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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4강 내외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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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840회 작성일 21-07-2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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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강 내외명철 


견성을 하고 난 다음 생기는 현상이 내외명철입니다. 

내외명철이 되면  신통력도 생기게 되고 기적도 일어납니다. 부처님의 십대 제자중에 신통제일 목련존자가 있습니다. 견성을 하고나면 불로소득으로 신통력이 생깁니다. 달마도 교종 스님들의 시기로 황제로부터 독약을 세 번이나 받았고 독약을 먹어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는 이 동토가 나와 인연이 다했다 하면서 사약을 먹고 죽습니다. 죽고 난 다음 또 새로운 달마의 삶이 시작됩니다. 

부처님께서 바라문족이 가장 성했던 말라족 쪽에 전법을 갔다가 너가 성인이면 얼마나 성인이냐 하면서 부처님을 시험합니다. 마을의 우물에 오물을 넣고 볏짚을 넣어 물을 못먹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물을 떠오라고 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가보니까 그 오염된 물이 그대로 있었는데 세 번째 가니까 오염된 물이 깨끗한 청정수로 변해서 부처님께 물을 떠다 올리게 됩니다. 그 광경을 보고 말라족은 부처님을 믿고 불법에 귀의하게 됩니다. 

신라시대 때 신통을 갖고 계시는 스님이 많았어요. 원효와 의상스님의 얘기입니다. 의상스님은 공양을 할 시간이 되면 천녀가 가져다주는 천공으로 공양을 했습니다. 원효스님께 자랑하려고 공양무렵에 원효스님을 초청해 법담을 하면서 기다려도 천공이 오지 않습니다. 원효는 실컷 법담도 나누었으니 이제 가야되겠다고 하면서 떠납니다. 원효가 가고 난 다음에 갑자기 천녀들이 천공을 갖고 옵니다. 왜 이제 갖고 오느냐 하니 원효스님을 지키고 있는 신중들 때문에 저희들이 도저히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라고 합니다. 

신통이 왜 생길까요? 신 선생님하고 열두 시에 서울역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해서 만났으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약속했으니까요. 그런데 서울 갔다가 우연히 열두 시에 거기서 마주쳤어요. 이것은 신기한 것입니다. 약속을 해서 올라갔으면 당연한 것이지만 모르는 어떤 업에 의해서 서울 올라갔는데 열두시에 거기서 마주쳐졌어요. 인과를 모르면 우연이고 기적이 일어나 신통이 되지만 인과를 알면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것뿐입니다. 

견성하고 난 다음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를 설명하는 내용이 내외명철입니다. 육조단경에서 청정법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의 부처라고 하는가?

선지식들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의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을 행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착한 행동을  닦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속에 있어서 자성은 항상 깨끗함을 알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들의 자성도 깨끗함이 맑은 하늘과 같아서, 혜(惠)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 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치게 밝아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며, 모든 법에 있는 자재한 성품을 청정 법신이라 한다.’

