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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무자성이므로 적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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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377회 작성일 21-07-2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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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06


 우리가 이렇게 다르게 생겼지만 업을 벗어두고 보면 본 바탕은 모두 다 같습니다. 한국인, 미국인, 독일인, 일본인이나 여기에 있는 저를 비롯해 다른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다른 동물, 곤충, 식물, 무생물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성의 부정입니다. 이런 무자성은 공이 됩니다. 중론에서는 모든 존재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기하는(pratiya bhavati) 연기(pratiya-samutpada)에 의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자존의 자성이 부정된다고 말합니다. 자성은 바로 지어진 것[非所作]이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것(para)이란 하나의 사물을 성립시키는 다양한 인과 연을 가리킵니다. 이런 연기는 생물 뿐 만이 아니라 무생물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만약 내가 돌에 걸려 넘어진다면 나와 돌의 인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중론의 핵심은 “무자성이므로 공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공의 근거는 사물에 자성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회정론>을 보면 “제법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는 것을 공성이라고 한다. 또 조건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은 무자성이다.”라고도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생하기 때문에 자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연기이기 때문에 무자성이고 무자성이므로 공하다는 것은 대승불교의 핵심이 됩니다. 

 7품 17게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번역 과정의 차이로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7품 16게로 나옵니다. 이것은 무자성이므로 적멸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緣)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그것은 자성(自性)으로서는 적멸이다. 그러므로 생시(生時)도 적멸이고 또 생도 마찬가지다.(prat tya yadyadbhavati tattacch nta svabh vata/ tasm dutpadyam na ca ntamutpattireva ca//)” "만일 법이 여러 가지 인연에서 생한다면 이것은 곧 적멸한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생과 생시 이 두 가지는 모두 적멸이다.(若法衆緣生 卽是寂滅性 是故生生時 是二俱寂滅)" 생한 것이나 생할 때나 모두 자성이 적멸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성품은 적멸하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삼법인을 철저히 인식했을 때 우리의 마음 상태가 열반적정입니다. 적정이 바로 적멸입니다. 결국은 여기의 내용도 모든 것이 무아임을 철저하게 깨달아 적멸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아와 무상을 모르기 때문에(무명이기 때문에) 끝없이 요동칩니다. 이것이 새로운 생각과 행위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나의 집착이나 탐욕이 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을 판단하더라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생각대로 받아들입니다. 

 23품 2게를 봅시다. “좋아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 잘못된 견해를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은 원래 자성을 갖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는 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ubh ubhavipary s n sa bhavanti prat tya ye/ te svabh v nna vidyante tasm tkle na tattvata//)” "만일 정(淨)과 부정(不淨), 전도(顚倒)된 견해에 인하여 삼독심(三毒心)이 발생한다면 삼독심은 그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는 그 실체가 없다.(若因淨不淨, 顚倒生三毒, 三毒卽無性, 故煩惱無實.)" 여기서 나오는 정(淨)은 물들기 전의 것, 부정(不淨)은 물든 후의 것이라 보시면 됩니다. 물들지 않는 상태에서는 전도(顚倒)된 견해가 나오지 않지만 물든 후에는 전도(顚倒)된 견해가 나옵니다. 삼독심(三毒心)은 탐진치를 말합니다. 오염된 내 속에는 탐진치가 꽉 차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 자기 고집(치심), 성내는 마음(진심), 탐내는 마음(탐심)은 모두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성내는 마음은 이기적인 마음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것을 보면 성을 냅니다. 나에게 집착하는 이기적인 마음, 즉 나라는 것이 있다고 인식하는 마음에서 우리의 마음은 물들기 시작합니다. 탐진치란 나의 이기적인 업들이 표면적으로 나온 모습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긴 번뇌를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세상의 본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체가 없습니다. 오염된 마음에 의해 있다고 인식할 뿐인 것입니다. 오염되지 않은 부처는 부정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때 부처가 됩니다. 나만 맞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제각각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져야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산스크리트 어 원문에서는 더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 이런 것은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들은 모두 조건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속에 오염된 것 즉 번뇌란 진실, 본질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적멸, 극락이 됩니다. 

