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시간의 공성, 윤회와 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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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7-22 09:21 조회 7,146 댓글 0본문
중론 11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을 합니다. 우리가 가진 육근을 통해 대상 육경에 접촉하면 식이 일어납니다. 그 식에서 인식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공간이 있고 공간이 움직여 시간이 있고, 그 공간 속에 물체가 있습니다. 그런 물체들에게 법칙이 있습니다. 무생물에게는 만유인력의 법칙, 상대성 이론 등이 적용되고 생물에게는 연기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생물에게는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 이외에 뜻, 의지(의)가 있습니다. 그 생물은 세상을 대상으로 인식하는데 눈을 통해 색을 인식하고, 귀를 통해 소리를 인식하고, 코를 통해 냄새를 인식하고, 혀를 통해 맛을 인식하고, 몸을 통해 감촉을 인식하고, 뜻과 의지를 통해 생각을 인식합니다. 이것은 12연기 가운데 명색, 육처와 관계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을 찾아온 아무개에게 ‘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아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나’란 인식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식을 하기 때문에 ‘나’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인식의 뿌리는 언어입니다. 우리 인류가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것도 언어를 통한 생각, 사고가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중론은 그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상을 인식한 후 언어와 생각을 통해 개념화, 형상화 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판단, 분별, 추론을 합니다. 중론은 판단, 분별, 추론에서 생기는 오류를 깨트립니다. 부처님의 별명이 분별론자입니다. 분별을 끝까지 해보아야 분별이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을 때 육지에 올라와서도 뗏목은 필요할까요? 필요하지 않습니다. 뗏목의 역할을 마쳤으므로 가져가지 않고 버려도 됩니다. 판단과 분별도 공부하는 과정에는 필요할지 몰라도 어떤 단계를 넘어선 후에는 필요가 없게 됩니다. 돈오돈수의 상태가 되면 뗏목을 버려도 됩니다.
3품 2게를 봅시다. “실로 보는 작용은 그 스스로에 있어서 그것(=눈 자신)이 그것(=눈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svam tm na dar ana hi tattameva na pa yati/ na pa yati yad tm na katha drak yati tatpar n//)” "이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눈)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是眼則不能 自見其己體 若不能自見 云何見餘物)"
설명을 봅시다. “실로 보는 작용은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이것은 인식주체의 문제를 다룬 것입니다. 여기서 눈으로 자기 자신도 못 보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라고 말합니다. 눈의 인식주체가 공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울에 비추면 모습이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은 눈의 대상인 색에 불과합니다. 눈의 인식주체가 아닙니다.
3품 4게를 봅시다.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는다면 보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는 작용(見)이 본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타당할 수 있겠는가?(n pa yam na bhavati yad ki cana dar anam/ dar ana pa yat tyeva kathametattu yujyate//)” "보는 작용이 보고 있지 않을 때는 본다고 말할 수 없는데 보는 작용이 능히 본다고 말한다. 이런 일은 옳지 않다.(見若未見時 則不名爲見 而言見能見 是事則不然)"
설명을 봅시다.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을 때에는 보는 작용이 없다. [즉 눈이 아니다] 그런데도 보는 작용이 본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치에 맞겠는가.” 눈이 어떤 대상을 볼 때는 작용을 합니다. 하지만 눈이 어떤 대상을 보지 않을 때는 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때는 눈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보는 작용이 있을 때는 눈이지만 보는 작용이 없을 때는 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대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눈의 작용입니다. 무엇을 보고 있지 않을 때 눈은 눈이 아닙니다. 보는 작용이 없는데 보는 작용이 있다고 하는 것이란, 눈이 작용을 하고 있지 않은데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눈’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3품 5게를 봅시다. “보는 작용이 보는 것도 결코 아니고 보는 작용이 없는 것이 보는 것도 결코 아니다. 보는 작용에 대해 (이처럼) 설명한 것을 가지고 보는 놈도 이해해야 한다.(pa yati dar ana naiva naiva pa yatyadar anam/ vy khy to dar anenaiva dra c pyupagamyat m//)” "보는 작용에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보는 작용이 아닌 것에도 보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이미 보는 작용을 논파했다면 결국 보는 놈도 논파된다.(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破於見 則爲破見者)"
설명을 봅시다. “보는 작용이 보는 것이 아니다. 보는 작용이 아닌 것이 보는 것도 아니다. 보는 작용을 떠나 보는 주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도 이미 설명되었다.” 보는 작용, 보는 작용이 아닌 것 모두 보는 것이 아니고, 보는 주체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보는 작용이 보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도 보지 못하는데 다른 것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말에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3품 6게를 봅시다. “보는 작용을 배제하건 배제하지 않건 보는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놈이 없다면 보이는 것(=대상)이나 보는 작용, 그것들이 어떻게 있겠느냐?(tirask tya dra n styatirask tya ca dar anam/ dra avya dar ana caiva dra aryasati te kuta//)” "보는 작용을 떠나서건 떠나지 않건 보는 놈은 얻을 수 없다. 보는 놈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는 작용이나 보이는 것이 있겠느냐?(離見不離見 見者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
설명을 봅시다. “보는 작용을 떠나건 떠나지 않건 보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보이는 것도 보는 작용도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보는 주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립하지 않으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 보는 작용도 결국 존재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볼 수 없는 것이 어떻게 대상을 보겠습니까. 그리고 자기 자신도 못 보는 것에 어떻게 주체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눈이란 눈을 뜰 때는 작용을 하지만 눈을 안 떴을 때는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눈에 주체가 있다면 눈을 감으나 뜨나 눈의 작용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눈은 그렇지 못합니다.