존재하는 것을 나와 대상으로 나눌 때 나는 자신이고 나 이외의 모든 대상은 법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법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현상이 제법입니다. 모든 것이 본래 성품은 스스로 깨끗하여 물들기 전의 것은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다 자기의 성품에 자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성에 있다는 것은  법신의 그 청정한 것이 내 자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자성에 법신의 모든 성품이 다 들어있다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대상을 우리가 알려고 했을 때는 세세생생을 알려고 해도 다 알 수 없지만 눈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가지고 아 나를 알고나니까 세상 전부다를 알겠다. 왜? 나와 대상은 둘이 아니니까. 모든 법이 다 내 성품 내 자성 속에 있어서 항상 깨끗하다. 원래 자성도 청정하고 법신도 원래 청청하다는 겁니다. 자성도 법성도 전부다 원래 청정하기 때문에 알고보면 한가지입니다. 해도 달도 항상 밝습니다. 해와 달이 비칠 때는 항상 밝은데 오늘같이 비오는 날 구름이 끼면 해와 달이 안보여요.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걷어 버리면 모든 번뇌망상을 걷어버리면 이 세상 삼라만상 모두가 일시에 그대로 들어납니다. 우리가 견성하여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이것이 그대로 들어나는 상태입니다. 바로 번뇌망상인 무명을 깨트리고 걷어내버리면 그대로 청정한 내 본래 성품인 자성이 드러나고 이 자성과 법성은 전부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해와 달이 항상 밝듯이 지혜는 항상 밝은데 우리는 경계에 집착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은 모든 업에 의해 항상 어떤 대상을 보던지 생각을 일으킵니다. 바로 이 모든 경계에 집착하여 부딪히는 순간 항상 어떤 생각을 일으키게 돼있어요. 그것은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본래 들어있는, 숨어있는 그 자성을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성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성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경계가  일어나는 번뇌망상이 본래 나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제 칠식을 나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선지식이 참 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쳐 밝아 내외명철이 됩니다. 안팎이 사무쳐 밝아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며 거기에 비춰가지고  그대로 다 들어나는 겁니다. 여기 내외명철에서 내가 바로 안이고 외가 밖입니다. 안팎에서 자성이 안이며 법성이 밖입니다. 정확하게는 자성과 법성은 원래 사무쳐 밝은 것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의 본래 성품은 원래 청정합니다. 여기서 안팎이 사무쳐 밝다 했을 때 안팎은 자신과 법신입니다. 안 자신은 안이비설신의를 말하고 밖 법신은 색성향미촉법입니다. 이 12처가 안과 밖이 전부다 사무쳐 밝아지면 자성과 법성을 보게 되는 겁니다. 사무쳐 밝으니까 본래 성품인 자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법신의 모든 것이 이 자성에 그냥 그대로 비치고 나타나더라는 겁니다. 제법이 갖고 있는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고 합니다. 이 청정법신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법성이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본 내공으로 돈오 견성하여 내외명철을 체득한 금강경의 대가 덕산스님을 한번 봅시다. 

한국에서 선불교의 주류는 임제선입니다. 임제선이 행했던 지역이 북간도입니다. 그래서 한국불교에 다른 선보다는 임제선이 훨씬 더 전래되기 쉬웠고 많은 한국의 선사들이 중국으로 건너갔을 때 임제선을 접하기도 쉬웠기 때문입니다. 임제선은 우리나라만 주류가 아니라 중국의 선불교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선불교를 지킨 최고의 종파입니다. 그 유명한 덕산방 임제할입니다.  덕산방은 부처가 뭐고 하고 물었을 때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견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임제할은 큰소리로 할하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부처가 뭐냐하는 그 물음에 답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거나 고함을 지르는거나 하는 것은 기존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이 틀을 깨뜨리지 않고는 제 칠식 밑으로 파고 들어갈 수가 없어요. 풍선을 불어보세요.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더 불면 터져버리죠. 그 유명한 덕산방을 한번 보도록 합시다. 당시 금강경의 대가였던 주금강이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남방에서는 마음만 깨치면 부처가 된다는 도깨비같은 놈들이 있다. 도대체 남방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부처가 되느냐? 이런 소문을 듣고 자기는 평생을 금강경을 공부해 수십 권이 되는 금강경소초를 모두 암기할 정도로 금강경의 대가인 자기도 부처가 아직 안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놈의 남방에 있는 그 도깨비들은 어떻게 해서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놈들을 전부다 쳐부수겠다고 생각하고 금강경소초를 등에 짊어지고 용담선사를 찾아 남방으로 떠납니다. 이 주금강이 덕산선사가 됩니다. 가다가 점심 때가 되어 만두집에 들렸는데 주인 노파가 스님을 보고 등에 매고 있는 것이 뭐요? 금강경입니다. 내가 묻는 말에 답을 하면 점심을 그냥 드리겠다며, 금강경에 보면 현재심불가득, 과거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어 점심을 드시려고 합니까? 그러니까 과거에 일어났던 생각도 원래 없는 것이며 현재에 일어나는 생각도 원래 없는 것인데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가 하고 물어요. 갑자기 스님이 띵해집니다. 자기는 금강경을 다 외웠는데 이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에 대해 말로는 이 뜻은 알았는데  이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파가 이 구절에서 당신은 어느 마음으로 점심공양을 할 것이오?하고 물으니까 주금강은 아무 말도 못하고 맙니다. 아무 말도 못한 스님은 점심을 굶고 용담을 찾아갑니다. 주금강인 덕산과 육조혜능과의 인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육조혜능의 제자인 청원행사 밑에서 석두희천이 나오고 석두희천 밑에서 천황도오가 나옵니다. 천황도오 밑에서 용담숭신이 나오고 용담숭신 밑에서 덕산선감이 나옵니다. 

