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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응무소주 이생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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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706회 작성일 21-07-2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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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번 시간에는 혜능이 게송을 바침으로써 오조의 법이 혜능에게로 이어지는 그런 상황이 되겠습니다.  혜능의  최초 설법지가 광주 법성사입니다. 중국지도를 보면 남부에 위치한 광동성에 광주가 있습니다. 광주 바로 위에 강서성이 있고 강서성에 조계산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주가 조계산 근처에 있습니다. 육조혜능이 보림을 하면서 평생 법을 편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육조혜능이 거의 40년 동안 머문 곳은 조계산 대범사가 되겠습니다. 


 홍인이 신수를 부르는 대목입니다. “이 게송을 네가 지었지?” 하고 물으니까 신수가 자기가 지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게송은 소견은 당도하였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안에 들어오지 못 했다. 법부들이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타락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견해를 가지고 위없는 보리를 찾는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문안으로 들어와야만 자기의 본성으로 볼 수 있다.” 하면서 며칠 더 생각을 해서 자성을 보면 게송을 하나 더 올려라. 그러면 너에게 육조를 부촉하겠다고 얘기합니다. 

다음은 혜능이 게송을 바치는 상황입니다. 혜능이 8개월 동안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데 동자 한 명이 신수가 읊었던 그 게송을 읊으며 방앗간을 지나갑니다. 혜능이 들어보니까 그 게송은 견성한 것도 아닌데 동자가 외우고 지나가니까 지금 외우고 있는 게송은 무슨 게송인가 하고 동자에게 물었습니다. 동자가 스승님께서 이 게송을 읽고 외우고 다니면 지옥에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 게송을 읽고 외우고 있다고 합니다. 혜능이 방앗간에서 8개월 동안 방아만 찧었기 때문에 조사당이 어디인지 모르니 그곳으로 데려다 주지 않겠나, 나도 그 게송에게 예배를 하고 외워가지고 극락에 태어나고 싶은데 그 게송과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좀 도와달라 라고 동자에게 말합니다. 동자가 혜능을 데리고 게송 앞에 갔습니다. 누가 좀 저 게송을 읽어달라고 하니까 한명이 나와 게송을 읽어줍니다. 혜능은 그 게송에게 예배를 하고 나도 게송 하나 짓고 싶은데 내가 글씨를 모르니 누가 좀 적어달라고 합니다. 혜능이 읊은 게송이 다음과 같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보리본무수, 명경역무대, 불성상청정, 하처유진애.” 보리본무수니까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명경역무대. 불성상청정,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 하처, 어디에, 유진애,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이것이 바로 혜능이 읊은 게송입니다. 이 뜻을 살펴보면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다 하니까, 나무는 바로 육신으로 신수가 읊었던 육신이지요. 그러니까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다. 깨달으면 본래 이 육신, 육근이 없다. 육근은 본래 공하며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밝은 거울은 우리의 마음에 비유한, 육근은 본래 공하며 마음 또한 공한 것이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 우리의 자성, 본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한데 어디서 번뇌망상이 일어나겠는가. 

우리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은 본래 부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부처기 때문에 우리의 원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대목이 남악회양이 육조혜능을 찾아갑니다. 육조혜능이 남악회양을 보자마자 어떤 한 물건이 왔는고? 하고 묻는 말에 남악회양은 아무 말도 못했어요. 이 한마디 물음에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옵니다. ‘어떤 한 물건’ 그 문제를  8년 동안 생각을 하다가 어느 날 저녁 공양하고 나오는데 나뭇잎이 떨어져요. 그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남악회양이 그 순간 깨쳐요. 깨치고 바로 육조혜능을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당신이 한 물건 했는데,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하고 한마디 합니다. 


