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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강설

제10강 아트만은 오온이 아니다, 선행하는 존재의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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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7,106회 작성일 21-07-2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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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10


 오온은 색수상행식을 말합니다. 우리의 육신, 감각과 더불어 의식까지 포함합니다. 아트만은 자아를 말합니다. 만약 오온과 아트만이 같다면 오온이 생멸하듯이 아트만도 생멸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오온과 아트만이 같지 않다면 자아의 특징이 없을 것입니다. 자아가 있다면 각 존재는 고유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고유의 특징은 육신을 통해 드러나는데, 만약 같지 않으면 특징이 나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오온과 아트만이 같으나 같지 않으나 모두 모순이 생깁니다. 둘 다 실체가 없는 것이지요.

 9품 1게를 봅시다. 선행하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무릇 보는 작용, 듣는 작용 등과 감수 작용 등이 속하여 존재하는 것, 그것은 선행하여 존재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설한다.(dar ana rava d ni vedan d ni c pyatha/ bhavanti yasya pr gebhya so 'st tyeke vadantyuta//)” "눈과 귀 따위의 모든 감각기관과 고락(苦樂) 따위의 모든 존재는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는 바 그것을 바로 本住(근본주체)라고 부른다.(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誰有如是事 是則名本住)"

 설명부분을 봅시다. 중론에서 독자부를 향해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행위 대상과 행위자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각기관, 청각기관 등의 감관 혹은 감수 등의 마음작용이 존재하기 이전에 그것들이 이후에 속하게 되는 ‘사람’이 이미 존재한다.” 보는작용, 듣는작용과 같은 감수작용 등을 소유하는 자[주체, 영혼]는 이들 작용에 선행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독자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라고 구체화하여 말하고 있지만 어떤 존재든 다 포함합니다. 생명체 전체를 말합니다. 독자부에서는 모든 생명체의 감각기관의 근원이 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빛의 이야기로 넘어가봅시다. 독자부에서는 선행되는 존재로 인해 존재의 감수 작용이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류는 빛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때문인지 많은 과학자들이 빛에 대해 수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뉴턴은 에너지를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은 질량, 입자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로 인해 빛이란 에너지를 가진 입자라는 생각이 긴 시간 동안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런데 실험을 해보니 입자라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나옵니다. 막혀 있는 곳에 빛을 비추니 빛이 통과되어 나왔습니다. 이것은 빛이 입자라고 가정하면 설명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입자가 아닌 파동이면 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빛이 입자이며 파동으로, 두 가지 성질을 다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결국 빛은 입자이며 입자가 아니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선행하는 존재에 대한 문제도 이러한 모순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 주변에도 많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도 그렇고, 벽에 낙서 금지라고 쓴다고 합시다. 그 낙서 금지라고 쓴 자체도 낙서입니다. 모든 것은 이런 모순 속에서 동시성을 띄고 있습니다. 분리된 것이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여 보니까 이와 같은 모순이 생기는 것이지, 만약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키지 않는다면 이러한 모순도 해결될 것입니다. 공간이 움직이면 시간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들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들은 하나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알고 보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니까 독자부와 같이 선행적인 존재를 의식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문제의 답은 바로 나올 것입니다.

 9품 2게를 봅시다. “왜냐하면 지금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 있어서 ‘보는 작용’ 등이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확립되어 있는 그 존재가 그것들에 선행하여 존재한다.(katha hyavidyam nasya dar an di bhavi yati/ bh vasya tasm tpr gebhya so 'sti bh vo vyavasthita//)” "만일 근본 주체가 없다면 눈 따위의 법을 소유한 놈은 누구이겠는가? 그러므로 미리 근본 주체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若無有本住 誰有眼等法 以是故當知 先已有本住)"