용담숭신이 계시는 절에 다다랐어요.  문안으로 삐죽히 들여다보니 조그마한 체구의 늙은 스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밭에서 열심히 일를 하고 있습니다. 덕산이 용담에 서서, 용담에 왔는데 연못도 없고. 용도 없고 아무것도 없구나하고 큰소리 칩니다. 땀 뻘뻘 흘리면서 일하던 그 노인 스님이 옆에 다가와서 조용한 소리로 내가 용담인데 합니다. 여기서 주금강은 기가 한번 더 죽었어요. 저녁공양을 마치고 난 후에 용담스님을 찾아뵙고 자기가 묻고 싶었던 것을 물어봅니다. 밤이 늦어 자러갈려고 문을 열고 나왔는데 너무 어두워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등불을 건네줘요. 주금강이 등불을 받는 순간 스님이 불을 훅 꺼버려요. 바로 그 순간, 주금강은 깨치게 됩니다. 주금강은 이때까지 선불교를 한번도 안했습니다. 금강경만 죽어라 공부했어요. 그런데 그 순간에 견성을 한 것입니다. 용담스님이 불을 꺼버리는 순간, 본래 성품을 보게 되고 나와 이 우주가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철저히 알게 된 것입니다.  

주금강이 고마워서 용담에게 절을 합니다. 용담이 대체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까 이제부터 천하의 노승들이 하는 말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주금강은 다음날 새벽에 법당에서 가져온 금강경소초를 다 태워버립니다. 태우면서 중얼거립니다. ‘그림의 떡으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없다. 이 금강경 내용 전부다가 그림의 떡이였구나. 우리는 진짜 떡을 먹어야한다. 세상의 온갖 중요한 일들을 다 이루더라도 결국은 물 한 방울이 바다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내 본래성품을 알게 되면 만법을 알게 되는 것을’ 그리고 용담 밑에서 여러 해를 머물며 덕산선감으로 태어납니다. 

