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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강설

제 8강 신수와 혜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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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932회 작성일 21-07-2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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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강 신수와 혜능


부처님 당시는 2600년 전의 상황입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인식하고 안다고 해도 어느 정도까지 역사적인 사실인지 뒷받침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선불교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의 일입니다. 모든 문헌이 정확한 기록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많은 선사가 치열한 구도의 삶을 살았고 어떤 삶의 모습에서 인간정신을 일깨우면서 살았는지 너무나 생생하게 잘 볼 수 있습니다.

육조단경의 앞부분에는 혜능의 행적 및 불연, 법문을 설했는 내용과 물음과 대답, 그리고 법을 전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홍인의 1차 시험이 끝나고 혜능을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니 한 행자가 이끄는 대로 방앗간에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었습니다.  


하루는 홍인대사가 방앗간 앞을 지나가면서 일하고 있는 혜능에게 ‘방아를 잘 찧고 있느냐?’ 하고 물으니까 혜능이  ‘방아를 벌써 다 찧어놓고 키질만 남겨놓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본인은 견성을 했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견성에 대한 인가만 남았습니다. 하는 답을 던졌습니다. 혜능에게 이 말을 들고 홍인은 모든 제자에게 게송을 하나씩 지어오라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수입니다. 육조단경은 혜능의 법문 내용집입니다. 그리고 홍인에게는 혜능이 오기 전에 신수라고 하는 뛰어난 제자가 있었습니다. 신수는 13살에 출가를 했고,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총기와 재능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40세가 넘어 홍인과 인연이 됩니다. 그 전까지는 교종을 찾아다니며 경전에 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홍인은 신수를 보자 황금덩어리를 본 것 보다 더 반가웠습니다. 세상의 이런 인제가 어디 있냐? 하면서 홍인은 신수를 제대로 교육을 시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감히 홍인의 법을 신수가 이어받을 거라는데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수는 늦게 참선을 시작하게 됩니다. 젊었을 때 참선할 것 같으면 가부좌 자세가 잘 됩니다. 신수는 40대에 참선을 접하고 보니 가부좌자세로 참선하기가 어려워 물속에서 가부좌를 하고 참선을 했다고 합니다. 육조단경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신수보다는 실제로 훨씬 더 뛰어난 사람입니다. 한 번은 측천무후의 초대를 받아 법문을 하러 법상에 오르고 황제인 측천무후가 신수에게 삼배를 올립니다. 황제인 측천무후가 신수에게 묻습니다. ‘누구의 종지를 전해 받았습니까?’ 


그러니까 신수 당신은 세간에 이름이 너무나 유명하고 수행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있어서 누구의 종지를 전해 받았습니까? 하고 측천무후가 신수에게 묻습니다. 저는 기주의 동산법문을 이어 받았습니다. 이 동산법문을  홍인대사가 있었던 지역에 따라서 동산종이라고도 하고 혹은 홍인종이라고도 합니다. 동산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홍인의 법을 이어 받았습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조홍인대사의 법을 이어받았습니다. 어떤 경전에 의거했습니까? 당신의 깨달음은 어디에 의거합니까? 하니까 “반야경의 일행삼매에 의거합니다” 하니까 측천무후가 그러면 국사보다 더 뛰어난 대사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신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혜능대사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질문이고 대답입니까? 황제 앞에서 당신보다 더 뛰어난 스님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신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혜능대사가 더 뛰어나다고 이야기합니다. 역사 속에서 지금 인식되고 평가되는 신수는 남종선에서 만들어 낸 신수입니다. 역사 속에서 신수는 실질적으로 측천무후와 더불어 살아있을 때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총애를 받으면서 모든 백성의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신수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결국 만들어진 역사입니다. 