회양이 마조도일이라는 젊은 수행자가 정말 열심히 수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갑니다. 아침 공양하고 갔는데 점심이 되어도 저녁이 되어도 조그마한 암자에서 참선하고 있으면서 밖에 코빼기도 안 내밀어요. 어른이 찾아들어가 볼 수도 없고 해서 방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어둑할 때 쯤 되어서 화장실 간다고 마조도일이 나와 보니까 웬 노승이 있어 그냥 인사를 합니다. 인사를 하니까 남악회양은 돌을 하나 줍더니, 법당 앞에 있는 바위에 슬슬 문대요. 마조도일이 화장실에 가려고 하다가 노승이 도대체 뭐하나 싶어서 “스님스님 뭐하세요?” 하니까 뒤도 안 돌아보면서 “거울을 만든다.”고 합니다. 마조는 피식 웃으면서 “스님스님 그 돌은 아무리 갈아도 돌일 뿐입니다. 거울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그 순간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악회양이 “그러면 앉아 있는다고 부처가 되나?” 하고 한마디 던집니다. 앉아 있는다고 부처 되나라는 그 말에 마조는 이제까지 참선하면 부처가 된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신이 오싹할 만큼 충격을 받고 전율이 온 것입니다. 스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한마디 묻습니다. 그때 회양이 마조에게 던진 화두가 ‘지금 여기 달구지(수레)를 단 소가 한 마리 있는데 이놈의 소가 가지 않는다. 소가 가지 않으면 이 소를 치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달구지를 밀겠느냐?’ 이 한마디를 회양이 마조한테 던졌어요. 결국 마조는 이 화두를 깨쳐서 견성을 하고 선불교의 거장이 됩니다. 여기서 소하고 수레를 생각해본다면 소 뒤에 수레가 달려있어요. 우리는 눈을 갖고 대상을 봅니다. 그러면 나는 주체고 대상은 객체입니다. 소하고 수레를 생각 할 때, 소 뒤에 달려있는 수레를 생각한다면 소는 주체가 될 것이고 달려있는 수레는 객체가 됩니다. 소를 쳐서 가게 한다거나 수레를 밀어서 가게 한다면 이것은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를 치겠느냐? 수레를 밀겠느냐? 하는 것은 잘못하면 주관에 빠지게 되는 것이고 또 객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의 정답은 바로 우리가 본래의 성품을 본, 견성을 한 상태에서의 답은 주관에도 객관에도 빠지지 않고 주관과 객관을 포함한, 하나가 된 그 상태의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혜능의 게송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앞서 본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이네,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끼겠는가.’로 덕이본 등에서는 이 게송 밖에 없습니다. 참고로 돈황본에 나오는 두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혜능이 오조홍인한테서 법을 받습니다. 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줍니다. 혜능이 구체적으로 깨친 내용이 바로 이 금강경을 설해주는 것을 듣고 홍인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설하자 이 구절에서 문득 다시 깨쳤습니다. 그날 밤,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제 홍인대사께서 단박에 깨치는 법과 가사를 전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주장하는 내용인 단박에 깨치는 법인 돈오를 설명하고 있고 돈오와 더불어 법의 상징인 가사를 전하면서 말씀합니다. 네가 이제 육조대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써 신표로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 이 돈오의 법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여 모두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돈황본에서 오조홍인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설법을 들으면서 바로 깨쳤다고 했는데 다시 깨친 그 구체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깨치고 난 다음에 오도송이 없습니다. 누군가 깨치고 나면 깨친 내용에 대해 오도송을 읊는데 돈황본에는 없습니다. 덕이본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깨쳤다고 하면서 그 깨친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놓고 있습니다. 혜능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깨친 바를 말합니다. ‘어찌 제 성품이 본래 청정함을 알았겠습니까? 본래 청정하고 본래 성품이 나고 죽지 않음을 알았겠습니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모든 것을 다 갖추어 구족함을 알았겠습니까? 제 성품이 흔들림 없음을 알았겠습니까? 제 성품에서 능히 이 만법이 전부다 나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제 10 장엄정토분에서 보살은 마땅히 이와같은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형상에 머무름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응무소주, 응당 소, 소에 머무르는 것 없이 이 마음을 내는 겁니다. 형상에 머무르는 것 없이,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생각의 대상에 머무름 없이, 이것이 소에 머무르는 것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유식의 5위 100법을 모르면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알 수가 없어요.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의 마음이 일으키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심, 의, 식을 갖고 있어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할 때 선불교에서의 핵심이 되는 것은 마음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교리를 설명할 때 의와 식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의라는 것은 안이비설신의 있었지요? 부처님이 깨친 연기는 의가 중심이 되어 깨치게 됩니다. 깨친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식입니다. 그래서 의식, 의를 중심으로 일으키는 모든 생각을 우리는 의식이라고 표현해요. 그러면 이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근과 경으로 내가 눈으로서 어떤 대상을 본다고 했을 때 눈으로 안근, 대상은 색경입니다. 눈이 대상과 부딪히면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이 안식이 생깁니다. 