 설명을 봅시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시각기관 등이 속하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그것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사람이 확립된 것으로 존재한다.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보는 작용 등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작용 등에 선행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면, 따로 시각이나 후각 등으로 감각이 분리된 다른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인간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9품 4게를 봅시다. “만일 보는 작용 따위 없이도 그것(=본주 本住)이 확립되어 있다면 그것들(=보는 작용 따위) 역시 그것(=본주) 없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vin pi dar an d ni yadi c sau vyavasthita/ am nyapi bhavi yanti tena na sa aya//)” "만일 눈이나 귀 등을 떠나서 본주(本住)가 존재한다면 응당 본주를 떠나서 눈이나 귀 등도 존재하리라.(若離眼耳等 而有本住者 亦應離本住 而有眼耳等)"

 설명을 봅시다. “예를 들어 시각기관 등이 없어도 만일 사람의 존재가 확립되는 것이라면 전자 사람도 또한 후자(시각기관 등)가 없어도 확립된 것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해 의심은 없다. 만일 보는 작용 등이 없더라도 선행하는 자가 존재한다면 선행하는 자가 없더라도 보는 작용 등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있어야 나를 통해서 보는 작용도 생기고 듣는 작용 등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런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등의 감각이 갖춰진 채 존재하고 있습니다. 용수의 말에 따르면 이런 것이 앞선 존재에서 따로 분리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선 존재도 지금 우리와 같이 감각 기관이 갖춰진 채로 존재했었다는 말입니다. 이 감각기관을 빼고도 인간의 존재가 확립될 수 있다면 선행된 존재에게 없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감각기관을 빼고 인간의 존재는 확립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선행된 존재도 감각기관을 반드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독자부의 말대로 선행된 존재에 의해 감각기관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이 갖춰진 채로 존재가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9품 8게를 봅시다. “만일 그가 바로 보는 자이고 그가 바로 듣는 자이고 그가 바로 감수하는 자이라면 각각의 것보다 이전의 그 무엇이 존재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그런 식응로 타당하지 않다.(dra sa eva rot sa eva yadi vedaka/ ekaikasm dbhavetp rvam eva caitanna yujyate//)”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감수하는 자라면 이런 여러 감각기관은 응당 본주(本住)를 가지리라.(見者卽聞者 聞者卽受者 如是等諸根 則應有本住)"

 설명을 봅시다. “만일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완전히 같다면[동일한 인식주체가] 하나하나의 감각기관보다 이전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불합리하다. 만일 그가 보는 주체인 동시에 듣는 주체이며 동시에 감수하는 주체여서 각각의 작용 이전에 존재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보는 주체, 듣는 주체, 느끼는 주체 등이 각각 이전에 존재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재 우리 몸의 보는 주체, 듣는 주체, 느끼는 주체가 따로 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나 하나입니다. 나 하나를 통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우리 이전의 존재도 감각기관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만일 주체가 모두 다 다르다면 현재 우리의 상태가 이치에 맞지 않게 됩니다.

 9품 9게를 봅시다. “그런데 만일 보는 자도 따로 있고 듣는 자도 따로 있고 감수하는 자도 따로 있다면 보는 자가 있을 때 듣는 자가 있겠는가? 또 아트만이 여러 개가 되리라.(dra nya eva rot nyo vedako 'nya punaryadi sati sy ddra ari rot bahutva c tman bhavet)” "만일 보는 것과 듣는 것이 서로 다르고 감수자도 역시 다르다면 볼 때도 응당 들어야 하리라. 이렇다면 신아(神我)는 여러 개가 된다.(若見聞各異 受者亦各異 見時亦應聞 如是則神多)"

 설명을 봅시다. “한편 만일 보는 자와 듣는 자와 느끼는 자가 완전히 별개라고 한다면, 보는 사람이 있을 때 듣는 사람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다수의 자기를 갖게 될 것이다. 만일 보는 주체와 듣는 주체와 감수하는 주체가 서로 다르다면 보는 주체가 있을 때 [다른] 듣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주체가 다수가 될 것이다.” 각 감각기관의 주체가 모두 다르다면 내 몸 속에 ‘나’가 여럿이 됩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실 시간이란 개념도 공간의 움직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진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선행한다는 이 말도 헛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논쟁도 결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달걀이 먼저고 어떻게 보면 닭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선행하는 존재를 따지는 것도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헛것을 쫓는 셈이 됩니다.

