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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2강 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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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679회 작성일 21-07-2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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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무념 


깊은 산속에 선비와 사냥꾼과 호색한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쁜 여자가 옷이 흐트러진 상태로 허겁지겁 튀어나왔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선비와 사냥꾼과 호색한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선비는 ‘방정하지 못한 막되 먹은 여자구나.’라고 생각했고. 호색한은 ‘웬 남자하고 정을 통하고 튀어나오는구나.’라고 생각했고, 사냥꾼은 ‘산 속에 짐승이 많은데 나물 캐다가 짐승을 만나 정신없이 튀어나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두 자기 관점에서 이 여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여자는 약초를 캐러갔다가 약탕관을 불에 올려놓은 것을 깜빡하고 있다가 생각이 나 집으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각자 자기 생각 속에서 그 여자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은 33장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무념, 견성, 삼신(내외명철), 삼귀의, 돈오등이 핵심내용입니다. 

먼저 무념無念을 보겠습니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무념無念은 심소와 작용하여 일으키는 식의 작용이 없을 때 선정에 들어 적정이 되면 무념이 되는데, 이 무념을 세워 종으로 삼으며, 무상無相은 심소와의 작용이 없으므로 상이 만들어지지 않아 상이 없는 것이며, 이 무상을 본체로 삼고, 무주無住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에서 보듯이 재생의 식을 만드는 심소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며, 이 무주를 근본으로 삼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당나라 때 유명한 염관선사가 있었습니다. 염관선사 선방에는 항상 참선납자가 칠팔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휘일이라는 젊은 스님은 연관선사의 이름을 쫓아 제자가 되었습니다. 출가하면서부터 선방 선객들을 후원한 것이 3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날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저승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스님의 명이 오늘까지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30년 동안 스님들을 돌봐준다고 본인은 공부를 한번도 못한 것입니다. 스승께서 일주일만 잘 하면 견성한다고 들은 말이 있어 일주일만 연기해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간곡하게 사정을 하니 저승사자는 염라대왕께 물어보고 연기해 주면 일주일 후에 오겠다고 하고 갔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바로 앉아 선정에 들어 무념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선정에 들어 있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저승사자가 와서 아무리 찾아도 휘일스님을 찾을 수가 없어 그냥 돌아갔습니다.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며 선정삼매에 들면 적정에 이르게 되고 무념이 됩니다. 무념이 지속되면 어느 순간 견성하게 됩니다. 본래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상태를 극저온의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저의 온도는 캘빈온도 K로 0 ⁰K입니다. 보통 온도로 나타내면 –273 ⁰C입니다. 헬륨액체가 –269 ⁰C가 되면 초전도현상, 초유동현상이 일어납니다. 높은 온도에서는 물질속의 열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극히 미세한 운동은 격자진동속에 묻혀 감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초전도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온도를 내리면 극히 미세한 운동까지도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참선을 하여 선정에 들어 적정이 되면 초전도현상의 극히 미세한 운동을 관찰할 수 있듯이 심소법의 제7식에 쌓여 감지할 수 없던 제8식, 아뢰야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본래성품을 보는 견성입니다.   

화두일념이 되면 의정이 생겨 자나 깨나 화두를 들고 있는 상태가 되며, 이 상태에서 선정에 들어 적정의 경지가 지속되면 무념무상이 되고 무주가 되어 무심도인이 되며 초월자가 되며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다보면 자성, 법성 제법등 여러 가지 말이 나옵니다. 그 말들의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불교를 쉽게 알 수 있는데 모르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불교가 어렵다는 것은 불교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나오는 용어들의 정확한 개념을 모르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존재는 나와 대상입니다. 나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체로는 안이비설신의 6개가 있고, 안이비설신의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법이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가 바로 나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이 바로 법신. 나의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하는 법입니다. 모든 법의 모습이 법신입니다. 나의 본래의 성품을 자성이라고 합니다. 법신의 본래의 성품이 법성입니다. 견성한다고 하는 것은 본래 성품을 본다는 것이고, 자성을 보는 것입니다. 법의 성품을 본다는 것은 법성을 보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해탈을 이야기합니다. 해탈은 자성만을 이야기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리를 이야기합니다. 보리는 자성과 법성을 다 포괄합니다. 견성성불을 이야기할 때 견성은 본래성품을 보면 견성이지만 성불은 복덕과 지혜를 갖추어야 부처가 될 수 있어요. 성품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견성하고 난 다음에도 지헤와 복덕을 두루 구족해야 부처가 됩니다.  

