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강 삼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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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강 삼귀의
불교를 세계 종교로 확장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삼귀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종교에 귀의하면서 가장 먼저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하면서 부처님께 돌아가 의지하고 부처님이 깨친 법에 돌아가 의지하고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에게 돌아가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그 종교에 귀의하게 되면 가장 처음 일어나는 것이 신심입니다. 그래서 신심이 제대로 잘 일어나면 이 신심을 갖고 평생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됩니다. 또 평생 그 신심이 나를 불교로 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됩니다. 어떻게 불교에 귀의할 수 있고 내가 믿고 있는 이 종교에 신심을 제대로 잘 일으키게 하는가 그것이 이 삼귀의입니다.
젊은 시절에 본 대승기신론에서 삼귀의를 ‘이 목숨을 거두어 부처님의 세계에 돌아갑니다, 이 목숨을 거두어 진리의 바다에 돌아갑니다. 이 목숨을 거두어 수행자의 무리에 돌아갑니다.’라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것을 보는 순간 아 이제까지 내가 생각했던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그냥 껍데기에 맴돌았다면 ‘이 목숨을 거두어’라는 말을 봄으로써 신심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과연 이 종교라는 것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무엇인가, 저는 결정적으로 이 목숨을 거두어 하는 이 한 말에 이제까지 생각했던 불교가 완전하게 달라져버렸어요. 이제까지는 내 삶에서 악세사리였던 불교가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철저한 ‘이 목숨을 거두어’라는 생각이 없으면 과연 우리는 불교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부처님의 법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불교에 미쳐서 이제까지 불교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제까지 생각했던 그 불교가 과연 얼마나 이 내 목숨을 거두어 갈 만큼 그렇게 진지했는가하는 그 생각 때문에 불교에 대한 생각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이 생에서 정말 이 목숨을 걸고 갈 수 있을 만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불교를 하도록 한 계기가 된 것이 이 삼귀의였습니다.
신심은 최선의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내가 목적하는 곳에 이 목숨을 거두어 그냥 던져버리는 삶이 된다면 불교를 통해서든지, 기독교를 통해서든, 과학을 통해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추구하는 삶에 최고의,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정말 진지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염불이나 하면서 살아도 좋지 않겠는가하는 생각도 간혹 했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우리가 진리를 알아야 될 거 같으면 알아야 되는 것이고 그 진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그 진리를 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목숨을 거두어 들어가는 진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아는 순간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생을 생각한다면 많은 것이 아닙니다. 나이라는 것은 지금 주어져있는 하나의 허상일 뿐입니다. 내가 진리를 추구할 때 그 진리가 나한테 인식되는 순간, 그 순간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1970년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표충사 영남불교학생회 수련대회때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을 했어요. 표충사에 들어갔는데 전에 한번 와 봤는듯이 훤해요. 어디에 뭐있고 어디에 뭐 있는지 다 보이는 거라요. 옛날에 있었던 그 건물에는 내가 생각했던 그 모양, 그 모습, 그 스님들이 그대로 앉아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 여기서 기거했던 모든 상황을 다 알게된 신비한 체험 때문에 이 표충사가 너무 좋았어요. 표충사에서 철야하면서 했던 천배를 기억하면 가장 또렷하게 가슴에 와닿는 그런 신심이 일어난 것이 바로 표충사의 천배였습니다.
삼귀의의 신심은 돈오로 가는 열쇠입니다.
종교는 의외로 단순해요. 신심을 한번 체험하고 겪을 수만 있다면 지금 이렇게 강의 듣거나 이해하고 있는 것이 수십 배 더 확실하게 와닿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은 내가 원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원력도 세우고 이런 신심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문제에서 신앙을 평생 지켜가게 하는 가장 좋은 것이 신심입니다.
혜능은 삼귀의를 무상삼귀의계라고 합니다. 보통 삼귀의계는 귀의불 양족존, 귀의법 이욕존, 귀의승 중중존입니다. 지혜와 복덕 구족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욕망을 떠나게 하는 청정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거룩한 수행자에게 귀의합니다. 이것을 혜능은 불을 각으로 부처님은 깨달았으니까 각이고 법은 올바름으로 바를 정이고 승은 깨끗함으로 깨끗할 정으로 확대해석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에 머물러 있던 진리를 각과 정과 정으로 표현하면서 세계 사상으로 확장시킨 것입니다. 육조단경이 이 세상에 기여한 가장 큰 부분은 삼귀의에 대한 혜능의 해석이 불교를 세계화 시킨 것입니다. 기록적으로 이렇게 삼귀의에 대해서 불을 각으로, 법을 정으로, 승을 깨끗할 정으로 해석함으로써 불교를 세계종교로 승화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삼귀의계가 아닌가 합니다.