 이제 아트만이란 오온과 같지 않다는 것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9품 10게를 봅시다. “그런데 보는 작용, 듣는 작용과 감수 작용 등이 비롯되어 존재하는 그 대종(大種)(=四大)들에도 역시 이것(=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눈과 귀 따위의 모든 지각기관과 고락 등 그것들이 비롯하는 여러 대(大)들(=四大) 그 대(大)에도 역시 신아(神我)는 없다.(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所從生諸大 彼大亦無神)” 아트만 존재의 부정은 무자성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설명을 봅시다. “시각기관이나 청각기관 등 감수 등이 그곳으로부터 일어나는 4원소 중에도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또 보는 작용, 듣는 작용 등과 감수 작용 등이 여러 요소로부터 생긴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여러 원소 속에도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요소란 오온을 만드는 요소입니다. 지수화풍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요소들 속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요소 속에는 자성이나 인격적인 성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9품 11게를 봅시다. “그런데 보는 작용이나 듣는 작용 따위 그리고 감수 작용 등이 속해 있는 그것(=본주)이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들(=보는 작용 등) 역시 존재하지 않으리라.(dar ana rava d ni vedan d ni c pyatha/ na vidyate cedyasya sa na vidyanta im nyapi//)” "만일 눈이나 귀 등의 감각기관과 고락 등의 모든 법이 본주를 갖지 않는다면 눈 등도 역시 응당 없으리라.(若眼耳等根 苦樂等諸法 無有本住者 眼等亦應無)"

 설명을 봅시다. “시각기관이나 청각기관 등 감수 등이 소속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여섯 감각기관들이나 마음의 작용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보는 작용, 듣는 작용 등과 감수 작용 등이 자아(아트만)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으로 나누어집니다. 감각기관에 의해 느낀 느낌이 형상화되고 행동이 되고 그것으로 분별한다는 말입니다. 반면 업에 의해 형성되는 자아, 성품, 개인아가 있는데 이것이 아트만, 푸드가라입니다. 원래 진리의 세계는 있는 그대로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이 존재하는 이유는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란 아트만이 있기 때문에 감각기관이 작용하고 아트만에 의해 우리는 자기만의 방식대로 세상을 인식합니다. 감각기관의 감수작용은 자아가 있을 때 형성되어 존재하게 되는데, 만약 자아가 없다면 이것들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감각기관이란 자아를 이루고 있는 내용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9품 12게를 봅시다. “보는 작용 따위 이전도 동시도 나중도 존재하지 않는 그것(=본주)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분별들은 여기서 사라진다.(pr k ca yo dar an dibhya s prata cordhvameva ca/ na vidyate 'sti n st ti niv tt statra kalpan//)” "눈 따위에는 본주는 없다. 지금이나 나중에도 역시 다시 없다. 삼세(三世)에 없으므로 있다거나 없다는 분별도 없다.(眼等無本住 今後亦復無 以三世無故 無有無分別)"

 설명을 봅시다. “[이상의 논증에 의해] 시각기관 등이 일어나기 이전에 또는 지금 [동시에] 그리고 그 이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사람은 존재한다’라든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소멸한다. 더구나 보는 작용 등보다도 이전에 있는 자는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관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분별은 사라진다.” 보는 작용과 같은 감각 기관의 본주 즉 주체는 지금이나 나중,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감각기관을 통한 분별들도 여기서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아트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나’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감각기관을 통한 분별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 즉, 아트만도 없는 것이 됩니다. 