3품 7게를 봅시다. “보여지는 것과 보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식(識) 등의 네 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취(取) 따위의 것이 존재하겠는가?(dra avyadar an bh v dvij n dicatu ayam/ n st ty up d n d ni bhavi yanti puna katham//)” "보는 작용과 보이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식(識) 등의 4법(四法)은 없다. 4취(四取) 등의 연(緣)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見可見無故 識等四法無 四取等諸緣 云何當得有)"
설명을 봅시다. “보이는 것과 보는 작용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식 등의 네 가지[촉, 수, 상]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집착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보이는 대상과 보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식, 촉, 수, 상도 없고, 식촉수상에 의해 나오는 집착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상은 상(常)으로 항상 일정한 모양을 갖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책상을 봅시다. 10초 전의 이 책상과 10초 후의 이 책상은 다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순간순간 변해갑니다. 이런 변화는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우리는 같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일정하지 않고 무상(無常)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연기하기 때문에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우리는 변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본질을 이해하면 집착이 없어지고 ‘나’가 없어집니다.
3품 8게를 봅시다. “앞에서 설명했던 듣는 작용, 냄새 맡는 작용, 맛보는 작용, 촉감을 느끼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등은 보는 작용(에 대한 논파)에 의해 알 수 있으리라. 또 듣는 놈과 들리는 것(=소리) 따위도.(vy khy ta rava a ghr a rasana sparana mana/ dar anenaiva j n y cchrot rotavyak di ca//)” "귀, 코, 혀, 몸, 생각과 소리나 듣는 놈 등의 이치도 모두 앞에서 설한 것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耳鼻舌身意 聲及聞者等 當知如是義 皆同於上說)"
설명을 봅시다. “듣는 작용, 냄새 맡는 작용, 맛 보는 작용, 감촉을 느끼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에 대해서도 보는 작용과 마찬가지로 성립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귀, 코, 혀, 몸, 생각도 눈과 같이 궁극적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없고, 각자의 주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두 공하다는 말입니다.