그래서 의식이라고 하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오식과 의식인 육식이 있습니다. 의식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로 육식, 칠식, 팔식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현재의 의식을 의식이라고 하고, 잠재의식을, 내 속에 축적되어 있는 그 많은 의식을 우리는 제칠식인 마나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식을,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뿌리, 창고를 제팔식인 아뢰야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모든 마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5위 100법이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무위법과 유위법으로 나눠집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유위법입니다. 어떤 조작에 의해가지고 만들어진 법입니다. 그러니까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유위법이고 깨달은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때, 그때 존재하는 세상이 바로 무위법이 됩니다. 중생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세상은 유의법이 되는 것이고 깨달음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인 무위법이 됩니다. 유위법은 구체적으로 심왕법, 색법, 심소법, 심불상응법으로 나누어집니다. 심왕법, 왕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를 결정을 하고 집행을 하는 것이 왕입니다. 이 왕에 해당하는 것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마나식, 아뢰야식으로 바로 이 여덟 개가 심왕법입니다. 색법은 11개, 심불삼응행법은 24개, 그 외 나머지는 통틀어 전부 다가 심소법입니다. 이 심소법 중에는 편행 5개와 별경, 선심소법, 번뇌지법, 수번뇌지법, 부정법으로 나누어집니다. 육식 칠식 팔식에 전부다 있는 것은 편행 다섯 개 촉, 작의, 수, 상, 사입니다. 편행 5개는 의식도 이것을 갖고 있고 마나식도 갖고 있고 아뢰야식도 이것을 갖고 있습니다. 전생에 지었던 업의 창고에 들어있는 것은 심소법의 나머지 것입니다. 이 창고에 들어있는 것을 끄집어내 쓰는 겁니다. 끄집어 내서 쓸 때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보고 의식을 일으키고 그다음 잠재의식 속에 있던 것을 결합해가지고 끄집어내서 쓸 때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내속에 들어있는, 이 저장창고에 들어있는 것을 갖고 끄집어내어 쓰는 것입니다. 앞에서의 화두 소를 칠까? 수레를 밀까? 했을 때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것은 내속에 저장되어있는 것을 끄집어내 계속 생각하기 때문에 수레를 밀까? 소를 칠까? 두 개다 할까? 가만 놔두고 움직일 때까지 기다릴까? 등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은 내속에 들어있는 많은 저장창고의 내용을 갖고 답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답은 이 저장창고에 들어있는 것과 결부되어 답을 내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생각에 묻어있는 내생각으로 그 답을 내놓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정답은 물들기 전의, 이것을 쓰지 않고, 그러니까 응무소주, 소에 머무르지 않고, 내 저장창고에 들어있는 것을 끄집어내가지고 이건가, 저건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 소에 머무는 겁니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을 쓰지 않고’ 입니다. 소를 칠까? 수레를 밀까? 하는 그 물음에 대해서 저장창고에 저장 되어있는 생각과 아무 상관이 없이 그냥 바로 이 편행 다섯 개에서만 일어나는 생각으로 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들기 전의 것은 어느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통섭불교원 앞에 있는 소나무를 보았을 때, 소나무를 보는 순간은 우리 눈이 보이는 소나무는 전부다 똑같아요. 눈으로 보는 순간 전오식은 어느 누구에게나 다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식을 하는 순간 전부다 다 달라요. 그다음 마나식, 내가 과거의 기억을 갖고 답을 내놓을 때는 전부다 다릅니다. 의식과 마나식은 사람마다 다 다른데 아뢰야식에 들어가면 전부다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전오식과 팔식은, 이것이 물들기 전의 그 상황의 것을 쓴다면 어느 누구에게나 다 똑같기 때문에 응무소주 이생기심할 때 우리가 쓰는 무심이다, 본래 청정하다, 본래 청정한 데서 그 마음을 쓰는 것은 전부다 심소법과 결부되지 않는 이 단게에서 모든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견성을 했다고 할 때 다른 것이 아니라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는 것입니다. 이 말 뜻이  견성했다고 하는 것이며, 본래의 성품을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들지 않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견성을 하면 인과불매, 즉 인과에 어둡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것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쓰는거나 안 쓰는 것에 자유로우며, 안 쓰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를 때는 전부다 자기 생각대로 쓰지만 알고 있을 때는 안쓰는 것입니다. 견성을 했다고 했을 때는 훤히 알아 업이 있어도 안쓸 수 있습니다.  이 상태가 깜깜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는 거기에 있는 업을 쓸 수밖에 없어요. 쓰더라도 전부다 부딪히고 잘 못씁니다. 그렇지만 이 상태를 전부다 알고 나면 밝은 상태에서는 안쓸 수도 있지만 다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쓸 수 있어도 물들지 않고 제대로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부처가 뭐냐?’ 했을 때 조주는 ‘뜰 앞에 작은 나무’ 운문은 ‘똥막대기’라고했고, 동산은 ‘마삼근’이라고 했습니다. 전부 다른 답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다 맞는 답입니다. 다 맞는 답이라는 것이 깨치고 밝은 상태에서나 이것을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쓰는 것은 다 맞다는 것입니다. 


