 정을 잘하는 사람이고, 줄기가 튼튼한 사람. 잘 못 써먹는 사람은 정과 혜로 따질 때 정이 7이고 혜가 3쯤 된다면 엄청난 많은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잘 못 써먹습니다. 그런데 정이 3이고 혜가 7인 사람은 능력은 덜 한데 훨씬 더 잘 써먹는 것입니다. 바깥에서 보면 저 사람이 큰 도인이다. 도인을 엉뚱한데 앉혀놓고 엉뚱한 사람을 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이 튼튼한 사람은 가만 있어도 신통이 잘 생기는 사람이고 혜를 잘 쓰는 사람은 신통을 부릴려고 해도 잘 안부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면서도 두 개고 두 개이면서도 하나인 것으로 그래서 바로 본체와 작용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삼매에 든다, 선정에 든다는 것은 한 우물을 열심히 파는 사람이 결국은 그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이 생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면 또 사는 방법이 다를 수 있어요. 뭐 좀 즐기면 어때? 즐기고 실컷 놀다가도 이 생뿐이라고 생각하면 끝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윤회한다. 뭔가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고 생각하면 뭔가 이생에서 내가 갖고 있었던 이 능력이 다음 생에도 전달이 된다고 생각 한다면 내가 공부 한 것만큼, 내가 갖고 있는 능력만큼 그 다음 생이 그만큼 쉬운 것입니다. 공부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렵기도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열심히 보면 알아져요. 근데 아무리 열심히 봐도 또 잘 모를 수도 있어요. 열심히 보면 알 수도 있다는 것은 뭔가 전생에 좀 봤기 때문에, 열심히 보다 보면 전생에 했던 것이 튀어나와서 알 수 있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열심히 봐도 모르는 것은 전생에 공부해 놓은, 축적해 놓은 것이 없으면 죽으라고 생각해도 나오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공부해 놓으면 다음 생에도 써먹을 수도 있고 이 생에도 잘 써먹을 수 있어서 이것만큼 더 좋은 게 없습니다.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며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이 된다.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사리불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을 유마가 꾸짖었음이 합당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뭔가 합당한 방법을 택해야하는 것이고 그다음 목적지까지 간 다음에는, 견성하고 난 다음에는 우리가 똑같이 참선해야한다고 다리 틀고 앉아서 그런 똑같은 방법으로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경전에 뗏목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뗏목이 얼마나 중요해요? 그러니까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나를 건너가게 해준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갔습니다. 이 뗏목이 강을 건너는데 중요한 것이지만 저 언덕에 도착해 놓고도 뗏목 중요하다고 그 뗏목을 들고 간다면 얼마나 어리석어요. 뗏목이라고 하는 것은 강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건너고 난 다음에 그게 소중하다고 내가 들고 간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바로 도는 통하여 흘러야한다는 것도 결국 뗏목의 비유와 같은 겁니다. 우리가 목적지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도달하고 난 다음에는 달라져요.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뗏목과 같은 것이다. 바로 여기서 공부하는 것도 결국은 목적지까지, 도달할 때까지는 필요 한 거지만 도달하고 나면 그것은 용도에 따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겁니다.  불교를 잘못 이해해버리면 공부해서 뭐하노? 그렇지만 목적지까지는 죽어라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목적지까지 간 다음에 그때는 공부를 버리더라도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우리는 전부다 겪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6년 동안 고행했듯이 공부의 커트라인은 6년 고행입니다. 그만큼도 노력하지 않고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그냥 가만히 부처 될 거 같으면 누가 못 되겠어요. 부처님께서 그 6년 고행을 보이신 것은 최소한 너희들도 부처가 될려고 하면은 이 정도는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옥중생이 지옥에서 어떻게 살까 싶지만 지옥에 살다보면 또 지옥에 그냥 살아져요. 결국 이 세상 어떤 삶보다도 부처 되고 나면 얻는 이익이 제일 큽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이익을 얻는 삶은 없습니다. 유마경에 유마가 사리불에게 한 내용입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지혜제일 사리불이 좌선한다고 앉아있는 것을 보고 유마한테 한방 얻어맞는 겁니다. 부처님의 제자, 성문, 보살들까지 전부다 유마한테 한소리 듣습니다. 이것은 한 500년 이상 불교가 흘러오면서 역사 속에 고여 있는 잘못된 부분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입니다. 또 진리는 이와 같이 흘러야 된다, 통해야 된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리불은 부처님에게 가장 총애를 받았던 제자입니다. 사리불이 안거 마지막 날 자자시간에 자기를 헐뜯고 비난한 제자를 놓고 사리불이 부처님 앞에서 했던 말입니다. ‘부처님, 저는 이제까지 풀 한 포기 다치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리불의 삶이 풀 한 포기도 다치지도 않게 평생을 살았던 삶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거가 끝나는 날,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비난했겠습니까?’ 