 적멸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반야심경의 유명한 구절을 봅시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오온개공...’ 반야심경의 결론은 여기에 있습니다. 깊은 마하반야바라밀다(지혜)를 행할 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공하더라는 것입니다. 깊은 마하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은 선정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선정삼매에 드는 것이 곧 열반적정, 적멸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윗빠사나와 사마타를 통해 공에 들어가는 것이 이 말입니다.

 다음 살펴볼 것은 무자성이므로 생멸변화가 생긴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연기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한문 번역판에서는 7품 31게이고 산스크리트 원어에서는 7품 30게입니다. “존재가 존재하는한 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성(一性)인 것에 존재와 비존재(라는 대립적인 두 가지가 있음은)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sata ca t vadbh vasya nirodho nopapadyate/ ekatve na hi bh va ca n bh va copapadyate//)” "만일 (어떤)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멸하지 않는다. 하나의 존재에 있음과 없음의 모습이 (함께) 있을 수는 없다.(若法是有者 是卽無有滅 不應於一法 而有有無相)" 이것은 질량보존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하기 수월합니다. 만약 어떤 존재가 실제로 있다면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전체 질량이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에 있었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공한 본질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애시당초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겼다 사라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성이 없는 무자성한 것들은 생멸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다음을 봅시다. 이것은 산스크리트 어 원본에서는 7품 31게이고, 한문 번역본에서는 7품 32게입니다.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제2의 머리가 잘라지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asato 'pi na bh vasya nirodha upapadyate/ na dvit yasya irasa chedana vidyate yath//)” "만일 어떤 존재(法)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멸(滅)하지도 않는다. 비유하자면 마치 제2의 머리는 (아예)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과 같다.(若法是無者 是卽無有滅 譬如第二頭 無故不可斷)" 실체가 없는 것은 멸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것을 제2의 머리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머리가 하나입니다. 애초에 제2의 머리 따위는 없습니다. 그것을 자를 수 없는 것처럼 실체 없는 모든 존재는 멸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결국 무자성한 이 모든 존재는 생멸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본질의 입장에서 보면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24품 38게입니다. “고유한 성질을 전제로 한다면 세계는 일어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변화하지도 않아 갖가지 양상이 없게 될 것이다.(aj tamaniruddha ca k astha ca bhavi yati/ vicitr bhiravasth bhi svabh ve rahita jagat//)”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다양한 모습들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常住)하여 괴멸(壞滅)되지 않는 것이다.(若有決定性 世間種種相 則不生不滅 常住而不壞)" 만약 자성이 있다면 항상 존재하여 괴멸되지 않고,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변화가 없기 때문에 자성이 있는 것은 갖가지 모양을 띄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성이 있다면 생멸변화가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부처님과 소나의 문답을 봅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소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로 이루어진 모양이 있는 것은 영원하겠느냐? 끊임없이 변하겠느냐?” 소나가 대답합니다. “부처님이시여 형상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무릇 모양 있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겠느냐? 즐거움이겠느냐?” 소나가 대답합니다. “부처님이시여 그것은 고통입니다.” “모양이 없는 것, 고통인 것, 변화하는 모양을 보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본질이다.>라고 할 수 있겠느냐?” “부처님이시여 그것을 본질적인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상이기에 고’란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겁니다. 무상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상의 상태에서는 생멸을 끊임없이 합니다. 무언가 존재가 태어날 때, 무언가 존재가 없어질 때 보면 즐겁기보다 고통스럽습니다. 생물을 예로 들어보면 새 생명을 낳을 때나, 씨앗이 분리되어 새로운 곳에 옮겨가는 것 고통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많은 존재들이 죽을 때 병들고 쇠약해져 고통스럽게 죽어갑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을 인식하면 삶과 죽음을 다른 관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순간 고에서 낙이 됩니다. 삶이나 죽음이 두려워지지 않습니다. 

 제2 관거래품을 봅시다. 제1품을 법무아, 관인연품이라고 한다면 제2품은 인무아, 관거래품이라 합니다. 거래란 가고 오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거래품이란 움직이는 것을 본다. 즉 움직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고찰입니다. 세간을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시(三時)에 작용이 있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가버린 것(已去-과거)과 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미래)과 지금 가고 있는 것(去時-현재)입니다. 이런 작용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있음을 압니다. 시간에 대한 개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보다 다양합니다. 우리는 공간의 이동을 시간으로 인식합니다. 하늘을 봤는데 지금 북극성이 폭발했다고 합시다. 지금 폭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500~700년 전에 폭발한 것입니다. 지구와 북극성의 거리가 500~700광년이기 때문입니다. 500~700년 전의 그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현재 북극성의 상태는 우리에게는 미래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상대적인 것으로 시간과 공간에 있어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다음을 봅시다.