 10품 1게를 봅시다. “만일 연료인 것, 그것이 불이라면 행위자가 행위가 동일성의 것으로 된다. (반대로) 만일 불이 연료와 다르다면 (불은) 연료 없이도 존재하리라.(yadindhana sa cedagnirekatva kart karma o/ anya cedindhan dagnirindhan dapy te bhavet//)” "만일 불이 그대로 연료라면 행위와 행위자는 동일하리라. 만일 불이 연료와 다르다면 연료 없이도 불이 있으리라.(若燃是可燃 作作者則一 若燃異可燃 離可燃有燃)"

 설명을 봅시다. “만일 섶이 곧 불이라면 작용주체[作者, kartri]와 작용[作業, karma]은 하나가 된다. 만일 불과 섶이 다르다면 섶을 떠나서도 불이 존재하게 된다.” 불은 섶을 태우지 않는다. 이 말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섶을 태워서 불이 붙는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같은 것이라면 불타는 것이고, 이것이 다른 것이라면 섶이 없어도 불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10품 2게를 봅시다. “실로 영원히 타오르게 되며 타오름의 원인이 되는 것도 없게 되리라. 더욱이 (점화의) 시작이 헛수고가 될 테니 이와 같다면 행위도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nitya pta eva sy daprad panahetuka/ punar rambhavaiyartyameva c karmaka sati//)” "이와 같다면 항상 타올라야 하리니 연료로 인해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불타게 하는 공능도 없는 꼴이 되며 짓지도 않은 불이라고 이름하게도 된다.(如是常應燃 不因可燃生 則無燃火功 亦名無作火)"

 설명을 봅시다. “불과 섶이 다르다면 불은 영원히 불타는 것으로서 타오르는 원인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불은 작용을 지니지 않는 것이 된다.” 불과 섶이 다르면 불은 불로만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불은 우리 주변에는 없습니다. 불이 붙을만한 것이 있어야 불이 불탑니다. 만약 불이 그 자체로 계속 불탄다면 이것은 원인 없이 결과가 존재하는 꼴이 됩니다. 

 10품 6게를 봅시다. “만일 연료와 다른 불이 있어서 그것이 연료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여자가 남자에게 도달하고 또 남자가 여자에게 도달하는 것과 같다.(anya evendhan dagnirindhana pr pnuy dyadi/ str sa pr pnoti puru a puru a ca striya yath//)” "불이 연료와 다르면서도 능히 연료에 도달하는 것은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도달하고 저 사람이 이 사람에게 도달하는 것과 같다.(燃如可燃異 而能至可燃 如此至彼人 彼人至此人)"

 설명을 봅시다. “만일 섶과는 별개의 불이 섶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여자가 남자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는 것과 같다.” 불과 연료가 다른 존재라고 가정하고 보면 연료에 불이 붙는 모습이란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도달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이 연료에 붙으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에는 불과 연료가 엉겨붙어 재로 남게 됩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연료가 타서 불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불이 연료를 태워 결국 연료의 잔해물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엉겨붙는 모습이 마치 여자가 남자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10품 8게를 봅시다. “만일 불이 연료에 의존해 있고 연료가 불에 의존해 있다면 그 둘 중의 어느 쪽이 미리 성취되어 있어서 불이나 연료가 의존하게 되겠느냐?(yad ndhanamapek y gnirapek y gni yad ndhanam/ kataratp rvani panna yadapek y gnirindhanam//)” "만일 연료로 인해 불이 있고 불로 인해 연료가 있는 것이라면 먼저 어떤 것이 정해져 있어서 불과 연료를 존재하게 하겠느냐?(若因可燃燃 因燃有可燃 先定有何法 而有燃可燃)"

 설명을 봅시다. “만일 섶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또 불에 의존해서 섶이 있다고 한다면 어느 한쪽이 먼저 성립하고 거기에 의존해서 불이 되거나 장작이 되는 것인가.” 이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나옵니다.