삼국지는 중국의 역사를 바꿔 놓습니다. 그 당시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공명을 모셔왔을 때, 제갈공명이 유비에게 한 내용이 바로 중국을 삼등분합니다. 하나는 조조의 나라이고 하나는 손건의 나라이고 하나는 유비의 나라로 삼등분한 것이 바로 삼국지이고 이 기획된 제갈공명의 계획에 따라서 전쟁이 수십 년간 치러지면서 나라가 성하고 망하고 결국은 위나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이런 역사가 제갈공명의 기획에 의해 이루어졌듯이 선불교에서 신회를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조단경은 법해가 서술했습니다. 법해가 바로 육조혜능의 제일 큰 제자입니다. 부처님의 제일 큰 제자가 가섭이 듯이 혜능의 가장 큰 제자는 법해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끝 서열에 있던 신회가 제갈공명과 같이 지기가 뛰어났습니다. 당시는 북종선의 중심인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이 남종선이 중국천하의 주류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서 신회는 제갈공명과 같이 혜능 중심의 남종선과 신수 중심의 북종선으로 나눕니다. 신회에 의해서 분리가 됩니다. 그래서 선불교라고 하면 혜능의 위치를 신수와 같게끔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남종선이 선불교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어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불교의 역사가 남종선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북종선은 없습니다. 신수 밑에 제자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는 우리에게 관심거리도 되지 못해요. 아마 그 당시에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신수가 차지하고 있겠지만 지금 역사 속에서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유일하게 혜능선만 남아 있어요. 남종선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역사가 되게끔 계획을 한 것이 혜능대사의 제자였던  신회에 의해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그리고 신수의 평가는 남종선의 선사들에 의해서 됩니다. 육조단경에서 나오는 것만큼 신수는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고 평생을 제대로 수행을 하면서 올곧게 수행자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고 자기보다 더 뛰어난 혜능을 그대로 인정 할 줄 아는 정말 뛰어난 선사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주어진 대로 인식하고 이해하기 쉬운 대로 배우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살아가는 모두가 최선의 삶인 것입니다. 누가 역사 속에 살아남느냐에 따라 살아남은 사람은 평가가 잘 되는 것이고 역사 속에 묻힌 사람은 그냥 묻혀서 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열심히 살아요. 누구하나 열심히 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통섭불교가 불교 역사 속에 한 구절 나온다고 하면 여기서 공부하신 모든 분이 새로운 불교 운동에 따라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통섭불교원이 불교역사 속에 한 구절 나올 수 있는데 거기에는 김성규만 나와요. 역사는 살아남은 또 전통으로 인정되는 그 한 사람이 대표되는 것이지만, 그 시대, 그 집단과 더불어 같이 살았던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제 2장에 보면 게송을 지으라고 이릅니다.  “너희들에게 말하니, 공부인 에게는 나고 죽는 일이 크거늘 너희들 문인은 종일토록 공양을 하며 다만 복밭 만을 구할 뿐이고 나고 죽는 괴로운 바다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구나. 너희들의 자성이 미혹하면 목의 문이 어찌 너희들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자성이 밝아야, 결국 견성을 해야, 너희들을 구제 할 수 있는 것이지 경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너희들을 구제 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 잘 살펴보고 자신을 잘 돌아보아라.” 즉 견성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일토록 공양만 하며 다만 복밭만 구할 뿐, 나고 죽는 괴로운 바다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어요. 여기서는 공덕과 복덕의 문제입니다. 지금 김선생 차에 쌀 한가마를 싣고 교육원까지 들고 왔어요. 차에서 교육원까지 들고 온 만큼 일을 한 겁니다. 쌀 10kg을 들고 이만큼 움직인 거리를 곱하면 김선생이 한 일의 양이 나옵니다. 추우면 따뜻한 커피를 마십니다. 열을 가해지고 따뜻한 것을 먹고 우리의 몸을 데웁니다. 일이라든가 열이라든가, 이런 것은 에너지와 같은 것입니다. 일은 에너지로 돌릴 수 없지만 에너지는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만큼 내가 일을 할 수 있다. 