‘사리불, 앉아 있는 것만이 좌선이 아니다.’ 근데 우리가 조금 전에 최소한 4시간은 앉아 있어보라고 했습니다. 도는 흘러야 된다는 것은, 4시간 앉아 있고 난 다음에 버리라는 겁니다. 8시간 앉아 삼매에 들고 난 다음에 버릴 때 그때 버리는 거지. 목적지에 가보지도 않고 이거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알았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힘이 생겨요. 앉아있는 것만이 좌선이 아닙니다. 

좌선이란 생사를 거듭하는 미혹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몸이나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바로 좌선입니다. 좌선이라고 하는 것은 선정 삼매에 들어있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미혹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몸이나 마음이, 마음의 작용을 타나내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좌선이다. 또 깨달음의 길을 걸으면서도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이 좌선이다. 마음이 안으로 갇히어 정적에 잠기는 것도 아니고 밖을 향해 어지러워지지도 않는 것이 좌선이다. 번뇌를 끊지 않은 채 궁극적인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좌선이다.’ 이렇게 좌선에 대해서 살아있는 멋진 법문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앉아있는 것만이 좌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 앉아있는 것을 넘어서서 그 경지에 가보고 난 다음에 이것이 다 통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거쳐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배우고 난 다음에 틀을 벗든, 틀을 깨든, 뭐든 전부 다 관계없는 것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틀을 깨는 것은 벌거숭이가 되는 것입니다. 생활과 격리된 깨달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깨달음의 성취도 바로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여기에 속아서  진정으로 해야 될 공부를 잘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은 참 멋진 말 같은데  우리 세속생활 하면서도 공부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착각하기 쉽게 만드는 구절이지만 결국 도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왜 도가 필요해요? 이 세상을 가장 멋진 화엄의 세계로 만들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한 거고 최고의 삶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가, 깨달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삶과 격리된 것이 아니라 세속과 더불어 같이 있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환상도 허구도 아닙니다. 실제 생활 속에 내재하고 있는 우리 현실의, 이 삶의 향기이며 여운인 것입니다. 사리불에게 유마가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사리불은 ‘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은 깨쳐, 깨어진, 깨쳐있는 상태라고 하면 이렇게 뭐가 항상 통합니다. 껍데기를 아무리 덮어 씌어 놔도 그 껍데기를 깨고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덮어 놓은 껍데기 속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왜 생각을 해야 되느냐? 덮어 쓰고 있는 이 껍데기를 깨는 방법은 생각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세상을 바꾸는 방법,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꾼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만큼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정치인들은 정치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고, 돈 버는 사람은 돈 벌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세상은 내가 바뀌는 것만큼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이 위대한 것입니다. 공부하는 우리만큼 더 절절하게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없어요. 불교의 목적이 우리가 삼매에 들어야 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삼매라고 하는 것을 내 삶과 한번 결부시켜보세요. 일하면서도 삼매, 자면서는 삼매, 무엇을 하면서도 항상 이렇게 생각을 해보세요. 결국은 삼매에 든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삼매에 들 수 없습니다. 생각을 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지고 풍부해지고 또 깊이를 더해가고 멋진 삶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옷 입는다고,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그 어떤 비싼 옷보다도 더 좋은 옷을 입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생각으로부터 전부 다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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