양족존은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심을 상징하며, 대원과 수행을 갖춘 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수행시절 48가지 원을 세워 중생을 구제하여 부처가 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홍서원인 4가지 위대한 원을 세워 중생들을 구제했습니다. 모든 중생을 전부다 건지고 모든 번뇌를 다 끊고 모든 불법을 다 배우고 모두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겠다고 원을 세웠습니다.
삼귀의는 자성의 삼보 불법승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불은 깨달음이며 법은 올바름이며 승은 깨끗함을 뜻합니다. 육조단경에서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하지 않고 삿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는 것을 양족존兩足尊이라고 했습니다. 이욕존離欲尊은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애착이 없으며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이라고 했습니다. 애착이 없으니까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는 것입니다. 법을 알면 바름을 알게 되고 내가 바르게 되면 이욕존이 됩니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은 중중존衆中尊이라 하였습니다. 깨끗함은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더라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듯이 자성이 번뇌와 망념 속에 있더라도 번뇌와 망념에 물들지 않는 이 상태를 중중존이라고 합니다. 바로 스스로의 부처. 자성불에 귀의한다는 겁니다. 혜능은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의 내용을 자성으로 환원시켜버립니다. 자성으로 환원시키니까 깨달음, 올바름, 깨끗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삼귀의가 자성 삼귀의가 됩니다.
이 육조단경에서 주장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가 삼귀의와 더불어 돈오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철스님께서도 한때 한국불교에서 돈오냐 점수냐 하는 문제로 논쟁의 쟁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논쟁은 깨달음이라는 것은 돈오 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돈오이지 점오라는 말은 없습니다. 돈오돈수, 돈오점수 이 말 때문에 돈오라는 것에 대해서 한때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혜능은 오조홍인대사가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말을 설명할 때 그 말 끝에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습니다. 이 경우는 돈오돈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경허스님의 경우는 ‘여사미거 마사도래’라는 화두를 걸머쥐고 몇 달을 두문불출하고 그 화두에 매달려 견성하게 됩니다. 이 경우는 돈오점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단박에 견성하는 것은 돈오돈수이며, 일정기간의 수행을 통하여 견성하는 것은 돈오점수인 것입니다.
돈오를 어렵게 생각할 것 같으면 불교도 어렵고 우리의 평생 삶이 크게 변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그렇지만 이 돈오를 쉽게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 돈오입니다. 매일매일 돈오가 되어야 우리의 삶에서 좀 더 본질의 성품에 가까워 질 수 있어요. 그리고 불교라는 종교가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 수가 있습니다. 확철대오하는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의 매일매일의 삶에서 일어나는 조그마한 변화인 돈오도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절에서 행자생활을 한 혜능은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이 내용에서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는 내용이 어떻게 적용이 되고 작용을 하는가 하는 이 내용입니다. 육조혜능은 견성하고 난 후 15년 동안 보림을 합니다. 대중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 혼자서 수행을 합니다.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에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성품을 단박 깨치게 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의 중요한 핵심은 혜능이 바로 단박에 깨쳤듯이 다른 사람들도 단박에 깨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움이 없는 나도 이렇게 그 법을 듣고 단박에 깨쳤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단박에 못 깨치겠는가, 분명히 단박에 깨칠 수 있는데 뭔가가 잘못됐기 때문에 단박에 깨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의 법을 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에 깨침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견성을 할 수 있는 가르침 주겠다는 겁니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다.’ 이 말은 성품을 보도록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할 때 스승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 깨치지 못하면 스승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스승을 찾아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단박에 깨치는 이 법을 배우도록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부처님의 은혜만큼 큰 은혜가 없고 그 다음이 스승의 은혜, 부모 은혜인 것입니다. 이 육신을 낳아준 분이 부모라면 우리의 정신을 있게끔 해준 분이 스승입니다.
육조단경은 불법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누구나 쉽게 견성 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돈오도 견성이 될 수가 있고 상당히 포괄적입니다. 견성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정확하게 견성은 내 본래의 성품을 봐야만 견성이 돼요. 번뇌를 떠나 내 자신이 깨치는 것을 해탈이라고 했고, 번뇌장과 소지장을 떠나면 보리를, 깨달음을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열반에 든다고 했어요. 본래성품에는 자성과 법성이 있습니다. 자성을 보는 것을 견성이라고, 견성성불이 되기 위해서는 법성도 봐야 됩니다.