얼마만큼 열량을 발생시킬 수 있다 할 수 있는 이 능력이 바로 에너지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에너지를 갖고 있어 부처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하다보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복밭과 공덕의 내용에 있어서 공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공덕은 복을 받을 수 있는 에너지이며 저장창고입니다. 내가 공덕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공덕에 의해서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복은 이 생에 받아버리면 없어져요. 이생에서 내가 뭔가 행해가지고 복을 받아버리면 나한테 남아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공덕을 지어놓으면 이것은 내가 다음 생에 써먹을 수 있는 복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덕이라고 하는 것은 퐁퐁 솟아나는 샘물과 같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이고 복이라고 하는 것은 써먹어 버리면 없는 것입니다. 단지에 들어 있는 물과 같은 것입니다. 단지에 가득 물을 담아놓으면 어떻습니까? 다 먹어버리면 물이 없어요. 근데 퐁퐁 솟아나는 샘물은 아무리 먹어도 끝도 없이 나옵니다. 바로 복덕이 단지의 물이라면 공덕은 샘물인 것입니다. 복덕이 일이라면 공덕은 에너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공덕은 공부하는 것입니다. 공부하자, 공부하자, 하는 것은 공덕을 쌓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내공을 쌓는 것입니다.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롭게 명상하고 참선하고 화두를 들고 뭔가 집중을 하고 공덕을 쌓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공덕은 집중하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집중하는 힘을 기르다 보면 견성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공부가 당장은 소득이 없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공부한 것 보다 더 큰 에너지는 없는 것입니다. 돈이나 금은 다음 생에 가지고 갈 수 없지만 이것은 다음 생에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이 바로 공부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에 의해서 내가 다음 생에 대통령을 하고 싶으면 대통력이 되는 곳에 그 능력을 쓰면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돈을 벌고 싶으면 돈을 버는 쪽으로 쓰면 돈을 벌 수 있는 것입니다. 교수가 되고 싶으면 교수가 되는 쪽에 그 힘을 쓰면 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너지를 길러 공덕을 쌓는 것이 이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을 누가 구하고 귀하게 만들겠습니까? 결국 공부하는 사람이 세상을 구하고 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돈 버는 사람도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구한다고 생각하고 정치하는 사람도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구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세상을 위하고 복되게 하고 세상을 구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진지하게 공부를 해야 됩니다. 묘법연화경을 매일 독송해보세요. 매일 참선해 보세요. 매일 아침 일어나 공부하는 것이 생활화 되면 이것보다 더 큰 공덕은 없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내 속에 에너지를 축적시키는 것입니다. 


이제 앞에 이어 지혜가 있는 자는 본래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써서 자기가 견성을 했으면 견성한 그 내용을 써서 각기 게송 한 수를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의 조사가 되게 하리니, 어서 빨리 서둘러서 가져오도록 해라. 오조 홍인대사가 이렇게 얘기 한 것은 누군가가 분명히 깨쳤다는 것을 알고 깨친 누군가에게 이 법을 전해야 되겠다고 결심이 섰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홍인대사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 그렇게 애지중지하게 키웠던 신수보다 더 뛰어난 혜능이 오니까 결국은 법을 혜능에게 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을 넘어서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자식이 좋아도 세상을 구할 더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밀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홍인의  위대한 점은 육조혜능의 가능성을 믿은 것입니다. 육조혜능부터 선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육조혜능으로부터 100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선불교가 전 중국에 활화산같이 일어납니다. 