 육조단경에 나오는 이 내외명철에 대한 설명을 보면 만법의 근원인 청정자성에서 출발하면은 법성을 다 볼 수 있는 상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법의 근원인 청정자성을 덮은 망념의 뜬구름을 다 흩어버리면 우주의 위 아래와 몸과 마음의 안팎이 확연명철하여, 깨끗한 유리병 속에 밝은 달을 담은 것과 같아 안과 밖을 다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외명철을 영락경, 능엄경에서는 구경묘각이라고 하였으며 육조는 이것을 법신불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묘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화엄경에 보면 깨달음은 보살10지로부터 시작합니다. 초지보살의 환희지부터 견성이 시작돼요. 이 견성이 등운지인 보살 10지를 거쳐서 마지막 단계가 등각묘각입니다. 깨달음에 다다른 가장 궁극적인 단계가 묘각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묘각이 되면 내외명철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천태사교의 원교장에서는 미세한 무명을 나아가 부수고 원교에 나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결국은 무념에 들면 궁극적으로 미세한 무명을 볼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극저온상태가 되면 조그마한 미세한 움직임도 전부다 포착하고 알 수가 있어요. 무념상태에 가지 않고는 무명의 미세한 움직임을 볼 수가 없습니다. 미세한 무명의 움직임을 보면 수억 겁의 자신의 인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제팔식 아뢰야식에 들어갈 수가 없고 아뢰야식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세한 무명의 움직임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의 작동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사리분별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분별의 모든 것은 제칠식입니다. 근거가 칠식이고 뿌리는 팔식이지만 평생을 칠식을 갖고 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아뢰야식은 생각을 하는데 그 생각이 미약하고 미미해서 감지를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모릅니다. 뭔가 작동하려고 하면 근원에서 움직이고 그 움직임 따라 현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그 뿌리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뿌리의 움직임에 따라 제칠식이 되고 제육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어요. 왜? 우리의 일반적인 사리분별에 묻혀서 안보입니다. 우리 눈에 벌레는 보이지만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평생을 분별하며 생각을 무지무지하게 많이 하지만 그 생각의 뿌리는 죽다 깨어나도 보지 못합니다. 무념상태가 되면 미세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해요. 아뢰야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뢰야식을 보기 때문에  모든 인과를 알게되며 정견이 이루어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 무명을 타파하고 라는 말은 미세한 움직임을 보는 것이며 아뢰야식을 보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 뭔지 몰라서 평생 이렇게 살아요. 원인을 알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인과공식인 사성제의 고집멸도입니다. 고는 나타나는 현상이며, 집은 일어나는 원인이 며, 멸은 현상이 해결된 상태이며, 도는 멸이 되기 위한 실천 방법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집멸도입니다. 고집멸도를 잘 하면 세상의 삶을 산다 하더라고 멋진 최고의 삶을 살 수가 있고, 견성을 하기위해서도 이 고집멸도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인이 뭔지를 안다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즉 위빠사나입니다. 위빠사나가 되면 그 한 생각을 갖고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집중하는 사마타입니다. 사마타가 지속되면 무념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처마 밑에서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 것과 같습니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한군데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들라는 겁니다. 화두를 들고 일어나는 모든 번뇌망상을 화두 한 군데 집중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한가지 생각에 집중하다보면 생각이 가라앉습니다. 그것이 가라앉으면 고요해지고 지속되면 무념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미세한 무명의 움직임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돼요. 일반적으로 제 팔식을 아뢰야식이라고 하고 아뢰야식을 아는 것을 제 구식 백정식이라고 합니다. 아뢰야식을 보면 백정식이 됩니다. 이 미세한 움직임 무명을 보는 순간, 아뢰야식을 보는 순간 그것을 바로 백정식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묘각의 지위에 들어가서 무명의 뿌리를 영원히 이별하는 것은 철저하게 아뢰야식을 안다는 겁니다. ‘무명을 영원히 이별하고 구경의 열반정상에 오르니 대열반, 대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청정법신을 이루어 상적광토, 항상 적적하고 빛나는 그런 대지가 곧 원교불상이다.’ 가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재보살들이 오매일여는 되어도 구경묘각을 실증하지 못하면 내외명철이 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항상 나와 하나가 되어있는 오매일여는 어묵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를 거쳐 견성 바로 전단계로 오매일여가 되면 견성의 단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매일여가 되어도 결국은 구경묘각을 실증하지 못하면 아뢰야식을 보지 못하고, 내외명철의 경지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구경묘각을 실증해서 내외명철이 된 극심심처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견성을 하고 나면 언젠가는 성불하게 됩니다. 견성했으면 성불을 못하지는 않습니다. 견성을 하고 나면 바르게 청정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지혜와 복덕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를 때는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사는데 지 멋대로 살지만 견성을 하면 우리의 삶은 확률 1, 100%의 딱 한 가지 삶밖에 없습니다.  화엄경에 보면 견성의 단계를 십지보살로 나누어 놓고 있습니다. 십지보살을 거쳐 등각부터 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견성성불로 나눌 때 정확하게 십지까지는 견성이고 십지를 넘어선 등각묘각이 성불하여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상등정각에서 등각은 등정각, 정각을 이룬 것이 바로 등각이고 묘각은 무상, 더 이상 높은 것이 없는 최고의 정각을 무상등정각이라고 하고 이것을 묘각이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일지보살만 되더라도 모든 것은 다 끝납니다. 신심에 사무쳐 이생에서 내가 할 것이 이 공부 밖에 없다 하는 득력을 얻는 것도 우리가 깊은 선정에 들거나  공부에 대한 자신과 확신이 생기면 순간적으로 견성을 할 수가 있어요. 힘이 없기 때문에 항상 밝지 않기 때문에 순간으로는 가능하지만 그것이 곧 꺼져버려요. 이것이 계속 지속되면 견성입니다. 시간 나는 대로 매일 공부하자는 것은 견성할 수 있는 많은 계기와 확률을 만들어 내는 방법인 것입니다. 시간나는대로 공부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하다보면 언젠가는 돼요. 한 수행자가 10년 동안 혼자서 산속에서 목숨 걸고 공부했는데도 아무 소득이 없어서 이생에서는 다시는 공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세속으로 내려옵니다. 마을에 들어서서 시장으로 가고 있는데 백정이 소고기를 팔면서 이 부위도 최고 부위요, 저 부위도 최고 부위요 하면서 소고기를 파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 순간 견성했다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그 놈의 산속에 10년 동안 견성하겠다고 앉았을 때는 견성이 안오더니 그놈의 시장바닥에서 백정의 한마디에 견성을 해버립니다. 바로 이겁니다. 공부는 항상 문이 열려있어요. 모든 것은 확률적입니다. 공부하지 안는 것보다 공부 하는 것이 견성할 확률이 큰 것입니다. 공부 안하고도 견성할 수 있어요. 평생 놀고도 견성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왜 우리가 공부하자, 공부하자 해요? 노는 것보다는 공부하는 게 견성 할 확률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확률이 큰 쪽으로 보편성이 있는 쪽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도랑을 보세요. 흐르다가 조금만 가물어버리면 도랑이 없어져버려요. 그런데 큰 강은 몇 년이 가물어도 그냥 물이 흐르고 강으로 존재하고 있어요. 조그마한 도랑같이 순간적으로 견성하다보면 어느 순간 강과 같은 견성이 되는거라요. 그래서 우리가 무념상태에 들어가는 순간 선정에 들어서 무념에 들려고 노력하는 그 순간적으로는 내가 느낄 수 없는 도저히 내가 상상도 할 수없는 그런 엄청난 힘들도 순간적으로 생길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을 한번 보세요. 이 몸 쉽게 받는 거 같지만 세세생생 살아도 몸 한번 받기 어려워요. 얼마나 귀하고 귀한 삶인데 지금 이 시간이 다시 와요? 우리가 수업 겁을 살아도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이 시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에 우리 이렇게 앉아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공부고 귀한 만남입니까. 