시간의 공성에 대해 살펴봅시다. 11품 1게입니다. “이전의 끝(=시작점)은 인식되지 않는다고 대성자(大聖者)께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윤회는 시종(始終)이 없으니 그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이다.(p rv praj yate ko iretyuv ca mah muni/ sa s ro 'navar gro hi n sy dirn pi pa cimam//)” "대성(大聖)께서는 한계(=본제 本際)는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바 생사는 시작도 없도 끝도 없다.(大聖之所說 本際不可得 生死無有始 亦復無有終)"
설명을 봅시다. “이전의 끝(=시작점)은 인식되지 않는다고 대성자(大聖者)께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윤회는 시종(始終)이 없으니 그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일어나는 감각작용이란 가짜란 것을 확인해보았습니다.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다’가 바로 중론의 논리입니다. 중론이 성립하는 근거입니다. 이것을 알게되면 우리는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시작과 끝의 고찰을 통해 시간의 공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중론에서는 이에 대해 설명을 덧붙입니다. “붓다는 ‘윤회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윤회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윤회의 주체인 자기도 존재한다는 독자부의 반론에 대답한다. 위대한 붓다는 ‘윤회의 궁극적인 시작은 알려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윤회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최초의 단계도 최후의 단계도 없다.” 위대한 성자인 부처님께서는 이전의 궁극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윤회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앞도 없고 뒤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멸의 시작을 어디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번 생에서는 A가 B보다 나이가 많을지 몰라도, 이번 생이나 다음 생에는 다를 것입니다. 그러니 특별한 시작점이 없는 셈이 됩니다. 우리는 생멸을 되풀이하며 윤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벗어나면 해탈이 됩니다. 진리를 모르면 윤회를 반복하지만 진리를 알게 되면 해탈을 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작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진리를 깨우친 이 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10살이라도 진리를 깨우치면 되는 것이고, 내가 90살이라도 진리를 깨우치면 되는 것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윤회 속에서 지금 이 순간 깨우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것이든 나고 있다가 무너지고 없어져 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든 생겼다가 머물다가 달라지고 없어집니다. 이것이 모두 반복됩니다. 윤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 정신을 비롯해 이 우주의 모든 것도 윤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윤회에는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11품 3게를 봅시다. “만일 생이 앞선 것이고 노사(老死)가 나중의 것이라면 노사(老死) 없는 생이 되리라. 또 죽지도 않은 것이 생하리라.(p rva j tiryadi bhavejjar mara amuttaram nirjar mara j tirbhavejj yeta c m ta//)” "만일 생이 먼저 존재하고 노사(老死)가 나중에 존재한다면 노사(老死) 없이도 생이 있는 꼴이 되고, 생 없이도 노사(老死)가 있는 꼴이 된다.(若使先有生 後有老死者 不老死有生 不生有老死)"
설명을 봅시다. “만일 생이 앞에 있고 노사가 뒤에 있다면 노사가 없는 생이 있게 된다. 그리고 죽지 않은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이것도 결국 닭과 달걀의 문제입니다. 생이 먼저건 노사가 먼저건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결국 윤회란 어떤 시점이 없는 것입니다. 시간은 공간이 움직임으로 생긴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11품 5게를 봅시다. “실로 생사와 생이 동시적이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이 죽어버리게 될 것이며 또 그 양자(兩者)가 무인(無因)의 존재가 될 것이다.(na jar mara enaiva j ti ca saha yujyate/ mriyeta j yam na ca sy cc hetukatobhayo//)” "생과 생사는 동시에 함께 존재할 수 없다. (함께 존재한다면) 생하는 순간에 사망하게 되고 이 (생과 사) 양자 모두 무인(無因)인 꼴이 된다.(生及於老死 不得一時共 生時則有死 是二俱無因)"
설명을 봅시다. “생이 노사와 함께 있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면 현재 태어나고 있는 것이 죽어가게 될 것이다. 또 둘[생과 노사]은 원인을 갖지 않는 것이 된다.” 생과 노사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11품 6게를 봅시다. “전이라거나 후라거나 동시라는 여러 가지 체계들이 성립되지 않는 상황인데 그런 생과 그런 노사에 대해 희론(戱論)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yatra na prabhavantyete p rv parasahakram/ prapa cayanti t j ti tajjar mara a ca kim//)” "만일 먼저 있다거나 나중에 있다거나 함께 한다는 것이 전혀 옳지 않다면 어째서 생이나 노사가 존재한다고 지껄이며 논하는 것이냐?(若使初後共 是皆不然者 何故而戱論 謂有生老死)"
설명을 봅시다. “전, 후 동시가 모두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생과 노사를 두고 희론할 것인가.” 생노병사란 앞도 없고 뒤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동시도 없다는 말입니다.
11품 8게를 봅시다. “단지 윤회에 있어서만 그 궁극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있어서도 그 궁극점은 존재하지 않는다.(p rv na vidyate ko I sa s rasya na kevalam/ sarve mapi bh v n p rv ko na vidyate//)” "단지 생사 뿐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본제(本際)를 얻을 수 없다. 이처럼 일체의 것 역시 모두 그 본제(本際)가 없다.(非但於生死 本際不可得 如是一切法 本際皆亦無)"
설명을 봅시다. “단지 윤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과 과, 상과 가상, 수와 수자 등 어떤 것이라도 모든 것에 시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순간 모든 것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집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존재할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진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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