혜능을 알아본 홍인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수십 년간 자기가 애써 애지중지 키웠던 신수에게 법을 전하지 않고 떠돌아 자기를 찾아온 혜능에게 법을 전한 것입니다. 육조단경의 내용을 보면 신수는 게송을 지어 바쳐야 하는가? 바치지 말아야 하는가? 하고 고민합니다. 내가 게송을 지어 바치면 법을 이어 받는 것에 현혹이 되어 잘못 인식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깨친 마음의 상태를 확인 받는 것이면 괜찮은데 분명히 스승께서는 깨쳤으면 법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스승이 저렇게 번듯하게 살아 계시는데 어떻게 법을 전해 받겠습니까? 그 생각에 게송을 지어 바치나 마나 고민 끝에 결국 신수는 게송을 지어 벽에 붙여 놓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勿使惹塵埃 (물사야진애)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이니

때때로 열심히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


신시보리수니까 신시, 이 몸이 바로 보리의 나무. 보리수요. 마음은 여, 명경대라.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이 몸은 보리의 나무고, 마음은 밝은 거울이다. 시시, 때때로. 근, 부지런히. 불시, 털고 닦아서, 막사야진애, 티끌과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해라. 바로 이 몸이 보리라고 했습니다. 이 몸뚱이를 보리라고 했으니까 얼마나 잘 표현한 것입니까? 그리고 또 이 마음은 밝은 명경, 거울이라고 했어요. 모든 것을 다 비출 수 있는 밝은 명경, 거울이라고 했으니까 표현 자체는 정말 적절한 것입니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이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해라. 경책하는 좋은 문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견성을 했는가, 성품을 보고 한 소리인가, 보지 않고 하는 소리인가? 하는데서는 딱 걸리는 것입니다. 견성한 사람의 시에는 견성한 성품을 바로 비친 내용이 항상 어느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첫째, 둘째 구절은 나름대로 구성을 잘 했어요. 이 몸은 보리나무라고 했고 마음은 밝은 거울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는 우리도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선 뭐가 있어야 되겠는데 이 내용은 본래의 성품을 보고 한 말이 아니라 열심히 노력해서 깨끗하게 유지하자는 내용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견성을 한 것이 아니라 견성의 문턱에서 한 소리인 것입니다. 그래도 몸은 보리다. 마음은 밝은 거울이다. 라고 정확하게 이야기 하는 것도 안 쉬워요. 신수가 이렇게 지어서 오조홍인대사 문 앞에 걸어 놓습니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재미있는 것은 항상 견성한 사람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따라 하다 보면 턱 걸려 넘어지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청출어람,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어야 해요. 내가 그 경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어떻게 “전쟁과 평화”만이 최고의 작품이 되겠습니까. 그것보다 더 좋은 작품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을 한번 알아봅시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끼지 않도록 해라라는 여기의 내용을 위산영우 선사의 이야기를 빌려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위산영우는 인류 역사상 선의 천재를 한 명을 꼽으라고 하면 위산영우를 꼽을 만큼 선에 뛰어난 선사입니다. 위산영우가 20대에 출가해서 얼마 되지 않아서입니다. 그때 백장 밑에서 공부하고 있는 제자 중 풍수를 잘 보는 스님이 한 명 있었어요. 선방에서 공부하다가 한철씩 유행을 하면서 대위산을 보고는 감탄을 하고 여기에는 중국 천하에서 가장 큰 선방이 들어설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백장을 찾아와 스승님 여기에 갈 만한 제자 한 명 좀 추천하라고 이야기를 하니 ‘내가 가면 안 되나? 그 좋은데 왜 나는 안 되느냐?’ 그 당시 백장 밑에는 몇 백 명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불합격이라고 이야기해요. 산의 기운과 스승님의 기운은 맞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님 밑에서 공부한 제자 한 명을 추천하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누구를 추천하느냐? 하니까, 공양할 때 스승님 옆에서 볼 테니까 한명씩 들어오면 시험해봅시다. 들어오는 사람들의 관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 많은 제자가 거의 들어왔는데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어요. 위산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일 끝에 들어옵니다.  아 저 산의 주인이 될 사람이 없었습니다. 실망하고 있는데 영우가 들어옵니다. 