자기성품의 마음자리를 지혜로서 관조하여 내외명철하면 자기 본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자성을 아는 것이니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을 해탈이라고 하며  이 해탈을 얻었으면 반야삼매이고 반야심매를 깨치면 곧 무념인 것입니다. 육진 속에서 여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 오고 감에 자유로움이 곧 반야삼매입니다. 


삼신에서 청정법신을 내외명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구조를 보면 삼신은 청정법신, 원만보신, 천백억화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청정법신은 뿌리입니다. 원만보신은 그 본체의 형태, 모양입니다. 천백억화신은 사용하는 용입니다. 이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에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 앉아 계십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는 집입니다. 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천백억화신으로 이 세상에 진리를 펴기 위해서 나오신 부처입니다. 이 부처의 뿌리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비로자나불을 모셔놓은 비로전 건물은 대웅전 보다 급이 낮지 않은 겁니다. 최소한 대웅전하고 같은 높이 정도에 모셔져 있습니다. 체의 형상, 모양이 원만보신 노사나불이고 이것의 쓰임새가 바로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입니다. 

천백억화신이 이 세상에 펼치는 것이 연기이며, 연기의 절정은 성구연기와 성기연기로 나타납니다. 성기연기의 결정판이 화엄경이며, 성구연기, 원래 이 세상은 그대로 다 이루어져있다는 성구연기의 결정판은 묘법연화경입니다. 묘법연화경이나 화엄경이 불교 최고의 경전이라고 얘기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화엄경의 성기연기는 체, 상, 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서 이 우주의 만다라 춤이 바로 대방광불화엄경입니다. 이 성기연기의 원리를 화엄경에서는 육상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어요. 그래서 총상, 별상, 동상, 이상, 성상, 괴상입니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이것을 총상과 별상, 전부다 총괄적으로 보는 방법이 하나 있고 이것을 분류해서 개별로 나누어 이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연기를 총상과 별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동상과 이상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이 또 연기입니다. 성상과 괴상. 생기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고 생멸하는 이것 또한 연기입니다. 