 제2품 1게를 봅시다. “간 것은 가지 않는다. 가지 않는 것도 역시 가지 않는다. 간 것과 가지 않는 것을 여읜 가는 중인 것은 가지 않는다.(gata na gamyate t vadagata naiva gamyate gat gatavinirmukta gamyam na na gamyate//)” "이미 가버린 것에는 가는 것이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역시 가는 것이 없다.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도 가는 것은 없다.(已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가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서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가는 중도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우리는 현재라고 인식은 하고 있지만 그것도 찰나입니다. 조금만 지나버리면 과거가 되어버려 현재진행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는 장소는 과거, 현재, 미래로 보면 이미 통과한 지점,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 아직 통과하고 있지 않은 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미 통과한 지점을 지금 가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직 통과하지 않은 지점을 지금 가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현재 통과하고 있는 지점은 바로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지금 걷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론에서 불래불거라고 한 것입니다. 이 내용이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제2품 3게를 봅시다. “가는 중인 것에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가는 중인 것에 두 개의 가는 작용이 있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gamyam nasya gamana katha n mopapatsyate/ gamyam ne dvgamana yad naivopapadyate//)” "어떻게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 가는 작용이 있겠는가? 만일 가는 작용을 떠난다면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을 얻을 수 없다.(云何於去時 而當有去法 若離於去法 去時不可得)"

 제2품 8게를 봅시다. “걷는 자가 걷는다는 것은 없다. 걷지 않는 자가 걷는다는 것은 결코 없다. 걷는 자와 걷지 않는 자와는 다른 제3자가 걷는다는 것이 있겠는가.(gant na gacchati t vadagant naiva gacchati/ anyo ganturagantu ca kast t yo hi gacchati//)” "가는 것은 가지 않으며 가지 않는 것도 가지 않는다. 가는 것과 가지 않는 것을 떠나서 제3의 가는 것은 없다.(去者則不去 不去者不去 離去不去者 無第三去者)" 아까 전에 과거, 현재, 미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걷는 것이란 바로 공간의 이동 즉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걷는 자에는 걷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걷지 않는 것도 걷는 것과 같이 걷지 않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개념이 없는 것은 둘 다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행위는 현상으로 볼 때 내가 걷는 것이 맞습니다. 제3자가 걸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3의 가는 것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은 이것들도 모두 시간, 공간의 개념은 없고 가짜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세상이 본질적으로 연기이며 공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2품 24게를 봅시다. “존재하는 걷는 자가 과거, 현재, 미래에서 존재, 비존재,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세 종류의 걷는 행위를 하는 일은 없다.(sadbh gamana gant triprak ra na gacchati/ n sadbh to 'pi gamana triprak ra gacchati//)”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가는 자는 가는 작용 세 가지를 행할 수 없다. 결정되어 있지 않는 가는 자도 역시 가는 작용 세 가지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決定有去者 不能用三去 不決定去者 亦不用三去)" 가는 행위, 가는 자, 가는 대상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음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앞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은 허상에 불과하므로 걷는다는 행위는 성립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중론에서는 이 세상의 본질로 공으로 보기 때문에 존재도 모두 공합니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이 걷는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걷는 것이나,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 걷는 것은 아예 성립하지 않습니다.  

 2품 25게를 봅시다. “존재하지 않는 걷는 자도 세 종류의 걷는 행위를 하는 일은 없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자가 세 종류의 걷는 행위를 하는 일은 없다.(gamana sadasdbh ta triprak ra na gacchati/ tasm dgati ca gant ca gantavya ca na vidyate//)” "가는 작용이 결정적으로 존재하건 안하건 가는 자는 세 가지를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는 작용이나 가는 자, 또 가야할 곳 모두 없다.(去法定否定 去者不用三 是故去去者 所去處皆無)" 그러므로 걷는 행위, 걷는 주체, 걷는 대상 모두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가는 일도 오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상 속에서 살기 때문에 가는 것 같이 생각되고 모든 존재가 있는 것 같이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서 벗어나면 이와 같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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