영우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저 사람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다음 날 백장은 영우를 불러 이런 상황이니까 너는 거기 가서 공부하라고 합니다. 언젠가는 거기가 중국 최고의 선방이 들어선다고 하니까 거기 가서 그렇게 될 때까지 공부하라고 합니다. 위산은 출가해서 백장에게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이때 위산영우는 깨쳤습니다. 특히 겨울에 산중에는 너무 추워서 숯을 담은 화덕을 방에 놓아둡니다. 위산영우가 백장선사 방의 화덕 담당이었습니다. 어느 날 스승님께 화덕을 갖다 드렸는데 나갈 때 백장이 영우에게 물었습니다. “거기 한번 확인해보아라. 불이 다 꺼졌는지?” 하니까 영우가 보더니 “완전히 다 꺼졌습니다.”하고 대답 합니다. 그러자 백장이 화덕이에서 작은 불씨 하나를 찾아내었습니다. 봐라 여기 불씨가 있잖아. 그 순간 영우가 깨쳐버리는 것입니다. 선의 천재라고 하는 영우가 그 순간 깨쳐버려요. 그러니까 영우는 불씨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스승님이 화덕이에서 작은 불씨 하나를 찾아내 “여기 불씨 있잖아” 하는 순간 영우는 견성해 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며칠 전에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백장도 저 스님 같으면 괜찮겠다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음날 백장 밑에서 공부하고 있던 제1수좌 화림선각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왜 말단에 있는 전좌인 영우가 거기에 가야하는가 만약 가야되면 제1수좌인 내가 가야되는데 인정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다. 너희들끼리 법 거량을 해서 이기는 사람을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백장이 물병을 갖다 놓고 “이 물병의 본래 성품을 떠나지 않고 한 마디를 일러라.”고 합니다. 화림선각은 “말뚝이라고는 하지 못합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백장이 영우도 한마디 일러라 하니까, 영우는 물병을 차버려요. 그리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버립니다. 백장이 옆에 있다가 “제1수좌인 선각이 전좌인 영우에게 지고 말았구나.” 라고 한마디 합니다. 위산은 이 상태에서 대위산에 가서 십 년 넘게 혼자 삽니다. 영우가 대위산에 머문지 십 년이 되어도 사람 한명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 최대의 선원인 대위산 선원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돈오와 점수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돈오돈수, 돈오점수라고 이야기 하는데 점오돈수, 점오점수. 점오라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 돈오는 있고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서 돈수와 점수는 사람에 따라 근에 따라 다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돈오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점수는 점점 수행을 거쳐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깨닫는 거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돈오는 사랑이고 점수는 정이라요. 돈오는 순간적으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딱 순간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정이라고 하는 것은 두고두고 계속 누적되는 감정입니다. 사랑과 정으로 돈오와 점수를 이해하면 좀 수월할 것 같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고 깨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점수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깨달음의 순간에 다다른 수행은 돈수가 되는 것입니다. 위산과 같이, 혜능과 같이 깨친 사람은 돈오돈수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은 수행하는 기간이 상당히 깁니다. 이 긴 기간을 거쳐서 어느 순간 돈수를 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많이 닦은 사람은 순간적으로 말 한마디 어떤 계기 하나에서 돈오돈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산에게서 여래선과 조사선이 나오게 됩니다. 위산 밑에는 앙산과 향엄이라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위산과 앙산을 합하여 위앙종이 됩니다. 향엄이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향엄은 젊은 시절에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습니다. 나보다 경전을 더 본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할 만큼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위산이 향엄에게 “이 몸 받기 전에 무엇이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이 몸 받기 전에 내가 뭐였던가, 자기가 봤던 그 많은 경전 중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기에 대한 답이 없었어요. 