법성게를 보면 법성원융무이상이 나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이 제법이고, 제법이 바로 이 법신입니다. 그러니까 제법실상을 이야기할 때는 이 법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법성이라고 하는 것은 둥글고 원융하여서 무이상 하다는 말입니다. 두 가지 모양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보면 “사리자야 시제법공상.” ‘모든 제법 이 법신.’ ‘이 모든 법의 모양 모든 것이 전부다 상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법성의 내용이 그 다음에 나옵니다.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여기까지가 법성 앞부분입니다. 앞부분이면서 법성에 대해서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 능 이야기 할 때 내가 주체일 때 능동적으로 행동한다고 하며 이것이 능입니다. 능에 비해 소라고 하는 것은 대상을 나타내며 대상이 바로 소입니다. 그 소는 모든 법을 포함하고 있는 심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개의 모양이 아니다. 제법부동본래적. 법신이 바로 제법이지요. 제법과 법성을 표현할 때 바다에 물결치고 파도치는 것을 비유해 보면 됩니다. 제법은 파도가 쳐서 일으키는 그 숱한 모양에 해당하고 그 밑으로 들어가면 고요한 똑같은 일정한 모양이 법성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법. 이 모든 법은 부동. 동 움직임이 없어서 본래적, 본래부터 적적하다. 반야심경에서 말했던 시제법공상을 법성에서는 제법부동본래적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적적하다. 화두 공부하면 성성적적합니다. 성성적적할 때 그 적이라는 것이 제법의 모든 것은 부동, 움직임이 없어서 본래부터 적적해서 고요합니다. 바로 극저온으로 들어가면 조그마한 움직임도 우리가 감지 한다고 했지요. 그 조그마한 움직임도 없는 원래의 고요가 본래적입니다. 열반적정입니다. 깨우치면 체득하는 그 상태가 바로 열반적정입니다. 이 마음은 그냥 그대로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다는 겁니다. 무명무상무절일체. 무명, 이름도 없고, 무상, 모양도 없고, 절일체, 모든 것이 전부다 떨어져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법성과 제법의 그 상황들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법성과 제법은 본래 이름도 없고 상도 없고 일체 모든 것이 전부 다 끊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증지. 내가 뭔가 체험하고 알아야 증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지. 응무소주의 그 소입니다. 대상의 모든 것이 바로 이 소입니다. 이 소지를 알아야 증명을 합니다. 여경 뭔가 나타나는 이런 경계가 아니다. 바로 끊어졌고 본래 적이고 이런 상태이지, 나타나는 여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계라던가 어떤 것으로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증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의 모든 것들을 나타내는 것이고 능증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기로 풀어나갑니다.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은 본래의 성품으로 자성과 법성이 있습니다. 본래의 성품은 깊고 깊어 극히 미묘해서 극저온상태로 가야만이 미세한 움직임도 잡히듯 본래의 성품은 깊고 깊어 극히 미묘해서 불수자성. 지키지 않고 자성을 따라 일으킨다. 수, 자성을 지키지 않고 본래의 성품인 자성을 지키지 않고 수연성. 인연을 따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입니다. 연기는 것은 자성이 나타내는 현상들입니다. 나타나는 파도와 같은 그런 현상들을 깊고 미묘하지만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우리 현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살아가는 현상입니다. 자성을 지키지 않고 자성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무념이라는 것은 삼매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현량과 비량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현량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비량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못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덧붙여서 자기 생각대로 보는 것이 비량입니다. 앞에 사진이 있습니다. 눈으로 사진을 보는 순간  안식이 일어납니다. 안식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그다음 판단하는 것은 내 속의 저장창고에 있는 것과 결합하여 자신의 생각대로 다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식은 안이비설신 전오식과, 의식인 육식, 제7식 마나식, 제 8식 아뢰야식입니다. 여기서 전오식과 아뢰야식은 현식이고, 육식과 마나식은 비량입니다. 눈으로 그림을 보는 순간 안식은 그 순간은 똑같이 봤는데(전오식) 그것을 보고 분별,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다 다릅니다(육식, 마나식). 부처가 무언가? 조주는 무, 동산은 마삼근, 운문은 똥막대기라고 대답했습니다. 답이 다 다른데 견성하여 본래성품에서 보면 다 같은 것입니다(아뢰야식). 아뢰야식은 무부무기입니다. 번뇌와 같은 어떤 것으로도 덮혀있지 않으며, 선악의 구별이 없는 무기입니다. 그렇지만 마나식은 유부무기입니다. 번뇌와 같은 것으로 덮여 있어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며 번뇌의 업에 따라 분별합니다. 자기의 업식대로 보는 것입니다. 

삼매에 든다는 것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면 순수함이고 본래청정이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성이나 자성을 이야기 할 때 삼매에 들면 우리가 본래 청정한 걸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고 전부 다 복합적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무주라는 뜻이 정확하게 이 응무소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소는 소지장의 소이며, 이 소가 의미하는 것이 심소인 것입니다. 

이 삼매에 들려면 화두가 좋은 방법인데, 화두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특수상황에 대한 특수한 대답입니다. 근데 결국에 그것이 바로 보편성을 갖게 되어야 답이 되는 것이고 그 보편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정도 공부하면 화두라는 그 내용에 대해서도 조금 알 수 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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