새벽예불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종을 칩니다. 원래 종도 치고 북도 치고 사물을 다 치는 것을 이 우주에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날 짐승과 네발 짐승과 물고기등 모든 생명을 전부다 깨우는 것입니다. 종성 염불에는 이런 내용이 있어요. 청산첩첩미타굴, 창해망망적멸궁, 물물염래무가애, 기간송정학두홍입니다. 청산첩첩. 산이 중첩되어 있는 그 첩첩산골에 끝도없는 청산은 아미타불의 집이고, 창해망망적멸궁, 망망한 끝도없이 조용한 푸른바다는 그대로 적멸궁이네. 물물염래무가애, 물물은 물건과 물건입니다, 표현상 물물보다 좋은 게 없어요. 업상과 생각이 오고 감에 걸림이 없으니, 기간송정학두홍, 소나무 정자에 학머리 붉음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 이것이 화두입니다. 이 화두를 풀고 나면 견성입니다. 바로 이 내용을 알면 돈오가 됩니다.
수학을 배우다 보면 인수분해도 나오고 방정식도 나오고 함수도 나오고 미분적분도 나오는데 왜 배우는지 모르고 그냥 배웁니다. 함수가 나오면 극대값을 구하고 극소값을 구하고 최대값을 구하고 최소값을 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돈도 많이 벌고 투자를 적게 하고 합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잘 할 수 있는 계산적인 근거가 함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함수라고 할 때 y=x하는 이 함수는 x가 하나씩 변하면 똑같이 y도 하나씩 변하는 함수입니다. 그래서 직선이 돼요. 일반적인 함수는 x가 변함에 따라 y가 일정하게 똑같이 변하는 것이 y=x인 함수입니다. 우리의 삶은 투자한 것만큼 결과를 얻어가는 y=x 입니다. y=x^2 제곱 같은 경우에는 포물선을 그립니다. 적게 투자하고 많이 갖고 가려는 도둑놈 심보입니다. 그렇지만 머리 좋은 사람은 적게 투자하고 많이 갖고 갈 수 있겠지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는 y=x라는 가장 정직한 내가 투자한 것만큼 어떤 결과를 얻어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y=x^2 제곱인 투자는 적게하고 훨씬 더 많이 가져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y=-x^2 제곱 같은 경우에는 투자를 했는데 적자가 나요. 그래프가 거꾸로 입니다. 이렇게 되는 경우는 노력은 실컷 했지만 결과가 없는 거라요. y= ㅣxㅣ. 이런 그래프를 가우스함수라고 합니다. y=x에서는 x가 0.1가면 y도 0.1을 가요. x가 0.9가면 y도 0.9가 갑니다. 가우스 함수는 어때요? x가 0.1이 가도 y는 0고 x가 0.5가 가도 y는 0고 x가 1이 될 때만 y도 1이 됩니다. x가 1.1일 때도 y는 1이고 x가 1.6이어도 y는 1이 됩니다. x가 2일 때 비로소 y는 2가 돼요. y=x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삶이라면 y= ㅣxㅣ의 이 함수를 보면 0에서 1까지 갈 때는 그냥 0이었다가 1이 되어야 1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중간 과정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어느 단계에 가야만 나타나는 식입니다. 공부를 하여 경계가 나타나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일 년을 삼 년을 참선을 했는대도 별 다름이 없다가 어느 경계 이상 되면 참선했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돈오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새벽에 일어나 참선을 하거나 끝도 없이 생각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계속 1 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느 순간 그 다음 단계를 넘어서는 2가 되어 2의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돈오라는 것은 가우스 함수와 같이 우리의 경계가 단계적으로 열리는 것이 됩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할 때 누구나 다 쉽게 보고 쉽게 했던 건데 별 것 없어요. 그냥 그렇게 가다가 어느 순간 ‘응무소주 이생기심’하는 그 말의 본질을 보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삼귀의를 독송할 때, 수 년 동안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라고 했던 일상적인 생각에서 ‘이 목숨을 거두어 부처님께 귀의합니다.’하는 그 말 한마디에 나의 온 정신이 전율에 휩싸여버렸습니다. 이 목숨 거두어, 이 말 한마디, 과연 내가 이제까지 생각했던 신심이 무엇이었는가? 그 한 마디 말에 신심에 대한 생각이 단박에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돈오라는 것은 그 상황을 우리가 알아야 해요. 백장어록에 백장과 어떤 노인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백장이 법문을 하고 있을 때 마다 웬 노인이 항상 스님들 뒤에 앉아 법문을 듣고 있었어요. 하루는 법문을 마치고 그 노인을 백장스님이 부릅니다. 당신 누구요? 하니까 저는 지금 석가불 전에 가석불 시대에 이 절에서 수행하던 수행자였는데 저는 제가 깨달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제자들이 불법을 물었을 때, 깨달은 사람도 인과를 받습니까? 물었을 때, 저는 그 사람들에게 불락인과, 깨달은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불락인과라고 한 이 말 한마디 잘못한 과보로 지금까지 여우의 몸을 받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백장스님이 노인에게 다시 물어보라고 합니다. 스님 ‘깨달은 사람도 인과를 받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백장스님이 불매인과. 깨달은 사람은 인과에 어둡지 않다. 인과에 밝다.라고 대답 해줍니다. 노인이 그 말을 듣고 깨쳐 여우몸을 벗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돈오인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을 집중적으로 하다보면 무념의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돈오와 견성은 한 가지 일에 집중을 하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원력을 통해서 견성을 할 수 있고 견성을 함으로서 내외명철의 단계까지 갈 수가 있습니다. 묘법연화경을 계속 독송 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집중은 이런 계기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수행과 정진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것입니다. 원인을 잘 분석하는 사람들이 과학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리는 과학적인 대발견도 결국은 원인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계속 되풀이함으로써 내가 갖고 있는 이 생각의 틀을 깰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견성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뚫고 들어가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고 그 세계가 보이면 견성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자기의 삶보다 소중한 삶은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이 순간은 우리가 세세생생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 소중한 삶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어요.