며칠 후에 위산을 찾아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답 좀 알려주시오. 안된다. 또 일주일 동안 열심히 경전들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답도 못 얻었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좀 가르쳐 주십시오. 안 된다. 다시 모든 경전을 다 살펴보고 한 달 정도 걸렸는데도 답이 없어요. 위산을 찾아가 답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안 가르쳐줘요. 답답한 향엄은 이 생에서는 다시는 경전 공부도 안하고 불교도 안하겠다고 뛰쳐나와 정처없이 떠돌아다닙니다. 그렇게 3년 동안 돌아다녔어요. 완전 거지가 되어 방랑자 생활을 하면서 여기서 걸식, 저기서 걸식 하면서 “이 몸 받기 전에 나는 누구였던가?” 부모미생전 화두입니다. 스승에게 들었던 그 화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어느 날 남양혜충국사 부도탑이 있는 곳에 다다르게 됩니다. 남양혜충은 견성하고 난 다음 40년 동안 박애산에 살면서 혼자 수행정진 하다가 열반에 듭니다. 임금이 세 번이나 국사로 초청을 했지만 끝까지 거절하고 박애산에서 수행만 합니다. 남양혜충의 부도탑을 지나가다가 보니까 폐허가 되어서 형편없는 것입니다. 잡풀만 무성한 선사의 부도탑에서 풀을 베고 열심히 청소를 합니다. 기왓장 깨진 것이 떨어져 있어 그 깨진 기왓장을 던졌어요. 던진 것이 날아가다가 대나무에 부딪칩니다. 바로 탁 부딪히는 순간, “부모미생전, 이 몸 받기 전에 나는 누구 였던가?” 하는 그 화두의 답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견성한 것입니다. 본래성품을 그 순간 보게 됩니다. 견성을 하고 난 다음에 왜 스승님께서 자기에게 그 답을 말해주지 않았던 가에 대한 것을 알게 됩니다. 견성을 했다고 답을 알려주면 그 답은 결국 견성한 사람의 대답이지 묻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스승이 그 답을 일러주지 않은 것이 얼마나 친절하고 자기를 위한 것인 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님 계신 곳을 향하여 꾸벅꾸벅 아홉 번 절을 하고 스승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깨친 향엄은 다시 자기 절로 돌아옵니다. 위산 밑에는 앙산이라는 깨친 제자가 있어 향엄과 셋이서 한집에 살고 있습니다. 하루는 산책을 가다가 앙산과 향엄이 맞추치게 됩니다. 앙산이 향엄에게 “너가 깨친 경계를 한번 일러보아라.” 라고 합니다. 향엄이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야말로 정말 가난이로다. 작년 가난에는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었는데 올해 가난에는 그 송곳조차 없구나.” 하고 읊습니다. 향엄이 읊은 게송을 듣고 앙산이 여래선은 보았다고 할 수 있으나 조사선은 꿈에도 못 보았구려 라고 핀잔을 줍니다. 여래선은 보았지만 아직까지 조산선은 보았다고 할 수 없는데 네 경지가 거기밖에 안되느냐 고 핀잔을 준 것입니다. 향엄이 읊은 이 선시에서 깨친 마지막 구절은 올해 가난에는 그 송곳조차 없구나 하는 이것이 그 내용입니다.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야말로 정말 가난이로다. 작년 가난에는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었는데 올해 가난에는 그 송곳조차 없구나. 

육조단경에서 신수의 게송을 보고 혜능이 읊은 게송이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이 내용이 ‘송곳조차 없구나’  바로 이 내용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향엄 네가 견성을 했지만 아직 경지가 그만큼 밖에 안 되나? 하고 향엄한테 핀잔을 주니까, 그다음 향엄이 또 한 게송을 읊습니다. “내게도 마음이 하나 있어, 단번에 그를 알아보네. 누구든지 이 이치를 모르면, 단번에 그를 알아보네, 선사라고 부르지마오.” 이것이 바로 더 높은 차원의 견성한 경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이치를 모르면 선사라고 부르지마오. 라고 한 마디 읊으니까 향엄 자네도 조사선을 아는구려 하면서 앙산이 향엄을 칭찬합니다. 향엄의 이 두 게송이 여래선과 조사선을 표현한 대표적인 게송으로서 지금도 선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고 있습니다. 


홍인대사가 아침에 화공을 불러 남쪽 복도에 능가변상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육조단경은 금강경을 바탕으로 합니다. 능가경이 선종의 초기경전이었어요. 그래서 선종을 능가종이라고도 합니다. 홍인이 능가경의 능가변상도를 그리게 하려다가 벽에 있는 신수가 써놓은 게송을 보게 됩니다. 화공에게 돈을 삼만냥 주어 멀리 온 것을 위로하며 화공 공봉에게 “능가변상도를 그리지 않아도 된다. 금강경에 말씀 하시기를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고 하였다. 그림을 그려 놓으려고 했는데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다고 했으니까 그림을 그리지마라. 지금 써 놓은 이 게송을 그대로 두어서 미혹한 사람들로 하여금 외우게 하여 이를 의지하여 행을 닦아서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이 게송에 의지하여 행을 닦으면 사람들에게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다.” 