 10품 9게를 봅시다. “만일 불이 연료에 의존한다면 성립된 불이 또 다시 성립되는 꼴이 된다. 이와 같은 존재라면 불없는 연료 역시 존재하리라.(yad ndhanamapek y gniragne siddhasya sdhanam/ eva sat ndhana c pi bhavi yati niragnikam//)” "만일 연료로 인해 불이 존재한다면 불이 성립되고 나서 다시 성립되는 꼴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연료 중에 불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若因可燃燃 則燃成復成 是謂可燃中 則謂無有燃)"

 설명을 봅시다. “만일 섶에 의존해서 불이 있는 것이라면 섶은 이미 성립하고 있는 불의 수단이다. 불이 없는 섶도 있을 수 있다.”

 “[다른 것에] 의존해서 성립하는 것은 아직 성립하고 있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이미 성립하고 있는 것이 의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새삼스럽게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불은 원래 그 자체가 불입니다. 그런데 만약 연료에 의해 불이 성립한다고 한다면 불은 그 자체에서 다시 성립하는 꼴이 됩니다. 이렇게 이미 성립하고 있는 것이 다른 것에 의존해서 성립한다고 하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불과 섶이 따로 존재해도 모순이 생기고 불과 섶이 서로 의존한다고 해도 모순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10품 12게를 봅시다. “불은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다. 불은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연료는 불에 의존하지 않는다. 연료는 불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apek yendhanamagnirna n napek y gnirindhanam/ apek yendhanamagni na n napek y gnimindhanam//)” "연료에 의존한 불은 없다. 연료에 의존하지 않아도 불이 없다. 불에 의존한 연료는 없다. 불에 의존하지 않아도 연료는 없다.(因可燃無燃 不因亦無燃 因燃無可燃 不因無可燃)"

 설명을 봅시다. “불은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다. 불은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연료는 불에 의존하지 않는다. 연료는 불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1)불은 연료에 의존해서 성립하지 않는다. 2)불은 연료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하지 않는다. 1)불은 연료에 의존해서 성립하지 않는다. 2)연료는 불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하지 않는다.(2구부정) 불은 섶을 원인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은 섶을 원인으로 하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섶은 불을 원인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섶은 불을 원인으로 하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10품 14게를 봅시다. “더우기 불은 연료가 아니다. 또 불은 연료와 다른 곳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불은 연료를 가진 것이 아니다. 불에 연료들이 있지도 않고 그것(=연료)에 그것(=불)이 있지도 않다.(indhana punaragnirna n gniranyatra cendhan t/ n gnirindhanav nn gn vindhan ni na te u sa//)” "연료는 불이 아니다. 연료를 떠나서 불은 없다. 불은 연료를 갖지 않는다. 불 속에 연료는 없다. 연료 속에도 불은 없다.(可燃卽非燃 離可燃無燃 燃無有可燃 燃中無可燃 可燃中無燃)"

 “1)불은 연료가 아니다. 2)불은 연료와 다른 것에는 없다. 3)불은 연료를 소유하지 않는다. 4)불 속에 연료는 없다. 5)연료 속에 불은 없다. 불은 섶이 아니다. 불은 섶 이외의 다른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불은 섶을 갖고 있지 않다. 또 불 속에 섶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한 섶 속에 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속에 고착된 생각들을 깨트리는 것이 이 중론의 방법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어에서 출발합니다. 중론은 언어로 우리를 깨우칩니다. 언어를 깨트려 집착을 없애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집착을 깨트려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내가 어딘가에 집착하여 탐욕을 일으킬 때 언어를 통해 내가 집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그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문제가 되는 탐진치도 집착 때문에 생깁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탐내고 화내고 진리를 못 보게 됩니다. 중론은 이 집착을 언어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통해 깨트립니다. 특히 ‘나’란 주체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 이것은 모든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입니다. 하지만 중론을 살펴보면 이 ‘나’라고 하는 주체는 모순된 것이고 ‘나’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자성, 공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기신론의 일심과 연결됩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집착이 계속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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