불교를 보면 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부처님의 첫째 제자가 가섭, 다음이 아난. 28대 달마. 달마에서부터 육조혜능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법과 법맥의 문제와 스승의 인가 등이 과연 있어야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견성은 스스로 깨치고 나면 스스로가 알아요. 그리고 또 이 법맥이 있음으로서 조직이 체계화 되고 오래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단지 법맥은 법이 없어도 전승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 견성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법맥은 다른 사람으로 이어져 오고 있어요. 이런 상황이 결국은 법맥이 갖고 있는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법맥 때문에 불교를 고착화시키고 고여 있는 썩은 물로 만들게 됩니다. 역사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항상 같이 갖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불교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같이 갖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역사에서 존재했던 모든 삶은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소중해요. 우리가 역사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인식하기 쉽게 체계화 시켜 놓은 것입니다. 지금 이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역사 속에서 정말 진지하게 안 살았겠습니까?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몇 명의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이해하지만 그 시대에 더불어 살았던 수많은 사람도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 못지않게 똑같이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 몇몇의 이름을 통하여 이해하기 쉽게 체계화하는 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일률적으로 무엇을 만들어갑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아요.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불교공부가 불교의 역사 속에서 없다고 하더라도 다음 역사에 남아있는 불교 보다 덜 진지합니까? 덜 소중한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아요. 남아있는 거나 남아있지 않은 거나 똑같이 중요하고 소중한데, 상황에 따라 역사 속에 기록 될 수도 있고 안 되는 부분도 될 수 있습니다. 법과 법맥의 관점에서는 법맥은 체계화 되고 오래 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장점이지만 법의 다양화, 어느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했을 때의 관점에서 보면 법맥은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어요. 법맥도 역사 속에서 장자 상속의 형태가 됩니다. 이것을 깨트린 체제가 티벳불교입니다. 티벳불교는 린포체라는 특수한 사상을 형성시켜 활불사상을 체계화합니다. 활불사상은 법으로 법맥을 이어가는 사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불교라고 하는 것은 역사의 껍질 속에 쌓여 있습니다. 이 껍질을 벗기는 것도 어렵고 차라리 뭔가 새롭게 만드는 것이 쉬울 수가 있습니다. 껍질을 벗기는 작업도 필요하고 새롭게 만드는 것도 필요해요. 지금 우리는 다양성 속에서 추구해야 될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 이것이 불교다라고 생각하고 걸어가면 새로운 불교가 만들어집니다. 지금은 법맥도 중요하지만 법이 더 중요한 상황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돈오, 정확하게 돈오라는 말은 없습니다. 돈오를 가지고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하는 말인데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돈오돈수도 돈오점수도 없습니다. 돈수와 점수가 생기는 것은 학교에서 공부할 때 1등하는 친구 있고 30등하는 친구있습니다. 똑같이 배우는데도 좀 더 잘하는 친구가 있고 못하는 친구가 있어요. 이와 같이 원래 돈오와 점수는 없지만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좀 더 빨리 깨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좀 더 더디게 깨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돈수와 점수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지만 표현상 돈오, 점오라고 했는데 깨치면 돈점이 없습니다. 돈 밖에 없어요. 그리고 닦는 과정은 사람의 근기에 따라 좀더 빠름과 더딤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수라는 것은 상황을 빠르게 순간적으로 잘 느낄 수 있다는 것이고 점수라고 하는 것은 긴긴 과정을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끝도없이 가다보면 또 어느 단계가 되어야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에 따라, 근기에 따라 돈수와 점수는 있지만 그것은 바로 돈과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근기 때문입니다. 육조단경에서 주장하는 것은 누구나 다 돈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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