지난시간에 교상판석 이야기 했지요? 교상판석은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설하신 법문을 과연 어떤 순으로 설하셨을까? 하고 많은 스님이 연구하고 고민을 해서 부처님의 45년 행적을 정리한 것이 교상판석입니다. 천태종의 교상판석은 5시 8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5시기로 나눠가지고 불법을 설했는데, 처음 견성하고 난 다음에는 화엄경을 설하셨고, 그다음 약 12년 동안은 아함경을 설하셨고 그다음에는 방등경을 8년 동안 설하셨고, 그다음 21년 동안 반야경을 설하셨고, 마지막 8년을 법화 열반경을 설하였다는 것입니다.  방등경에는 유마경, 승만경, 능가경, 능엄경이 여기에 속합니다. 방등경은 부처님께서 아함경에 설하신 육근, 육식의 연기의 구조를 인식하게 하는 이 내용이 반야경의 공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 두 개가 포함하고 있는 내용들이 방등경입니다. 연기를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두 개는 무상과 무아이며 무아는 인무아와 법무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법무아를 인식해야 만이 견성성불이라고 합니다. 인무아인 나에 대한 무아를 인식하면 해탈이라고 하고 법무아인 모든 존재에 대한 무아를 인식하면 열반이 됩니다. 내외명철이 되기 위해서는 법무아까지 인식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래선은 능가경에서 이야기 하는 수행의 단계에서 우부소행선, 관찰의선, 반연진여선, 여래선으로 나누어 최고의 깨달은 단계를 여래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초기 경전에서 나오는 이 깨달음의 경지를 더 넘어선 경지로 바로 마음을 깨치는 선을 조사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조사선이 좀 더 확고하게 체계화 된 것을 화두를 통해서 깨치는 것을 간화선이라고 합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사구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형상이 있는 모든 것,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다.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니. 모든 형상이 항상 같은 모습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면, 그것이 바로 부처를 보는 것이다. 무아를 알면 바로 부처를 보는 것이고 바로 내 본래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이 내용이 바로 금강경에 나오는 내용이고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존재는 변화를 통해서 인식이 되고 또 그 변화는 변화하는 자체가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색신은 모양이 있지만 법신은 모양이 없습니다. 혜능의 견성에 대한 설명이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에 대한 바로 이 설명입니다. 혜능대사가 설명 해 놓은 것이 우리 육신, 이 색신, 이 몸뚱이는 모양을 갖고 있지만 이 색신을 벚어난 법신은 모양이 없다. 그래서 법신은 본래성품이다. 돈오돈수에 의해 견성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이야기 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나라고 주장 할 만한 주제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아라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 된 것이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공간의 변화, 공간의 이동이 바로 시간입니다. 그래서 변화와 존재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시간적 관점에서 이야기 한 화엄경의 연기나, 공간적인 관점에서 이야기 한 법화경의 연기나 결국은 다 같은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우리는 무상을 이야기 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그 주제성이 없는 것을 설명하면 바로 무아가 됩니다. 바로 이 무상과 무아를 설명한 것이 바로 연기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불교는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성품을 본다, 견성을 한다는 것이 무상과 무아와 별개의 내용이 아니라 무아와 무상을 바탕으로 한 견성이고 무아와 무상을 바탕으로 한 공입니다. 그래서 하나 잘하면 다 잘해요. 이것을 알고 참선을 하면 참선이 쉽습니다. 


다리 아파서 참선하기 힘들면 걸어 다니면서 ‘이뭣고?’ 하면 됩니다. 앉아서 참선하는 것은 훨씬 더 깊이 집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집중한다고 해도 마지막 단계인 적멸은 모든 것을 멈춤한 상태에서 들어가야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그 앞의 단계까지 가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도 갈 수 있어요. 좀 더 쉽고, 좀 더 덜 쉽고, 좀 더 빨리 가고, 좀 더  천천히 가고 그것 차이일 뿐입니다. 천천히 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요? 천천히 가는 것이 나한테 맞으면 그것이 더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공부를 해야 내공이 쌓이고 그 내공이 결국은 뭔가를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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