내외명철은 안과 밖이 사무쳐 밝다는 것입니다. 안은 안이비설신의이고 밖은 색성향미촉법입니다. 우리의 눈은 색, 형상, 모양을 봅니다. 눈은 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또 소리는, 귀는 소리만 듣습니다. 우리 귀에다 대고 잘생겼다 하는 모양을 갖다가 볼 수 없습니다. 비. 코는 향, 냄새만 맡습니다. 설은 혀는 맛만 봅니다. 신. 감촉은 촉감만 느낍니다. 의는 생각만 합니다. 이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바로 이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은 안팎이 사무쳐 밝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안과 색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안과 색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눈과 색이, 안과 색이 하나이고 이와 성이 하나이고 비와 향이 하나이며 설과 미가 하나이며 신과 촉이 하나이며 의와 법이 하나인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내외명철입니다. 그러니까 내외명철이 되면 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성을 했다고 해도 내외명철이 되지 않는 견성은 신통이 없어요. 신통이 생기는 상황에서는, 신통은 순간적으로 생길 수도 있고 신통이 지속적으로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항상 신통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내외명철이 된 상태입니다.  안과 밖이 사무쳐서 안과 색이 하나이며, 안과 색이 하나이기 때문에 눈과 색이 하나인 것을 알고 본 것입니다. 안색이 원래 동근인데 우리는 동근인지 모릅니다. 동근이기 때문에 자성과 법성은 하나라요. 다른 사람이 배 아픈건 모르지만  내가 배아픈 것은 압니다. 내 것이기 때문에 압니다. 눈과 색이 하나인 것을 알면 다른 사람이 배 아픈 것도 알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눈과 색이 하나이고 이와 성이 하나이고 비와 향이 하나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그냥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신통이지만 내외명철의 상태에서 볼 때는 당연한 것입니다. 돈황본에서의 설명이나 경전에서의 설명은 만법이 자성하고 구체적으로 같다고 하면서 자성에 비춰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의 자성은, 법성은 다 똑같은 겁니다. 그게 사람한테 들어가면 사람이 되는 거고 그것이 개한테 들어가면 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뿌리의 자성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며. 개는 그 자성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도 우리의 능력대로 자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알고 나면 이 세상에 어느 것을 얻는 것보다도 최고의 이득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최고의 장사는 공부해가지고 내외명철이 되고 자성의 본래 성품을, 법성의 본래 성품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크다 보니까 우리들 눈에  안 보이며. 안보이니까 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그 신심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 신심이 없고는 우리가 첫째 관문을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정말 그럴까?  내가 부처일까?하는 끝도 없는 의심만 일어납니다. 믿고 들어갔을 때 그 신심이 100%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그 신심 때문에 목숨걸고 해보겠다는 분심도 생기고 그 분심을 만드는 또 방법으로서  화두로 어떤 문제점을  갖고 들어감으로서 그 분심을 더욱더 정진시키고  이런 것을 바탕으로 본질을 찾는 공부를 한번 해보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단지 불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든 어떤 그룹이나 어떤 무리에서도 전부다 이거를 공부할 수 있어요. 단지 이 부분을 불교만큼 명확하고 명쾌하게 체계화시키고 잘 해놓은 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불교공부 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장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성과 법성은 하나인데 우리는 하나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한테 있는 자성이나 신선생님한테 있는 자성이나 양선생님한테 있는 자성이나 같은 것을 모르니 우리는 다 남남인 것입니다. 견성하여 알면 자성이 전부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성을 느끼는 순간 이 법성을 느끼며 전부다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거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저 바깥에서 놀고 있는 개도 하나가 되는 거고 저 나무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놈의 나무가 왜 저기 서있는지 저놈의 개가 왜 짓는지 그냥 보면 아는 것입니다. 무념과 무상이 되면 이런 경계들이 전부다 허물어져요. 내외명철이 시작됩니다. 수월스님이 북간도를 갔는데 한국인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어요. 날이 어두운데 인기척 소리가 나니까 개가 짖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개들이 뛰어나왔어요. 마을 사람들은 또 한사람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새벽에 나와 보니까 개들이 전부다 스님 주위에 몰려 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스님의 무심이, 무념이 개하고 통한 것입니다. 무념이 되니까, 개가 스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동체인 것입니다. 내외명철이 되면 세상은 하나이며 일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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