‘뜰 앞의 잣나무’도 맞고 ‘마삼근’도 맞고 ‘똥막대기’도 맞고 다 맞는 것입니다. 견성을 해서 밝은 상태에서 보게 되면 우리 속에 축적되어 있는 번뇌망상들도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 밝은 상태에서 맞게끔, 어긋나지 않게끔 제대로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견성한 상태에서 무심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무심입니다. 첫째는 저장창고에 있는 업을 사용하지 않아도 무심이고 둘째는 이것을 밝은 상태에서 다 써도 무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우리가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 업으로 태어나지만 견성을 하거나 도가 높은 사람은 업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원력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티벳불교에는 활불사상이나 린포체신앙이 있습니다. 죽어서 어떤 몸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것은 자신의 원으로 태어나서 다시 이 세상에 불법을 전하러 오는 것입니다. 


오조홍인이 혜능한테 법을 전하면서 “혜능아, 예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는 말은 법을 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혜능한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홍인은 너한테 법을 전해 줄 테니까 빨리 도망가라는 겁니다. 네가 법을 전해 받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전법의 내용을 갖고 가려고, 가사를 빼앗아 가려고 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으니까 빨리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500년 경 교종의 전성시대에서 새로운 불교를 태동시킨 달마에게 기득권자들이 왕에게 계속 달마를 시비하여 사약을 내리기를 권합니다. 그래서 황제가 몇 번이나 독약을 달마한테 내려요. 그렇지만 독약을 먹고도 달마는 끄덕없었습니다. 네 번째 독약을 먹고 난 다음 달마는 이제 중국에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선불교의 씨앗을 뿌렸고 법을 전할 제자도 몇 명 있으니 내가 해야 될 일은 다 마쳤다고 생각하고 독약을 먹고 죽습니다. 달마가 독약을 먹고 죽으면서 황제한테 한마디 청을 합니다. 내가 죽어도 화장하지 말고 그냥 묻어달라고 청을 해요. 사신이 티벳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파미르고원에서 달마를 마주쳐요. 사신은 황제와 달마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사님이 여기에 왜 있습니까?’ 하니까 동토하고는 인연이 다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신 한짝을 그 사신에게 전해줍니다. 그 사신이 신을 갖고 가서 황제한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까 달마는 2년 전에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이 신은 그때 달마에게 신겨줬던 신인데 하면서 무덤을 파보니까 신 한짝만 있는 것입니다. 달마가 준 신 한짝과 맞춰보니까 한 켤레가 돼요. 그 무덤속에는 신 한짝만 있고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달마는 파미르 고원 넘어가면서 그 신 한쪽을 주고 자기는 태어났던 고향으로 돌아간 이야기입니다. 


도망을 간 혜능은 15년 동안 보림을 합니다. 자기가 깨친 이 내용을 정말 제대로 확철대오 할 수 있도록 15년 동안을 보림을 한 것입니다. 혜능이 가사와 법을 받고 밤중에 떠나려 하니 홍인대사께서 몸소 구강역까지 전송해 주었고 떠날 때, “너는 가서 노력하여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최초 설법이 광주 법성사에서 일어납니다.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이 법을 퍼려 하지 말라. 환란이 일어날 것이다. 뒤에 널리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결국은 이 3년이 15년이 됩니다. 혜능은 15년 동안 보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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